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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감호를 주제로한 전래동화책(호랑이 처녀의 사랑/강숙인 글, 김종민 그림)/ⓒ교보문고

 

김현감호(金現感虎) :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

 

신라 풍속에 해마다 음력 이월(仲春)이 되면 초여드렛날에서 보름날까지 서울의 남녀들이 다투어 흥륜사(興輪寺, 법흥왕 때 신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절로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지금은 1980년대에 새로 지은 절이 있다.)의 전탑을 돌면서 복을 빌었다. 원성왕(元聖王, 신라 제38대 왕, 재위 785~798년)에 화랑 김현(金現)이 밤이 깊도록 혼자 쉬지 않고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이때 한 처녀가 염불을 외면서 뒤따라 돌다가 서로 눈길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탑돌이를 마치고는 조용한 곳으로 가 정을 통했다. 처녀가 막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려 했다. 처녀가 사양했으나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김현감호를 주제로한 전래동화책(호랑이 처녀의 사랑/강숙인 글, 김종민 그림)/ⓒ교보문고

 

서산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으로 들어갔는데, 노파가 있어 처녀에게 물었다.

"따라온 사람이 누구냐?"

처녀는 사실 대로 말했다.

노파가 말했다.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없었던 것만 못하구나.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어쩌겠느냐? 은밀한 곳에 숨겨 주어라. 네 오라비들이 나쁜 짓을 할까 걱정된다."

처녀는 김현을 구석진 곳에 숨겨 주었다.

 

얼마 후 호랑이 세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오더니 사람의 말로 얘기했다.

"집에서 비린내가 나니 요기를 했으면 좋겠다."

노파와 처녀가 꾸짖었다.

"너희들 코가 어떻게 되었구나. 어찌 미친 소리를 하느냐?"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남의 생명을 빼앗기를 좋아하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행을 징계하겠다."

세 호랑이가 이 말을 듣고 모두 근심하는 빛을 띠자 처녀가 말했다.

"만약 세 오라비가 멀리 피해 스스로 뉘우친다면 제가 대신 그 벌을 받겠습니다."

 

모두 기뻐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도망갔다.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했다.

"처음에 저는 낭군께서 저희 집에 오시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오지 못하게 했던 것인데, 지금은 숨길 것이 없으니 감히 속마음을 털어놓겠습니다. 비록 제가 낭군과 같은 부류는 아니지만 하룻밤의 즐거움을 같이 했으니 그 의리는 부부의 결합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 오라비의 악행을 이미 하늘이 미워하니, 우리 집안의 재앙을 제가 감당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에 죽어 은혜를 갚는 것과 한가지겠습니까? 제가 내일 거리로 들어가 사람을 심하게 해치면 나라 사람들은 저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께서는 반드시 높은 벼슬을 내걸고 저를 잡으려 할 것입니다. 그때 낭군께서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 북쪽 숲 속으로 오시면 제가 낭군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이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귀는 것은 인륜의 도리지만, 다른 부류와 사귀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운명인데,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서 요행으로 한세상의 벼슬자리를 바라겠습니까?"

 

여인이 말했다.

"낭군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지금 제가 일찍 죽는 것은 하늘의 명이고 저 또한 바라는 바입니다. 낭군의 경사고 우리 가족의 축복이며 온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하나가 죽어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게 되는데 어찌 꺼려하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해 절을 짓고 강론하여 좋은 업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게 해 주시면 낭군의 은혜는 더없이 클 것입니다."

 

김현과 처녀는 서로 울면서 헤어졌다.

다음 날 과연 사나운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사납게 해치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원성왕은 그 소식을 듣고는 명을 내렸다.

"호랑이를 잡는 사람에게는 2급의 벼슬을 주겠다."

김현이 궁궐로 가서 아뢰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원성왕은 벼슬을 내리고 그를 격려했다.

김현이 칼 한 자루를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니, 호랑이는 처녀로 변신하여 웃으면서 말했다.

"어젯밤 낭군과 함께 은근히 나눈 말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제 발톱에 다친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 곧 나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처녀가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찌르자 바로 호랑이가 되었다. 김현이 숲에서 나와 말했다.

"지금 여기에서 호랑이를 쉽게 잡았다."

김현감호를 주제로한 전래동화책(호랑이 처녀의 사랑/강숙인 글, 김종민 그림)/ⓒ교보문고

 

사정은 말하지 않고 단지 호랑이가 일러 준 대로 사람들을 치료하게 하니, 그 상처가 모두 나았다. 지금 풍속에서도 호랑이에게 입은 상처는 이 방법으로 치료하고 있다.

 

김현은 등용된 후 서천(西川) 가에 절을 세우고 호원사(虎願寺, 현재 경주 황성공원에 터가 남아있다.)라 했다. 항상 <범망경(梵網經, 색계 제4천인 마혜수라대범천궁(摩醯首羅大梵天宮)에 있는 그물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경전의 이름이다. 알려져 있기를 욕계 도리천 제석천궁에는 인타라망(帝網)이란 그물이 있고 색계 대범천궁에는 범망이라는 그물이 있다 한다.-불교신문>을 강론하여 호랑이의 명복을 빌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어짊을 이루어 준 은혜를 갚았다. 김현이 죽을 즈음에 전에 있었던 이상한 일에 매우 감동하여 전기를 적었으므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 기록을 <논호림(論虎林)>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경주 황성공원 호원사터/ⓒ황성신문

 

정원(貞元, 당나라 덕종德宗 이괄李适이 785년~805년 8월까지 사용한 세번째 연호이자 마지막 연호) 9년(793년)에 신도징(申屠澄, 신도징은 불교와는 큰 관련이 없는 인물로 다음 이야기는 송나라 원래 태평광기太平廣記 429권에 실려 있던 것이다.)이 야인(野人)으로 서 한주(漢州)의 십방현(什邡縣, 중국 촉한 유비의 본거지였던 사천성의 작은 현)의 현위가 되어 부임지로 가는데, 진부현(眞符縣) 동쪽 10리 남짓 되는 곳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갑자기 눈보라와 매서운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길가에 초가집이 있어 들어가니 안에 불이 피워져 있어 매우 따뜻했다. 등불이 켜진 곳으로 가 보니 늙은 부부와 처녀가 불 가에 둘러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 처녀는 열네댓 살쯤 되어 보였다. 비록 헝클어진 머리와 때묻은 옷을 입었지만 눈처럼 하얀 살결에 볼이 꽃처럼 부드럽고 몸가짐이 고왔다.

 

노부부는 신도징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 말했다.

"손님이 추위와 눈을 무릅쓰고 왔으니, 앞으로 오셔서 불을 쬐시지요."

 

신도징이 한참 동안 앉아 있었으나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눈보라가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이 말했다.

"서쪽 현까지 가기에는 아직도 머니 여기서 자고 가게 해 주십시오."

노부부가 말했다.

"진실로 초가집이 누추하다고 여기시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신도징이 말안장을 풀고 이부자리를 폈다.

그 처녀가 바르고 단정한 손님의 행동을 보고는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장막 속에서 나오는데, 아름다운 자태가 처음보다 훨씬 더했다. 신도징이 말했다.

"어린 낭자의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납니다. 다행히 미혼이라면 감히 청혼을 하고 싶은데 어떠하십니까?"

노부부가 말했다.

"뜻밖의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정해진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신도징은 사위의 예를 올리고 타고 온 말에 여자를 태우고는 길을 떠났다.

부임지에 가 보니 봉록이 매우 적었지만 아내가 힘써 일하여 집안을 꾸려 나갔으므로 항상 마음에 즐거운 일뿐이었다. 그 후 임기가 끝나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1남1녀를 두고 있었다. 아이들이 매우 총명하였으므로 신도징은 안래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했다.

 

일찍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렇다.

 


한 번 벼슬하니 매복(梅福, 한나라의 학자로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처자를 버리고 구강九江으로 가서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에게 부끄럽고,

삼 년이 지나니 맹광(孟光, 중국 동한의 양홍梁鴻이라는 학자의 아내이며, 중국 고대 4대 추녀 중 한 사람이지만 어진 아내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에게 부끄럽다.

이 정분을 어디에 비유할까.

시냇가에 원앙새는 날아다니는데.


그의 아내는 종일 이 시를 읊조리며 화답하는 듯했으나 소리 내어 읊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오려 하자, 아내가 갑자기 슬픈 기색으로 신도징에게 말했다.

"이전에 시 한 편을 주셨으니 화답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읊었다.


금실 같은 정이 비록 중하다 하지만

숲 속의 뜻이 절로 깊다.

시절이 변하는 것을 언제나 근심하고

백 년을 함께 살 마음 저버릴까 저어하네.


그 후 함께 예전에 아내가 살던 집을 찾아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매우 그리워하며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벽 모서리에 호랑이 가죽 한 장이 있는 것을 보더니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 있을 줄 몰랐다."

 

아내가 그것을 재빨리 뒤집어쓰자 호랑이로 변해 으르렁거리며 할퀴다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신도징이 놀라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간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며 며칠 동안 통곡했으나 끝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오호라! 신도징과 김현이 사람이 아닌 종류를 접했을 때 사람으로 변해 아내가 된 것은 같으나, 신도징의 호랑이가 사람을 저버리는 시를 주고 나서는 울부짖으며 할퀴며 달아난 것이 김현의 호랑이와는 다르다. 김현의 호랑이는 부득이해서 사람을 해쳤으나 좋은 약방문으로 사람을 구했다. 짐승도 그처럼 어질었는데 지금 사람으로 태어나 짐승만도 못한 자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의 앞뒤를 꼼꼼히 살펴보면, 절을 도는 중에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이 악행을 징계하려 하자 자신이 대신했다. 또 신기한 방법을 전하여 사람을 구했고, 절을 세워 불계(佛戒)를 강론하게 했다. 비단 짐승의 성품이 어질었을 뿐만 아니라 대개 부처가 미물에 감응하는 방법이 여러 방면이어서 김현이 정성껏 탑을 돌자 감응하여 보답하고자 한 것이니, 그때 복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산골집 세 오라비의 악행이 모질어도

고운 입에 한 번 맺은 가약 어찌 감당하리.

의리의 중함이 몇 가지 되니 만 번 죽음도 가벼이 여기고,

숲 속에서 맡긴 몸은 떨어지는 꽃처럼 없어졌네.

 

-삼국유사 권제5, 감통(感通)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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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이 1978년에 제작한 원효대사 영정/ⓒ국립현대미술관

 
성사(聖師) 원효(元曉)는 세속의 성이 설씨(薛氏)고,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며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원효의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일대이며, 설총과 일연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지금의 경산시 남산면에는 삼성현(원효, 설총, 일연)을 테마로 하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어있다.) 남쪽 불지촌(佛地村)의 북쪽 밤골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불지촌은 간혹 발지촌(發知村-속어로는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고 한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명의 음운학적인 이유와 설총의 생가가 있었던 유곡동이 바로 이웃마을이라는 것, 그리고 근처 당음동이 원효의 탄생지라는 전설이 남아 있는 것 등을 들어 현재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 부근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분홍, 「원효행장신고-재의수칙의 시론」, ≪논문집≫ 4, 마산대학, 1082, 293쪽))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라는 것을 세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원효와 설총이 살던 마을 유음곡동(지름골) 전경/ⓒ경산인터넷뉴스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원효대사 영정/ⓒ범어사

 
"법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배어 달이 찼는데 마침 이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었다. 급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놓고 그 안에 누워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다. 그 나무의 열매 또한 보통 것과는 달라서 지금까지도 사라율(裟羅栗)이라고 부른다."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전경/ⓒ경산시문화관광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어떤 절의 주지가 종에게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자 종이 적다고 관아에 소송했다. 관리가 괴이하게 여겨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니 한 알이 사발 하나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그래서 밤나무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의 원효대사 기념물/ⓒ경산시문화관광

 
법사가 출가하고서 그 집을 내놓아 초개사(初開寺)라 이름 짓고, 나무 옆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불렀다.
 
범사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는 할아버지의 사적을 좇은 것이다."라고 했으나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경산 초개사 전경(신림사)/ⓒ경산인터넷뉴스

 
이를 살펴보면, 인덕(麟德, 664년~665년까지 사용한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 2년 사이에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했는데, 하주는 바로 지금의 창녕군(昌寧郡)이다. 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속한 현이며,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로 간혹 상주(湘州)라 쓰기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慈仁縣, 757년부터 1895년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으로 현재 경산시의 정중앙에 있는 면이다. 원래 경주부의 속현이었으나 분리되고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전까지 경산, 하양, 자인 중에서 자인군의 중심을 맡은 곳이었으며 2020년 1월 1일 압량면이 압량읍으로 승격되면서 경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면이 되었다.)에 속하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것이다.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의 원효대사 기념물/ⓒ경산시문화관광

 
법사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고 또 다른 이름은 신당(新幢, 여기서 당幢은 세속에서 털毛이라고 한다.) 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똥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는데, 출산을 하게 되자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이때가 진평왕 39년인 대업(大業, 605년~618년까지 사용한 수나라 양제煬帝 양광楊廣의 연호) 13년(617년) 정축년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스승을 좇지 않고 혼자 배웠는데, 그가 사방을 떠돌던 시말(始末)과 성대하게 편 포교의 자취들은 모두 <당전(唐傳)>과 그의 행장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 다 기록하지 않고, 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대사가 어느 날 일찍이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誰許沒柯斧
누가 내게 자루(남성을 상징) 없는 도끼(여성을 상징, 파계승을 암시, 자루 없는 도끼는 과부를 상징)를 주려는가
我斫支天柱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 무열왕이 이 말을 듣고는 말했다.
"이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現경주향교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 궁궐에 딸린 구실아치, 궁궐의 일을 맡아 보던 사람)를 시켜 원효를 불러 오게 했다. 궁리가 왕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보니, 이미 남산을 거쳐 문천교(蚊川橋, 남천을 건너 요석궁으로 가던 다리로 지금도 경주에 그 터가 남아 있다.)를 지나고 있었다.

경주향교/ⓒ경주시문화관광
경주향교/ⓒ경주시문화관광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 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다 가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책에 널리 통달했으니, 신라의 10현(賢) 중 한 사람이다. 방음(方音, 한자의 음이나 훈을 가져와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나 향찰식 언어)으로 중국과 신라의 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 유학에서 중시한 여섯 가지 경전으로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춘추(春秋)를 가리킨다.)과 문학에 토를 달고 풀이했으니, 지금도 신라에서 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고 있다.

설총 영정/ⓒ국립현대미술관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부터 속인의 이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매우 낮은 사람)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瓠)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으므로 그 셩상을 따라 도구(道具)를 만들었다. <화엄경(華嚴經)>의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마음에 거릴낄 것이 없는 사람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 도를 이룬다.-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㝵人一道出生死)" 라는 구절을 따서 무애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원효는 이것을 지니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뽕나무 농사 짓는 늙은이나 옹기장이, 무지몽매한 무리에게도 모두 불타의 이름을 알리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으니, 원효의 교화가 컷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태어나 인연 맺은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의 이름을 초개사라 했으며, 스스로 원효라 부른 것은 아마도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의미다. '원효'라는 이름 역시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은 향언(鄕言, 우리말)으로 '새벽'이라고 했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0 <회향품(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꺾었다. 또 송사 때문에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니 모두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 보살이 수행하는 오십이 계위 중 십 지위의 첫 단계인 환락지歡樂地를 말한다.)라고 했다. 또 바다 용의 권유로 길가에서 조서를 받들고 <삼매경소(三昧經疎)>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 원효의 불교를 뜻하는 것으로,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본각(本覺, 각이 모든 중생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는 뜻)과 시각(視覺, 어떤 계기를 만나 그 본타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경우)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 이 또한 음을 알아 화답하여 부른 것이었다.

국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경주시문화관광

 
그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참 얼굴(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슬픔의 뜻을 표했다. 그때 설총이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채 그대로 있다. 일찍이 원효가 거주하던 혈사(穴寺, 바위 구멍, 석굴, 토굴 등 수행자가 수행하던 곳)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각승초개삼매축 角乘初開三昧軸
 각승으로 처음 삼매축을 열었고
무호종괘만가풍 舞壺終掛萬街風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에 유행했네.
월명요석춘면거 月明瑤石春眠去
달 밝은 요석궁 봄의 꿈은 지나가고
문엄분황고영공 門掩芬皇顧影空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그림자가 공하다.

 
-삼국유사 권 제4, 의해(義解)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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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 대성동 고분군/ⓒ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추친단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추친단

 
한국고대사 연구자인 김태식 교수에 의하면 '가락국기' 조는 원래 고려 문종(文宗) 후반의 문인이 편찬한 것을 일연이 줄여 쓴 것이라고 한다. 이 조는 수로왕 신화를 시작으로 400년 정도 지속된 가야에 관한 내용으로 단편적인 <삼국사기> 기록에 비해 상세하게 밝혀 나가고 있어 가야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가락'은 가야(伽耶), 가야(加耶), 가라(加羅)라고도 하며, 북방의 부여(扶餘)계 언어에 속한다.

 
문종조(文宗朝, 고려 제11대 왕) 대강(大康, 요나라 도종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가 1075년~1084년까지 사용한 연호)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였던 문인이 지었는데, 여기에 그 개략적인 것을 싣는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이 땅에 아직 나라의 칭호가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 추장들이 백성을 아울러 다스렸으니, 모두 100호(戶는 하나의 고을과 비슷한 규모이며, 마을이나 씨족 집단을 뜻한다.)에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이 저마다 산과 들에 모여 살았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42년) 3월 계욕일(禊浴日, 재앙을 물리치고 몸을 강물에 씻어 깨끗이 하는날로, 몸을 깨끗하게 하여 액땜을 하고 다같이 모여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는 날을 뜻한다. 대부분 3월 상사일上巳日 즉, 음력 3월 3일에 하며, 이 시기는 파종기로 풍요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등의 큰 행사가 있었다.)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봉(龜旨峯, 지금의 경남 김해시에 있으며, 구지봉의 봉우리 모양이 넓은 원형으로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과 같다고 한다. 구지봉 꼭대기에는 돌 무더기가 거북 모양의 돌울 떠받치고 있는 고인돌이 있고, 근처에 1976년 세운 여섯 개의 알과 아홉 마리의 돌거북으로 구성된 천강육란석조상天降六卵石造像이 있다.)에서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래서 무리 이삼백 명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의 소리 같았지만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구간들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다시 대답했다.
"구지봉입니다."
 

구지봉 전경/ⓒ김해시청
구지봉/ⓒ김해시청

 
또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온 것이다. 너희들이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내면서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밀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구하구하龜何龜何 수기현아首其現也 약불현야若不現也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라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기뻐 춤추게 되리라"
 
구간들은 그 말대로 하면서 모두 기쁘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 하늘을 우러러보니 자줏빛 새끼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살펴보니 붉은색 보자기로 싼 금합(金合, 수확한 곡식을 다음 수확기까지 보관하는 상자)이 있었다. 그것을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허리를 굽혀 백 번 절하고, 얼마 후 다시 금합을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와 탑 위에 두고 제각기 흩어졌다.
 
12일(협진浹辰을 풀이한 말로 협浹은 일주一周 즉, 한바퀴 도는 것을 뜻하고, 진辰은 12간지를 뜻한다.)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열어 보니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빼어났다. 그들을 평상에 앉혀 절하며 축하하고 지극히 공경했다. 그들은 나날이 자라서 열흘 남짓 되자 키가 아홉 자나 되어 은(殷)나라의 탕왕(湯王) 같았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의 고조(高祖)와 같았고, 눈썹의 여덟 색채가 요(堯) 임금과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이 순(舜) 임금과 같았다(태평성대라고 일컫는 요순시대의 임금들로, 요 임금은 유가가 꿈꾸었던 이상적 군주이며, 순 임금은 요 임금과 더불어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린 명군으로 불린다).
 
그달 보름에 즉위했는데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부르니, 바로 여섯 가야 중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호암미술관의 가야 금관(좌), 오구라 컬렉션의 가야 금관(우)/ⓒ국립중앙박물관
고령 지산동 30호 출토 가야 금동관(좌), 성주 가암동 출토 가야 금동관(우)/ⓒ국립중앙박물관
고령 지산동 32호 가야 금동관/ⓒ국립중앙박물관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그는 임시로 궁궐을 짓게 하고 들어가 다스렸는데, 질박하고 검소하여 지붕의 이엉(짚이나 풀잎 새 등을 엮어 만든 초가 지붕의 재료)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석 자를 넘지 않았다.
 
즉위 2년 계묘년(43년) 봄 정월에 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
 
이에 임시로 지은 궁궐 남쪽 신답평(新畓坪, 이곳은 한전閑田 즉, 묵은 밭이었는데 새로 경작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답畓이란 글자는 속자俗字다.)에 행차하여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다가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곳은 마치 여뀌잎처럼 좁지만, 빼어나게 아름다워 열여섯 나한(羅漢,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소승 불교에서 교법을 수행하는 성문聲聞(출가 수행자) 사위四位(수행자의 수행의 단계) 중 덕행이 높았던 성자聖者를 뜻한다.)이 머물 만한다. 더군다나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일곱 성(七聖, '성'이란 올바른 지혜로 진리를 비추어 본 사람으로, '칠성'이란 수신행隨信行, 신해信解, 견지見至, 신증身證, 혜해탈慧解脫, 구해탈俱解脫을 말한다. 한편 고운기교수는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란 구절의 3과 7을 연계시켜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칠일의 숫자와 관련되어 있일 것이라고 보았다.)이 머물 만하여, 정말로 알맞은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참으로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1500보(약 1.8km) 둘레의 외성(外城)과 궁궐, 전당(殿當)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 창고, 곡식 창고 지을 곳을 두루 정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국내의 장정과 공장(工匠)을 두루 불러모아 그달 20일(즉위 2년 봄 정월)에 튼튼한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3월10일에 역사(役事)를 마쳤다. 궁궐과 옥사(屋舍)는 농한기를 기다려 그해 10월 안에 짓기 시작하여 갑진년(44년) 2월에 이르러 완성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궐로 옮겨 가서 모든 정치의 큰 기틀을 살피고 여러 가지 일을 신속히 처리했다.
 

김해 가야테마파크에 복원된 가야왕궁 태극전/ⓒ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홍보서비스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니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했다. 탈해는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는데, 키가 석 자고 머리 둘레가 한 자나 되었다. 탈해는 기뻐하며 궁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위를 빼앗으려고 왔소."
 
수로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왕위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명했으니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 너에게 왕위를 넘겨 줄 수 없고, 또 감히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했다.
"그대는 나와 술법을 겨룰 수가 있겠소?"
 
수로왕이 말했다.
"좋다."
 
그래서 잠깐 사이에 탈해가 매로 변하자 왕은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왕은 새매로 변했는데, 그사이에 아주 짧은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탈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왕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서대석 교수는 수로왕과 탈해의 이야기를 해상을 통해 가락국을 침략한 집단과 수로왕 집단이 전쟁을 한 일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경남 김해시에 조성된 '가야의 거리'의 가야 군사들/ⓒ한국관광공사

 
탈해가 이에 항복하여 말했다.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서 제가 매가 되자 독수리가 되었고, 참새가 되자 새매가 돠었는데도 죽임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인께서 저의 죽음을 원치 않는 인(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왕과 왕위를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탈해는 곧 절을 하고 나갔다. 그러고는 서울 변두리의 나루터로 가서 중국 배가 오가는 물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탈해가 머물면서 모반을 꾸밀까 걱정하여 급히 수군 500척을 내어 추격했으나, 탈해가 계림 땅 경계로 도망쳐 들어갔으므로 수군이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이일에 관한 기록은 신라의 기록과 많이 차이가 있다.
 

가야의 영역[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대가야-고령, 비화가야-창녕/6가야 중 하나로 경북 성주에 있었다고 알려진 '성산가야'는 실제성에 논란이 있다.]/ⓒ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추친단

 
건무 24년 무신년(48년) 7월27일에 구간들이 조회(朝會) 때 왕께 아뢰었다.
"대왕께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도 좋은 짝을 얻지 못했으니, 신들의 딸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처자를 뽑아 궁궐로 들여 배필로 삼으십시오."
 
왕이 말했다.
"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왕후를 맞는 것 역시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마라."
 
그리고 유천간에게 가벼운 배와 날랜 말을 주어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명하고, 또 신귀간에게는 승점(乘岾,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며, 승점은 연하輦下-즉, 도읍에 속한 곳-의 나라다.)으로 가도록 명했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횃불을 들자 배는 재빨리 육지 쪽으로 달려왔다. 신귀간 등이 이를 보고는 대궐로 달려들어와 아뢰었다. 수로왕은 이 말을 듣고서 기뻐했다. 얼마 후 구간들을 보낸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좋은 계수나무로 만든 아름다운 노를 저으며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 안으로 모셔오게 했다.
 

1800년대 말 제작된 웅천현(現 경남 창원시 진해구) 지도(고지도)에 나오는 '만산도'/ⓒ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배에서 내린 왕후가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평소에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아뢰니, 왕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여겨 유사(有司,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를 데리고 행차했다. 그리고 대궐 아래 서남쪽 60보쯤 되는 곳의 산언저리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이에 왕후가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 입구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때 모시던 잉신(媵臣, 왕비를 따라온 신하들)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었으며, 노비까지 합치면 모두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수놓은 비단(금수錦繡)과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능라綾羅), 의상(衣裳), 필로 된 비단(필단疋緞), 금은, 구슬과 옥, 아름다운 옥(경구瓊玖), 장신구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드라마 김수로에서 김수로왕과 허왕후/ⓒMBC드라마

 
왕후가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자 왕이 나가 맞이하여 장막 궁전으로 함께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계단 아래서 왕을 뵙고 즉시 물러갔다. 임금은 유사에게 잉신 부부를 데려오도록 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노비들은 각기 한 방에 대여섯 명씩 들게 하라."
 
그리고 좋은 음료와 향이 좋은 술을 주고 무늬 있는 자리에서 재웠다. 또 의복과 보화를 주었고 많은 수의 군사에게 지키게 했다.
그래서 왕과 왕후가 함께 침전에 들게 되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陁國, 중인도中印度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해석해 왔으나 중국이나 태국이라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아요디아 [Ayodhya] 인도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주(州)에 있는 도시라는 설도 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그곳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 풍속이 아름다우며 백여 곳의 사찰에 3,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許氏)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금년 5월에 부왕과 왕후가 저를 보고 말하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똑같이 꿈속에서 상제(上帝)를 보았다. 상제께서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왕이 되게 한 신성한 사람으로,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짝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가락국으로 보내 수로왕의 짝이 되게 하라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난 후에도 상제의 말이 귀에 남아 있으니 너는 여기서 빨리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향해 가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신선이 먹는 대추(증조蒸棗, 찐대추-신선이 먹는 대추)를 구하고, 하늘로 가서 선계(仙界)의 복숭아(반도蟠桃, 신성한 복숭아)를 좇으며 반듯한 이마(진수螓首-아름다운 용모)를 갖추어 이제야 감히 임금의 얼굴(용안龍顔)을 뵙게 된 것입니다."
 

드라마 김수로에서 김수로왕과 허왕후/ⓒMBC드라마

 
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왕비를 맞이하자는 신하들의 간청을 구태여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당신이 몸소 내게 오셨으니, 못난 나에게는 다행이오."
 
드디어 혼인을 하고 이틀 밤을 지낸 뒤 또 하루 낮을 지냈다. 그러고는 마침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기 양식으로 쌀 열 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수로왕비릉(허왕후릉) 옆에 있는 파사석탑. 허왕후(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고 한다/ⓒ국립중앙박물관


 
8월1일에 왕은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부부도 모두 수레를 나란히 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외국의 갖가지 진기한 물건을 모두 싣고 천천히 돌아오니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게 하고, 잉신 부부와 노비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살게 했으며, 나머지 따라온 자들은 20여 칸의 빈관(賓館) 한 채에 사람 수를 정하여 나누어 살게 하고 일용품을 넉넉히 주었다. 또한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내고(內庫, 왕궁에 직속된 왕실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 또는 재정을 담당하던 관청)에 저장하여 왕후가 사철 쓰도록 했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영전/ⓒ전통문화포털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들은 모두 여러 벼슬아치의 우두머리인데, 그 지위와 이름이 모두 소인이나 농부의 호칭이지 결코 고관 직위의 호칭이라고는 할 수 없소. 혹시라도 나라 밖 사람들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마침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고치고,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으로 고쳤으며,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이란 명칭은 윗글자는 고치지 않고 아랫글자만 고쳐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했다. 또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쳤으며, 신귀(神鬼)는 음을 고치지 않고 훈만 고쳐 신귀(臣貴)로 했다. 계림의 직의(職儀)를 취해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周)의 제도와 한(漢)의 제도를 나누어 정했으니, 이는 옛것을 고쳐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해상왕국 가야 ❘ 특별전 《바다를 건넌 가야인》 전시 영상 中/ⓒ국립김해박물관

 
이에 수로왕은 국가를 다스리는 집을 정돈하여, 백성들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사는 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비유할 수 있었다. 그 공(功)은 도산씨(塗山氏)가 하(夏)나라를 보필하고(도산씨의 딸로 하나라 우 임금에게 시집가 도왔다. 도산은 우 임금이 제후들과 맹세한 땅이다.), 요임금의 딸들(당원唐媛, 요임금의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으로 순임금에게 시집 가 교씨의 시조가 되었다.)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해에 곰 얻는 꿈을 꾸어 징조가 있더니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년(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175세였다.
 

김해 수로왕비릉(허왕후릉)/ⓒ김해시청

 
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왕후가 가락국에 처음 와서 닿은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했으며, 붉은 깃발이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왕비를 따라온 잉신이던 천부경(泉府卿) 신보와 종정감(宗正監) 조광 등은 가락국에 도착한 지 30년 만에 각자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2년 뒤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밖의 하인들은 온 지 칠팔 년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오직 고국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지닌 채 고향을 향하고 죽으니, 살던 빈관이 텅 비어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매일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슬픔에 젖곤 하다가 24년이 지난 헌제(獻帝) 건안(建安, 중국 후한 헌제의 세 번째 연호) 4년 기묘년(199년) 3월 23일에 죽었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비통해했는데,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욱 심했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는 한 발(약 1.8미터)이고 둘레는 300보(약 360미터)로 하여 장사를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대를 이은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 구형(仇衡)까지 이 묘에 배향하고, 매년 맹춘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정결한 제사를 지냈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김해시청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김해시청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문무왕文武王) 용삭(龍朔, 661년에서 663년까지 사용한 당나라 고종의 연호) 원년 신유년(661년) 3월 어느날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왕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 삼국사기에는 노종奴宗으로 삼국유사에는 세종世宗으로 나오며, 이는 동일한 사람인 노종을 훈차訓借에 의해 세종으로 기록되었다고 본다.)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 졸지공卒支公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솔우공이 아닌 졸지공卒支公으로 보기도 한다.) 아들 잡간 서운(庶云)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원군은 나에게 바로 15대 시조다. 그 나라는 이미 망했으나 장례를 지내는 묘는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해라."
 

문무왕 영정/ⓒ전통문화포털

 


이에 사자를 옛터로 보내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을 공양 밑천으로 삼아 왕위전(王位田)이라 불렀으며 본토에 귀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인 급간 갱세(賡世)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제전(祭田)을 관리하며 해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과 밥, 다과 등 여러 가지 음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삿날도 거등왕이 정한 연중 다섯 날을 그대로 지켜 정성 어린 제사가 지금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년)에 편방(便房, 임시로 제사를 지내는 장소)을 설치한 후부터 구형왕 말까지 330년 동안에 종묘의 제사는 항상 변함이 없었는데,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용삭 원년 신유년(661년)까지의 60년(실제로는 구형왕 항복부터 문무왕 즉위년까지는 120년 차이가 있다.) 사이에는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간혹 거르기도 했다.

아! 아름답구나, 문무왕(文武王)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냈으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도다.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행하게 했으니.

경남 김해시 안동에 있는 초선대(招仙臺). 가락국의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七点山)의 선인(仙人)을 초대하여 거문고와 바둑으로 서로 즐겼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한국학중앙연구원


 
신라 말년에 잡간 충지(忠至)란 사람이 있었는데, 금관성(金官城)을 공격하여 빼앗아 성주장군(城主將軍, 신라 말에 지방 호족들이 그 지방을 점령하고 일컫던 칭호)이 되었다. 또 아간 영규(英規)라는 사람이 장군의 위엄을 빌려 종묘의 제사를 빼앗고 함부로 제사를 지냈다. 그가 단오날을 맞아 제사를 지내는데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 없이 무너져 깔려 죽고 말았다.
 
이에 성주장군이 혼잣말을 했다.
"다행히 전세의 인연으로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그러니 마땅히 내가 영정(影幀)을 그리고 향과 등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겠다."
 
그리고 석 자 크기의 교견(鮫絹, 남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비단)에 진영(眞影, 초상화)을 그려 벽에 모셔 두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경건하게 받들었다. 이렇게 한 지 사흘도 채 못 되어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바닥에 거의 한 말이나 흥건히 괴었다. 이에 장군은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받들어 사당으로 가서 불태운 다음 즉시 수로왕의 직계 자손 규림(圭林)을 불러 말했다.
"어제 불상사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나는가? 이는 정녕 내가 영정을 그려서 공양하는 것이 공손치 못하여 사당의 위령(威靈, 위엄이 있는 신령)이 진노한 것이다. 영규가 이미 죽었고 나도 매우 두려워 영정을 불태웠으니, 반드시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 자손이니 옛날 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겠다."
 
이리하여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는데 여든여덟 살이 되어 죽은 뒤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사당을 배알하는 단오일 제사에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미친 증세로 인해 사당에 와 간원이 차려 놓은 제수를 치우고 자기의 제수를 차려 제사 지냈다. 준필은 술잔을 세 번 올리는 일(삼헌三獻)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서 죽고 말았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이 말했다.
"분수 넘게 지내는 제사는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낳는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여규가 있었고 후에는 준필이 있었으니, 이들 부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또 사당 가운데 금옥이 많으니 도적들이 언젠가 와서 훔쳐가려 했다. 도적들이 사당에 처음 왔을 때,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는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 사면으로 비오듯 홀을 쏘아 도적 칠팔 명을 맞히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 도적들이 다시 왔을 때는 길이가 30여 자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팔구 명을 물어 죽였다. 이때 겨우 죽음을 면한 도적들은 모두 엎어지고 흩어졌다. 때문에 능원(陵園)의 안팎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지켜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야 철갑주/ⓒ국립중앙박물관

 
건안 4년 기묘년(199년)에 처음으로 이 사당을 세운 이후로 지금 임금이 즉위한 31년 대강(大康) 2년 병진년(1076년)까지 모두 878년이 되었으나, 쌓아 올린 깨끗한 흙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배열해 놓은 여러 옥조각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면 당나라 사람 신체부(辛替否)가 "예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으며, 허물어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오직 이 가락국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신체부의 말이 영험이 있는 것이지만, 수로왕의 사당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신체부의 말이 다 믿을 만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또 수로왕을 사모하여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29일이 되면 향토의 백성과 관리와 병사들이 승점(乘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은 동서쪽으로 바라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누어 망산도로부터 용맹한 말을 타고 육지로 다투어 달리고, 뱃머리를 둥실 띄워 서로 물에서 밀며 북쪽의 고포(古浦)를 향해 내달린다. 이는 대개 옛날 유천간, 신귀간 등이 허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급히 임금께 알렸던 유적이다.
 

가야 유물인 국보275호 기마인물형 뿔잔/ⓒ국립중앙박물관


가락국이 멸망한 후 대대로 이곳에 대한 칭호가 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661년~663년까지 사용한 당唐 고종의 연호) 원년 신사년(681년)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부르고 태수를 두었다. 그 후 259년이 지나 우리 태조가 통합한 후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설치하여 48년을 지냈다. 다음에는 임해군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여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27년을 지냈고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64년을 지냈다.
 
순화(淳化, 북송 태종의 연호며 고려 성종 2년이다.) 2년(991년)에 김해부의 양전사(量田史, 토지조사를 감독하고 통제하는 일을 하는 관리)인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이 조사하여 보고했다.
"수로왕릉에 딸려 있는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옛 제도 대로 15결로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 부역을 맡은 장정)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담당한 관서에게 그 장계를 전하니 조정에서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알을 내려 변해 성스러운 임금이 된 후, 수명이 길어 158세에 이르렀으니, 저 삼황(三皇) 이후 비견될 만한 사람이 없다. 죽은 후 선대로부터 능묘에 딸려 있던 전답을 지금 줄여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가 또 아뢰니,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겨 절반은 능묘에 두어 옮기지 않고 절반은 향리의 역정에게 주도록 했다. 절사(節使)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이에 반은 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에서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도록 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양전사는 매우 피곤했다. 어느날 저녁 꿈 속에서 갑자기 칠팔 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했다.
"네거 큰 죄를 지었으므로 베어 죽이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깨어났는데 이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쳤는데, 병이 조금도 낫지 않아 관문을 지나다가 죽었다. 그때문에 양전사는 양전도장(量田都帳)에 도장을 찍지 못했다.
 
이후에 봉사(奉使)하는 사람이 와서 그 전답을 조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일 뿐이고, 3결 87부 1속이 부족했다(결부제結負制라는 제도로 신라 이후부터 조선까지 활용한 토지파악 제도이며, 수확량을 기초로 토지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곡식 다발을 손으로 움켜쥔 1주먹(악握) 만큼 세(稅)로 낼 수 있는 토지를 1파(把)라고 하고, 10파를 1속(束)으로, 10속을 1부(負) 혹은 복(卜)으로, 100부를 1결(結)로 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로챈 것을 추적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서에 보고하고 왕명으로 다시 넉넉히 지급했으니 고금에 탄실할 일이다.
 
시조 수로왕(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부지런하게 다스리고 정성스럽게 도를 숭상했는데, 시조의 어머니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가(元嘉) 29년 임진년(452년)에 원군과 왕후가 합혼하던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 했으며, 사신을 보내 그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측량하여 삼보(三寶, 불자가 귀의해야 한다는 불보, 법보, 승보의 3가지를 가리키는 불교의 교리로서, 석가모니 자신이 불보이고,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이 법보이며, 부처의 제자로서의 비구, 비구니의 출가 교단이 승보이다.)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했다.
 

장유사/ⓒ김해시청

 
이 절이 생긴 지 500년이 지나자 장유사(長遊寺, 경상남도 김해시 불모산佛母山에 있는 삼국시대 승려 장유가 창건한 사찰)를 지었는데, 이 절에 바친 전시(田柴)가 모두 300결이었다. 그러자 장유사의 삼강(三剛, 절의 재정과 운영의 실무를 담당하는 세 가지 직책)은 왕후사가 장유사 시지(柴地)의 동남쪽 지경(일정한 테두리 안의 땅) 안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없애 전장(田莊)으로 만들고, 추수한 것을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세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를 아래에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렇다.
 

태초가 열리니 해와 달이 비로소 밝았고,
인륜은 비록 있었으나 임금의 자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방의 나라들은 서울을 나누었다.
신라가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은 뒤에 세워졌다.
세상을 다스릴 사람이 없으니 누가 백성을 돌보랴.
드디어 상제께서 저 창생을 돌보아 주셨다.
이에 부명(符命, 하늘이 제왕이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을 주어 특별히 정령을 보냈다.
산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아득한 듯하고 바깥도 컴컴했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것 같은데, 들으니 소리가 났다.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이레가 지난 후에야 한때 고요해졌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에서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내려오며 자색 끈 하나를 드리웠다.
다른 지방 낯선 땅에 집들은 잇달아 있었다.
구경꾼이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이 우글거렸다.
다섯 분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다.
같은 시각 같은 모습은 형제 같았다.
참으로 하늘이 덕인(德人)을 내어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천하가 맑아지려 했다.
화려한 제도는 옛 제도를 모방하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평했다.
온갖 정사에 힘쓰니 모든 정치가 시행되고, 기울지도 치우치치도 않으니 오직 정일(精一, 정세하고 한결같다.)했다.
길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농부는 밭갈이를 서로 양보했다.
사방에 사건이 없어 베개를 편히 받치고, 만백성이 태평을 맞이했다.
갑자기 햇볕에 드러나 풀잎 위의 이슬처럼 문득 대춘(大椿, 수명이 긴 참죽나무를 말하며, 오래사는 것을 뜻한다.)을 보전하지 못했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가 통곡했다.
금 같은 그 자취 빛나고 옥 같은 소리를 울렸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제사는 향기롭기만 했다.
세월은 비록 흘러갔으나 규범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다. 건안 4년 기묘년(199년) 3월13일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가평(嘉平, 중국 위魏나라 왕 조방曺芳의 연호로 249년~254년까지 사용했다.) 5년 계유년(253년) 9월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렇게 말했다.
"성은 김씨(金氏)라고 하니, 아마도 가야국의 세조가 금빛 알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으로 성을 삼았을 뿐이다."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가평 5년 계유년(253년)에 즉위해 39년을 다스리고 영평(永平) 원년 신해년(291년) 1월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로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평 원년에 즉위하여 56년을 다스리고, 영화(永和) 2년 병오년(346년) 7월8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간 아궁(阿躬)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다. 영화 2년에 즉위하여 62년을 다스리고, 의희(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 사마덕종司馬德宗의 연호로 419년~420년까지 사용했다.) 3년 정미년(407년) 4월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의 딸인 정신(貞信)이며,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407년)에 즉위하여 용녀(傭女)와 결혼한 후 외척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여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계림이 꾀를 써서 가락국을 정벌하고자 했다. 가락국의 신하 박원도(朴元道)가 좌지왕에게 간했다.
"이런 일은 유초(遺草)를 깎고 깎아도 또한 털이 나는 법이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인들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복사(卜士)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에 '소인을 없애면 군자인 벗이 와서 도울 것이다.'라고 했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펴보십시오."
왕이 "옳다."라고 사례하고는 용녀를 내쳐 하산도(荷山島)로 귀양 보내고 정치를 고쳐 오랫동안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15년 동안 다스리고 영초(永初, 송宋나라 무제武帝 유유劉裕의 연호로 420년~422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유년(421년) 5월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초 2년에 즉위하여 31년 동안 다스리고 원가(元嘉, 송宋나라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연호로 424년~453년까지 사용했다.) 28년 신묘년(451년) 2월3일에 죽었다. 왕비는 각간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에 즉위했으며 이듬해 세조와 허황옥(許黃玉) 황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처음 세조와 왕후가 결혼하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전답 10결을 내어 보탰다. 42년 동안 다스리고 영명(永明,남조 제齊나라 무제武帝 소색蕭賾의 연호로 483년~493년까지 사용했다.) 10년 임신년(492년) 10월4일에 죽었다. 왕비는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 10년에 즉위하여 30년을 다스리고 정광(正光,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 원후元詡의 연호로 520년~525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축년 (521년) 4월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의 딸 숙(淑)이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김씨다. 정광 2년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렸다. 보정(保定, 북조北朝 북주北周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의 연호로 561년~565년까지 사용했다.) 2년 임오년(562년)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자 왕이 직접 군졸을 거느리고 싸웠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항하여 사울 수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신라에 들어가 항복했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각(世宗角干)이고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이며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말했다.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양梁나라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연호로 529년~534년까지 사용했다.) 4년 임자년 (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과 구형왕비(신라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와 증조모)/ⓒ전통문화포털

 

경남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이라고 전하는 '산청 전 가야 구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 임자년에 땅을 신라에 바치고 항복했다고 했다. 그러기에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 임인년(42년)에서 구형왕 말 임자년(532년)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땅을 바친 것이 위(魏)나라 보정(保定) 2년 임오년 (562년)이 되므로 30년이 더 있게 되니 모두 520년이 되는데, 지금 두 가지 설을 다 기록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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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복원도/ⓒ경주문화관광

 

경주 황룡사지/ⓒ경주문화관광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년(636년)에 자장법사가 서쪽(당나라)으로 유학을 갔는데, 바로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감화되어 불법을 전수받았다.

자장법사/ⓒ경주시

 
문수보살은 자장법사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 왕은 천축 찰리종(刹利種, 고대 인도에서 네 계급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크샤트리아를 말한다)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 불교 이치를 깨달은 이에게 주는 본인의 미래에 관한 기록)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 황하 문명을 중심으로 하고 동서남북 사방의 변방을 하급의 문화로 폄하하는 데서 나온 관념으로 산동성 제나라도 동이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공공(共工, 중국 요순 시대에 흉포하기로 이름난 종족으로 중국 강회江淮 지방에 살았다)의 종족과는 다르다.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 사교(邪敎, 건전하지 못하고 그릇된 종교)를 믿어 때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법문(法文, 불경의 글)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승려들이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모든 백성이 평화롭다."
말을 마치자 문수보살은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법사는 이것이 보살의 변화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그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둑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나타나 물었다.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보리(提, 보디bodhi의 음역으로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불타 정각正覺의 지혜, 즉 불타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그에게 절하고서 다시 물었다.
"너희 나라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는 말갈과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왜와 이어져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가며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입이 잦으니, 이것이 백성의 고통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거라."
 
자장법사가 물었다.
"고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해야 이롭겠습니까?"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 불교 또는 불법을 보호하거나 옹호하는 용)은 바로 내 큰아들인데, 범왕(梵王, 범천왕梵天王의 준말로 인도 바라문교婆羅門敎-힌두교의 기본 배경이 되며 불교에도 영향을 미친 인도의 원시종교-의 최고 신이다)의 명령을 받고 가서 절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九韓)가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 호국 사상에서 생겨난 팔관회는 우리나라의 고유 민속과 불교가 접목된 것으로 윤등을 설치하고 향등을 달아 밤새도록 광명과 향기가 가득하도록 연화대를 설치해 가무를 즐기는 축제로 신라시대에 시작되어 고려 시대에 가장 많이 개최되었던 불교 의례다)를 열고 죄인을 풀어 주면 밖의 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 서울 남쪽 언덕에 정사를 하나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어 주면 나 역시 덕을 갚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신령한 사람은 자장법사에게 옥()을 바치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사중기寺中記>에는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의 처소에 탑을 세워야 할 이유를 들었다고 했다.
 
정관 17년 계모년(643년)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내려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와 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권했다.

선덕여왕과 신하들/ⓒ경주시(천년 왕국의 부활 中)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자 신하들이 말했다.
"백제에 부탁해 공장(工匠, 장인 중에서 국가의 직역 체제 아래에 편재된 장인층의 장인)을 데려와야 가능합니다."
선덕왕은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공장을 청하게 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재목과 돌을 다듬고, 이간(伊干, 신라 17관등의 제2등으로 잡찬의 위이다)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라고 하며,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다)이 수하 공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처음 이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는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꿈꾸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심이 되어 손을 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사방으 컴캄해지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공장은 뉘우치고 탑을 완성했다.

황룡사 9층목탑/ⓒ경주시(천년 왕국의 부활 中)

 
<찰주기刹柱記>에 이렇게 말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근자, 그 이하는 183자다(약 66미터 정도 되며, 21미터의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의 세 배다)."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백 개를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戒壇, 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으로 대승 계단과 소승 계단으로 나뉜다) 및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셔, 못에 있는 용의 청원을 들어주었다.-대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이며 역시 자장법사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이후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 고구려 왕이 장차 신라를 정벌하고자 계책을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가?"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구려 왕은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나라에 구정(九鼎, 중국 하나라 우임금 때 전국의 쇠를 모아 만든 아홉 주州를 상징하는 솥)이 있어서 초()나라 사람들이 감히 북쪽(주나라)을 엿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귀신이 받치는 힘으로 수도 장안을 누르니,
휘황찬란한 금벽색이 기왓장을 움직이네.
올라가 굽어 보니 어찌 구한(九韓)만 복종하랴.
천하가 특히 태평함을 비로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 명현(名賢) 안흥(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 제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략했다. 대궐 남쪽 황룔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 나라의 침략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왜(倭, 일본), 2층은 중화(中華,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로 추정), 3층은 오월(吳越,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로 추정), 4층은 탁라(托羅, 탐라국), 5층은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여진족), 9층은 예맥(穢貊, 고구려로 추정)을 억누른다."

황룡사역사박물관 전시모형

 
또 <국사>와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계유년(553년)에 절을 세운 뒤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년(645년)에 탑을 처음 세웠다. 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7년 성력(聖曆,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 원년 무술련(698년) 6월에 벼락을 맞았다.-<사중고기>에 성덕왕(聖德王) 때라고 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제33대 성덕왕 경신년(720년)에 다시 지었고, 제48대 경문왕(景文王) 무자년(868년)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같은 시대에 세 번째로 다시 지었다. 고려 광종(光宗) 즉위 5년 계축년(953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顯宗) 13년 신유년에 네 번째로 다시 지었다. 또 정종(靖宗) 2년 을해년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아 문종(文宗) 갑진년(1064년)에 다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헌종(獻宗) 말년 을해년(1095년)에 여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고종 16년 무술년(1238년) 겨울에 몽골이 침입하여 탑과 절, 장륙존상과 전각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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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통령, 제3대 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에 쏠린 민의(1952년)/ⓒ문화체육관광부
후보자의 대형 초상화를 든 거리유세(1952년)/ⓒ문화체육관광부
함태영 부통령 제3대 민의원 총선거 투표(1954년)/ⓒ문화체육관광부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한 후보자의 선거사무소 전경(1954년)/ⓒ문화체육관광부
당시 주요 홍보수단이었던 지프로 제3대 민의원 선거를 홍보 중인 지프(1954년)/ⓒ문화체육관광부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선거 홍보물/ⓒ문화체육관광부
정·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장면 후보의 선거 홍보물(1956년)/ⓒ문화체육관광부
이승만·이기붕 후보 유세차량(1956년)/ⓒ문화체육관광부
벽에 나붙은 각종 홍보물(1956년)/ⓒ문화체육관광부
5·15 정·부통령 선거를 알리는 후보자 벽보를 붙이고 있는 장면(1956년)/ⓒ문화체육관광부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1956년)/ⓒ문화체육관광부

 

정·부통령선거 개표(1956년)/ⓒ문화체육관광부
정ㆍ부통령 선거 개표 속보판(1956년)/ⓒ문화체육관광부
민의원 제4대 국회 정·부의장 선거 개표 상황(1958년)/ⓒ문화체육관광부
개봉되는 제4대 정부통령 선거 투표함(1960년)/ⓒ문화체육관광부
1960년 제 4대 대통령 선거,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투표하는 장면(1960년)/ⓒ문화체육관광부
게시판을 통해 실황중계 중인 민의원 선거 개표 결과(1960년)/ⓒ문화체육관광부
베트남파견 비둘기부대 경비중대 대통령 선거 투표(1967년)/ⓒ문화체육관광부
윤보선 대통령 후보와 공덕귀 여사 내외 5ㆍ3 대통령 선거 투표(1967년)/ⓒ문화체육관광부
박정희 대통령 후보와 육영수 여사 내외 5ㆍ3 대통령 선거 투표(1967년)/ⓒ문화체육관광부
박정희 대통령 제7대 대통령선거 청주 유세(1971년)/ⓒ문화체육관광부
박정희 대통령 제7대 대통령선거 서울 유세(1971년 장충동)/ⓒ문화체육관광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대통령 선거(1972년)/ⓒ문화체육관광부
정주영 회장 제12대 대통령 선거 투표(1981년)/ⓒ문화체육관광부
정주영 회장 제12대 대통령 선거 투표(1981년)/ⓒ문화체육관광부
정주영 회장 제12대 대통령 선거 투표(1981년)/ⓒ문화체육관광부
남덕우 국무총리 제11대 국회의원선거 개표 상황실 방문(1981년)/ⓒ문화체육관광부
남덕우 국무총리 제11대 국회의원선거 개표 상황실 방문(1981년)/ⓒ문화체육관광부
남덕우 국무총리 제11대 국회의원선거 개표 상황실 방문(1981년)/ⓒ문화체육관광부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유세(1987년)/ⓒ문화체육관광부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유세(1987년)/ⓒ문화체육관광부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유세(1987년)/ⓒ문화체육관광부
노태우 대통령 13대 대통령 선거유세 장면 사진(1989년)/ⓒ문화체육관광부
노태우 대통령 13대 대통령 선거유세 장면 사진(1989년)/ⓒ문화체육관광부
노태우 대통령 13대 대통령 선거유세 장면 사진(1989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재자 투표, 해군 장병 함상투표(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재자 투표, 해군 장병 함상투표(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재자 투표, 해군 장병 함상투표(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선거 유세(1992년 김영삼)/ⓒ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선거 유세(1992년 김영삼)/ⓒ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선거 유세(1992년 김영삼)/ⓒ문화체육관광부
서울 효자동의 정부합동 공명선거관리 상황실(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의 선거 벽보(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선거 개표상황(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조순 서울시 시장 후보, 서울 시민들(1995년)/ⓒ문화체육관광부
제15대 국회의원선거 합동 연설회(1996년)/ⓒ문화체육관광부
제15대 대통령선거 스케치(1997년)/ⓒ문화체육관광부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제15대 대통령선거 거리 연설회(1997년)/ⓒ문화체육관광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벽보(2000년)/ⓒ문화체육관광부
제16대 대통령 선거 유세(이회창, 노무현)(2002년)/ⓒ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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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진덕여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은 즉위하자 직접 태평가(太平歌, 진덕여왕이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은 사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5 '진덕왕 조'에 실려 있는데, 당나라 고종은 이것을 읽고 법민을 대부경大府卿으로 임명해 돌려보냈다고 한다.)를 짓고 비단 무늬를 짜서 사신('삼국사기'에는 진덕왕 4년에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사신으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을 시켜 당나라에 바치게 했다.

어떤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요청하자, 당 태종이 가상히 여겨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현경(顯慶,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로 656년에서 661년까지 사용했다.)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제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은 태종 시대가 아니라 바로 고종(高宗) 시대다. 소정방이 온 것이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에 무늬를 짠 것이 군사를 청할 때가 아님은 확실하므로 진덕여왕 때가 맞다. 아마도 김흠순(金欽純)의 석방을 요청할 때였을 것이다.

당나라 황제는 이 점을 가상하게 여겨 진덕여왕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권5) 치당태평송/ⓒ한국학중앙연구원

 

위대한 당나라가 큰 왕업을 여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획 창성하여라.
전쟁이 그치니 위엄이 정해지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임금을 잇는다.
하늘을 통솔하닌 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빛을 머금는다.
깊은 인(仁)은 해와 달을 짝할 만하고
운수가 요순 시대와 같다.
펄럭이는 깃발은 어찌 그토록 빛나며
울리는 북소리는 어찌 그리도 장엄한가.
나라 밖의 오랑캐로 명을 거스른 자는
칼날에 엎어져 죽임을 당하리라.
순수한 풍속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 고루어리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
사계절은 옥촉(玉燭, 사계절의 기후가 조화를 이룬 것이니 태평한 시대를 말한다.)처럼 화합하고
일월과 오행(七曜, 하늘에 보이는 별 중 육안으로 관찰되고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별을 오행과 대응시킨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과 태양 달을 합친 7개의 천체를 말하며 칠요성이라고도 한다.)은 만방을 순행한다.
산의 신령은 보필할 재보(宰輔, '시경詩經-대아大雅' 숭고崧高의 '유악강신維嶽降神:큰 산의 산신령이 내려와  생보급신生甫及申:보씨와 신씨를 낳으셨도다'를 인용한 것으로 보후甫候와 신백申伯 두 사람으로 국가의 동량 즉, 기둥과 들보가 되는 신하를 가리킨다.)를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진실된 사람을 임명하였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이룬 한결같은 덕이
우리 당나라 황실을 비추리라.

 
진덕왕 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어 남산 우지암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그때 몸집이 큰 호랑이가 그 자리로 달려들자 공들이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며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던져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아 상석에 앉았지만, 공들은 모두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

 

진덕여왕 때 일화/출처 : https://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6/2009052601483_6.html


신라에는 신령스러운 땅이 네 군데 있었다. 큰일을 의논할 때마다 대신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 의논했고, 그렇게 하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졌다.
신령스러운 땅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진덕왕 대에 처음으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조례(正旦禮,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진덕왕 즉위 5년의 일이다.)를 행했고, 처음으로 시랑(侍郞)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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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00여년 동안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은 겨우 14,000여 명이었다. 따라서 한 해에 겨우 28명 정도만 문과를 통하여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문과에 합격한 후 중앙부서에 대간(臺諫,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을 함께 이르는 말로,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하던 벼슬)과 같은 청요직(淸要職, 청빈함을 요구하는 중요한 관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를 아우르는 관직)이나 승지와 같은 국왕의 시종관으로 근무하게 된다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배출한 가문으로서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봉급은 의외로 적어서 그것만 가지고는 생활하기가 곤란하였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녹봉은 고려시대에 비해 적었는데, 그마저도 갈수록 감소되었다고 한다.

이성원(李性源 1725~1790) 초상-조선후기 홍문관교리, 개성부유수,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관리의 녹봉내력

구분경국대전인조 25년속대전
정1품中米 14石, 糙米 48石, 田米 2石, 黃斗 23石, 小麥 10石, 紬 6匹, 正布 15匹, 楮貨 10張米 14石, 田米 2石, 黃斗 4石米 2石 8斗, 黃豆 2石 5斗
정3품
(당상)
中米 11石, 糙米 32石, 田米 2石, 黃斗 15石, 小麥 7石, 紬 4匹, 正布 13匹, 楮貨 8張米 7石, 田米 2石, 黃斗 2石米 1石 9斗, 黃豆 1石 5斗
정6품中米 5石, 糙米 18石, 田米 2石, 黃斗 9石, 小麥 4石, 紬 1匹, 正布 10匹, 楮貨 4張米 4石, 田米 1石, 黃斗 2石<米 1石 1斗, 黃豆 10斗
종9품糙米 8石, 田米 1石, 黃斗 2石, 小麥 1石, 正布 2匹, 楮貨 1張米 2石, 黃斗 1石米 10斗, 黃豆 5斗

먼저 조선 전기 관리의 녹봉내력을 파악하기 위해 <경국대전>을 살펴보면, 정1품의 관리는 중미(中米 찧거나 쓿어 속겨를 한 차례 벗긴 쌀, 현미보다 더 쓿고 백미보다는 덜 찧은 쌀), 조미(糙未 왕겨만 벗긴 쌀, 현미玄米), 전미(田米 껍질을 벗기지 않을 쌀) 등 쌀 64가마, 콩(黃斗) 23가마, 밀(小麥) 10가마, 명주(紬) 6필, 베(布) 15필, 저화(楮貨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 10장을 받았다. 정3품 당상이나 정6품 관리들은 같은 종류의 물품들을 차등 있게 지급받았다. 그러나 종9품의 경우에는 중미와 명주는 아예 지급받지 못하였으며, 그 밖의 것들도 아주 적은 양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실록 등에 의하면, 흉년이 들거나 외국사신들이 자주 왕래하여 국가의 재정형편이 어렵다는 핑계로 실제로는 위 규정보다 녹봉을 적게 지급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왕조 기본법전/ⓒ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인조 25년(1647)에 지급된 녹봉을 살펴보면, 정1품의 경우 전미를 포함하여 쌀 13가마와 콩 10가마였다. <경국대전>의 규정과 비교하면 녹봉의 종류가 크게 줄어들고 양도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에게 지급되는 녹봉이 이와 같이 적었으니 그 아래의 관원들에게 지급된 것이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더군다나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을 살펴보면 관리들의 녹봉이 더욱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의 경우 겨우 쌀 2가마 8말과 콩 2가마 5말을 지급받았으며, 최하위직인 종9품은 단지 쌀 10말에 콩 5말 밖에 받지 못했다. 이 녹봉으로 고위직은 그럭저럭 살 수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하위직은 분명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데는 관리들의 적은 녹봉이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속대전(續大典, 경국대전 법령 중 시행할 법령만을 추려 편찬한 통일 법전)/ⓒ국립중앙박물관

한양의 물가가 지방보다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앙 관리들은 녹봉만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가계의 수입과 지출상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메워 주는 것이 타인들로부터 수수한 선물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서로의 집을 방문할 때 예의의 표시로 선물을 주었다. 심지어는 편지를 보낼 때에도 선물을 동봉하였다. 특히 요직에 있는 중앙관들은 지방의 수령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이 경우 뇌물과 선물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당시 풍조가 선물을 자유롭게 주고받았기 때문이었는지, 어떤 경우에는 선물을 받고도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청탁하기도 했다. 1644년 정월에 영의정 김류(金瑬, 1571~1648)가 익산군수 조행립(曺行立)에게 보낸 편지에 그러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봄날 그리운 생각에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뜻하지 않게 편지와 아울러 각종의 새해선물도 받았습니다. 더욱 옛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겠으니, 고마움이 갑절이나 됩니다. -중략- 당신 관할 지역에 살고 있는 나주부사를 역임한 김 아무개는 잘 지냅니까? 부디 내가 살아 있다고 전해 주고 또 음식이라도 보내 주어, 이 늙은이 생색이라도 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 속의 별록(別錄)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련된 일인데, 관례를 깨서라도 세밀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김류는 조행립이 새해인사와 아울러 보낸 여러 종류의 선물을 받고서 우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지인인 나주부사 김 아무개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 주고 먹을거리를 보내 생색을 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부탁할 것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한 일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이 사적으로 은밀히 청탁하는 일은 별지(別紙)에 작성하였으며, 이를 읽어 본 후에는 뒷날 말썽이 일어나지 않도록 태우는 것이 관례였다. 김류의 경우에도 별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그런 관례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김류는 영의정에 재임 중이었으니 어느 수령이 청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수령은 비록 지방에 파견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교체되거나 승진하여 중앙의 부서로 돌아갈 관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 간찰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명절이나 절일에 중앙의 고관들에게 선물을 보내어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유지하려 하였다.
 
중앙관들은 박봉으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수입과 지출의 차이를 지방 수령들이나 친지들이 보내 주는 선물로 보충해 간 데 비해 지방관, 그중에서도 특히 수령은 그러한 생활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방 관아에는 수령이 유용할 수 있는 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관리들은 국왕에게 이를 핑계로 수령에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수령은 자신의 소관 업무만 담당했던 경관과는 달리 사법, 군사, 행정의 모든 일을 혼자서 주관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바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모습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쓴 간찰에 잘 나타나 있다.

동추(同推, 관원이  합동으로 죄인을 추문하는 일)하는 걸음이 아니면 창고를 돌며 조적(糶糴 관에서 쌀을 비축하고 배포하는 일)을 나누는 일로, 비록 한가한 고을이라고는 해도 장부 정리도 때에 맞추어야 하고 공문 처리하기에도 겨를이 없다. 여러 고을이 대부분 같아서, 진실로 덜하고 더한 차이가 없다. 붓을 들고 종이를 펴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미처 한 글자도 적기 전에 창 밖에서는 형방이 무릎을 꿇고 '하삷오며(爲白乎旀)'나 '저저자자(這這刺刺)' 등의 소리를 내며 읽고 있고, 개구쟁이 아이가 진한 먹에 붓을 적시고 종이 모서리를 비스듬히 잡고 있으니 나는 먹으로 돼지 모양 비슷하게 수십 개의 서명을 바쁘게 한다. 물러나 생각해 보면 앞서 가슴속에 있던 미처 쓰지 못한 한 편의 좋은 문장은 애석하게도 어느새 만 길 지리산 너머로 달아나 버렸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이 간찰에는 관아에서 관속(官屬)들이 각자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모습과 갑자기 떠오른 좋은 시상(詩想)을 바쁜 업무에 쫓겨 놓쳐 버린 후 안타까워하는 박지원의 모습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박지원은 수령직에 있는 덕분으로 지인인 남공철과 심상규 등에게 백지 한 뭉치씩을 보내 주고, 친척과 친지에게 요전(料錢, 급료)과 제수전(祭需錢, 제사에 필요한 재료를 장만하는데 사용하는 돈) 등을 줄 수 있었으며, 또 수시로 말린 고기와 볶은 고기, 곶감과 고추장 등과 같은 반찬과 먹을거리 등을 집에 보낼 수 있었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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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경천묘 신라 제56대 경순왕 어진/ⓒ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소재 신라 제56대 경순왕릉/ⓒ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부는 경순왕의 성과 이름이다. 본문에서 경순왕이라고 해야 하지만 시호를 쓰지 않았다. '왕력' 편에는 경순왕이라고 되어 있다. 내용은 '삼국사기'와 비슷하다.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은 시호가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후당後唐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연호로 926년에서 930년까지 사용했다.) 2년 정해년(927년) 9월, 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북 영천)에 도착했다. 경애왕은 고려 태조(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날랜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인 11월 겨울에 견훤이 서울(지금의 경주다.)로 엄습해 왔다. 왕은 비빈 및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이르던 말로,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과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느라 적병이 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견훤에게 모두 엎드려 노비로 삼아 줄 것을 애원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조정과 민간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거처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왕을 찾게 했다. 왕과 왕비 및 빈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군중(軍中)으로 끌려나왔다. 견훤은 왕에게는 자진하도록 핍박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풀어 빈첩들을 겁탈하게 했다. 그리고 왕의 족제(族弟, 성과 본이 같은 사람들 중 유복친-상복을 입을 수 있는 가까운 친척-안에 들지 않는 같은 항렬의 아우뻘 남자)인 부(傅)를 왕으로 세웠으니, 왕은 견훤에 의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왕은 전왕의 시신을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신하들과 통곡했다. 태조는 사신을 보내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년(928년) 봄 3월에 태조가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서울 근교에 도착했다.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태조를 영접하여 궁궐로 들어가 서로 마주하면서 마음과 예의를 다했다. 임해전(臨海殿, 월지-안압지- 서쪽에 있던 전각)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왕이 말했다.

 

"과인이 부덕하여 환란을 불러들이고 견훤이 불의를 자행하여 국가를 잃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그러고 눈물을 흘리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목메어 울었으며,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이 정숙하여 추호도 법을 범한 일이 없었다. 도성 사람과 사녀들이 서로 축하하면서 말했다.

 

"지난번 견훤이 왔을 때는 이리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

 

8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말안장을 선물하고, 여러 신하와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청태(淸泰, 후당 폐제廢帝 이종가李從珂의 연호로 청태 2년 태조 18년에 해당한다.) 2년 을미년(935년) 10월에 사방의 국토가 전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국력이 쇠약하고 형세가 고립되어 스스로 버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왕은 신하들과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신하들의 가부(可否)가 분분해지자 태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힘써 본 뒤에 할 수 없으면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 년의 사직을 경솔히 남에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아 이미 보전할 수 없는 형세다. 이미 강성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는데, 나로서는 차마 무고한 백성들에게 더 이상 도탄의 괴로움을 맛보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시랑(侍郞, 신라시대 관직으로 집사부(執事部)·병부(兵部)·창부(倉部)의 차관직이다.) 김봉휴(金封休) 편에 편지를 보내어 태조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곧장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을 말한다.)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 '화엄경'을 받드는 불교 종파로서 두순杜順, 지엄智儼, 법장法藏의 순서로 계승되었다.)에 귀속해 승려가 되었는데, 이름을 범공(梵空)이라고 했다. 범공은 후에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도 한다.

 

태조는 편지를 받아 보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 맞이했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순했는데, 아름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 리를 연달아 뻗쳐 도로의 길목이 막히고 구경꾼들로 담을 이루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가 그를 맞아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고려)의 정승원政丞院이다.)을 내리고,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주었다. 경순왕은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살게 되었기 때문에, 어미와 떨어져 사는 난새에 비유하여 낙랑공주의 호칭을 신란공주(神鸞公主)로 고쳤다. 시호는 효목(孝穆)이다. 김부를 정승(政丞)에 봉하니 지위는 태자 위에 있었으며, 녹봉 1,000석을 주고 시종과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임용했다. 그리고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공의 식읍(食邑,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조세 수입을 독점하도록 한 고을이다.)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와서 항복하자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접하고 산신을 보내 말했다.

 

"이제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큰 것을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종실과 결혼하여 영원히 장인과 사위 같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의 백부 억렴(億廉, 왕의 아버지인 각간 효종은 추봉된 신흥대왕新興大王의 아우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과 용모가 모두 아름다우니 이 사람이 아니면 내정(內政)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억렴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이 여인이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다. 우리 왕조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엮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성왕후 이씨의 본은 경주다.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俠州 지금의 경남 합천이다.)의 군수로 있을 때 태조가 이 주에 행차했다가 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이곳을 협주군(俠州郡)이라고도 한다.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며, 3월 25일을 기일忌日로 하여 정릉(貞陵)에 장사 지냈는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바로 안종(安宗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욱郁으로 그의 아들이 고려 제 8대 왕인 현종이다.)이다." 이 밖에 25명의 비와 주(主) 가운데 김씨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의 역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했으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伷)는 정승공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으니, 바로 헌승왕후(憲承王后)다. 이리하여 정승을 봉하여 상보(尙父, 아보亞父와 같은 말로 아버지에 버금간다는 의미다.)로 삼았는데, 태평흥국(太平興國, 북송 태종太宗 조경趙炅의 연호로 976년에서 984년까지 사용했다.) 3년 무인년(978년)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보를 책봉하는 고문(誥文)에 이렇게 말했다.

 

"칙(勅)하노니, 희씨(姬氏)의 주(周)나라가 나라를 세운 처음에는 먼저 여망(呂望, 주나라의 어진 신하 강태공姜泰公으로 무왕이 상보로 정한 인물이다.)을 봉했고, 유씨(柳氏)의 한(漢)나라가 시작될 때는 먼저 소하(蕭何, 한나라 고조를 도와 승상이 되었던 공신으로 한신을 고조에게 추천한 일화가 유명하다.)를 책봉했다. 이로부터 천하가 크게 평정되고 기업(基業)이 널리 열렸다. 용도(龍圖, 용마龍馬가 가지고 나온 그림으로, 제왕 출현을 알리는 부서符瑞다.)는 30대를 세웠으며 인지(麟趾, 본래 '시경-주남'의 편명으로 한나라 왕실의 국운이 계승됨을 말한다.)는 400년을 이었으니 해와 달이 아주 밝고 천지가 평안했다. 비록 무위(無爲, 노자는 '무위이치無爲而治'라고 말하며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지 작위나 형벌 등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의 군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보좌하는 신하로 말미암아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000천 호(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 食邑 八千戶)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고 관직은 왕의 작위를 나누어 받았다.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에 닿고 문장의 재능은 땅을 흔들 만하다. 풍요로움은 춘추에 있고 귀함은 봉토에 누렸으며, 가슴속에는 육도(六韜)와 삼략(三略, 병서兵書 '육도'는 강태공이 지었고 '삼략'은 황석공黃石公이 지었다고 한다.)이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從五申, 칠종은 제갈량이 남만의 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주었다는 고사로 전략의 탁월함을 비유한 것이다. 오신은 삼령오신三令五申의 준말로 군령이 엄한 것을 말한다.)을 손바닥에서 움직였다.

 

우리 태조가 처음으로 우호를 맺어 일찍부터 그 풍도를 알아 때를 가려 부마의 혼인을 맺어 안으로 큰 절의에 순응했다. 국가가 통일되고 군신이 완연히 삼한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아름다운 법은 빛나고 높았다.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의 칭호를 더하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칭호를 주니, 훈봉(勳封)은 과거와 같고 식읍은 이전의 것과 합쳐 모두 1만 호다. 유사는 날을 택하여 예를 갖추어 책명하고 맡은 사람은 시행하라. 개보(開寶, 북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연호로 968년에서 976년까지 사용했다.) 8년(975년) 10월 어느 날."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내의성內議省의 최고직으로 조선의 영의정에 해당한다.)겸 총한림(摠翰林) 신(臣) 핵선(翮宣)은 위와 같이 칙명을 받들어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받들어 시행하라.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시중(侍中, 문하성門下省의 최고직이다.)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내봉성의 최고직이다.) 서명, 군부령(軍部令) 서명, 군부령 무서(無署, 서명이 없다는 뜻),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명, 광평시랑 무서,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 내봉시랑서명, 군부경(軍部卿) 서명, 병부경(兵部卿) 무서, 병무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보도성령 상주국 낙랑도왕(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都王)식읍 1만 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위와 같이 칙서를 받들고 부(符)가 이르거든 받들어 시행하라.

주사(主事) 무명(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 낭중(郎中) 무명, 서령사(書令史) 무명, 공목(孔目, 회계와 공문서를 맡은 아전으로 '서령사'도 마찬가지다.) 무명,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내림."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박씨(朴氏)와 석씨(昔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금궤에 담겨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고 혹은 금수레를 타고 내려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서로 전하여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여기고 있다 다만 그 처음에는 위에 있는 자가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관대했으며, 관직의 설치는 간략했고, 일을 간단하게 시행했으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배를 타고 조공하는 사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 조정(宋)에 숙위(宿衛, 황제를 숙위하는 직무를 말한다.)하게 하고, 공부하게 했다. 성현의 풍토를 이어받고 거친 풍속을 고침으로써 예의의 나라가 되게 했다. 또 당나라 군사의 위엄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영토를 취해 군현으로 삼았으니 진실로 그 시절에는 성대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면서도 그 폐단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여염 마을에까지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우고, 백성들은 달아나 승려가 되어 군사나 농민이 점점 줄어들고 나날이 쇠미해졌으니, 어찌 나라가 어지럽지 않겠으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러할 때, 경애왕은 더욱 못되고 음탕하여 궁인 및 신하들과 포석정에 놀이를 나가 술자리를 마련하여 연회를 열면서 견훤이 쳐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으니, 문밖의 한금호(韓擒虎, 수나라 노주총관盧州摠管으로 날랜 기마 500명을 이끌고 진나라 공격의 선봉에 섰으며 진나라 후주-숙보叔寶와 장려화를 사로잡았다.)와 누각 위의 장려화(張麗華, 진나라 후주의 귀비貴妃로 지혜로워 후주에게 총애를 받았다.)의 일과 차이가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투항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였지만 잘한 일이었다. 그때 만약 힘써 싸워 죽을 각오로 왕사(王師, 고려 태조의 군사를 뜻한다.)에게 대항하다 힘이 미치지 못하고 형세가 곤궁하게 됐다면, 반드시 그 가족은 멸망했을 것이고 무고한 백성에게 해를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궁궐 창고를 봉쇄하고 군현의 문서를 기록해 귀의했으니, 고려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들에게 덕을 크게 베푼 것이다.

 

옛날 전씨(錢氏, 오월왕 전숙錢叔으로, 자기가 다스리던 13개 주를 송나라에 바쳤다.)가 오월(吳越)을 가지고 송나라로 들어가자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字다. 소식은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송대의 정치가이자 대문호다.)이 그를 충신이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신라 왕의 공덕은 그보다 더욱 크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아주 많아 자손도 번창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자로 보위에 올랐고, 이후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국토를 바치고 멸망한 후에 아간 신회(神會)가 외직(外職)을 그만두고 돌아와 황폐해진 도성을 보고는 서리리(黍離離)의 탄식(주나라 대부가 주나라 왕실의 몰락을 보고 탄식하여 지은 시로 '시경'의 편명이다.)이 있어 노래를 지었지만, 그 노래는 유실되어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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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소재 경애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55대 경애왕(景愛王, 재위 924~297, 이름은 위응魏膺, 제53대 신덕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城王后 김씨이다.)이 즉위한 동광(同光, 후당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의 연호로 923년에서 926년까지 사용했다.) 2년 갑신년(924년) 2월 19일, 황룡사에 백좌(百座, '인왕백면좌회仁王百面座會'의 줄임말로 하루에 백 자리를 베푸는 불교 설법 행사다.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호국 경전인 '인왕경'이 이 의례에 사용된다.)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아울러 선승(禪僧) 300명에게 공양한 다음 대왕이 직접 향을 피워 불공을 올렸다.

이것이 백좌로서 선(禪)과 교(敎, 참선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일반적인 불교를 '교'라고 한다.)가 함께 한 시초가 된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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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소재 신라 제42대 흥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 재위 826~836, 41대 헌덕왕 김언승의 동생)은 보력(寶歷, 당唐나라 경종敬宗 이담李湛의 재위기간 825~827년 연호) 2년 병오년(826년)에 즉위했다. 얼마 후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鸚鵡)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자 외로운 수컷이 구슬프게 울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앞에다 거울을 달아 주었다. 앵무새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는 자기 짝으로 여겨 거울을 쪼았는데, 그것이 자기 모습인 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왕이 이를 노래로 지었다 하는데 자세하지는 않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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