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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장에서는 무슨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을까? 여기에는 부세문제가 첫 번째로 꼽힌다. 이 경우 부세 운영에 대한 호소라고 할 수도 있고, 부세를 통해 관의 조치나 지배구조에 대하여 저항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먼저 부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정에 관련된 내용이다. 전세를 감면 또는 면제해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전답이 진전(陳田)이 되었거나 재해를 입어서 경작할 수 없는 경우, 또는 비가 오지 않아서 제때에 모내기를 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로 전세를 낼 수 없는 상황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지면적 이상으로 세가 매겨지거나(加錄),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되어야 할 수세결수가 책정되는 등 오류를 바로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 경우 세를 매기는 과정에서 담당하는 서원, 감색 등이 농간을 부렸을 수도 있다.

서병훈 면세청원소장 일괄(徐秉勳免稅請願訴狀一括)/ⓒ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다시 조사하여 이정하도록 하거나, 때로는 잘못 책정되었다면 담당자를 처벌하고 그에게 환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담당자에게 처리를 맡기면 잘 해결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수세가 잘못 들어왔다면 그쪽으로 이록(移錄)해야 하는데, 관에서 이록받을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여 민간에 책임을 넘기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양전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에서는 가급적 현상 유지, 또는 민간에서 알아서 수세액을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소유자나 경작자가 몇 차례 바뀌어도 파악하지 못하고 처음 책정되었던 사람의 이름으로 납부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농민들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일뿐 아니라 제대로 전세가 매겨지는지, 전세를 책정하는 이서들이 농간을 부리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하였다. 더구나 지주들은 점차 전세를 작인들에게 넘기는 추세여서 농민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다음음 군정과 관련된 내용이다. 군정은 토지보다 변동이 심한 사람을 직접 다르기 때문에 문젯거리가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군역의 탈급에 대한 호소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한 사람에게 군정이 이중삼중으로 부과되거나(첩역),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 매겨지거나,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 계속 부과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며, 때로는 양반인데 군역이 매겨졌다고 하여 탈급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조사를 한 뒤 처리해야겠지만 당연한 요구의 경우에도 해결이 쉽지만은 않았다. 군역은 고을-면-리 단위로 일정한 액수가 있었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계속 내려오기도 해서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관에서는 이런 사정을 알기 때문에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탈급하려는 사람에게 대신 군역을 맡을 사람을 구하라고 윽박질렀다. 죽은 사람의 탈급도 잘 들어주지 않는 형편이어서 나이가 많다거나 병을 호소하는 경우는 아예 논의조차 어려웠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보면, 1863년경 강원도 철원(북면 원지리)에 사는 평민 김복동의 집은 군역이 5명이다. 그와 아우, 그리고 세 아들이 모두 군역을 지고 있었는데 새로운 군역이 부과되었다. 셋째 아들에게는 다른 군역이 중첩하여 부과되었던 것이다. 이는 면임 윤도신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같은 마을의 이응규라는 자가 벌을 받게 되면서 두 군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벌을 대체하였는데, 면임은 이용규에게 뇌물을 받고 군역 하나를 빼 주었고 대신 김복동의 셋째 아들에게 중첩해서 배정하였다. 이에 김복동은 민장을 올렸는데, 관에서는 몇 차례 시간을 끌다가 1년 만에 그 역을 탈급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정할 것을 명령하였다. 면임의 농간에다가 관에서 늑장을 부리다가 여러 차례 호소하자 뒤늦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그 당시 이런 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처리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한능 탈역청원소장(諸漢能頉役請願訴狀)/ⓒ국립중앙박물관

환곡의 경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문제가 심각하였다. 양반의 경우 '가세가 빈궁'하다며 환곡 분급을 면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지만, 일반농민들은 도망이나 유리, 사망으로 인해 분급을 면제받고자 하였다. 환곡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호소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유서필지>에 부세에 관한 민장은 군역과 환곡의 사례가 있는데, 군역은 양반가와 관련된 것인 반면 환곡은 가난한 집에서 분급을 받더라도 나중에 갚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서 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도 본래 환곡은 흉년 구제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분급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1872년 철원 갈말면 동막리 도기점에 사는 김서경은 자식 하나 없이 맹인 아내와 둘이 살고 있는 등짐장수였다. 김서역에게도 환곡이 배정되자, 이를 갚기 어려웠기 때문에 분배 대상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반면에 관에서는 환곡을 강제로 분급하기 때문에 탈급을 하려 하지 않았다. 김서경은 자신이 떠돌이생활을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였고, 결국 관에서는 이런 자에게 분급하면 회수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는지 제외시켰다. 이처럼 한사코 환곡을 받지 않으려고 민장을 올리는 점에서 환곡의 문제점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고을에서 부과하는 갖가지 잡세에 대한 요구도 적지 않았다. 잡세는 특별한 원칙 없이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일반민들에게는 삼정보다 수탈적인 것으로 비추어졌을 수도 있다. 잡역 또한 대상자가 사망했거나 촌리의 실정이 너무 어렵거나, 또는 본래 역에서 제외된 제역촌(除役村)이라는 이유로 탈급을 요구하였다. 잡역은 대체로 동리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리에서 요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민들이 등장을 통해 잡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관에서는 의례적으로 그냥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상의 부세에 관해서는 이를 담당하는 국가와 관에 대한 민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는 담세자인 일반민중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전세는 토지를 가진 양반층이 민장을 많이 올린 반면에 군역, 환곡, 잡세 등은 일반민의 호소가 더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호가 아닌 대부분의 양반은 평민들과 크게 구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조선 후기에 인구가 증가하고 토지의 분할 상속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지주가 가진 토지규모도 줄어들었다. 이를 막기 위해 장자에게 토지를 집중하거나 많은 전답을 제위전(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으로 할당하고 종손에게 관리하게 하여 종가형 지주가 출현하였다. 반면에 종손이 아닌 경우 토지규모는 더욱 영세해졌고, 또 한편 관료가 되지 못함으로써 신분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일반민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18, 19세기에 개별 농민의 경작면적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이들의 경제실태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데 비해 부세의 종류와 액수는 늘어나고 있어 민의 호소, 저항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부세는 대체적으로 개인에게 납부 책임이 있고, 이에 따라 개인이 주로 감면 등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실제 부세의 부과와 징수에 있어서 촌리의  공동적인 책임이 없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정의 경우 이정법(里定法)이라고 하여 군액의 충원을 촌리에서 책임져야 했다. 잡세의 경우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면리에서 힘을 모아 토지를 마련하는 등 공동납 방식이 채택되고 있었다. 따라서 부세문제에 대해 때로는 개인적으로, 때로는 촌리단위로 대응이 필요하였다.

 

[참고 : 조선시대 민소(재판)의 절차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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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조선시대에 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에는 삼법사(三法司), 사송아문(詞訟衙門), 직수아문(直囚衙門) 등이 있는데, 이중 삼법사는 중앙의 형조, 한성부, 사헌부를 가리킨다. 사송아문은 민사사건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지방의 군현, 감영, 서울의 한성부, 자예원, 형조, 사헌부를 가리킨다. 직수아문은 죄수를 직접 구금할 수 있는 기관들로, 가두어 놓고 심문할 정도의 중죄인을 다루는 기관이다. 여기에는 병조, 형조, 한성부, 사헌부, 승정원, 장예원, 종부시, 관찰사, 수령 등이 해당된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여러 기관은 재판과 형벌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 행사였는데, 특히 지방의 경우 각 도의 관찰사와 군현의 수령은 사송아문, 직수아문에 속하여 중요 재판기관으로 설정하여 행정을 담당할 뿐 아니라 재판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관찰사는 사형 다음으로 중한 형벌인 유배형까지 판결하고 집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령은 태(笞) 이하의 범죄에 대한 재판과 형벌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상의 범죄는 심리를 한 다음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병영, 통영 등의 군문도 상당히 광범위한 재판권을 행사하였으며, 감영만큼은 아니지만 지방 군현보다 상급기관으로서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조선시대 동헌/ⓒ오마이포토

 

수령의 재판권

수령의 임무 일곱 가지(수령칠사)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임무가 조세 수취와 재판이라고 한다. 더구나 조세 수납은 자신의 형벌권의 뒷받침을 받아 완수하고 있었다. 수령은 조세 납부 기관을 정해 담당자를 독려하고, 정한 날짜를 지키지 않으면 담당자와 납부자들에게 형벌을 내리고 독납하였다.

**수령칠사 (守令七事,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의 통치에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임무)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戶口增 : 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이처럼 수려의 재판·형벌권은 한 고을을 다스리는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의 입장에서는 이런 형벌을 당하지 않으려고, 때로는 이러한 형벌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민소를 하게 된다.
 
이렇듯 한 지방의 소송은 해당 지방관이 담당하였다. 다만 지방관이 자리를 비울 경우 이웃고을의 수령이 겸관으로서 민장을 받아 처리하였다. 양쪽 지방 사람이 재판에 관계될 때에는 원고는 피고가 있는 지방의 수령에게 민장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 피고에게 무언가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피고를 다스리는 지방 수령의 힘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재판의 과정은 먼저 원고가 민장을 내어 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 고을 백성이면 누구나 민장을 제출할 수 있었다. 양반이나 노비나 신분의 제한 없이 제출하는데, 노비의 경우 주인을 대신해서 내기도 하였다. 때로는 등장이라 하여 집단적으로 내기도 하였는데, 주로 면리공동체, 문중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관임, 면·이임이 행정 보고로서 내기도 하였다. 제출자는 어느 면, 어느 동 누구라고 쓰고, 다른 고을 사람일 경우에는 어느 고을 누구라고 밝혔는데, 이 경우 소송 상대나 관련된 물건이 이 고을에 있는 경우에 한하였다.
 
소송의 성격은 다양하였다. 형사 고발, 민사소송 제기, 행정적 청원, 행정 소송, 행정 보고 등을 모두 포함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는 재판 자체가 수령에 대한 일종의 청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령의 입장에서는 재판은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수령의 일상적 업무의 한 부분인 한편 조세 수취 등 다른 임무도 재판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민장은 대개 제출자가 직접 관정에 가지고 와서 제출하였다. 수령의 집무 지침서에는 민장은 반드시 해당자가 직접 와서 바치도록 하고, 이를 문지기나 관속들이 밖에서 가로막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면하여 호소하는 백성이 있으면 다른 일을 멈추고 전념하여 자세히 듣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함께 보기 : 민장(民狀)이란?]
 
민장이 들어오면 수령이 곧바로 처리해야 한다. 수령은 민장을 물리치기도 한다. 이를테면 흔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될 때는 올리지 말도록 제사를 썼다. 당사자를 대질시켜야 할 경우에는 피고를 대동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따라 원고가 피고(피고는 '척隻'이라고 불렀는데, '척지지 말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를 대동하여 재판정에 출두하면 심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고와 피고가 서로 화해하여 관에 나오지 않기도 하고, 피고가 수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피고가 응하지 않을 경우에 원고는 "피고가 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관에서 사람을 내어 붙잡아 와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수령이 이를 받아들여 면주인이나 형리를 시켜 피고를 붙잡아 오게 되고, 피고는 관령 거역죄로 치죄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소소한 다툼에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원고가 피고를 고발하기가 어려웠고, 고발하였다고 하더라도 수령은 이졸이 촌리에 나가면 폐단이 생기므로 보내지 않고 원고로 하여금 붙잡아 오게 하였다. 때로는 피고를 데려오지 못해 송사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피고가 관정에 나오지 않더라도 판결은 가능했지만, 수령의 집무 지침서들은 되도록 공정한 편결을 위해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였다.

소장(訴狀)/ⓒ국립중앙박물관

이렇게 하여 대부분의 송사는 간단한 대질심문만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큰 송사의 경우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처리의 내용은 민장 말미에 제사를 써서 당사자에게 내주었다. 관은 이러한 사건 처리문서를 보관하지 않고, 다만 그 내용을 최소한 보존할 목적으로 <민장치부책>을 작성하였다. 다라서 민장을 낸 사람이 이를 보관하며 필요할 때는 연결하여 민장을 내어서 심리의 시속성과 판경의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민장이 제기되었을 때 심리가 끝나면 판결을 내리는데, 이를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건의 확정 판결일 수도 있고 심리를 진행해 가는 과정의 명령이기도 하였다. 제사는 민장의 말미에 적어서 민장 제출자에게 돌려주었다. 때로는 문서를 따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면 대가를 받고 사건의 전말과 판결내용을 자세히 적은 판결문을 작성해 주었다. 민장 제출자는 제사가 적힌 민장을 증거문서로 삼거나 제사에 기재된 관령을 수행하도록 지시된 자에게 직접 제시하였다.
 

민장을 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민장은 일반민이 제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개인이 제출하기도 하고 집단으로 제출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개인이 제출하였는데, 개인의 이해관계가 담긴 소소한 사건이 많기 때문이며, 사회적 신분에 따라 그 내용은 다양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대개의 경우 억울함을 해결할 방안이 없어 민장을 쓰기도 하고, 우월한 처지에서 관의 힘을 보태어 밀어붙이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서병훈 채권추심 소장(徐秉勳債權推尋訴狀)/ⓒ국립중앙박물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제출도 적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촌을 단위로 하는 촌리민이 가장 보편적이다. 드물지만 문중이 주체가 되기도 하고, 지주들이 소작인과의 갈등 때문에 등장을 제출하는 사례도 있다. 그런데 양자는 같은 집단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같은 문중에 속하는 지주들이 도조 추급을 위해 함께 등장을 내기도 하였다. 다만 문중의 역할은 줄어드는 추세로 보인다. 반면에 같은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고 있는 소작인들이 나서기도 한다. 때로는 면리의 보편적인 문제를 가지고 촌리민이 힘을 모아 등장을 제출하기도 한다. 정약용 같은 경우 , 등소에 앞장선 이들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았는데, 이들이 당시 면리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잘 알고 나섰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면세청원소장(訴狀) 초고/ⓒ국립중앙박물관

또 하나 면·이임과 같은 말단 행정 담당자들이 민장을 내기도 한다. 이를 일반민의 경우처럼 민장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면리 전체의 문제를 대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각종 부가세나 잡세, 군역의 이정, 감면을 요구하고, 때로는 공동부역이나 기강, 산송의 문제에 대해서도 소장을 제출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이 부세의 부과와 징수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어려움과 부세 거납자들에 대한 처리를 하소연하기도 한다. 스스로 직임을 그만두게 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많았다. 이들이 올린 것은 민장이라기보다 행정적 보고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외형적으로는 관에 대한 문제 제기나 저항적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용으로는 부세제도의 불합리성과 탐학성에 저항하는 일반민인들의 모습을 은근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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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648호, 만력기묘명 승자총통(萬歷己卯銘 勝字銃筒)/ⓒ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648호, 만력기묘명 승자총통(萬歷己卯銘 勝字銃筒)/ⓒ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648호, 만력기묘명 승자총통(萬歷己卯銘 勝字銃筒)/ⓒ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648호, 만력기묘명 승자총통(萬歷己卯銘 勝字銃筒)/ⓒ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648호, 만력기묘명 승자총통(萬歷己卯銘 勝字銃筒)/ⓒ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648호 만력기묘명 승자총통(萬歷己卯銘 勝字銃筒)은 총통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데, '만력기묘'라는 뜻 그대로 명나라 만력 기묘년 즉, 만력 7년인 1579년(선조 12)에 제작된 것으로 규가(揆加)라고 하는 장인(匠人)이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승자총통(勝字銃筒)은 불씨를 손으로 점화 및 발사하는 총통 중 휴대용으로 사용하도록 만든 개인화기이며, 1635년에 발행한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무신 이서(李曙, 1580 선조 13∼1637 인조 15)가 총 쏘는 법과 화약 굽는 법을 기술한 '화포식'을 한글로 풀어 발행한 군서)'를 통해 탄환과 화실이 모두 사용 가능한 총통인 것을 알 수 있다.

 

전체길이 56.8cm, 통길이 34.8cm, 입지름 4cm, 무게 4.5kg으로 6마디의 대나무 모양을 띄고 있다. 약실쪽의 3마디의 간격을 총구 쪽 보다 좁게 만든 것은 화약의 폭발 위력을 감안해 터지지 않도록 만든 것며, 적과 가까이 붙었을 때를 대비해 곤봉처럼 근접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양각하였고, 손잡이는 음각으로 총통의 제작시기와 무게를 비롯해 제작한 장인(匠人)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다. 원래 나무 손잡이가 붙어 있었나 오래되어 소실되었다.

 

1578년(선조 8)에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金墀)가 발명해 만들었으며, 1583년 이탕개의 난에서 효력을 발휘하였다고 전해진다. 크기와 화력에 따라 대승자총통,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의 세 종류로 나뉘며, 정철(正鐵, 참쇠라고도 하며 탄소 함유량이 낮아 단조 가공이 가능한 숙철熟鐵을 재정련하여 얻는 쇠로 수차례 담금질과 단조를 통해 쇠의 강도와 점성을 증대 시켜 도검이나 화약을 사용하는 화기에 주로 사용된 철)로 만들어졌다. 찬혈(鑽穴, 단조로 만든 총열에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총열을 만드는 전통 기법)과 조성(照星, 총을 목표물에 조준할 때 이용하는 장치, 가늠쇠) 등은 조총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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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는 한 축의 조선전도를 표시한 지도로 조선 전체는 물론 독도와 만주의 일부까지도 자세히 표현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로 272.7cm에 가로 137.9cm의 크기를 자랑하는 대형 축적의 지도이며, 세견(細絹, 비단의 일종)을 재료로 세 폭을 이어 만든 바탕에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이어지는 산맥과 물줄기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330여 개의 고을과 병영(兵營), 수영(水營), 산성(山城), 역원(驛院)을 비롯해 도로와 교통정보, 행정, 군사 등의 정보가 상세하게 표시 되어 있다. 특히 돋보이는 부분 중에 하나는 바로 현대의 지도처럼 역권, 진보(鎭堡, 조선 전기 지방의 군대 소집 체계인 진관鎭管의 최하단위), 봉수, 고개 등을 기호화 하여 지도의 가독성을 높인 점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특징과 표시된 내용 등을 종합해 보았을 때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의 원본을 기초로 도화서의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 지도의 제작 시기는 18세기 중반인 1755년에서 1757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1767년에 산청(山淸)과 안의(安義)로 바뀌는 산음(山陰)과 안음(安陰)의 지명이 변경 이전의 지명으로 표시되어 있는 점 등이 그 근거이다.
'동국대지도'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당시 과학적인 축적법인 '백리척(百里尺, 1척을 100리로, 1촌을 10리로 기준하여 계산한 축적법)을 적용하여 제작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축적법이 밝혀진 지도일 뿐만 아니라 축적법을 통해 도별도를 이으면 전국도가 되도록 고안되었으며, 산맥의 명확한 표현, 도별 채색 등을 통해 지도의 가독성을 높이는 등 당시 지도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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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455호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금제 태환 이식)/ⓒ국립중앙박물관
보물 455호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금제 태환 이식)/ⓒ국립중앙박물관
보물 455호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금제 태환 이식)/ⓒ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455호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慶州 路西洞 金製耳飾, 金製太環耳飾)'는 신라 5~6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로 귀에 거는 중심고리(主環)인 태환(太環)에 크고 작은 2개의 노는 고리(遊還)로 연결하고, 아래에 긴 이파리 모양을 한 여러개의 달개가 달린 샛장식(中間飾, 귀걸이의 중심고리 아래 달리는 꾸미개장식)을 달았는데, 샛장식은 작은 고리를 연접시켜 만든 구체에 새김눈(‘目’자처럼 가로 또는 세로로 조각한 눈금선문양)이 장식된 달개로 이를 여러개 붙여 방사형으로 펼쳐져 있어 매우 화려해 보이며, 그 아래 테두리와 중심선에 모두 새김눈을 2줄로 겹쳐 붙여 입체감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심엽형(하트 모양 또는 그와 비슷한 나뭇잎 모양)의 드림(垂下飾, 귀걸이의 가장 아래 매달리는 드리개 장식)을 달아 장식하였다.

 

전형적인 경주식 태환이식(太環耳飾, 금으로 만든 굵은 고리의 귀걸이)이라는 점과 제작기법과 조형성이 우수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는 점, 이후 금조총 및 보문동 부부총 금귀걸이로의 양식사적 발전과정을 보여준다는 점 등에서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최초 발견 당시 경주 노서동 215호 고분에서 출토되었으나 귀걸이 1쌍 중 하나가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으로 1966년 국내로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에 소장되었으며, 유사한 유물로 창녕 계성고분군 등지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한편, 보물 제455호는 그동안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2018년10월30일 문화재청에서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보물 제2001호로 재지정하고, 기존 보물 제455호의 이름을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바꾸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1967년 보물 455호로 지정 당시 펴낸 각종 자료에 경주 노서동에서 발굴한 금귀걸이가 아닌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를 실수로 올려 바뀌면서 시작되었는데, 다행히 2000년 어느 날 일본학자인 '가즈오(藤井和夫)'가 신라 황금전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에게 유물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 덕이라고 하며, 그동안 실수로 인해 잘못 알려졌던 것을 보물 지정 당시로부터 51년만에 각자 제이름을 찾은 것입니다. 

 

[보물 제2001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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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오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한다. 수는 장수(長壽), 즉 오래 사는 것을 말하며, 부는 부유, 곧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뜻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재력을 의미한다. 강녕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것을 말하며, 유호덕은 덕을 좋아하여 남에게 베풀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고종명은 일생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덕을 좋아하며 살다가 제명대로 생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종명에는 앞에서 말한 네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고종명하기를 희망했다.

 

고종명을 말할 때 으레 거론되는 것이 회갑(回甲)과 회훤(回婚) 및 회방(回榜)이다. 회갑은 태어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하고, 회혼은 결혼한 지 60년이 된 것을 지칭하며, 회방은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된 것을 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먹는 것이 부족하고 질병도 자주 나돌았으며 의료수준 또한 높지 않아서 60세가 될 때까지 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60세가 되면 회갑연을 성대하게 베풀고 더욱 장수하기를 축원하였다.

 

회혼은 회근(回卺)이라고도 하였는데, 혼인한 지 60년이 되는 해애ㅔ 행했기 때문에 이를 맞이하는 사람이 더욱 드물었다. 15세에서 20세 사이에 혼인한다고 가정하면 75세에서 80세가 되어야 회혼이 가능했는데, 부부가 모두 살아 있어야 예식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회혼례(回婚禮)를 볼 수 없었다. 회혼례는 노부부가 다시 신랑신부가 되어 혼인식을 치르는 것인데, 아들과 사위가 혼인식을 거행하는 집사(執事)와 신랑을 인도하는 기러기아범이 되고, 딸과 며느리가 신부의 수발을 드는 수모(手母)가 되었으며, 손자와 손녀가 구경꾼이 되어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전 김홍도필 담와 홍계희 평생도 중 '회혼례' 일부/ⓒ국립중앙박물관 

회방은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지나야 가능했기 때문에 회방연(回榜宴)을 구경하기가 회혼례보다 더욱 어려웠다. 문과 급제 평균 나이가 30세를 훌쩍 상회했으니, 90세가 넘어야 회방연을 실시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시 합격 평균연령은 이보다 어렸기 때문에 이는 종종 볼 수 있었다. '만력기유사마방회도첩(萬曆己酉司馬榜會圖帖)'이라는 회방연 관련 그림이 현존하는데, 제목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문과 회방연이 아니라 생원진사시 회방연이다. 이 도첩은 만력 기유년, 즉 1609년의 생원진사시 합격자들이 60년이 지난 1669년에 장원으로 합격했던 이민구(李敏求)의 집에 모여 잔치를 벌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장혼(張混, 1759~1828)의 문집인 <이이엄집(而已广集)>에는 회갑과 회후너 및 회방을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다만 장혼은 회갑보다는 회방이 드물고, 회방보다는 회혼이 드물었다고 말하고 있다. 순서는 다르지만 회갑과 회방 및 회혼을 맞이하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희귀한 일이라고 칭하며 사람들이 경하(慶賀)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생년(生年)의 회갑, 등과(登科)의 회방, 초례(醮禮)의 회근이 그것이다. 이것은 황왕(皇王)과 제백(帝伯)의 권세로도 취할 수 없고, 진나라나 초나라 도주공(陶朱公)이나 의돈(猗頓)의 부(富)로도 구할 수 없으며, 현인군자의 덕이라도 반드시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장수(長壽)한 후에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회갑을 맞이하는 것은 열에 대여섯이고, 회방을 맞이하는 것은 백에 서넛이며, 회혼은 천에 한둘이다.

<계서야담(溪西野談)>을 살펴보면, 회갑과 회혼 및 회방을 모두 치른 인물로 심액(沈詻, 1571~1654)이 거론된다. 그는 1571년에 태어나 20세인 158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6세인 1596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혼인을 언제 했는지는 알 수 없느나 그가 회갑을 맞이한 해는 1631년이며, 생원시의 회방이 된 해는 1649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과 회방연도가 되는 1656년보다 2년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계서야담>에서 말하는 회방은 생원진사시 회방임을 알 수 있는데, 그와 같이 회갑과 회혼 및 회방을 모두 치른 인물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몇명 되지 않았다.

 

회갑, 회혼, 회방을 다 맞이하고, 여기에 더하여 기로연(耆老宴)과 구순연(九旬宴)까지 치른 인물로는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있다. 그는 1783년에 태어나 15세인 1797년에 강릉김씨(江陵金氏) 김계락(金啓洛)의 딸과 혼인하고 20세인 180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회갑을 맞이하던 1843년 그는 좌의정을 거쳐 판중추부사로 재임하였다. 김씨와 혼인한 지 60년이 되던 1857년에 국왕은 장악원(掌樂院)에 명하여 그의 회혼연(回婚宴)에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고, 탁지부(度支部)에 지시하여 잔치비용을 지급하도록 했으며, 관원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문과에 급제한 지 60년이 지난 1862년에 국왕은 그에게 궤장(几杖,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하고 회방홍패(回榜紅牌, 홍패는 붉은 종이에 쓴 증서라는 뜻으로 문무과거 합격자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합격증이다.)를 발급하였는데, 이 홍패가 현재 그의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다. 홍패를 발급한 것은 이원익(李元翼) 이후 처름 있었던 일로 알려져 있다.

현종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 1595~1671)에게 내린 하사품 궤장/ⓒ경기도박물관

그런데 이보다 10년 전인 1852년에 정원용은 나이가 70세가 되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기로연을 베풀었다. 그는 관례에 다라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시 20년 후인 1872년에 90세가 되자 그는 구순연을 크게 열었다. 고종은 "영부사가 올해 90세가 되었다. 대관(大官)으로 이 나이에 이른 인물은 국조 이래 불과 서너 명밖에 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한 집안만의 경사이겠는가? 또한 태평한 시절의 상서로운 징조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지금에 와서는 회갑을 맞이하는 일은 어찌보면 거의 당연시 되는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일생에서 고종명을 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회갑을 맞이하기도 어렵던 시절에 심액과 정원용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록을 모두 누린 행운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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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들은 집안 관리에 매우 엄격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그동안 조상들이 힘서 쌓아 놓은 명성이나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안 관리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가혹한 수신(修身)에서 출발하였으며, 사치를 금하고 모든 것을 절약하도록 하였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남긴 가훈이나 유서 등을 통해 그들의 생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그의 아들 윤인미(尹仁美, 1607~1674)에게 준 가훈의 내용이다.

의복과 안장(鞍裝) 및 말(馬) 등 무릇 자신을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모든 낡은 습관을 바꾸고 폐단이 없도록 하라! 식사는 배고픔을 면하면 족하고, 옷은 몸을 가리면 충분하며, 말은 내가 직접 걷지 않을 정도로 허약하지 않으면 되고, 안장은 튼튼하면 그만이며, 그릇은 적절히 쓸 수 만 있으면 좋다.

부유하게 살던 조선시대 양반들 사이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안장에 잘 달리는 말을 타려 하며 울긋불긋 사치스러운 옷을 입으려는 충조가 크게 성행하였다. 그래서 윤선도는 가훈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후손들에게 절대로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풍류와 사치를 즐기다 보면 조상들이 힘써 모은 재산이 흩어지기 마련이었으며, 결국 전답과 가옥을 모두 팔고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게 되면 자연 피붙이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남남이 되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일은 종통(宗統)을 부정하고 제사를 끊어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조상이 물려준 토지와 노비 및 가산(家産)을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노력했다. 가난해져서 부득이하게 토지와 노비 등을 방매할 경우가 되더라도 피붙이에게 팔아서 다른 사람이 조상의 집에 살거나 조상의 땅을 갈아먹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경상도 안동에 살았던 이우양(李遇陽)이 1452년에 그의 자녀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당부한 말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자자손손에게 유서를 남기는 뜻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웃집 자손을 보니 자기 조상이 고생하며 경영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전택(田宅)을 모두 팔아 치우고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여 남이 그 집에 들어와 살고 그 토지를 경작하니, 이는 종통 (宗統)을 뒤엎고 제사를 끊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중략- 바라건대 너희들은 무릇 내가 전하는 적지 않은 조사으이 토지와 노비 및 가재(家財) 등을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전달하여 잃지 않도록 하여라. 만일 가난해져서 이를 팔아먹게 되더라도 너희들의 동종족류(同宗族類)에게 팔고, 남이 내 집에 들어오고 내 토지를 갈며 내 재물을 사용하지 않게 한다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우양이 후손에게 당부한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조상의 제사가 끊어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불효 중에서도 이것이 가장 큰 죄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실 재산 관리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제사를 제대로 이어 가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던 부안김씨 김명열(金命說, 1613~?)이 자신의 후손에게 남긴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내가 일찍이 살펴보니, 다른 집안의 사위와 외손들이 제사를 서로 미루다가 빼먹는 경우가 많았다. 또 비록 제사를 지낸다고 해도 제물을 정결하게 마련하지 못하고 예(禮)를 정성과 경외(敬畏)의 마음 없이 행하니 글허게 제사를 받들 바에야 차라리 지내지 않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일찍이 이 일을 아버지께 아뢰어 정하고 또 우리 형제들이 충분히 논의하여 결정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제사를 결단코 사위나 외손의 집에 윤행시키지 말라. 그리고 이를 정식으로 삼아 대대로 준행(遵行)하도록 하라.

김명열의 당부에 의하면, 제사를 이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물을 장만하는 정성과 제사를 받드는 경외심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성이 다른 외손이나 사위가 제사를 제대로 받들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김명열은 만일 친손(親孫)이 가난해서 제사를 받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절대로 이를 사위나 외손에게 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김명열이 생존했던 당시까지만 해도 종법(宗法)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친손과 외손들이 제사를 돌려 가며 지냈다.

김명열의 '전후문기(傳後文記)' 김명열이 1669년에 작성하여 그의 후손들에게 준 문서로, 그는 이 문서에서 자신의 후손들이 지켜야 할 재산 분배와 제사 봉행에 대한 일종의 지침을 내리고 있다. 조선 중기에 변화해 가는 재산 분배와 제사 봉행의 관행을 엿볼 수 있다./ⓒ한국학자료센터

가장(家長)이 가정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지만, 실제로 집안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사내종과 계집종이었다. 사내종은 농사를 짓고 땔감을 마련하는 등 노동력이 필요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이에 비해 계집종은 물 긷고 빨래하는 일을 비롯하여 길쌈 등 가정의 소소한 일 등을 책임져야 했다. 이와 같이 사내종과 계집종이 집안의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그들은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가장이 이들의 불만을 어떻게 해소시켜 주느냐에 따라서 집안의 성쇠(盛衰)가 달려 있었다. 충청도에 거주하던 이유태(李惟泰, 1607~1684)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옷과 음식을 춥고 배고프지 않게 한 다음에 농사일이나 길쌈하는 일을 하도록 하며, 태만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도록 유도한다.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덜컥 매질부터 해서는 안 되고 먼저 잘 타일러 가르칠 것이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 가지 죄를 합하여 다스리는 것이 좋다. 만약 거칠게 성내고 형벌을 지나치게 하여 도리어 원망하고 배반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거나, 혹은 다치거나 죽게라도 한다면 그 후회가 미칠 바가 없을 것이다.

이유태는 노비들을 부릴 때 먼저 옷과 음식을 춥고 배고피지 않게 줄 것을 강조하고 있다. 노비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춥고 배고프면 자연히 일을 하지 못하기 대문에 옷을 따뜻하게 입혀 주고 배부르게 먹일 것을 당부했다. 잘못이 있더라도 곧바로 처벌하지 말고 타일러서 가르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두세 가지 죄를 아울러서 처벌하되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도록 권유하고 있다. 그는 모든 하인에게 한 달에 3일의 휴가를 주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

 

노비 중에서도 호노(戶奴) 혹은 수노(首奴)는 특별히 대우를 할 것을 당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호노는 집안에서 거느리는 모든 노비의 우두머리로, 상전을 대신해서 관아에 나아가 소송을 제기하고 토지와 노비를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체면상 관아에 출입하거나 직접 나서서 상거래를 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호노가 이를 대신하였다. 또 관에 세금을 납부하고 환곡을 타거나 갚을 때에도 호노가 이를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따라서 호노는 가노(家奴) 중에서 글자를 알고 사리 판단이 정확한 사내종으로 선정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윤선도는 볼길도와 해남 일대를 개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서 호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체엄했다. 그래서 그는 후손들에게 가훈을 내리면서 호노에 대해서도 특별히 언급하였던 것이다.

큰 힘을 들이는 일이 아닌, 기타 사소한 잡일과 통상적인 심부름은 오로지 집안의 다른 노비들에게 맡기고 호노를 부리지 말아서 그가 넉넉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도록 해 주어라. 스스로 힘써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동네 사람들이 종종 부려먹는 일은 더욱 못하게 하라.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집안 관리에 철저하였다. 재산과 제사를 관리할 때에는 언제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고 배려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치를 멀리했으며, 편한 것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 등 집안 관리는 '자기 관리(修身))'로부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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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140호 데니 태극기 정면/ⓒ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2140호 데니 태극기 반대면/ⓒ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2140호 '데니 태극기'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Owen N. Denny, 1838~1900)가 1890년 5월 청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어 미국으로 돌아갈 때 고종으로부터 선물로 하사 받아 가져간 것으로, 데니가 1900년 자식이 없이 죽은 후 다른 가족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가 1981년 데니의 후손인 윌리엄 랠스턴(William Ralston)이 우리나라에 기증하면서 국내로 돌아왔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이 태극기에서 특이한 것은 태극기의 태극 문양과 태극기를 게양할 때 매달기 위한 끈의 위치인데, 태극 문양은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다른 태극기와 비교했을 때 4괘의 위치와 태극문양이 차이가 있는데, 이는 태극 문양 박음질을 하면서 실수로 좌우를 바꿔 뒤집은 모양으로 박음질 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 태극기를 매다는 끈의 위치가 우측에 있는 것은 당시 글을 쓰는 방향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던 관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태극기를 국기봉에 매달 때 우측 부분을 매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데니(Owen N. Denny, 1838~1900)는 한자식 이름으로 덕니(德尼)라고 불렀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모르간 카운테에서 출생하였으며, 오리건주에서 성장하였다. 레바논 아카데미를 거쳐 윌리엄에테 대학에서 법학 공부 후 1862년 변호사가 되어, 1868년까지 와스코 카운티의 판사를 역임, 1870년에서 1874년까지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서 즉결 심판소 판사를 지냈다. 1876년부터 1877년까지 오리건과 알레스카에서 정부의 세금 징수관을 역임하다 같은 해 청나라 천진(天津) 주재 미국영사 1880년 상해(上海) 주재 미국영사로 재직하였으며, 1886년 청나라 정치인 이홍장(李鴻章·1823~1901)의 추천으로 조선 정부의 외교 및 내무 담당 고문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외교고문을 지내는 동안 '청한론(淸韓論, China and Corea)' 저술을 통해 근대 국제법 이론에 근거하여 조선이 청에 속한다는 속방론을 부정하고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조선은 엄연한 독립국이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데니가 쓴 '청한론'은 총 47쪽으로 구성되었으며, 크게 3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서구의 국제법적 이론을 토대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혔으며, 청의 조선 속방론과 내정간섭을 부정. 둘째,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 1859~1916, 청나라의 북양군(北洋軍)에 기반을 둔 중국의 군벌 세력 수장이며,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알려진 인물)의 비리를 폭로. 셋째, 통치권자로서 고종의 능력을 높게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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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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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1962 지정, 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문화재 수난사를 대표 한다고 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 1907년 순종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가 주민들과 당시 군수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한밤중 밀반출이라는 불법 약탈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10여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로 석탑 약탈에 대한 불법성을 알리게 되고, 다행히도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를 통해 결국 계속되는 반환 여론을 조성하게 되었고, 1915년 11월 15일 국내로 반환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적인 문제로 재건은 보류되었고, 40여년 간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어 오다 1962년 비로소 국보 86호로 지정되고,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재개관에 맞추어 현재의 전시실에 석탑의 불법 반출 이후 100여년 만에야 비로소 재조립 되어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내게 됩니다.

경천사 10층석탑 구조 설명/ⓒ기호일보

석탑의 제1층 옥신 이맛돌에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으며 '지정 8년(至正八年)'이라는 기록을 통해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에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당시의 정치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중국탑의 영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어 평면 사각형의 석탑 또는 새로운 양식으로 다각(多角) 석탑이 나타나는데, 이런 것과 달리 특수한 형태를 보이는 것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입니다. 평면과 부재의 구조 등에서 각기 특수한 양식을 보여주고 전체의 균형이 아름다워 주목되는 탑이며, 기단 평면은 아자형(亞字形)으로 3단을 이루고 있으며, 탑신부는 1, 2, 3층이 기단과 같은 평면이지만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4층부터는 탑신이 사각형을 이루었는데 층마다 옥신(屋身, 층과 층 사이를 이루는 몸돌) 밑에는 난간을 돌리고 옥개(屋蓋) 밑에는 다포집 양식의 두공(枓栱, 전통적인 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들기 위해 기둥 위에 복잡하게 엮은 일종의 결구물) 형태를 조각하였습니다. 윗면에는 팔작지붕 형태의 모양과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으며, 기단과 탑신에는 불, 보살, 인물, 용, 천부(天部, 불상의 분류에서 여래, 보살, 명왕에 이어서 최하위에 놓여진 존상의 총칭으로, 제천부, 천이라고도 한다.) 등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장식이 풍부하고 조각수법이 상당히 정교한데, 이런 형태의 석탑이 조선시대 초기에 다시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유례가 없는 희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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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677호 원교 이광사 서첩 '원교법첩'/ⓒ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77호 원교 이광사 서첩 '원교법첩'/ⓒ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77호 원교 이광사 서첩 '원교법첩'/ⓒ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77호 원교 이광사 서첩 '원교법첩'/ⓒ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77호 원교 이광사 서첩 '원교법첩'/ⓒ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77호 원교 이광사 서첩 '원교법첩'/ⓒ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77호 원교 이광사 서첩 '원교법첩'/ⓒ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77호 원교 이광사 서첩 '원교법첩'/ⓒ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77호 '원교 이광사 서첩 원교법첩'은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쓴 것으로 모두 20장 40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쪽의 25면은 밝은 옥색 비단, 중간의 9면은 옅은 옥색 비단에 먹으로 씌어 졌다. 뒤쪽의 6면은 검은 비단에 금니(金泥, 금박이나 금가루를 아교에 풀어 만든 안료)로 씌어 졌다. 가장 위의 것은 두보의 시 '동정호를 지나며(過洞庭湖)'를 전서(篆書, 한자의 고대 서체 중 하나로 갑골문에서 변형 발전 된 초기 형태의 서체)로 쓴 것이다. 이 외에도 모두 18수의 오언시(五言詩)를 담고 있으며, 전서를 비롯해 해서, 행서, 초서, 예서 등의 다양한 서체로 씌어 있다. 이 서첩을 통해 조선 후기 서예가인 이광사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는데, 특히 서첩의 글씨 중에 중국 전서 비석 '형산비(衡山碑, 우비禹碑, 우왕비禹王碑 등으로 불린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떨리는 듯한 필획의 감각적 표현은 두보의 시와 어우러져 보다 운치 있고, 마치 서체가 아닌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크기

가로 23.3cm X 세로 35.2cm

이광사(李匡師, 1705~1777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난 진검眞儉의 아들이다.)는 조선후기 서화가로, 한석봉(韓石峯)으로 잘 알려진 한호(韓濩, 1543~1605) 이후 조선적인 글씨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서예가이자 화가였다. 대표작으로 행서4언시(行書四言詩, 서울대학교 박물관), 1746년(영조 22) 오대(五代, 중국 당나라 말기에서 송나라 초기의 기간에 흥망한 나라들로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가리킨다.)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임모하여 그렸다고 하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畫圖, 간송미술관), '산수도(山水圖,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있으며,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과 '원교집선(圓嶠集選)' 등의 저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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