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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八公山)은 신라시대 부악, 공산 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산으로 부르다가 후에 지금의 팔공산이라 불렀다. 팔공산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려태조 왕건과 충신 8명과 관련된 설, 그리고 원효대사가 8명의 중국 승려를 득도시킨 것과 관련된 설, 중국의 지명에서 따왔다는 설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팔공산 주변에 전해지는 왕건과 관련된 여러 지명의 유래로 보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과 그 휘하 충신 8명과의 인연으로 이름 붙여진 것이란 설이 보다 힘을 받는 전설로 전해진다.


팔공산(八公山)

대구광역시 동구와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신녕면, 군위군 부계면에 걸처 있는 산.

(비로봉 해발 1,192.3m)




후삼국 중 고려와 백제의 전투가 한창이던 시기인 927년 팔공산 아래 현재의 파군재(파군재는 왕건의 군대가 대패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에서 먼저 진을 치고 기다리던 백제 견훤의 군대에 완전히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을 당시 충신 신숭겸과 7명의 장수가 왕건을 피신시키고 대신해 싸우다 전사한다. 이 때 왕건은 신숭겸과 옷을 바꿔 입고 적진을 빠져나와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게 되는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지명에 대한 전설은 왕건과 관련된 것이 많다.


[공산전투/문화콘텐츠닷컴]


파군재 삼거리 북쪽에 위치한 산이 왕산인데 왕산은 왕건이 잠시 머물렀던 산이라 그 이름이 '왕산'으로 불린다 하고, 파군재 아래쪽에 위치한 '지묘동'은 도망치는 왕건을 지혜로운 계책으로 도움을 주어 살아갈 수 있게 한 동네란 뜻으로 전해지며, '독좌암'은 왕건이 도망치며 잠시 쉬어갔다 하여 붙여진 지명, '연경'은 왕건이 지나갈 때 사람들의 글 읽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 그리고 위기를 모면하고 탈출에 성공한 왕건이 현재의 안심동 지역에 와서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하여 '안심'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 '반야월'은 왕건이 도망갈 때 반달이 비추어 줘 무사히 도착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곳, '해안'은 패퇴하던 왕건의 걱정스런 얼굴이 비로소 편안해진 곳이라고 한다. 대구 남구의 앞산 '은적사'는 왕건이 몸을 숨겼던 곳, '장군수'는 왕건이 숨어 몰래 물을 마셨던 곳, '왕굴'은 3개월 가량 왕건이 숨어지냈던 곳, '안일사'는 패퇴후 참담한 심정에서 벗어나 마음을 누그러뜨고 편히 쉬었다 간 곳, '임휴사'는 왕건이 마지막으로 쉬어갔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로 미루어 짐작컨데 팔공산이란 지명은 태조 왕건과 그를 따르던 휘하 8명의 충신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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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불국사/경주시>


<사진 석굴암/경주시>


먼 옛날 신라시대 신문왕 때입니다.

모량리라는 마을에 대성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 갔지만, 효심도 지극하고 바른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흥륜사의 한 스님이 보시를 받으러 집에 오셨습니다.

보시 할 것이 없던 가난한 대성은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품삯으로 받은 집 근처의 작은 밭이 하나 있어요. 그걸 보시하고 싶습니다."

스님은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며칠 후 대성은 이유 없이 앓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대성이 죽던 날 신라의 재상인 김문량은 아내와 집 앞 마당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불호령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량리에 살았던 김대성이 너의 집에 태어나리라"


김문량은 놀라워하며, 아내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내는 갑자기 입덧을 하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김문량의 집에 태어난 대성은 어느새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청년이 된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사냥을 나간 토함산 기슭에서 곰 한마리를 만났습니다. 자신보다 큰 몸집을 가진 곰을 사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대성은 사냥에 성공합니다.

그는 사냥에 지친 팔다리를 쉴 겸 사냥한 곰을 옆에 두고 그늘에 잠시 누웠습니다.

'큰 곰을 사냥했다고 하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대성은 흐뭇한 마음으로 누워 있다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곰이 피를 흘리며 잡아먹겠다며 무섭게 으르렁 거렸습니다.

대성은 두려움에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곰이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살려 줄 터이니, 나를 위해 절을 하나 지어 줄 수 있겠소?"



대성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대성은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김대성은 이후 곰을 사냥했던 그 장소에 장수사라는 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 일로 깨달음을 얻은 김대성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무언가 나도 보답을 해야 해"




김대성은 현생이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지었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불사(지금의 석굴암)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이 부모님에 대한 효심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김대성의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설화는 실제로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조(大成孝二世父母條)에 전하는 이야기 입니다./출처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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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충북 괴산군 불정면 달천(달래강)/두산백과사전]



달래강(고개)전설
충주의 한 산골에 부모를 여의고 의좋게 살아가는 오누이가 있었다.
오누이는 산에서 생산한 여러 식물과 땔감 등을 장날에 내다팔아 살았다.
하루는 오누이가 장에 다녀오는데,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억수처럼 퍼부었다.
늘 건너다니넌 달래강에 물이 불어 건너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남동생이 누이를 등에 업고 달래강을 어렵게 건넜다.
그런데 비에 흠뻑 젖은 누이의 탐스런 몸을 보고 그만 동생이 잠깐 이상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길을 가다가 정신을 차린 동생이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하며 누이를 먼저 가라했다.
동생이 따라오지 않자 누이가 되돌아가 동생을 찾았다.
동생은 죄의식 때문에 바위 아래에서 돌로 자신의 음경을 내리쳐 자결하고 말았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알아챈 누이가 죽은 동생을 안고 "죽기는 왜 죽어, 한번 말이나 해보지. 달래나 보지."하면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이후로 그 강을 달래강(達川)이라고 한다.
[전설속 달래강(달천)은 충북 괴산읍과 충주시를 흐르는 하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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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주 오릉(五陵)/네이버지식백과]


 신라시조 혁거세왕의 죽음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이레 후에야 유해가 흩어져서 땅 위로 떨어졌고 왕후 역시 작고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합해서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더니 큰 뱀이 쫓아다니면서 금(禁)하므로 다섯 부분을 다 각각 장사 지내어 다섯 능으로 되었다. 또 사릉(蛇陵)이라고 부르니 담엄사 왕릉이 바로 그것이다.[삼국유사/권1 기이 신라시조 혁거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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