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시장은 상인과 소비자, 그 둘을 연결하는 중개인, 그리고 물건을 운반하는 마행상이나 선상(船商)으로 구성되고 운영된다. 상인은 앉아서 파는 좌고(坐賈)와 돌아다니며 파는 행상(行商)으로 나뉜다. 좌고는 좌상(坐商)이라고도 하며, 좌고와 행상을 합하여 상고(商賈)라고 한다. 객주(客主,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거간하며, 여러 가지 부수 기능을 담당한 중간상인), 거간(居間, 타인간의 상행위의 중개 및 토지와 가옥의 매매·임차·전당의 중개를 직업으로 삼는 중간상인), 공인(貢人, 조선 후기 중앙 각 궁(宮)·관부(官府)에 필요한 물자의 조달을 맡았던 어용적 공납청부업자) 등은 중개상인들이다.


[김홍도 <장터길> 보물 527호]


선상은 조선 초기에는 주로 서강, 마포, 용산 등의 한강변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이나 성안에 사는 부재지주인 사대부들의 소작료를 운반해 왔다. 또 이들이 생산지의 포구주인이나 행상 또는 직접 생산자로부터 산 물화를 싣고 경강에 도착하면 경강주인이나 중도아(中都兒, 조선 후기 상품 유통체계 내에서 생산지와 소매상인 간의 연결고리를 담당한 중간 도매업자들을 일컫는 표현)가 이를 시전에 넘겼다.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 행상/국립중앙박물관]


우리 역사에서 행상들이 언제 자체 조직과 운영체제를 갖추게 되었는지는 문헌적 근거가 없어 알 수 없다.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용어는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합친 말인데, 이것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조선 말기인 19세기 후반경이다.


부상(負商)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관련지어 볼 때 장시 유통망이 전국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에 조직화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유품으로만 보면 1845년 이후 군현의 수령이 상고(商賈)에게 발급한 공원차정첩(公員差定帖)과 1851년에 작성된 '예산임방입의절목(禮山任房立義節目)'이나 원홍주육군상무사(元洪州六郡商務社)의 '청금록(靑衿錄)' 등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7세기 중엽 이후 지방의 장시가 활성화되고 대동법의 시행으로 물자의 유통이 전국적인 망을 갖추게 되면서 장시는 자연히 수세(收稅)의 표적이 되었다. 장시 운영에 관한 권한은 지방관이 가지고 있었는데, 지방관은 그 권한으로 어려운 재정사정을 타개하고 모자라는 공공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장세(場稅) 징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수세패/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중엽이 되면 비교적 규모가 큰 장시를 둔 군현에서는 장세 징수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을 일종의 관행처럼 받아들였다. 대개 처음에는 진휼을 위한 비용 마련에서 징수를 시작하였지만, 그 액수가 커지면서 지방재정의 한 축을 이루게 된 것이다. 19세기 초가 되면 전국적인 장시망(場市網)이 형성된데다가 거래물량도 많아지면서 장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관리가 요구되는 시점에 도달한다. 송상(松商)이나 경상(京商), 즉 개성이나 한양의 거상들이 전국적인 상단(商團)을 조직하여 운영한 것도 이때쯤으로 여겨진다. 19세기 중반에 들어 행상들에 대한 국가적 관리가 요구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중에서도 현실적으로도 가장 필요했던 것이 장세 징수였는데, 징수의 대상인 이들의 일부를 중간관리자로 조직하는 등의 방식으로 장세의 효율적인 징수를 꽤했던 것이다.


상인조직으로는 보부상조직말고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첫째, 서울 육주비전(六注比廛, 육의전)과 같은 시전(市廛)이나 개성, 평양, 수원 등에서 시전을 운영한 상인들의 조직

둘째, 객주와 여각

셋째, 대동법 실시 이후 관수품 조달을 담당하였던 공인(貢人) 조직


거래 물량이 많을 경우 시장에서 처음 만난 판매자나 구매자 모두 당사자들끼리 바로 거래하는 것은 매우 불안하다. 객주는 위탁판매를 맡아 쌍방 간에 이러한 불확실성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객주는 위탁판매를 맡아 쌍방 간에 이러한 불확실성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객주와 고객 사이에 신용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객주는 각처에서 모여드는 상인들을 위해 이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거나 물건을 보관하는 일, 물품 매매를 성립시키는 일 등을 업으로 하는 상인다. 창고 보관과 물품 운송취급은 위탁판매에 부수되는 이들의 업무이다.

거간은 매매자 쌍방 간에 개입하여 매매를 성사시키고 수수료를 받는 자를 말한다. 장주릅, 우다위 등으로 부리기도 한다. 집을 거래하는 거간은 특히 가쾌(家儈)라고 한다. 거간은 객주에 딸려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두 유형이 있는데, 전자를 내거간(內居間)이라 하고 후자를 외거간(外居間)이라고 한다. 전문적인 미곡거간을 감고(監考)라고 하며, 보통 시장에서는 '되쟁이' 또는 '마쟁이'로 불린다. 일반농민이 직접 쌀가게에 와서 소매하는 경우에 이를 중개하는 자를 특히 승간군(升看軍)이라고 한다. 환전거간은 금전의 대부와 차용에 관여하는 거간이고, 당화거간은 화물에 관여하는 거간이다. 육주비전 전포 앞에서 지나가는 손님을 끌어 물건을 사게 하는 '여리꾼(列立軍)'도 거간의 일종이다. 거간이 받는 수수료를 구전(口錢)이라고 하는데, 대개 곡물 한 섬에 대해 2~4전(錢), 기타 잡물에 대해서는 매매가격의 1%를 받는다. 그러나 객주의 수수료는 거래내용에 따라 다양하다. 매매물건의 수량을 기준으로 받는 구전을 물구문(物口文)이라 하고, 가격을 기준으로 받는 구전을 전구문(錢口文)이라고 한다. 위탁 판매한 물건을 맡을 때는 [임치표(任置票), 임치장(任置狀)]를 주었다.


[개성부기/국립중앙박물관]


시장에서 통용되던 거래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어음, 환간(換簡), 임치장(任置狀), 선지증(船之證, 출차표(出次票), 고본(股本), 세가문권(貰家文券), 장기(掌記), 수표(手票), 삭채표(朔債票), 명문(明文), 보음지(保音紙), 전안(廛案) 등 거래문서의 일종인 거래장부도 다음과 같이 여러 종류가 있다.

일기장(日記帳), 각방세책(各房稅冊), 물품 거래장(物品去來帳), 위탁물 처리장(委託物處理帳), 어험 수지장(魚驗收支帳), 회계책(會計冊), 손익 계산장(損益計算帳), 분개장(分介帳) 등 분개장에는 원장(元帳), 외상장책(外上長冊), 타급장책(他給長冊), 결산장(決算帳) 등이 포함된다, 사개부기(四介簿記) 또는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이라고 하는 개성상인들이 개발한 복식부기도 이러한 문서의 일종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전통사회에서는 도시적 여건을 갖춘 읍성이 많지 않은데다가 농촌을 배후지로 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양자 간에는 경제적인 의존관계가 높았기 때문에 분산된 구매력을 모아 장을 상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간혹 교통이 발달한 행정 중심지의 경우는 수요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장날 간격을 5일보다 더 줄여 2~3일 간격으로 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나 나주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전주는 서울, 평양, 개성 등과 함께 상설점포라고 할 수 있는 시전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용하는 전주읍장은 상설화되어 있지 않아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등 사대문의 입구에서 번갈아 장이 열렸는데, 2일에는 남문 밖, 4일에는 북문 밖, 7일에는 서문 밖, 9일에는 동문 밖에 장이 섰다. 그 중에서도 2일과 7일에 열리는 장은 큰 장으로, 4일과 9일에 열리는 장은 작은 장으로 각각 부렸다. 나중의 읍내장도 2일, 4일, 7일, 9일 등 열흘에 네 번 열려 다른 곳에 비하면 배나 자주 열렸다.


[함께보기: 오일장의 역사]


전라도 부안은 규모가 큰 군은 아니지만 해안을 끼고 있어 생산물이 풍부한데다가 교통의 요충지여서 이곳 역시 읍내장을 둘로 나누었다. 장날을 보면, 읍내상장(邑內上場)은 2 · 7일에, 읍내하장(邑內下場)은 4 · 9일에 열리므로 결국 열흘에 네 번 여는 셈이다.

오일장은 정기시장인데, 구체적으로는 한 달을 30일로 잡아 여섯 번, 열흘을 단위로 하면 두 번 여는 장이다. 장날은 주변 장을 고려하여 상인들이 순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매달 1일, 6일, 11일, 16일, 21일, 26일 등 6일을 여는 장이 주변에 있으면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 등 5일 간격으로 장을 열게 되며, 여기에 들른 상인은 다음 날은 매달 3일과 8일이 들어가는 날에 여는 장으로 이동한다.


정기시장과 그 주기는 세 가지 원리에 의해 형성된다. 중국대륙의 장시체계를 연구한 스키너(G. W. Skinner)는 전통 농민사회의 시장이 정기성(定期性)을 띠는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첫째는 공급자, 즉 생산자나 상인의 입장으로, 이들이 하나의 시장에만 의존하기에는 이익이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면 공급자는 서로 다른 개시일을 이용하여 판로를 여러 개의 시장에 의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정기시는 대량생산자나 순회상인이 아닌 소규모 생산자로서의 농민에게도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키우는 몇 마리의 닭이 낳은 달걀은 매일같이 시장에 나가 팔 만큼의 수량이 되지 못한다. 농민의 생산규모는 이와 같이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시장 하나에만 의존하더라도 충분하며, 그 대신 하나의 시장에서 많은 고객을 대할 수 있어 좋은 것이다.


둘째는 소비자의 입장으로, 시장의 정기성은 여행거리를 줄이는 방법이 된다. 농민들의 전통적인 소비규범은 검약을 강조하며, 또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시장에 매일 나갈 필요가 없다. 하나의 시장권 내에 있는 가구의 수가 증가하여 상인의 입장에서는 장을 매일 열어 상설화하기에 충분한 수준까지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농민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소비형태가 여전히 이전과 같아 5일 간격의 장에 어떠한 불편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러한 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교통 · 운송수단으로, 정기시장은 그것이 발달하지 않은 지역에서 그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통 · 운송수단이 아무리 발달해 있어도 농촌의 인구는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거리 이동에 많은 비용이 든다. 그러므로 교통비와 시간을 아끼려는 농민들과 단순한 생계수단으로 장사를 계속하는 영세상인이 존속하는 한 농촌의 정기시장은 계속 그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수원의 우시장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곳이다. 장날이면 각지에서 소장수와 농민들이 몰려들어 언제나 성시를 이루었다. 수원의 우시장은 일반장과 함께 서는데, 성내(城內) 시장은 10일 간격인 9일, 19일, 29일에, 성외(城外) 시장도 역시 10일 간격인 4일, 14일, 24일에 열어 합치면 5일장을 여는 셈이 된다.


[도리도표/ⓒ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을 기점으로 주요 대로상의 거점과 거리를 표로 그린 첩으로,

상인이나 여행객이 지참했던 19세기 유물이다.


[도리도표/ⓒ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순조 연간에 제작된 8도전도의 도리도표첩. 채색목판본


위와 같이 상거래가 활발한 지역에서 정기시장의 개시일이 늘어나는 현상은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상설화되지 않고 분설(分設)되어 간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요자인 농민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며, 상인의 입장에서도 시장이 포섭할 수 있는 지역적인 범위를 넓히고 거래를 통해 발생하는 이익을 골고루 나눌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6대로(大路), 또는 이후의 10대 간선도로 중에 서울에서 호서와 호남으로 향하는 도로는 수원을 거쳐 간다. 서울에서 서남쪽으로 나 있는 6대로의 하나인 제5대로 제주로는 1770년에 나온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 의하면 한성에서 출발하여 동작진을 건너 과천에 이르고, 사근천을 건너 수원에 도착하면 그 다음은 진위-소사점-아주교-성환역-직산-천안-차령-공주-니성-여산-삼례역-태인-정읍-장성-영암-해남-제주에까지 이른다. 이책은 화성건설 이전에 나왔기 때문에 여기서 수원은 화성 축조 이전의 구읍(舊邑)을 가리키는 것이다. 구 읍치 남쪽 아래의 황구지천을 건너면 독산성이 있기 때문에 황구지천을 건너기 위해 설치한 다리가 세람교이다.


장길은 두 장시를 지름길로 연결한다. 경기지역 장시의 연결은 서울을 구심점으로 방사선을 이루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웃하는 장의 개시일이 지방의 장들과는 달리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수원장 역시 정조의 화성 축조 이전에는 이웃 장들과 마찬가지로 서울로 모이는 선사으이 한 장에 불과하였으므로 포섭범위는 비교적 넓었지만 주변 장들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화성 축조 이전의 옛 수원장 자리는 구 읍치에 있어 현 위치보다 남쪽 아래로 위도상 남양장과 나란히 하고 있어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었고, 따라서 서울을 향해 올라가는 물자들이 남양장과 수원장을 모두 거칠 수 없었다.

화성 축성 이전에 서울을 떠나는 주요 시발점은 양재역(良才驛)이었으며, 광주에 이르러 용인과 수원 방면으로 길이 나뉘었는데, 그 분기점이 낙생역(樂生驛)이다. 광주를 거쳐 경상도 동래로 향하는 역로는 조선 말엽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 즉 용인 구흥(駒興)과 김령(金嶺)을 경유하여 죽산과 음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수원을 경유하는 역로는 양재역에서 시작하여 용인을 거쳐 삼남으로 향하는 대로(大路) 도중에 낙생역이나 구흥역에서 분기(分岐)하는 간로(間路)였다.

본래 옛 수원과 남양의 치소(治所)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남양은 서해로 돌출한 반도이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수원으로도 갈 수는 있지만 서울이 목적지인 경우는 옛 수원장을 경유해야 할 이유가 없다. 유통체계로 볼 때 화성 축조 이전까지 세람교는 육로로 올라온 남쪽의 물산들이 수원구읍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에 해당한다. 세람교를 건넌 물자들은 동북쪽으로 과천을 통과하여 올라간 것이 아니라, 서북쪽으로 현 화성시 봉담면 동화리에 있던 동화역을 지나 매송면 어천리를 거쳐 노량진을 향해 올라갔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역을 수원의 읍치로 천장(遷葬)함과 동시에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원행로(園幸路)를 새로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호서와 호남으로 가는 대로와 신작로가 생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화성을 통과한 역로는 팔달문을 나와 수원천을 따라 남진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수원은 광주(廣州)와 더불어 삼남으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부각되었다.

화성 건설로 수원 인근의 장시체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후기 수원을 중심으로 하는 장시는 북쪽으로 서울 방면, 동쪽으로 용인 방면, 남서쪽으로 남양 방면, 그리고 남쪽으로 평택 방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장시들은 모두 삼남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구조에서 서울방면 외에 나머지 세 방면은 화성 건설 이후에 변화를 겪는데, 그것은 수원장과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구 읍치를 화성으로 이읍(移邑)한 데 따른 결과이다.


송파는 한강, 동빙고, 용산, 마포 등과 더불어 한강의 오강(五江)이라고 하였다. 송파를 거점으로 한강을 오르내리는 수운(水運)은 강원도까지 닿았고, 마행상(馬行商)들은 이곳을 기점으로 전국을 돌았다. 장날이면 이러한 마행상인들과 뱃사람들이 들끓어 270여 호의 객줏집이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송파장은 원래 오일장이므로 본장날은 하루지만, 그 전날과 다음 날 물선을 실어 오고 내가는 화물과 상인들로 붐볐으므로 거의 상설화하다시피 한 것이다. 서울로 공급되는 경기도 남동부의 쌀 · 숯 · 담배 · 소 · 채소 · 곡식 등이 모두 송파나루를 건넜다.


1900년을 전후로 경인선 및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는 등 운손수단의 발달과 교통로의 변화로 송파장의 경기는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서울 장안 곳곳에 상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분산되어 갔다. 또 상권이 약화되자 행상인들은 직접 물건을 들고 경성시내를 돌아다녀 송파장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결국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진이 물에 잠기는 사건이 일어나자 솦아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두레에서 필수적인 것이 공동회연(共同會宴)으로, 대표적인 것은 '호미모듬', ;호미씻이' '풋굿'이다. 김매기를 마친 뒤 공동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먹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 가지 연희를 곁들여 뛰고 놀면서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결속을 재확인하는 의례이자 행사였다. 호미는 가장 기본적이고 다용도로 활용된 농구였다. 두레가 노동조직이었기 때문에 호미를 상징적 행사에 동원한 것이었다.


호미모듬은 두레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두레꾼들이 농청에 모여 역원을 선출하고 공동의 조직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작업을 준비하는 날로, 저마다 자기의 호미를 한 개씩 농청에 모아 거두는 의식이다. 이 호미는 대개 첫 두레일까지 걸어 두는 것이 관례였고, 그 시기는 대개 2월 하리아드랫날(2월 초하루), 혹은 2월의 머슴날이었다.


호미씻이는 세조연(洗鋤宴), 세조회(洗鋤會)라고도 하고, 호미걸이라고도 한다. 호미씻이는 두레 최고의 축제로서, 세벌매기가 끝나 재배기의 농사가 실제적으로 마무리되는 7월 15일을 전후하여 날을 잡아 잔치를 벌이던 행사이다. 농민들의 일년 영농주기를 보면, 크게 농번기와 농한기가 교차하면서 그 중간중간에 준농한기가 끼여 있다. 호미씻이는 여름철의 최대 농작업이던 논매기뿐만 아니라 밭매기를 마치는 시점에 형성되는 준농한기에 하루를 잡아서 온 동민이 모여 놀던 농경세시였다.


[연산백중놀이/ⓒ한국민속대백과사전]



호미씻이는 농민들이 중노동의 중압감을 씻어 내고 전반부의 재배기에서 후반부의 수확기로 이행하는 과정에 설정된 시간적 통과의례였다. 동시에 호미씻이는 매년 결성되던 두레와 같은 공동협업노동조직이 제 기능을 다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그런 노동조직을 해체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호남지역은 호미씻이라고 하는데, 이는 농사가 끝나 호미를 씻는다는 의미이며, 경기지역에서는 호미걸이라고 하는데, 두레기의 버릿줄에 호미를 걸어 두기 때문이다.


호미씻이는 지역별로 그 명칭이 매우 다양한데, 풋구(혹은 풋꾸, 풋굿)와 초연(草宴), 두레 먹기, 장원례, 머슴잔치 등으로도 불렸다. 풋구, 곧 초연(草宴)은 들판의 잡초(풀:草)를 제거한 다음에 하는 굿(잔치:宴)이라는 뜻으로, '풋구 먹는다' '풋구먹이 한다' '초연 먹는다'라고 하며, 주로 영남지방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호미씻이를 '두레 먹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호남과 충남, 경남 남부에서 주로 쓰인다.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두레 먹기라 하는데, 이는 두레꾼의 공동작업인 제초작업이 끝난 후에 모여서 놀고 먹는다는 의미이며, 간혹 '두레잔치'라고도 했다. 그리고 두레 먹기를 할 때, 두레꾼 가운데서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뽑아 소에 태워 주인집에 가서 후하게 대접받고 즐겁게 논다고 하여 장원례(壯元禮)라고도 하였다. 또 머슴들이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이므로 이 행사를 머슴잔치, 머슴생일 또는 머슴날이라고도 했다.


모이는 장소는 강변이나 개울가의 그늘, 또는 마을 주변의 그늘진 곳이었다. 호미씻이를 하러 나갈 때는 집집마다 성의껏 음식과 술을 준비해 갔다. 대체로 부잣집에서 더 풍성하게 마련하는 것이 관례였다. 참여한 사람들은 온종일 먹고 마시며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놀았느넫, 머슴들은 주인집에서 만들어 준 음식과 술을 가지고 나가서 은근히 과시하면서 흥겹게 놀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집마다 마련해 준 음식물을 늘어놓고 머슴들 스스로 품평회를 하기도 했다. 주인집에서 많은 음식을 제공받은 머슴은 주인한테 그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제공된 음식물로 주인의 인심이 얼마나 후한지도 헤아려졌다. 그런가 하면 농사가 잘된 집의 머슴을 뽑아 시상하기도 하고, 삿갓을 씌워 소등에 태워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곳도 있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두레의 공동노동 내용과 방식

두레가 맡아서 하는 공동노동은 모내기, 물 대기, 김매기, 벼 베기, 타작 등 논농사의 전 과정이다. 특히 일시적으로 많은 품이 요구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반드시 두레가 동원되어야 했다.


[함께 보기: 전통 공동노동조직, 두레의 발생과 명칭]



[사진 모내기 두레/한국학중앙연구원]


김매기는 농사일 중 가장 힘든 것이어서 공동으로, 그리고 풍물로 흥을 돋우며 일을 하였다. 김매기는 모내기가 끝나고 15일이 지나 모와 함께 잡초가 자라는 오뉴월의 더위와 겹쳐서 시작되는데, 음력 5~6월(양력 6~7월)에 이루어진다.

김매기는 논바닥에 물기가 있어 흙이 마르기 전에 빨리 해야 하므로 두레 공동작업이 필요하며, 김을 매는 간격은 초벌 도는 애벌매기를 한 후 10일 뒤에 두벌매기, 다시 보름 후에 세벌매기(만두레라고도 함)를 한다.

두레작업(두레공사)은 엄격한 규율 아래 진행되었다. 현지 조사된 두레작업의 한 예시를 간략하게 묘사하여 두레 일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두레꾼들은 두레작업을 하는 날 아침 동이 틀 무렵부터 마을 동각이나 모정 혹은 도가집 앞마당에 모였다. 모이는 신호로 종고를 울리거나 징을 쳤다. 어떤 두레는 아예 늦게 모일 것을 염려하여 공동취침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두레꾼들이 다 모이면 두레기를 앞세우고 풍물(길 군악)을 치면서 일터로 나간다. 농기와 영기를 세우고 상쇠가 앞장서 위세를 보이면서 행군하면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줄지어 따라가기도 했고, 일단 일터에 도착하면 두레기를 넓은 곳에 세우고 간단한 풍물 고사를 지냈다.

풍물꾼들이 먼저 논으로 들어간다. 김매는 순서와 요령을 잘 알고 있는 영좌나 좌상의 지시에 따라 일꾼들은 논으로 들어가 앞잽이와 뒷잽이가 원을 지어 돌아가면서 김을 맨다. 이 과정에서 경험이 많은 좌상이나 공원의 지시가 매우 중요하며, 풍장에 따라 고된 노동을 흥겹게 진행한다. 이 같은 일과 놀이의 순환이 바로 두레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삼복더위에 뙤약볕 아래서 김매기를 하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앞잽이 선소리꾼과 논북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래서 중간중간에 논두렁에서 한바탕 놀아야만 그 고통을 덜 수 있었다. 이러한 일과 놀이의 순환은 내용적으로 보면 노동의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미중의 지혜로운 선택이었던 것이다.

작업시간은 좌상이 정하는데, 시계가 없을 때는 구멍 뚫린 초롱에 물을 채워 그것이 다 없어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일하는 중간에 두렁 넘기라 하여 옆 논으로 연이어 이동하기도 하고, 몬들이라 하여 원을 모아 마지막 쌈을 싸게 되는데, 이것이 두레작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레의 공동식사 관행은 또 다른 문화적 특징이었다. 두레의 공동식사는 새참과 식사로 구분되는데, 새참은 술이 주종이었고, 비록 빈약한 차림이었으나 일꾼들 모두가 바가지에 들밥을 먹으면서 공동체로서의 동질감과 친밀감을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레 일이 끝나면 두레꾼들은 풍장을 치면서 마을로 돌아온다. 일꾼들은 도랑에서 몸을 씻은 뒤 도가집[도가(都家), 농사(農舍), 농청(農廳)]에 준비한 술을 마시고 즐기면서 하루 일을 마친다. 일종의 뒤풀이 형태로 놀이판이 벌어지고, 여기에 술과 음식, 다양한 여흥이 어우러지면 한판 굿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두레작업에서 과부, 노인, 환자가 있는 집안이나 어린아이만이 있는 집의 농사를 두레가 거들어 주는데, 이처럼 마을 전체적인 노역에 인력을 제공함으로써 공동체적 삶의 유지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보물 344호 '청자 양각 갈대 기러기무늬 정병(靑磁陽刻柳蘆水禽文淨甁)'은 경기도 개성 부근에서 출토된 높이 34.2cm, 몸통지름 12.8cm 크기의 정병이다.

국보 92호 '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 무늬 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과 전체적인 형태가 매우 흡사하다.


[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 무늬 정병 함께 보기]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한 달 남짓 머물렀던 개성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지은 책인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시대 정병에는 맑은 물만 담았다고 하며, 그런 용도와 의미와도 어울리게 정병에는 수양버들과 원앙 한 쌍이 그 아래서 노닥거리는 등의 한가로운 물가 풍경을 양각으로 새겼다.


정병(淨甁)이란?

정병(淨甁)은 인도에서 에서 승려가 먼길을 떠날 때 메고 다니던 물을 담은 물병에서 유래되었으며, 훗날 승려가 가지고 다니는 필수품의 하나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 차츰 부처님 자비의 상징으로 변화되었는데, 바로 정병 속에 들어있는 물을 통해 중생들의 목마름과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는 상징적 의미의 공양구의 용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정병을 만드는 재료는 주로 청동과 도자기가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을 숭상하던 고려시대에 특히 많이 제작되었다.



보물 344호 청자 양각 갈대 기러기무늬 정병/ⓒ국립중아박물관


보물 344호 청자 양각 갈대 기러기무늬 정병/ⓒ국립중아박물관


보물 344호 청자 양각 갈대 기러기무늬 정병/ⓒ국립중아박물관


보물 344호 청자 양각 갈대 기러기무늬 정병/ⓒ국립중아박물관


보물 344호 청자 양각 갈대 기러기무늬 정병/ⓒ국립중아박물관


보물 344호 청자 양각 갈대 기러기무늬 정병/ⓒ국립중아박물관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촌락공동체 조직은 시기별로 변모와 변천을 거듭하였다. 예를 들면 성리학적 지배질서가 확립되면서 실시된 향약이나, 사족들의 동계, 동약 조직의 보급으로 기층민 조직이었던 촌락조직은 축소되고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난후 복구와 자구책으로 상하합계(上下合契)의 동계가 나타났으며, 또 사족의 동계조직이 와해되거나 사족 간의 상호부조 역할로 한정되자,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촌락민들이 주도하는 대동계(大同契)가 운영되었다.


[함께보기: 대동계(大同契) 촌계]


과거 대동계(촌계)는 마을조직을 대표하는 가장 규모가 크고 우위에 있는 상징조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대동계의 존재는 대표성과 상징성까지 잃지는 않았지만 생활문화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감소되었다. 특히 다음에서 보는 특수목적을 가지고 결성, 운영되는 계조직들에 비하면, 일견 결속력과 조직력이 느슨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들 목적계도 조선 후기에는 대동계(촌계)의 상대적 우위를 인정하면서 상하, 내외, 본말의 관계 속에서 운영되었다. 동족마을의 경우는 대동계와 함께 문중조직인 족계(화수계, 종중) 조직이 별도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1) 농계(農契)

농계는 계원 중에서 농잠(農蠶, 農桑)에 정통한 사람을 유사로 임명하고, 우마(牛馬) 등을 계원끼리 공동으로 사용하거나 농기구 구입, 종자 대여, 공터에 뽕나무, 잣나무 등의 유실수(有實樹, 먹을 수 있거나 유용한 열매가 열리는 나무) 심기 장려, 농한기에 유휴지 개간 등 농사에 관련된 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동시에 각종 풍교에 필요한 자치활동과 길흉상구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계조직으로는 농계, 농사(農社), 몽리계(蒙利契, 수리시설의 수축과 관리를 위하여 지역 농민들의 조직한 계), 농구계, 우계, 마계 등이 있다.


2) 서당계(書堂契)

서당계는 마을단위로 건립되었던 서당의 운영과 조직에 관한 자료들이다. 훈장선생안, 서당규약, 강첩, 선악적, 치부기(재산)가 함께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서당 건립에 동원(출연)되는 인력과 물자의 기록은 촌락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문중별로 서재나 강사 등도 이와 유사한 성격으로, 촌락 내에서 족적의 기반을 살피는 데 이용될 수 있다.


3) 송계(松)

송계는 삼림의 보호와 이용을 목적으로 한 계조직으로, 금송계(禁松契)라고도 한다.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되며, 범위는 한 동리나 수개의 동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송계는 삼림 보호를 직접 관장하는 역원을 두고 교대로 이를 맡아 순찰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삼림 보호는 국가의 중요한 관심사였기 때문에 관청과 밀접한 관련하에 운영되었다.


4)상여계(喪輿契)

상여계는 마을과 상여의 규모에 따라 20~30가구 안팎으로 이루어지는데, 상여의 운반 및 무덤 터 다지기, 묘 쓰기 등 장례에 관계되는 일에 두레 형식을 모방한 공동조직이다. 운구와 산역에 드는 많은 인력 등 노동력을 직접 제공하였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粉靑沙器象嵌蓮唐草文甁)'은 높이 31.8cm, 입지름 7.7cm, 바닥지름 9.8cm 크기의 조선시대 분청사기 병이다.

전체적으로 유약이 잘 녹아 맑게 윤이 나며, 다리굽의 접지면은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를 얇게 발라 구웠다.

나팔처럼 벌어진 입구 부분에서 풍만하게 처리된 몸통 부분에 이르는 유연한 곡선과 높고 튼튼한 굽의 조화가 형태미와 안정감을 돋보이게 한다.

몸통 부분에는 연꽃을 중앙 세 곳에 흑상감(도자기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흑토나 자토를 메워 넣는 공예 기법)으로 새겨 넣고, 연꽃 줄기가 원을 그림며 감싸듯 이어져 있어 형태와 무늬 구성이 조화롭고도 짜임새 있게 표현되었다.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본래 혼인이란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독점적, 배타적 성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핏줄로 맺어진 가족을 이루고 사는 첫 단계가 혼인이다.

그러나 혼인은 단순한 남녀 간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다. 혼인(婚姻)이라는 글자는 혼례를 저녁에 치른다 하여 저녁 혼(昏)이 변한 혼(婚)자와, 인척관계를 의미하는 인(姻)자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글자이다. 그러므로 혼인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는 개인적 관계이기도 하지만,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사회적 관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양가 집안의 사회적 지위, 경제력 등이 혼인의 성사 여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러한 경햡이 더 심했다. 조선시대의 통혼권(通婚圈)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첩을 두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혼인은 같은 신분끼리만 행해져 이를 동색혼(同色婚)이라 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혼인으로 인한 혈연의 계승이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데 여러 부문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호적에는 호주와 처의 사조가 기록되었고, 과거를 치를 때에는 사조단자(四祖單子)를 제출하여야 했다. 여기서 사조란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말한다. 그러므로 남녀 모두 상대방 집안의 신분, 지위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살펴보아야 할 상대방 친족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예컨대 왕비가 될 사람의 가문을 심사할 때에는 팔고조도(八高祖圖)를 보는데 팔고조도의 경우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또는 그 가운데 아버지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버지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뒤섞인 경우까지 모두 포함하여 고조부모에 16명, 증조부모에 8명, 조부모에 4명, 부모에 2명 등 30명이 열거되는 복잡한 가계도였다.


팔고조도(八高祖圖)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조祖
모母

조祖
부父

조祖
모母

조祖
부父

비妣(어머니)

고考(아버지)


그리고 여말선초에 음서(蔭敍)에서 가계(家系)를 확인하고, 사심관(事審官, 고려시대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을 임명할 때 연고지를 확인하며, 경재소(京在所, 지방 관청과 정부의 연락 기능을 담당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울에 설치한 출장소를 이르던 말)의 범위를 정하고, 근친혼 관계를 확인할 때 쓰였던 팔조호구(八祖戶口)는 조부모, 증조부모, 외조부모, 처부모의 사조를 조사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아버지 쪽으로 6대조까지 20명, 어머니 쪽으로 5대조까지 13명, 처 쪽으로 4대조까지 12명으로 도합 45명이 팔조호구의 범위였다. 이런 사회에서 혼인은 가문의 성쇠를 결정짓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음서의 혜택을 받는 경우에도 조선시대에는, 비록 고려시대와는 달리 친족의 범위가 좁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가문의 격기 힘을 발휘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여러 조건이 같은 신분끼리의 폐쇄적인 통혼권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조선시대에는 이혼을 이이(離異)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출처(出妻), 기처(棄妻)라는 말도 쓰였다. 출처는 처를 내쫓는 것이고, 기처는 처를 버린다는 뜻이다. 낱말에도 나타나듯이, 조선시대의 이혼은 부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행위였다. 아내 쪽에서 이혼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처부모를 구타한다든지, 처를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구타하는 경우에 한했다. 그 경우에도 이혼의 제기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 부모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혼, 즉 아내를 내쫓기 위한 명분으로는 유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칠거지악 (七去之惡)이 있었다.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경우는 첫째, 시부모에게 불손하거나 둘째,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셋째, 음행을 저지르거나 넷째, 투기를 부리거나 다섯째, 나쁜 병을 앓거나 여섯째, 말이 많거나 일곱째, 도벽이 있는 경우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삼불거(三不去)라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쫓겨나서 돌아갈 곳이 없거나,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렀거나, 가난하고 미천한 집을 부귀하게 만든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하였다. 하지만 굳이 삼불거를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칠거지악을 이유로 이혼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시부모를 구박하거나 음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심각한 이혼사유가 될 수 있었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사소한 사유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혼이 자유로웠다. 심지어 왕실에서도 그러해서 고려 초에는 문덕왕후(文德王后) 유씨가 과부가 된 상태에서 성종과 혼인하였고, 그려 말에는 순비(順妃) 허씨가 3남 4녀를 낳고 충선왕과 재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절을 장려한 것도 사실이어서, 3품 이상의 처가 수절하는 경우에는 작위를 내려 주는 봉작(封爵)을 하였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러 재가를 점차 규제하기 시작했다. 공양왕 때에 6품 이상의 처는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재가를 금지하고, 위반하면 처벌하고 봉작을 회수하도록 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로는 세 번 시집가는 삼가(三嫁)부터 규제하여 삼가를 실행(失行)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고, 이어서 삼가녀는 행실이 나쁜 여자들의 명부인 자녀안(恣女案)에 기록해 두고 그 자녀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데에 제한을 두었다. 즉 세 번째 결혼 전에 낳은 자식은 관직의 품계에 제한을 두고, 세번째 결혼 후 낳은 자식은 금고(禁錮)에 처하여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령들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삼가녀를 자녀안에 올리고, 그 자손은 사헌부, 사간원 같은 모법이 되어야 하는 맑은 벼슬자리나, 문신과 무신의 인사를 담당하는 중요한 관서인 이조, 병조의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서 성종 때에는 지방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직에 쓰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이러한 조항들은 결혼 자체를 못하게 한 금지조항이 아니라 결혼해서 낳은 자식에게 불이익이 가도록 한 억제조항이었다.




그 후로 1477년(성종 8)에는 두 번 시집가는 재가(再嫁)도 규제대상이 되었다. 재가를 한 경우에는 자손들을 금고에 처하여 문과, 무과, 생원과, 진사과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벼슬길을 막았고, 이는 재혼 전에 낳은 자식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양반가의 자식들은 출세를 하려면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에 어머니의 재혼을 막아야 했다.

이러한 규정이 생겨난 데에는 유고적인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여자가 홀몸이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작지 않은 문제였다. 따라서 의탁할 곳 없는 여인들이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일부 유학자들은 재혼을 아주 곱지 않는 눈으로 보았다. 중국의 정자(程子)는 여자들이 재혼을 하는 것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하는 일이지만,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지극히 큰 일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처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완고한 사고방식은 조선의 법령에도 영향을 미쳤다. 1477년에 성종은 의정부, 육조, 사헌부, 사간원 등의 고위 관원들을 모아 놓고 재가 규제에 대한 의논을 했는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하였지만, 성종은 재가 규제의 편을 들어 결국 재가 규제법이 시행되었다. 몇 해 뒤에 도승지 김승경(金升卿)이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너무 심한 듯하니 규제를 풀자고 건의했으나, 성종은 두 번 시집가도 자신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니, 그래도 재가하고 싶은 여인들은 그러면 그만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이 조항은 '경국대전'에 수록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재가에 대해 일반인들의 견해가 그다지 심하게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서 16세기에 퇴계 이황(李滉)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를 재가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자들의 재혼을 심각한 도덕적 흠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족보에도 재혼한 사실을 밝히고 전남편과 후남편의 이름을 모두 족보에 올렸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우리나라에서 일부일처제가 시행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부일처제는 대부분의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가장 적절한 혼인제도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일부다처의 사례도 종종 발견되는데, 여기서 주의할 서은 일부다처란 처 외에 첩을 거느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첩의 유무, 다과는 관계없이 처가 여럿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비가 6명에 부인이 23명이었는데, 부인 23명은 차치하고 왕비가 여섯이었다는 것은 일부다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왕실의 특수한 경우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1123년(인종 1)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의 부자들은 처를 서너 명씩 두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기록에도 최충헌(崔忠獻), 이제현(李齊賢)처럼 2명의 처를 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첫 번째 처가 죽고 난 후 후처를 취했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둘 이상의 처를 거느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울과 지방 두 군데에 처를 두었다는 기록도 있고, 한꺼번에 세 처를 두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물론 이런 사례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전통 혼례식의 초례 장면/ⓒ한국관광공사


그려시대 일부다처의 경우, 상당히 오랫동안 먼저 혼인한 처와 나중에 혼인한 처 사이에 차별 없이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고려 말에 이르면 '정처(正妻)' 외에 다음 처라는 뜻의 '차처(次妻)'도 보이고, 나머지 여러 처라는 뜻의 '서처(庶妻)'라는 용어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처 사이에도 차츰 차별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얼마 후 15세기 태종 때에 이르러서는, 극히 일부의 예외는 있었지만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확고히 하였다. 그래서 가장 먼저 결혼한 정처 하나만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첩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가에서 첩을 두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중혼(重婚)을 법으로 금지하기 때문에 축첩은 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경우 누가 첩인가는 자명하다. 나중에 혼인관계를 맺은 여자가 첩이 된다.

그러나 예전에는 처와 첩의 구분이 혼인의 순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처첩의 구분은 신분에 의해 결정되었다. 신분과 지위가 높은 양반가의 딸은 처로 결혼하지만, 일반양인이나 천민이 양반가의 남자와 결혼할 경우에는 처의 지위에 오를 수 없고 어디까지나 첩으로 인정될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계집종이나 기녀로서 첩이 된 천첩(賤妾)의 경우에는 지위가 더 열악했다. 그 소생 자녀의 경우에도 본래는 천자수모법(賤子隨母法)에 따라 천인(賤人)이 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위가 높은 양반관리의 자녀를 천인으로 삼기에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장애가 있어 결국 양인(良人)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서얼금고(庶孼禁錮)의 법에 따라 문과(文科), 생원과(生員科),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문관직은 금지되고 무관직은 허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의관(醫官), 역관(譯官), 지관(地官) 등의 특수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이 법이 서얼 자신의 금고에 그쳤으나, 16세기 명종 때에는 서얼의 자자손손(子子孫孫)에 미치는 것으로 해석되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분제가 조금씩 이완됨에 따라 파기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