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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릉/ⓒ한국콘텐츠진흥원

제13대 미추이질금(未鄒尼叱今, 재위 262~284, 혹은 미조未組 또는 미고未古라 한다.-여기서 미조, 미고는 근저根抵, 원본元本이라는 뜻인 '및', '및'의 사음寫音이라는 설이 있다.)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높았고 여전히 성현의 덕이 있어 이해(理解, '삼국사기'에는 점해沾解라고 되어 있다.)로부터 자리를 이어받아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지금 세상에서는 미추왕의 능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며, 후대에 김씨의 여러 왕들이 모두 미추를 시조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오른지 23년 만에 죽었는데, 왕릉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 대에 이서국(伊西國, 지금의 경북 청도 지역에 있던 나라)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우리 [신라]는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막았으나 오랫동안 대항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군대[竹葉軍]가 도우러 와서 우리 군대와 힘을 합쳐 적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적이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선왕이 음덕으로 도와 공을 세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능을 죽현릉(竹現陵, 여기서 '현現'이 '엽葉'과 음이 통하므로 '죽엽릉'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이라 불렀다.

 

그 후 37대 혜공왕(惠恭王) 대인 대력(大曆) 14년 기미년(779년) 4월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무덤 속에서 어떤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는데, 장군과 같은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또 갑옷 차림에 무기를 든 마흔 명가량의 군사가 뒤를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안에서 진동하고 소리내어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어떤 때는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 말은 이런 내용이었다.

 

"신은 평생을 시대의 환란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어 통일을 이룩한 공이 있고, 이제는 혼백이 되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쳐 환란을 구하려는 마음을 잠시도 고쳐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혜공왕 6년)에는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그것은 군주나 신하가 저의 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이제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으려 하니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했다.

"나와 공이 이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예전처럼 힘써 노력해 주시오."

 

[김유신의] 세 차례 부탁에 세 차례 다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회오리 바람은 곧 돌아갔다.

 

혜공왕은 그 말을 듣고는 두려워 즉시 대신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의 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서른 결(結)을 취선사(鷲仙寺, 취선사는 경북 경주에 있던 절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하'에 이 내용이 있다.)에 하사하여 명복을 빌게 했다. 그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에 복을 심기 위해 세운 절이다. 미추왕의 혼이 아니었다면 김유신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이니, 나라를 지키는 마음이 크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미추왕의 혼은 호국령에 속한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기려 삼삼(三山, 신라의 제전 중에서 대사大祀에 속하며 내림奈林, 골화骨化, 혈례穴禮의 세 곳이다.-이동환 설)과 함께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제사 차례를 오릉(五陵, 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제2대 남해차차웅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 보다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함께보기: 이서국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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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제2대 남해차차웅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 자충慈充과 동음어이며 '스승'의 옛말 혹은 존장자에 관한 칭호)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일컫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전한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4년)에 즉위하여 21년 동안 다스리고 지황(地皇, 한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 평제平帝를 죽이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다.) 4년 갑신년(24년)에 죽으니, 이 왕이 바로 삼황(三皇, 혁거세왕, 노례왕, 남해왕을 말한다.)의 첫째라고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불렀는데,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어떤 이는 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시대의 명문장가로 '화랑세기'를 지었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다.)이 말했다.

 

"차차웅은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존장인 자를 자충이라 한 것이다."

 

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잇금[齒理](잇자국을 말한다.) 을 말한다. 처음에 남해왕이 승하하자 아들 노례(努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자 탈해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합니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했다. 옛날부터 이렇게 전해 왔다.

 

혹은 왕을 마립간(麻立干, 립立을 수袖로 쓰기도 한다.)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은 이렇게 말했다.

 

"마립이란 궐(橛, 서열을 말한다.)을 말하는 방언이다. 궐표(橛標)는 자리에 따라 두는데, 왕궐(王橛)이 주가 되고 신궐(臣橛)은 아래에 두게 되어 있어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삼국사론三國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거서간과 차차웅이라 부른 임금이 각각 한 명씩 있고, 이사금이라 부른 임금이 열여섯 명이고, 마립간이라 부른 임금이 넷 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을 지으면서 모두 무슨 왕[某王]이라 칭하고 거서간이나 마립간 등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 말이 비루하고 거칠어서 일컬을 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롟하면서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 또한 옳은 일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를 갈문왕(葛文王, 신라 시대 임금의 존족尊族과 임금에 준하는 자에게 주던 칭호다.)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 시대에 낙랑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또 천봉(天鳳) 5년 무인년(18년)에 고구려의 속국 일곱 나라가 투항해 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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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금관(金官, 지금의 김해시)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 본래 김해시 호계사에 있었는데, 1873년에 허 왕후릉 곁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전각을 둘러쳐 놓았다.)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의 왕비 허 왕후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년(48년)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陀國, 현재 인도 아요디아 지역에 있었던 나라)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향하려 하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건너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에게 아뢰자, 부왕이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정박했다. 이 배에는 붉은 돛대와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기에 주포(主浦)라 이름했다. 처음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이 처음으로 들어오던 해안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수로왕은 아내를 맞이하여 함께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 당시 해동에는 아직 절을 지어 불법을 받드는 사례가 없었다. 아마도 상교(像敎, 불교의 다른 명칭)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고 이 땅 사람들이 받들지 않았기 때문으로 '가락국본기'에는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년)에 이르러, 그 땅에다 절을 짓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지어(이 일은 아도와 눌지왕 시대에 있었는데, 법흥왕 이전 시대다.) 지금까지 여기서 복을 빌고 남쪽 왜를 진압했다. 이것은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사각형ㅇ데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다. 돌은 약간 붉은 반점 무늬를 띠고 있는데 질이 매우 연하여 이 땅에서 나는 것은 아니다. '신농본초(神農本草, 후한 때 365종의 약이름을 분류하여 지은 책)'에서 닭 벼슬의 피를 떨어뜨려 시험했다는 돌이 바로 이 돌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것은 '가락국본기'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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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나무위키

 

옛 책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 이 무왕은 제30대 무왕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이병도 박사는 무녕武寧의 동의이사同義異寫임을 모르고 쓴 것이라 하여 제25대 무녕왕을 말하는 듯하다고 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조에는 이름이 장璋이고 법왕法王의 아들이며 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수도 남쪽 못 가(南池, 부여군 동남리에 있으며 궁남지라고 한다. 여기서 무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 이병도 박사는 "서동은 내가 아는 바로는 무왕의 아명이 아니라 훨씬 이전의 동성왕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서동이 마를 캐어 팔며 살았던 이유를 왕위 계승과 관련된 권력 투쟁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항상 마(薯蕷)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라고 쓴다.)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고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이재선 교수는 이 동요가 서동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백제에 퍼져 있던 구전 설화를 의도적으로 개작하여 경주 지역에 전파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善化公主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선화 공주님은 남몬래 짝지어 두고

薯童房乙 夜矣 卯乙 抱遣 去如

서동(薯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동요는 수도에 가득 퍼져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백관들은 힘껏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게 했다. 공주가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몰랐으나, 우연한 만남을 기뻐하며 그를 믿고 따라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그러고는 함께 백제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며 앞으로 살아갈 계책을 세우자고 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인데, 한평생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 것이 흙덩이처럼 쌓여 있소."

공주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보물을 부모님의 궁궐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았는데, 마치 구릉처럼 쌓였으므로 용화산(龍華山, 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금을 운반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옮겨 줄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의 궁궐에다 금을 날라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하게 여겨 서동을 더욱 존경했고,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 일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도착했는데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가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간곡한 소원입니다."

 

왕이 절을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법상(彌勒法像) 세 개와 회전(回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미륵사 터가 있는데 4미터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유추할 수 있다.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 불교가 미륵신앙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했다.)라고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돕게 했는데,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삼국사>에 "이는 법왕의 아들이다."라고 했는데 이 전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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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천도 과정/ⓒ우리역사넷

 

부여군(扶餘郡)은 전백제의 수도인데, 혹은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성왕(聖王, 백제 제26대  왕, 재위 523~554) 26년 무오년(538년) 봄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그 지명은 소부리인데, 사비란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고 소부리란 부여의 별칭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제4에는 성왕 26년이 아닌 16년으로 되어 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이유는 고구려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비좁은 웅진熊津보다는 넓은 평지에 기틀을 다지려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

 

또 토지측량대장에는 이렇게 말했다.

"소부리군 농부의 주첩(柱貼, 농사 짓는 일꾼의 대장)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여군이라 말하는 것은 아주 옛날의 이름을 회복한 것이며 이는 백제 왕의 성이 부씨(扶氏)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혹은 여주(餘州)라고도 하는데 군의 서쪽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 승려가 대중에게 설법할 때 앉는 대좌를 말한다.)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통화(統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연호로 983년에서 1012년까지 사용했다.) 15년 정유년(997년) 5월 어느 날 여주 공덕대사수장(功德大師繡帳)."

 

또 옛날 하남(河南)에서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지도책 안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으니,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에는 [후한서]의 말을 인용하여 "삼한은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다."라고 했고, [북사北史,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역사서로 위魏나라부터 수나라까지 역사를 기록했다.]에는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고 서남쪽은 큰 바다와 닿아 있으며, 북쪽 끝은 한강(漢江)인데 그 군(郡)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그 밖에 또 오방성(五方城)이 있다."라고 했다.

 

[통전通典]에는 "백제는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가 위치하고 서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해 있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에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으로 그 동북쪽은 신라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越州)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이 있다."라고 했으며, [신당서新唐書]에는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 건너편이고, 북쪽은 고구려다."라고 했다.

 

[삼국사(삼국사기를 말한다.)] '본기本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북부영에서 난리를 피해 달아나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주(州)의 왕에게는 왕자가 없고 단지 세 딸만 있었다. 왕은 주몽이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부여 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沸流)라고 하고 둘째는 온조(溫祚)라고 했다.

 

두 왕자가 후에 태자(太子, 주몽의 아들로 나중에 유리왕이 되었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과 마려(馬黎) 등 10여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따라갔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도착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말했다.

'오직 하남의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그 천연의 요새와 이로운 땅은 또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 지금의 인천 지역)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이며 풍납토성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때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게 되자 위례성으로 돌아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도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 고쳤다. 그 조상의 계보가 고구려와 똑같이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사비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은 인주仁州며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말했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前漢) 홍가 3년 계유년(기원전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기원전 5년)에 한산(漢山, 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도읍을 옮기고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105년이 지나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고 원휘(元徽, 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유욱劉昱의 연호로 473년에서 477년까지 사용했다.) 3년 을묘년(475년)에 이르러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고, 63년이 지나 26대 성왕에 이르러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이 지났으니, 당나라 현경 5년(660년)이었다. 이때는 의자왕이 즉위한 지 20년으로, 신라의 김유신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여 평정시켰다.

 

백제국에는 옛날부터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 200여 성, 76만 호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당나라에서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를 나누어 두고, 그 추장을 도독부 자사(都督府刺史)로 삼았다. 얼마 후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하여 웅(熊), 전(全), 무(武)의 세 개 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했다.

 

또 호암사(虎巖寺)에는 정사암(政事巖, 지금은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이 있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을 선출할 때 뽑힐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적어서 상자에 넣고 바위 위에 둔다. 얼마 후 상자를 가져다 보고는 이름 위에 인(印)이 찍힌 흔적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정사암이라 한 것이다.(이는 귀족 연합적인 삼국 시대의 정치 성격을 나타내는 실례로서 오늘날의 선거 방식과 비슷하여 주목할 만하다.)

 

사비하 가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바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았기 때문에 바위에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남아 있어서 용암(龍巖)이라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浮山) 등 세 개의 산이 있었는데 나라가 흥성하던 시기에는 각기 신인(神人)이 있어 그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서 왕래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비하 절벽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열 명이 앉을 정도로 컸다. 백제 와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하여 예불하려면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며 절을 했는데,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이름을 온돌석(㷝石, 구들돌, 부여에서 보령 쪽으로 가다 보면 큰 다리를 지나 왼쪽에 있다.)이라 했다.

또 사비하 양쪽 절벽이 마치 병풍을 드리운 듯했는데, 백제 왕이 매일 유희하고 잔치를 베풀어 노래와 춤을 추었기 대문에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부른다. 또 시조인 온조는 바로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서 몸집이 크고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이라고도 한다.)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즉시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간혹 지락(至樂, 경초景初의 오기인데, 경초는 위魏나라 명제明帝 조예曺叡의 연호로 237년에서 239년까지 사용했다.) 3년 기미년(239년)에 사비왕이 죽어 고이왕이 즉위했다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읽기: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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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 복원 모형/ⓒ나무위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옆에 있는 탑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렇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 구름이 땅에 드리워진 것을 보고는 구름 속으로 찾아 들어가 보았더니 어떤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갑자기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났다. 그 옆에는 3층으로 된 탑이 있었는데, 위에 솥을 엎어 놓은 듯하여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가서 승려를 찾아보니 다만 거친 풀만 있었다. 그곳을 한 길가량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발이 나왔고, 더 깊이 파자 명(銘)이 나왔다. 그릇 위에 범서(梵書, 인도 문자인 산스크리트 어로 기록된 글)가 있었는데 모시고 있던 신하가 이 글을 알아보고는 불탑이라 했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대답했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 원래는 휴도왕休屠王으로 쓰는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부처다.)이라 합니다."

이로 인하여 성왕은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고, 그 이후에 불법이 처음으로 전래되자 탑과 불도의 인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탑의 높이가 줄어들고 본래의 탑은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 아소카로, 불교를 굳게 믿었으며 불교의 자취를 따라 곳곳에 탑을 세웠다.)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 옛 인도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인간 사회로 볼 수 있다.)에는 곳곳마다 탑을 세웠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또 당나라 용삭(龍朔) 연간에 요동에서 전쟁이 있었다.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가 정벌했던 요동의 옛 땅에 가서 산에 있는 불상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적막하며 행인의 왕래조차 끊어져 있었다. 한 노인에게 묻자 이렇게 말했다.

'이 불상은 선대에 나타났던 것이오.'

그래서 이것을 그려서 서울로 돌아왔다(모두 '대장경'을 함에 넣고 함의 차례를 천자문의 차례로 표시한 약함若函에 기록되어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으며 한나라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했다.

고구려 성왕이 어떤 임금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왕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紹) 2년(기원전 37년)에 제위에 올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년(기원전 19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에는 한나라도 불경을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해외의 변방 신하가 범서(梵書)를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이라고 불렀으니, 서한 시대에도 필시 서역 문자를 아는 사람이 있어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을 하나씩 세우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염부계(閻浮界, 인도를 말한다.) 안의 8만 4000개 탑을 큰 바위 속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지금 곳곳마다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 하나 둘이 아닌데, 아마도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그 감응을 헤아리기 어렵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육왕(育王)의 보탑(寶塔)은 온 속세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혀 이끼가 끼었구나.

그 당시 길 가던 사람들 눈길을 생각해 보면

몇 명이나 신의 무덤을 가리키며 제사 지냈을까?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 요동성의 육왕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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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문화컨텐츠닷컴

제27대 덕만(德曼/德萬)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불법의 수입에 남달랐으며 경주 남산 신유림에 능이 있다.)이고, 성은 김씨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貞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 사용했으며 치세로 유명하여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말이 있다) 6년 임진년(632년)에 즉위하여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씨앗 세 되를 보내 왔다(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보여 주는 예다). 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

명을 내려 씨를 뜰에 심도록 했더니 그 꽃이 피었다가 질 때까지 과연 그 말과 다름이 없었다(모란꽃이 향기가 없다는 말은 수사적 비유다).

둘째는, 영묘사(靈妙寺, 선덕여왕 즉위 원년인 632년에 세워진 절로 찰간지주刹竿支柱만 남아 있다.)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개구리들이 모여 사나흘 동안 울어 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예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둘러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 여인의 생식기 모양이라는 뜻으로 경주에서 대구로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건산과 아화 사이에 있다.)을 물어보면 그곳에 틀림없이 적병이 있을 테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말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나서 각기 1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에워싸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亏召)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포위하여 활을 쏘아 죽였다. 백제 후원병이 1200여 명이 왔지만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경주 여근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셋째는, 왕이 병도 없을 때인데 모든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이 되면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불가에서 말하는 욕계육천欲界六天의 둘째 하늘이다.) 가운데 장사 지내라."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었다.

"어디입니까?"

왕이 말했다.

"낭산(狼山, 높이가 몇십 미터에 불과한 나지막한 언덕이다. 사천왕사 터와 가까이 있다.)의 남쪽이다."

과연 그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지금의 경주시 배반동에서 불국사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터만 남아 있다.)를 지었다. 불경에 말했다.

"사천왕천(四天王天, 육계육천의 하나로서, 동방은 지국천持國天, 서방은 광목천廣目天, 남방은 증장천增長天, 북방은 다문천多聞天이라 한다.) 위에 도리천이 있다."

이에 대왕이 신령스럽고 성스러웠음을 알게 되었다.

왕이 살아 있을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가지 일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말했다.

"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는 것을 알았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배필이 없는 나를 놀린 것이다.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인의 음부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이 흰데, 흰색은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이러한 해석은 그 당시 신라에 음양오행설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다라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여왕의 그 성스러운 지혜에 감탄했다.

세 가지 색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인가? 세 여왕은 선덕(善德), 진덕(眞德), 진성(眞聖)이니 당나라 황제의 놀라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세운 것에 관해서는 '양지사전(良志師傳)에 모두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선덕여왕 시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경주시 인왕동에 있으며 반월성에서 바라보인다. 첨성대는 평지에 세워져 있어 실제 관측에는 부적당한 구조물이고 선덕여왕 시절에 천문 관측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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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도화녀와 비형랑'/ⓒ한국학중앙연구원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고 성은 김씨다.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태건(太建, 남조南朝 진陳나라 선제宣帝의 연호) 8년 병신년(576년)에 즉위하여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음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을 폐위시켰다.

 

진지왕릉/25대 진지왕과 46대 문성왕이 함께 묻혀있는 무덤/사적 제517호(진지왕릉), 사적 제518호(문성왕릉)/ⓒ경주문화관광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의 민가의 여인이 얼굴이 고와 당시 도화랑(桃花娘)이라 불렸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천자의 위엄이 있다 해도 남편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가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인이 말했다.

"차라리 저자에서 죽어 딴마음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왕은 여인을 희롱하여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는가?"

"됩니다."

그래서 왕은 여인을 놓아 보냈다.

이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고, 2년 뒤에 여인의 남편 역시 죽었다.

열흘 남짓 지난 어느 날 밤에 왕이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여인의 방에 와서 말했다.

"네거 지난번 약속한 바와 같이 이제 네 남편이 죽었으니 되겠는가?"

여인이 좀처럼 승낙하지 않고 부모에게 여쭙자 부모가 말했다.

"임금의 명령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그리고 딸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임금은 이레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 구름이 지붕을 감싸고 방 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레 후 왕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여인이 이로 인해 임신하여 달이 차 곧 해산하려고 하자 천지가 진동했다.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은 아이가 매우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는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다. 열다섯 살이 되자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이 매일 밤마다 먼 곳으로 달아나 놀자 왕이 날랜 병사 쉰명에게 지키게 했다. 그러나 비형은 매일 월성을 넘어 서쪽 황천(荒川, 경성 서쪽, 지금의 경주 남천 하류인데 신원사 터가 보이는 곳이다.) 언덕 위로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날랜 병사들이 숲 속에 숨어서 엿보니, 귀신들이 여러 절의 종소리를 듣고 각기 흩어지면 비형랑 역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군사들이 와서 이런 일을 아뢰니 왕이 비형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는 것이 사실이냐?"

비형랑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경주시 탑정동에 있다.) 북쪽 시내에 다리를 놓아라."

비형은 왕의 명령을 받을어 귀신들에게 돌을 다듬게 하여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그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이 또 물었다.

"귀신들 중에서 인간 세상에 나와 정치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비형이 대답했다.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왕이 말했다.

"데려 오너라."

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나타나자, 왕은 그에게 집사의 벼슬을 내렸다. 길달은 과연 충직하기가 세상에 둘도 없었다.

이때 각각(角干, 신라 관등의 제1위인 이벌찬伊伐飡) 임종(林宗)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은 길달을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길달에게 흥륜사(신라 초기 불교 사찰의 중심으로 진흥왕 5년 544년에 세웠으며 경주시 사정동에 터만 남아 있다.) 남쪽에 누문(樓門)을 짓게 하자, 길달은 매일 밤 그 문 위에 가서 잤다. 때문에 이름을 길달문(吉達門)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둔갑해 도망치자 비형은 귀신을 시켜 붙잡아 죽였다. 그래서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무서워 도망쳤다. 그때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성스러운 임금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세.

날뛰는 온갖 귀신들이여,

이곳에는 함부로 머물지 마라.

 

만간에서는 이 가사를 써 붙여 귀신을 쫓곤 한다.('처용랑과 망해사' 조에도 처용의 얼굴을 붙여 귀신을 쫓았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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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부여는 "은정월(殷正月, 12월), 고구려와 예(濊)는 10월에 각각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온 마을의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며칠 동안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었으며, 마한(馬韓)은 5월 씨뿌리기를 끝냈을 때와 10월 추수가 끝났을 때에 제사를 지내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기를 밤낮을 쉬지 않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고시대부터 노래와 춤을 통해 신에게 감사드리고 풍년을 기원하며 즐거움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에는 신에게 기원하거나 즐거움을 표현하고자 방울 같은 단순한 악기를 흔들며 춤추고 노래했으나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고대 현악기인 '고' 및 완함(阮咸), 비파(琵琶)와 적(笛), 요고(腰鼓), 배소(排簫), 각(角) 등이 등장하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만들어 한민족 특유의 음악을 형성해나갔다.



1. 고구려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는 거문고이다. '삼국사기'에 "진(晉)'에서 7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제2상(第二相) 왕산악(王山岳)이 본래의 모양을 그대로 두고 자못 법제를 개량하여 악기를 만들고, 겸해서 1백 곡을 지어서 연주했다. 그때 현학(玄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지었는데, 후에는 다만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검을 현(玄)', '고 금(琴)'이니 현금은 바로 거문고를 뜻한다. '고'는 현악기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진은 265~419년에 존재했던 중국 왕조이니 거문고 제작연대는 4세기 전후로 볼 수 있다. 음악사학적으로는 고구려에 아무런 현악기가 없는 상태에서 중국 7현금을 보고 갑자기 거문고를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어떤 현악기가 있는 상태에서 7현금의 영향으로 거문고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고 있다.

완함/ⓒ두산백과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거문고 외에 완함, 종적(縱笛), 횡적(橫笛), 요고, 각, 배소 등의 악기가 보인다. 완함은 몸체가 둥글고 목이 긴 현악기인데, 타클라칸 사막 북쪽에 위치한 쿠차에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류트 종류를 바탕으로 재창조한 악기고, 뿔나팔인 각과 대나무관을 옆으로 나란히 묶은 배소는 북방유목민의 고취(鼓吹)에 편성되던 악기이다.

고구려 벽화 오회분제5호묘/ⓒ문화콘텐츠닷컴



요고는 세요고(細腰鼓)를 줄인 말로 '허리가 잘록한 악기', 즉 장구와 같은 것인데, 오른쪽 면은 채로 치고 왼쪽 면은 손으로 두드리는 장구와 달리 양쪽 면을 모두 손으로 친다. 서역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악 3호분의 다리를 X자 모양으로 하고 두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춤추고 있는 무용수는 콧대가 높고 이국적인 복장을 한 것으로 미루어 서역의 무용수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는 거문고 외에 서역에서 들어온 악기들이 다수 있었다.



2. 백제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의 뚜껑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배치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으며, 봉황과 일직선상의 아래인 중앙에 완함이 있고, 왼쪽으로 종적과 배소(排簫), 오른쪽으로 북과 거문고(혹은 가야금 종류)가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백제 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3. 신라
신라의 대표적인 악기는 가야금이다. '삼국사기'에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고 나서 우륵에게 12곡을 짓도록 하였다. 우륵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서 악기를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재위 540~576)에게 의탁하니, 진흥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 충주의 옛 이름)에서 편히 살도록 하고서 곧 주지, 계고, 만덕을 보내서 그 업을 전수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국원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으로 알려져 있는 탄금대가 있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 "변진(弁辰)에 슬(瑟)이 있는데 그 모양은 축(筑)과 비슷하다.:고 하여, 변진지역에 중국의 슬이나 축이 아닌 어떤 현악기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슬은 25현의 현악기이고 축은 대쪽(竹片, 대를 갈라 쪼갠 조각)으로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13현의 현악기이다. 따라서 음악사학적으로는 가실왕이 변진지역에 있었던 기존의 고대 현악기를 개량하여 가야금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보 195호 토우장식 장경호/ⓒ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95호 토우장식 장경호/ⓒ국립중앙박물관


또한 경주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장경호(長頸壺, 4~5세기 경으로 추정)에 표현된 임산부의 현악기 연주모습에서 보듯이 신라에 가야금을 받아들인 6세기 중엽 이전에 '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해왕 17년(212)에 물계자가 나라의 환란에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산속에 들어가 은거하며 탔다는 금(琴)과 자비왕(재위 458~479)때 백결선생이 세모(歲暮)에 방아를 찧을 거리가 없어 슬퍼하는 아내를 위로하고자 방아 찧는 소리를 내며 탔다는 금(琴)은 거문고나 가야금이 아닌 바로 변진지역에 있었던 고대 현악기이다.

신라에는 고대 현악기 '고'와 가야금 이외에 비파와 종적도 있었다. 4~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우에 그 연주모습이 나타나 있다.



4.통일신라시대

삼국이 통일된 뒤에 삼현(三絃,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삼죽(三竹, 대금, 중금, 소금), 박(拍), 대고(大鼓)가 연주되었다.

당과의 활발한 교류로 통일신라에 당악(唐樂)이 들어왔고, 그 영향으로 삼현 삼죽에 반섭조(般涉調), 봉황조(鳳凰調)와 같은 당악의 악조가 쓰이기도 하였다. 당악기로는 725년(성덕왕 24)에 조성된 상원사 범종에 공후, 생, 쟁, 당적, 요고, 당피리, 당비파 등이 보이고, 883년(헌강왕 9)에 건립된 경북 문경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에 생, 당적, 당비파, 동발, 당피리, 박 등이 보인다.

와공후/ⓒ한국학중앙연구원


당악과 구분하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로 향악(鄕樂)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이란 한시에는 서역에서 유래한 춤과 음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당악이 유입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역음악과 춤이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향악으로 불린 것이다. <향악잡영>중 하나인 월전(月顚)은 서역 우전국(지금의 Khotan)에서 전래한 탈춤의 일종이며, 또다른 하나인 속독(束毒)은 서역 소그디아나제국에서 유래한 춤이다.


<월전>

어깨는 올라가고 목은 움츠렸으며 상투는 우뚝 솟았네.

팔 걷어붙인 뭇 선비들 요란하게 잔을 부딪히네.

노랫소리 들리자 한바탕 웃음소리

밤새 휘날린 깃발이 새벽을 재촉하는구나.


<속독>

고수머리와 남빛 얼굴의 낯선 사람들이

데를 지어 뚤에 와서 난새 같이 춤을 추네.

북소리 둥당둥당 바람은 살랑살랑

남북으로 뛰놀면서 끝없이 춤추네.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권도희 김성혜 이지선 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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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과 세오녀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내용이 없으나 고려초기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에 실려있다.


[사진 삼국유사 권1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한국학중앙연구원]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년 정유년(157년)에 동해 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로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하나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제기를 살펴볼 때, 이때를 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그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알리고 세오녀를 왕께 바쳤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렸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사진 포항 호미곶 연오랑과 세오녀상/국정브리핑]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자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짐의 비(妃)가 짜 놓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오랑이 준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했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은 영일현(迎日懸)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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