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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 대성동 고분군/ⓒ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추친단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추친단

 
한국고대사 연구자인 김태식 교수에 의하면 '가락국기' 조는 원래 고려 문종(文宗) 후반의 문인이 편찬한 것을 일연이 줄여 쓴 것이라고 한다. 이 조는 수로왕 신화를 시작으로 400년 정도 지속된 가야에 관한 내용으로 단편적인 <삼국사기> 기록에 비해 상세하게 밝혀 나가고 있어 가야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가락'은 가야(伽耶), 가야(加耶), 가라(加羅)라고도 하며, 북방의 부여(扶餘)계 언어에 속한다.

 
문종조(文宗朝, 고려 제11대 왕) 대강(大康, 요나라 도종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가 1075년~1084년까지 사용한 연호)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였던 문인이 지었는데, 여기에 그 개략적인 것을 싣는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이 땅에 아직 나라의 칭호가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 추장들이 백성을 아울러 다스렸으니, 모두 100호(戶는 하나의 고을과 비슷한 규모이며, 마을이나 씨족 집단을 뜻한다.)에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이 저마다 산과 들에 모여 살았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42년) 3월 계욕일(禊浴日, 재앙을 물리치고 몸을 강물에 씻어 깨끗이 하는날로, 몸을 깨끗하게 하여 액땜을 하고 다같이 모여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는 날을 뜻한다. 대부분 3월 상사일上巳日 즉, 음력 3월 3일에 하며, 이 시기는 파종기로 풍요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등의 큰 행사가 있었다.)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봉(龜旨峯, 지금의 경남 김해시에 있으며, 구지봉의 봉우리 모양이 넓은 원형으로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과 같다고 한다. 구지봉 꼭대기에는 돌 무더기가 거북 모양의 돌울 떠받치고 있는 고인돌이 있고, 근처에 1976년 세운 여섯 개의 알과 아홉 마리의 돌거북으로 구성된 천강육란석조상天降六卵石造像이 있다.)에서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래서 무리 이삼백 명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의 소리 같았지만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구간들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다시 대답했다.
"구지봉입니다."
 

구지봉 전경/ⓒ김해시청
구지봉/ⓒ김해시청

 
또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온 것이다. 너희들이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내면서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밀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구하구하龜何龜何 수기현아首其現也 약불현야若不現也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라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기뻐 춤추게 되리라"
 
구간들은 그 말대로 하면서 모두 기쁘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 하늘을 우러러보니 자줏빛 새끼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살펴보니 붉은색 보자기로 싼 금합(金合, 수확한 곡식을 다음 수확기까지 보관하는 상자)이 있었다. 그것을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허리를 굽혀 백 번 절하고, 얼마 후 다시 금합을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와 탑 위에 두고 제각기 흩어졌다.
 
12일(협진浹辰을 풀이한 말로 협浹은 일주一周 즉, 한바퀴 도는 것을 뜻하고, 진辰은 12간지를 뜻한다.)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열어 보니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빼어났다. 그들을 평상에 앉혀 절하며 축하하고 지극히 공경했다. 그들은 나날이 자라서 열흘 남짓 되자 키가 아홉 자나 되어 은(殷)나라의 탕왕(湯王) 같았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의 고조(高祖)와 같았고, 눈썹의 여덟 색채가 요(堯) 임금과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이 순(舜) 임금과 같았다(태평성대라고 일컫는 요순시대의 임금들로, 요 임금은 유가가 꿈꾸었던 이상적 군주이며, 순 임금은 요 임금과 더불어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린 명군으로 불린다).
 
그달 보름에 즉위했는데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부르니, 바로 여섯 가야 중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호암미술관의 가야 금관(좌), 오구라 컬렉션의 가야 금관(우)/ⓒ국립중앙박물관
고령 지산동 30호 출토 가야 금동관(좌), 성주 가암동 출토 가야 금동관(우)/ⓒ국립중앙박물관
고령 지산동 32호 가야 금동관/ⓒ국립중앙박물관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그는 임시로 궁궐을 짓게 하고 들어가 다스렸는데, 질박하고 검소하여 지붕의 이엉(짚이나 풀잎 새 등을 엮어 만든 초가 지붕의 재료)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석 자를 넘지 않았다.
 
즉위 2년 계묘년(43년) 봄 정월에 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
 
이에 임시로 지은 궁궐 남쪽 신답평(新畓坪, 이곳은 한전閑田 즉, 묵은 밭이었는데 새로 경작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답畓이란 글자는 속자俗字다.)에 행차하여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다가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곳은 마치 여뀌잎처럼 좁지만, 빼어나게 아름다워 열여섯 나한(羅漢,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소승 불교에서 교법을 수행하는 성문聲聞(출가 수행자) 사위四位(수행자의 수행의 단계) 중 덕행이 높았던 성자聖者를 뜻한다.)이 머물 만한다. 더군다나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일곱 성(七聖, '성'이란 올바른 지혜로 진리를 비추어 본 사람으로, '칠성'이란 수신행隨信行, 신해信解, 견지見至, 신증身證, 혜해탈慧解脫, 구해탈俱解脫을 말한다. 한편 고운기교수는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란 구절의 3과 7을 연계시켜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칠일의 숫자와 관련되어 있일 것이라고 보았다.)이 머물 만하여, 정말로 알맞은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참으로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1500보(약 1.8km) 둘레의 외성(外城)과 궁궐, 전당(殿當)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 창고, 곡식 창고 지을 곳을 두루 정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국내의 장정과 공장(工匠)을 두루 불러모아 그달 20일(즉위 2년 봄 정월)에 튼튼한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3월10일에 역사(役事)를 마쳤다. 궁궐과 옥사(屋舍)는 농한기를 기다려 그해 10월 안에 짓기 시작하여 갑진년(44년) 2월에 이르러 완성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궐로 옮겨 가서 모든 정치의 큰 기틀을 살피고 여러 가지 일을 신속히 처리했다.
 

김해 가야테마파크에 복원된 가야왕궁 태극전/ⓒ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홍보서비스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니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했다. 탈해는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는데, 키가 석 자고 머리 둘레가 한 자나 되었다. 탈해는 기뻐하며 궁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위를 빼앗으려고 왔소."
 
수로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왕위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명했으니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 너에게 왕위를 넘겨 줄 수 없고, 또 감히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했다.
"그대는 나와 술법을 겨룰 수가 있겠소?"
 
수로왕이 말했다.
"좋다."
 
그래서 잠깐 사이에 탈해가 매로 변하자 왕은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왕은 새매로 변했는데, 그사이에 아주 짧은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탈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왕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서대석 교수는 수로왕과 탈해의 이야기를 해상을 통해 가락국을 침략한 집단과 수로왕 집단이 전쟁을 한 일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경남 김해시에 조성된 '가야의 거리'의 가야 군사들/ⓒ한국관광공사

 
탈해가 이에 항복하여 말했다.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서 제가 매가 되자 독수리가 되었고, 참새가 되자 새매가 돠었는데도 죽임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인께서 저의 죽음을 원치 않는 인(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왕과 왕위를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탈해는 곧 절을 하고 나갔다. 그러고는 서울 변두리의 나루터로 가서 중국 배가 오가는 물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탈해가 머물면서 모반을 꾸밀까 걱정하여 급히 수군 500척을 내어 추격했으나, 탈해가 계림 땅 경계로 도망쳐 들어갔으므로 수군이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이일에 관한 기록은 신라의 기록과 많이 차이가 있다.
 

가야의 영역[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대가야-고령, 비화가야-창녕/6가야 중 하나로 경북 성주에 있었다고 알려진 '성산가야'는 실제성에 논란이 있다.]/ⓒ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추친단

 
건무 24년 무신년(48년) 7월27일에 구간들이 조회(朝會) 때 왕께 아뢰었다.
"대왕께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도 좋은 짝을 얻지 못했으니, 신들의 딸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처자를 뽑아 궁궐로 들여 배필로 삼으십시오."
 
왕이 말했다.
"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왕후를 맞는 것 역시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마라."
 
그리고 유천간에게 가벼운 배와 날랜 말을 주어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명하고, 또 신귀간에게는 승점(乘岾,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며, 승점은 연하輦下-즉, 도읍에 속한 곳-의 나라다.)으로 가도록 명했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횃불을 들자 배는 재빨리 육지 쪽으로 달려왔다. 신귀간 등이 이를 보고는 대궐로 달려들어와 아뢰었다. 수로왕은 이 말을 듣고서 기뻐했다. 얼마 후 구간들을 보낸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좋은 계수나무로 만든 아름다운 노를 저으며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 안으로 모셔오게 했다.
 

1800년대 말 제작된 웅천현(現 경남 창원시 진해구) 지도(고지도)에 나오는 '만산도'/ⓒ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배에서 내린 왕후가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평소에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아뢰니, 왕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여겨 유사(有司,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를 데리고 행차했다. 그리고 대궐 아래 서남쪽 60보쯤 되는 곳의 산언저리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이에 왕후가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 입구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때 모시던 잉신(媵臣, 왕비를 따라온 신하들)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었으며, 노비까지 합치면 모두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수놓은 비단(금수錦繡)과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능라綾羅), 의상(衣裳), 필로 된 비단(필단疋緞), 금은, 구슬과 옥, 아름다운 옥(경구瓊玖), 장신구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드라마 김수로에서 김수로왕과 허왕후/ⓒMBC드라마

 
왕후가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자 왕이 나가 맞이하여 장막 궁전으로 함께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계단 아래서 왕을 뵙고 즉시 물러갔다. 임금은 유사에게 잉신 부부를 데려오도록 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노비들은 각기 한 방에 대여섯 명씩 들게 하라."
 
그리고 좋은 음료와 향이 좋은 술을 주고 무늬 있는 자리에서 재웠다. 또 의복과 보화를 주었고 많은 수의 군사에게 지키게 했다.
그래서 왕과 왕후가 함께 침전에 들게 되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陁國, 중인도中印度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해석해 왔으나 중국이나 태국이라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아요디아 [Ayodhya] 인도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주(州)에 있는 도시라는 설도 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그곳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 풍속이 아름다우며 백여 곳의 사찰에 3,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許氏)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금년 5월에 부왕과 왕후가 저를 보고 말하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똑같이 꿈속에서 상제(上帝)를 보았다. 상제께서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왕이 되게 한 신성한 사람으로,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짝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가락국으로 보내 수로왕의 짝이 되게 하라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난 후에도 상제의 말이 귀에 남아 있으니 너는 여기서 빨리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향해 가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신선이 먹는 대추(증조蒸棗, 찐대추-신선이 먹는 대추)를 구하고, 하늘로 가서 선계(仙界)의 복숭아(반도蟠桃, 신성한 복숭아)를 좇으며 반듯한 이마(진수螓首-아름다운 용모)를 갖추어 이제야 감히 임금의 얼굴(용안龍顔)을 뵙게 된 것입니다."
 

드라마 김수로에서 김수로왕과 허왕후/ⓒMBC드라마

 
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왕비를 맞이하자는 신하들의 간청을 구태여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당신이 몸소 내게 오셨으니, 못난 나에게는 다행이오."
 
드디어 혼인을 하고 이틀 밤을 지낸 뒤 또 하루 낮을 지냈다. 그러고는 마침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기 양식으로 쌀 열 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수로왕비릉(허왕후릉) 옆에 있는 파사석탑. 허왕후(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고 한다/ⓒ국립중앙박물관


 
8월1일에 왕은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부부도 모두 수레를 나란히 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외국의 갖가지 진기한 물건을 모두 싣고 천천히 돌아오니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게 하고, 잉신 부부와 노비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살게 했으며, 나머지 따라온 자들은 20여 칸의 빈관(賓館) 한 채에 사람 수를 정하여 나누어 살게 하고 일용품을 넉넉히 주었다. 또한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내고(內庫, 왕궁에 직속된 왕실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 또는 재정을 담당하던 관청)에 저장하여 왕후가 사철 쓰도록 했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영전/ⓒ전통문화포털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들은 모두 여러 벼슬아치의 우두머리인데, 그 지위와 이름이 모두 소인이나 농부의 호칭이지 결코 고관 직위의 호칭이라고는 할 수 없소. 혹시라도 나라 밖 사람들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마침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고치고,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으로 고쳤으며,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이란 명칭은 윗글자는 고치지 않고 아랫글자만 고쳐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했다. 또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쳤으며, 신귀(神鬼)는 음을 고치지 않고 훈만 고쳐 신귀(臣貴)로 했다. 계림의 직의(職儀)를 취해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周)의 제도와 한(漢)의 제도를 나누어 정했으니, 이는 옛것을 고쳐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해상왕국 가야 ❘ 특별전 《바다를 건넌 가야인》 전시 영상 中/ⓒ국립김해박물관

 
이에 수로왕은 국가를 다스리는 집을 정돈하여, 백성들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사는 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비유할 수 있었다. 그 공(功)은 도산씨(塗山氏)가 하(夏)나라를 보필하고(도산씨의 딸로 하나라 우 임금에게 시집가 도왔다. 도산은 우 임금이 제후들과 맹세한 땅이다.), 요임금의 딸들(당원唐媛, 요임금의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으로 순임금에게 시집 가 교씨의 시조가 되었다.)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해에 곰 얻는 꿈을 꾸어 징조가 있더니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년(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175세였다.
 

김해 수로왕비릉(허왕후릉)/ⓒ김해시청

 
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왕후가 가락국에 처음 와서 닿은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했으며, 붉은 깃발이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왕비를 따라온 잉신이던 천부경(泉府卿) 신보와 종정감(宗正監) 조광 등은 가락국에 도착한 지 30년 만에 각자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2년 뒤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밖의 하인들은 온 지 칠팔 년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오직 고국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지닌 채 고향을 향하고 죽으니, 살던 빈관이 텅 비어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매일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슬픔에 젖곤 하다가 24년이 지난 헌제(獻帝) 건안(建安, 중국 후한 헌제의 세 번째 연호) 4년 기묘년(199년) 3월 23일에 죽었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비통해했는데,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욱 심했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는 한 발(약 1.8미터)이고 둘레는 300보(약 360미터)로 하여 장사를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대를 이은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 구형(仇衡)까지 이 묘에 배향하고, 매년 맹춘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정결한 제사를 지냈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김해시청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김해시청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문무왕文武王) 용삭(龍朔, 661년에서 663년까지 사용한 당나라 고종의 연호) 원년 신유년(661년) 3월 어느날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왕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 삼국사기에는 노종奴宗으로 삼국유사에는 세종世宗으로 나오며, 이는 동일한 사람인 노종을 훈차訓借에 의해 세종으로 기록되었다고 본다.)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 졸지공卒支公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솔우공이 아닌 졸지공卒支公으로 보기도 한다.) 아들 잡간 서운(庶云)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원군은 나에게 바로 15대 시조다. 그 나라는 이미 망했으나 장례를 지내는 묘는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해라."
 

문무왕 영정/ⓒ전통문화포털

 


이에 사자를 옛터로 보내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을 공양 밑천으로 삼아 왕위전(王位田)이라 불렀으며 본토에 귀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인 급간 갱세(賡世)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제전(祭田)을 관리하며 해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과 밥, 다과 등 여러 가지 음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삿날도 거등왕이 정한 연중 다섯 날을 그대로 지켜 정성 어린 제사가 지금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년)에 편방(便房, 임시로 제사를 지내는 장소)을 설치한 후부터 구형왕 말까지 330년 동안에 종묘의 제사는 항상 변함이 없었는데,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용삭 원년 신유년(661년)까지의 60년(실제로는 구형왕 항복부터 문무왕 즉위년까지는 120년 차이가 있다.) 사이에는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간혹 거르기도 했다.

아! 아름답구나, 문무왕(文武王)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냈으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도다.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행하게 했으니.

경남 김해시 안동에 있는 초선대(招仙臺). 가락국의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七点山)의 선인(仙人)을 초대하여 거문고와 바둑으로 서로 즐겼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한국학중앙연구원


 
신라 말년에 잡간 충지(忠至)란 사람이 있었는데, 금관성(金官城)을 공격하여 빼앗아 성주장군(城主將軍, 신라 말에 지방 호족들이 그 지방을 점령하고 일컫던 칭호)이 되었다. 또 아간 영규(英規)라는 사람이 장군의 위엄을 빌려 종묘의 제사를 빼앗고 함부로 제사를 지냈다. 그가 단오날을 맞아 제사를 지내는데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 없이 무너져 깔려 죽고 말았다.
 
이에 성주장군이 혼잣말을 했다.
"다행히 전세의 인연으로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그러니 마땅히 내가 영정(影幀)을 그리고 향과 등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겠다."
 
그리고 석 자 크기의 교견(鮫絹, 남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비단)에 진영(眞影, 초상화)을 그려 벽에 모셔 두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경건하게 받들었다. 이렇게 한 지 사흘도 채 못 되어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바닥에 거의 한 말이나 흥건히 괴었다. 이에 장군은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받들어 사당으로 가서 불태운 다음 즉시 수로왕의 직계 자손 규림(圭林)을 불러 말했다.
"어제 불상사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나는가? 이는 정녕 내가 영정을 그려서 공양하는 것이 공손치 못하여 사당의 위령(威靈, 위엄이 있는 신령)이 진노한 것이다. 영규가 이미 죽었고 나도 매우 두려워 영정을 불태웠으니, 반드시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 자손이니 옛날 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겠다."
 
이리하여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는데 여든여덟 살이 되어 죽은 뒤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사당을 배알하는 단오일 제사에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미친 증세로 인해 사당에 와 간원이 차려 놓은 제수를 치우고 자기의 제수를 차려 제사 지냈다. 준필은 술잔을 세 번 올리는 일(삼헌三獻)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서 죽고 말았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이 말했다.
"분수 넘게 지내는 제사는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낳는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여규가 있었고 후에는 준필이 있었으니, 이들 부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또 사당 가운데 금옥이 많으니 도적들이 언젠가 와서 훔쳐가려 했다. 도적들이 사당에 처음 왔을 때,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는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 사면으로 비오듯 홀을 쏘아 도적 칠팔 명을 맞히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 도적들이 다시 왔을 때는 길이가 30여 자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팔구 명을 물어 죽였다. 이때 겨우 죽음을 면한 도적들은 모두 엎어지고 흩어졌다. 때문에 능원(陵園)의 안팎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지켜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야 철갑주/ⓒ국립중앙박물관

 
건안 4년 기묘년(199년)에 처음으로 이 사당을 세운 이후로 지금 임금이 즉위한 31년 대강(大康) 2년 병진년(1076년)까지 모두 878년이 되었으나, 쌓아 올린 깨끗한 흙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배열해 놓은 여러 옥조각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면 당나라 사람 신체부(辛替否)가 "예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으며, 허물어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오직 이 가락국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신체부의 말이 영험이 있는 것이지만, 수로왕의 사당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신체부의 말이 다 믿을 만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또 수로왕을 사모하여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29일이 되면 향토의 백성과 관리와 병사들이 승점(乘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은 동서쪽으로 바라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누어 망산도로부터 용맹한 말을 타고 육지로 다투어 달리고, 뱃머리를 둥실 띄워 서로 물에서 밀며 북쪽의 고포(古浦)를 향해 내달린다. 이는 대개 옛날 유천간, 신귀간 등이 허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급히 임금께 알렸던 유적이다.
 

가야 유물인 국보275호 기마인물형 뿔잔/ⓒ국립중앙박물관


가락국이 멸망한 후 대대로 이곳에 대한 칭호가 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661년~663년까지 사용한 당唐 고종의 연호) 원년 신사년(681년)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부르고 태수를 두었다. 그 후 259년이 지나 우리 태조가 통합한 후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설치하여 48년을 지냈다. 다음에는 임해군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여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27년을 지냈고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64년을 지냈다.
 
순화(淳化, 북송 태종의 연호며 고려 성종 2년이다.) 2년(991년)에 김해부의 양전사(量田史, 토지조사를 감독하고 통제하는 일을 하는 관리)인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이 조사하여 보고했다.
"수로왕릉에 딸려 있는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옛 제도 대로 15결로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 부역을 맡은 장정)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담당한 관서에게 그 장계를 전하니 조정에서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알을 내려 변해 성스러운 임금이 된 후, 수명이 길어 158세에 이르렀으니, 저 삼황(三皇) 이후 비견될 만한 사람이 없다. 죽은 후 선대로부터 능묘에 딸려 있던 전답을 지금 줄여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가 또 아뢰니,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겨 절반은 능묘에 두어 옮기지 않고 절반은 향리의 역정에게 주도록 했다. 절사(節使)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이에 반은 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에서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도록 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양전사는 매우 피곤했다. 어느날 저녁 꿈 속에서 갑자기 칠팔 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했다.
"네거 큰 죄를 지었으므로 베어 죽이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깨어났는데 이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쳤는데, 병이 조금도 낫지 않아 관문을 지나다가 죽었다. 그때문에 양전사는 양전도장(量田都帳)에 도장을 찍지 못했다.
 
이후에 봉사(奉使)하는 사람이 와서 그 전답을 조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일 뿐이고, 3결 87부 1속이 부족했다(결부제結負制라는 제도로 신라 이후부터 조선까지 활용한 토지파악 제도이며, 수확량을 기초로 토지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곡식 다발을 손으로 움켜쥔 1주먹(악握) 만큼 세(稅)로 낼 수 있는 토지를 1파(把)라고 하고, 10파를 1속(束)으로, 10속을 1부(負) 혹은 복(卜)으로, 100부를 1결(結)로 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로챈 것을 추적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서에 보고하고 왕명으로 다시 넉넉히 지급했으니 고금에 탄실할 일이다.
 
시조 수로왕(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부지런하게 다스리고 정성스럽게 도를 숭상했는데, 시조의 어머니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가(元嘉) 29년 임진년(452년)에 원군과 왕후가 합혼하던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 했으며, 사신을 보내 그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측량하여 삼보(三寶, 불자가 귀의해야 한다는 불보, 법보, 승보의 3가지를 가리키는 불교의 교리로서, 석가모니 자신이 불보이고,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이 법보이며, 부처의 제자로서의 비구, 비구니의 출가 교단이 승보이다.)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했다.
 

장유사/ⓒ김해시청

 
이 절이 생긴 지 500년이 지나자 장유사(長遊寺, 경상남도 김해시 불모산佛母山에 있는 삼국시대 승려 장유가 창건한 사찰)를 지었는데, 이 절에 바친 전시(田柴)가 모두 300결이었다. 그러자 장유사의 삼강(三剛, 절의 재정과 운영의 실무를 담당하는 세 가지 직책)은 왕후사가 장유사 시지(柴地)의 동남쪽 지경(일정한 테두리 안의 땅) 안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없애 전장(田莊)으로 만들고, 추수한 것을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세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를 아래에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렇다.
 

태초가 열리니 해와 달이 비로소 밝았고,
인륜은 비록 있었으나 임금의 자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방의 나라들은 서울을 나누었다.
신라가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은 뒤에 세워졌다.
세상을 다스릴 사람이 없으니 누가 백성을 돌보랴.
드디어 상제께서 저 창생을 돌보아 주셨다.
이에 부명(符命, 하늘이 제왕이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을 주어 특별히 정령을 보냈다.
산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아득한 듯하고 바깥도 컴컴했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것 같은데, 들으니 소리가 났다.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이레가 지난 후에야 한때 고요해졌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에서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내려오며 자색 끈 하나를 드리웠다.
다른 지방 낯선 땅에 집들은 잇달아 있었다.
구경꾼이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이 우글거렸다.
다섯 분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다.
같은 시각 같은 모습은 형제 같았다.
참으로 하늘이 덕인(德人)을 내어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천하가 맑아지려 했다.
화려한 제도는 옛 제도를 모방하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평했다.
온갖 정사에 힘쓰니 모든 정치가 시행되고, 기울지도 치우치치도 않으니 오직 정일(精一, 정세하고 한결같다.)했다.
길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농부는 밭갈이를 서로 양보했다.
사방에 사건이 없어 베개를 편히 받치고, 만백성이 태평을 맞이했다.
갑자기 햇볕에 드러나 풀잎 위의 이슬처럼 문득 대춘(大椿, 수명이 긴 참죽나무를 말하며, 오래사는 것을 뜻한다.)을 보전하지 못했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가 통곡했다.
금 같은 그 자취 빛나고 옥 같은 소리를 울렸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제사는 향기롭기만 했다.
세월은 비록 흘러갔으나 규범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다. 건안 4년 기묘년(199년) 3월13일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가평(嘉平, 중국 위魏나라 왕 조방曺芳의 연호로 249년~254년까지 사용했다.) 5년 계유년(253년) 9월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렇게 말했다.
"성은 김씨(金氏)라고 하니, 아마도 가야국의 세조가 금빛 알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으로 성을 삼았을 뿐이다."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가평 5년 계유년(253년)에 즉위해 39년을 다스리고 영평(永平) 원년 신해년(291년) 1월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로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평 원년에 즉위하여 56년을 다스리고, 영화(永和) 2년 병오년(346년) 7월8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간 아궁(阿躬)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다. 영화 2년에 즉위하여 62년을 다스리고, 의희(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 사마덕종司馬德宗의 연호로 419년~420년까지 사용했다.) 3년 정미년(407년) 4월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의 딸인 정신(貞信)이며,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407년)에 즉위하여 용녀(傭女)와 결혼한 후 외척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여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계림이 꾀를 써서 가락국을 정벌하고자 했다. 가락국의 신하 박원도(朴元道)가 좌지왕에게 간했다.
"이런 일은 유초(遺草)를 깎고 깎아도 또한 털이 나는 법이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인들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복사(卜士)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에 '소인을 없애면 군자인 벗이 와서 도울 것이다.'라고 했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펴보십시오."
왕이 "옳다."라고 사례하고는 용녀를 내쳐 하산도(荷山島)로 귀양 보내고 정치를 고쳐 오랫동안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15년 동안 다스리고 영초(永初, 송宋나라 무제武帝 유유劉裕의 연호로 420년~422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유년(421년) 5월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초 2년에 즉위하여 31년 동안 다스리고 원가(元嘉, 송宋나라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연호로 424년~453년까지 사용했다.) 28년 신묘년(451년) 2월3일에 죽었다. 왕비는 각간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에 즉위했으며 이듬해 세조와 허황옥(許黃玉) 황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처음 세조와 왕후가 결혼하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전답 10결을 내어 보탰다. 42년 동안 다스리고 영명(永明,남조 제齊나라 무제武帝 소색蕭賾의 연호로 483년~493년까지 사용했다.) 10년 임신년(492년) 10월4일에 죽었다. 왕비는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 10년에 즉위하여 30년을 다스리고 정광(正光,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 원후元詡의 연호로 520년~525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축년 (521년) 4월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의 딸 숙(淑)이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김씨다. 정광 2년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렸다. 보정(保定, 북조北朝 북주北周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의 연호로 561년~565년까지 사용했다.) 2년 임오년(562년)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자 왕이 직접 군졸을 거느리고 싸웠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항하여 사울 수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신라에 들어가 항복했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각(世宗角干)이고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이며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말했다.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양梁나라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연호로 529년~534년까지 사용했다.) 4년 임자년 (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과 구형왕비(신라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와 증조모)/ⓒ전통문화포털

 

경남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이라고 전하는 '산청 전 가야 구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 임자년에 땅을 신라에 바치고 항복했다고 했다. 그러기에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 임인년(42년)에서 구형왕 말 임자년(532년)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땅을 바친 것이 위(魏)나라 보정(保定) 2년 임오년 (562년)이 되므로 30년이 더 있게 되니 모두 520년이 되는데, 지금 두 가지 설을 다 기록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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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복원도/ⓒ경주문화관광

 

경주 황룡사지/ⓒ경주문화관광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년(636년)에 자장법사가 서쪽(당나라)으로 유학을 갔는데, 바로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감화되어 불법을 전수받았다.

자장법사/ⓒ경주시

 
문수보살은 자장법사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 왕은 천축 찰리종(刹利種, 고대 인도에서 네 계급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크샤트리아를 말한다)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 불교 이치를 깨달은 이에게 주는 본인의 미래에 관한 기록)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 황하 문명을 중심으로 하고 동서남북 사방의 변방을 하급의 문화로 폄하하는 데서 나온 관념으로 산동성 제나라도 동이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공공(共工, 중국 요순 시대에 흉포하기로 이름난 종족으로 중국 강회江淮 지방에 살았다)의 종족과는 다르다.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 사교(邪敎, 건전하지 못하고 그릇된 종교)를 믿어 때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법문(法文, 불경의 글)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승려들이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모든 백성이 평화롭다."
말을 마치자 문수보살은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법사는 이것이 보살의 변화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그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둑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나타나 물었다.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보리(提, 보디bodhi의 음역으로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불타 정각正覺의 지혜, 즉 불타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그에게 절하고서 다시 물었다.
"너희 나라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는 말갈과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왜와 이어져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가며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입이 잦으니, 이것이 백성의 고통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거라."
 
자장법사가 물었다.
"고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해야 이롭겠습니까?"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 불교 또는 불법을 보호하거나 옹호하는 용)은 바로 내 큰아들인데, 범왕(梵王, 범천왕梵天王의 준말로 인도 바라문교婆羅門敎-힌두교의 기본 배경이 되며 불교에도 영향을 미친 인도의 원시종교-의 최고 신이다)의 명령을 받고 가서 절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九韓)가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 호국 사상에서 생겨난 팔관회는 우리나라의 고유 민속과 불교가 접목된 것으로 윤등을 설치하고 향등을 달아 밤새도록 광명과 향기가 가득하도록 연화대를 설치해 가무를 즐기는 축제로 신라시대에 시작되어 고려 시대에 가장 많이 개최되었던 불교 의례다)를 열고 죄인을 풀어 주면 밖의 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 서울 남쪽 언덕에 정사를 하나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어 주면 나 역시 덕을 갚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신령한 사람은 자장법사에게 옥()을 바치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사중기寺中記>에는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의 처소에 탑을 세워야 할 이유를 들었다고 했다.
 
정관 17년 계모년(643년)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내려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와 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권했다.

선덕여왕과 신하들/ⓒ경주시(천년 왕국의 부활 中)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자 신하들이 말했다.
"백제에 부탁해 공장(工匠, 장인 중에서 국가의 직역 체제 아래에 편재된 장인층의 장인)을 데려와야 가능합니다."
선덕왕은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공장을 청하게 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재목과 돌을 다듬고, 이간(伊干, 신라 17관등의 제2등으로 잡찬의 위이다)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라고 하며,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다)이 수하 공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처음 이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는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꿈꾸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심이 되어 손을 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사방으 컴캄해지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공장은 뉘우치고 탑을 완성했다.

황룡사 9층목탑/ⓒ경주시(천년 왕국의 부활 中)

 
<찰주기刹柱記>에 이렇게 말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근자, 그 이하는 183자다(약 66미터 정도 되며, 21미터의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의 세 배다)."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백 개를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戒壇, 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으로 대승 계단과 소승 계단으로 나뉜다) 및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셔, 못에 있는 용의 청원을 들어주었다.-대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이며 역시 자장법사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이후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 고구려 왕이 장차 신라를 정벌하고자 계책을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가?"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구려 왕은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나라에 구정(九鼎, 중국 하나라 우임금 때 전국의 쇠를 모아 만든 아홉 주州를 상징하는 솥)이 있어서 초()나라 사람들이 감히 북쪽(주나라)을 엿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귀신이 받치는 힘으로 수도 장안을 누르니,
휘황찬란한 금벽색이 기왓장을 움직이네.
올라가 굽어 보니 어찌 구한(九韓)만 복종하랴.
천하가 특히 태평함을 비로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 명현(名賢) 안흥(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 제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략했다. 대궐 남쪽 황룔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 나라의 침략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왜(倭, 일본), 2층은 중화(中華,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로 추정), 3층은 오월(吳越,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로 추정), 4층은 탁라(托羅, 탐라국), 5층은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여진족), 9층은 예맥(穢貊, 고구려로 추정)을 억누른다."

황룡사역사박물관 전시모형

 
또 <국사>와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계유년(553년)에 절을 세운 뒤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년(645년)에 탑을 처음 세웠다. 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7년 성력(聖曆,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 원년 무술련(698년) 6월에 벼락을 맞았다.-<사중고기>에 성덕왕(聖德王) 때라고 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제33대 성덕왕 경신년(720년)에 다시 지었고, 제48대 경문왕(景文王) 무자년(868년)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같은 시대에 세 번째로 다시 지었다. 고려 광종(光宗) 즉위 5년 계축년(953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顯宗) 13년 신유년에 네 번째로 다시 지었다. 또 정종(靖宗) 2년 을해년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아 문종(文宗) 갑진년(1064년)에 다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헌종(獻宗) 말년 을해년(1095년)에 여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고종 16년 무술년(1238년) 겨울에 몽골이 침입하여 탑과 절, 장륙존상과 전각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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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진덕여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은 즉위하자 직접 태평가(太平歌, 진덕여왕이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은 사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5 '진덕왕 조'에 실려 있는데, 당나라 고종은 이것을 읽고 법민을 대부경大府卿으로 임명해 돌려보냈다고 한다.)를 짓고 비단 무늬를 짜서 사신('삼국사기'에는 진덕왕 4년에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사신으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을 시켜 당나라에 바치게 했다.

어떤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요청하자, 당 태종이 가상히 여겨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현경(顯慶,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로 656년에서 661년까지 사용했다.)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제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은 태종 시대가 아니라 바로 고종(高宗) 시대다. 소정방이 온 것이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에 무늬를 짠 것이 군사를 청할 때가 아님은 확실하므로 진덕여왕 때가 맞다. 아마도 김흠순(金欽純)의 석방을 요청할 때였을 것이다.

당나라 황제는 이 점을 가상하게 여겨 진덕여왕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권5) 치당태평송/ⓒ한국학중앙연구원

 

위대한 당나라가 큰 왕업을 여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획 창성하여라.
전쟁이 그치니 위엄이 정해지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임금을 잇는다.
하늘을 통솔하닌 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빛을 머금는다.
깊은 인(仁)은 해와 달을 짝할 만하고
운수가 요순 시대와 같다.
펄럭이는 깃발은 어찌 그토록 빛나며
울리는 북소리는 어찌 그리도 장엄한가.
나라 밖의 오랑캐로 명을 거스른 자는
칼날에 엎어져 죽임을 당하리라.
순수한 풍속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 고루어리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
사계절은 옥촉(玉燭, 사계절의 기후가 조화를 이룬 것이니 태평한 시대를 말한다.)처럼 화합하고
일월과 오행(七曜, 하늘에 보이는 별 중 육안으로 관찰되고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별을 오행과 대응시킨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과 태양 달을 합친 7개의 천체를 말하며 칠요성이라고도 한다.)은 만방을 순행한다.
산의 신령은 보필할 재보(宰輔, '시경詩經-대아大雅' 숭고崧高의 '유악강신維嶽降神:큰 산의 산신령이 내려와  생보급신生甫及申:보씨와 신씨를 낳으셨도다'를 인용한 것으로 보후甫候와 신백申伯 두 사람으로 국가의 동량 즉, 기둥과 들보가 되는 신하를 가리킨다.)를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진실된 사람을 임명하였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이룬 한결같은 덕이
우리 당나라 황실을 비추리라.

 
진덕왕 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어 남산 우지암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그때 몸집이 큰 호랑이가 그 자리로 달려들자 공들이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며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던져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아 상석에 앉았지만, 공들은 모두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

 

진덕여왕 때 일화/출처 : https://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6/2009052601483_6.html


신라에는 신령스러운 땅이 네 군데 있었다. 큰일을 의논할 때마다 대신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 의논했고, 그렇게 하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졌다.
신령스러운 땅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진덕왕 대에 처음으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조례(正旦禮,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진덕왕 즉위 5년의 일이다.)를 행했고, 처음으로 시랑(侍郞)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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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팔국의 난 전개도/ⓒ더위키 THE WIKI

제10대 내해왕(奈解王,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이라고도 한다. 재위 196~230)이 자리에 오른지 17년 임진년(212년)에 보라국(保羅國, 지금의 나주지역)과 고자국(古自國, 지금의 고성), 사물국(史勿國, 지금의 사주泗州-사천지역) 등 여덟 나라가 힘을 합쳐 신라의 변경으로 쳐들어왔다. 왕이 태자 내음(㮈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도록 명령하자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다.

 

이때 물계자(勿稽子)의 군공(軍功, 전쟁 등에서 얻은 군사상의 공적)이 으뜸이었지만, 태자의 미움을 사 공을 보상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말했다.

 

"이번 전쟁의 공은 오직 자네에게만 있는데, 상이 자네에게 미치지 않은 것은 태자가 자네를 미워하는 것인데 자네는 원망스럽지 않은가?"

 

물계자가 말했다.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어찌 태자를 원망하겠는가?"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는 것이 좋겠소."

 

물계자가 말했다.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여 이름을 다투고, 자신을 드러내어 남을 덮는 것은 뜻 있는 선비가 할 일이 아니네. 마음을 가다듬고 다만 때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네."

 

10년(20년의 잘못이다.) 을미년(215년)에 골포국(骨浦國, 지금의 합포合浦)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갈화(竭火, 지금의 울주다.)를 치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이때 물계자가 적군 수십 명을 베었으나, 사람들이 물계자의 공적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가 아내에게 말했다.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에 임해서는 자신을 잊고 절조와 의리를 지켜 생사를 돌보지 않아야 충(忠)이라고 들었소. 무릇 보라(지금의 나주羅州지역)와 갈화의 싸움이야말로 나라의 어려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기가 없었으니, 이것은 매우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오.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그 허물이 아버님께 미쳤으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소. 이미 충효를 잃어버렸는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과 저자를 왕래하겠소."

 

물계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지니고 사체산(師彘山,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대나무의 곧은 성질이 병임을 슬퍼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기도 하고,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지으며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국유사 권 제5 피은(避隱)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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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에 신라인에게 불교는 상당한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이 조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자비왕의 맏아들로 효성스럽고 겸손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권3에는 소지마립간이라 했다. 소지왕炤知王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지 10년 무진년(488년)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라. 혹은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興輪寺에 가서 향을 피우려고(行香-행향은 재를 베푸는 사라이 도량 안을 천천히 돌며 향을 사르는 의식이다.) 하는데, 길에서 여러 마리 쥐가 서로 꼬리를 물고 가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돌아와 점을 쳐 보니 내일 맨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아가라고 하였다는데, 이 견해는 틀린 것이다."

 

왕은 기병에게 명령하여 뒤따르게 했다. 남쪽의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촌壤避寺村이니 경주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렀을 때 되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기병들은 멈춰 서서 이 모습을 구경하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 겉봉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경북 경주시 남산동 서출지/ⓒ경주문화관광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신라인들의 수수께끼 형식의 해학으로서 제유법의 일종이다.)"

 

사신이 와서 글을 바치니 왕이 말했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뜯어보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일관(日官, 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리)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뜯어 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거문고 갑(琴匣)을 쏴라."

 

왕은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속에서는 내전에서 분향 수도(焚修, 모든 불사를 맡아서 행하는 의식이다.)하는 승려와 비빈이 은밀히 간통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살되었다.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상해(上亥, 이달의 첫 해일亥日이다.), 상자(上子, 이달의 첫 자일子日이다.), 상오(上午, 이달의 첫 오일午日이다.)일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 '까마귀를 꺼려 하는 날' 이란 뜻인데, 까마귀에게 찰밥으로 제사 지내는 풍속은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온다. 이 설화는 향찰을 한자어로 보는 데서 생긴 어원인 듯 하다.)로 하여 찰밥으로 제사 지냈는데, 이 풍속은 지금까지도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것을 속어로는 달도(怛忉, 양주동 박사에 의하면 우리말 '설, 슬'과 샛해 첫날을 뜻하는 '설'의 음이 상통하는 데서 온 훈차라고 한다.)라고 하는데, 또한 노인이 나와 글을 바친 그 연못의 이름을 서출지(書出池,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양기못'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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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진흥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제24대 진흥왕은 즉위할 당시 열다섯 살('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일곱 살로 되어 있다.)이었기 때문에 태후가 섭정을 했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이며, 법흥왕의 아우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다. 임종 무렵 머리칼을 깎고 법복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승성(承聖(남조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의 연호다.) 3년(554년) 9월, 백제의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공해 와서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필을 빼았아 갔다.

국보 3호 북한산 신리 즌흥왕 순수비/ⓒ국립중앙박물관

이보다 앞서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모의 했다. 이때 진흥왕이 말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알렸더니, 고구려는 그 말에 감격하여 신라와 화친을 맺었다. 이 대문에 백제는 신라를 원망하여 침략해온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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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 재위 500~514)의 성은 김씨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도는 지도로(智度路)며, 시호는 지증(智證)이라 했다. 이때부터 시호가 쓰이기 시작했고, 또 우리말에서 왕을 마립간(麻立干, '마립'은 두頭, 상上, 종宗의 의미고 '간'은 대大, 장長의 뜻이니, '정상'을 뜻하는 존호로 왕에게 쓰였으며, '마라한', '마루한'으로 발음했다고 한다.-양주동, 이동환 설)이라고 부른 것도 이 왕 때부터다.

 

왕은 영원(永元, 남조 제나라 동혼후東昏侯 소보권蕭寶券의 연호다.) 2년 경진년(500년)에 즉위했다.(혹은 신사년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3년이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여서 좋은 짝을 찾기가 어려웠으므로 사신을 삼도(三道)로 보내 구했다. 사신이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개 두 마리가 북만큼 커다란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다투어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묻자 한 소녀가 이렇게 말했다.

 

"모량부 상공(相公)의 딸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다 숲 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상공 딸의 키가 일곱 자 다섯 치나 되었다. 이런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왕이 수레를 보내 그녀를 궁궐로 맞아들여 황후로 봉하니(박씨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신하들이 모두 축하했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다.) 동해 속으로 바람을 타고 이틀 정도 가면 우릉도(于陵島, 지금의 우릉도羽陵島-지금의 경북 울릉군 울릉도다.)가 있는데, 둘레가 2만 6730보(步)였다. 섬의 오랑캐들이 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게 굴면서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伊湌, 신라 벼슬 이름으로 17관등에서 제1관등이다.) 박이종(朴伊宗,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이사부異斯夫라고 되어 잇으며 김씨라고 했다.)에게 명하여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박이종은 나무로 만든 사자를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신라장군 '이사부' 표준영정/삼척시청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겠다."

 

우릉도의 오랑캐는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려 주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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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유적 효충사(朴堤上遺跡 孝忠祠) 박제상 영정/ⓒ양산시립박물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는 박제상(朴堤上)으로 되어 있어 박제상으로 교쳐야 한다. '제상'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했다.

 

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왕위에 오른지 36년 경인년(39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말했다.

 

"저희 임금은 대왕의 신성하심을 듣고 신 등에게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께 아뢰도록 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왕자 한 명을 보내 저희 임금께 성심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왕이 셋째 아들 미해(美海, 미토희未吐喜-라고도 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미사흔未斯欣으로 되어 있다. 미사흔과 박제상 이야기는 <일본서기> 권7에도 전한다.)를 왜국(신라에게 위협을 주었던 왜국의 성립은 대체로 4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왜국은 신라 왕을 눈물 흘리게 만들 만큼 강한 힘이 있었다.)에 보냈다. 이때 미해의 나이는 열 살로 말과 행동이 아직 반듯하게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내신 박사람(朴娑覽)을 부사(副使)로 삼아 딸려 보냈다. 그런데 왜왕이 30년 동안 그를 붙잡아 두고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訥祗王)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기미년(419년)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사신을 보내 말했다.

 

"저희 임금께서는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 <삼국하기> '신라본기'에는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가 지혜가 빼어나고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특별히 소신을 보내 간청하도록 했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러워하면서 서로 화친을 맺어 왕래하기로 했다. 그래서 동생 보해에게 고구려로 가도록 명령하고 내신 김무알(金武謁)을 보좌로 삼아 보냈다. 그런데 장수왕 역시 그를 억류하고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10년 을축년(425년)에 이르러 왕은 여러 신하들과 나라 안의 호걸들을 불러모아 직접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고 다양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자 왕이 눈물을 떨구면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과거 선친께서는 백성들의 일이라면 성심을 다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왜국으로 보냈다가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또 짐이 보위에 오른 이래 이웃 나라의 군사가 대단히 강성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고구려만이 화친을 맺자는 말을 하였으므로 짐이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루려에 보냈다. 그런데 고구려 역시 그를 붙잡아 두고는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짐이 비록 부귀한 위치에 있지만 일찍이 하루 한 순간이라도 아우들을 잊거나 생각하고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만약 두 아우를 만나 보고 함께 선왕의 묘를 뵙게 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겠는데, 누가 이 계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때 모든 관료들이 다 함께 아뢰었다.

 

"이 일은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 태수 박제상(朴堤上)이라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제상을 불러 물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어려운가 쉬운가를 따져 보고 나서 행동하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죽을지 살지를 따져 보고 나서 움직이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명을 받들어 가겠습니다."

 

왕은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그와 잔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손을 잡고는 헤어졌다.

 

제상은 왕 앞에서 명을 받들고 곧장 북해(北海)의 길을 달려 변복을 하고 고구려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 함께 탈출할 날짜를 의논하여 우선 5월 15일로 정하고, 고성(高城) 수구(水口)로 돌아와 묵으면서 기다렸다. 보해는 기일이 다가오자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조회하지 않다가 밤중에 도망쳐서 고성 바닷가까지 이르렀다. 고구려 왕이 이을 알고는 수십 명을 보내 뒤쫓아 고성에 이르러 따라잡게 되었다. 그러나 보해가 고구려에 머무는 동안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활을 쏘았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을 면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왕은 보해를 만나 보자 미해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며 눈물을 머금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마치 몸 하나에 팔뚝이 하나뿐이고 얼굴 하나에 눈이 하나뿐인 것 같소.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소?"

 

이때 제상이 이 말을 듣고는 두 번 절한 후 하직하고 말에 올랐다.

 

그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길을 떠나 곧바로 율포(栗浦) 바닷가에 도착했다.

 

제상의 아내가 이 일을 듣고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가 간곡하게 불렀으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떠났다. 그러고는 왜국에 도착해서 거짓으로 말했다.

 

"계림의 왕이 무고한 내 아버지와 형을 죽였기 때문에 이곳까지 도망쳐 왔습니다."

 

왜왕은 그를 믿고서 집을 주고 편안히 살게 해 주었다.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바닷가에 나가 노닐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았다. 잡은 것을 항상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이 매우 기뻐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 안개가 짙게 끼자 제상이 말했다.

 

"도망가실 만합니다."

 

미해가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갑시다."

 

제상이 말했다.

 

"만약 신까지 달아난다면 아마도 왜인들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받을 것입니다. 신이 남아서 추격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말했다.

 

"지금 그대는 나에게 아버지나 형과 같은 존재인데, 어찌 그대를 버려 두고 혼자 돌아갈 수 있겠소?"

 

제상이 말했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만 있다면 만족할 따름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술을 가져다 미해에게 바쳤다. 이때 계림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에 있었으므로 그를 딸려 보냈다.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 있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주변 사람들이 들어와 보려고 했으나 제상이 밖으로 나와서 저지하며 말했다.

 

"어제 말을 달려 사냥을 하느라 병이 깊어 아직 일어나지 않았소."

 

그러나 날이 저물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다시 묻자 대답했다.

 

"미해는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주변 사람들이 급히 왜 왕에게 알렸다. 왜왕은 기병을 시켜 뒤쫓게 했으나 따라잡지 못했으므로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너희 나라 왕자를 돌려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했다.

 

"나는 계림의 신하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한 것뿐인데 어찌 감히 당신에게 말하겠는가?"

왜왕이 노하여 말했다.

 

"이제 너는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니, 오형(五形, 중국 고대 다섯 가지 형벌로서 대체로 먹물로 얼굴에 글씨를 새기고[墨], 코를 베고[劓], 발뒤꿈치를 베고[刖], 성기를 절단하고[宮], 목을 베는[斬] 것을 말한다.)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신하라고 말하면 후한 녹을 주겠다."

 

제상이 대답했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 왕에게 볼기를 맞는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하여 제상의 발바닥 살갗을 도려 낸 후 갈대를 베어다 놓고 구 위를 걷게 했다.(오늘날 갈대에 있는 핏자국을 세속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제상이 대답했다.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뜨거운 철판 위에 세우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역시 제상이 대답했다.

 

"계림의 신하다."

 

그러자 왜왕은 제상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는 목도(木島) 가운데서 불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오자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에 알리게 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백관들에게 굴헐역(屈歇驛)에서 맞도록 명하고, 자신은 친동생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서 맞았다. 그리고 대궐로 들어와서 잔치를 베풀고 나라 안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제상의 아내는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하고 딸을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옛날 한(漢)나라의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에 있을 때 초(楚)나라 군사의 포로가 되었다.  항우(項羽)가 주가에게 '네가 내 신하가 되면 만록후(萬祿侯)로 봉하겠다.'라고 했으나, 주가는 욕을 하며 굽히지 않다가 초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제상의 충렬(忠烈)이 주가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처음에 제상이 떠나갈 때, 소식을 들은 부인이 뒤쫓았으나 만나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의 모래밭에 드러누워 오래도록 울부짖었는데, 이 때문에 그 모래밭을 장사(長沙)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 했다. 오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경주시 외동읍과 울주군 두동면 경계에 있으며 해발 754미터다. 그 아래에 박제상 사당이 있다. 아직도 이곳 주민들은 치술령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다 삶을 마쳤다. 그 뒤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으며, 지금도 사당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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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성왕의 무덤이라고 추측되기도 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보물 630호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국립중앙박물관

의희(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 사마덕종司馬德宗의 연호다.) 9년 계축년(413년)에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를 만들었다.(아마도 남평양南平壤인 듯한데, 지금의 양주楊州다.) 왕은 이전 왕의 태자인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음이 못마땅하여 그를 해치려고 고구려 군사를 청해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에게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는 창을 거꾸로 하여 [자기 편인]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은 뒤 떠났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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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 제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의 개국 시조면서 경주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서술했다. 혁거세란 명왕明王, 성왕聖王, 철왕哲王의 뜻이며 존호다.-이병도설)

 

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다음 신화를 서대석 교수는 육촌장 신화라고 이름지었다. 내용은 씨족 집단의 거주 지역과 족장의 이름을 이야기한 것으로서 천신 숭배 집단의 부계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 생활을 하던 사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 여섯 마을 사람들을 조선의 유민으로 보았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며, 촌장은 알평(謁平)이라고 한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峯, 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인데 그 아래에 석탈해왕릉이 보인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설치하고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년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로 읽어야 하며, 간혹 탁涿으로 쓰는데 역시 음은 도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며 아래의 예도 그렇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 구俱를 구仇로 표기하기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에 이산(伊山 혹은 개비산皆比山이라 한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양梁은 탁涿이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혹은 빈지賓之, 빈자貧子, 빙지氷之라고도 한다.)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와서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치원이 옛 집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지금의 금강산-현재의 경주 북쪽에 있는 산-백률사栢栗寺 북쪽산)으로 촌장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라고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활아(活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고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 혹은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여섯 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례왕 9년(132년)에 처음으로 여섯 부의 명칭을 고쳤고, 또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다.)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고본古本에는 건무建武 원년이라고도 하고 또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우물은 이 부족이 농경 생활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은 신라정新羅井이라고 하는데 경주의 탑정동 솔밭에 있따.)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하늘을 나는 천마의 의미가 있으며 하늘의 사자다.)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태양신의 정기를 받아 고귀하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서대석 설) 그 알을 깨뜨려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이 말은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박'은 우리말 '밝光明'에 대한 음차자音借字며, '혁赫'의 훈'밝'에 대한 음차자인 '박'자로 성을 삼은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양주동, 이동환-해설가들에 다르면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선도성모와 같은 존재며, 중국 황실의 공주로서 성도산에 와서 깃들었다는 신모다. -이동환-가 낳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는 말에 어진 사람을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은 것 역시 서술성모가 나타났음을 뜻함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居瑟邯) (또는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 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후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축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맺어드려야 한다."
(이하는 왕비 알영 부인을 맞이하는 이야기인데, 고운기의 고증에 의하면 부인이 태어난 해는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5년 뒤라고 기록하고 있어 여기와는 다르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이도흠에 의하면 '알'은 사물의 핵심이나 근원을 말하며, '씨'의 대칭어로 여성에게만 쓰였다고 한다. 서대석은 알영정을 나정에 대응되는 마을의 중심지로 보았다.-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다. 이러한 닭 토템은 신성 관념의 반영이며 신라 전체의 토템으로 확장된다.) 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이다.)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했다. 여자 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열세 살이 되는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 아이를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 자를 서벌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왕후는 경주의 오릉五陵에 혁거세와 같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한 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五體]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蛇陵 '삼국유사'에 나오는 '뱀'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뱀이야말로 합장을 막고 오릉을 만든 매개자이다.)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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