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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감호를 주제로한 전래동화책(호랑이 처녀의 사랑/강숙인 글, 김종민 그림)/ⓒ교보문고

 

김현감호(金現感虎) :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

 

신라 풍속에 해마다 음력 이월(仲春)이 되면 초여드렛날에서 보름날까지 서울의 남녀들이 다투어 흥륜사(興輪寺, 법흥왕 때 신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절로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지금은 1980년대에 새로 지은 절이 있다.)의 전탑을 돌면서 복을 빌었다. 원성왕(元聖王, 신라 제38대 왕, 재위 785~798년)에 화랑 김현(金現)이 밤이 깊도록 혼자 쉬지 않고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이때 한 처녀가 염불을 외면서 뒤따라 돌다가 서로 눈길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탑돌이를 마치고는 조용한 곳으로 가 정을 통했다. 처녀가 막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려 했다. 처녀가 사양했으나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김현감호를 주제로한 전래동화책(호랑이 처녀의 사랑/강숙인 글, 김종민 그림)/ⓒ교보문고

 

서산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으로 들어갔는데, 노파가 있어 처녀에게 물었다.

"따라온 사람이 누구냐?"

처녀는 사실 대로 말했다.

노파가 말했다.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없었던 것만 못하구나.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어쩌겠느냐? 은밀한 곳에 숨겨 주어라. 네 오라비들이 나쁜 짓을 할까 걱정된다."

처녀는 김현을 구석진 곳에 숨겨 주었다.

 

얼마 후 호랑이 세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오더니 사람의 말로 얘기했다.

"집에서 비린내가 나니 요기를 했으면 좋겠다."

노파와 처녀가 꾸짖었다.

"너희들 코가 어떻게 되었구나. 어찌 미친 소리를 하느냐?"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남의 생명을 빼앗기를 좋아하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행을 징계하겠다."

세 호랑이가 이 말을 듣고 모두 근심하는 빛을 띠자 처녀가 말했다.

"만약 세 오라비가 멀리 피해 스스로 뉘우친다면 제가 대신 그 벌을 받겠습니다."

 

모두 기뻐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도망갔다.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했다.

"처음에 저는 낭군께서 저희 집에 오시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오지 못하게 했던 것인데, 지금은 숨길 것이 없으니 감히 속마음을 털어놓겠습니다. 비록 제가 낭군과 같은 부류는 아니지만 하룻밤의 즐거움을 같이 했으니 그 의리는 부부의 결합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 오라비의 악행을 이미 하늘이 미워하니, 우리 집안의 재앙을 제가 감당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에 죽어 은혜를 갚는 것과 한가지겠습니까? 제가 내일 거리로 들어가 사람을 심하게 해치면 나라 사람들은 저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께서는 반드시 높은 벼슬을 내걸고 저를 잡으려 할 것입니다. 그때 낭군께서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 북쪽 숲 속으로 오시면 제가 낭군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이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귀는 것은 인륜의 도리지만, 다른 부류와 사귀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운명인데,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서 요행으로 한세상의 벼슬자리를 바라겠습니까?"

 

여인이 말했다.

"낭군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지금 제가 일찍 죽는 것은 하늘의 명이고 저 또한 바라는 바입니다. 낭군의 경사고 우리 가족의 축복이며 온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하나가 죽어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게 되는데 어찌 꺼려하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해 절을 짓고 강론하여 좋은 업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게 해 주시면 낭군의 은혜는 더없이 클 것입니다."

 

김현과 처녀는 서로 울면서 헤어졌다.

다음 날 과연 사나운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사납게 해치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원성왕은 그 소식을 듣고는 명을 내렸다.

"호랑이를 잡는 사람에게는 2급의 벼슬을 주겠다."

김현이 궁궐로 가서 아뢰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원성왕은 벼슬을 내리고 그를 격려했다.

김현이 칼 한 자루를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니, 호랑이는 처녀로 변신하여 웃으면서 말했다.

"어젯밤 낭군과 함께 은근히 나눈 말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제 발톱에 다친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 곧 나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처녀가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찌르자 바로 호랑이가 되었다. 김현이 숲에서 나와 말했다.

"지금 여기에서 호랑이를 쉽게 잡았다."

김현감호를 주제로한 전래동화책(호랑이 처녀의 사랑/강숙인 글, 김종민 그림)/ⓒ교보문고

 

사정은 말하지 않고 단지 호랑이가 일러 준 대로 사람들을 치료하게 하니, 그 상처가 모두 나았다. 지금 풍속에서도 호랑이에게 입은 상처는 이 방법으로 치료하고 있다.

 

김현은 등용된 후 서천(西川) 가에 절을 세우고 호원사(虎願寺, 현재 경주 황성공원에 터가 남아있다.)라 했다. 항상 <범망경(梵網經, 색계 제4천인 마혜수라대범천궁(摩醯首羅大梵天宮)에 있는 그물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경전의 이름이다. 알려져 있기를 욕계 도리천 제석천궁에는 인타라망(帝網)이란 그물이 있고 색계 대범천궁에는 범망이라는 그물이 있다 한다.-불교신문>을 강론하여 호랑이의 명복을 빌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어짊을 이루어 준 은혜를 갚았다. 김현이 죽을 즈음에 전에 있었던 이상한 일에 매우 감동하여 전기를 적었으므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 기록을 <논호림(論虎林)>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경주 황성공원 호원사터/ⓒ황성신문

 

정원(貞元, 당나라 덕종德宗 이괄李适이 785년~805년 8월까지 사용한 세번째 연호이자 마지막 연호) 9년(793년)에 신도징(申屠澄, 신도징은 불교와는 큰 관련이 없는 인물로 다음 이야기는 송나라 원래 태평광기太平廣記 429권에 실려 있던 것이다.)이 야인(野人)으로 서 한주(漢州)의 십방현(什邡縣, 중국 촉한 유비의 본거지였던 사천성의 작은 현)의 현위가 되어 부임지로 가는데, 진부현(眞符縣) 동쪽 10리 남짓 되는 곳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갑자기 눈보라와 매서운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길가에 초가집이 있어 들어가니 안에 불이 피워져 있어 매우 따뜻했다. 등불이 켜진 곳으로 가 보니 늙은 부부와 처녀가 불 가에 둘러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 처녀는 열네댓 살쯤 되어 보였다. 비록 헝클어진 머리와 때묻은 옷을 입었지만 눈처럼 하얀 살결에 볼이 꽃처럼 부드럽고 몸가짐이 고왔다.

 

노부부는 신도징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 말했다.

"손님이 추위와 눈을 무릅쓰고 왔으니, 앞으로 오셔서 불을 쬐시지요."

 

신도징이 한참 동안 앉아 있었으나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눈보라가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이 말했다.

"서쪽 현까지 가기에는 아직도 머니 여기서 자고 가게 해 주십시오."

노부부가 말했다.

"진실로 초가집이 누추하다고 여기시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신도징이 말안장을 풀고 이부자리를 폈다.

그 처녀가 바르고 단정한 손님의 행동을 보고는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장막 속에서 나오는데, 아름다운 자태가 처음보다 훨씬 더했다. 신도징이 말했다.

"어린 낭자의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납니다. 다행히 미혼이라면 감히 청혼을 하고 싶은데 어떠하십니까?"

노부부가 말했다.

"뜻밖의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정해진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신도징은 사위의 예를 올리고 타고 온 말에 여자를 태우고는 길을 떠났다.

부임지에 가 보니 봉록이 매우 적었지만 아내가 힘써 일하여 집안을 꾸려 나갔으므로 항상 마음에 즐거운 일뿐이었다. 그 후 임기가 끝나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1남1녀를 두고 있었다. 아이들이 매우 총명하였으므로 신도징은 안래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했다.

 

일찍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렇다.

 


한 번 벼슬하니 매복(梅福, 한나라의 학자로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처자를 버리고 구강九江으로 가서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에게 부끄럽고,

삼 년이 지나니 맹광(孟光, 중국 동한의 양홍梁鴻이라는 학자의 아내이며, 중국 고대 4대 추녀 중 한 사람이지만 어진 아내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에게 부끄럽다.

이 정분을 어디에 비유할까.

시냇가에 원앙새는 날아다니는데.


그의 아내는 종일 이 시를 읊조리며 화답하는 듯했으나 소리 내어 읊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오려 하자, 아내가 갑자기 슬픈 기색으로 신도징에게 말했다.

"이전에 시 한 편을 주셨으니 화답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읊었다.


금실 같은 정이 비록 중하다 하지만

숲 속의 뜻이 절로 깊다.

시절이 변하는 것을 언제나 근심하고

백 년을 함께 살 마음 저버릴까 저어하네.


그 후 함께 예전에 아내가 살던 집을 찾아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매우 그리워하며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벽 모서리에 호랑이 가죽 한 장이 있는 것을 보더니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 있을 줄 몰랐다."

 

아내가 그것을 재빨리 뒤집어쓰자 호랑이로 변해 으르렁거리며 할퀴다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신도징이 놀라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간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며 며칠 동안 통곡했으나 끝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오호라! 신도징과 김현이 사람이 아닌 종류를 접했을 때 사람으로 변해 아내가 된 것은 같으나, 신도징의 호랑이가 사람을 저버리는 시를 주고 나서는 울부짖으며 할퀴며 달아난 것이 김현의 호랑이와는 다르다. 김현의 호랑이는 부득이해서 사람을 해쳤으나 좋은 약방문으로 사람을 구했다. 짐승도 그처럼 어질었는데 지금 사람으로 태어나 짐승만도 못한 자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의 앞뒤를 꼼꼼히 살펴보면, 절을 도는 중에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이 악행을 징계하려 하자 자신이 대신했다. 또 신기한 방법을 전하여 사람을 구했고, 절을 세워 불계(佛戒)를 강론하게 했다. 비단 짐승의 성품이 어질었을 뿐만 아니라 대개 부처가 미물에 감응하는 방법이 여러 방면이어서 김현이 정성껏 탑을 돌자 감응하여 보답하고자 한 것이니, 그때 복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산골집 세 오라비의 악행이 모질어도

고운 입에 한 번 맺은 가약 어찌 감당하리.

의리의 중함이 몇 가지 되니 만 번 죽음도 가벼이 여기고,

숲 속에서 맡긴 몸은 떨어지는 꽃처럼 없어졌네.

 

-삼국유사 권제5, 감통(感通)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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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이 1978년에 제작한 원효대사 영정/ⓒ국립현대미술관

 
성사(聖師) 원효(元曉)는 세속의 성이 설씨(薛氏)고,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며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원효의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일대이며, 설총과 일연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지금의 경산시 남산면에는 삼성현(원효, 설총, 일연)을 테마로 하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어있다.) 남쪽 불지촌(佛地村)의 북쪽 밤골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불지촌은 간혹 발지촌(發知村-속어로는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고 한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명의 음운학적인 이유와 설총의 생가가 있었던 유곡동이 바로 이웃마을이라는 것, 그리고 근처 당음동이 원효의 탄생지라는 전설이 남아 있는 것 등을 들어 현재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 부근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분홍, 「원효행장신고-재의수칙의 시론」, ≪논문집≫ 4, 마산대학, 1082, 293쪽))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라는 것을 세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원효와 설총이 살던 마을 유음곡동(지름골) 전경/ⓒ경산인터넷뉴스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원효대사 영정/ⓒ범어사

 
"법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배어 달이 찼는데 마침 이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었다. 급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놓고 그 안에 누워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다. 그 나무의 열매 또한 보통 것과는 달라서 지금까지도 사라율(裟羅栗)이라고 부른다."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전경/ⓒ경산시문화관광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어떤 절의 주지가 종에게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자 종이 적다고 관아에 소송했다. 관리가 괴이하게 여겨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니 한 알이 사발 하나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그래서 밤나무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의 원효대사 기념물/ⓒ경산시문화관광

 
법사가 출가하고서 그 집을 내놓아 초개사(初開寺)라 이름 짓고, 나무 옆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불렀다.
 
범사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는 할아버지의 사적을 좇은 것이다."라고 했으나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경산 초개사 전경(신림사)/ⓒ경산인터넷뉴스

 
이를 살펴보면, 인덕(麟德, 664년~665년까지 사용한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 2년 사이에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했는데, 하주는 바로 지금의 창녕군(昌寧郡)이다. 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속한 현이며,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로 간혹 상주(湘州)라 쓰기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慈仁縣, 757년부터 1895년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으로 현재 경산시의 정중앙에 있는 면이다. 원래 경주부의 속현이었으나 분리되고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전까지 경산, 하양, 자인 중에서 자인군의 중심을 맡은 곳이었으며 2020년 1월 1일 압량면이 압량읍으로 승격되면서 경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면이 되었다.)에 속하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것이다.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의 원효대사 기념물/ⓒ경산시문화관광

 
법사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고 또 다른 이름은 신당(新幢, 여기서 당幢은 세속에서 털毛이라고 한다.) 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똥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는데, 출산을 하게 되자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이때가 진평왕 39년인 대업(大業, 605년~618년까지 사용한 수나라 양제煬帝 양광楊廣의 연호) 13년(617년) 정축년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스승을 좇지 않고 혼자 배웠는데, 그가 사방을 떠돌던 시말(始末)과 성대하게 편 포교의 자취들은 모두 <당전(唐傳)>과 그의 행장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 다 기록하지 않고, 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대사가 어느 날 일찍이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誰許沒柯斧
누가 내게 자루(남성을 상징) 없는 도끼(여성을 상징, 파계승을 암시, 자루 없는 도끼는 과부를 상징)를 주려는가
我斫支天柱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 무열왕이 이 말을 듣고는 말했다.
"이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現경주향교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 궁궐에 딸린 구실아치, 궁궐의 일을 맡아 보던 사람)를 시켜 원효를 불러 오게 했다. 궁리가 왕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보니, 이미 남산을 거쳐 문천교(蚊川橋, 남천을 건너 요석궁으로 가던 다리로 지금도 경주에 그 터가 남아 있다.)를 지나고 있었다.

경주향교/ⓒ경주시문화관광
경주향교/ⓒ경주시문화관광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 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다 가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책에 널리 통달했으니, 신라의 10현(賢) 중 한 사람이다. 방음(方音, 한자의 음이나 훈을 가져와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나 향찰식 언어)으로 중국과 신라의 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 유학에서 중시한 여섯 가지 경전으로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춘추(春秋)를 가리킨다.)과 문학에 토를 달고 풀이했으니, 지금도 신라에서 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고 있다.

설총 영정/ⓒ국립현대미술관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부터 속인의 이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매우 낮은 사람)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瓠)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으므로 그 셩상을 따라 도구(道具)를 만들었다. <화엄경(華嚴經)>의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마음에 거릴낄 것이 없는 사람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 도를 이룬다.-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㝵人一道出生死)" 라는 구절을 따서 무애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원효는 이것을 지니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뽕나무 농사 짓는 늙은이나 옹기장이, 무지몽매한 무리에게도 모두 불타의 이름을 알리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으니, 원효의 교화가 컷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태어나 인연 맺은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의 이름을 초개사라 했으며, 스스로 원효라 부른 것은 아마도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의미다. '원효'라는 이름 역시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은 향언(鄕言, 우리말)으로 '새벽'이라고 했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0 <회향품(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꺾었다. 또 송사 때문에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니 모두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 보살이 수행하는 오십이 계위 중 십 지위의 첫 단계인 환락지歡樂地를 말한다.)라고 했다. 또 바다 용의 권유로 길가에서 조서를 받들고 <삼매경소(三昧經疎)>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 원효의 불교를 뜻하는 것으로,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본각(本覺, 각이 모든 중생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는 뜻)과 시각(視覺, 어떤 계기를 만나 그 본타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경우)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 이 또한 음을 알아 화답하여 부른 것이었다.

국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경주시문화관광

 
그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참 얼굴(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슬픔의 뜻을 표했다. 그때 설총이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채 그대로 있다. 일찍이 원효가 거주하던 혈사(穴寺, 바위 구멍, 석굴, 토굴 등 수행자가 수행하던 곳)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각승초개삼매축 角乘初開三昧軸
 각승으로 처음 삼매축을 열었고
무호종괘만가풍 舞壺終掛萬街風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에 유행했네.
월명요석춘면거 月明瑤石春眠去
달 밝은 요석궁 봄의 꿈은 지나가고
문엄분황고영공 門掩芬皇顧影空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그림자가 공하다.

 
-삼국유사 권 제4, 의해(義解)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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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경천묘 신라 제56대 경순왕 어진/ⓒ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소재 신라 제56대 경순왕릉/ⓒ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부는 경순왕의 성과 이름이다. 본문에서 경순왕이라고 해야 하지만 시호를 쓰지 않았다. '왕력' 편에는 경순왕이라고 되어 있다. 내용은 '삼국사기'와 비슷하다.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은 시호가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후당後唐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연호로 926년에서 930년까지 사용했다.) 2년 정해년(927년) 9월, 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북 영천)에 도착했다. 경애왕은 고려 태조(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날랜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인 11월 겨울에 견훤이 서울(지금의 경주다.)로 엄습해 왔다. 왕은 비빈 및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이르던 말로,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과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느라 적병이 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견훤에게 모두 엎드려 노비로 삼아 줄 것을 애원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조정과 민간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거처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왕을 찾게 했다. 왕과 왕비 및 빈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군중(軍中)으로 끌려나왔다. 견훤은 왕에게는 자진하도록 핍박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풀어 빈첩들을 겁탈하게 했다. 그리고 왕의 족제(族弟, 성과 본이 같은 사람들 중 유복친-상복을 입을 수 있는 가까운 친척-안에 들지 않는 같은 항렬의 아우뻘 남자)인 부(傅)를 왕으로 세웠으니, 왕은 견훤에 의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왕은 전왕의 시신을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신하들과 통곡했다. 태조는 사신을 보내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년(928년) 봄 3월에 태조가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서울 근교에 도착했다.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태조를 영접하여 궁궐로 들어가 서로 마주하면서 마음과 예의를 다했다. 임해전(臨海殿, 월지-안압지- 서쪽에 있던 전각)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왕이 말했다.

 

"과인이 부덕하여 환란을 불러들이고 견훤이 불의를 자행하여 국가를 잃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그러고 눈물을 흘리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목메어 울었으며,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이 정숙하여 추호도 법을 범한 일이 없었다. 도성 사람과 사녀들이 서로 축하하면서 말했다.

 

"지난번 견훤이 왔을 때는 이리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

 

8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말안장을 선물하고, 여러 신하와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청태(淸泰, 후당 폐제廢帝 이종가李從珂의 연호로 청태 2년 태조 18년에 해당한다.) 2년 을미년(935년) 10월에 사방의 국토가 전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국력이 쇠약하고 형세가 고립되어 스스로 버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왕은 신하들과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신하들의 가부(可否)가 분분해지자 태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힘써 본 뒤에 할 수 없으면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 년의 사직을 경솔히 남에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아 이미 보전할 수 없는 형세다. 이미 강성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는데, 나로서는 차마 무고한 백성들에게 더 이상 도탄의 괴로움을 맛보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시랑(侍郞, 신라시대 관직으로 집사부(執事部)·병부(兵部)·창부(倉部)의 차관직이다.) 김봉휴(金封休) 편에 편지를 보내어 태조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곧장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을 말한다.)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 '화엄경'을 받드는 불교 종파로서 두순杜順, 지엄智儼, 법장法藏의 순서로 계승되었다.)에 귀속해 승려가 되었는데, 이름을 범공(梵空)이라고 했다. 범공은 후에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도 한다.

 

태조는 편지를 받아 보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 맞이했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순했는데, 아름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 리를 연달아 뻗쳐 도로의 길목이 막히고 구경꾼들로 담을 이루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가 그를 맞아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고려)의 정승원政丞院이다.)을 내리고,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주었다. 경순왕은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살게 되었기 때문에, 어미와 떨어져 사는 난새에 비유하여 낙랑공주의 호칭을 신란공주(神鸞公主)로 고쳤다. 시호는 효목(孝穆)이다. 김부를 정승(政丞)에 봉하니 지위는 태자 위에 있었으며, 녹봉 1,000석을 주고 시종과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임용했다. 그리고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공의 식읍(食邑,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조세 수입을 독점하도록 한 고을이다.)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와서 항복하자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접하고 산신을 보내 말했다.

 

"이제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큰 것을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종실과 결혼하여 영원히 장인과 사위 같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의 백부 억렴(億廉, 왕의 아버지인 각간 효종은 추봉된 신흥대왕新興大王의 아우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과 용모가 모두 아름다우니 이 사람이 아니면 내정(內政)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억렴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이 여인이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다. 우리 왕조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엮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성왕후 이씨의 본은 경주다.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俠州 지금의 경남 합천이다.)의 군수로 있을 때 태조가 이 주에 행차했다가 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이곳을 협주군(俠州郡)이라고도 한다.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며, 3월 25일을 기일忌日로 하여 정릉(貞陵)에 장사 지냈는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바로 안종(安宗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욱郁으로 그의 아들이 고려 제 8대 왕인 현종이다.)이다." 이 밖에 25명의 비와 주(主) 가운데 김씨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의 역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했으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伷)는 정승공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으니, 바로 헌승왕후(憲承王后)다. 이리하여 정승을 봉하여 상보(尙父, 아보亞父와 같은 말로 아버지에 버금간다는 의미다.)로 삼았는데, 태평흥국(太平興國, 북송 태종太宗 조경趙炅의 연호로 976년에서 984년까지 사용했다.) 3년 무인년(978년)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보를 책봉하는 고문(誥文)에 이렇게 말했다.

 

"칙(勅)하노니, 희씨(姬氏)의 주(周)나라가 나라를 세운 처음에는 먼저 여망(呂望, 주나라의 어진 신하 강태공姜泰公으로 무왕이 상보로 정한 인물이다.)을 봉했고, 유씨(柳氏)의 한(漢)나라가 시작될 때는 먼저 소하(蕭何, 한나라 고조를 도와 승상이 되었던 공신으로 한신을 고조에게 추천한 일화가 유명하다.)를 책봉했다. 이로부터 천하가 크게 평정되고 기업(基業)이 널리 열렸다. 용도(龍圖, 용마龍馬가 가지고 나온 그림으로, 제왕 출현을 알리는 부서符瑞다.)는 30대를 세웠으며 인지(麟趾, 본래 '시경-주남'의 편명으로 한나라 왕실의 국운이 계승됨을 말한다.)는 400년을 이었으니 해와 달이 아주 밝고 천지가 평안했다. 비록 무위(無爲, 노자는 '무위이치無爲而治'라고 말하며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지 작위나 형벌 등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의 군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보좌하는 신하로 말미암아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000천 호(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 食邑 八千戶)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고 관직은 왕의 작위를 나누어 받았다.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에 닿고 문장의 재능은 땅을 흔들 만하다. 풍요로움은 춘추에 있고 귀함은 봉토에 누렸으며, 가슴속에는 육도(六韜)와 삼략(三略, 병서兵書 '육도'는 강태공이 지었고 '삼략'은 황석공黃石公이 지었다고 한다.)이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從五申, 칠종은 제갈량이 남만의 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주었다는 고사로 전략의 탁월함을 비유한 것이다. 오신은 삼령오신三令五申의 준말로 군령이 엄한 것을 말한다.)을 손바닥에서 움직였다.

 

우리 태조가 처음으로 우호를 맺어 일찍부터 그 풍도를 알아 때를 가려 부마의 혼인을 맺어 안으로 큰 절의에 순응했다. 국가가 통일되고 군신이 완연히 삼한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아름다운 법은 빛나고 높았다.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의 칭호를 더하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칭호를 주니, 훈봉(勳封)은 과거와 같고 식읍은 이전의 것과 합쳐 모두 1만 호다. 유사는 날을 택하여 예를 갖추어 책명하고 맡은 사람은 시행하라. 개보(開寶, 북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연호로 968년에서 976년까지 사용했다.) 8년(975년) 10월 어느 날."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내의성內議省의 최고직으로 조선의 영의정에 해당한다.)겸 총한림(摠翰林) 신(臣) 핵선(翮宣)은 위와 같이 칙명을 받들어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받들어 시행하라.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시중(侍中, 문하성門下省의 최고직이다.)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내봉성의 최고직이다.) 서명, 군부령(軍部令) 서명, 군부령 무서(無署, 서명이 없다는 뜻),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명, 광평시랑 무서,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 내봉시랑서명, 군부경(軍部卿) 서명, 병부경(兵部卿) 무서, 병무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보도성령 상주국 낙랑도왕(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都王)식읍 1만 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위와 같이 칙서를 받들고 부(符)가 이르거든 받들어 시행하라.

주사(主事) 무명(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 낭중(郎中) 무명, 서령사(書令史) 무명, 공목(孔目, 회계와 공문서를 맡은 아전으로 '서령사'도 마찬가지다.) 무명,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내림."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박씨(朴氏)와 석씨(昔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금궤에 담겨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고 혹은 금수레를 타고 내려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서로 전하여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여기고 있다 다만 그 처음에는 위에 있는 자가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관대했으며, 관직의 설치는 간략했고, 일을 간단하게 시행했으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배를 타고 조공하는 사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 조정(宋)에 숙위(宿衛, 황제를 숙위하는 직무를 말한다.)하게 하고, 공부하게 했다. 성현의 풍토를 이어받고 거친 풍속을 고침으로써 예의의 나라가 되게 했다. 또 당나라 군사의 위엄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영토를 취해 군현으로 삼았으니 진실로 그 시절에는 성대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면서도 그 폐단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여염 마을에까지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우고, 백성들은 달아나 승려가 되어 군사나 농민이 점점 줄어들고 나날이 쇠미해졌으니, 어찌 나라가 어지럽지 않겠으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러할 때, 경애왕은 더욱 못되고 음탕하여 궁인 및 신하들과 포석정에 놀이를 나가 술자리를 마련하여 연회를 열면서 견훤이 쳐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으니, 문밖의 한금호(韓擒虎, 수나라 노주총관盧州摠管으로 날랜 기마 500명을 이끌고 진나라 공격의 선봉에 섰으며 진나라 후주-숙보叔寶와 장려화를 사로잡았다.)와 누각 위의 장려화(張麗華, 진나라 후주의 귀비貴妃로 지혜로워 후주에게 총애를 받았다.)의 일과 차이가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투항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였지만 잘한 일이었다. 그때 만약 힘써 싸워 죽을 각오로 왕사(王師, 고려 태조의 군사를 뜻한다.)에게 대항하다 힘이 미치지 못하고 형세가 곤궁하게 됐다면, 반드시 그 가족은 멸망했을 것이고 무고한 백성에게 해를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궁궐 창고를 봉쇄하고 군현의 문서를 기록해 귀의했으니, 고려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들에게 덕을 크게 베푼 것이다.

 

옛날 전씨(錢氏, 오월왕 전숙錢叔으로, 자기가 다스리던 13개 주를 송나라에 바쳤다.)가 오월(吳越)을 가지고 송나라로 들어가자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字다. 소식은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송대의 정치가이자 대문호다.)이 그를 충신이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신라 왕의 공덕은 그보다 더욱 크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아주 많아 자손도 번창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자로 보위에 올랐고, 이후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국토를 바치고 멸망한 후에 아간 신회(神會)가 외직(外職)을 그만두고 돌아와 황폐해진 도성을 보고는 서리리(黍離離)의 탄식(주나라 대부가 주나라 왕실의 몰락을 보고 탄식하여 지은 시로 '시경'의 편명이다.)이 있어 노래를 지었지만, 그 노래는 유실되어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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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소재 경애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55대 경애왕(景愛王, 재위 924~297, 이름은 위응魏膺, 제53대 신덕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城王后 김씨이다.)이 즉위한 동광(同光, 후당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의 연호로 923년에서 926년까지 사용했다.) 2년 갑신년(924년) 2월 19일, 황룡사에 백좌(百座, '인왕백면좌회仁王百面座會'의 줄임말로 하루에 백 자리를 베푸는 불교 설법 행사다.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호국 경전인 '인왕경'이 이 의례에 사용된다.)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아울러 선승(禪僧) 300명에게 공양한 다음 대왕이 직접 향을 피워 불공을 올렸다.

이것이 백좌로서 선(禪)과 교(敎, 참선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일반적인 불교를 '교'라고 한다.)가 함께 한 시초가 된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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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소재 신라 제42대 흥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 재위 826~836, 41대 헌덕왕 김언승의 동생)은 보력(寶歷, 당唐나라 경종敬宗 이담李湛의 재위기간 825~827년 연호) 2년 병오년(826년)에 즉위했다. 얼마 후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鸚鵡)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자 외로운 수컷이 구슬프게 울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앞에다 거울을 달아 주었다. 앵무새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는 자기 짝으로 여겨 거울을 쪼았는데, 그것이 자기 모습인 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왕이 이를 노래로 지었다 하는데 자세하지는 않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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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사실만 기록한 이 조는 <기이> 편 전체에서 특이한 제목이다. 고운기는 그 당시 이상 징후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았다.

제 40대 애장왕(哀裝王, 재위 800~809, 39대 소성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청명淸명, 즉위 후 중희重熙로 개명했다.) 말년인 무자년(808년)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경북 경주시 동천동 헌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 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 38대 원성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김인겸金仁謙,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다.) 원화(元和, 당唐나라 헌종憲宗 이순李純의 연호로 806년에서 820년까지 사용했다.) 13년 무술년(818년) 3월 14일에 큰눈이 왔다. 어떤 책에는 병인년으로 되어 있ㅇ으나 잘못된 것이다. 원화는 15년에서 끝나며 병인년이 없다.

 

경북 경주시 서악동 문성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종태후定宗太后라고도 불리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기미년(839년) 5월 19일에 큰눈이 내리고 8월 1일에 온 세상이 어두컴컴했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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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배반동 효공왕릉/ⓒ문화컨텐츠닷컴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며 어머니는 김씨고 이름은 요蟯다.) 대인 광화(光化, 당唐나라 소종昭宗 이엽李曄의 연호로 898년에서 901년까지 사용했다.) 15년 임신년(912년, 실제로는 주온朱溫의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이다.)에 봉성사(奉聖寺) 외문(外門) 동서쪽 스물한 칸 사이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神德王) 즉위 4년 을해년(915년, 고본古本에는 천우天祐 12년이라 했는데, 정명貞明 원년으로 해야 한다.)에 영묘사(靈妙寺) 안의 행랑에 까치집이 서른네 개, 까마귀 집이 마흔 개 있었다. 또 3월에는 서리가 두 번 내렸고, 6월에는 참포(斬浦,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참포槧浦라고 했으며, 신라의 4독瀆 중에서 동독東瀆으로 중사中祀의 제전祭典에 속한다.-이병도설)의 물이 바다의 파도와 사흘 동안 다투었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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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4대 경명왕릉/경북 경주시 배동/ⓒ문화컨텐츠닷컴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신덕왕神德王의 태자며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다.)에 사천왕사 벽화 속에 있는 개가 짖어 사흘 동안 경을 읽어 쫓아 버렸는데 반나절이 지나자 또 짖었다.

 

7년 경진년(920년) 2월에는 황룡사의 탑 그림자가 사지(舍知, 신라시대 17관등 중 16번째 등급의 벼슬) 금모(今毛)의 집 뜰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비쳤고, 또 10월에는 사천왕사에 있는 오방신(五方神,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을 수호하는 신이다.)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 속에 있는 개가 뛰쳐나와 뜰을 달리고는 다시 벽화 속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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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대왕 괘릉(掛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찬(伊湌, 신라 17관등 중 두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진골만 오를 수 있었다. 이척찬(伊尺飡) 혹은 이간(伊干), 일척간(一尺干), 이찬(夷粲)이라고도 한다.)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었고 원성왕(元聖王)은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중 첫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일명 이벌간(伊罰干),우벌찬(于伐飡),이벌찬(伊伐飡),각간(角干),각찬(角粲),서발한(舒發翰),서불한(舒弗邯)이라 하였다.)으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다. 원성왕은 꿈에 복두(幞頭, 두건의 일종으로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처음 만들었으며, 귀인이 쓰는 모자의 하나로 보면 된다.)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 12현의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꿈에서 깨어나 사람을 시켜 풀이하게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

 

원성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닫고는 나가지도 않았다. 이때 아찬(阿飡, 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직으로 일명 아척간(阿尺干)·아찬(阿粲)이라고도 하였다.) 여삼(餘三 혹은 여산餘山이라고도 한다.)이 와서 뵙기를 청했다. 원성왕은 병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아찬이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했다.

 

아찬이 말했다.

"공께서 꺼리는 일이 무엇입니까?"

원성왕은 꿈을 풀이한 일을 자세히 말했다. 그러자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면서 말했다.

"이는 바로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왕은 주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풀이해 줄 것을 청했따. 아찬이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孫, 원성왕이 내물왕의 12세손이 된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의거)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권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왕이 말했다.

"위로는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아찬이 말했다.

"청컨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지내십시오."

 

왕은 아찬의 말에 따랐다.

얼마 후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삼아 궁궐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시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즉위하자 대신의 무리들이 모두 따라와서 새로 즉위한 임금에게 절을 하고 축하했다. 이 사람이 바로 원성대왕(元聖大王, 재위 785~798)이다. 대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인데, 꿈의 응험이 맞았던 것이다.

 

김주원은 물러나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살았다.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이니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匝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은 참으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의 만파식적을 전해 받아 왕에게 전했다. 왕은 만파식적을 얻었기 때문에 하늘의 은혜를 받아 그 덕이 원대하게 밫났다. 정원(貞元, 당唐나라 덕종德宗 이적李適의 연호로 785~805년까지 사용) 2년 병인년(786년) 10월 11일, 일본의 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記'를 보면, 제55대 문덕왕文德王이 이에 해당되는 듯하다. 그 이외에는 문경이 없는데, 어떤 책에는 왕의 태자라고 하기도 한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했는데,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돌리고 금 50냥과 함께 사신을 보내 그 피리를 청했다. 왕이 사신에게 말했다.

 

"짐은 선대인 진평왕 대에는 있었다고 들었으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듬해 7월7일, 다시 사신을 보내 금 천 냥으로 만파식적을 청하며 말했다.

"과인이 신물(神物)을 보고 난 후 다시 돌려드리겠소."

 

왕은 역시 이전과 같은 대답으로 사양하고, 은 3,000냥을 사신에게 주어 금과 함께 돌려보냈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다음 날 두 여자가 내정(內庭)에 나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바로 동지(東池)와 청지(靑池, 청지는 바로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그 절의 기록에, 우물은 바로 동해의 용이 왕래하면서 설법을 듣는 곳이라 했다. 이 절은 바로 진평왕이 만든 것으로 500성중聖衆, 5층탑, 전민田民을 아울러 바쳤다고 한다.)의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티베트계통의 당항黨項, 탕구트) 사람 두명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이 우물은 지금도 분황사에 남아 있다.)의 용 등 세 용을 저주하여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 속에 담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저희 남편을 비롯하여 나라를 지키는 용을 돌려주게 하십시오."

 

왕은 뒤쫓아 하양관(河陽館, 경상북도 영천 서쪽인 하양에 있어던 관사)에 이르러 직접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의 용 세 마리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느냐?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하겠다."

 

그러자 하서국 사람은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쳤다. 세 곳에 놓아 주자 제각각 한 길씩이나 뛰어오르고 기뻐하며 사라졌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성스럽고 명철함에 감복했다.

 

어느 날 왕은 황룡사(皇龍寺,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 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했는데, 절 이름과 경經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의 승려 지해(智海)를 궁궐로 청하여 50일 동안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했다. 사미(沙彌, 출가하여 정식 승려가 되기 전에 수련 중인 남자 승려) 묘정(妙正)은 항상 금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로 인해 얻은 이름이다.)에서 그릇을 씻었는데, 자라 한 마리가 샘 가운데에서 떴다 잠겼다 했다. 모정은 늘 먹다 남응ㄴ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놀곤 했다. 법연이 끝나 돌아가게 되자 사미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며칠 동안 덕을 베풀어 주었는데 어떻게 갚겠느냐?"

 

며칠 후 자라는 작은 구슬 한를 토해 주었다. 사미는 그 구슬을 허리띠 끝에 매달았다.

 

이후부터 대왕은 사미를 보면 애지중지하여 내전으로 불러들여 항상 곁에 두었다. 이때 한 잡간(匝干, 신라 17관등 중 3위 관등)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역시 사미를 사랑하여 함께 데리고 가기를 청했다. 왕이 허락하여 잡간은 사미와 같이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 역시 사미를 보자 총애하고, 승상과 좌우 신하들이 모두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런데 관상을 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건대, 길상(吉相)이 하나도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존경과 신임을 받으니, 반드시 특별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사미의 허리띠 끝에서 작은 구슬이 나왔다.

황제가 말했다.

 

"짐에게는 여의주 네 개가 있었는데 지난해에 한 개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다."

 

황제가 사미에게 묻자 사미는 그 일을 사실대로 아뢰었다. 황제가 말했다.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사미가 구슬을 얻은 날이 같다."

 

그 구슬을 빼았고 사미를 쫓아냈는데 그 뒤로는 아무도 사미를 사랑하거나 신임하지 않았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숭복사崇福寺다.)에 있는데(그의 능은 물이 차 있어 관을 땅에 묻지 못하고 걸어 놓았다고 하여 괘릉掛陵이라고 부른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또한 왕은 보은사(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조부 훈입(訓入) 잡간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증조부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고조부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삼았는데,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보기: 만파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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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5대 경덕왕릉/ⓒ문화컨텐츠닷컴

[당나라에서] <덕경德經, 도가의 창시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말하며 모두 5,000자로 이루어져 있다.> 등을 보내오자 대왕은 예를 갖추어 받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효성왕 2년'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어 경덕왕 대의 일이 아니라고도 하나, 리상호는 경덕왕 대의 일이 맞다고 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던 해에 오악삼산(五岳三山,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이며, 삼산은 경주 남산, 영천 금강산, 청도 부산이다. 윤영옥 교수는 오악이 통일신라의 상징적 존재이자 전제왕권의 상징이라고 했다.)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 뜰에서 대왕을 모셨다.

3월3일 왕은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올라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길거리에서 대덕(大德, 중에게 부여하는 직위 명칭인데 덕망이나 풍모가 높은 중을 일컫는다.) 한 명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이때 마침 위엄과 풍모가 깨끗한 고승이 배회하며 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와 뵙게 하니 왕이 말했다.

"내가 말한 위엄과 풍모가 있는 승려가 아니다."

그리고 돌려보냈다.

다시 한 승려가 가사를 걸치고 앵통(櫻筒, 중이 물건을 넣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통)을 지고(삼태기를 메고 있었다고 한 곳도 있다.)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그를 보고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통 안을 살펴보니 다구(茶具, 차를 다려 마시기 위한 도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충담(忠談)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매년 중삼일(重三日, 세시풍속에 액을 막는 제의祭儀가 있는 날로 3월3일이다.), 중구일(重九日, 중양일重陽日 이라고도 하며 액을 막는 제의가 있는 날로 9월9일이다.)에 차를 끓여 남산 삼화령(三花嶺, 경주 남산에 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데, 이 위에 연꽃 모양의 불상 대좌가 있다고 한다.)의 미륵세존(彌勒世尊, 뒷 세상에 나타날 부처)께 올리는데, 지금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했다.

"나에게도 차 한 잔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승려는 이에 차를 끓여 바쳤는데, 찻잔 속에서 향내가 풍겼다. 왕이 말했다.

"짐은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 향가를 일컫는 가사의 별칭인데 '기이 제1'에는 사뇌격詞腦格이라고 했다.)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보라."

왕이 말했다.

충담은 곧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 왕의 불교 수행을 돕는 승려)로 봉했으니, 그는 삼가 재배하며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다.

 

君隱父也

군은부야(임금은 아버지요)
臣隱愛賜尸母史也
신은애사시모사야(신하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라)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민언광시한아해고위사시지(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면)
民是愛尸知古如
민시애시지고여(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리라)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굴리질대힐생이지소음물생(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此肹湌惡支治良羅

차힐식악지치량나(이들을 먹여 다스려라)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차지힐사유지어동시거어정위시지(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하면)
國惡支持以支知右如

국악지지이지지고지(이 나라가 보전될 줄 알리라)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후구군여신다지민은여위내시등언(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國惡太平恨音叱如

국악태평한음질여(나라는 태평을 지속하리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김상억 교수는 '찬讚'이 게송류偈頌類의 '찬'이 아니고 한시의 '송찬頌讚' 류와 맥이 같다고 했다. 양주동 박사는 이 작품의 기상천외한 시법에 감탄하면서 문답체의 구조로 보았다.)는 다음과 같다.

 

咽嗚爾處米
열오이처미(열어젖히자)
露曉邪隱月羅理
로효야은월라리(벗어나는 달이)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支下
백운음축간부거은안지하(흰구름 좇아 떠간 언저리)
沙是八陵隱汀理也中
사시팔릉은정리야중(백사장 펼친 물가에)
耆郞矣皃史是史藪邪
기랑의모사시사수야(기파랑 모습이 잠겼어라)
逸烏川理叱磧惡希
일오천리질적악희(일오천 자갈벌에서)
郞也持以支如賜烏隱
랑야지이지여사오은(낭의 지니신)
心未際叱肹逐內良齊
심미제질힐축내량제(마음 좇으려 하네)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아야백사질지차고지호(아! 잣나무 가지 높아)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설시모동내호시화판야(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왕은 옥경(玉莖, 남자의 성기)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는데, 자식이 없어 왕비('왕력'에는 삼모부인三毛夫人으로 되어 있다.)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했다. 후비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각간(角干, 신라 17간등 중 최고 관직) 의충(依忠)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사(表訓大師)를 불러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했으니 원하건대 대사께서 하느님(上帝)에게 청하여 사내아이를 점지하게 해 주시오."

표훈대사가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말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천제께서는 '딸을 구하는 것은 되지만 사내아이는 마땅치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말했다.

"딸을 아들로 바꿔 주시오."

표훈대사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했다.

천제가 말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표훈대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인간 사이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데 지금 대사는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오는 것을 금하노라."

표훈대사가 와서 천제의 말을 전하니 왕이 말했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을 얻어 후사를 삼고 싶소."

달이 차서 왕후가 태자를 낳으니('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7년 7월23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으니,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 신라 제36대 왕, 재위 765~780)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태후가 섭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았고(그는 16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반란이 다섯 번이나 일어났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도 막지 못했으니, 표훈대사의 말이 사실이었다. 태자는 원래 여자였다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돌 때부터 즉위하기까지 항상 부녀자들의 놀이를 일삼고 비단 주머니 차는 것을 좋아하며 도사(道士)들과 희롱했다. 그래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결국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 김양상은 선덕와으이 이름이다. 김경신金敬信의 오기라는 설도 일리가 있다.-이가원 설)에게 시해되었다. 표훈대사 이후로 신라에 성인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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