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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동차와 기차가 잘 포장된 도로와 철길을 달리고,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날아다니니 나라 안은 물론 세계를 돌아다니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예전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발전결과가 18세기에 산업혁명으로 확산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동하는 방법으로는 그저 걷는 것 외에 말, 나귀 등의 동물을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사람이 메거나 들어 움직이는 가마나 바퀴가 붙어 있는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동수단들은 각자 특성에 따라, 경우에 따라 이용되었지만, 신분적 제약을 받기도 했다.

 

말은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용했던 보편적인 승용수단이었다. 말은 도로 사정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고, 기동성이 있어 먼 거리를 빠른 시간에 이동할 수 있으며, 게다가 체구가 커서 그 위에 높이 올라탄 사람은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도 아무나 탈 수 없었다. 지방에서는 특별한 경우 종도 말을 탈 수 있었지만 도성 안에서는 양반신분만이 탈 수 있었다. 만약 노인이나 환자가 아닌데도 일반백성이 소나 말이나 나귀를 타다가 잡히면 탔던 동물을 압수당하고 장(杖) 80대를 맞아야 했다.

 

양반은 먼 거리를 갈 때에는 대개 말을 이용했고, 만약 말이 없으면 세를 내어서라도 말을 타고 다녔다. 양반이 동구(洞口) 밖을 나서면서 말이나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 양반의 체모가 손상되는 것으로 여겼다.

 

훔쳐보기, 김홍도 《행려풍속도병》/ⓒ국립중앙박물관

 

 

 

양반의 나들이에 말과 함께 따르는 것이 종이다. 종은 말구종을 하기도 하고, 먼 거리를 갈 때에는 짐을 지고 따라나섰다. 그래서 양반이 먼 길을 가려면 육족(六足)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의 발 넷과 종의 발 둘을 합하여 이른 말이다. 말과 종은 항상 함께 따라다녀서 '노마(奴馬)'라는 합성어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말은 상당히 귀한 존재였다. 말을 관리하는 비용도 적지않게 들어 17세기에 이유태(李惟泰)가 '정훈(庭訓)'이라는 집안 살림살이 지침서에 남긴 글을 보면, 소 한 마리가 1년 동안 먹을 곡식으로 콩 한 섬을 준비해 두라고 한ㄴ 반면에, 말은 콩 두 섬에 좁쌀 열 말을 준비해 두라고 하였으니 유지비용이 소의 두 배가 넘었던 셈이다.

 

말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특별한 취급을 받아 발을 절거나 병에 걸리면 말에게 침을 놓아 주는 마의(馬醫)가 다로 있었다.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의학서적으로 '동의보감'이 있듯이 말을 치료하는 책으로 '마의보감(馬醫寶鑑)이 있을 정도였다. 좋은 말을 고르는 법, 말의 건강상태를 알아보는 법, 말을 치료하는 법 등을 수록한 말에 관한 백과사전으로 '마경(馬經)'이 있었고, 그 책의 분량이 너무 많아 이를 간단하게 요점만 추려 편찬한 '마경초(馬經抄)'가 있었으며, 이를 다시 일반백성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한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도 있었다. 말이 얼마나 특별히 취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국립중앙박물관

 

 

말은 키를 잴 때에 말굽에서부터 등줄기에서 목덜미로 넘어가는 부분에 불룩 솟은 뼈까지의 높이를 손바닥의 폭, 핸드(hand)로 재는데, 14.5핸드 이하의 말을 포니(pony), 즉 조랑말이라 부른다. 14.5핸드는 대략 1.5미터에 해당되는데, 우리나라 말은 10핸드 내지 12핸드의 아주 작은 조랑말이었다. 사실 키가 크고 늘씬한 말은 예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 흔치 않았다.

 

우리나라의 조랑말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예(濊)에서는 키가 석 자밖에 안되는 과하마(果下馬)가 있었다 하는데, 말을 탄 상태로 이마를 부딪히지 않고 과일나무 아래로 지날 수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04년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J. London)은 조선의 말이 어찌나 작은지 뉴펀들랜드산 개보다 조금 커서 자신이 안고 산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19세기 말에 고종의 행렬을 목격한 비숍(I. B. Bishop)은 고위관리들이 타고 다닌 말도 대개 조랑말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키가 큰 종마를 중국에서 수입하여 큰 말을 얻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랑말은 비록 왜소하지만 장점도 많았다. 사료는 적게 먹으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다니는 데는 아주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 조랑말/ⓒ나무위키

 

 

말 외에 타고 다녔던 동물로는 나귀와 노새가 있었다. 나귀는 말보다 기동성이 떨어지고 목덜미에 가까운 허리 쪽 힘이 말보다 약해 군용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다만 짧은 거리를 가는 데는 말보다 간편한 수단으로 종종 이용되었다. 나귀는 말에 비해 체구도 작아 볼품이 없어서 말보다 훨씬 값이 쌌다. "여각(旅閣)이 망하려니 나귀만 든다"는 속담은 예전부터 나귀가 값싼 돌물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래서 말이 부와 권세를 누리는 관리에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나귀는 검소한 선비에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관직에 오르기 전의 유생들이 나귀를 애용하였다고 한다.

 

한편 암말과 수탕나귀를 교접시켜 낳은 잡종노새나 암탕나귀와 수말을 교접시켜 낳은 버새는 2세를 낳지 못하는 동물이었다. 노새는 말보다도 훨씬 힘이 세어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데 자주 쓰였다.

 

말 외에도 소도 가끔 타고 다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세종 때의 맹사성(孟思誠), 효종 때의 김육(金堉)이 종종 소를 타고 다녔다 하며,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풍속화에는 소를 타고 장에 가는 아낙네가 종종 등장한다.

 

말이나 나귀는 남자들만 탄 것이 아니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사대붓집 여자들이 얼굴을 너울(羅兀, 나올)로 가리고 나귀나 말을 타고 바깥나들이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여자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풍경은 18세기 풍속화에도 등장한다.

 

연소답청(年少踏靑) 《혜원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여자들이 말을 탈 때에는 다리를 벌리고 말 등에 오르므로 속바지가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겉치마 위에 커다란 바지를 입고 말을 탔는데 그 겉바지를 말군(襪裙)이라 했다.

 

말군(襪裙) 《악학궤범》/ⓒ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여자들이 언제나 말군을 입고 말을 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세조 때 예조정랑 우계번(禹繼蕃)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는 취한 채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말을 타고 오는 영접도감사 조숙생(趙肅生)의 처가 말군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는 기생으로 오인하여 말에서 끌어내리고는 말채찍으로 때려 실신시킨 일로 유배된 일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함께보기 : 전통적 이동(운송)수단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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