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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댁대왕신종(에밀레종)/ⓒ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제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 재위 742~765)이 천보(天寶, 당나라 대종代宗 이예李豫의 연호로 766년에서 779년까지 사용했다.) 13년 갑오년(754년)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가 열 자 세 치고 두께는 아홉 치며 무게는 49만 7581근이었다. 시주(施主)는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三毛夫人, 경덕대왕의 선비先妃)이며, 공장은 이상택(里上宅) 노복이었다. [당나라] 숙종(肅宗, 재위 756~762) 때 다시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여섯 자 여덟 치였다. 또 다음해인 을미년(755년)에 분황사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동상을 주조했는데, 무게는 30만 6700근이고 공장은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참고: 신라시대 1근의 무게는 성덕대왕신종의 무게인 18.9톤을 통해 신라시대 당시 1근의 무게는 약 250g으로 추정

 

또 경덕왕은 황동 12만 근을 들여 선친 성덕왕을 위해 큰 종 하나를 주조하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재위 765~780) 건운(乾運)이 대력(大歷, 당나라 대종 때의 네 번째 연호로 766~779까지 사용) 경술년(770년) 12월에 유사(有司, 어떤 단체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의 벼슬아치 또는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공장을 모아 종을 완성한 뒤 봉덕사에 모셨다. 이 절은 바로 효성왕(孝成王, 제34대 왕 재위 737~742)이 개원(開元 26년 무인년(738년)에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래서 종의 이름을 '성댁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칭으로 봉덕사종 별칭으로 에밀레종'이라 했다. 성덕대왕은 바로 경덕왕의 아버지 흥광대왕(興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해 시주한 금으로 주조했기 때문에 성덕대왕의 종이라 한 것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郞) 한림랑(翰林郞) 김필해(金弼奚, 김필오金弼奧라고도 한다, 생몰미상)가 왕명을 받들어 종의 이름을 지었는데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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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장보고기념관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 재위 839~839, 제38대 원성왕의 손자로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등에 화살을 맞는 꿈을 꾼 후 등에 종기가 나 죽었다고 한다.)은 왕우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사람) 궁파(弓巴, <삼국사기> '열전'에는 '궁복弓福'이라 되어 있다. 장보고張保皐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한다.)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는 원수(신무왕의 아버지 균정과 왕위를 다투었던 희강왕과, 장보고와 신무왕에게 죽임을 당한 민애왕을 말함)가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그를 제거해 주면 왕위를 차지한 후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

궁파는 응낙하고 마음과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켜 수도를 침범해 그 일을 이루었다.

왕이 왕위를 찬탈하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신하들이 옆에서 힘껏 간했다.

"궁파는 비천하니 왕계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왕은 신하들의 말에 따랐다. 이때 궁파는 청해진(淸海鎭,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흥덕왕 때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하던 곳으로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였으며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에 있는데, 이 섬의 남쪽에 방어용 목책이 있었다.)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꾀하고자 했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 생몰미상, 장보고 휘하에서 활약한 무장으로 <속일본기>에는 염장閻丈, 염문閻文으로 기술되어 있다.)이 그 말을 듣고는 왕에게 아뢰었다.

"궁파가 장차 불충을 저지르려 하니 소신이 제거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기꺼이 허락했다.

염장은 왕명을 받고 청해진으로 가서 연락하는 사람을 통해 궁파에게 말했다.

"왕에게 작은 원망이 있어 현명한 공께 몸을 의탁하여 목숨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너희 무리가 왕에게 간하여 내 딸을 왕비로 삼지 못하게 했는데, 어찌하여 나를 만나려 하는가?"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 전했다.

"이는 백관들이 간언하는 것이지, 저는 그 모의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공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청사(廳事)로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왔소?"

염장이 말했다.

"왕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 막하(幕下, 지휘관이나 책임자가 거느리는 사람)에 기대어 해를 모면하고자 합니다."

궁파가 말했다.

"다행한 일이오."

그들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매우 기뻐했다. 그사이 갑자기 염장이 궁파의 장검을 가져다 그를 죽였다. 그러자 휘하의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들을 이끌고 서울(경주)로 돌아와 결과를 보고했다.

"궁파를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염장에 상을 주고 아간(阿干, 신라 17관등 중 제6위인 아찬의 별칭)의 벼슬을 내렸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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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잡간 위홍(魏弘, 제48대 경문왕의 친동생) 등 서너 명의 총애하는 신하가 정권을 쥐고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근심스러워하자 어떤 사람이 다라니(陀羅尼, 범어 dharani의 음역. 석가의 가르침의 정요精要로서, 신비한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의 은어(隱語, 특정한 집단에서 구성원들끼리만 사용하는 은밀한 용어)를 지어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이것을 손에 넣고 말했다.

"왕거인(王居仁)이 아니면 누가 이런 글을 짓겠는가?"

왕거인을 옥에 가두자 왕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그러자 하늘이 곧 그 옥에 벼락을 내려 모면하게 해 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燕丹泣血虹穿日(연단읍혈홍천일)

연단의 피울음은 무지개와 해를 뀌뚫고,

※연단은 전국시대 진시황의 죽이려다 실패하고 죽임을 당한 연나라 태자 단을 말함.

 

鄒衍含悲夏落霜(추연함비하락상)

추연이 머금은 비애는 여름에도 서리를 내렸네

※추연은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연나라 소왕의 스승이 되었지만 혜왕이 즉우하자 참소를 받아 옥에 갇혔는데 한여름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今我失途還似舊(금아실도환사구)

지금 내가 길 잃은 것은 옛 일과 비슷한데,

 

皇天何事不垂祥(황천하사불수상)

아! 황천은 어찌하여 상서로움을 내리지 않나?

 

다라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무망국 찰니나네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詞."

 

풀이하는 자들이 말했다.

"'찰니나제'란 여왕을 말하며, '판니판니소판니'란 두 명의 소판(蘇判, 신라 17관등 중 제3위인 잡찬의 별칭)을 말하는데, 소판이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명의 아간(阿干, 신라 17관등 중 제6위인 아찬의 별칭)을 말한 것이고, '부이'란 부호부인을 말한다."

 

거타지/문화컨텐츠닷컴

 

이때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 나루터와 섬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를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사(弓士)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지금의 백령도, 지방에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도착했을 때,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 열흘 넘게 꼼짝없이 머물렀다. 공이 이를 걱정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못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의 물이 한 길 남짓이나 솟구쳤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말했다.

"활 잘 쏘는 사람을 이곳에 남겨 두면 순풍을 만날 것이다."

공은 꿈에서 깨어나 그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말했다.

"마땅히 나무 조작 쉰 개를 만들어 우리들의 이름을 써서 바다에 던진 후 가라앉은 자의 이름으로 제비를 뽑아야 합니다."

공은 그렇게 했다. 군사 가운데 거타지(居陁知,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용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유사하다.)란 사람의 이름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으므로 그를 남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순풍이 불어 배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거타지는 수심에 잠겨 섬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의 신(神) 약(若)인데 날마다 승려 하나가 해가 뜰 무렵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른다오. 그러면 그는 내 자손의 간장(肝腸)을 모조리 먹어치운다오. 이제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았소. 내일 아침이면 반드시 또 그가 올 테니 그대가 쏘아 주시오."

거타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내 특기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고마워하고는 사라졌다.

거타지가 숨어 엎드려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이 밝아 오자 과연 승려가 나타나 이전처럼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려 했다.

이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즉시 늙은 여우로 변해서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노인이 나와 감사해하며 말했다.

"공의 은혜를 입어 내 목숨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그대의 아내로 주겠소."

거타지가 말했다.

"제게 주신다면 평생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하겠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바뀌게 해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는, 두 용에게 거타지를 데리고 사신의 배를 뒤쫓아가 그배를 호위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가 용 두 마리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 사실을 위에 보고했다.

황제가 말했다.

"신라 사신은 반드시 비범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연회를 열어 신하들의 위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나라로 돌아와서 거타지가 품에서 꽃송이를 꺼내자 꽃이 여인으로 바뀌었으므로 함께 살았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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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처용 문화제 www.cheoyongf.or.kr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재위 875~886)대에는 서울(지금의 경주)에서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담장이 서로 맞닿았는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위치하므로 지금의 울주蔚州다.)로 놀러 갔다 돌아오려 했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 신라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원)이 아뢰었다.

"이는 동해에 있는 용의 변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유사(有司, 어떤 단체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의 벼슬아치 또는 담당관리)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라고 한 것이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둘어와 왕의 정사를 보필했는데, 이름을 처용(處龍)이라 했다. 왕은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아 그의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면서 급간(級干, 신라 십칠 관등 중 가운데 아홉째 등급의 벼슬로 진골과 6두품만 오를 수 있는 관등)이란 직책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밤이 되면 사람으로 변해 그 집에와 몰래 자곤 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났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東京明期月良

동경 밝은 달에

夜入伊遊行如可

밤새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구나.

二 兮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것이지만

二 兮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가.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래 내 것이지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이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끓어앉아 말했다.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범했는데도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됩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치고(이러한 미신은 불교 최전성기인 고려에 와서 궁중 의식으로서 처용무와 처용희로 발전되었다.)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려고 했다.

왕은 돌아오자 곧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 경남 울주군 문수산에 있던 절로 지금은 소실되어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라 했다. 망해사를 또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는데, 이는 처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또 왕이 포석정(鮑石亭, 경주시 배동에 있는 임금의 별궁으로 지금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웠다는 석구만 남아 있다.)으로 행차하니, 남산의 신(神)이 나타나 어전에서 춤을 추었는데(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는 "어디서 왓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 앞에서 가무를 하였는데" 라고 나와 있다.),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그래서 왕이 몸소 춤을 추어 형상을 보였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미

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므로 그 모습을 살펴 왕이 공장(工匠)에게 본떠 새기도록 하여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고 했다고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춤을 추자 이름을 옥도금(玉刀鈐)이라 했고,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어 지백금간(地伯級干)이라 불렀다.

'어법집(語法集)'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고 했다. '도파'란 말은 아마도 지혜(智)로써 나라를 다스리는(理)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아채고 모두(多) 달아나(逃) 도읍(都)이 곧 파괴된다(破)는 뜻이다."

이는 바로 지신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면서 즐거움에만 점점 더 탐닉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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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헌화공원/ⓒ삼척시청 문화관광

 

성덕왕(聖徳王, 신라 33대 왕-재위: 702~737) 대에 순정공(純貞公, 5급 이상의 진골 귀족)이 강릉(江陵, 강원도 명주溟州지역) 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옆에는 바위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는데, 천 길이나 되는 높이에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내게 저 꽃을 꺾어 바치겠소?"

따르던 사람이 말했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

다들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그 꽃을 꺾어 와서 가사(歌詞)도 지어 부인에게 함께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시 이틀째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 바닷가에 닿아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낚아채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다시 한 노인이 말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라고 하니, 바닷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들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이 말을 따르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바다에서 나와 그에게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었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일곱 가지 보물로 꾸민 궁전에 음식들은 맛이 달고 매끄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도 색다른 향기가 스며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 볼 수 없는 향이었다.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 가를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에게 빼앗겼으므로 여러 사람이 해가(海歌, 가락국 수로왕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와 유사함)

그 가사는 이렇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를 약탈해 간 죄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헌)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을 쳐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구지가龜旨歌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놓아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만약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노인이 바친 헌화가(獻花歌)는 이렇다.

 

紫布岩乎邊希(자포암호변희)

자줏빛 바위 가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집음호수무우방교견)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吾肸不喩慚肸伊賜等(오힐불유참힐이사등)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화힐절길가헌호리음여)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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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부산성/문화재청

신라 제32대 효소왕 대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혹은 득곡得谷) 급간이 있었는데, 화랑의 명부에 이름을 놀려놓고 날마다 나오다가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물었다.

"당신의 아들은 지금 어디 있소?"

득오의 어머니가 말했다.

"당전(幢典)인 모량부(牟梁部)의 아간(阿干) 익선(益宣)이 제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경주 서쪽에 있는 해발 729.5m 부산富山 정상부를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계곡을 감싼 포곡식 석산성)의 창고지기(倉直)로 보냈는데, 급히 가느라 낭께 말씀을 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낭이 말했다.

"네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공적인 일로 갔으니 내가 가서 대접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갖고 좌인(左人, 갯지-개질지皆叱知, 신라 때때에 종을 일컫는 말)들을 거느리고 떠나는데, 낭의 무리 137명 역시 의장을 갖추어 따라갔다.

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 위의 득오와 같은 사람이며 득오의 다른 명칭인 득곡得谷의 뜻말의 음차)의 행방을 물어보자 그가 말했다.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으로 득오를 대접했다. 그리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득오와 함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익선이 완강히 반대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경남 밀양의 옛 지명)의 세금 30석을 거두어 성안으로 수송하다가 선비를 귀중히 여기는 낭의 풍모를 아름답게 여기고 융통성 없는 익선을 야비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지(舍知, 신라시대 17관등 중 13위 관등) 진절(珍節)이 기마와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花主, 화랑을 관할하는 관직)가 그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잡함을 씻어 주려 했는데, 익선이 달아나 숨었으므로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이때는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성안에 있는 못 가운데서 익선의 아들을 목욕시키니 그대로 얼어 죽고 말았다.

대왕은 그 말을 듣고는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내쫓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검은색 옷(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면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 한 마을의 사무를 맡아 보던 수장)으로 삼아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했다.

이전에 술종공(述宗公)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9주의 하나)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삼한에 전쟁이 있어 기병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했다. 가다가 죽지령(竹旨嶺)에 도착하니, 한 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그것을 보고 감탄하고 칭찬했다. 거사 역시 공의 위세가 매우 큰 것을 좋게 보고 서로 마음속으로 감동하게 되었다.

술종공이 삭주에 부임하여 다스린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거사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여 매우 놀라고 괴상하게 여겼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사람들이 말했다.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하니, 거사가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은 날이었다. 공이 말했다.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 같소."

다시 군사를 보내 고갯마루 북쪽 봉우리에 거사를 장사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 한 구(軀)를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아내가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자 이름을 죽지(竹旨)라 했다. 그는 장성하여 벼슬길에 올라 김유신 공과 함께 부수(副帥, 주장을 보좌하는 장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문 등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慕竹旨郎歌)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去隱春皆理米,
지나간 봄 그리매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계시지 못해 울면서 시름하는데
,
두덩을 밝히오신 모습이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目煙廻於尸七史伊衣,
눈 돌림 없이 저를
逢烏支惡知乎下是,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에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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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金大城, ?~774)/ⓒ나무위키

모량리(牟梁里, 부운촌浮雲村이라고도 한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城)과 같아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키울 수가 없었으므로 부자인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했는데, 그 집에서 논 몇 이랑을 주어 의식의 밑천을 삼게 했다.

 

이때 덕망 있는 승려[開土] 점개(漸開)가 흥륜사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고자 하여 시주를 받으러 복안의 집에 이르렀는데,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했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했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므로 천신이 항상 ㅗ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안락을 누리고 장사할 것입니다."

대성이 그 말을 듣고는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문밖에 온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전생에 좋은 일을 한 것이 없어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제 또 시주를 하지 못한다면 오는 세상에는 더욱 가난할 것입니다. 우리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세의 응보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했으므로 밭을 점개에게 시주했다.

얼마 후 대성이 죽었다.

그날 밤 나라의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 태어나려고 한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 보니 대성이 과연 죽었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던 날과 같은 날이었다.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왼쪽 주먹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7일 만에 폈는데,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금패를 쥐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다시 대성이라 짓고 그의[예전] 어머니를 맞이하여 집 안에 두고 함께 봉양했다.

대성이 어른이 된 뒤에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묵게 되었다. 대성의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며 말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였느냐? 내가 다시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하며 용서를 비니, 귀신이 말했다.

"나를 위해 절을 지어 줄 수 있겠느냐?"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불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후부터는 사냥을 하지 않고 꿈 속에 나타났던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이 일로 해서 감동하는 바가 있어 자비의 원력(悲願)이 더욱 독실해졌다.

이로 인해서 이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국보 24호인 석굴암. 한편 불국사와 석굴암 두 불사를 한 개인이 일으켰다는 것에 회의를 품는 학자도 있다.)를 세워,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승려에게 각가가 절에 머물도록 부탁했다. 대성은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워 길러 준 부모의 노고에 보답했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도 듣기 어려운 일로 과연 시주를 잘한 징험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주 불국사/ⓒ세계문화유산 불국사

 

석굴암/ⓒ세계문화유산 석굴암

 

대성이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실(龕室, 석굴의 벽 가운데를 깊이 파서 석불을 모셔 두는 곳으로 석굴암 보존불 주위의 십대제자상 위에 열 개의 감실을 팠다.)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개로 쪼개졌다. 그래서 분통해하다가 얼핏 선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감실을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그래서 대성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남쪽 고개로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러므로 그 땅을 향고개[香嶺]라 한다. 불국사의 구름다리[雲梯]와 석탑은 그 나무와 돌에 새긴 노력이 동도(東都)의 여러 사찰 중 어느 것보다 뛰어나다. 옛 향전(鄕傳)에는 위의 내용이 실려 있는데, 절 안의 기록에는 이렇다.

"경덕왕 대에 대상(大相)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년(751년)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대를 거쳐 대력 9년 갑인년(774년)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처음에는 유가종의 고승 항마(降魔)를 청하여 이 절에 살게 했고 이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렇듯 고전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모량 마을에 봄이 지나 세 무의 밭을 시주하니,

향고개에 가을이 되어 만금을 거두었네.

어머니는 한평생에 가난과 부귀를 맛보았고,

재상(김대성)은 한 꿈 속에서 내세와 현세를 오갔네.

 

-삼국유사 권5, 효선(孝善) 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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