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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암살 당하기 전 술을 마시고 말을 거꾸로 타고 선죽교로 향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왜?




포은 정몽주는 낙마해 크게 다친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유명한 이방원의 '하여가'와 포은선생의 '단심가'는 바로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 삼아 정몽주와 이방원이 만났을 때 서로 주고 받았던 시조입니다.

나와 함께 대업을 이루자는 이방원과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정몽주 간에 당시 팽팽했던 대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내용이죠.



하여가 (何如歌)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丹心歌)- 정몽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했다고도 하는데,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꺼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랑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고 합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지만,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고 했다는데요,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너무 취해 그러는가 하고 의아해 물으니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정몽주는 곧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던 거죠.


포은 정몽주(1337~1392)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로 향했는데,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멀리 숨어 있던 궁사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순간 조영규가 이끄는 고여, 조평 등 5~6명의 괴한이 나타나 부상당하고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와 철편으로 때려 암살했습니다.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5년 이후 김구선생이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암살을 당한 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이 다리는 원래 선지교라고 하였으나 다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어졌고,

당시 정몽주의 나이는 향년 56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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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도담삼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출처: Steve46814 at ko.wikipedia.com]


 정도전(1342~1398)의 호는 삼봉(三峯). 자는 종지(宗之), 본관은 봉화로서 아버지는 정운경(鄭云敬)이고 어머니는 우연(禹淵)의 서녀(庶女)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362(공민왕 1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375(우왕 1)년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관리로 임명된 것에 반발하였다가 나주로 귀양갔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권력을 잡자 그의 천거로 요직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공신에 책봉되었다. 1391(공양왕 3)년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의 탄핵으로 봉화로 유배되었다가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한 뒤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이 해에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강씨의 둘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군사와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1396년 명나라에서 외교 문서의 내용을 문제삼아 정도전에게 명나라로 입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거부하였다. 1397년 요동 정벌을 주도하였으나 이듬해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

위로는 음양을 조화롭게 하고 아래로는 서민을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진정하고 무마하는 것이니 국가의 포상과 형벌이 여기에 관련되며 천하의 정치와 명령이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진 삼봉집/한국학중앙연구원]


'삼봉집'은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우왕 말년에 작성된 권근(權近)의 서문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처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1397(태조 6)년에 아들 정진(鄭津)에 의해 증보 간행되었는데, 이 때까지는 서문이 중심이었다. '삼봉집'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중간되었다. 1465(세조 11)년에 손자 정문형(鄭文炯)이 '경제문감(經濟文鑑)',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심문천답(心問天答)' 등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이어 1481(성종 18)년에는 정문형이 시부(詩賦) 100여 수와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1791(정조 15)년에 왕명에 따라 성종대의 판본을 정리하여 다시 간행하였는데, 현재 전해지는 판본의 대부분은 정조 때 간행된 것이다.

 '삼봉집'은 모두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1에서 권 4까지는 각종 시문과 악장(樂章)이며, 권 5는 '불씨잡변', 권 6은 '심기리편'과 '심문천답', 권 7은 진법(陣法)과 습유(拾遺), 권 8은 부록, 권 9와 권 10은 '경제문감', 권 11과 12는 '경제문감별집', 권 13과 권 14는 '조선경국전'이다.

 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대체로 시문(詩文), 경세서(經世書), 사상서(思想書), 병서(兵書), 악장(樂章) 등 다섯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삼봉집'은 고려를 대신한 조선 국가의 사상적, 법제적 기초를 닦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불교를 대신하는 성리학의 이념적 위치를 확립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불씨잡변'은 고려 말에 활발히 제기된 배불론을 집대성한 것이면서 종래의 단선적 비판을 넘어 체계적 비판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제시된 비판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성리학의 우위를 제시한다는 정치적 목적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논리가 일방적 성향을 띠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체계적 비판은 성리학의 정착을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후 기존 이념에 대한 비판의 수준을 넘어 당대의 이념으로서 그 내용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한편 법제적 관점에서 보면, 15세기 조선 국가 체제 정비의 초석을 놓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조선은 태조대에 '경제육전'의 편찬을 시작으로 육전 체제에 입각한 법전의 정비를 모색하였고, 이것은 영구히 지켜 나갈 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조선경국전'은 바로 법전에 입각한 국가 운영이라는 정책 지향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육전의 내용 중에서도 '헌전'을 특히 강조하며 후서(後序)를 덧붙인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삼봉집'은 조선 국가의 중심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과 법전 체제의 바탕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조선 당대에 지성사적으로 높이 평가받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정도전이 태종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제거되었던 사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후대의 학인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정도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따라 '삼봉집'도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 '삼봉집'에서 제시한 조선 국가 체제의 이념적 원리가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1791(정조 15)년에 왕명으로 '삼봉집'이 다시 간행된 것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정조는 1785(정조 9)년에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전 체제의 재정비를 도모한 바 있다. '삼봉집'의 재간행도 그러한 관심의 한 반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삼봉집'은 조선 일대에 걸쳐 국가 체제의 토대가 된 저작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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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정종 3)~1031(현종 22). 고려 현종 때의 장군.

1010년과 1018년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특히 우리나라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구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본관은 금천(衿川).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헌복시(任軒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그뒤 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고, 1018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했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조정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이에 놀란 조정의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은 이를 반대하고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왕을 나주로 피신하게 했다. 왕의 피신중에 양규(楊規)가 곽주(郭州)에서 적을 무찌르고, 하공진(河拱辰)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고려는 항복의 치욕을 면하게 되었다.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현종이 친히 조회(朝會)하지 않은 것과 강동(江東) 6성을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 : 지금의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 : 지금의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다. 침략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니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했다. 거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검교태사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文宗)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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