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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38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朝鮮古地圖)'는 한 축의 조선전도를 표시한 지도로 조선 전체는 물론 독도와 만주의 일부까지도 자세히 표현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로 272.7cm에 가로 137.9cm의 크기를 자랑하는 대형 축적의 지도이며, 세견(細絹, 비단의 일종)을 재료로 세 폭을 이어 만든 바탕에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이어지는 산맥과 물줄기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330여 개의 고을과 병영(兵營), 수영(水營), 산성(山城), 역원(驛院)을 비롯해 도로와 교통정보, 행정, 군사 등의 정보가 상세하게 표시 되어 있다. 특히 돋보이는 부분 중에 하나는 바로 현대의 지도처럼 역권, 진보(鎭堡, 조선 전기 지방의 군대 소집 체계인 진관鎭管의 최하단위), 봉수, 고개 등을 기호화 하여 지도의 가독성을 높인 점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특징과 표시된 내용 등을 종합해 보았을 때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의 원본을 기초로 도화서의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 지도의 제작 시기는 18세기 중반인 1755년에서 1757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1767년에 산청(山淸)과 안의(安義)로 바뀌는 산음(山陰)과 안음(安陰)의 지명이 변경 이전의 지명으로 표시되어 있는 점 등이 그 근거이다.
'동국대지도'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당시 과학적인 축적법인 '백리척(百里尺, 1척을 100리로, 1촌을 10리로 기준하여 계산한 축적법)을 적용하여 제작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축적법이 밝혀진 지도일 뿐만 아니라 축적법을 통해 도별도를 이으면 전국도가 되도록 고안되었으며, 산맥의 명확한 표현, 도별 채색 등을 통해 지도의 가독성을 높이는 등 당시 지도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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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 486호 채용신 필 운낭자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등록문화재 486호 채용신 필 운낭자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등록문화재 486호 채용신 필 운낭자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1914년에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것으로 운낭자상(雲娘子像, 蔡龍臣筆雲娘子肖像)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초상화의 실제 주인공은 최연홍(1785~1846)이라는 기녀이다. '운낭자'는 최연홍의 초명이다.

운낭자는 원래 평안남도 가산고을의 청기(廳妓, 수청을 드는 관기)로서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군수와 시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녀의 남편과 시부모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내고 시동생을 극진히 간호하여 회생케 하였다고 하며, 이 일로 홍경래의 난이 평정된 후 나라에서 그녀를 표창하여 기적(妓籍, 기생들의 등록 대장)에서 제외시키고, 그 초상화를 계월향의 사당인 평양의 의열사(義烈祠)에 함께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단정하게 빗어내린 쪽머리에 잠을 꽂고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다. 통통하게 살이 찐 아이를 안고 있는 저고리 아래로 젖가슴이 살짝 보이는 것은 당시 풍속(아들을 낳아 엄마가 자랑으로 젖가슴을 살짝 드러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치마주름 사이로 살짝 드러난 반달 모양의 흰버선이 나타나는 특징은 18~19세기의 미인도에 흔히 표현되는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동아대학교 소장 <미인도>와 전 채용신 작품인 <팔도미인도병(八道美人圖屛)>의 양식과 부분적으로 유사하며, 그림의 우측에 있는 '운낭자이십칠세상' 이라고 하는 제기(題記, 작품에 적힌 제목)를 통해 운낭자가 27세의 젊은 엄마였던 시기에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채용신은 칠곡군순, 정산군수 등을 지내고 종2품관까지 지낸 인물로 조선말기 우국지사나 항일투사의 초상화를 많이 제작했으며, 고종의 어진과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등을 그렸으며,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황장길부인상(黃長吉夫人像) 등의 여인상도 그렸다. 그의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을 사용해 얼굴의 육리문 묘사에 주력하고, 서양의 데생작업과 유사한 많은 필선을 사용해 요철,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한 점 등이 특징으로 꼽힌다.

그림 크기

전체 120.5X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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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그림감상'은 가로 23.9cm 세로 28.1cm 크기의 작품으로, 유생들이 세로로 길게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잡고 빙 둘러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림을 감상하는 유생들의 표정이 모두 다르게 표현돼 있는데, 등장 인물들의 표정이 각기 매우 진지하다. 특히 한 유생은 그림에 침이라도 튈까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그림을 감상하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다. 작품에서 종이에 그려진 그림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태도와 표정들에서 유생들의 진지함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그림감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그림감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그림감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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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326호 '사여래도(四如來圖)'는 각기 다른 부처의 모습 즉, 아미타불, 약사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의 설법회를 하나의 화면에 표현한 가로 74cm, 세로 90cm 크기의 불화이다.

이 불화는 1562년(명종 17) 그려졌으며, 중종(中宗, 1488~1544)의 다섯 번째 아들인 덕양군(德陽君, 1524~1581)의 장남 풍산군 이종린(豊山君 李宗麟, 1538~1611)이 1560년에 세상을 떠난 외조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권찬(權纘)을 비롯한 가족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발원해 조성되었다. 왕실 종친에 의해 발원된 조선 중기 대표적 불화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보물 1326호 사여래도(四如來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6호 사여래도(四如來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6호 사여래도(四如來圖)/ⓒ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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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은 당대 최고의 궁중 예술가들이 최고의 재료를 이용해 그림과 글로 궁중행사를 기록한 것으로 조선 후기 문화의 품격을 잘 알려주는 작품이다.

기사(耆社)란 원래 70세 이상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중신을 우대하기 위해 만든 모임으로,

이 첩은 1719년(숙종 45) 4월 17일과 18일에 있었던 중신들의 경로잔치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것으로 1720년에 완성되었다.

이유(李濡)·김창집(金昌集)·김우황(金宇杭)·황흠(黃欽)·최규서(崔奎瑞)·강현·홍만조(洪萬朝)·이선부(李善溥)·정호(鄭澔)·신임(申醐)·임방(任埅) 등 11명이 참석대상자였으며, 왕이 친히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첩은 모두 12부를 만들었는데, 1부는 기사의 관청에서 보관하고 11부는 참석한 중신 11명이 각 1부씩 나눠가졌다고 한다.

계첩의 그림은 김진여(金振汝)·장태흥(張泰興)·박동보·장득만(張得萬)·허숙(許俶) 등 인물과 초상에 능한 5명의 화원이 담당했으며, 숙종이 내린 글, 서문과 발문,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 참석 중신들의 초상과 직접 쓴 축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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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은 소당 이재관(小塘 李在寬, 1783-1838,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로 본관은 용인, 자는 원강, 호는 소당, 벼슬은 감목관을 지냈다. 전통적인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남종화의 세계를 이룩한 화가이다.)의 작품으로 초상화의 상단에 "若山眞影 小塘寫(약산의 진영 소당이 그림)"이라 쓰여 있어 초상화의 주인공이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였던 약산 강이오(若山 姜彛五, 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임을 알 수 있다. 강이오는 정조 시대 예단(藝壇, 예술계) 총수 격이었던 강세황(姜世晃)의 손자로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문인화가로서는 널리 이름을 알렸다. 당시 예술작품에 대한 감식안이 높았던 추사 김정희나 신위(申緯, 조선 후기의 문신·화가·서예가)의 글 속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강이오의 초상화는 섬세한 필력을 바탕으로 강이오의 차분한 인상이 특징적으로 잘 묘사되었고, 능숙하고 빠른 속도로 그려낸 의습선(옷의 주름 등을 표현하는 필선)은 이재관의 개성적인 필법인 날카로운 각선들로 표현되었다. 초상화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이재관과 강이오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김정희가 초상화를 평한 글과 '노염제(老髥題)'라는 서명이 있으며 '염(髥)', '추사(秋史)'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통해 이재관이 강이오의 초상화를 그린 까닭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그 까닭은 아마도 그들이 1833년 창경궁영건공사와 1838년 태조 어진 모사 작업에 참여한 인연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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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96호 '윤급 초상'은 가로 113.3cm 세로 151.5cm 크기의 윤급(尹汲, 1697(숙종 23)∼1770(영조 46). 조선 후기의 문신)의 관복전신좌상이다.

사모(紗帽,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를 쓰고 서대(犀帶, 조선 시대 일품의 벼슬아치가 허리에 두르던 띠로 조복, 제복, 상복에 둘렀으며 무소의 뿔로 장식하였다.)를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를 부착한 현녹색 단령(團領, 조선 말기까지 모든 관원이 평소 집무복으로 착용한 상복)을 입고 있으며, 표피를 덮은 의자에 앉아 화문석(花紋席, 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이 깔린 족좌대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은데, 이러한 양식은 18세기 초 이후에 보이는 양식이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왼쪽 귀가 보이도록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향하게 표현한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적 특색인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 형식으로, 쌍학문의 흉배는 구름을 수놓은 것 같이 표현하고자 구름의 윤곽선을 곡선이 아닌 짧은 단선을 세로로 그어 표현하였다.

그림에서 배 부분을 가장 어둡게 처리하여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느낌을 살렸으며, 의자와 족좌대의 나뭇결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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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88호 '강민첨 초상'은 경상우병사 이연필(李延弼, 생년미상~1803)이 진주에 있던 원본을 1788년 화원 박춘빈에게 옮겨 그리게 하여 강원도 회양 관아로 보낸 것이다.

이 그림이 그려져 전달된 곳인 당시 회양 관아는 강민첨의 후손인 강세황이 회양부사로 부임한 아들 강인과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이 초상화의 모사에 강세황이 관여해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상의 주인공인 강민첨(姜民瞻, 963(광종 14)∼1021(현종 12))은 고려시대 전기 문신이자 장군이며, 진주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시조로 강세황(姜世晃, 1713(숙종 39)∼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이자 평론가)의 17대조이다.


[강세황 초상 보기]


강민첨은 1016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 고려시대 내의성(內議省)의 종4품 관직)이 되었고,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대장군으로 평장사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홍화진에서 적을 대파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은열(殷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공신각에 초상이 걸렸다고 전한다.

이 초상에서 강민첨은 머리에 관모인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쓰고, 중국 송(宋)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고려시대 관복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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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685-1호 '추사 김정희가 쓴 묵소거사 자찬'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정중하게 정성을 담아 쓴 듯한 글씨로 글씨형이 세장(細長, 가늘고 길다)하며, 날카롭고 변화가 큰 필획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묵소거사(默笑居士)'는 추사 김정희의 친한 친구였던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의 호로 이 글은 '묵소거사'라는 호를 지은 뜻을 담고 있는데, 작품을 감싼 장황 주변에 찍힌 엽전 모양의 둥근 인장들 또한 김유근의 것으로 친구인 김유근과 이 글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 내용을 보면,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시중(時中)에 가깝고, 웃어야할 때 웃는다면 중용(中庸)에 가깝겠지.

옳고 그름을 판단 할 때나, 세상에서 벼슬하거나 또는 은거를 결심할 시기가 찾아 올 때는 그 그동은 천리(天理)를 위반하지 않고,

그 고요함은 인정(人情)을 거스리지 않으리.

침묵할 때 침묵을 지키고, 웃을 때 웃는다는 의미는 대단하도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의 뜻을 알릴 수 있으니, 침묵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중용의 도를 터득하여 나의 감정을 발할 수 있으니, 웃는다 한들 무슨 걱정이 되랴.

힘쓸지어다.

나 자신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화는 면할 수 있음을 알겠다.

묵소거사가 스스로 찬(讚)하노라."구절로 돼 있다.


보물 1685-1호 '추사 김정희가 쓴 묵소거사 자찬'/ⓒ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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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자리짜기'는 자리를 짜고 있는 아버지와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뒤로 막대기로 힘있게 짚어가며 긁을 읽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 부모는 뒤에서 힘차게 글을 읽는 아들이 자랑스럽고 대견해 힘든 노동도 힘든줄 모르고 집중하고 있다.

쉼없이 힘든 노동을 해야하는 빡빡한 현실 속에서도 다시 힘을 내게 하는 서민가정의 유일한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림이다.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자리짜기/ⓒ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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