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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들은 집안 관리에 매우 엄격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그동안 조상들이 힘서 쌓아 놓은 명성이나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안 관리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가혹한 수신(修身)에서 출발하였으며, 사치를 금하고 모든 것을 절약하도록 하였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남긴 가훈이나 유서 등을 통해 그들의 생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그의 아들 윤인미(尹仁美, 1607~1674)에게 준 가훈의 내용이다.

의복과 안장(鞍裝) 및 말(馬) 등 무릇 자신을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모든 낡은 습관을 바꾸고 폐단이 없도록 하라! 식사는 배고픔을 면하면 족하고, 옷은 몸을 가리면 충분하며, 말은 내가 직접 걷지 않을 정도로 허약하지 않으면 되고, 안장은 튼튼하면 그만이며, 그릇은 적절히 쓸 수 만 있으면 좋다.

부유하게 살던 조선시대 양반들 사이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안장에 잘 달리는 말을 타려 하며 울긋불긋 사치스러운 옷을 입으려는 충조가 크게 성행하였다. 그래서 윤선도는 가훈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후손들에게 절대로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풍류와 사치를 즐기다 보면 조상들이 힘써 모은 재산이 흩어지기 마련이었으며, 결국 전답과 가옥을 모두 팔고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게 되면 자연 피붙이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남남이 되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일은 종통(宗統)을 부정하고 제사를 끊어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조상이 물려준 토지와 노비 및 가산(家産)을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노력했다. 가난해져서 부득이하게 토지와 노비 등을 방매할 경우가 되더라도 피붙이에게 팔아서 다른 사람이 조상의 집에 살거나 조상의 땅을 갈아먹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경상도 안동에 살았던 이우양(李遇陽)이 1452년에 그의 자녀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당부한 말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자자손손에게 유서를 남기는 뜻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웃집 자손을 보니 자기 조상이 고생하며 경영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전택(田宅)을 모두 팔아 치우고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여 남이 그 집에 들어와 살고 그 토지를 경작하니, 이는 종통 (宗統)을 뒤엎고 제사를 끊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중략- 바라건대 너희들은 무릇 내가 전하는 적지 않은 조사으이 토지와 노비 및 가재(家財) 등을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전달하여 잃지 않도록 하여라. 만일 가난해져서 이를 팔아먹게 되더라도 너희들의 동종족류(同宗族類)에게 팔고, 남이 내 집에 들어오고 내 토지를 갈며 내 재물을 사용하지 않게 한다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우양이 후손에게 당부한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조상의 제사가 끊어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불효 중에서도 이것이 가장 큰 죄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실 재산 관리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제사를 제대로 이어 가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던 부안김씨 김명열(金命說, 1613~?)이 자신의 후손에게 남긴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내가 일찍이 살펴보니, 다른 집안의 사위와 외손들이 제사를 서로 미루다가 빼먹는 경우가 많았다. 또 비록 제사를 지낸다고 해도 제물을 정결하게 마련하지 못하고 예(禮)를 정성과 경외(敬畏)의 마음 없이 행하니 글허게 제사를 받들 바에야 차라리 지내지 않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일찍이 이 일을 아버지께 아뢰어 정하고 또 우리 형제들이 충분히 논의하여 결정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제사를 결단코 사위나 외손의 집에 윤행시키지 말라. 그리고 이를 정식으로 삼아 대대로 준행(遵行)하도록 하라.

김명열의 당부에 의하면, 제사를 이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물을 장만하는 정성과 제사를 받드는 경외심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성이 다른 외손이나 사위가 제사를 제대로 받들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김명열은 만일 친손(親孫)이 가난해서 제사를 받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절대로 이를 사위나 외손에게 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김명열이 생존했던 당시까지만 해도 종법(宗法)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친손과 외손들이 제사를 돌려 가며 지냈다.

김명열의 '전후문기(傳後文記)' 김명열이 1669년에 작성하여 그의 후손들에게 준 문서로, 그는 이 문서에서 자신의 후손들이 지켜야 할 재산 분배와 제사 봉행에 대한 일종의 지침을 내리고 있다. 조선 중기에 변화해 가는 재산 분배와 제사 봉행의 관행을 엿볼 수 있다./ⓒ한국학자료센터

가장(家長)이 가정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지만, 실제로 집안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사내종과 계집종이었다. 사내종은 농사를 짓고 땔감을 마련하는 등 노동력이 필요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이에 비해 계집종은 물 긷고 빨래하는 일을 비롯하여 길쌈 등 가정의 소소한 일 등을 책임져야 했다. 이와 같이 사내종과 계집종이 집안의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그들은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가장이 이들의 불만을 어떻게 해소시켜 주느냐에 따라서 집안의 성쇠(盛衰)가 달려 있었다. 충청도에 거주하던 이유태(李惟泰, 1607~1684)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옷과 음식을 춥고 배고프지 않게 한 다음에 농사일이나 길쌈하는 일을 하도록 하며, 태만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도록 유도한다.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덜컥 매질부터 해서는 안 되고 먼저 잘 타일러 가르칠 것이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 가지 죄를 합하여 다스리는 것이 좋다. 만약 거칠게 성내고 형벌을 지나치게 하여 도리어 원망하고 배반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거나, 혹은 다치거나 죽게라도 한다면 그 후회가 미칠 바가 없을 것이다.

이유태는 노비들을 부릴 때 먼저 옷과 음식을 춥고 배고피지 않게 줄 것을 강조하고 있다. 노비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춥고 배고프면 자연히 일을 하지 못하기 대문에 옷을 따뜻하게 입혀 주고 배부르게 먹일 것을 당부했다. 잘못이 있더라도 곧바로 처벌하지 말고 타일러서 가르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두세 가지 죄를 아울러서 처벌하되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도록 권유하고 있다. 그는 모든 하인에게 한 달에 3일의 휴가를 주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

 

노비 중에서도 호노(戶奴) 혹은 수노(首奴)는 특별히 대우를 할 것을 당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호노는 집안에서 거느리는 모든 노비의 우두머리로, 상전을 대신해서 관아에 나아가 소송을 제기하고 토지와 노비를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체면상 관아에 출입하거나 직접 나서서 상거래를 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호노가 이를 대신하였다. 또 관에 세금을 납부하고 환곡을 타거나 갚을 때에도 호노가 이를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따라서 호노는 가노(家奴) 중에서 글자를 알고 사리 판단이 정확한 사내종으로 선정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윤선도는 볼길도와 해남 일대를 개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서 호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체엄했다. 그래서 그는 후손들에게 가훈을 내리면서 호노에 대해서도 특별히 언급하였던 것이다.

큰 힘을 들이는 일이 아닌, 기타 사소한 잡일과 통상적인 심부름은 오로지 집안의 다른 노비들에게 맡기고 호노를 부리지 말아서 그가 넉넉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도록 해 주어라. 스스로 힘써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동네 사람들이 종종 부려먹는 일은 더욱 못하게 하라.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집안 관리에 철저하였다. 재산과 제사를 관리할 때에는 언제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고 배려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치를 멀리했으며, 편한 것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 등 집안 관리는 '자기 관리(修身))'로부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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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140호 데니 태극기 정면/ⓒ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2140호 데니 태극기 반대면/ⓒ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2140호 '데니 태극기'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Owen N. Denny, 1838~1900)가 1890년 5월 청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어 미국으로 돌아갈 때 고종으로부터 선물로 하사 받아 가져간 것으로, 데니가 1900년 자식이 없이 죽은 후 다른 가족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가 1981년 데니의 후손인 윌리엄 랠스턴(William Ralston)이 우리나라에 기증하면서 국내로 돌아왔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이 태극기에서 특이한 것은 태극기의 태극 문양과 태극기를 게양할 때 매달기 위한 끈의 위치인데, 태극 문양은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다른 태극기와 비교했을 때 4괘의 위치와 태극문양이 차이가 있는데, 이는 태극 문양 박음질을 하면서 실수로 좌우를 바꿔 뒤집은 모양으로 박음질 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 태극기를 매다는 끈의 위치가 우측에 있는 것은 당시 글을 쓰는 방향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던 관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태극기를 국기봉에 매달 때 우측 부분을 매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데니(Owen N. Denny, 1838~1900)는 한자식 이름으로 덕니(德尼)라고 불렀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모르간 카운테에서 출생하였으며, 오리건주에서 성장하였다. 레바논 아카데미를 거쳐 윌리엄에테 대학에서 법학 공부 후 1862년 변호사가 되어, 1868년까지 와스코 카운티의 판사를 역임, 1870년에서 1874년까지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서 즉결 심판소 판사를 지냈다. 1876년부터 1877년까지 오리건과 알레스카에서 정부의 세금 징수관을 역임하다 같은 해 청나라 천진(天津) 주재 미국영사 1880년 상해(上海) 주재 미국영사로 재직하였으며, 1886년 청나라 정치인 이홍장(李鴻章·1823~1901)의 추천으로 조선 정부의 외교 및 내무 담당 고문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외교고문을 지내는 동안 '청한론(淸韓論, China and Corea)' 저술을 통해 근대 국제법 이론에 근거하여 조선이 청에 속한다는 속방론을 부정하고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조선은 엄연한 독립국이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데니가 쓴 '청한론'은 총 47쪽으로 구성되었으며, 크게 3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서구의 국제법적 이론을 토대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혔으며, 청의 조선 속방론과 내정간섭을 부정. 둘째,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 1859~1916, 청나라의 북양군(北洋軍)에 기반을 둔 중국의 군벌 세력 수장이며,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알려진 인물)의 비리를 폭로. 셋째, 통치권자로서 고종의 능력을 높게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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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학교에도 원활한 운영을 위한 교칙이 있듯 옛날 서당에도 학규가 있었다.

 

서당은 현실적으로 한자를 익히고 한문을 해독하기 위해 설립한 교육기관이지만, 향촌사회에서 서당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교육목표는 인륜을 밝히고 예법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학규에는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기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유학자의 문집 가운데에는 당시에 실제로 시행했거나 혹은 시행하기 위해 제정한 서당의 학규가 많이 실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쓴 <남계서당학규(南溪書堂學規)>이다.

조선 중기 문신 남계 박세채 초상(유복본)/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3호/ⓒ경기도박물관
조선 중기 문신 남계 박세채가 작성한 <남계서당학규(南溪書堂學規)>

<남계서당학규(南溪書堂學規)> 서당 학규의 요점

1. 서당의 입학은 독지향학(篤志向學)한 자로서 늘 내독(來讀)하는 자를 허입(許入)하되 현족미품(顯族微品)을 가리지 않는다.
2. 거처에는 반드시 연장자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10세 이상 연장자가 출입할 때 소자(少者)는 반드시 기립한다.
3. 언어는 반드시 신중하고 예법과 문자에 관한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음설패란(淫䙝悖亂)하거나 신괴(神怪)한 일들은 말하지 않는다. 타인의 과오나 조정주현(朝廷州縣)의 득실은 말하지 않는다.
4. 성현의 성리서가 아니면 피람(披覽)할 수 없다. 다만 사서(史書)는 열람할 수 있으나 이단(異端) 및 과거문자(科擧文字)는 일체 입당(入堂)을 허락하지 않는다.
5. 사장(師長, 스승과 어른)이 강당에 있으면 복상복(服上服)하여 앞에 나아가 배례(拜禮)하고 사장은 좌상(座上)에서 부수(俯手)하여 답한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이 학규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즉 입학과 공부방법에 대한 규정 및 서당에서 지켜야 할 생활수칙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입학에 대한 규정은 "공부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을 선택해서 입학시키되 그 출신에 구애받지 말라"고 되어 있다. 수학할 의지만 있다면 현족(顯族)뿐만 아니라 한미한 사람(微品)까지도 서당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인 인륜을 밝히고 예법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서당에 출입하는 계층을 양반만으로 국한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넓은 층이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학규를 이와 같이 제정한 것이다.

 

학습과 관련된 규정들은 매우 구체적이다. 우선 "성현의 성리학 책이 아니면 펴보지도 말고 이단서(異端書)는 아예 서당에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여 서당에서 학습해야 할 책들을 성리서로 제한하였고, 불서(佛書)나 제자백가(諸子百家)에 관한 책은 아예 서당에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했다. 서당에 출입하는 학동들이 어리기 때문에 이단서를 읽으면 그 사상에 쉽게 빠져들 것이라고 판단했기 대문이다. 사서(史書)는 성리서가 아니지만 지나온 역사를 알기 위해 읽도록 권장하였다. 또 "종일 책을 읽되 조금이라도 의문 나는 곳이 있으면 즉시 질문하고 모르는 것을 지나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여 책의 내용, 즉 성혀느이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학문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서당에서 지켜야 할 생활수칙도 매우 엄격했다. "삭망에는 훈장에게 재배례(再拜禮)를 행한 후 동서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읍례(揖禮)를 행하라"고 하여 훈장과 동료에게 언제나 예의를 갖추도록 권장하였다. 서당생활은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동료 상호간의 존경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음담패설이나 신비롭거나 괴이한 이야기 및 조정과 군현(郡縣)의 득실(得失)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규정도 있었는데, 이는 세속화를 막으려는 조처였다. 특히 조정과 군현의 득실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게 한 것은 서당이 서원과 같이 정치성 짙은 기구로 변모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제정한 규칙이었다. 또 "편한 곳은 연장자에게 양보하고 열 살 이상의 연장자가 출입할 때 연소자는 반드시 기립하라"든지 "식사할 때에는 나이순으로 조용히 앉아서 하되 항상 배부름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등은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인 서당에서 학동들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세부적인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면서 서당의 원만한 운영을 위한 규칙이라는 점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함께보기 : 서당 교육의 내용과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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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서 교육하는 내용은 강독(講讀)과 제술(製述) 및 습자(習字)였다. 강독은 먼저 <천자문(千字文)> <유합(類合)> <추구(推句)> 등을 통해 한자(漢字)를 익힌 후 <동몽선습(童夢先習)> <소학(小學)> 및 사서삼경(四書三經, 사서와 삼경을 이르는 것으로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일컫는다.) 등을 통하여 한문을 터득하도록 하였다. <천자문>을 예로 들어 강독방식을 소개해보면, 먼저 훈장이 그 첫머리에 나오는 '天地玄黃 宇宙洪荒'의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이라고 음(音)과 훈(訓)을 함께 가르쳐 준 후 이를 통재로 해석하여 "하늘과 땅은 검고 누르며 우주는 넓고 크다"라고 뜻풀이를 해주었다. 학동은 이를 익숙해질 때까지 몇 차례 반복하여 성독(聲讀)하고, 다음 날 훈장이나 접장 앞에서 암송하여 통과되면 비로소 다음 진도가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천자문>을 모두 마치면 한문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한자는 익혔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는 한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동몽선습> 등을 읽었다. 예를 들어 그 책의 첫머리에ㅣ 나오는 "天地之間萬物之中 惟人最貴 所貴乎人者 以基有五倫也"를 학동으로 하여금 글자 하나하나의 음과 훈을 새겨 읽도록 한 후, 훈장이 토(吐)를 달아서 "天地之間 萬物之中에 惟人이 最貴하니 所貴乎人者는 以基有五倫也라"고 읽어 주고 학동으로 하여금 익숙해질 때까지 성독하도록 했다. 그 후 이 문장을 해석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 사람이 귀한 이유는 오륜이 있기 대문이다"라고 풀이해 준 후 다음 날 이 문구를 다 암송하고 해석이 틀리지 않으면 다음 구절을 공부하도록 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글자의 의미나 문장의 해석을 놓고 훈장과 학동 간에 질의응답 및 토론 등을 하였다. 암송을 위해 여러 차례 성독하였는데, 이때 그 횟수를 셈하기 위해 서산(書算, 책갈피의 일종으로 여러 개의 오린 문양을 종이 위에 만들어 접었다 폈다 하면서 수를 셈하도록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했다.

서산(書算), 서수(書數)라고도 한다/ⓒLH토지주택박물관

강독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여 <소학>과 사서삼경 등을 다 읽으면 기본적인 문리(文理)를 깨달았다고 판단하였으며,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때대로 <통감(通鑑)>이나 <사기(史記)> 등을 읽도록 했다. 도 제술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명문장(名文章)과 명시(名詩)가 수록된 <당송문(唐宋文)>과 <당률(唐律)> 등도 읽었다.

 

제술은 시(詩), 부(賦), 표(表), 책(策) 등을 짓는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훈장들은 시를 짓는 데 나름대로 지삭과 재능이 있었다. 서당에서는 주로 오언절구(五言絶句) 등을 많이 짓도록 했으며, 간혹 과거 응시생을 위해 고풍십팔구시(古風十八句詩)도 익혔다고 한다. 고풍십팔구시는 7언(言) 18구(句)로 운(韻)을 달지 않고 짓는 시였다. 그러나 부나 표 또는 책에 능숙하지 못한 훈장이 상당히 많아서 제술교육을 하지 않는 서당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습자는 해서(楷書)를 위주로 교육했으나 이것이 익숙해지면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익히도록 하였다. 친구나 가족끼리 주고받는 간찰 등을 작성할 때에는 대부분 행초서로 썼기 때문에 이를 해독하지 못하면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종이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서당에서는 분(粉)을 기름에 개어서 널조각에 바른 분판(粉板)을 이용하여 글씨연습을 했다. 과거에서 응시자의 글씨를 평가하고 관리를 채용할 때에도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글시체가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기 대문에 어려서부터 정확하고 예술성이 높은 글씨체를 익히려 노력하였다.

조선시대의 글씨노트, 분판(粉板)/ⓒ전주역사박물관

서당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속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학습방법도 다른 경우가 많았다. 학동들이 서당에서 기숙(居接)하거나 가까운 집에서 매일 통학할 경우에는 일강(日講)이라 하여 매일매일 강의하였다. 그러나 서당에서 기숙하지 않거나 통학하기 어려울 정도로 먼 거리에 사는 학동들을 위해서 매월 10일이나 15일 간격으로 두세 번, 도는 특정한 날에 한 번 강의를 하였다. 이를 차례대로 순강(旬講), 망강(望講), 월강(月講)이라 하였는데, 학동들은 지정한 날 서당에 모여 이전에 학습했던 내용을 훈장 앞에서 암송하여 그 성취 정도를 평가받고 훈장이나 접장으로부터 새로운 내용을 배웠다. 따라서 순강이나 망강을 하는 날이면 학동들이 저마다 성독하는 소리로 서당은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강을 하는 방식도 면강(面講)과 배강(背講)으로 구분되었다. 훈장의 얼굴을 마주한 채 책을 보면서 글을 읽고 그 뜻을 풀이하는 것을 면강이라 하고, 책을 보지 않고 뒤돌아 앉아서 암송하고 그 뜻을 해석하는 것을 배강이라고 하였다. 임문강독(臨文講讀), 즉 책을 보면서 글을 읽고 그 뜻을 풀이하는 것은 초보자들이 선호하였으나 공부가 점차 깊어지면서 배강을 주로 하였다.

 

서당교육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계절에 따라 학습내용을 달리했다는 점이다. 학습 내용과 방법을 계절의 기후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여 겨울에는 경사(經史)와 같은 어려운 과목을 학습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율(詩律)과 같은 흥미 본위의 공부를 익히도록 하였다. 또 봄과 가을에는 <사기(史記)>나 고문(古文)과 같은 글을 읽게 하여 학자로서 뜻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 취해진 조처였다. 아울러 무더운 여름철에는 고요하고 시원한 산방(山房)으로 강학장소를 옮겨 더위를 피하면서 시회(詩會) 등을 개최하여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재충전의 기회도 마련하였다.

 

조선시대의 서당에서 널리 사용하였던 교재들 중 <천자문>은 중국 양(梁)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책으로, '천지현황(天地玄黃)'과 같이 4자씩 1구를 구성하여 모두 250구로 되어 있다. 자연현상으로부터 인륜도덕에 이르기까지 초학자가 알아야 할 상식이나 지식들을 고시(古詩)의 형태로 표현하였기 대문에 한자를 익히려는 초보자들이 가장 널리 사용한 입문서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한글로 음과 훈을 붙인 <천자문>이 널리 보급되었다.

 

<추구>는 학동의 한자교육을 위해서 만든 기초교재 중의 하나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구(詩句)를 발췌하여 엮은 책이다. 5언 1구로 2구씩 짝이 되도록 구성하였다. 예컨대 '天高日月明 地厚草木生'과 같이 대구(對句)를 이루도록 구성하여 한자를 습득하면서 동시에 작시(作詩)의 기초적인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합> 역시 학동이 한자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든 교재이다. 총 1,512자로 되어 있어서 수록된 한자의 수가 <천자문>보다는 1.5배쯤 많다. 조선 선조 대의 학자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이 책에 불교를 숭상하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또 글자 수가 적다고 판단해서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고 약 1,500자를 보태어 3천 자로 이루어진 <진증유합(新增類合)>을 편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학자가 편찬한 초보 한자교재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동몽선습>은 조선 명종 대의 학자 박세무(朴世茂)가 저술한 책이다. 이는 <천자문>을 익히고 난 후 한문 문장을 익히기 위해 편찬한 초급교재로, 첫머리에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등 오륜(五倫)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부터 명나라까지의 역대사실(歷代史實)과 한국의 단군으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약술하였다. 영조는 이 책이 오륜과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명하게 설명한 점을 크게 칭찬하고 교서관(校書館)에서 이 책을 발간해서 널리 보급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 명종 대의 학자 박세무가 저술한 책 <동몽선습>/ⓒ한국학중앙연구원

<소학>은 중국 송의 유자징(劉子澄)이 스승인 주자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을 교화시키 ㄹ수 있는 내용을 여러 책에서 발췌하여 편진한 것으로, 주자가 교열과 가필(加筆)을 하였다. 책은 내편과 외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편은 다시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계고(稽古)의 4편으로, 그리고 외편은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의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금굉필(金宏弼) 1454~1504)과 김안국(金安國, 1478~1543) 등과 같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아 이후에 향교와 서원 등 각 교육기관의 기본교재로 널리 보급되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 도리와 도덕의 원리가 잘 집약되어 있어서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읽혔던 한문 교재이자 수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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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백범일지>/ⓒ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백범일지>는 백범 긴구가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 하 2권으로 되어 있다. 김구가 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고라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임시정부의 역할 등 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말기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한 사료이다. 1947년 12월15일 국사원에서 처음 김구의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발행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했던 서당의 모습을 그 말기에, 그것도 '상놈'이 쓴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일반적으로 서당은 양반의 자제들이 향교나 서원에 가기 전에 학습했던 사설 교육기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상놈이 쓴 기록이란 바로 김구(金九, 1876~1949)의 <백범일지>를 가리킨다. 김구는 평민 출신의 어느 한 노인이 양반들이 쓰던 말총갓을 쓰고 출타하였다가 양반에게 들켜 갓을 찢기는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양반과 평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어른들에게 물었다. 어른들은 글공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하면 양반이 된다고 대답하였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지만 어른들은 어린 김구에게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김구는 어떻게든 공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하고 싶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했다. 아버지께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님은 주저하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어서 다른 동네 서당에 다녀야만 하는데, 양반의 서당에서는 나 같은 상놈은 잘 받아 주지도 않거니와, 설혹 받아 준다고 해도 양반의 자식들이 업신여길 터이니 그 꼴은 차마 못 보겠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집안아이들과 이웃동네 상놈친구의 아이들 몇 명을 모아 새로 서당을 하나 여셨다. 수강료는 가을에 쌀과 보리를 모아 주기도 하고, 청수리 이 생원이라는 분을 선생으로 모셔 왔다. 이 생원은 신분은 양반이지만 글공부가 모자라 양반 서당에서는 써 주는 데가 없어서 우리 선생으로 오신 것이다.

이러한 김구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서당에 대한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서당에 출입하는 학동들의 신분에 따라 양반 서당과 상놈 서당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이다. 서당이 이와 같이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양반 서당에 상놈 학동이 다닐 수 없었고 평민 서당에 양반 학동이 드나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후기 향교의 상황과 유사하였다. 향교의 동재(東齋)에는 양반 출신의 유생만 출입하고 서재(西齋)에는 평민 출신의 교생만 드나들었으며, 설령 결원이 생겨도 상대의 재(齋)에 드나들려 하지 않았다. 서당이나 향교 모두 신분을 철저히 따져 출입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조선 말기에는 평민들도 마음대로 서당을 꾸리고 글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평민들이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는 것이 말기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다. 평민들이 서당에서 글공부를 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 어느 시점부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평민들도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다는 것은 조선시대 평민들의 문자 인식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위 인용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김구가 이미 서당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익혀서 소설책을 읽을 줄 알고 천자문도 동냥글로 다 떼었다는 사실이다. 평민들도 어린 나이에 한글을 익히고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셋째, 훈장에 대한 예우가 열악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사회가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 일 년의 학채(學債)를 쌀과 보리로 주었으며, 그것도 가을에 한 차례 모아서 지급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 훈장에 대한 예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일 흉년이 들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기 대문에 나중에 받기로 한 학채는 지급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평민 서당의 학부모들은 대부분 가난하여 저축해 놓은 자금도 없었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학채를 받아 낼 길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사실은 이러한 평민 서당이 오래 존속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학동들이 모여서 공부할 장소 마련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지원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김구의 증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어 모시기로 했다. -중략- 우리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 나서 산동(山洞) 신존위(申尊位)의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겼다. -중략- 그런데 불과 반년 만에 신존위와 선생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결국 그 선생님을 내보내게 되었다.  선생님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 쫓아낸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은 (신존위가) 자기 자식은 머라가 나빠서 공부를 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기한 것이었다. -중략- 참으로 이른바 상놈의 생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서당은 처음에 김구의 집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선생의 식사를 그의 집에서 제공하기로 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겨우 석 달이 지나서 신존위의 집 사랑으로 옮겨지고 불과 반년 만에 신존위와 선생이 반목하여 서당 운영이 끝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김구나 신존위 등을 비롯한 평민 집안의 경제적 여건이 제대로 된 강학(講學) 공간을 마련할 수 없었으며, 동시에 학채는 고사하고 훈장의 숙식조차 제공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재력이 있어야만 강학공간을 마련하고 훈자으이 숙식을 제공하며 학채도 지급할 수 있는데, 평민들의 재력이 매우 부실했기 때문에 설령 한때 서당을 설립한다고 해도 장기간 운영되지 못하고 단기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실정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상놈 출신이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과거에 급제한 후 관리가 되거나 학문에 종사하여 대학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민들은 중도에서 공부의 목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이따금 내게 이렇게 충고하셨다. "-중략-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이나 배우거라" 그리하여 나는 땅문서 짓기, 소장(訴狀) 쓰기, 축문 쓰기, 혼서문 쓰기, 편지 쓰기 등을 짬짬이 익혀서 무식한 우리 집안에서느느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한 자리는 하리라고 기대했다.

김홍도의 '서당'/ⓒ국립중앙박물관

비록 출발은 과거에 합격해서 양반이 되고 가문의 명성을 떨치려는 목표에서 시작했으나 어려운 교육환경 아래에서는 그것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서필지(儒胥必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아전 글(吏文)이나 익혀서 토지매매 문서와 소장, 축문이나 혼서 등 실용문을 서 주고 '시골에서 이름난 문장'으로 행세하다가 존위, 즉 면장(面長)이라도 한 자리 차지하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실적인 여건이 이와 같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재능이 있으면 나름대로 성공할 수도 있었다. 다음은 <백범일지>에 나오는 그러한 사례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좋은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못되자 아버님이 무척 걱정을 하셨다. 그러던 중 마침 글공부할 길이 하나 열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십 리쯤 되는 학명동(鶴鳴洞)에 정문재(鄭文哉)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이지만 과거하는 글로는 지방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고, 더구나 큰어머니와는 6촌 남매간이었다. -중략- 그의 집에는 여러 곳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시와 부(賦)를 짓고, 한쪽에는 서당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정문재는 재능을 기반으로 소기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재능 있는 평민이 제아무리 뛰어 보았자 그와 같이 훈장질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평민들이 오를 수 있는 '성공의 사다리'는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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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당의 모습/ⓒ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서당은 서원과는 달리 관으로부터 설립허가를 얻어야 하는 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범일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설치가 자유로웠다.

집안이 가난하여 좋은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못되자 아버님이 무척 걱정을 하셨다. 그러던 중 마침 글공부할 길이 하나 열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십 리쯤 되는 학명동(鶴鳴洞)에 정문재(鄭文哉)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이지만 과거하는 글로는 지방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고, 더구나 큰어머니와는 6촌 남매간이었다. -중략- 그의 집에는 여러 곳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시와 부(賦,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한문문체)를 짓고, 한쪽에는 서당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백범일지 中-

수요자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자유롭게, 다양한 수준의 서당을 설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으나, 설립주체나 운영방식에 따라 구분하면 대략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훈장 자영(自營) 서당'으로, 훈장이 소일거리나 생계 유지를 위해 자신의 집에 개설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서원은 대부분 이른바 '촉학구(村學究)' 도는 '궁생원(窮生員)'이라 불리는 시골의 선비들이 설립하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빈한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학동들로부터 일종의 수업료인 학채를 쌀이나 나락, 또는 곡물이나 돈으로 받았다. 이들은 학동을 가르치는 일이 없을 때에는 마을사람들의 소장(訴狀)이나 편지를 대신 써 주고 그 대가를 받아 생활하기도 했다.

 

둘째, '유지 독영(獨營) 서당'으로, 유지나 부자가 자신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훈장을 초빙하고 그에 다른 경비 일체를 부담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제 교육을 위해 많은 경비를 들이면서 '독선생'을 초청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훈장의 학식이나 교육경력이 출중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이때 제한적으로 서당을 개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일가친척이나 인근의 자제들에게는 '어깨너머 공부' 혹은 '동냥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서당 운영 경비를 유지나 부자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는 서너 명이 협동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유지 독영 서당의 한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마을 공영(共營) 서당'으로, 마을 전체의 구성원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설립하고 훈장을 초빙하는 형태이다. 서당 운영을 위해 학계를 조직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학전을 구입하여 여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서당을 운영하였다. 마을에 동계(洞契)가 조직되어 잇을 경우, 굳이 학계를 조직하지 않고 동계에서 직접 서당 운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훈장을 초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마을의 원로 중에 학식이 높은 인물이 있을 경우에는 그를 선정하기도 했다. 마을에 거주하는 호수(戶數)가 많지 않거나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할 경우에는 인근의 서너 마을과 합동하여 서당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마을 공영 서당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문중 공영 서당'으로, 문중이 주도하여 서당을 운영하는 형태이다. 따라서 서다으이 학동은 문중의 자제들로만 구성되었으며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모두 문중에서 지출하였다. 조선 후기에 문중이 크게 번성하면서 이러한 형태의 서당이 성행하였다. 훈장은 위의 '마을 공영 서당'처럼 대부분 외부에서 초빙하였으나 문중 구성원 중 학식이 뛰어난 원로가 있을 경우에는 그를 추대해서 학동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아들이나 조카 및 손자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서당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 대부분 친척의 자제들도 함께 배웠기 때문에 이는 '문중 공영 서당'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다섯째, '관립(官立) 서당'으로, 관의 자원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형태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학교를 진흥시키는 것(興學校)'은 수령이 관심을 쏟아야 할 7가지 업무(守令七事) 중 하나였는데, 조선 후기의 수령 중에는 백성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인물이 많았다. 이들은 향교와 서원뿐만 아니라 서당에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서당은 수령이 교체된 후 후임수령이 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면 곧바로 운영이 어려워져 폐쇄되고 말았다. 향촌의 사족과 수령이 함께 설립한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의 서당도 있었으나 이는 '관립 서당'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학문에 뜻을 둔 몇 명의 선비들이 모여 독서와 강학 및 토론의 공간으로 서당을 설립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인(門人) 송흥주(宋興周), 최명룡(崔命龍) 등이 황산(黃山)에 서당 몇 칸을 지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던 것이라든지, 정온(鄭蘊, 1569~1641)의 아버지인 정유명(鄭惟明)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천서당(嶧川書堂)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삼았던 것 등이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서당은 초등교육을 위해 만들었다기보다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학자들이 강학공간으로 마련한 것이었기 때문에 위의 구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국가기록원

다음으로 서당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면, 서당의 인적 구성은 훈장과 접장(接長) 및 학동으로 이루어진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매우 다양한 서당이 존재했기 때문에 훈장의 학문 수준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훈장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경(經) 사(史) 자(子) 집(集)에 두루 통달한 훈장은 거의 드물었으며, 언해(諺解)를 보고서 경전의 대강의 뜻을 겨우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훈자으이 출신신분도 다양하여 몰락한 양반과 평민 출신의 유랑 직식인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는 도망노비 출신도 종종 있었다. 따라서 훈장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으며, 경우에 다라서는 멸시나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훈장의 대우에 대해서는 다음의 탄원서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탄원서는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내산내면 저동리에 사는 박영식(朴永植)과 한인교(韓仁敎) 등이 1884년에 수령에게 제출한 것이다.

사인(士人) 김양렬(金養烈)은 나이가 50세로 아내를 잃고 홀아비로 살면서 어린 아들을 거느린 채 사방을 떠돌아다니면서 글을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금년 봄에 그를 우리 마을로 초청해서 일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 대가로 받은 곡식(舌耕)은 겨우 나락 5가마에 불과했는데 그는 이를 잘 아는 제자의 집에 유치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 봉고(封庫, 지방관의 비위 사실을 확인한 뒤 창고를 봉하는 제도)할 때 감관(監官)과 색리(色吏)가 관의 명령을 받고 집집마다 수색하다가 이 나락 5가마를 발견하고서 압류하여 봉고하고서 읍내로 가버렸습니다. 이는 전무후무한 일대 변괴입니다. 홍산(鴻山)이 비록 땅이 좁고 가난한 고을이라고 하지만 어찌 꼭 가난한 선비의 양식을 압류해야 만족하겠습니까? -중략-
진대(賑貸, 관곡을 어려운 백성에게 꾸어주던 것)를 받아야 할 이때에 오히려 글을 가르치고 받은 나락 5가마를 빼앗아 봉고하니, 저 슬프고 가난한 선비가 굶주림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략- 저희들은 그 사람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부탁했기에 차마 그가 굶주림 때문에 떠돌이생활을 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사연을 수령님께 사실대로 하소연하니 봉고한 나락 5가마를 즉시 지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영식 등은 자신의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양반 출신의 김양렬을 훈장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50세의 홀아비로 자식까지 딸려 있었으나 먹고살기 위해 훈장 노릇을 하느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일 년 내내 학동을 가르치고 받은 대가는 겨우 나락 5가마였는데, 그것조차도 별감과 색리의 착오로 관에 몰수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부모인 박영식 등이 수령에게 타원서를 제출하여 몰수된 나락 5가마를 훈장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위 탄원서에 훈장노릇을 하는 것을 설경(舌耕), 즉 '혀로 밭을 간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훈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남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행위를 수치로 여겼다. 돈을 받고 남을 가르친다는 것을 글을 파는 행위, 즉 천(賤)하기 짝이 없는 상업행위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농업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혀로 밭은 간다'고 표현했으며, 수업료인 '학채'나 '강미(講米)'도 '폐백(幣帛)'이라 칭했던 것이다.

 

훈장에 대한 인식이나 대우가 이와 같았기 대문에 자연히 훈장에 취임하는 인물의 학식이나 인품이 탁월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인물들이 훈장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학동들의 눈에도 훈장이 훌륭해 보이지 않았다. 김구는 어린 시절 그를 가르쳤던 훈장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열네 살이 되고 보니 만나는 선생이 대개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아무개 선생은 '벼 열 섬짜리', 아무개 선생은 '다섯 섬짜리' 하고 수강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할격을 짐작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선생들의 마음 씀씀이나 처신이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어 보였다.

훈장 아래에는 오늘날의 조교 또는 보조교사의 역할을 하는 접장이 있었다. 물론 모든 서당에 접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규모가 큰 서다으이 경우, 훈장 한 사람이 많은 학동의 교육을 모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제자 가운데 우수한 자를 접장으로 선발하여 초보 학동의 지도를 맡겼던 것이다. 접장은 학동들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과제를 해 오지 않았을 경우에 훈장을 대신해서 이들을 체벌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따라서 접장은 한편으로는 훈장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보 학동의 지도를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접장에게는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대신 수업료가 면제되었다. 이들은 초보 학동들에게 선생님이자 동문 사형(師兄)이었기 대문에 초보 학동에게 미치는 영향이 훈장보다 큰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국가기록원

학동들의 연령층이나 계층은 매우 상이하였다. 일반적으로 양반 서당에는 양반 자제만이 출입하였으며 평민 서당에는 평민 자제만 입학하였다. 평민이 양반 서당에 다닐 경우, 양반층 자제의 텃세에 견디기 힘들었다는 사실 또한 <백범일지>에 잘 나타나 있다. 양반 자제는 평민 서당에 출입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들의 체모가 손상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서당에 출입하는 학동들의 연령은 매우 다양하나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에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비였던 구상덕(仇相德, 1706~1761)이 농사와 농촌에서의 일상생활을 37년간 빠짐 없이 기록한 일기책인 <승총명록>을 살펴보면 '생원'이라 불리던 중장년도 서당에 출입하였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글 공부할 마음이 간절했다. 아버지께 서당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님은 주저하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어서 다른 동네 서당에 다녀야만 하는데, 양반의 서당에서는 나 같은 상놈은 잘 받아 주지도 않거니와, 설혹 받아 준다고 해도 양반의 자식들이 업신여길 터이니 그 꼴은 차마 못보겠다는 것이다.
-백범일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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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양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은퇴한 후에는 대부분 지방으로 낙향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낙향한 후에도 양반가문으로서의 지체와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했다. 그들의 자손은 유명한 학자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로 진출해야 했다. 또 향교나 서원에 출입하며 그 지방의 양반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어야 했다.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하고, 방문한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소흘함이 없도록 융숭히 대접해야 했다. 아울러 좋은 집안과 대대로 혼인을 맺어 혼맥(婚脈)도 형성해야 했다.

19세기 화가 '성협'의 '고기굽기'/ⓒ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중앙과 연결되는 두 가지 조건을 더 갖추어야 했다. 하나는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 서울의 양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귀족화한 양반을 뜻함) 또는 명문세족(名門世族, 이름을 떨치고 세력이 있는 양반 집안)과의 교유가 있어야 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중앙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서리(書吏,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딸려 있던 하급 관리)들과 연망이 있어야 했다.

 

우선 지방 양반과 경화세족과의 교유의 예로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는 부안김씨의 예를 보면 이들은 조선시대에 무노가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 중의 하나인 반남박씨(潘南朴氏)와 교유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반남박씨와 부안김씨가 언제부터 교유를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박동량(朴東亮, 1569~1635)과 김홍원(金弘遠, 1571~1645)이 그 시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동량은 한때 부안현으로 유배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김홍원이 귀양살이하는 그를 위로하면서 가까워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두 집안은 대대로 교유하였다. 박동량의 종손(從孫)인 박세모(朴世模), 박세견(朴世堅), 박세해(朴世諧) 등은 김홍원의 아들인 김명열과 절친하게 지냈다. 또 박세표의 아들인 박태관(朴泰觀)과 조카인 박태겸(朴泰謙) 등은 김번의 아들인 김수종(金守宗)과 매우 친근하게 지냈다.

 

서울에 사는 반남박씨와 부안에 거주하는 부안김씨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주 왕래하지는 못했지만 서신 교환 등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고 또 선물 등을 주고받았다. 이들이 교환한 선물의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김수종과 박태관 등이 주고받은 선물의 내용을 간찰에 기록된 것만을 근거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기록된 것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김수종이 박태겸, 박태관과 주고받음 물품들

번호 일시 김수종이 보낸 물품 김수종이 받은 물품
01 1699/01 대복, 괴판, 담배 달력
02 1701/05
03 1703/07 복, 종이  
04 1703/12 물고기  
05 1704/11   달력, 먹
06 1705/01 괴판
07 1706/01 차양죽 해묵, 주재
08 1706/05 나락, 물고기, 푸른 대
09 1706/12   달력
10 1706/12 차양죽 달력
11 1708/08  
12 1708/08   붓, 먹
13 1709/03 망건  
14 1710/01 푸른대나무 달력
15 1710/12   달력, 붓
16 1711/12   달력
17 1712/08 물고기, 돈  
18 1713/04   붓, 먹
19 1713/11   달력
20 1714/01  
21 1714/02  
22 1714/02  
23 1715/03 벼, 대하
24 1715/08  
25 1716/01 돈, 대하 달력, 먹
26 1716/05 벼, 돈, 대하 아이 약, 붓
27 1716/10 나락, 물고기  
28 1716/11 달력
29 1717/05 망건, 천초, 참빗 부채, 먹, 붓
30 1718/01   아이 약
31 1718/11 생강  
32 1721/12 보리, 괴판  
33 1733/12   달력
34 미상   납제
35 미상 달력, 붓
36 미상   종이
37 미상 쌀, 콩, 말죽  

 

김수종이 박태겸이나 박태관에게 보낸 선물은 주로 대하와 전복 같은 어물, 망건과 참빗 등의 생활용품, 담배와 생강같은 기호품, 그리고 식량과 돈이었다. 이에 비해 박태겸이나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물품은 붓이나 먹과 같은 문방구와 책력 등이었다.

 

주고받은 선물의 종류나 양만을 놓고 따져 보면 김수종이 박태겸이나 박태관에게 보낸 선물이 그들로부터 받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에서 김수종은 커다란 손해를 보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박태겸과 박태관은 과거의 실시시기, 국왕의 병세, 각종 사건과 고변 등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정세와 관련된 정보를 김수종에게 상세히 전달해 주었다. 그 결과 김수종은 비록 궁벽한 해안가에 살고 있어도 서울 소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그들은 김수종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이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고관의 청탁편지를 받아주거나, 감사나 현감이 그들의 지인일 경우에는 이들에게 직접 부탁하기도 했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김수종이 참봉으로 천거되었을 때에도 임명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것들이 배경이 되어 김수종은 부안지역에서 정보력 있고 권세 있는 양반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지방 양반과 서리와의 연망관계인 예로 현재는 경상도 봉화군 봉화읍에 있는 유곡마을은 예전에는 안동에 속하였던 곳이다. 그곳에는 세상에 '닥실권씨'로 널리 알려진 안동권씨들이 세거하고 있는데, 이들은 권벌(權橃, 1478~1548)의 후손들이다. 이 안동권씨는 조선 말기에 이조(吏曹)의 서리인 오상린(吳相麟)과 밀접한 연망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이 양반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서리를 '단골리(丹骨吏)'라고 불렀다. 권벌의 후손 중에 권호연(權好淵, 1824~ ?)이란 인물이 있는데, 그는 1859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례에 따라 삼관(三館, 조선시대 학술 문필 기관인 성균관-승문원-교서관의 통칭) 중의 하나인 승문원에 부정자로 배속되었다. 그 후 그는 인사철이 다가오자 정주(政注), 즉 승정원 주서(注書)로 임명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서 단골리였던 오상리에게 이를 알아보도록 지시하였다. 오상린이 이에 대해 수소문해 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내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목(告目)을 권호연에게 보내어 그간의 사정을 간략히 보고하고 있다.

 

삼가 엎드려 아룁니다. 보내 주신 편지를 일거 보니 위로 됨이 큽니다. 지시하신 것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주(政注)에는 윤영신(尹榮信), 조병직(趙秉稷)이 확정되었으니 양해하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평사(評事)에는 박해철(朴海哲)로 정해졌으니 헤아리시라는 뜻으로 알립니다.

 

중앙의 서리들은 이와 같이 지방 양반에게 인사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임명장을 작성해 주고 근무일수 계산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등 업무와 관련된 자문에 응했으며 서울에 있는 집과 노비 및 녹봉 등을 관리해 주기도 했다. 이에 반해 양반들은 서리에게 대가로 선물이나 돈을 주었다. 지방 양반과 중앙 서리의 끈끈한 관계를 매우 잘 드러내 주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선동력(夏扇冬曆)'이다. 여름에 지방 양반들이 서리들의 노고에 보답하려 부채를 만들어 보내고, 겨울에는 그 반대로 중앙 서리들이 책력을 구해서 지방 양반들에게 보내 주었다.

 

앞서 두 가지의 예와 같이 지방 양반과 중앙 사이에는 두 가지 연망이 있었다. 하나는 경화사족과의 연망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중앙 서리와의 연망이었다. 지방 양반들은 이와 같이 두 개의 연망을 형성하고 유지해야만 토반(土班)으로 몰락하지 않고 양반으로서의 지체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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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은 예로 부터 '인륜의 대사(人倫之大事)'이며 '오복의 근원(五福之根源)'이라 하여 매우 신중하게 행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여러 연망 중에서도 혼망(婚網)을 매우 중시하였기 때문에 혼인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평생 자기 가문의 격(格)을 높이거나 유지하는 데 커다란 관심을 가졌는데,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좋은 가문의 구성원과 혼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혼인 상대 가문의 격은 대부분 자신의 가문보다 못한 집안과는 절대로 혼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산풍속도첩 '초례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혼인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혼인 당사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상다가문의 격만을 따져 혼사가 결정되는 일도 많았다. 또 지방 양반의 경우에는 서울 혼인, 즉 경혼(京婚) 또는 낙혼(洛婚)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문의 지체를 하루아침에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김시온(金是瑥, 1598~1669)이 1663년에 정랑(正郞) 남 모(南某)에게 보낸 다음의 간찰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말씀하신 혼사는 진실로 처음에 작정했던 대로 함이 마땅하나, 요즘에 와서 며느리와 의논해 보니, "근래 이웃에서 경혼(京婚)한 사람들을 보니 후회를 면치 못하는지라 이것이 가볍게 허락할 수 없는 첫째 이유요, 저쪽에서 비록 (장차) 산양(山陽)으로 (낙향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예전에 사대부로서 낙남(落南)하여 편안히 살려고 한 자들도 지금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데, 하물며 오지도 않고 한갓 말만 하는 사람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가볍게 허락할 수 없는 둘째 이유요, 혼사를 정하는 즈음에 먼저 신랑을 높이고 뒤에 가세(家世)를 언급하는 것이 곧 상례이어늘, 고성(固城)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 편지에 다만 가세는 물을 것이 없다고만 하고 신랑이 어떻다는 말이 없으니, 이것은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일 터이니 가볍게 허락할 수 없는 셋째 이유입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드디어 눈물을 흘리면서 흔쾌히 따르려 하지 않으니, 내 비록 할아비이나 어찌 억지로 (혼인)하도록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이편지에 의하면 김시온은 자신의 손녀딸을 정랑을 지낸 남 모와 아주 가까운 친인척과 혼인을 시키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두 집안 간의 혼담은 고성군수를 역임한 인물이 중간에서 전달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김시온 개인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집안이 좋고 또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손녀의 어미인 며느리에게 의향을 물었더니 며느리는 세 가지 점에서 이 혼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첫째, 주위에서 서울 혼인을 한 사람들을 살펴보니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권력의 중심지인 서울에 살다 보니 자연히 당쟁 등에 깊이 연루되어 패가(敗家)하거나 파산하는 집안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낙남하여 편안하게 살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낙남하였던 사람들도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모두 떠났으며, 상대방의 고향이 원래 상주에 속하는 산양이라고는 하나 말만 낙남하여 살 것이라 해 놓고 실제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곳으로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사는 사대부들은 언제나 정치에 더 이상 간여하지 않고 낙남하여 편히 살겠다고 말하지만 이를 선뜻 실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딸을 그런 집안에 시집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중매를 할 때에는 먼저 상대방의 인물됨을 논하고 그 다음에 가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고성군수가 혼담을 건넬 때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가세는 물을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신랑감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시온의 며느리는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남 정랑 댁 친인척과의 혼인을 반대하였다. 이 혼담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 간찰을 통해서 김시온과 그의 며느리가 손녀의 혼인에 대해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김시온은 자기 집안보다 가격(家格)이 높고 서울에 세거하던 집안과의 혼인을 선호한 데 비하여 며느리는 신랑의 인물 됨을 더욱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혼인은 이와 같이 자신이나 자기 가문보다 우월하거나 동등한 조건을 가진 집안을 찾아서 하고자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더군다나 왕이나 세자가 결혼해야 하면 전국에 혼인 금지령이 내려졌고, 또 인심이 조석으로 변하기 때문에 혼담이 오갈 때에는 서둘러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였다. 일이 잘되었을 때에는 두 집안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에는 소원해지거나 심지어는 원수관계로 돌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석윤(趙錫胤, 1606~1655)이 보낸 다음의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드릴 말씀은 대혼(大婚) 금지령이 이미 풀렸다고 합니다. 세상 인심이 나날이 더욱 사나워져 사람 일도 또한 알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과연 저희 집과 혼사를 치를 의향이 있으면 먼저 폐백을 보낼 기일을 정하고 좋은 달과 날짜를 정하십시오. 그런 후에야 두 집안의 관계가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조석윤이 말한 바와 같이, 중매인을 통하여 서로 혼인의사를 확인한 후에는 순서에 따라 납채(納采, 납채문과 사주단자를 보내는 일)와 연길(涓吉, 혼인 날자를 정하여 택일단자를 보내는 일)을 하고 대례(大禮)를 치렀다. 혼인 또한 집안의 경사였기 때문에 이때에도 특별한 재산 분급이 이루어졌는데, 대개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주거나 장인이 사위에게 별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1551년에 전라도 남원부에 살던 이혼(李渾)은 며느리를 맞이하고서 마음이 흡족하여 자신의 재산을 떼어 주었다.

납채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길단자/ⓒ문화컨텐츠닷컴

오늘 우리 집안의 맏며느리를 맞이하니 나의 마음이 흡족하다. 용모가 단정하기까지 하니 매우 기뻐서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쪽에서 전래된 인동(仁同)에 사는 사내종 철손의 둘째 소생 계집종 춘덕(39세, 계묘생) -중략- 과 금천(衿川)에 있는 -중략- 논 1섬지기(약 2천평) 등을 별급하니 자손에게 대대로 전하여 오랫동안 부려 먹도록 해라.

 

이 외에도 신부가 시집가면서 친정에서 부리던 계집종을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교전비(轎前婢)라 하였다. 신부가 출가하면 처음에는 으레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댁의 여러 집안일에 서투를 수밖에 ㅇ벗었다. 또 가문에 따라 예의범절이 약간씩 다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친정에서 신부와 오랫동안 생활해 온 경험이 많은 계집종을 교전비로 딸려 보내어 신부의 시집생활을 돌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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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족

가훈은 집안을 어떻게 경영해야 다음 세대에도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정체였고, '가정교육의 테스트'였다. 가훈서는 각 집안의 환경과 배경, 사회적 지위와 고유한 경험의 토대 위에서 실제적인 삶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 작성형태 등에서도 차이가 나게 마련이며, 특히 가훈을 편찬한 인물의 평생 경험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가훈이 없는 집안이 거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었고, 이름 있는 가문들은 가문의 전통이 마련된 기반으로 선조의 유훈과 가훈을 특화하기도 한다.

 

가훈의 일반화는 성리학적 지배체재의 확산과 연관되어 있었다. 조선 초의 가훈자료가 대체로 성리학적 수신과 도덕적 함양에 보다 중점을 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며, 이러한 한국의 가훈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안지추(顔之推 531~602)가 지은 '안씨가훈(顔氏家訓)'이나 '주자가훈(朱子家訓)' 등을 전범(典範)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훈의 성격은 조선 중기 이후 장자 중심, 가부장적 친족조직이 발전하고 가문의 전통이 매우 중시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7세기는 성리학적 지배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사대봉사(고조, 증조, 조부, 아버지의 신주를 집안의 사당에 모시는 일)가 끝날 무렵 묘위전(墓位田, 무덤 앞 제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밭)의 운영과 관련된 족계(族契)나 족규(族規)를 마련하고 족보와 가훈서를 간행하였다. 또 각 사족가문은 현실적으로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도덕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가(齊家)를 위한 가정교육이 필요하였다.

 

효정공 가훈/조선 세종대왕이 친히 쓴 효정공의 가훈/ⓒ한국학중앙연구원

 

가훈의 주요 내용은 수신과 공부, 덕성의 함양이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었다. 또 동시에 각 가문별로 특수한 성격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즉 개별 가문의 상징전통으로 특화되어, 가훈의 내용은 그 가문의 실용성, 구체성을 바탕으로 한 생활문화가 되었다. 가훈서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은 서간, 문답(問答), 유훈(遺訓) 등의 형식으로 아직 미정착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17세기 이후가 되면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체계를 갖추어 편찬된 가훈들이 나타난다. 그 특징을 요약하면, 첫째는 수신과 제가, 처세의 3부문이 고르게 수록되는 가훈의 기본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점, 둘재는 내용이 세분되면서 실천방안들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에 이르면 거의 모든 가문의 가훈서를 가지며, 그 대상 또한 확대되어 여성, 어린이, 노비, 서자, 측실 등 구체적으로 분화되고, 형태도 다양해졌으며, 교과서적인 목적도 부가되는 경향을 보여 주면서 전문화되어 갔다. 그중 여훈이나 계녀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7세기 이후이다. 당시 부덕이 높은 여성이 가문 영달의 밑거름이자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여성의 부덕은 그 가문의 명성과 가풍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함께 보기: 가훈의 종류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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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058호 '백자 청화 꽃 무늬 조롱박 모양 병(白磁靑畵草花文瓢形甁)'은 조선후기 경기도 광주 금사리의 가마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조롱박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아래 쪽 볼록한 면을 곡선이 아닌 8모로 깎아 만들고, 그 위로 목이 긴 곡선의 병을 얹은 단정하고 안정감 있는 모양의 호리병으로, 조선백자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형태이다.


전체 크기

높이 21.1cm, 입지름 3.7cm,  바닥지름 7.8cm


순백색의 백자의 색감과 청색의 문양이 여백의 미를 살리면서 조화롭게 표현돼 있는데, 위쪽볼록한 면에는 길상도안(吉祥圖案,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문양 및 도안)의 한 종류인 전보(錢寶, 옛날 동전 무늬)와 방승보(方勝寶, 네모난 고리가 가로세로로 연속해서 이어진 모양의 무늬)를 그려 넣었고, 아래의 각진 면에는 한국적 정취를 한껏 살려주는 난초와 패랭이꽃을 넣었다.


보물 1058호 '백자 청화 꽃 무늬 조롱박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58호 '백자 청화 꽃 무늬 조롱박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58호 '백자 청화 꽃 무늬 조롱박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58호 '백자 청화 꽃 무늬 조롱박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58호 '백자 청화 꽃 무늬 조롱박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58호 '백자 청화 꽃 무늬 조롱박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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