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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의 역사





조선시대 향시(鄕市)는 15세기 말부터 삼남지방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 기록상으로는 성종 1년(1470년)의 흉년으로 전라도의 농민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듬해부터 서로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들고 나와 장을 열었는데, 이것을 장문(場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까지도 지방은 성읍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하여 살던 때여서 성 외곽에 정기적인 장이 설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 같다. 또 장이 있었다고 해도 5일 간격으로 1일 행정(行程), 즉 하루 왕복거리인 30~40리마다 교통요충지에 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의 현상이다. 즉 임진왜란 전후인 선조 때에 이르러 미약하나마 5일 간격으로 각 지역이 연결되는 시장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장시의 개설은 더욱 진전되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게 되면 국토 전역으로 확대된다. 이것은 그동안의 주거기 확산과 수공업의 활성화, 대동법 시행, 그리고 이에 따른 상품화페경제의 발달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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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통 시장의 분류(종류)와 의미






[김홍도 <장터길> 보물 527호]


 조선시대에는 시장보다는 장시(場市) 또는 장(場)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장시에는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붙는 수식어가 다르다. 우선 장이 언제 열리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 매일 열리는 상설시장을 시(市)라고 하고, 점포를 시전(市廛)이라고 하였다. 시민(市民)은 시전을 운영하는 상인을 말한다. 매일 열리지 않고 주기를 정해 열리는 정기시장은 장(場)이라고 하여 그 주기에 따라 오일장, 10일장 등으로 불렀다. 일정한 주기가 없이 배가 도착할 때라든지 별신제가 열릴 때, 또는 허가된 장소가 아니거나 장을 처음 개설할 때 벌이는 장은 난장(亂場)이라고 하였다.


 장이 서는 위치를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중앙시장과 지역시장이 있고, 경시(京市), 향시(鄕市), 성읍시(城邑市), 가로시(街路市) 등이 있었다. 경시에는 정부로 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시전과 그렇지 않은 난전(亂廛),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잠시 열리는 조석시(朝夕市)가 있었다. 조석시에서는 도시나 성읍의 주민들이 필요한 신선한 생선이나 채소 또는 땔감 등을 거래하였다. 무역이 이루어지는 지역에는 개시(開市) 또는 후시(後市) 등이 있었다.


 거래물종에 따라 시장을 분류하면 일반시장과 특수시장, 농산물시장과 수산물시장으로 구분되고, 거래단계별로 보면 산지시장, 중앙도매시장, 도매시장, 소매시장 등으로, 제조과정을 기준으로 보면 원료시장과 제품시장으로 나뉘는데, 이는 대개가 산업화 이후에 진행된 현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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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의 발생과 명칭

두레는 농사일이나 마을 일 등을 협업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공동노동조직의 대표명칭으로 지역마다 명칭이 다양하다.


[사진 모내기 두레/한국학중앙연구원]


 두레는 상부상조와 공동노동조직으로 촌락조직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레는 조선 후기의 농업 생산과 관련된 공동노동조직으로, 이앙법의 확산에 따른 노동집약 형태의 농법을 반영한 마을단위의 공동노동조직이었다. 조선 후기에 두레 조직이 일반화하는 것은 17세기 이래 노동력의 집중도를 증가시킨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라고 하는 답작농업의 기술과 형태 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집약적 농업 생산방식, 공동노동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레는 밭농사 지역보다는 논농사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두레'라는 명칭은 대표명칭일 뿐 실제 생산형태와 지역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문헌기록에는 두레가 농사(農社), 농계(農契), 농청(農廳)으로 표현된다. 또 두레는 동두레, 대두레, 농사두레, 길쌈두레 등으로 서로 다르게 불리며, 지역에 따라서 영남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풋굿이 두레와 같은 조직이다. 협동작업을 하기 위해 두레를 조직하는 것을 '두레 짠다'고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두레를 낸다', '두레농사'라고도 한다. 그리고 일하는 도중에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두레 먹는다'고도 한다. 또 두레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농악을 들 수 있다. 두레작업을 나갈 때에는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친다. 농악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없애고, 흥을 돋우며, 협동심을 복돋우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를 '두레 논다'고 하고 '두레풍장'이라고도 한다.

 두레와 유사한 조직으로 평안도 일대의 건답(乾沓)지역에는 황두라 불리는 노동조직이 있었다. 황두는 20~30명의 농민이 한 작업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만을 수행한 공동노동조직이었다. 황두의 어원은 향도에서 변이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두레와 거의 유사한 형식이지만 건답지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각 집에서는 반드시 1호당 1명씩 장정을 내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조직상의 강제성도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행동이 빠른 사람을 '황두꾼 같다'고 하였다.

 제주도의 특수한 노동조직인 수놀음도 두레와 유사한 조직형태이다. 농번기에 김을 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집을 지을 때, 지붕을 이을 때, 산에서 큰 나무를 끌어내릴 때, 방앗돌을 굴릴 때, 발을 밟아 줄 때, 마을 길을 닦을 때와 같이 마을의 공동노역에 힘을 합하는 관행이다. 제주도에는 소를 키우는 수눌음인 '번쇠'가 있어 이웃끼리 소를 한데 모아 목야에 방목하고, 그 임자들이 순번제로 감시하며 키운다. 그런가 하면 해녀들의 그물접도 수눌음의 일종으로, 해녀계원들은 몇 개의 접으로 나누어 공동으로 노동, 분배하였다. 이러한 노동 교환은 서로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유대감을 강화시켜 주며, 능률과 일의 신명을 부추기는 노래도 생겨났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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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과 장터 문화



 시장은 시간과 공간의 일치를 통해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물자가 만나는 곳이다. 시장은 물자가 유통되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일대의 지역은 서로 간에 거미줄과 같은 연결망을 이루게 된다. 일단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간에 정보가 오고 가는데, 이것도 역시 지역과 지역을 엮는 끈으로 작용한다.

 농민들이 꼭 사거나 팔 물건이 없더라도 구경 삼아 나와 보는 것이 농촌의 시장이다. 장에 나가면 견문을 넓히고, 친지나 친척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시장에서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 중의 하나가 혼담(婚談)이다. 혼인을 통해 농민들은 사돈을 맺게 되고, 그 유대의 끈이 된 시장은 이들이 가지는 또다른 공동체적 연망(聯網). 시장은 이처럼 조직이 없는 민중에게는 자연스러운 집회장소를 제공한다. 민란의 시작도, 일제 때의 만세운동도 그 배경이 시장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은 경제적 행위를 하는 공간이지만 농민들에게는 동시에 일상의 활동에서 잠시 해방되는 날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히 시장에서 행해지는 각종 민속놀이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선 후기에 탈춤의 연희장소로 알려진 곳은 주로 시장터이다. 야유(野游), 오광대(五廣大) 가면극 등이 행해진 경상도 동래(東萊) 중앙통의 시장 터, 수영(水營)의 시장 터, 그리고 고성(固城) 지역 등이 이러한 예이다.


[가락오광대 중 할미,영감 과장의 한 장면/부산일보DB]


 남한강 주변에는 산신과 용신에 대한 별신제가 행해졌다. 육로가 발달하기 전에는 수로가 운송로로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강변에 시장이 형성된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개펄장터에서 이러한 별신제가 열렸다. 남한강이 중원벌을 가로질러 올라가면 충주 목계장에 이르는데, 이곳의 별신제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목계장은 소금배가 닿을 때마다 임시로 서는 장이다. 소금배는 대개 한 달에 세 번 닿았으며, 한번 장이 서면 여러 날 지속되었다. 이때마다 음성, 괴산, 청안, 영풍, 제천, 단양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도 북구 및 강원도 남부의 여러 읍에서 장꾼들이 몰려왔다. 뱃길이 무사하고 장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기원을 담은 목계별신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행해졌다. 별신제는 부용산신과 남한강 용신을 모셔오는 강신굿으로 시작하여 줄다리기 행사로 이어진다.


[사진 충주 목계나루터 전경-목계교가 놓이기 전 이 곳은 백여척의 상선이 집결한던 곳이다./네이버]


 줄다리기는 강을 경계로 동서 양편으로 나누어 줄을 당긴다. 동편은 수줄이고 서편은 암줄이 된다. 줄꾼이 동쪽으로는 강원도 강릉에서, 서쪽으로는 서울에서 까지 동원되었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송신굿으로 행사를 마무리 한다. 이긴 편은 그해 운수가 좋다고 하여 잔치를 벌였다. 줄다리기에 사용된 줄은 남한강 양편에 걸어 놓아 여름장마의 액막이로 떠내려가게 둔다. 이 행사는 1967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7월 백중이 되면 시골 오일장에서는 농사꾼들을 위해 백중장을 열었다. 이때가 되면 시장권 내에 있는 농사꾼들이 씨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장으로 모였다. 이 대회는 장의 번영을 목적으로 시장상인들이 추렴을 하여 마련한 각종 행사 중의 하나이다. 이날은 낮부터 밤는게까지 행사가 이어진다. 4월 초파일에는 불놀이를 했으며, 사당패를 불러 풍물, 무등, 줄타기 등을 하였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사시(徙市), 즉 시장 터를 옮기는 관행이 있었다. 가뭄을 해결하는 것과 시장을 옮기는 것 간에 어떤한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시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므로 장터의 이전은 가뭄의 심각성을 알리는 극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을 든다. 또 하나는 대체로 이동장소가 강가, 또는 평소에는 물에 잠겨 있던 곳이라는 점인데, 이것 역시 가뭄을 과장하는 방법이 된다. 시장의 특징인 소란함도 이러한 해석 중에 들어 있는데, 시장에서 들리는 소음이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을 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해석이든 시장을 이동한다는 그 자체가 가지는 상징적 효과가 이러한 관행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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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시계가 없던 옛날, 일반 민가에서의 시간 측정 방법


[사진 고려시대 해시계/네이버지식백과]


 서울이나 몇몇 중요한 도시에서는 새벽이나 저녁에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그렇지만 일반고을에는 시계가 없었고 시간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스스로 시간을 알아 내야 했다. 시간을 알아 내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시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민간에서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해시계(sundial)였다. 해시계는 가장 만들기 쉬운 시계였으므로 지금도 꽤 많이 남아 있다.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김정희의 옛집에도 해시계 받침 기둥돌이 남아 있듯이, 양반집에서는 종종 해시계를 놓아 시간을 쟀다. 또, 성냥갑처럼 작은 휴대용 해시계도 많았고, 때로는 작은 해시계를 부채자루에 매달아 선추(扇錘)로 쓰기도 하였다. 이런 휴대용 해시계는 어디서나 방향을 알아낼 수 있도록 대개 나침반이 함께 붙어 있었다.


[사진 고려시대 일영의(해시계)/높이9.5cm/합천 해인사 소장/한국한중앙연구원]


 그렇지만 해시계는 밤이나 궂은 날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향시계(香時計)였다. 향시계는 주로 절에서 많이 썼는데, 참나무에서 나는 버섯을 잿물에 삶은 뒤 가루를 내어 돌 따위에 글자 모양으로 파놓은 홈에 채워 놓은 것인데, 여기에 불을 붙여 그 타들어가는 정도에 따라 시각을 판별하는 것이다. 비슷한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는 서양에 초시계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과거시험 가운데 초가 다 탈 때까지 시권(試券:답안지)을 내게 하는 각촉시(刻燭試)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궂은 날 향시계도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 하고 궁금하겠지만 이때는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판별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대개는 시간을 몰라도 그만이었다.

 그러면 시계가 없을 때에는 어떻게 시간을 쟀을까? 우선 낮시간을 아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해가 어느 곳에 떠 있는가를 보고 알아내는 방법이다. 해의 높이가 아니라 해가 정남쪽에 떠 있는 시각을 오정으로 하여 해가 얼마나 남쪽에 가까이 있는가를 판별해서 시간을 알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어느 정도 인지능력이 생겨나면 곧바로 동서남북을 가르쳤다고 한다. 소혜왕후 한씨의 '내훈(內訓)'에서도 '예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여섯 살이 되면 셈과 방위이름을 가르칠지니'라고 하였다. 방위를 아는 것은 아이들에게 공간감각과 함께 시간감각을 익히는 가장 기초적인 방편이었다.

 방위를 알아 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물론 나침반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풍수지리가 유행하여, 지관들이 항상 패철(佩鐵) 또는 나경(羅經)이라 부르는 나침반을 가지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사실 지관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나침반은 마음만 먹으면 구하기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또, 굳이 나침반을 이용하지 않아도 대강의 방위는 알아낼 수 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북극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공해가 거의 없고 밤이 칠흑같이 어두웠던 예전에는 날만 맑으면 어디서나 별이 또렷하게 보였으므로 북극성을 바라보고 서서 팔을 벌리면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이 된다. 이 방법이 미덥지 않으면 마당에 기다란 막대기를 세워 놓고 낮에 그림자를 관찰하여 그림자가 가장 짧아졌을 때의 그림자 방향을 남북으로 정하면 된다.


[사진 북두칠성/위키백과]


 남북이 정해지면 해시계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반 모양의 돌에 방사선 모양으로 시간을 그리되, 남북방향에 자시와 오시를, 동서방향에 묘시와 유시를 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해가 사라진 밤에는 별이 교대했다. 하늘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 시간을 판별했던 것이다. 북극성은 찾기 어렵지 않았다.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 끝자리의 별 메라크(Merak)와 두베(Dubhe) 두 개를 직선으로 이어서 두 별의 거리 다섯 배를 한 연장선상에 북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동서양이 똑같이 사용했다.


[사진 북극성 찾는방법/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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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먹는 일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먹을 것을 유달리 중시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뿐 아니라 대표적인 예로 진달래꽃을 참꽃, 철쭉꽃을 개꽃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철쭉꽃이 진달래꽃보다 아름다워도 먹지 못하는 철쭉꽃은 '개꽃',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은 '참꽃'이라고 불렀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가와 없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루의 시각을 밥 먹을 때로 구분했는데, 그래서 저녁밥을 먹는다고 하지 않고 통상 '저녁'을 먹는다고 말한다. 또 인사말로 '밥 먹었느냐'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예전에 너무 가난하고 굶주리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인사말이 생겼다고 오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어에서 '굿 모닝', '굿 이브닝'이라는 말을 우리는 "아침밥 먹었습니까?", "저녁밥 먹었습니까?"로 인사했던 것이다. 시간을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밥 먹는 때로 생각했던 관습이 매우 오래 된 것이라는 것은 '끼'라는 말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끼'와 '때'는 본래 같은 말이었다. 16세기 중종 때 편찬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時'를 'ㅂㅅ기니 시'라 풀이했다. 요즘도 노인들은 '세 끼 밥'이라 하지 않고 '세 때 밥'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원으로 살펴보더라도 '끼'는 '때'와 함께 하나의 낱말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다. 또 우리는 뭐든지 먹는다고 표현했다.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의 말들이 먹는다는 말 한마디로 표현된다. 영어에서는 물이나 술을 마시는 것을 'drink' 담배 피우는 것을 'smoke'로 표현하지만 우리말에서는 모두 먹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마음도 먹고, 욕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귀도 먹고, 겁도 먹고, 잊어먹고, 떼어먹고 등의 표현이 보여 주듯 우리의 오래된 언어생활에도 먹는 것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우리는 예전부터 다른 민족에 비해 많이 먹었다. 성인 남자는 한 끼에 420cc의 곡물을 먹었는데, 이는 지금의 식사량에 비하면 3배에 이르는 것으로,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에 비해서도 꽤 많은 양을 먹었다. 끼니는 예전에는 '조석(朝夕)끼니'라는 말 처럼 한 두 끼를 먹었으며, 해가 긴 여름철이나 힘든 일을 할 때에는 간단한 점심(點心)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기도 했다. 예전에는 어린이도 180cc를 먹어 지금의 어른 보다도 더 많이 먹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먹었을까? 그 원인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난해서 그랬다는 지적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전에 너무나 어렵게 살아서 먹을 것이 생기면 정신없이 허겁지겁 많이 먹는 습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전의 가난이나 기근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이전에는 중국, 일본, 서양 어디나 흉년, 기근이 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심지어는 영아 살해 등의 풍습이 횡행했다. 우리민족이 많이 먹었다는 것은 늘 많이 먹었다는 것이지 어쩌다가 한 번 먹을 것이 생겼을 때 닥치는 대로 많이 먹었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하면 늘 많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었다. 조선시대에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출, 공출 등으로 쌀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남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쌀의 완만한 증산, 보리의 급격한 증산이 식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쌀은 칼로리가 높고, 고른 영양소를 갖추고 있는 우수한 식품이다. 또, 벼는 파종량에 비해 수확량이 많고, 벼농사는 토지 이용도가 높아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훌륭한 곡식이었다.

 가장 중요한 부식인 김치는 무, 오이, 가지 등으로 만들었는데, 18세기부터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여 지금처럼 빨간 김치가 생겨났으며, 19세기에는 배추가 주재료로 부상했다.

 식사도구로는 밥상과 수저를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작은 소반을 써서 식사를 했고 성인은 각자 따로 상을 받아 먹었다. 집 구조가 조리를 하는 부엌과 밥을 먹는 방으로 분리되어 있고, 부엌에서 방에 이르는 동선이 복잡하여 소반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중국이나 일본이 13, 14세기부터는 젓가락만으로 밥을 먹었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써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상차림에는 항상 국이 있었는데, 그 국이 건더기가 많고 뜨거웠기 때문에 숟가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생활문화/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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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발효음식, 김치! 우리나라 식탁이라면 빠질 수 없는 김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어디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역사속 김치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김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다. 삼국지 위서 30권에 동이전(東夷傳) 중 고구려 편에 나타나는데-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은 비록 중국측의 기록이지만 고대사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우리민족의 고대사를 연구할 때 귀중한 사료 중 하나로써 동이(東夷) 즉,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왜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내용을 보면 "고구려인은 술 빚기,장 담그기, 젓갈 등의 발효음식을 매우 잘한다" 고 기록돼 있다. 이는 이미 이 시기에 저장발효식품이 보편화 되고 생활화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언제부터 김치를 만들어 먹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김치를 주로 '저(菹)'로 표기했으며 그밖에도 여러가지 한자어가 사용되었다. 침채(沈菜), 염채(鹽菜), 함채(鹹菜), 엄채(醃菜), 저채( 菹菜), 침저(沈菹), 침지(沈漬) 등이 그것이다.

 김치를 뜻하는 낱말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10세기 고려시대이다. 즉 983년(성종 2년)에 환구(圜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 차려 놓는 음식 가운데 미나리김치[근저(芹菹)], 죽순김치[순저(筍菹)], 순무김치[청저(菁菹)], 부추김치[구저(韭菹)] 등이 보이는데, 이것들이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으로 분명히 보이는 김치이다.

 하지만 10세기에 처음으로 김치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10세기 전에, 오래전부터 김치를 만들어 먹었는데 지금까지 남은 기록에 그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김치를 '저(菹)'로 기록하여, 오이를 깎아 절여서 만든 '저(菹)'가 '시경'에  처음으로 보인다. 그때의 저는 공자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먹었다는 것으로 보아 오이를 시큼하게 절인 것으로서, 아마도 지금의 오이피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8세기의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의 문서에 제조방법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된 '츠케(漬)'가 등장한다. 그것은 김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김치를 '츠케모노(漬物)'라고 부른다.

 중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김치가 있었고, 6세기에 편찬된 '제민요술( 濟民要述)'이라는 책에 김치 제조법이 소개되어 있으며, 일본에도 8세기에 김치가 있었으므로, 중국과 일본의 문화적 가교 역할을 했던 한반도에도 일본에 김치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김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정창원 문서에 수수보리지(須須保理漬)라는 순무김치 만드는 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수수보리는 일본에 누룩으로 술 만드는 법을 알려 준 백제사람 이름이므로 그 순무김치도 백제에서 제조법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치가 수천 년 전부터 중국에 있었고 8세기 일본의 기록에 김치가 등장하므로 우리나라에도 김치가 그 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김치는 꼭 다른 나라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도 있다.

 김치의 종류가 수백 가지가 넘는다는 말도 있듯이, 어떤 채소든 절여서 먹을 수만 있다면 김치가 될 수 있다. 음식물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에 생선은 바닷가에서나 구할 수 있고, 고기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먹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은 곡식과 채소였다. 그런데 김치의 재료는 꼭 밭에서 나는 채소뿐이 아니었다. 고려 말의 시에도 여뀌풀에 마름을 넣어 소금에 절였다는 말이 있듯이 야생초도 절여 먹으면 김치가 된다.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 진휼식품으로 나누어 주었던 것이 쌀, 콩, 장, 미역국이었는데, 장을 나누어준 것은 야생초를 그냥 먹으면 탈이 나기 때문에 장으로 조리를 해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결국 김치는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음식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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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생활문화-수저

 식사도구로 유렵에서는 실버웨어(silverware)라 일컫는 나이프, 스푼, 포트를 사용하고, 아시아에서는 젓가락을 사용하며, 나머지는 맨손을 사용하는데, 이 세 부류가 거의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화권 안에 있으면서도 특이하게 숟가락을 함께 사용한다.

 

[사진 조선시대 백동, 청동 수저/온양민속박물관/한국학중앙연구원]

 

 젓가락은 편리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사용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숙련이 필요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숟가락보다 뒤에 고안되어 함께 사용되었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에 이미 젓가락이 사용되었고, 한대(漢代) 마왕퇴(馬王堆)의 고분에서 수저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일본에서도 나라, 헤이안시대에 수저가 함께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령왕릉에서 독특한 모양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함께 발굴되었다.

 

[사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수저/국립공주박물관/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13,14세기쯤에 이르러서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숟가락이 사용되지 않고 젓가락만이 사용되었다. 숟가락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용도로 쓰일 뿐 식사 때 항상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중국, 일본, 조선의 사신들이 숟가락을 쓰고 안 쓰는 것을 서로 신기해 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도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사용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도 숟가락을 쓰고 있는 것은 우리 상차림의 특성 때문이다. 우리의 상차림에는 항상 국이 따른다. 중국이나 일본에도 국이 있지만 우리의 국과는 내용이 달랐다. 예전 중국의 국은 채소를 삶아 젓가락으로 건더기를 건져 먹는 국이었고, 일본의 미소시루는 손으로 그릇을 들고 마시는 국이다. 그러나 우리의 국은 매우 다양하고, 그 가운데는 여러 가지 건더기가 들어 있어 건더기와 함께 떠 먹는 것이 많다. 미역국, 된장국 등 대개의 국이 그러하다. 또, 우리의 것은 뜨거운 국이 많아 국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실 수가 없다. 먼저 숟가락에 떠서 식히는 과정을 거쳐 조금씩 먹어야 했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는 밥을 국에 말아 먹고 물에 말아 먹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국밥이 있는데, 국과 밥이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밥이 국에 말아져 나온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보이듯이, 이런 국밥을 먹으려면 반드시 숟가락이 필요했다.

 결국 언제나 상차림에 빠지지 않는 국이 있고, 또 그 국이 대개 뜨거웠기 때문에 숟가락을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송찬섭,전경목,정연식,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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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훈은 무엇이고, 왜 만드는 것일까?

 가훈(家訓)이란 집안어른이 자녀 또는 후손들에게 주는 가르침, 교훈을 일컫는다. 가훈은 집안을 어떻게 경영해야 다음 세대에서도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정체였고, '가정교육의 텍스트'였다. 전통사회에서 가정은 사회생활의 기본으로, 가훈을 통한 가정교육을 가문 전통의 유지, 존속, 명예를 담보할 중요한 구실을 삼았다. 가훈은 대체로 수신제가(修身 齊家), 즉 처세와 때로는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치인(治人)의 도리를 중심으로 생활문화 전반에 걸친 규범과 지침들을 간단명료하게 조목으로 나열, 정리한 것이 일반적이다.

 가훈서는 각 집안의 환경과 배경, 사회적 지위와 고유한 경험의 토대 위에서 실제적인 삶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 작성형태 등에서도 차이가 나게 마련이며, 특히 가훈을 편찬한 인물의 평생 경험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가훈이 없는 집안이 거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었고, 이름있는 가문들은 가문의 전통으로 선조의 유훈(遺訓)과 가훈을 특화, 전승하였다. 예컨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김유신(金 庾信) 집안의 '충효', 최영(崔瑩) 집안의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신의,지조,청백,성실,우애', 김굉필(金宏弼)의 '인륜(人倫)', 이언적(李彦迪)의 '근검과 절약', 이이(李珥)'의 '화목과 우애' 등은 오랫동안 그들 집안의 생활신조이다.

 이렇게 가훈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구전으로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 많고, 오늘날의 가훈처럼 간단한 명구로 작성된 것도 있다.

 

[사진 풍천노씨가학십도-도식으로된 풍천노씨의 가훈/네이버]


 가훈의 종류와 형태

 가훈은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예를 들어 가정의 규범이라는 의미로 정훈(庭 訓), 가범( 家範), 가규(家規), 가헌(家憲), 가의(家儀), 가학(家學), 가법(家法)이라고도 불리며, 자손에게 내리는 교훈, 계시라는 뜻에서 유훈(遺訓), 유서(遺書), 유명(遺命), 가계(家戒), 유계(戒), 훈자(訓子), 계자서(書) 등으로 불린다.

 대상은 아들, 딸, 손자 등으로 구체적인 대상을 명시한 경우도 있고, 대상을 명시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역시 가훈이라면 협의의 대상범위는 자녀와 친족(당내지친)이었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모든 후손이 규범으로 삼는 교육서로 활용되기도 한다.

 가훈서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은 서간(書簡), 문답(問答), 유훈(遺訓) 등의 형식이며, 17세기 이후가 되면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체계를 갖추어 편찬된 가훈들이 나타난다. 서간은 부모가 생전에 자손들에게 준 일상생활의 가르침이나 언행에 대한 훈계를 사후에 기록하여 가훈서로 삼은 경우이다. 문답은 각 가정에서 학문, 독서의 중요성, 독서방법, 인물관 등에 대한 문답을 엮어 가훈으로 전해 준 경우이고, 유훈은 성현의 격언을 기초로 유언, 유서로 남긴 것이 가훈이 된 경우이다.

 잡저(저술)로 편찬된 것으로는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경우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역시 가장 일반적이다. 현재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가훈은 70여 종이 넘지만, 이 중 필사본은 10여 종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저자의 문집이나 족보 등에 수록된 것들이다. 이와 달리 별도의 저술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된 '분봉가훈(盆峯訓)'(연안이씨, 1706), '수졸재가훈(守拙齋訓)'(진주강씨, 1789), '우곡선생훈자격언(愚谷先生子格訓)'(진주강씨, 1724), '풍천노씨가학십도(豊川盧氏 學十圖)'(1847) 등도 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훈자첩(訓子帖), 제영( 題 詠), 도상(圖像) 등으로 남겨진 경우도 있다.

 이런 가훈의 내용은 개인적 덕목인 수신에서부터 가정생활인 제가, 그리고 사회생활인 처세, 거향, 관리 생활 전반에 두루 미치고 있다. 조선시대 가훈서의 내용을 보면 5~6개조에서 30여 개 조목에 이르는 다양함을 보여 주는데, 이들 내용을 요소별로 분석한 연구(정무곤, 조선시대 가훈서의 교육학적 해석, 2006)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15개조 내외가 가장 많고, 공통적으로 포함된 조목을 보면 '봉선, 제사, 목친, 독서, 의복, 언행, 우애, 부부, 교자, 어목, 치산, 농상, 거향, 접인, 교우, 거관' 등으로, 크게 보아 몸가짐(修身), 집안일( 齊家), 바깥( 處世)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한다.

 수신의 항목으로는 성의, 정심, 독서, 언행 등의 항목에 집중되어 있으며, 다음 집안일(齊家)에 관련한 조목으로는 부모 섬기기와 조상제사를 비롯하여 효우, 노비 다스리기, 가정경제 운용의 항목이 주류를 이룬다. 다음으로는 사회활동(處世)과 관련한 항목인데, 종족 간의 돈목을 시작으로 거향, 접인, 교유, 거관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출처:전통사회와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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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에서 현저히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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