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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는 수레와 함께 전통적으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 널리 사용된 이동수단이었다. 그런데 가마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가마는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멀리 유럽에도 있었고, 가까이는 중국, 일본 등에도 있었다. 중국의 가마는 메는 구조가 우리나라의 가마와 같지만 우리나라의 가마가 평평한 바닥에 책상다리 자세로 앉아서 타고 가는 것에 비해 중국의 가마는 밖은 위아래로 길게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안은 의자에 끌채가 달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두 발을 늘어뜨려 의자에 걸터앉은 상태로 타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일본의 가마 가운데 기다란 끌채가 집 모양 몸체의 바닥 좌우 양쪽에 붙어 있는 구조의 가마를 가리킨다. 그러나 높은 신분의 무가(武家)에서 썼던 '가고(駕籠)'라고 하는 가마는 굵은 끌채가 가마 몸체 꼭대기에 붙어 있어 몸체가 끌채에 매달려 있는 구조이다. 우리나라 통신사들도 일본에 가면 종종 가고를 타고 다녔다.

일본 가마 가고( 駕籠) ' 택사문 당초 산시회 여승물(澤瀉紋唐草蒔繪女乘物)'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가마 가고(駕籠)/ⓒja.wikipedia.org

 
우리나라의 가마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분류기준에 따라서도 이름이 달랐다. 우선 단거리 이동에 쓴느 가마는 벽체와 지붕의 유무에 따라 유옥교자(有屋轎子)와 평교자(平轎子)로 크게 나눈다.
유옥교자는 옥교(屋轎)라고도 하는데, 눈비와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지붕과 벽이 있는 가마이다. 내외법이 엄했던 조선시대에 여자들은 대개 유옥교자를 타고 다녔다. 유옥교자는 겨울에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여름에는 더운 단점이 있다. 그래서 아녀자가 옥교를 타면 계집종이 부채를 들고 따라가며 부채질을 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내부가 비좁아 답답하기도 하다.
평교자는 의자형태에 끌채가 붙어 있어 사방이 트여 있는 구조의 가마이다. 시원한 개방감이 있는 대신에 햇빛이나 비바람을 그대로 맞으므로 더위와 추위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고위 관원의 가마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일산(日傘)이나 파초선이 다르고, 비를 막기 위한 우산(雨傘)이 따르는 경우도 있다.
 

유옥교자(有屋轎子)/ⓒ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

 

일반 평교자(平轎子)/ⓒe뮤니엄-예천박물관

 
가마를 메는 사람의 수에 따라 구분하면 2인교, 4인교, 6인교, 8인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메는 사람이 많을수록 요동이 덜하여 편안한 장점이 있다. 그러나 박제가가 < 북학의(北學議)>에서 지적했듯이, 한 사람이 타고 가는 가마에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많아야 4인교이고, 6인교나 8인교는 특별한 경우에나 사용되었다. 공주나 옹주가 타는 덩(德應)은 8명이 메었고, 왕이 타는 연(輦)은 20여 명이 메었다.

왕실 행차에서 연여(輦轝),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하)(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下))'/ⓒ국립중앙박물관
연여(輦轝)/ⓒ국립고궁박물관

 

덩(德應)/ⓒ국립고궁박물관

 
이처럼 가마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교통수단으로써 주로 많이 이용된 가마는 관원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관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 중에 최고 관리들이 이용한 것이 평교자(平轎子)이다. 평교자는 일반적으로 벽체와 지붕이 없는 개방형 가마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평교자는 양교(亮轎)라고도 부르는 가장 호화로운 가마로서, 1품 벼슬의 정승급 관리들이 타고 다녔다. 가마의 끌채에 끈을 걸어서 양쪽 어깨에 메고 앞뒤 좌우로 4명이 메는 가마이다. 김홍도의 그림으로 전하는 홍이상(洪履祥)의 평생도(平生圖)에는 좌의정 시절 달밤에 평교자를 타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마에는 표범가죽이 깔려 있고, 머리 위로 커다란 파초선이 위를 가리고 있는데, 그것만으로 이 가마가 어떤 가마이고 가마를 탄 인물이 얼마나 높은 관리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등롱(燈籠)을 든 사람, 불붙은 홰를 등에 멘 사람, 우산을 든 사람 등 수행인원도 20여 명에 이를 만큼 호화로웠다.

양교(亮轎) 평교자(平轎子)/ ⓒ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

 

양교(亮轎)를 탄 고관의 행차, '필자미상 평생도 10폭 판화(筆者未詳平生圖十幅版畵)'/ⓒ국립중앙박물관

평교자보다는 격이 낮지만 일반적으로 편안하고 호화로운 가마로는 쌍교(雙轎)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쌍교는 쌍마교( 雙馬轎)라고도 한다. 두 마리 말이 끄는 가마라는 뜻이다. 가마의 좌우에 앞뒤로 길게 뻗은 끌채를 가마 앞뒤로 세운 말 두 마리의 옆구이에 걸어 말의 힘으로 끌고 가는 가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17세기부터 등장하는데, 본래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에서는 말 두마리에 마부만 있으면 되었지만, 조선에서는 고위 관료들이 타는 가마라서 가마 양옆에 가로로 뻗은 멍에를 양쪽에서 붙잡아 가마가 요동치지 않도록 멍에목을 잡는 사람만 넷이 필요했다. 말 둘에 멍에목 잡는 사람만 넷이 필요한 호화스러운 가마라서 탈 수 있는 사람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김홍도 그림의 쌍교 행차 모습 '신임 관리의 행차(안릉신연도 安陵新迎圖)'/ⓒ국립중앙박물관

 
쌍교를 탈 수 있는 사람으로는 우선 왕, 왕비, 왕자, 공주 등 왕족이 있었다. 왕족의 쌍교는 가교(駕轎)라고 불렀다. 그 밖에 관리들로는 2품 이상이나 관찰사나 승지를 지낸 사람에게만 허락되었다. 중국 사신을 상대하는 의주부윤(義州府尹)이나 일본 사신을 상대하는 동래부사(東萊府使)는 이 자격에 들지 않더라도 나라의 체모를 생각해서 쌍교를 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관리라 할지라도 왕족이 아니면 한양 도성 안에서는 쌍교를 탈 수 없었다. 그래서 대개는 한강나루를 건너고 나서 쌍교를 탔다. 여자들의 평생소원이 쌍교 타는 것이었다고 할 만큼 쌍교는 지위와 권세의 상징이었다.
 
쌍교와 대비되는 것이 독교(獨轎)이다. 독교는 독마교(獨馬轎)라고도 한다. 소나 말 한 마리의 등에 얹은 가마인데, 가마에 휘장을 둘러 장독교(帳獨轎)라고도 부른다. 이것도 2품 이상의 관리들이 타던 것인데, 대개 지방관들이 타고 다녔다. 독교를 탈 수 있는 2품 이상의 지방관은 관찰사(觀察使)나 부사(府使), 부윤( 府尹), 유수(留守)처럼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중요한 행정구역의 장(長)이었다. 그런데 소나 말의 등에 가마를 얹기 때문에 균형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이 끌채를 잡고 다라붙어야 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독교를 타야 할 지방관들이 모두 쌍교를 타고 다니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고위 관료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에는 남여(籃輿)도 있다. 남여는 발판과 등받이, 팔걸이가 갖추어진 의자 모양의 몸체에 기다란 끌채가 양옆에 앞뒤로 길게 뻗은 것이다. 왕, 세자도 궁궐 안에서나, 궁궐 밖이라도 가까운 거리를 갈 때에는 남여를 타고 다녔다. 남여는 대개 늙은 재상이나 대신들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여가 항상 늙은 고위 관료들이 타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 수령도 가까운 밖으로 행차할 때에는 남여를 탔다. 그리고 지위에 관계 없이 낮은 의자 모양에 길게 앞뒤로 끌채가 붙어 있는 것이면 모두 남여라 불렀다. 따라서 남여에는 호화로운 것도 있고 아주 간단한 것도 있었다. 때로는 대나무를 얽어 만든 것도 있고, 칡끈을 끌채에 묶어 메는 것도 있었다.

남여(籃輿)/ⓒ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

 
관리들이 가마를 타고 갈 경우에는 근수(跟隨)라는 수행원들이 따라다녔는데, 이들이 길을 인도하고, 횃불을 들거나 메고, 등롱(燈籠)을 들고 다니고, 일산(日傘)이나 우산(雨傘)을 들고 따라다녔다. 특히 맨 앞에 선 두 사람은, 앞서 소개한 홍이상의 평생도에서 보이듯이 안롱(鞍籠)과 호상(胡牀)을 들고 다녔다. 안롱은 대개 기름종이로 만들어 한쪽에 사자를 그려 넣은 가마덮개이다. 고급품은 쇠가죽, 사슴가죽, 해달(海獺)가죽으로 만들기도 했다. 맨 앞에 선 사람은 이 안롱을 옆에 끼고서 길을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소리 지르는 일을 벽제(辟除)라 했으며, 벽제를 맡은 자를 알도(喝道)라 불렀다. 안롱을 든 알도는 정3품 이상이 되어야 둘 수 있었다.

왕실 행차에서 평교자(남여),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文孝世子冊禮都監儀軌)/ⓒ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안롱을 든 사람과 나란히 호상을 든 사람이 앞에서 걸었다. 호상은 등받이가 없는 이동용 간이의자로, 접어서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본래는 북방 유목민들이 쓰던 것인데,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다. 호상은 야외에서 간이의자로 쓰이기도 하지만, 말에 오르내릴 때 디딤판으로 쓰기도 했다. 말에 오르내릴 때 딛는 상이라 해서 마상(馬牀)이라고도 하고, 등받이가 없는 간단하고 작은 새끼상이라는 뜻으로 승상(繩床) 또는 승창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호상은 안롱보다 더 격이 높아서 정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이 가지고 다녔고, 정3품 이하의 당하관(堂下官)은 가지고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회의가 열리면, 당상관은 대청마루에 올라 교의(交椅)라는 등받이가 있는 접는 의자에 앉았고, 당하관들은 뜰에 호상을 펴고 앉아 회의를 진행했다.
 

접이식 교의(交椅)/ⓒ우리역사넷


호상과 안롱 외에 가마의 깔개도 있다. 남여가 평교자 등 개방형 가마의 의자 모양 몸체에는 바닥에 짐승가죽으로 깔개를 깔았다. 대표적인 것이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가죽인 호피(虎皮) 방석이나 표범가죽인 표피(豹皮) 방석이다. 특별히 표피방석은 아닷개, 아자개, 아다개 등으로 불렀는데, 여진말이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온 것이다. 호피방석이나 아닷개는 꼬리가 붙은 형태 그대로 만들어 가마에 깔 때에는 꼬리를 길게 뒤로 늘어뜨리며 타고 갔다.
 

남여를 탄 고종황제와 옆에서 따르는 일산/ⓒ한국학중앙연구원

 

권력과 권위를 상징했던 파초선/ⓒ성균관대박물관


가마에는 일산이나 우산도 따랐다. 일산은 말 그대로 햇볕 가리개로, 여름날 뜨거운 햇볕을 차단하기 위해 시종이 받치고 가는 것이다. 일산 외에도 최고관료가 타는 평교자에 파초잎처럼 넓고 기다란 파초선이 따랐다. 이것도 의정(議政)급 관리들이 썼고 판서(判書)급 관리들은 쓸 수 없었던 듯하다. 때로는 우산도 따랐는데, 지금은 일반화된 우산도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이나 쓸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비는 농사를 돕기 위해 하늘이 내리는 고마운 혜택이라 생각하여 일반인들은 우산 쓰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었다.
 

[함께보기 : 전통적인 이동수단 말(馬)]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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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통적인 가훈(家訓)은 집안어른이 자녀 또는 후손들에게 주는 가르침, 교훈을 일컫는 것으로써, 대체로 수신제가(修身 齊家), 즉 처세와 때로는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치인(治人)의 도리를 중심으로 생활문화 전반에 걸친 규범과 지침들을 간단명료하게 조목으로 나열,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이 남성 중심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러다 17세기 이후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가훈서들도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여훈(女訓)과 계녀서(戒女書)이다. 이는 보다 구체적인 여성 교육서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당시는 부덕이 높은 여성이 가문 영달의 밑거름이자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여성의 부덕은 그 가문의 명성과 가풍을 전하는 것으로도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우암선생계녀서/ⓒ우리역사넷

 
따라서 가훈서와 여훈서의 목차를 비교해 보면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부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훈서에는 일반가훈과 마찬가지로 가족관계, 교육, 조상 섬기기, 아랫사람 대하기 등 유교가 추구하는 실천윤리가 모두 포함된다. 여기에 더하여 여훈서는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시부모 섬기기와 남편 섬기기가 추가되고, 남성의 사회적 관계를 뒷받침하는 역할이 부여되며, 남녀가 각각 힘써야 할 본업에 대해서도 다르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여훈, 계녀서로는 이황(李滉, 1501~1570)의 <규중요람(閨中要覽)>,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가 왕실의 비빈(妃嬪)을 훈육하기 위해 엮은 <어제내훈(御製內訓>,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계녀서(戒女書)>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저자가 알려진 사대부의 여훈서로 한원진의 <한씨부훈(韓氏婦訓)>, 권구의 <내정편(內政篇)>, 조관빈의 <계자부문(戒子婦文)>, 조준의 <계녀약언(戒女略言)> 등이 있고, 작가 미상의 <규중요람> <규범> <여자계행편> 등이 있다.
 
이러한 사대부가의 여훈서는 대개 '사부모(事父母 부모를 섬기는 도리), 사구고(事舅姑 시부모님을 섬기는 도리), 화형제(和兄弟 형제 사이의 우애를 밝히는 도리), 목친척(睦親戚 친척과 화목하게 지는 도리), 교자녀(敎子女 자녀를 교육하는 도리), 봉제사(奉祭祀 제사를 받드는 도리), 접빈객(接賓客 손님을 접대하는 도리), 어노비(御奴婢 종을 다스리는 도리), 음식의복(飮食衣服 음식과 의복 만드는 도리), 절검(節儉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도리), 근면(勤勉 부지런하게 힘쓰는 도리), 불투기(不妬忌 투기하지 않는 도리), 수신(修身 마음과 몸을 닦아 수양하는 도리), 신언어(愼言語 말을 조심하는 도리)'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목차와 내용은 매우 상세한 것으로, 여성의 삶을 시집살이 중심으로 구조화하고 제가(齊家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는 일) 중심의 기능적 여성상을 강조하는 한편 불투기와 정절을 강조하고 있다.
 

국보 송시열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대표적으로 송시열의 <계녀서>는 출가하는 딸에게 교훈으로 삼게 하기 위해 지어준 글로 한글로 되어 있는데, '부모 지아비 시부모 섬기는 도리, 형제간, 친척 간에 화목하는 도리, 자식 가르치는 도리, 제사 받들고 손님 대접하는 도리, 투기하지 않는 도리, 말을 조심하는 도리, 재물을 절제 있게 쓰는 도리, 일을 부지런히 하는 도리, 병환을 돌보는 도리, 의복과 음식을 만드는 도리, 노비 부리는 도리, 재물을 빌려 주고 되돌려 받는 도리, 팔고 사는 도리' 등  선인들의 선행 등 20여 조목으로 되어 있다. 이들 내용은 조선시대의 사대부가 부녀자들의 행동에 관한 사회적 규범을 보여 주는 것으로 여성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다음으로 우암의 제자이면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으로 저명한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한씨부훈( 韓氏婦訓)-남당선생문집 권26, 잡저>은 1712년(숙종 38)에 부녀자에게 교훈이 될 만한 것을 내용으로 하여 지은 10장 34쪽의 책이다. 이 자료는 한원진이 시집간 누이의 요청에 따라 성현의 말씀 가운데 부인의 행실과 일상적인 가정생활에 절실한 내용을 '부모, 남편 섬기기와 형제자매, 며느리, 첩, 비복 등을 대하는 법도를 비롯하여 집안일 다루기, 접빈과 봉제사 등'의 총 11장으로 구성한 것으로, 주로 <소학(小學)-1187년 완성된 송나라 유징이 지은 수양서>과 <격몽요결(擊蒙要訣)-학자 이이가 1577년 간행한 아동 유학입문서> 에서 발췌하였으며 여훈서에서 다루는 정형화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씨부훈>의 특징은 집안의 성쇠가 부인의 행실에 달려 있고 그것은 교육에 달려 있다고 전제하여 며느리 교육을 항목에 포함시킨 점, 아동 교육의 중요성과 아동 교육의 담당자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의 <가훈(家訓)-근재집(近齋集), 권23~24 잡저>은 부인에게 내린 경계와 질부 박종경(朴宗慶) 처에게 준 8가지 경계로 딸, 측실, 노비 등을 경계한 글이다.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의 < 가훈(家訓)-양유원집(陽園遺集) 권14>도 '내칙(內則)'이라 하여 부모 섬기기, 봉제사, 부부 형제 관계, 아들 가르치기, 종족과 노비 관련 조목, 그리고 복식까지를 다루고 있다. 박필주(朴弼周)의 <계유가중(戒諭家衆)-여호집(黎湖集 1744>은 특별하게 노비들을 대상으로 한 경계로서 상전을 모시는 법, 속이거나 탐하는 마음 없애기, 언행과 음주에 대한 조심 등의 8조목을 수록한 흥미로운 자료이다. 노비 관련 모목이 강조된 가훈으로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가잠(家箴> '사노비(使奴婢), 강덕준(姜德俊, 1607~1668)의 <우곡선생훈자격언(愚谷先生訓子格言)> '어비복(馭婢僕)'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의 <가훈> '계노비문( 戒奴婢文)', 이경근(李擎根, 1824~1889)의 <고암가훈(顧菴家訓)> '사비복(事婢僕)' 등이 있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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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 도깨비 문양 벽돌)은 충청남도 부여군 외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8종의 백제시대 무늬 벽돌 중 하나로써, 연화대(蓮花臺, 연꽃 모양으로 만든 불상의 자리) 위에 정면으로 서 있는 도깨비 형상이 새겨져 있으며, 약간 연질로 구워진 것이 특징이다. 대각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것 처럼 몸의 크기에 비해 머리 부분이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벌거벗은 상태에서 허리에는 과대(銙帶)가 둘러져 있는데 대금구(帶金句, 띠꾸미개, 금속제 허리띠)와 대선금구(帶先金具, 띠고리의 반대쪽 끝에 달린 장식)가 잘 표현 되어 있다.

크게 부릅뜬 눈과 정면을 향해 포효하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데, 덥수룩한 수염과 양어깨에 휘날리는 갈퀴, 그리고 양손과 발도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문양전의 성격이나 제작기법은 대체로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남조시대의 유물 중 동진(東晉) 영화4년(永和四年, 348)의 명문(銘文)이 있는 중국 난징(南京) 출토 전과 신녕전와창제1호묘(新寧塼瓦廠第一號墓)의 와전(瓦塼)과 매우 깊은 관련을 보여 준다.

 

반대로 일본의 나라(奈良) 난호케사(南法華寺)에 소장되어 있는 벽전(壁塼)과 오카사(岡寺) 출토 봉황문전(白鳳時代, 1변 39㎝, 두께 8.8㎝) 등은 백제 문화와 관련되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 준다.

 

[함께 보기 : 산수귀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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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국립중앙박물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국립중앙박물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국립중앙박물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는 전통적으로 가장 중시되어 온 천문의기(天文儀器)의 하나로 일명 혼의(渾儀), 혼의기(渾儀器),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우주론인 혼천설(渾天說, 하늘이 땅을 둘러싸고 있어 마치 새알의 껍질이 노른자위를 싸고 있는 것과 같다고 믿는 우주관)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천체 관측 기구이며 서기전 2세기경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에 예문관제학 정인지, 대제학 정초 등이 왕명을 받아 고전을 조사하여, 중추원사 이천, 호군 장영실 등이 1433년 6월에 최초로 제작한 것으로 나온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나무 혼천의가 원형 고리를 대나무로 제작한 것에 비해 본 혼천의는 원형의 고리를 포함 모두 목제로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십자형 받친대 밑면에 "制氶 辛未 十二月 十一 日" 이라는 묵서(墨書)가 있어 이 묵서를 근거로 본 혼천의가 1871(고종 8)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교육적 효과를 얻기 위해 28수 별자리 배열을 강조하는 등 실제 천체관측을 위해 사용한 혼천의와는 구성이 다르며, 별자리와 방위까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관측보다는 교육을 위한 기자재로 제작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는 구조는 세겹의 동심구면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바깥층에서 중심으로 지평환(地平環), 자오환(子午環), 적도환(赤道環) 등 세 개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평환은 지평에 평행하며 천구를 상하로 나누고, 자오환은 천구자오선과 일치하는 대원(大圓)을 이루고, 천구북극, 천정, 천구남극 등이 이 대원상에 있어 지평환과는 지평에서 직각으로 만난다. 적도환은 천구적도와 일치하는 환으로서 자오선과는 직교하나 지평환과는 엇비슷하게 만난다.

 

이들 세 개의 환이 교착되어 그곳에서의 천구를 알 수 있고, 천구의 상하와 사방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하여 이 환들을 육합의(六合儀)라고 한다. 가운데 층은 황도환(黃道環)과 백도환(白道環)으로 구성되어,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가운데 층을 삼진의(三辰儀)라 하는데 여기서 황도는 태양의 길, 백도는 달의 길을 의미한다.

 

안쪽 층은 적경쌍환(赤經雙環), 극축(極軸), 규관(窺管)으로 구성되며, 망원경과 같이 천체를 관측하는 규관을 통하여서는 동서남북 사방을 볼 수 있으므로 사유의(四遊儀)라 한다. 이들 각 층의 각 환에는 필요한 수의 눈금을 표시하여 정확하게 관측하였다.혼천의는 아침, 저녁 및 밤중의 남중성(南中星), 천체의 적도좌표 · 황도경도 및 지평좌표를 관측하고 일월성신의 운행을 추적하는 데 쓰였다.

 

전체너비 36.5cm X 전체높이 4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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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金製制誥之寶, 금제 제고지보)는 1897년 고종에 의해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만든 국새(國璽) 10과 중 하나로 황제의 명령을 백성에게 알리는 문서나 고급 관원을 임명할 때 사용한 것으로 대한제국기 황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조선왕실의 어보가 거북이 모양의 귀뉴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중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용모양을 한 손잡이인 용뉴와 얕은 받침인 유대, 글자가 쓰인 보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신에 쓰인 글자인 '제고(制誥)'라는 말이 '황제의 명령'을 뜻하는 것으로, 곧 이 국새는 조선왕실이 아닌 황제로 칭한 대한제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국새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제고지보는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지고 6개월 후인 1911년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일본 궁내청으로 들어갔다가 광복 후인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궁내청으로 들어간 국새를 환수해 중앙행정기관이었던 총무처로 인계하였는데, 안타깝게도 6.25전쟁을 거치며 행방이 모연하게 된다. 그러다 다행히도 1954년 경남도청 금고에서 제고지보가 발견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칙명지보', '대원수보'와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크기
가로 11.1cm X 세로 11.1cm
 
[함께 보기 : 국새 칙명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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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높이 34.5cm, 입지름 5.8cm, 몸통지름 21.2cm 크기의 보물 제346호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 청자 상감 동채 모란문 매병 靑磁 象嵌銅彩牡丹文 梅甁 또는 청자 상감 동채 모란문 매병 靑磁象嵌銅畫牡丹文梅甁 이라고도 한다)은 고려청자에 동화(銅畫, 주성분이 구리인 안료를 사용하여 무늬를 그린 후 구워내면 무늬가 선홍색으로 표현되는 기법) 기법을 이용하여 무늬를 표현하였는데, 몸통에는 모란가지 세 개를 흑백상감으로 묘사한 후 꽃잎에 동화(銅畫) 기법을 이용하여 붉은색을 입혀 화려한 무늬를 나타냈다.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특히 매병을 장식하는데 사용한 경우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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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출처(出處), 즉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감에 민감하였는데,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이념일 뿐, 현실적으로는 여러 여건 때문에 실제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무리 물러가려 해도 국왕이 놓아주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조선 숙종 시기 소론의 영수였던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1706년 10월에 영의정에서 물러나려고 여러 차례 상소하였지만 국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최석정이 뜻을 굽히지 않고 무려 16번이나 상소를 올리자 국왕은 할 수 없이 이를 허락해 주었다. 바로 그 다음 날 그는 종친부전부, 삭녕군수, 장령 들을 역임한 나양좌(羅良佐, 1638~1710)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최석정(崔錫鼎, 1646~1715) 초상/ⓒ국립청주박물관

방문을 닫고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세속에 대한 모든 생각이 재같이 식었습니다. 하지만 동인(同人)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열여섯 번이나 사직서를 올렸는데, 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직을 허락받았으니 개인적으로는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최석정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아 조정에 나왔으며,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서를 올려 겨우 면직된 경우도 있었다. 1710년에는 약방도제조로서 임금의 병환을 살피는 데 소흘했다며 삭탈관직(削奪官職,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사판에서 이름을 깎아 버리는 일)과 문외출송(門外黜送, 조선시대 죄인의 관작을 빼앗고 한양 밖으로 추방하던 형벌)까지 당하였다.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도 이와 같이 어려웠지만, 수십 년 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온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더욱이 그 때쯤이면 노령으로 신체가 허약해진데다가 걸핏하면 발병하므로 장기간 여행하는 것이 무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625년 10월에 이전(李㙉, 1558~1648, 조선시대 '월간문집'을 저술한 학자)이 아우 이준(李埈, 1560~1635, 첨지중추부사,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에게 보낸 간찰을 통해 알 수 있다.

듣자니 아우가 낙향할 뜻을 이미 굳혀서 호군(護軍) 봉록(俸祿)도 받지 않을 것이라 하는데, 많은 식구에 어떻게 지내려는가? 무척 걱정이 되네. 학질을 앓고 난 후 원기 회복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추운 날씨에 뱃길 여행은 몸을 더욱 상하게 할 것 같아 우려되니, 부디 이 계획을 그만두길 바라네. 육로를 거쳐 오되, 혼자 오는 것이 간편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꺼번에 가족을 거느리고 귀향하기가 불편하다면, 작은제수씨는 박첨지 집에 의탁한 뒤 나중에 내려오게 해도 무방할 것 같네.

당시 이준의 나이가 66세였으므로 사직하고 낙향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것은 그보다도 훨씬 후였다. 1627년에 정묘호란이 얼아나자 고령임에도 손수 의병을 모집하고, 조도사(調度使, 중앙에서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국가 재정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특별 어사)로 임명되자 군현을 돌아다니며 의곡(義穀, 의병이 납부한 곡식)을 모았다. 70세가 다 되어서도 국왕의 부름을 받고 중앙으로 나아가 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 보니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도 남들처럼 퇴직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고 어린 손자들이 장성하는 것을 바라보려는 꿈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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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원들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관원으로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사화와 당쟁이 빈번히 일어나면서 이 유배살이가 관리들에게 하나의 필수과정처럼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에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유배를 한두 차례 당하지 않은 관원은 이름이 없거나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정파가 집권하게 되면 반대편의 실각한 정파의 주요 관리들을 제일 먼저 유배형에 처했는데, 실각한 정파가 훗날 다시 집권하면 유배되었던 관리들은 대부분 중앙의 정계로 복귀하였으므로 유배의 성격도 약간 변화하여 조선 후기에는 그것이 일종의 '정치금고'와 동일한 처벌로 간주되곤 하였다. 즉 유배기간에는 중앙의 정계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한국관광공사

일단 유배형이 내려지면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데 드는 일체의 비용을 피유배자가 지불해야 했는데, 심지어는 호송관리의 수고비까지도 부담해야 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모함 등으로 억울하게 유배를 당한 경우라면 그 손해가 엄청났지만 법이 그러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배당한 관리의 신분이나 지위, 인적 관계와 복관 가능성 등에 따라서 떠나는 유배길이나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크게 달랐는데, 고관이나 권신들은 유배길에 거처가는 군현마다 들러 그 지역 수령으로부터 향응을 받거나 유배지의 수령이나 아전들로부터 깍듯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유배간 사람이 본가에 쓴 편지/ⓒ국립전주박물관

유배생활의 실제 모습을 조선 영조 대에 충청남도 직산군수(稷山郡守)를 역임한 전근사(全近思, 1675~1732)의 편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전근사는 1728년 4월에 전라도 운봉현(雲峰縣,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동면·산내면·아영면 일대에 1914년까지 있던 행정구역.)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이유는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무리를 보고도 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낸 대관(臺官, 조선 시대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들은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그를 의금부에 가두고 조사하게 했는데, 직무를 유기환 죄가 드러나자 운봉현에 유배하도록 지시하였다. 유배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같은 도(道)의 수령으로 재임하고 있는 친지에게 다음과 같은 간찰(簡札, 옛 편지들을 이르는 말. 서간(書簡), 서찰(書札)이라고도 부른다.)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체직(관직을 교체하는 것, 보통 면직을 뜻하나 경우에 따라 파직을 뜻하기도 함) 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겪었던 어려운 사정은 잠시 말하지 않더라도, 체직된 후에 양식을 지니고 올 방법이 없어서 맨손으로 내려왔는데, 지금 식량을 주가(主家)에 부탁하기가 구차하고 어려운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 근심스러움을 어찌합니까? 형에게 사람을 보내어 어려움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을까 염려될 뿐만 아니라, 관직에 있으면서 응대하는 어려움을 제가 평소에 잘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 안에 영남 출신 친구로서 수령이 된 사람이 6, 7명에 이르니, 만약 유배지에서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반드시 무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나, 관문(官門)은 사실(私室)과 다르고 어리석은 저의 종놈이 동서도 분간 못하기에 실로 서로 통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관중(管仲, 관포지교의 관중을 빗댓 말)인 저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포숙(관포지교의 포숙을 빗댄 말)인 형뿐이니, 부디 같은 도 출신이 부임한 고을에 편지를 띄워서 특별히 구제해 달라는 뜻으로 간절히 부탁하여 제가 객중에서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가? -중략- 근래에 갖가지 신병이 떠나지를 않아 날마다 신음하는 것이 일인지라, 형편상 혼자 머무르기가 어려워서 아들놈과 비복을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이 때문에 식구가 적지 않으니 더욱 근심스럽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조선시대 관리들은 유배생활 중에도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며 비복(계집종과 사내종)까지 거느리고 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근사는 자신의 신병 때문에 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만, 어찌되었든 유배된 관리들 중에는 가족과 함께 살고 또 비복도 거느리고 산 사람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유배기간에 드는 생활비를 당사자가 마련해야 했지만, 전근사는 경상도 출신의 호남지역 수령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던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정약전의 유배기간을 그린 영화 '자산어보' 스틸 컷/출처 : 네이버영화

한편 같은 유배자라 하더라도 유배기간의 생활과 해배 이후의 행보에는 상당한 개인차가 있었는데, 물론 정치적인 유배의 경우는 유배기간 내내 울분 속에서 보내는 유배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나 정약전처럼 이 기간에 독서와 저술을 하고 또 유배지역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등 유교의 진작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인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복관 후에도 그 지역의 자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리로서 중앙에 진출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은 사후에 그 지역 자제들의 추대로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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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토지 등의 재산을 둘러싼 소유권 싸움 못지않게 많이 나타나는 사건은 채무관계이다. 여기에는 채무 이행 요구, 물건의 매매대금 지급 관련 등이 있다. '빌린 돈(債錢)'을 갚으라는 요구에도 다양한 채무관계가 있겠지만, 민간에서 행해지던 고리대에 관한 것도 적지 않았다. 빈농들은 농사를 짓거나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리대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채무는 직접적인 채무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먼 길을 함께 다녀온 족인(族人)이 경비를 갚지 않았다거나 때로는 약을 먹고 약값을 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빌린 돈을 갚고 난 뒤에는 다시 추급요구를 할까 걱정하여 관에 입지성급(立旨成給, 관에서 공증하는 문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입지(立旨) 문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밖에 물건의 매매대금에 대한 내용도 적지 않으며, 목화, 약재, 목재, 포, 생견, 철물, 당물과 등의 물품값을 둘러싼 송사가 일어났으며, 더불어 이 시기의 다양한 상품의 매매 실태도 함께 알 수 있다.

또, 옥사(獄事, 크고 중대한 범죄를 다스리는 일 또는 그 사건)에 따른 비용을 물리는 것도 채무관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데, 옥사(에 따른 비용은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 또는 가족이 부담하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살옥(殺獄, 살인 사건에 대한 옥사)에 대해 초복검(시신의 첫 검안과 재검안)에 사용한 부비(浮費, 일하는 데 써 없어지는 비용)를 가족, 친지에게 물려서 결국 집안 물품과 전답까지 사용한 예까지 있다. 그래서 정약용은 살인이 일어나도 검안에 따른 비용 때문에 관에 알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였다.

 

또, 대가를 받고 소를 먹이다가 소가 죽은 경우도 있었는데, 소를 먹이는 과정에서 소가 죽으면 당연히 배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소 주인도 손해를 보지만, 먹여 기르는 사람도 그간 들였던 노동력에 대한 대가는 받을 길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경우 관에서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액수를 정하라고 하고, 관에다가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채무관계 외에 농민적 권리와 관련된 갈등도 많은데 여기에는 소작권, 초지, 수리 이용권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작인의 경작권이 인정되었는데 주주의 갑작스러운 이작, 탈경에 대해 작인이 호소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점은 '목민서'에서도 매우 중요시하였는데, 특히 파종 이후에는 경작권을 빼앗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지주가 소유권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때로는 파종 이후까지 자의에 의해 작인의 경작권을 빼앗는 일이 발생하여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또 이 과정에서 새로이 경작권을 얻게 된 농민이 구 작인의 항해와 저항 때문에 경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경작권 이외에도 농업과 관련 있는 초지, 수리 등의 이용권을 둘러싼 갈등도 보인다. 특히 수리의 확보를 둘러싸고 면리 간의 갈등이 야기되어 집단적인 등소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때로는 공동수리시설이 개인의 토지에 피해를 입힘으로써 촌리민과 개인이 대립하기도 하였다. 보를 축조함으로써 개인의 토지에 피해를 가져오게 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참고 : 조선시대 민장의 내용으로 보는 갈등들-① 부세 운영에 대한 호소]

[참고 : 조선시대 민장의 내용으로 보는 갈등들-② 민간의 갈등]

 

[참고 : 조선시대 민소(재판)의 절차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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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 갈등으로는 지금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볼 수 있는데, 주로 노비, 토지 등의 재산을 둘러싼 소유권 싸움이었으며, 그 외에 도난, 서로간의 시비를 비롯한 소소한 싸움이 있었다.
 
먼저 토지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회보장제도가 없는 당시로서는 큰 돈이 필요하면 우선 토지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환퇴(環退)라는 제도가 있었다. 환퇴는 일종의 조건부 매매로서, 소유권 이전을 한시적인 것으로 보아 일정한 시기 이내에 소유권 봔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소유권 이전과는 다른 전근대적인 매매형태라고 하겠다. 그런데 원주인이 환퇴를 요구하였지만 현 소유자가 응하지 않으면 관에 민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토지뿐 아니라 시장(柴場, 관청의 땔감 채취를 위해 특별히 지정한 지역 ), 심지어 가옥도 환퇴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환퇴제도를 악용한 사례도 있어 환퇴조건이 없이 매입하였거나 매입한 지 오래된 토지에 대해 환퇴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광무5년 전답환퇴명문(光武五年田畓還退明文)/ⓒ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소유권을 강제로 빼앗는 일들도 더러 있었다. 주로 권세가들이 저지르게 마련이었는데, 물론 멀쩡한 토지보다는 개간지를 대상으로 하기가 쉬웠다. 새로이 개간하거나 이용한 지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소유권을 주장하여 빼앗거나, 분명히 민결인데도 궁방전에 들어 있었다고 주장하여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심지어 오래전에 빈 땅에 가옥을 지은 것을 뒤늦게 빼앗으려 한 사건도 있었고, 문권을 위조하여 전답이나 시장(柴場)을 빼앗으려 한 사건도 있었다.
 
매매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투매, 암매, 이중 매매 또는 매매 방해 등의 사례도 있었다. 이를테면 원소유자의 동의 없이 몰래 팔아 버림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중의 위로 담이나 산지 등을 족인 등 특정인이 팔아 버렸는데 문중이 이를 뒤늦게 알고 문제 삼음으로써 갈등이 빚어졌다. 전당잡힌 전답을 방매하거나 고의로 이중 매매를 행하는 경우도 있다. 주인이 전답을 매매하려 할 때 이를 경작하는 작인이 매매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주인이 바뀜으로써 경작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한 것이다.
 
노비를 둘러싼 분쟁도 적지 않았다. 소유노비의 매매과정이나 노비신분의 확인에 따른 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산송은 산지를 둘러싼 소송이지만 실제로는 소유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조선 후기 유교적 윤리에서 부계 중심의 종족질서가 형성되어 가면서 부계친족의 분묘를 모시는 족산(族山)이 형성되어 갔다. 이처럼 족산을 갖추고 지켜 나가려면 인근에 분묘를 가진 측과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문중조직이 분화하면서 친족 내에서도 산송이 일어나게 되었다. 후손 간에 산지를 나누어 사용하게 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경계가 불분명할 수도 있고 또 경계를 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윤상정 산송소장(尹相定山訟訴狀)/ⓒ국립중앙박물관

한편으로 유교적 상·장례와 종족의식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중인과 양인층에게 확산되면서 이들도 분묘를 위한 산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특히 여건이 좋지 않은 양인층으로서는 이를 확보하기 어려우므로, 암장을 하고 발각이 되면 도피하는 일도 벌어졌다. 따라서 관에서도 투장한 자가 도망하면 집안의 문장(門長)을 잡아 오라고 명령하기도 하였다.
 
산지의 매매를 둘러싼 문제도 일반토지보다 복잡하였다. 산지 속의 분묘에 대한 이장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매입 이후에도 끊임없이 산송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 산지의 목재 이용권을 확보하려고 하면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산지를 소유한 쪽에서는 목재 등에 대해 배타적인 이용권을 확보하려 하였고, 생계를 위해 산림을 이용하려는 쪽에서는 몰래 작벌하면서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는 토지 소유권과 산림에 대한 공동 이용권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공동 이용권을 주장하는 자들은 빈농층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계급적·계층적 대립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지를 가진 집안은 족계를 형성하거나 집안끼리 연대하여 금송계(禁松契)를 결성하면서 산지를 수호하고 민인들의 산림 이용을 철저하게 통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향촌공동체의 금송계와 연대하여 산지를 수호하면서 반대급부로서 시초 채취권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목재를 이용하려는 측은 무리를 지어 입산하여 나무를 작벌하였다. 특히 읍저의 초군(樵軍)들은 읍저의 세력을 믿고 저질렀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 : 조선시대 민장의 내용으로 보는 갈등들-① 부세 운영에 대한 호소]
 
[참고 : 조선시대 민소(재판)의 절차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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