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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경산의 자취 압독국(押督國)

 

1. 압독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압독국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경까지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삼한 중 '진한(辰韓)'에 속한 자립적인 소국이었습니다. 위치는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이며, 풍부한 철 자원과 농경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했습니다.
'압독(押督)'이라는 국명은 중국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진한 12국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압량소국(押梁小國)이라고도 불렸으며, 압押은 '누르다', 량梁은 '돓'의 음차로 보아 고대 한국어는 '누르돌ㆍ누르독' 정도로 추정하며, 길게 늘어진 형태의 지형을 뜻하는 '누런 들 ㆍ누런 터' 등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압독국의 위치 및 영역

 

 

2. 정치 및 사회 구조

 

임당 1A호 주곽 출토유물 ‘금제 귀걸이’/출처 : 경북일보(https://www.kyongbuk.co.kr)


● 부족 연맹체 성격 : 왕 혹은 족장 중심의 지배 체계를 가진 소국으로,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연맹 형태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계급 구조 존재 : 고분(무덤) 규모 차이, 부장품의 다양성으로 볼 때, 귀족층과 평민층의 구분이 뚜렷했습니다.
 철기 무기, 마구류가 다수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군사력도 상당했으며, 주변 국가들과 교류 또는 경쟁 관계였을 수 있습니다.

 

 

3. 경제와 문화

 

압독국 유물 ⓒ경산시청


 철기 문화가 발달하여, 당시 다른 진한 소국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기술력이 높았던 국가로 추정됩니다.
● 발견된 유물 :
*세형동검, 철촉, 철제 말갖춤(마구) 등 → 전쟁과 말타기에 능숙했던 사회.
*토기, 장신구, 청동기 등 → 미술과 공예 발달.
 교역 중심지 역할 : 낙동강 유역의 내륙 교통로에 위치해 다른 진한 소국, 변한, 심지어 일본 열도와도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4. 고분군과 유적

 

임당동 고분군 ⓒ경산시청


 임당동·조영동 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 이 고분들에서는 왕족 혹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형 석실분(돌방무덤)들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는 귀중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국립경산박물관에서는 이 유물들을 직접 볼 수 있으며, 압독국이 단순한 부족이 아니라 고도로 조직된 국가였음을 보여줍니다.

 

5. 신라와의 관계

 

임당동 고분군 임당7A호 출토 금동관 ⓒ경산시청

 


● 4세기 초~중반, 신라(사로국)가 진한 지역을 병합하면서 압독국도 자연스럽게 신라에 흡수됩니다.
● 이후 경산 지역은 신라 귀족 출신들의 거주지가 되며, 문화와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 압독국 고분은 신라 귀족문화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압독국(押督國) 요약

시기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4세기
위치 경북 경산시
성격 진한 12국 중 하나, 철기 문명 기반의 자립 국가
특징 철기 문화 발달, 왕족 중심의 사회, 고분 유적 다수
역사적 의의 신라 형성 과정의 핵심적 기반

 

 

압독국은 단순한 지방 소국이 아니라, 신라의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고대 왕국입니다.
그 문화적 깊이와 역사적 가치는 오늘날 경산 일대 유적에서 계속 발굴되고 있으며, 우리 고대사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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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

진한(辰韓) 또는 진한(秦韓) 이라고도 한다.



[사진 경주 입실리 출토 세형동검 진한시대의 유물인 세형동검, 동과, 동모. 경주 입실리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고 서로 불러 무리를 이루었는데, 진나라 말과 유사하여 간혹 진한(秦韓)이라 했다고 한다. 열두 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 모두 1만호씩이고 각기 나라라 일컬었다."

 또 최치원은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들이 피신해 온 곳이다. 때문에 탁수(琢 水)의 이름을 취해 살고 있는 읍과 마을을 사탁(沙琢), 점탁(漸)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을 도로 발음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때로 사량(梁)이라 쓰고, 양(梁) 역시 '도'로 읽는다." 

 신라는 전성기에 서울이 17만 8936호였고,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金入宅)-부유하고 윤택한 큰집이 있었다. 그것은 남택, 북택, 오비소택, 본피택, 양택, 지상택, 재매정택,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 한기택, 비혈택, 판적택, 별교택, 아남택, 금양종택, 곡수택, 유야택, 사하택, 사량택, 정상택, 이남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 임상택, 청룡사, 교남택, 항질택, 누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 등이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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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과 백제

남부여라고도 하며 곧 사비성이다.





 신라시조 혁거세가 자리에 오른지 19년 임오년에 변한( 卞韓)사람이 나라를 바쳐 투항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다."

 최치원이 말했다.

 "변한은 백제(百濟)다."

 '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다. 에 의하면, 온조가 일어난 것은 홍가( 鴻嘉)-서한 성제 유경의 연호다. 4년 갑진년(기원전 17년)이었으니, 혁거세나 동명왕의 세대보다 40여년 뒤의 일이 된다.

 '당서'에서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라고 말한 까닭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뿐이다. 간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에서 나와 변한에 나라를 세워 마한 등과 대치한 적이 있었다고 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던 일로, 도읍이 낙랑의 북쪽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이는 구룡산(九龍山) 역시 변나산(卞那山)으로 불렀다는 이유로 함부로 고구려를 변한이라 하는데, 이는 아마도 잘못된 것이다. 마땅히 옛 현인(최치원)의 견해가 옳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백제 전성기에 15만 2300호였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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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초기 여러나라의 성장과정/두산백과]


 마한(馬韓)

 '삼국지( 三國志) 위지(魏志)' 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국지 위지는 진(晉)나라 역사가 진수(陳壽)가 편찬한 위, 촉, 오 삼국의 정사 '삼국지' 중 위나라 부분으로 '위서(魏書)'가 정확한 말이다. 여기에 마한 50여 국의 이름이 있으며 백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 왕 준(準)은 궁중 사람들과 측근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나라 땅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

 견훤(甄萱)이 태조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습니다.(금마산은 지금의 전북 익산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다.

 (삼국사기 본기에 이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 준(準)을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마한을 합병했음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간혹 금마산을 마한으로 알고 백제라고 하는 것은 잘못되고 황당한 일이다. 고구려 땅에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사이(四夷)는 구이(九夷)와 구한(九韓), 예(穢), 맥(貊)이 있으니,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했다."라고 한 것은 동이족 즉 구이를 말한 것이다.(사이四夷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일컫는다. 직방씨는 주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천하의 지도와 토지에 관한 일을 했다.)

 '삼국사(三國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주(溟州)는 옛날 예국(國)이었는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印章)을 얻어 바쳤다."

 또 이렇게 말했다.(명주는 지금의 강릉이다.)

 "춘주(春州)는 옛날 우수주(牛首州)며 옛날의 맥국인데, 어떤 이는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 한다."(삭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

 '회남자(淮南子)'의 주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이(夷)는 아홉 종류나 있다."

 '논어정의(論語正義)'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구이란 첫째 현도, 둘째 낙랑, 셋째 고려, 넷째, 만식(滿飾), 다섯째 부유(鳧臾), 여섯째 소가(素家), 일곱째 동도(東屠, 여덟째(倭), 아홉째 천비(天鄙)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해동안홍기는 신라의 승려 안홍이 지은 책이다.)

 "구한이란 첫째 일본, 둘째 중화(中華), 셋째 오월(吳越), 넷째 탁라, 다섯째 응유(鷹遊), 여섯째 말갈(靺鞨), 일곱째 단국(丹國), 여덟째 여진(女眞), 아홉째 예맥(貊)이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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