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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는 수레와 함께 전통적으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 널리 사용된 이동수단이었다. 그런데 가마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가마는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멀리 유럽에도 있었고, 가까이는 중국, 일본 등에도 있었다. 중국의 가마는 메는 구조가 우리나라의 가마와 같지만 우리나라의 가마가 평평한 바닥에 책상다리 자세로 앉아서 타고 가는 것에 비해 중국의 가마는 밖은 위아래로 길게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안은 의자에 끌채가 달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두 발을 늘어뜨려 의자에 걸터앉은 상태로 타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일본의 가마 가운데 기다란 끌채가 집 모양 몸체의 바닥 좌우 양쪽에 붙어 있는 구조의 가마를 가리킨다. 그러나 높은 신분의 무가(武家)에서 썼던 '가고(駕籠)'라고 하는 가마는 굵은 끌채가 가마 몸체 꼭대기에 붙어 있어 몸체가 끌채에 매달려 있는 구조이다. 우리나라 통신사들도 일본에 가면 종종 가고를 타고 다녔다.

일본 가마 가고( 駕籠) ' 택사문 당초 산시회 여승물(澤瀉紋唐草蒔繪女乘物)'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가마 가고(駕籠)/ⓒja.wikipedia.org

 
우리나라의 가마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분류기준에 따라서도 이름이 달랐다. 우선 단거리 이동에 쓴느 가마는 벽체와 지붕의 유무에 따라 유옥교자(有屋轎子)와 평교자(平轎子)로 크게 나눈다.
유옥교자는 옥교(屋轎)라고도 하는데, 눈비와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지붕과 벽이 있는 가마이다. 내외법이 엄했던 조선시대에 여자들은 대개 유옥교자를 타고 다녔다. 유옥교자는 겨울에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여름에는 더운 단점이 있다. 그래서 아녀자가 옥교를 타면 계집종이 부채를 들고 따라가며 부채질을 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내부가 비좁아 답답하기도 하다.
평교자는 의자형태에 끌채가 붙어 있어 사방이 트여 있는 구조의 가마이다. 시원한 개방감이 있는 대신에 햇빛이나 비바람을 그대로 맞으므로 더위와 추위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고위 관원의 가마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일산(日傘)이나 파초선이 다르고, 비를 막기 위한 우산(雨傘)이 따르는 경우도 있다.
 

유옥교자(有屋轎子)/ⓒ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

 

일반 평교자(平轎子)/ⓒe뮤니엄-예천박물관

 
가마를 메는 사람의 수에 따라 구분하면 2인교, 4인교, 6인교, 8인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메는 사람이 많을수록 요동이 덜하여 편안한 장점이 있다. 그러나 박제가가 < 북학의(北學議)>에서 지적했듯이, 한 사람이 타고 가는 가마에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많아야 4인교이고, 6인교나 8인교는 특별한 경우에나 사용되었다. 공주나 옹주가 타는 덩(德應)은 8명이 메었고, 왕이 타는 연(輦)은 20여 명이 메었다.

왕실 행차에서 연여(輦轝),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하)(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下))'/ⓒ국립중앙박물관
연여(輦轝)/ⓒ국립고궁박물관

 

덩(德應)/ⓒ국립고궁박물관

 
이처럼 가마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교통수단으로써 주로 많이 이용된 가마는 관원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관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 중에 최고 관리들이 이용한 것이 평교자(平轎子)이다. 평교자는 일반적으로 벽체와 지붕이 없는 개방형 가마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평교자는 양교(亮轎)라고도 부르는 가장 호화로운 가마로서, 1품 벼슬의 정승급 관리들이 타고 다녔다. 가마의 끌채에 끈을 걸어서 양쪽 어깨에 메고 앞뒤 좌우로 4명이 메는 가마이다. 김홍도의 그림으로 전하는 홍이상(洪履祥)의 평생도(平生圖)에는 좌의정 시절 달밤에 평교자를 타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마에는 표범가죽이 깔려 있고, 머리 위로 커다란 파초선이 위를 가리고 있는데, 그것만으로 이 가마가 어떤 가마이고 가마를 탄 인물이 얼마나 높은 관리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등롱(燈籠)을 든 사람, 불붙은 홰를 등에 멘 사람, 우산을 든 사람 등 수행인원도 20여 명에 이를 만큼 호화로웠다.

양교(亮轎) 평교자(平轎子)/ ⓒ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

 

양교(亮轎)를 탄 고관의 행차, '필자미상 평생도 10폭 판화(筆者未詳平生圖十幅版畵)'/ⓒ국립중앙박물관

평교자보다는 격이 낮지만 일반적으로 편안하고 호화로운 가마로는 쌍교(雙轎)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쌍교는 쌍마교( 雙馬轎)라고도 한다. 두 마리 말이 끄는 가마라는 뜻이다. 가마의 좌우에 앞뒤로 길게 뻗은 끌채를 가마 앞뒤로 세운 말 두 마리의 옆구이에 걸어 말의 힘으로 끌고 가는 가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17세기부터 등장하는데, 본래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에서는 말 두마리에 마부만 있으면 되었지만, 조선에서는 고위 관료들이 타는 가마라서 가마 양옆에 가로로 뻗은 멍에를 양쪽에서 붙잡아 가마가 요동치지 않도록 멍에목을 잡는 사람만 넷이 필요했다. 말 둘에 멍에목 잡는 사람만 넷이 필요한 호화스러운 가마라서 탈 수 있는 사람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김홍도 그림의 쌍교 행차 모습 '신임 관리의 행차(안릉신연도 安陵新迎圖)'/ⓒ국립중앙박물관

 
쌍교를 탈 수 있는 사람으로는 우선 왕, 왕비, 왕자, 공주 등 왕족이 있었다. 왕족의 쌍교는 가교(駕轎)라고 불렀다. 그 밖에 관리들로는 2품 이상이나 관찰사나 승지를 지낸 사람에게만 허락되었다. 중국 사신을 상대하는 의주부윤(義州府尹)이나 일본 사신을 상대하는 동래부사(東萊府使)는 이 자격에 들지 않더라도 나라의 체모를 생각해서 쌍교를 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관리라 할지라도 왕족이 아니면 한양 도성 안에서는 쌍교를 탈 수 없었다. 그래서 대개는 한강나루를 건너고 나서 쌍교를 탔다. 여자들의 평생소원이 쌍교 타는 것이었다고 할 만큼 쌍교는 지위와 권세의 상징이었다.
 
쌍교와 대비되는 것이 독교(獨轎)이다. 독교는 독마교(獨馬轎)라고도 한다. 소나 말 한 마리의 등에 얹은 가마인데, 가마에 휘장을 둘러 장독교(帳獨轎)라고도 부른다. 이것도 2품 이상의 관리들이 타던 것인데, 대개 지방관들이 타고 다녔다. 독교를 탈 수 있는 2품 이상의 지방관은 관찰사(觀察使)나 부사(府使), 부윤( 府尹), 유수(留守)처럼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중요한 행정구역의 장(長)이었다. 그런데 소나 말의 등에 가마를 얹기 때문에 균형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이 끌채를 잡고 다라붙어야 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독교를 타야 할 지방관들이 모두 쌍교를 타고 다니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고위 관료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에는 남여(籃輿)도 있다. 남여는 발판과 등받이, 팔걸이가 갖추어진 의자 모양의 몸체에 기다란 끌채가 양옆에 앞뒤로 길게 뻗은 것이다. 왕, 세자도 궁궐 안에서나, 궁궐 밖이라도 가까운 거리를 갈 때에는 남여를 타고 다녔다. 남여는 대개 늙은 재상이나 대신들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여가 항상 늙은 고위 관료들이 타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 수령도 가까운 밖으로 행차할 때에는 남여를 탔다. 그리고 지위에 관계 없이 낮은 의자 모양에 길게 앞뒤로 끌채가 붙어 있는 것이면 모두 남여라 불렀다. 따라서 남여에는 호화로운 것도 있고 아주 간단한 것도 있었다. 때로는 대나무를 얽어 만든 것도 있고, 칡끈을 끌채에 묶어 메는 것도 있었다.

남여(籃輿)/ⓒ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

 
관리들이 가마를 타고 갈 경우에는 근수(跟隨)라는 수행원들이 따라다녔는데, 이들이 길을 인도하고, 횃불을 들거나 메고, 등롱(燈籠)을 들고 다니고, 일산(日傘)이나 우산(雨傘)을 들고 따라다녔다. 특히 맨 앞에 선 두 사람은, 앞서 소개한 홍이상의 평생도에서 보이듯이 안롱(鞍籠)과 호상(胡牀)을 들고 다녔다. 안롱은 대개 기름종이로 만들어 한쪽에 사자를 그려 넣은 가마덮개이다. 고급품은 쇠가죽, 사슴가죽, 해달(海獺)가죽으로 만들기도 했다. 맨 앞에 선 사람은 이 안롱을 옆에 끼고서 길을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소리 지르는 일을 벽제(辟除)라 했으며, 벽제를 맡은 자를 알도(喝道)라 불렀다. 안롱을 든 알도는 정3품 이상이 되어야 둘 수 있었다.

왕실 행차에서 평교자(남여),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文孝世子冊禮都監儀軌)/ⓒ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안롱을 든 사람과 나란히 호상을 든 사람이 앞에서 걸었다. 호상은 등받이가 없는 이동용 간이의자로, 접어서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본래는 북방 유목민들이 쓰던 것인데,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다. 호상은 야외에서 간이의자로 쓰이기도 하지만, 말에 오르내릴 때 디딤판으로 쓰기도 했다. 말에 오르내릴 때 딛는 상이라 해서 마상(馬牀)이라고도 하고, 등받이가 없는 간단하고 작은 새끼상이라는 뜻으로 승상(繩床) 또는 승창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호상은 안롱보다 더 격이 높아서 정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이 가지고 다녔고, 정3품 이하의 당하관(堂下官)은 가지고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회의가 열리면, 당상관은 대청마루에 올라 교의(交椅)라는 등받이가 있는 접는 의자에 앉았고, 당하관들은 뜰에 호상을 펴고 앉아 회의를 진행했다.
 

접이식 교의(交椅)/ⓒ우리역사넷


호상과 안롱 외에 가마의 깔개도 있다. 남여가 평교자 등 개방형 가마의 의자 모양 몸체에는 바닥에 짐승가죽으로 깔개를 깔았다. 대표적인 것이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가죽인 호피(虎皮) 방석이나 표범가죽인 표피(豹皮) 방석이다. 특별히 표피방석은 아닷개, 아자개, 아다개 등으로 불렀는데, 여진말이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온 것이다. 호피방석이나 아닷개는 꼬리가 붙은 형태 그대로 만들어 가마에 깔 때에는 꼬리를 길게 뒤로 늘어뜨리며 타고 갔다.
 

남여를 탄 고종황제와 옆에서 따르는 일산/ⓒ한국학중앙연구원

 

권력과 권위를 상징했던 파초선/ⓒ성균관대박물관


가마에는 일산이나 우산도 따랐다. 일산은 말 그대로 햇볕 가리개로, 여름날 뜨거운 햇볕을 차단하기 위해 시종이 받치고 가는 것이다. 일산 외에도 최고관료가 타는 평교자에 파초잎처럼 넓고 기다란 파초선이 따랐다. 이것도 의정(議政)급 관리들이 썼고 판서(判書)급 관리들은 쓸 수 없었던 듯하다. 때로는 우산도 따랐는데, 지금은 일반화된 우산도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이나 쓸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비는 농사를 돕기 위해 하늘이 내리는 고마운 혜택이라 생각하여 일반인들은 우산 쓰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었다.
 

[함께보기 : 전통적인 이동수단 말(馬)]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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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국립중앙박물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국립중앙박물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국립중앙박물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는 전통적으로 가장 중시되어 온 천문의기(天文儀器)의 하나로 일명 혼의(渾儀), 혼의기(渾儀器),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우주론인 혼천설(渾天說, 하늘이 땅을 둘러싸고 있어 마치 새알의 껍질이 노른자위를 싸고 있는 것과 같다고 믿는 우주관)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천체 관측 기구이며 서기전 2세기경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에 예문관제학 정인지, 대제학 정초 등이 왕명을 받아 고전을 조사하여, 중추원사 이천, 호군 장영실 등이 1433년 6월에 최초로 제작한 것으로 나온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나무 혼천의가 원형 고리를 대나무로 제작한 것에 비해 본 혼천의는 원형의 고리를 포함 모두 목제로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십자형 받친대 밑면에 "制氶 辛未 十二月 十一 日" 이라는 묵서(墨書)가 있어 이 묵서를 근거로 본 혼천의가 1871(고종 8)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교육적 효과를 얻기 위해 28수 별자리 배열을 강조하는 등 실제 천체관측을 위해 사용한 혼천의와는 구성이 다르며, 별자리와 방위까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관측보다는 교육을 위한 기자재로 제작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는 구조는 세겹의 동심구면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바깥층에서 중심으로 지평환(地平環), 자오환(子午環), 적도환(赤道環) 등 세 개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평환은 지평에 평행하며 천구를 상하로 나누고, 자오환은 천구자오선과 일치하는 대원(大圓)을 이루고, 천구북극, 천정, 천구남극 등이 이 대원상에 있어 지평환과는 지평에서 직각으로 만난다. 적도환은 천구적도와 일치하는 환으로서 자오선과는 직교하나 지평환과는 엇비슷하게 만난다.

 

이들 세 개의 환이 교착되어 그곳에서의 천구를 알 수 있고, 천구의 상하와 사방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하여 이 환들을 육합의(六合儀)라고 한다. 가운데 층은 황도환(黃道環)과 백도환(白道環)으로 구성되어,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가운데 층을 삼진의(三辰儀)라 하는데 여기서 황도는 태양의 길, 백도는 달의 길을 의미한다.

 

안쪽 층은 적경쌍환(赤經雙環), 극축(極軸), 규관(窺管)으로 구성되며, 망원경과 같이 천체를 관측하는 규관을 통하여서는 동서남북 사방을 볼 수 있으므로 사유의(四遊儀)라 한다. 이들 각 층의 각 환에는 필요한 수의 눈금을 표시하여 정확하게 관측하였다.혼천의는 아침, 저녁 및 밤중의 남중성(南中星), 천체의 적도좌표 · 황도경도 및 지평좌표를 관측하고 일월성신의 운행을 추적하는 데 쓰였다.

 

전체너비 36.5cm X 전체높이 4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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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높이 34.5cm, 입지름 5.8cm, 몸통지름 21.2cm 크기의 보물 제346호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 청자 상감 동채 모란문 매병 靑磁 象嵌銅彩牡丹文 梅甁 또는 청자 상감 동채 모란문 매병 靑磁象嵌銅畫牡丹文梅甁 이라고도 한다)은 고려청자에 동화(銅畫, 주성분이 구리인 안료를 사용하여 무늬를 그린 후 구워내면 무늬가 선홍색으로 표현되는 기법) 기법을 이용하여 무늬를 표현하였는데, 몸통에는 모란가지 세 개를 흑백상감으로 묘사한 후 꽃잎에 동화(銅畫) 기법을 이용하여 붉은색을 입혀 화려한 무늬를 나타냈다.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특히 매병을 장식하는데 사용한 경우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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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출처(出處), 즉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감에 민감하였는데,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이념일 뿐, 현실적으로는 여러 여건 때문에 실제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무리 물러가려 해도 국왕이 놓아주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조선 숙종 시기 소론의 영수였던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1706년 10월에 영의정에서 물러나려고 여러 차례 상소하였지만 국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최석정이 뜻을 굽히지 않고 무려 16번이나 상소를 올리자 국왕은 할 수 없이 이를 허락해 주었다. 바로 그 다음 날 그는 종친부전부, 삭녕군수, 장령 들을 역임한 나양좌(羅良佐, 1638~1710)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최석정(崔錫鼎, 1646~1715) 초상/ⓒ국립청주박물관

방문을 닫고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세속에 대한 모든 생각이 재같이 식었습니다. 하지만 동인(同人)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열여섯 번이나 사직서를 올렸는데, 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직을 허락받았으니 개인적으로는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최석정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아 조정에 나왔으며,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서를 올려 겨우 면직된 경우도 있었다. 1710년에는 약방도제조로서 임금의 병환을 살피는 데 소흘했다며 삭탈관직(削奪官職,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사판에서 이름을 깎아 버리는 일)과 문외출송(門外黜送, 조선시대 죄인의 관작을 빼앗고 한양 밖으로 추방하던 형벌)까지 당하였다.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도 이와 같이 어려웠지만, 수십 년 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온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더욱이 그 때쯤이면 노령으로 신체가 허약해진데다가 걸핏하면 발병하므로 장기간 여행하는 것이 무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625년 10월에 이전(李㙉, 1558~1648, 조선시대 '월간문집'을 저술한 학자)이 아우 이준(李埈, 1560~1635, 첨지중추부사,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에게 보낸 간찰을 통해 알 수 있다.

듣자니 아우가 낙향할 뜻을 이미 굳혀서 호군(護軍) 봉록(俸祿)도 받지 않을 것이라 하는데, 많은 식구에 어떻게 지내려는가? 무척 걱정이 되네. 학질을 앓고 난 후 원기 회복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추운 날씨에 뱃길 여행은 몸을 더욱 상하게 할 것 같아 우려되니, 부디 이 계획을 그만두길 바라네. 육로를 거쳐 오되, 혼자 오는 것이 간편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꺼번에 가족을 거느리고 귀향하기가 불편하다면, 작은제수씨는 박첨지 집에 의탁한 뒤 나중에 내려오게 해도 무방할 것 같네.

당시 이준의 나이가 66세였으므로 사직하고 낙향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것은 그보다도 훨씬 후였다. 1627년에 정묘호란이 얼아나자 고령임에도 손수 의병을 모집하고, 조도사(調度使, 중앙에서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국가 재정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특별 어사)로 임명되자 군현을 돌아다니며 의곡(義穀, 의병이 납부한 곡식)을 모았다. 70세가 다 되어서도 국왕의 부름을 받고 중앙으로 나아가 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 보니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도 남들처럼 퇴직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고 어린 손자들이 장성하는 것을 바라보려는 꿈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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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원들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관원으로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사화와 당쟁이 빈번히 일어나면서 이 유배살이가 관리들에게 하나의 필수과정처럼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에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유배를 한두 차례 당하지 않은 관원은 이름이 없거나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정파가 집권하게 되면 반대편의 실각한 정파의 주요 관리들을 제일 먼저 유배형에 처했는데, 실각한 정파가 훗날 다시 집권하면 유배되었던 관리들은 대부분 중앙의 정계로 복귀하였으므로 유배의 성격도 약간 변화하여 조선 후기에는 그것이 일종의 '정치금고'와 동일한 처벌로 간주되곤 하였다. 즉 유배기간에는 중앙의 정계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한국관광공사

일단 유배형이 내려지면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데 드는 일체의 비용을 피유배자가 지불해야 했는데, 심지어는 호송관리의 수고비까지도 부담해야 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모함 등으로 억울하게 유배를 당한 경우라면 그 손해가 엄청났지만 법이 그러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배당한 관리의 신분이나 지위, 인적 관계와 복관 가능성 등에 따라서 떠나는 유배길이나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크게 달랐는데, 고관이나 권신들은 유배길에 거처가는 군현마다 들러 그 지역 수령으로부터 향응을 받거나 유배지의 수령이나 아전들로부터 깍듯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유배간 사람이 본가에 쓴 편지/ⓒ국립전주박물관

유배생활의 실제 모습을 조선 영조 대에 충청남도 직산군수(稷山郡守)를 역임한 전근사(全近思, 1675~1732)의 편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전근사는 1728년 4월에 전라도 운봉현(雲峰縣,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동면·산내면·아영면 일대에 1914년까지 있던 행정구역.)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이유는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무리를 보고도 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낸 대관(臺官, 조선 시대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들은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그를 의금부에 가두고 조사하게 했는데, 직무를 유기환 죄가 드러나자 운봉현에 유배하도록 지시하였다. 유배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같은 도(道)의 수령으로 재임하고 있는 친지에게 다음과 같은 간찰(簡札, 옛 편지들을 이르는 말. 서간(書簡), 서찰(書札)이라고도 부른다.)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체직(관직을 교체하는 것, 보통 면직을 뜻하나 경우에 따라 파직을 뜻하기도 함) 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겪었던 어려운 사정은 잠시 말하지 않더라도, 체직된 후에 양식을 지니고 올 방법이 없어서 맨손으로 내려왔는데, 지금 식량을 주가(主家)에 부탁하기가 구차하고 어려운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 근심스러움을 어찌합니까? 형에게 사람을 보내어 어려움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을까 염려될 뿐만 아니라, 관직에 있으면서 응대하는 어려움을 제가 평소에 잘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 안에 영남 출신 친구로서 수령이 된 사람이 6, 7명에 이르니, 만약 유배지에서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반드시 무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나, 관문(官門)은 사실(私室)과 다르고 어리석은 저의 종놈이 동서도 분간 못하기에 실로 서로 통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관중(管仲, 관포지교의 관중을 빗댓 말)인 저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포숙(관포지교의 포숙을 빗댄 말)인 형뿐이니, 부디 같은 도 출신이 부임한 고을에 편지를 띄워서 특별히 구제해 달라는 뜻으로 간절히 부탁하여 제가 객중에서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가? -중략- 근래에 갖가지 신병이 떠나지를 않아 날마다 신음하는 것이 일인지라, 형편상 혼자 머무르기가 어려워서 아들놈과 비복을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이 때문에 식구가 적지 않으니 더욱 근심스럽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조선시대 관리들은 유배생활 중에도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며 비복(계집종과 사내종)까지 거느리고 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근사는 자신의 신병 때문에 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만, 어찌되었든 유배된 관리들 중에는 가족과 함께 살고 또 비복도 거느리고 산 사람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유배기간에 드는 생활비를 당사자가 마련해야 했지만, 전근사는 경상도 출신의 호남지역 수령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던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정약전의 유배기간을 그린 영화 '자산어보' 스틸 컷/출처 : 네이버영화

한편 같은 유배자라 하더라도 유배기간의 생활과 해배 이후의 행보에는 상당한 개인차가 있었는데, 물론 정치적인 유배의 경우는 유배기간 내내 울분 속에서 보내는 유배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나 정약전처럼 이 기간에 독서와 저술을 하고 또 유배지역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등 유교의 진작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인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복관 후에도 그 지역의 자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리로서 중앙에 진출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은 사후에 그 지역 자제들의 추대로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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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토지 등의 재산을 둘러싼 소유권 싸움 못지않게 많이 나타나는 사건은 채무관계이다. 여기에는 채무 이행 요구, 물건의 매매대금 지급 관련 등이 있다. '빌린 돈(債錢)'을 갚으라는 요구에도 다양한 채무관계가 있겠지만, 민간에서 행해지던 고리대에 관한 것도 적지 않았다. 빈농들은 농사를 짓거나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리대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채무는 직접적인 채무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먼 길을 함께 다녀온 족인(族人)이 경비를 갚지 않았다거나 때로는 약을 먹고 약값을 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빌린 돈을 갚고 난 뒤에는 다시 추급요구를 할까 걱정하여 관에 입지성급(立旨成給, 관에서 공증하는 문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입지(立旨) 문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밖에 물건의 매매대금에 대한 내용도 적지 않으며, 목화, 약재, 목재, 포, 생견, 철물, 당물과 등의 물품값을 둘러싼 송사가 일어났으며, 더불어 이 시기의 다양한 상품의 매매 실태도 함께 알 수 있다.

또, 옥사(獄事, 크고 중대한 범죄를 다스리는 일 또는 그 사건)에 따른 비용을 물리는 것도 채무관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데, 옥사(에 따른 비용은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 또는 가족이 부담하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살옥(殺獄, 살인 사건에 대한 옥사)에 대해 초복검(시신의 첫 검안과 재검안)에 사용한 부비(浮費, 일하는 데 써 없어지는 비용)를 가족, 친지에게 물려서 결국 집안 물품과 전답까지 사용한 예까지 있다. 그래서 정약용은 살인이 일어나도 검안에 따른 비용 때문에 관에 알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였다.

 

또, 대가를 받고 소를 먹이다가 소가 죽은 경우도 있었는데, 소를 먹이는 과정에서 소가 죽으면 당연히 배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소 주인도 손해를 보지만, 먹여 기르는 사람도 그간 들였던 노동력에 대한 대가는 받을 길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경우 관에서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액수를 정하라고 하고, 관에다가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채무관계 외에 농민적 권리와 관련된 갈등도 많은데 여기에는 소작권, 초지, 수리 이용권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작인의 경작권이 인정되었는데 주주의 갑작스러운 이작, 탈경에 대해 작인이 호소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점은 '목민서'에서도 매우 중요시하였는데, 특히 파종 이후에는 경작권을 빼앗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지주가 소유권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때로는 파종 이후까지 자의에 의해 작인의 경작권을 빼앗는 일이 발생하여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또 이 과정에서 새로이 경작권을 얻게 된 농민이 구 작인의 항해와 저항 때문에 경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경작권 이외에도 농업과 관련 있는 초지, 수리 등의 이용권을 둘러싼 갈등도 보인다. 특히 수리의 확보를 둘러싸고 면리 간의 갈등이 야기되어 집단적인 등소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때로는 공동수리시설이 개인의 토지에 피해를 입힘으로써 촌리민과 개인이 대립하기도 하였다. 보를 축조함으로써 개인의 토지에 피해를 가져오게 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참고 : 조선시대 민장의 내용으로 보는 갈등들-① 부세 운영에 대한 호소]

[참고 : 조선시대 민장의 내용으로 보는 갈등들-② 민간의 갈등]

 

[참고 : 조선시대 민소(재판)의 절차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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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 갈등으로는 지금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볼 수 있는데, 주로 노비, 토지 등의 재산을 둘러싼 소유권 싸움이었으며, 그 외에 도난, 서로간의 시비를 비롯한 소소한 싸움이 있었다.
 
먼저 토지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회보장제도가 없는 당시로서는 큰 돈이 필요하면 우선 토지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환퇴(環退)라는 제도가 있었다. 환퇴는 일종의 조건부 매매로서, 소유권 이전을 한시적인 것으로 보아 일정한 시기 이내에 소유권 봔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소유권 이전과는 다른 전근대적인 매매형태라고 하겠다. 그런데 원주인이 환퇴를 요구하였지만 현 소유자가 응하지 않으면 관에 민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토지뿐 아니라 시장(柴場, 관청의 땔감 채취를 위해 특별히 지정한 지역 ), 심지어 가옥도 환퇴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환퇴제도를 악용한 사례도 있어 환퇴조건이 없이 매입하였거나 매입한 지 오래된 토지에 대해 환퇴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광무5년 전답환퇴명문(光武五年田畓還退明文)/ⓒ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소유권을 강제로 빼앗는 일들도 더러 있었다. 주로 권세가들이 저지르게 마련이었는데, 물론 멀쩡한 토지보다는 개간지를 대상으로 하기가 쉬웠다. 새로이 개간하거나 이용한 지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소유권을 주장하여 빼앗거나, 분명히 민결인데도 궁방전에 들어 있었다고 주장하여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심지어 오래전에 빈 땅에 가옥을 지은 것을 뒤늦게 빼앗으려 한 사건도 있었고, 문권을 위조하여 전답이나 시장(柴場)을 빼앗으려 한 사건도 있었다.
 
매매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투매, 암매, 이중 매매 또는 매매 방해 등의 사례도 있었다. 이를테면 원소유자의 동의 없이 몰래 팔아 버림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중의 위로 담이나 산지 등을 족인 등 특정인이 팔아 버렸는데 문중이 이를 뒤늦게 알고 문제 삼음으로써 갈등이 빚어졌다. 전당잡힌 전답을 방매하거나 고의로 이중 매매를 행하는 경우도 있다. 주인이 전답을 매매하려 할 때 이를 경작하는 작인이 매매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주인이 바뀜으로써 경작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한 것이다.
 
노비를 둘러싼 분쟁도 적지 않았다. 소유노비의 매매과정이나 노비신분의 확인에 따른 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산송은 산지를 둘러싼 소송이지만 실제로는 소유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조선 후기 유교적 윤리에서 부계 중심의 종족질서가 형성되어 가면서 부계친족의 분묘를 모시는 족산(族山)이 형성되어 갔다. 이처럼 족산을 갖추고 지켜 나가려면 인근에 분묘를 가진 측과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문중조직이 분화하면서 친족 내에서도 산송이 일어나게 되었다. 후손 간에 산지를 나누어 사용하게 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경계가 불분명할 수도 있고 또 경계를 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윤상정 산송소장(尹相定山訟訴狀)/ⓒ국립중앙박물관

한편으로 유교적 상·장례와 종족의식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중인과 양인층에게 확산되면서 이들도 분묘를 위한 산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특히 여건이 좋지 않은 양인층으로서는 이를 확보하기 어려우므로, 암장을 하고 발각이 되면 도피하는 일도 벌어졌다. 따라서 관에서도 투장한 자가 도망하면 집안의 문장(門長)을 잡아 오라고 명령하기도 하였다.
 
산지의 매매를 둘러싼 문제도 일반토지보다 복잡하였다. 산지 속의 분묘에 대한 이장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매입 이후에도 끊임없이 산송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 산지의 목재 이용권을 확보하려고 하면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산지를 소유한 쪽에서는 목재 등에 대해 배타적인 이용권을 확보하려 하였고, 생계를 위해 산림을 이용하려는 쪽에서는 몰래 작벌하면서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는 토지 소유권과 산림에 대한 공동 이용권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공동 이용권을 주장하는 자들은 빈농층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계급적·계층적 대립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지를 가진 집안은 족계를 형성하거나 집안끼리 연대하여 금송계(禁松契)를 결성하면서 산지를 수호하고 민인들의 산림 이용을 철저하게 통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향촌공동체의 금송계와 연대하여 산지를 수호하면서 반대급부로서 시초 채취권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목재를 이용하려는 측은 무리를 지어 입산하여 나무를 작벌하였다. 특히 읍저의 초군(樵軍)들은 읍저의 세력을 믿고 저질렀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 : 조선시대 민장의 내용으로 보는 갈등들-① 부세 운영에 대한 호소]
 
[참고 : 조선시대 민소(재판)의 절차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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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장에서는 무슨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을까? 여기에는 부세문제가 첫 번째로 꼽힌다. 이 경우 부세 운영에 대한 호소라고 할 수도 있고, 부세를 통해 관의 조치나 지배구조에 대하여 저항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먼저 부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정에 관련된 내용이다. 전세를 감면 또는 면제해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전답이 진전(陳田)이 되었거나 재해를 입어서 경작할 수 없는 경우, 또는 비가 오지 않아서 제때에 모내기를 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로 전세를 낼 수 없는 상황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지면적 이상으로 세가 매겨지거나(加錄),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되어야 할 수세결수가 책정되는 등 오류를 바로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 경우 세를 매기는 과정에서 담당하는 서원, 감색 등이 농간을 부렸을 수도 있다.

서병훈 면세청원소장 일괄(徐秉勳免稅請願訴狀一括)/ⓒ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다시 조사하여 이정하도록 하거나, 때로는 잘못 책정되었다면 담당자를 처벌하고 그에게 환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담당자에게 처리를 맡기면 잘 해결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수세가 잘못 들어왔다면 그쪽으로 이록(移錄)해야 하는데, 관에서 이록받을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여 민간에 책임을 넘기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양전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에서는 가급적 현상 유지, 또는 민간에서 알아서 수세액을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소유자나 경작자가 몇 차례 바뀌어도 파악하지 못하고 처음 책정되었던 사람의 이름으로 납부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농민들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일뿐 아니라 제대로 전세가 매겨지는지, 전세를 책정하는 이서들이 농간을 부리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하였다. 더구나 지주들은 점차 전세를 작인들에게 넘기는 추세여서 농민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다음음 군정과 관련된 내용이다. 군정은 토지보다 변동이 심한 사람을 직접 다르기 때문에 문젯거리가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군역의 탈급에 대한 호소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한 사람에게 군정이 이중삼중으로 부과되거나(첩역),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 매겨지거나,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 계속 부과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며, 때로는 양반인데 군역이 매겨졌다고 하여 탈급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조사를 한 뒤 처리해야겠지만 당연한 요구의 경우에도 해결이 쉽지만은 않았다. 군역은 고을-면-리 단위로 일정한 액수가 있었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계속 내려오기도 해서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관에서는 이런 사정을 알기 때문에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탈급하려는 사람에게 대신 군역을 맡을 사람을 구하라고 윽박질렀다. 죽은 사람의 탈급도 잘 들어주지 않는 형편이어서 나이가 많다거나 병을 호소하는 경우는 아예 논의조차 어려웠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보면, 1863년경 강원도 철원(북면 원지리)에 사는 평민 김복동의 집은 군역이 5명이다. 그와 아우, 그리고 세 아들이 모두 군역을 지고 있었는데 새로운 군역이 부과되었다. 셋째 아들에게는 다른 군역이 중첩하여 부과되었던 것이다. 이는 면임 윤도신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같은 마을의 이응규라는 자가 벌을 받게 되면서 두 군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벌을 대체하였는데, 면임은 이용규에게 뇌물을 받고 군역 하나를 빼 주었고 대신 김복동의 셋째 아들에게 중첩해서 배정하였다. 이에 김복동은 민장을 올렸는데, 관에서는 몇 차례 시간을 끌다가 1년 만에 그 역을 탈급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정할 것을 명령하였다. 면임의 농간에다가 관에서 늑장을 부리다가 여러 차례 호소하자 뒤늦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그 당시 이런 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처리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한능 탈역청원소장(諸漢能頉役請願訴狀)/ⓒ국립중앙박물관

환곡의 경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문제가 심각하였다. 양반의 경우 '가세가 빈궁'하다며 환곡 분급을 면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지만, 일반농민들은 도망이나 유리, 사망으로 인해 분급을 면제받고자 하였다. 환곡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호소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유서필지>에 부세에 관한 민장은 군역과 환곡의 사례가 있는데, 군역은 양반가와 관련된 것인 반면 환곡은 가난한 집에서 분급을 받더라도 나중에 갚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서 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도 본래 환곡은 흉년 구제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분급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1872년 철원 갈말면 동막리 도기점에 사는 김서경은 자식 하나 없이 맹인 아내와 둘이 살고 있는 등짐장수였다. 김서역에게도 환곡이 배정되자, 이를 갚기 어려웠기 때문에 분배 대상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반면에 관에서는 환곡을 강제로 분급하기 때문에 탈급을 하려 하지 않았다. 김서경은 자신이 떠돌이생활을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였고, 결국 관에서는 이런 자에게 분급하면 회수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는지 제외시켰다. 이처럼 한사코 환곡을 받지 않으려고 민장을 올리는 점에서 환곡의 문제점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고을에서 부과하는 갖가지 잡세에 대한 요구도 적지 않았다. 잡세는 특별한 원칙 없이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일반민들에게는 삼정보다 수탈적인 것으로 비추어졌을 수도 있다. 잡역 또한 대상자가 사망했거나 촌리의 실정이 너무 어렵거나, 또는 본래 역에서 제외된 제역촌(除役村)이라는 이유로 탈급을 요구하였다. 잡역은 대체로 동리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리에서 요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민들이 등장을 통해 잡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관에서는 의례적으로 그냥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상의 부세에 관해서는 이를 담당하는 국가와 관에 대한 민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는 담세자인 일반민중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전세는 토지를 가진 양반층이 민장을 많이 올린 반면에 군역, 환곡, 잡세 등은 일반민의 호소가 더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호가 아닌 대부분의 양반은 평민들과 크게 구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조선 후기에 인구가 증가하고 토지의 분할 상속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지주가 가진 토지규모도 줄어들었다. 이를 막기 위해 장자에게 토지를 집중하거나 많은 전답을 제위전(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으로 할당하고 종손에게 관리하게 하여 종가형 지주가 출현하였다. 반면에 종손이 아닌 경우 토지규모는 더욱 영세해졌고, 또 한편 관료가 되지 못함으로써 신분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일반민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18, 19세기에 개별 농민의 경작면적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이들의 경제실태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데 비해 부세의 종류와 액수는 늘어나고 있어 민의 호소, 저항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부세는 대체적으로 개인에게 납부 책임이 있고, 이에 따라 개인이 주로 감면 등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실제 부세의 부과와 징수에 있어서 촌리의  공동적인 책임이 없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정의 경우 이정법(里定法)이라고 하여 군액의 충원을 촌리에서 책임져야 했다. 잡세의 경우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면리에서 힘을 모아 토지를 마련하는 등 공동납 방식이 채택되고 있었다. 따라서 부세문제에 대해 때로는 개인적으로, 때로는 촌리단위로 대응이 필요하였다.

 

[참고 : 조선시대 민소(재판)의 절차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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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조선시대에 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에는 삼법사(三法司), 사송아문(詞訟衙門), 직수아문(直囚衙門) 등이 있는데, 이중 삼법사는 중앙의 형조, 한성부, 사헌부를 가리킨다. 사송아문은 민사사건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지방의 군현, 감영, 서울의 한성부, 자예원, 형조, 사헌부를 가리킨다. 직수아문은 죄수를 직접 구금할 수 있는 기관들로, 가두어 놓고 심문할 정도의 중죄인을 다루는 기관이다. 여기에는 병조, 형조, 한성부, 사헌부, 승정원, 장예원, 종부시, 관찰사, 수령 등이 해당된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여러 기관은 재판과 형벌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 행사였는데, 특히 지방의 경우 각 도의 관찰사와 군현의 수령은 사송아문, 직수아문에 속하여 중요 재판기관으로 설정하여 행정을 담당할 뿐 아니라 재판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관찰사는 사형 다음으로 중한 형벌인 유배형까지 판결하고 집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령은 태(笞) 이하의 범죄에 대한 재판과 형벌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상의 범죄는 심리를 한 다음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병영, 통영 등의 군문도 상당히 광범위한 재판권을 행사하였으며, 감영만큼은 아니지만 지방 군현보다 상급기관으로서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조선시대 동헌/ⓒ오마이포토

 

수령의 재판권

수령의 임무 일곱 가지(수령칠사)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임무가 조세 수취와 재판이라고 한다. 더구나 조세 수납은 자신의 형벌권의 뒷받침을 받아 완수하고 있었다. 수령은 조세 납부 기관을 정해 담당자를 독려하고, 정한 날짜를 지키지 않으면 담당자와 납부자들에게 형벌을 내리고 독납하였다.

**수령칠사 (守令七事,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의 통치에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임무)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戶口增 : 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이처럼 수려의 재판·형벌권은 한 고을을 다스리는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의 입장에서는 이런 형벌을 당하지 않으려고, 때로는 이러한 형벌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민소를 하게 된다.
 
이렇듯 한 지방의 소송은 해당 지방관이 담당하였다. 다만 지방관이 자리를 비울 경우 이웃고을의 수령이 겸관으로서 민장을 받아 처리하였다. 양쪽 지방 사람이 재판에 관계될 때에는 원고는 피고가 있는 지방의 수령에게 민장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 피고에게 무언가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피고를 다스리는 지방 수령의 힘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재판의 과정은 먼저 원고가 민장을 내어 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 고을 백성이면 누구나 민장을 제출할 수 있었다. 양반이나 노비나 신분의 제한 없이 제출하는데, 노비의 경우 주인을 대신해서 내기도 하였다. 때로는 등장이라 하여 집단적으로 내기도 하였는데, 주로 면리공동체, 문중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관임, 면·이임이 행정 보고로서 내기도 하였다. 제출자는 어느 면, 어느 동 누구라고 쓰고, 다른 고을 사람일 경우에는 어느 고을 누구라고 밝혔는데, 이 경우 소송 상대나 관련된 물건이 이 고을에 있는 경우에 한하였다.
 
소송의 성격은 다양하였다. 형사 고발, 민사소송 제기, 행정적 청원, 행정 소송, 행정 보고 등을 모두 포함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는 재판 자체가 수령에 대한 일종의 청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령의 입장에서는 재판은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수령의 일상적 업무의 한 부분인 한편 조세 수취 등 다른 임무도 재판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민장은 대개 제출자가 직접 관정에 가지고 와서 제출하였다. 수령의 집무 지침서에는 민장은 반드시 해당자가 직접 와서 바치도록 하고, 이를 문지기나 관속들이 밖에서 가로막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면하여 호소하는 백성이 있으면 다른 일을 멈추고 전념하여 자세히 듣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함께 보기 : 민장(民狀)이란?]
 
민장이 들어오면 수령이 곧바로 처리해야 한다. 수령은 민장을 물리치기도 한다. 이를테면 흔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될 때는 올리지 말도록 제사를 썼다. 당사자를 대질시켜야 할 경우에는 피고를 대동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따라 원고가 피고(피고는 '척隻'이라고 불렀는데, '척지지 말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를 대동하여 재판정에 출두하면 심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고와 피고가 서로 화해하여 관에 나오지 않기도 하고, 피고가 수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피고가 응하지 않을 경우에 원고는 "피고가 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관에서 사람을 내어 붙잡아 와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수령이 이를 받아들여 면주인이나 형리를 시켜 피고를 붙잡아 오게 되고, 피고는 관령 거역죄로 치죄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소소한 다툼에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원고가 피고를 고발하기가 어려웠고, 고발하였다고 하더라도 수령은 이졸이 촌리에 나가면 폐단이 생기므로 보내지 않고 원고로 하여금 붙잡아 오게 하였다. 때로는 피고를 데려오지 못해 송사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피고가 관정에 나오지 않더라도 판결은 가능했지만, 수령의 집무 지침서들은 되도록 공정한 편결을 위해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였다.

소장(訴狀)/ⓒ국립중앙박물관

이렇게 하여 대부분의 송사는 간단한 대질심문만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큰 송사의 경우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처리의 내용은 민장 말미에 제사를 써서 당사자에게 내주었다. 관은 이러한 사건 처리문서를 보관하지 않고, 다만 그 내용을 최소한 보존할 목적으로 <민장치부책>을 작성하였다. 다라서 민장을 낸 사람이 이를 보관하며 필요할 때는 연결하여 민장을 내어서 심리의 시속성과 판경의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민장이 제기되었을 때 심리가 끝나면 판결을 내리는데, 이를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건의 확정 판결일 수도 있고 심리를 진행해 가는 과정의 명령이기도 하였다. 제사는 민장의 말미에 적어서 민장 제출자에게 돌려주었다. 때로는 문서를 따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면 대가를 받고 사건의 전말과 판결내용을 자세히 적은 판결문을 작성해 주었다. 민장 제출자는 제사가 적힌 민장을 증거문서로 삼거나 제사에 기재된 관령을 수행하도록 지시된 자에게 직접 제시하였다.
 

민장을 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민장은 일반민이 제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개인이 제출하기도 하고 집단으로 제출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개인이 제출하였는데, 개인의 이해관계가 담긴 소소한 사건이 많기 때문이며, 사회적 신분에 따라 그 내용은 다양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대개의 경우 억울함을 해결할 방안이 없어 민장을 쓰기도 하고, 우월한 처지에서 관의 힘을 보태어 밀어붙이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서병훈 채권추심 소장(徐秉勳債權推尋訴狀)/ⓒ국립중앙박물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제출도 적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촌을 단위로 하는 촌리민이 가장 보편적이다. 드물지만 문중이 주체가 되기도 하고, 지주들이 소작인과의 갈등 때문에 등장을 제출하는 사례도 있다. 그런데 양자는 같은 집단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같은 문중에 속하는 지주들이 도조 추급을 위해 함께 등장을 내기도 하였다. 다만 문중의 역할은 줄어드는 추세로 보인다. 반면에 같은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고 있는 소작인들이 나서기도 한다. 때로는 면리의 보편적인 문제를 가지고 촌리민이 힘을 모아 등장을 제출하기도 한다. 정약용 같은 경우 , 등소에 앞장선 이들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았는데, 이들이 당시 면리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잘 알고 나섰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면세청원소장(訴狀) 초고/ⓒ국립중앙박물관

또 하나 면·이임과 같은 말단 행정 담당자들이 민장을 내기도 한다. 이를 일반민의 경우처럼 민장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면리 전체의 문제를 대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각종 부가세나 잡세, 군역의 이정, 감면을 요구하고, 때로는 공동부역이나 기강, 산송의 문제에 대해서도 소장을 제출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이 부세의 부과와 징수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어려움과 부세 거납자들에 대한 처리를 하소연하기도 한다. 스스로 직임을 그만두게 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많았다. 이들이 올린 것은 민장이라기보다 행정적 보고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외형적으로는 관에 대한 문제 제기나 저항적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용으로는 부세제도의 불합리성과 탐학성에 저항하는 일반민인들의 모습을 은근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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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오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한다. 수는 장수(長壽), 즉 오래 사는 것을 말하며, 부는 부유, 곧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뜻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재력을 의미한다. 강녕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것을 말하며, 유호덕은 덕을 좋아하여 남에게 베풀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고종명은 일생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덕을 좋아하며 살다가 제명대로 생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종명에는 앞에서 말한 네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고종명하기를 희망했다.

 

고종명을 말할 때 으레 거론되는 것이 회갑(回甲)과 회훤(回婚) 및 회방(回榜)이다. 회갑은 태어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하고, 회혼은 결혼한 지 60년이 된 것을 지칭하며, 회방은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된 것을 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먹는 것이 부족하고 질병도 자주 나돌았으며 의료수준 또한 높지 않아서 60세가 될 때까지 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60세가 되면 회갑연을 성대하게 베풀고 더욱 장수하기를 축원하였다.

 

회혼은 회근(回卺)이라고도 하였는데, 혼인한 지 60년이 되는 해애ㅔ 행했기 때문에 이를 맞이하는 사람이 더욱 드물었다. 15세에서 20세 사이에 혼인한다고 가정하면 75세에서 80세가 되어야 회혼이 가능했는데, 부부가 모두 살아 있어야 예식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회혼례(回婚禮)를 볼 수 없었다. 회혼례는 노부부가 다시 신랑신부가 되어 혼인식을 치르는 것인데, 아들과 사위가 혼인식을 거행하는 집사(執事)와 신랑을 인도하는 기러기아범이 되고, 딸과 며느리가 신부의 수발을 드는 수모(手母)가 되었으며, 손자와 손녀가 구경꾼이 되어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전 김홍도필 담와 홍계희 평생도 중 '회혼례' 일부/ⓒ국립중앙박물관 

회방은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지나야 가능했기 때문에 회방연(回榜宴)을 구경하기가 회혼례보다 더욱 어려웠다. 문과 급제 평균 나이가 30세를 훌쩍 상회했으니, 90세가 넘어야 회방연을 실시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시 합격 평균연령은 이보다 어렸기 때문에 이는 종종 볼 수 있었다. '만력기유사마방회도첩(萬曆己酉司馬榜會圖帖)'이라는 회방연 관련 그림이 현존하는데, 제목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문과 회방연이 아니라 생원진사시 회방연이다. 이 도첩은 만력 기유년, 즉 1609년의 생원진사시 합격자들이 60년이 지난 1669년에 장원으로 합격했던 이민구(李敏求)의 집에 모여 잔치를 벌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장혼(張混, 1759~1828)의 문집인 <이이엄집(而已广集)>에는 회갑과 회후너 및 회방을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다만 장혼은 회갑보다는 회방이 드물고, 회방보다는 회혼이 드물었다고 말하고 있다. 순서는 다르지만 회갑과 회방 및 회혼을 맞이하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희귀한 일이라고 칭하며 사람들이 경하(慶賀)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생년(生年)의 회갑, 등과(登科)의 회방, 초례(醮禮)의 회근이 그것이다. 이것은 황왕(皇王)과 제백(帝伯)의 권세로도 취할 수 없고, 진나라나 초나라 도주공(陶朱公)이나 의돈(猗頓)의 부(富)로도 구할 수 없으며, 현인군자의 덕이라도 반드시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장수(長壽)한 후에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회갑을 맞이하는 것은 열에 대여섯이고, 회방을 맞이하는 것은 백에 서넛이며, 회혼은 천에 한둘이다.

<계서야담(溪西野談)>을 살펴보면, 회갑과 회혼 및 회방을 모두 치른 인물로 심액(沈詻, 1571~1654)이 거론된다. 그는 1571년에 태어나 20세인 158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6세인 1596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혼인을 언제 했는지는 알 수 없느나 그가 회갑을 맞이한 해는 1631년이며, 생원시의 회방이 된 해는 1649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과 회방연도가 되는 1656년보다 2년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계서야담>에서 말하는 회방은 생원진사시 회방임을 알 수 있는데, 그와 같이 회갑과 회혼 및 회방을 모두 치른 인물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몇명 되지 않았다.

 

회갑, 회혼, 회방을 다 맞이하고, 여기에 더하여 기로연(耆老宴)과 구순연(九旬宴)까지 치른 인물로는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있다. 그는 1783년에 태어나 15세인 1797년에 강릉김씨(江陵金氏) 김계락(金啓洛)의 딸과 혼인하고 20세인 180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회갑을 맞이하던 1843년 그는 좌의정을 거쳐 판중추부사로 재임하였다. 김씨와 혼인한 지 60년이 되던 1857년에 국왕은 장악원(掌樂院)에 명하여 그의 회혼연(回婚宴)에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고, 탁지부(度支部)에 지시하여 잔치비용을 지급하도록 했으며, 관원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문과에 급제한 지 60년이 지난 1862년에 국왕은 그에게 궤장(几杖,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하고 회방홍패(回榜紅牌, 홍패는 붉은 종이에 쓴 증서라는 뜻으로 문무과거 합격자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합격증이다.)를 발급하였는데, 이 홍패가 현재 그의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다. 홍패를 발급한 것은 이원익(李元翼) 이후 처름 있었던 일로 알려져 있다.

현종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 1595~1671)에게 내린 하사품 궤장/ⓒ경기도박물관

그런데 이보다 10년 전인 1852년에 정원용은 나이가 70세가 되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기로연을 베풀었다. 그는 관례에 다라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시 20년 후인 1872년에 90세가 되자 그는 구순연을 크게 열었다. 고종은 "영부사가 올해 90세가 되었다. 대관(大官)으로 이 나이에 이른 인물은 국조 이래 불과 서너 명밖에 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한 집안만의 경사이겠는가? 또한 태평한 시절의 상서로운 징조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지금에 와서는 회갑을 맞이하는 일은 어찌보면 거의 당연시 되는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일생에서 고종명을 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회갑을 맞이하기도 어렵던 시절에 심액과 정원용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록을 모두 누린 행운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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