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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삼형제/ⓒ울산매일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축복할 만한 일이며 온 가족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엄격하기 짝이 없던 유학자들도 아이, 그중에서도 특히 손자가 탄생했을 때에는 체면과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기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96년 3월에 쓴 다음과 같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초사흘에 관가의 하인이 돌아오면서 기쁜 소식을 가져왔더구나.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인간의 즐거운 일이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게다. 육순의 늙은이가 이제부터 엿을 물고 구슬을 희롱할 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느냐?...

오늘이 바로 내 손자의 삼칠일이로구나. 이백여 명의 관속(官屬)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 주더구나. 그제서야 나도 경술년에 순조(純祖) 임금께서 막 태어나셨을 때 산해진미로 기쁨에 넘쳐 즐거워하면서 억조창생을 고무케 하시던 성심(聖心)을 가늠하겠더라. 다 쓰지 못한다.


아이의 탄생을 전하는 편지를 읽고서 박지원이 "응애응애" 하고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편지에 가득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아이의 탄생을 얼마만큼 기다려 왔고, 또 그것을 어느 정도 기뻐하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박지원은 얼마나 기뻤던지, 아이가 태어나 21일째 되던 삼칠일에 200여 명이나 되는 관속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박지원과 같이 아이의 탄생을 크게 축하해야 하는 경사로 여겼기 때문에 갓 태어난 손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재산을 분배하는 일도 허다하였다.


?... 장손에게 명문(明文)을 성급(成給)해 주는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오늘은 네가 태어난 지 7일이 되어 너를 대립(大立)이라 이름 지으니 종사(宗祀)가 이로부터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에 내가 매우 기쁠 뿐만 아니라 이는 가문의 적지 않은 경사이다.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전래된 사내종 권막(權莫)의 다섯째 소생 계집종 끝지와 온계(溫溪) 집 앞 우물가의 밭[井田] 10마지기를 영영 별급(別給)한다. ...


위 문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이 1559년 6월에 그의 맏조카 이완(李完)이 아들을 낳자 7일 만에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해 준 것이다. 이호아은 손자가 태어난 일이 가문의 경사라고 말하면서 손수 이름을 '대립'이라 지어주고, 말 그대로 문전옥답인 집 앞 우물가의 밭과 이를 경작할 수 있는 계집종을 특별히 분배해 주고 있다.

온 가족의 관심은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고 축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지원이 위의 손자를 얻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세로, 경상도 안의현감에 재임 중이었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곧장 서울로 달려가서 손자를 안아 보고 싶었을 것이나 그럴 수가 없었다. 관찰사나 국와의 허락 없이 임지(臨地)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자가 어떻게 생겼을지 더욱 궁금해지고, 또 누구를 닮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집으로부터 아이의 소식이 담긴 편지가 어서 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오는 편지에는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잔뜩 화가 난 박지원은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손자의 용모에 대해 직접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네 첫 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미목(眉目)이 밝고 수려하다 하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점점 충실해져서 그 사람 꼴을 갖춤이 자못 초초(艸艸)하지 않다고 하더니, 종간(宗侃)의 편지에도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더구나. 대저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박지원은 아이를 키우는 데 대해서도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고 지시하였다. 어느 아이든지 조금 자라서 걸어다니게 되면 그때부터 말썽꾸러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비록 어리지만 이때에 기본적인 성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돌보느냐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제사에 날씨가 아직 더워 방구들이 찌는 듯하니, 아이들도 조양(調養)하기가 몹시 어려운데, 하물며 모든 게 입에 들어갈 물건임에야 어떻겠느냐? 반드시 모름지기 경고(京橋)의 어린 계집종을 빌려 정성껏 바깥채에서 돌보게 하고, 안채 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귀봉(貴奉)이의 술주정은 요즘은 심하지 않으냐? 그 사람은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다. 절대로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


날씨가 더운데다가 제사를 지내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 안이 찌는 듯할 것이니 아이를 기르는데 유의해야 하며, 또 모든 물건을 입에 넣을 나이이므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를 당부하고 있다. 또 계집종을 빌려 바깥채에서 아이를 돌보게 하고 안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술주정이 심한 귀봉이에게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박지원의 모습을 통하여 조선시대 양반들이 후손의 성장과 교육에 얼마나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생후 1년을 무사히 넘기면 돌잔치를 크게 열었다. 이때 온 가족이 모여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돌이 된 것을 축하하고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를 점치기도 하였다. '돌잡이'가 그것인데, 돌상 앞에 필묵, 옥환(玉環), 인장 등을 늘어놓고 아이가 무엇을 잡는지를 보아 장래 어떠한 인물이 될 것인가를 판단하였다. 아이가 필묵을 잡으면 문인이 되어 문명을 널리 떨칠 것이고, 옥환을 집으면 덕성을 갖춘 인물로 성장할 것이며, 인장을 만지면 관리가 되어 이름을 날릴 것이라 전망하였다. 아이가 무엇을 잡든지 아이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가 반영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김홍도, 초도호연(初度弧宴)/ⓒ국립중앙박물관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돌잡이를 하는 모습 


조선시대에는 돌잔치에서 책을 써 주는 풍속이 있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아이가 덕성을 갖춘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정성을 담아 아들이나 손자에게 손수 책을 필사해 주었다. 또 돌잔치에 초대된 유명한 하객에게 한두 글자씩을 써 달라고 부탁해서 '천자문'을 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돌잔치는 한 아이가 태어나서 무사히 한 해를 넘긴 것을 축하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이 아이와 유명한 하객이 일종의 연망(聯網)을 맺는 자리였는데, 이때 하객들이 한 글자씩 써서 만들어 준 '천자문'이 바로 그 증표였던 것이다.

실제로 아이에게 '효경(孝經)'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같은 책을 제작해 주는 사례를 충청도 서산에 세거했던 경주김씨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노응(金魯應), 1757~1824)은 아들 김도희(金道喜)가 1784년에 돌을 맞이하자 인륜에 밝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직접 

'효경'을 써 주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아들 김도희가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서 자신의 아들 김상준(金商濬)이 돌을 맞이하자 어린 나이부터 오륜을 엄중히 체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몽선습'을 써 주었다. 이는 그가 이 책의 끝에 쓴 다음과 같은 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내아이가 태어난 날에 책을 써서 내려 주는 것은 동방의 풍속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제 삼복더위를 당하여 '동몽선습' 한 책을 땀 흘려 가며 쓰노니, 네 아버지의 애태우는 마음을 생각하고 오륜(五倫)이 가장 엄중함을 체득하고 끊임없이 전진하여 그치지 말며 쉼 없이 부지런하여 더함이 있도록 하라.


돌에 별급문서를 작성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던 부안김씨 김명열(金命說, 1613~?)은 60세가 다 되도록 친손자를 얻지 못하자 자손이 끊어질까 근심하였다. 그러던 중 둘째 아들 김문(金璊)이 마침 사내아이를 낳으니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어느덧 한 해를 무사히 넘겨 돌을 맞이하자 기뻐서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돌을 맞은 손자에게 써 준 아래의 별급문서에 자세히 쓰여 있다.


나이가 육십이 되었는데도 친손자를 얻지 못하여 슬하가 무료할 뿐만 아니라 후사가 끊어지지 않을까 항상 크게 근심하여 왔다. 막내아들 문(璊)이 비로소 아들을 낳아 이름을 수종(壽宗)이라 하였다. 태어난지 겨우 한 돌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눈썹이 뚜렷한데다 살결이 백옥(白玉)과 눈처럼 뽀얘서 사랑스러우며 용모가 준수하여 장차 크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만일 맏아들 번(璠)이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당연히 봉사손(奉祀孫)이 될 것이니 그 경사스럽고 다행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경사나 즐거움이 있을 때 특별히 재산을 분배하는 것은 관례이다. 다행히 이와 같이 손자를 얻었으니 어찌 별급이 없을 수 있겠는가.


'김수종 별급문기'

전라도 부안에 살던 김명열이 1672년에 손자 김수종의 돌을 맞이하여 약간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서 작성한 문서이다. 손자를 얻은 기쁨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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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기구로는 수레와 가마가 있었다. 수레와 가마를 구분하는 기준은 바퀴의 유무이다. 바퀴가 있는 것은 수레라 하고 바퀴가 없는 것은 가마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수레는 널리 쓰이지 못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소가 끄는 수레가 보이기는 하지만 그 후로는 수레가 널리 사용되었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8세기에 박제가(朴齊家)가 '북학의(北學議)'에서 수레의 좋은 점을 열거하며 수레를 사용하자고 열렬히 주장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레의 사용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무용총 우거도-중국 길림성 집안현 소재 고구려 무용총 벽화 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렇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운송수단이 발달하려면 그에 맞추어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19세기 초 영국에서 돌을 잘게 부수어 도로를 포장하는 매커덤공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도로의 포장에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유럽에서도 16세기 후반에 초보적인 형태의 사륜마차가 나타났고, 여럿이 함께 타는 합승마차는 17세기에 가서야 등장했던 것도 도로 포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도로사정은 땅의 자연적인 상태가 도로에 적합한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평탄한 땅이 넓게 펼쳐져 있으면 수레가 통행하기 쉬웠다. 하지만 한반도 지형은 산이 많고 그에 다라 골짜기도 많아서 바퀴 달린 수레가 통행하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고대 전투에서 전차(戰車; Chariot)전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마전투가 발달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개개인이 들고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상품을 파는 보부상(褓負商)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도 수레의 사용이 어려워 물자 운송이 대량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만으로 물건을 운반할 수 없을 때에는 소나 말의 등에 물건을 실어 운반할 수는 있으나, 바퀴 달린 수레에 소나 말을 매어 운반하는 방법은 일반화되기 어려웠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수레가 쓰이기는 했지만 사람이 타는 승용보다는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운송용으로 쓰였다.


그러나 적지만 승용수레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승용수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초헌(軺軒)이다. 초헌은 초거(軺車)라고도 하는데, 바퀴 하나가 달린 높다란 수레를 말한다. 즉 의자에 기다란 끌채가 좌우로 붙고, 의자 아래에는 기둥이 있고, 그 밑에 커다란 바퀴 하나가 달려 있다. 옛날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수레라 하면 말 네 마리가 끌었는데, 초(軺)는 한두 마리 말이 끄는 가볍고 작은 수레를 말했다. 그리고 헌(軒)은 높다란 집을 뜻했다. 따라서 초헌은 사람이 올라타는 부분이 높이 있는 간단한 외바퀴 수레를 말한다.


초헌/ⓒ네이버지식백과



초헌은 1440년(세종 22)에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수레이다. 그래서 중국 사신이 초헌을 보고는 신기해하여 잠시 태워 준 일도 있었다. 이 초헌은 가마와는 뚜렷이 다른 독특한 탈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었다. 중앙의 육조 판서, 참판이나 지방의 도 관찰사급에 해당하는 2품 이상의 관원이 타는 것이었다. 고위관원뿐 아니라 왕자나 왕의 사위인 부마도 타고 다녔다.


초헌, '기산풍속도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헌의 기다란 끌채에는 가로로 길게 멍에목을 끼워 앞뒤로 양쪽에서 초헌을 끌고 가므로 초헌을 움직이려면 서너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격이 높은 수레로 높은 벼슬의 상징과 같은 수레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나 형과 아우가 나란히 초헌을 타고 가는 것을 가문의 영예로 알았다. 그러나 불편한 점도 있었는데, 바퀴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바닥의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서 울퉁불퉁한 길에서는 심하게 덜거덕거렸다.


좌거, 김홍도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국립중앙박물관



초헌 외에 흔히 보기는 어려웠지만 좌거(坐車)라는 수레도 있었다. 좌거는 흔히 중국에서 사용되었지만, 중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에도 있었다. 좌거란 말 그대로 앉아서 타고 가는 수레로, 형태는 가마와 같은데 바퀴가 달려 있고 말이 끄는 것이다. 이는 1786년에 김홍도가 그린 안주목사 부임행렬 그림에 등장한다. 구체적인 모양은 유옥교자(有屋轎子)처럼 지붕과 벽체가 있고, 사면에 휘장이 둘려 있으며, 바퀴가 둘 달려 있다. 가마부분의 옆으로 뻗은 멍에목을 앞뒤로 네 사람이 잡고, 맨 뒤에서 다시 한 사람이 끌채를 잡아 균형을 유지하며 가는 가마형 수레이다. 그러나 이런 수레가 널리 사용되지는 않은 듯하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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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동차와 기차가 잘 포장된 도로와 철길을 달리고,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날아다니니 나라 안은 물론 세계를 돌아다니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예전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발전결과가 18세기에 산업혁명으로 확산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동하는 방법으로는 그저 걷는 것 외에 말, 나귀 등의 동물을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사람이 메거나 들어 움직이는 가마나 바퀴가 붙어 있는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동수단들은 각자 특성에 따라, 경우에 따라 이용되었지만, 신분적 제약을 받기도 했다.

 

말은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용했던 보편적인 승용수단이었다. 말은 도로 사정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고, 기동성이 있어 먼 거리를 빠른 시간에 이동할 수 있으며, 게다가 체구가 커서 그 위에 높이 올라탄 사람은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도 아무나 탈 수 없었다. 지방에서는 특별한 경우 종도 말을 탈 수 있었지만 도성 안에서는 양반신분만이 탈 수 있었다. 만약 노인이나 환자가 아닌데도 일반백성이 소나 말이나 나귀를 타다가 잡히면 탔던 동물을 압수당하고 장(杖) 80대를 맞아야 했다.

 

양반은 먼 거리를 갈 때에는 대개 말을 이용했고, 만약 말이 없으면 세를 내어서라도 말을 타고 다녔다. 양반이 동구(洞口) 밖을 나서면서 말이나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 양반의 체모가 손상되는 것으로 여겼다.

 

훔쳐보기, 김홍도 《행려풍속도병》/ⓒ국립중앙박물관

 

 

 

양반의 나들이에 말과 함께 따르는 것이 종이다. 종은 말구종을 하기도 하고, 먼 거리를 갈 때에는 짐을 지고 따라나섰다. 그래서 양반이 먼 길을 가려면 육족(六足)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의 발 넷과 종의 발 둘을 합하여 이른 말이다. 말과 종은 항상 함께 따라다녀서 '노마(奴馬)'라는 합성어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말은 상당히 귀한 존재였다. 말을 관리하는 비용도 적지않게 들어 17세기에 이유태(李惟泰)가 '정훈(庭訓)'이라는 집안 살림살이 지침서에 남긴 글을 보면, 소 한 마리가 1년 동안 먹을 곡식으로 콩 한 섬을 준비해 두라고 한ㄴ 반면에, 말은 콩 두 섬에 좁쌀 열 말을 준비해 두라고 하였으니 유지비용이 소의 두 배가 넘었던 셈이다.

 

말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특별한 취급을 받아 발을 절거나 병에 걸리면 말에게 침을 놓아 주는 마의(馬醫)가 다로 있었다.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의학서적으로 '동의보감'이 있듯이 말을 치료하는 책으로 '마의보감(馬醫寶鑑)이 있을 정도였다. 좋은 말을 고르는 법, 말의 건강상태를 알아보는 법, 말을 치료하는 법 등을 수록한 말에 관한 백과사전으로 '마경(馬經)'이 있었고, 그 책의 분량이 너무 많아 이를 간단하게 요점만 추려 편찬한 '마경초(馬經抄)'가 있었으며, 이를 다시 일반백성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한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도 있었다. 말이 얼마나 특별히 취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국립중앙박물관

 

 

말은 키를 잴 때에 말굽에서부터 등줄기에서 목덜미로 넘어가는 부분에 불룩 솟은 뼈까지의 높이를 손바닥의 폭, 핸드(hand)로 재는데, 14.5핸드 이하의 말을 포니(pony), 즉 조랑말이라 부른다. 14.5핸드는 대략 1.5미터에 해당되는데, 우리나라 말은 10핸드 내지 12핸드의 아주 작은 조랑말이었다. 사실 키가 크고 늘씬한 말은 예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 흔치 않았다.

 

우리나라의 조랑말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예(濊)에서는 키가 석 자밖에 안되는 과하마(果下馬)가 있었다 하는데, 말을 탄 상태로 이마를 부딪히지 않고 과일나무 아래로 지날 수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04년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J. London)은 조선의 말이 어찌나 작은지 뉴펀들랜드산 개보다 조금 커서 자신이 안고 산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19세기 말에 고종의 행렬을 목격한 비숍(I. B. Bishop)은 고위관리들이 타고 다닌 말도 대개 조랑말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키가 큰 종마를 중국에서 수입하여 큰 말을 얻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랑말은 비록 왜소하지만 장점도 많았다. 사료는 적게 먹으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다니는 데는 아주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 조랑말/ⓒ나무위키

 

 

말 외에 타고 다녔던 동물로는 나귀와 노새가 있었다. 나귀는 말보다 기동성이 떨어지고 목덜미에 가까운 허리 쪽 힘이 말보다 약해 군용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다만 짧은 거리를 가는 데는 말보다 간편한 수단으로 종종 이용되었다. 나귀는 말에 비해 체구도 작아 볼품이 없어서 말보다 훨씬 값이 쌌다. "여각(旅閣)이 망하려니 나귀만 든다"는 속담은 예전부터 나귀가 값싼 돌물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래서 말이 부와 권세를 누리는 관리에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나귀는 검소한 선비에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관직에 오르기 전의 유생들이 나귀를 애용하였다고 한다.

 

한편 암말과 수탕나귀를 교접시켜 낳은 잡종노새나 암탕나귀와 수말을 교접시켜 낳은 버새는 2세를 낳지 못하는 동물이었다. 노새는 말보다도 훨씬 힘이 세어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데 자주 쓰였다.

 

말 외에도 소도 가끔 타고 다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세종 때의 맹사성(孟思誠), 효종 때의 김육(金堉)이 종종 소를 타고 다녔다 하며,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풍속화에는 소를 타고 장에 가는 아낙네가 종종 등장한다.

 

말이나 나귀는 남자들만 탄 것이 아니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사대붓집 여자들이 얼굴을 너울(羅兀, 나올)로 가리고 나귀나 말을 타고 바깥나들이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여자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풍경은 18세기 풍속화에도 등장한다.

 

연소답청(年少踏靑) 《혜원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여자들이 말을 탈 때에는 다리를 벌리고 말 등에 오르므로 속바지가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겉치마 위에 커다란 바지를 입고 말을 탔는데 그 겉바지를 말군(襪裙)이라 했다.

 

말군(襪裙) 《악학궤범》/ⓒ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여자들이 언제나 말군을 입고 말을 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세조 때 예조정랑 우계번(禹繼蕃)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는 취한 채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말을 타고 오는 영접도감사 조숙생(趙肅生)의 처가 말군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는 기생으로 오인하여 말에서 끌어내리고는 말채찍으로 때려 실신시킨 일로 유배된 일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함께보기 : 전통적 이동(운송)수단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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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에는 각종 양념이 들어간다. 고추, 파, 마늘, 새앙, 부추 등 경우에 다라 여러 가지가 조합되어 참가되는데, 이런 양념들은 우리에게 철분, 비타민, 칼슘을 제공한다. 특히 마늘은 쌀밥을 먹을 때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B1의 흡수를 도와 각기병을 막아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양념들이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파슬리, 로즈마리, 육두구, 정향 등의 향신료(香辛料)는 음식의 맛과 향을 돋우기 위해 넣는 첨가물로서, 전세계 여러 민족은 모두 자신들이 즐기는 향신료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에 썼던 향신료로는 마늘, 새앙, 겨자, 천초 등이 있었다. '산가요록(山家要錄,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요리서)'에는 이 밖에도 정가, 노야기, 분디나무 잎 등 다양한 향신료가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정작 가장 중요한 고추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추는 본래 감자, 옥수수처럼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건너온 식품이다. 다라서 신대륙이 발견되고 그곳의 물산이 아이사에 전해지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나라에서 고추가 전해지기 전까지 고춧가루의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 천초(川椒)가루이다. 천초는 그냥 초(椒)라고도 하며, 촉초(蜀椒)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산쇼(山椒)라고 부른다. 천초는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아직도 추어탕에 양념으로 쓰이고 있는데, 추어탕에 매운맛을 내는 짙은 갈색 가루가 바로 천초가루이다.


천초 껍질/ⓒ위키백과


천초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 자생하는 초피나무 열매 껍질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서 양념으로 쓰며, 쌉싸래하고 매운맛이 나는 향신료이다. 허균(許筠)이 지은 음식에 관한 책 '도문대작(屠門大嚼)(1611)에 '초시(椒豉)'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7세기에 천초로 고추장과 비슷한 형태의 장을 담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요록(要錄)'(1680년경)이라는 요리책에도 오이김치를 담글 때에 겨잣가루와 함께 천초가루를 양념으로 쓰고 있다.


초피나무/ⓒ위키백과


그러다가 고려 중기에 우리나라에 후추가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서역에서 온 물건에 호(胡)자를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서역에서 온 복숭아처럼 생긴 과일을 호두(胡桃)라고 했듯이 서역에서 온 초(椒)라는 뜻에서 호초(胡椒)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후추가 되었다.


후추열매/ⓒ학국학중앙연구원


후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입맛을 돋우는 최고의 향신료로 각광받았다. 유럽의 경우 오래 묵은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 주는 중요한 향신료로서, 멀리 인도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값이 상당히 비싸서 알갱이 수를 세어 팔 정도였다.


후추는 우리나라에는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처음 보이며, 신안 앞바다 해저에서 발견된 원나라 무역선의 물품 가운데에서도 발견된 일이 있다. 후추는 열대지방의 식물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므로 값이 상당히 비쌌다. 그래서 왕의 하사품으로 등장했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일본 사신이 잔칫상에 후추알을 뿌리자 조선의 악공(樂工)과 기녀들이 비싼 후추알을 줍느라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던 일을 소개하고 있다.


유구국(琉球國: 현 오키나와)에서 수입해 오는 후추 값이 너무 비싸고 또 구하기도 어려워서 조선시대 15세기에는 국내에서 재배하려는 노력도 해 보았으나 우리나라 풍토에 맞지 않아 실패했다. 결국 너무 비싸서 음식의 양념으로 쓰기에는 적절치 않아 약재로 많이 쓰였다. 때로는 더운 여름날 후추알을 갈아 물에 타서 마시며 갈증을 가라앉히기도 했으니, 쌉싸래한 맛이 지금의 탄산음료를 마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발발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해졌다. 고추라는 이름은 고초(苦椒)ㅇ에서 온 것으로, '매워서 열이 나는 초'라는 뜻이다. 고추는 일본에서 온 매운 식품이라는 뜻에서 왜겨자(倭芥子)라고 했고, 때로는 서양 오랑캐 남만(南蠻)에서 들여온 초라고 해서 남만초(南蠻椒), 번초(蕃椒)라고도 했으며, 매운 가지라는 뜻의 날가(辣茄)라고도 불렀는데, 실제로 고추는 멕시코 원산의 가짓과 식물이다.


고추는 아마도 1600년을 전후하여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추에 관한 기록은 1614년경에 편찬된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일종의 백과사전)에 처음 보인다. 그 측에 기록되기로는, 주막집에서 소주 안주로 고추를 놓았는데, 고추가 하도 매워서 그것을 먹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이야기로 생각되지만, 새로운 식품 고추가 주었던 강렬한 인상이 그렇게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추를 안주로 먹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당시 기록에도 고춧가루에 관한 내용은 없으므로, 그때의 고추는 말려서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어 양념으로 쓴 것이 아니라 통째로 그대로 식품으로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1670년경에 쓴 '음식디미방'에서도 마늘김치에 고춧가루를 양념으로 쓰지 않고 천초가루를 양념으로 쓰고 있다.


고추가 가루 상태로 양념으로 쓰인 것은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처음 보이며, 이때에는 고춧가루뿐만이 아니라 고춧가루로 고추장을 담가 먹는 만초장(蠻椒醬)도 등장한다. 이때부터 우리의 식생활은 엄청난 변화를 겼었다. 서양에서는 근대에 접어들어 일어난 식생활의 혁명으로 18세기의 감자, 포크, 개인접시를 들고 있지만, 우리나라 식생활의 혁명은 고춧가루의 사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추도 김치처럼 우리 식품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1980년대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 모든 음식이 빨간 것이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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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와 소금 또는 향신료만으로 만든 김치는 단백질의 부족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예전 김치에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한 다양한 김치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치에 육류를 넣은 것이다. 17세기 안동장씨의 '음식디미방'(1670년경)에는 생치김치, 생치지, 생치짠지라는 이름으로 오이김치에 ㅁ라리지 않은 꿩고기, 즉 생치(生雉)를 넣어 만드는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또 18세기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는 어육(魚肉)김치가 소개되어 있고, 19세기 빙허각(憑虛閣)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에도 어육김치와 전복김치가 등장한다. 어육김치는 대구, 북어, 민어, 조기 등의 대가리와 껍질을 모아 두었다가 김장 때에 김치에 넣는 것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말린 새우살과 같은 어패류도 김치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오이에 꿩고기를 넣어 담그는 꿩김치(생치김치)/ⓒ농촌진흥청


그런데 가장 널리 쓰인 단백질을 섭취하는 방법은 젓갈이다. 그래서 '규합총서'에서는 김치 담그는 법에 곤쟁이젓뿐 아니라 조기젓, 준치젓, 밴댕이젓, 굴젓 등 여러 가지 젓갈이 소개되어 있다. 많지는 않지만 김치에 새우젓을 쓰는 사례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19세기에 접어들어 어패류나 고기를 넣어 단백질을 공급하고 맛을 돋우는 고급 김치가 등장했고, 이때부터 젓갈이 김치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생선은 제철에 한꺼번에 많이 잡은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장하고 조리하여 먹었다. 크기가 커서 볼품이 있는 것은 식해(食醢)를 만들어 먹었다. 생선을 소금에 절이고 좁쌀 따위의 곡물을 첨가하여 발효시켜 먹는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등 여러 가지 식해가 동해안 지방에서 특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리고 크기가 작아 식해를 만들기 적합하지 않은 새우, 멸치 등은 젓갈을 담가 먹었다. 물론 조기젓, 밴댕이젓, 굴젓 등 크기와 관계없이 삭혀서 만든 젓갈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들은 액젓을 만들어 먹었다.


젓갈과 액젓은 김치에 첨가되어 김치의 맛을 좋게 하였다. 어패류를 소금에 절여 오래 묵혀 발효시키면 단백질이 차츰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고유의 맛과 향기를 낸다. 2,3개월 숙성시키면 생선뼈가 물러지고 분해되어 흡수하기 쉬운 상태의 젓갈로 변하여 특유의 맛과 향기를 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젓갈은 질 좋은 단백질과 칼슘, 지방질의 공급원이 되었다.


젓갈 가운데 새우젓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조기는 2,3개월 숙성시키면 조기젓이 되고, 1년 이상 숙성시키면 조기젓국이 된다. 한반도 남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멸치도 멸치젓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예전 문헌에 멸치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이지 않으므로 조선시대에는 김치의 젓갈로 많이 쓰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젓갈이 본격적으로 김치에 사용된 것은 고춧가루와 함께 18세기부터인 듯하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젓갈은 이미 15세기에 김치에 쓰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례가 많이 보이지 않아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고춧가루가 사용되면서 고춧가루가 젓갈의 산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자 적극적으로 김치 조리에 이용된 듯하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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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헌에 김치 제조법이 대강이나마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이다. 이규보는 여기서 순무를 여름 석 달 동안에는 장에 절여 먹고, 겨울 석 달 동안은 소금에 절여 먹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채소를 장이나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치를 소금에 절여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김치의 종류와 재료, 제조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요리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이 처음이다.


오이지/© 깊은나무-다음백과


'산가요록'에는 여러 종류의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순무김치[청침채(菁沈菜)], 오이김치[과저(瓜菹)], 가지김치[가자저(茄子菹)], 파김치[생총침채(生蔥沈菜)]는 물론이고 토란김치[우침채(芋沈菜)], 고사리김치[침궐(沈蕨)], 마늘김치[침산(沈蒜)] 등 여러 가지 김치 담그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여름에 속성으로 만들어 먹는 물김치[즙저(汁菹)], 겨울에 무를 이용한 동치미[동침(凍沈)]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15세기의 김치는 지금의 김치와 사뭇 달랐다. 우선 김치의 재료를 살펴보면, 지금은 김치의 가장 일반적인 주재료인 배추가 당시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농서(農書)나 요리서에서 채소 재배법이나 요리법을 소개할 때에도 배추는 오이, 무, 가지, 동아(冬瓜) 등에 비해 아주 소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고문헌에서 배추는 '숑(숭(崧)]', '숑채[숭채(崧菜)]' 또는 '배채[백채(白菜)]'로 기록되었는데, 16세기의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도 '숭저(崧菹)'가 보이고 '산가요록'에도 '배추김치 담그기'라는 뜻의 '침백채(沈白菜)'가 보이지만 단 한 번 등장 할 뿐이다. 이처럼 김치의 주재료로는 배추보다 오이, 가지, 순무, 동아, 파 등의 채소가 널리 쓰였다.


배추의 품종이 꾼준히 개량되어 제대로 결구가 된 품종이 생산되어 김치 재료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쯤으로 짐작된다. 1800년경에 간행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 오늘날의 배추김치와 같은 통배추김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과 추위에 강하면서도 맛과 질감이 좋은 배추가 만들어져 본격적으로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에 우장춘이 개발한 원예 1호, 원예 2호 배추부터였다.


순무/ⓒ위키백과


그리고 무도 지금과 같은 무가 아니라 순무 종류가 더 많이 쓰였다. 지금의 무는 '댓무'라고 하여 나복(蘿葍)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나박김치라는 말은 본래는 무김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댓나무보다는 청(菁)이라고 쓰는 '쉿무', 즉 순무가 더 많이 쓰였고, 기록에도 나복보다는 청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통상 김치라 하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것을 연상하지만, '산가요록'에는 과일도 김치의 주재료가 되고 있다. 즉 수박, 복숭아, 살구 등의 과일이 김채재료로 쓰인 것이다. 사실 과일과 채소는 식물학의 분류방법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즉 과학이 아니라 문화적인 분류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파파야를 익지 않아 파란 상태에서는 채소로 먹고, 노랗게 익으면 과일로 먹는다. 우리도 토마토를 굳이 채소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토마토는 과일일 뿐이다. 서양사람들은 토마토를 스파게티나 햄버거, 샌드위치의 재료로 쓰니까 채소라고 하지만, 우리는 토마토를 과일로 먹지 조리 재료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의 우리 조상들은 수박, 복숭아, 살구를 채소로도 썼던 것이다. 이때의 김치는 반찬으로 과일을 조리하기 위한 것으로도 쓰였지만, 과일을 오래 저장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전기의 김치에 대한 기록에는 젓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젓갈이 김치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전에도 젓갈이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세종 때에 기록에 어린 오이에 곤쟁이젓[자하해(紫蝦醢)]을 넣은 오이김치가 보이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譚)'이라는 책에서도 곤쟁이젓으로 담근 오이김치를 세상에서 '감동(感動)'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다. 흔치는 않지만 김치에 젓갈을 넣은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가요록'에는 곡물을 넣어 발효시킨 김치가 보인다. 여름에 물김치를 담글 때에 날콩이나 기울을 찧어 만든 덩어리를 가루를 내어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특별한 김치 외에는 거의 모든 김치에 고춧가루가 쓰이지만 이때는 양념 중에 고춧가루가 없다. 고추는 17세기에 도임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김치가 18세기에 접어들어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이고 젓갈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19세기에 배추김치가 크게 확산되면서 다른 나라의 김치와 다른 독특한 김치가 만들어졌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함께보기: 초기 김치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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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편으로는 자연환경과 어울리게 지어야 하고, 좋은 자연환경을 찾아 지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연환경의 악조건을 이겨 낼 수 있게 지어야 했다.


좋은 자연환경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집터를 찾아야 했다. 그때 활용된 것이 풍수지리였다.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듯이 풍수지리에 비합리적인 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좋은 자연환경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풍수에 좋은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집 주변 산세의 모양을 가리키는 형국(形局), 집의 방향을 가리키는 좌향(坐向), 집 자리를 가리키는 혈(穴) 등 꽤 복잡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그런데 풍수(風水)라는 것은 본래 '장풍득수(藏風得水)'를 가리키는 것으로, 장풍은 찬바람이 휘몰아치지 않아 추운 겨울을 나기에 족한 조건을 가리키며, 득수는 농사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을 가까운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건을 가리킨다. 풍수에 맞는 조건이란 결국은 살기 편한 자리였다.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뒤쪽에 산이 있고 앞쪽이 낮아 물이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을 길지로 여겼다. 이 역시 생활의 편리성과 관계가 깊다. 주변은 거센 바람이 몰아치지 않도록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앞은 시원스럽게 탁 트였으며, 볕이 잘 드는 곳이 바로 풍수에 맞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배산임수는 생활필수품을 쉽게 조달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는 매일 길어 와야 했고, 때로는 냇가에 나가 빨래를 해야 했다. 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고 구들을 데우기 위해서는 나무를 해야 했다. 물과 나무를 가까운 데서 쉽게 구하기 위해서는 배산임수의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집은 자연환경을 극복하여 살기 편한 곳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집의 구조는 기후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강우량, 강설량, 일조량, 바람, 습도, 지형 등 모든 것이 집의 모양과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는 지붕의 물매가 가파르며, 햇볕이 강한 곳에서는 창살이 촘촘하다. 바람이 강한 곳에서는 지붕을 묶어 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기왓골의 깊이까지도 비가 많은 곳에서는 깊다. 길게 앞으로 뻗은 처마도 비가 안으로 들이치지 않게 하고 뜨거운 햇볕을 막아 방 안을 서늘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가옥구조 중에 기후와 관련하여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마루와 온돌이다. 대청, 안청, 마래라고도 부르는 마루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벌레를 차단하고 통풍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시설이다. 남쪽 지방에서 발달한 마루는 덥고 습한 기후를 이겨 내려는 노력과 지혜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더위와 습기보다는 추위를 막는 것이 더 중요했던 평안도, 함경도 지역의 민가에는 마루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함경도의 집은 양통집이라 하여 한 용마루 아래에 간격을 두지 않고 앞뒤로 방을 배치했다. 이는 추운 지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방 안의 열을 최대한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 부뚜막/ⓒ국립중앙박물관


한편 우리 주거생활의 특색을 이루는 구들 또는 온돌(溫突)이라는 난방법은 일찍이 고구려의 서민가옥에서 유래되었다. 온돌이 언제부터 일반화되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지만, 처음에는 서민들의 난방법이었던 온돌이 전국적으로 전 계층에 일반화된 것은 조선 후기로 보인다.

처음 온돌은 방 전체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 일부를 데우는 '쪽구들' 형태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에는 대개의 경우 부엌의 부뚜막에 불을 때어 밥을 짓고 물을 끌이면서 동시에 온기가 방바닥 밑을 지나게 하여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이는 적은 연료로 장시간 실내를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난방법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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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혈연과 혼인관계로 묶인 한 가족이 사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예전에는 대가족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현대사회에 접어들어 전통사회가 무너져가고 핵가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의 대가족이 지금 핵가족으로 바뀌었다는 관념은 단순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대가족은 매우 희귀했다. 그리고 서구의 핵가족은 부부 중심의 가족을 가리키는데, 지금도 핵가족이라고 해도 부부 중심의 핵가족은 사실상 그다지 흔치 않다.



가족 구성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부부가족(conjugal family)은 부부와 그 자녀로 구성된 가족으로, 자녀는 없을 수도 있다. 원시사회와 현대사회에 많은 이 부부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만 갖추고 있어 핵가족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직계가족(stem family)은 결혼한 자녀 가운데 한 사람이 부모와 함께 가족을 꾸려 사는 형태이다. 이 가족에서 가족을 결합시키는 중요한 힘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유대이다. 그리고 확대가족(extended family)은 결혼한 자녀들이 모두 부모와 함께 가족을 구성하여 사는 형태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호적을 살펴보면 부부가족이 압도적으로 많고, 직계가족이 소수를 차지하며, 확대가족은 생각보다 아주 드물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대 서구사회는 그렇지 않다. 직계가족이나 확대 가족이 거의 없고, 부부가족도 우리의 부부가족과는 다르다. 우리는 자녀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와 함께 살지만, 서구에서는 결혼하기 전이라도 성년이 되면 따로 독립해 나간다. 그리고 서구의 부부가족에서 가족의 가장 강력한 유대는 부부 사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부가족에서는 직계가족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부모와 자녀의 유대가, 부부가족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부부 사이의 유대 못지않게 강하다.


그런 탓에 부부가족은 언제든지 직계가족으로 바뀔 수 있다. 자녀 가운데 하나가 결혼하면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은 독립하여 부부가족을 이룬다. 또 그 직계가족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다시 부부가족으로 돌아온다. 결국 부부가족과 직계가족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서로 넘나드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는 17세기까지만 해도 상속형태가 자녀균분상속이었다. 그런 경우에도 집은 맏아들에게 상속되었다. 맏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 구성은 가옥형태에도 남아 있다. 예전의 집들은 규모로 보나 공간 구성으로 보나 대개 한 부부가족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구조와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초가삼간이란 부부가족을 상정한 집이다. 실제로 한 집에 사는 사람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호적에 기록되어 있는 1회의 가족 숫자는 호적에 오르지 않은 인구를 감안하더라도 다섯 명을 크게 넘지 않는다. 대가족이라는 개념을 가족 구성적 측면에서 확대가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식구가 많은 가족으로 상정한다면, 부무가 미성년의 많은 자녀를 거느리고 있는 집도 대가족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도 많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부부가족은 때로는 직계가족으로 전환되고 직계가족이 다시 부부가족으로 전환되듯이, 직계가족의 흔적도 가옥구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동춘당 송준딜(宋浚吉), 명재 윤증(尹拯), 완당 김정희(金正喜)가 살았던 유명한 옛집들은 모두 직계가족이 살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에는 시어머니가 거처하는 안방과 며느리가 거처하는 건넛방 또는 머릿방이 있고,, 사랑채에는 아버지가 거처하는 큰사랑방과 결혼한 아들이 거처하는 작은 사랑방이 있다. 그러나 이런 집도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방 두세 칸으로 이루어진 집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부부가족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확대가족은 효를 중시하는 유교적인 이념에 부합되는 가족형태이다. 본래 부모가 살아 계신데 집을 따로 가지고 재산을 따로하는 분호별산(分戶別産)은 유교적인 효의 관념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겨 고려시대에는 이를 금지하는 법까지 제정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고 관습도 그렇지 않았다.


결혼한 자녀가 모두 부모와 함께 사는 확대가족은 조선 말기에 극히 일부 부유한 양반집에서 나타났을 뿐이다. 또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가 사망하면 형제가 서로 살림을 나누는 것이 원칙이었다. 형제 사이에 불화가 일어날 경우 중재자 역할을 할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가족 간의 큰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 '박타령'에서 놀부 부부가 흥부 부부를 내보낸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일이었다. 전통적 유교관념에서 강조했던 부모와 자녀, 그리고 형제 사이에 함께 살며 재산을 함께 소유한다는 동거공재(同居共財)는 단지 이상적인 이념일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집에 공간이 없으면 함께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퇴계 이황(李滉)도 자신의 아들이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일이 아닌 줄은 알지만 집이 좁아 함께 살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한편 17세기까지만 해도 결혼하면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입장(入丈)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은 이미 늦어도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풍습으로서 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이 많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김숙자(金叔滋), 이언적(李彦迪), 김성일(金誠一) 등 여러 이름 있는 양반집안에도 처가살이 풍습이 존재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자녀들은 친가 못지않게 외가를 매우 중시했고, 친밀도는 오히려 외가가 더했으며, 사위와 딸이 처가의 제사를 지내는 일도 사대부들의 일기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장인이 여러 사위와 함께 살 수는 없었으며, 처가살이하는 남자들도 몇 해가 지나면 대개는 분가하여 따로 살림을 차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의 가장 보편적인 가족형태는, 직계가족의 속성을 지녔고 직계가족으로 전환할 수 있는 부부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집도 그러한 구조에 맞게 지어졌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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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연령층은 7~8세 이상의 유소년부터 중장년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어린 학동들이었다. 이들은 연령상 한창 놀이를 즐길 나이이므로 학습보다는 놀이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은 인류학자인 윤학준(尹學準)의 어린 시절 추억담인데, 그는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를 훈장으로 모시고 가숙(家熟)에서 '천자문'을 배웠다고 한다.


대관령서당 선생님과 학생들 기념 촬영(1959)/ⓒ국가기록원


저녁 무렵 아이들은 옆집 마당에서 '진 뺏기 놀이'에 열중해서 함성을 지르며 놀고 있는데, 그 고함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면서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마음은 콩밭에 가 있어서 글이 머리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벼락은 떨어졌고, 회초리가 날아오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이런 어린 학동들의 관심을 공부로 유인하기 위해 흥미를 유발하는 여러가지 놀이가 동원되었다. 그중 하나가 '글자 찾기 놀이'인데, 이것은 '천자문' 등을 통해 이제 막 글자를 익혀가는 어린 학생들의 놀이 중 하나였다.


두 사람 이상 복수의 개구쟁이가 책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과(戈)나 식(式) 따위의 (삐침이 비슷한) 글자를 누가 먼저 가장 많이 찾아내는가 하는 놀이이다. 순간적인 승부이기 때문에 자못 시끄럽다. 이 '삐침' 찾기 놀이에 싫증이 나면 이번에는 같은 글자가 나란히 있는 것을 찾는 놀이를 한다. 이 놀이의 경우에는 모양은 비슷하나 다른 글자, 가령 강(岡)자와 망(罔)자가 나란히 있는 것을 짚었을 때는 페널티가 붙는다.


삐침이나 한자의 부수가 같은 글자 찾기와 유사하나 뜻이 다른 글자 찾기는 놀이를 통해서 글자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이는 앞으로 사서삼경과 같은 경전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미처 익히지 못한 글자를 자전(字典)이나 옥편(玉篇)에서 찾아야 할 때 매우 손쉽게 찾기 위한 학습방법 중의 하나였다.


학습과 관련된 본격적인 놀이로는 '초(初) 중(中) 종(終) 놀이'가 있었다. 학동 서넛이 짝이 되어 한 학동이 옛사람의 시구(詩句) 한 구절을 소리 높여 읊으면 다른 학동이 이에 호응하여 대구(對句)를 찾아내는 것으로, 시 창작에 도움이 되는 놀이였다. 또 '화승작(火繩作)'이나 '각촉부시(刻燭賦詩)'와 같은 놀이도 있었다. 이것은 시간을 정해 놓고 글짓기를 겨루는 것으로, 짧은 시간 내에 글을 얼마나 짜임새 있게 잘 짓느냐를 경쟁하는 놀이였다.


학동들의 야외 수업/ⓒ대구광역시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공부하는 데 필요한 정신 집중 강화와 체력 보강을 위한 놀이도 있었다. 정신집중 강화를 위한 것으로는 '투호(投壺)'가 있었다. 서당의 마당에 항아리를 놓고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10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항아리 속에 던져 많이 넣은 편이 이기는 것인데, 항아리에 화살을 집어넣으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원래 이 투호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향사례(鄕射禮)와 더불어 유생들이 예법을 익히고 시행하는 의식이었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투호를 향사례와 함께 흥학(興學)의 일환으로 보고 수령들에게 이를 실시하도록 권장하였다.


체력을 보강하는 놀이로는 줄넘기와 '태격'이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은 새끼줄로 줄넘기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자신을 찾아와 글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에게 먼저 줄넘기를 3천 번 하도록 한 후에 글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또 일개 가문에서 전해 오는 일이기는 하지만, 전라도 김제의 어느 가문에서는 태극을 음차한 '태격'이라는 무예를 익혀 몸을 단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놀이는 아니지만 이황(李滉, 1501~1570)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나오는 도인법(導人法)은 공부하면서 생긴 심신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서당에서 널리 행해졌다.


서당의 행사로 개접례(開接禮)와 파접례(罷接禮)가 있다. 개접례와 파접례는 일종의 개강식과 종강식인데, 주로 규모가 큰 서당에서 실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접은 대략 3월에서 5월 사이에 했고, 파접은 7월 이후 날씨가 쌀쌀해지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모든 서당이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농촌의 경우에는 일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농번기에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서당에 다니며 공부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서당의 행사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책거리였다. 책씻이(冊施時) 또는 세책례(洗冊禮)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학동들이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스승에게 감사의 표시로 떡을 해서 올리는 간단한 잔치였다. 책 한 권을 다 읽은 학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학동들도 이 날은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덩달아서 좋아했다. 다음은 어린 시절 안동에서 서당을 다닌 윤학준의 추억담이다.


나에게 도 하나의 즐거움은 가끔씩 들어오는 '책거리 떡'이다. '책거리 떡'이란 '학생'이 책을 한 권 데면 감사의 뜻으로 스승에게 가져오는 떡이다.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인데, 떡이 마치 귀(耳) 모양 같아서 '귀떡'이라고도 한다. 크기도 귀만한고 속은 비어 있으며 겉에는 노란 콩고물을 입힌다. 속이 비어 있는 것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소견이 넓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도량이 있고 틀이 큰 사람이 되라는 소망이 것들어 있다.


책거리는 때가 되면 의례적으로 행하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학부모들이 학동들의 학업 성취 정돌을 확인하고 격려하며 훈장의 노고에 감사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때 먹는 떡 하나에도 이와 같이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책거리로 송편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송편과 같이 속이 지식으로 꽉 찬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서당행사 중의 하나로 봄에 등산을 하거나 여름에 천렵(川獵)을 하기도 하였다. 정기적으로 실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봄이 되면 훈장과 학동들이 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고 높은 곳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영조 대에 경상도 고성현(固城縣)에서 훈장 노릇을 하던 구상덕(仇尙德, 1706~1761)은 봄이 되면 학동들과 산에 올랐는데,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여름에는 시원한 강이나 계곡으로 물놀이를 나가 더위에 지친 신심을 회복하고 공부를 향한 의욕을 재충전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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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은 조선시대에 성행한 초급 교육기관 중의 하나였다. 서당의 기원을 무엇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으로까지 소급하는 학설도 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인들은 책을 좋아하여 -중략- 저잣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당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문무교육을 겸비한 사설 교육기관이기에 이를 서당의 기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서긍(徐兢,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에서 고려로 파견돼 왔던 사절의 한 사람)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 두서너 채가 마주 보고 있는데, 백성의 자제들이 이곳에 모여 스승에게서 경서를 배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의 경당과 고려의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모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서당/ⓒ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서당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16세기로,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동에 거주하던 김진(金璡, 1510~1560)은 1525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임하현(臨河縣)으로 이거한 후 부암(傅巖) 근처에 서당을 설립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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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의 곁에 서당 한 채를 짓고 자제와 고을의 어린이를 불러 모아 학령(學令, 학교에서 학생들의 활동과 수업내용, 처벌 규정을 정한 학칙)을 세우고 수업과정을 엄히 하였다. 가르치는 데 열성적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고 수십 년 하였더니 학도(學徒)의 기상이 크게 일어났고 경전을 외우는 소리가 온 마을에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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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초기의 서당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김진은 먼저 집 근처에 서당을 세우고 자기 가=문의 자제와 마을의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가 과거 응시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한 것은 유학의 가르침, 즉 '수신제가 (修身齊家)'를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르치는 일에 더욱 열성적이었고 교육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년 동안 했더니 마침내 학도의 기상이 크게 진작되고 마을에 경전 읽는 소리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16세기 서당의 모습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양란을 겪고 난 후 정부는 재정적인 이유를 들어 관학(官學)인 향교에 교관(敎官)을 파견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서원의 활동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서당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이러한 사정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고을에는 비록 향교와 서원이 있지만 한갓 문구(文具)로만 설립되어 있을 뿐 교육방도가 크게 무너지고 시설은 형편없이 낡아 유학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공부하고자 하는 선비들은 서당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향촌의 사족들은 서당 설립에 열성적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사족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향촌사족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곳에서는 수령이 직접 주도하여 서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7세기에는 향촌 사족과 수령이 적극적으로 도와 서당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조속한 시일 내에 회복하려 하였다.


18세기가 되면 서당은 또 한 차례 변모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8세기에 들어와 향촌 곳곳에 동성(同姓)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 성씨가 특정한 마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서당의 설립도 자연히 문중(門中) 또는 마을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문중과 마을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서당계(書堂契)나 학계(學契)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계(契)를 통해 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고리대로 놓아 이자를 불리든지 혹은 학전(學田)을 구입하여 거기에서 얻어지는 소출로 서당의 학채와 운영비를 조달했다. 이와 같이 18세기에는 문중 또는 마을 중심의 서당이 크게 성행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서당을 통한 교육의 수요가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중인과 평민, 천민층에까지 확대되었다. 평민과 천민들까지도 문자를 터득하여 자신의 의사와 소망을 글로 표현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등장한 것이 '지식을 팔아 먹고사는' 새로운 계층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몰락한 양반이거나 신흥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평민 또는 천민 출신의 유랑지식인이었는데, 이들이 설립한 서당이 바로 '훈장 자영 서당'이었다. 훈장의 지적 수준이나 성향이 다양했기 때문에 이들이 설립한 서당의 교육수준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서당이 번성하여 한 마을에만 서너 개나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학동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서당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무튼 19세기에는 서당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훈장 자영 서당'이 새롭게 등장하여 중인이나 평민, 천민까지도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함께보기: 조선 말기(후기) 서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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