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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96호, 청자 거북이 모양 주자/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6호, 청자 거북이 모양 주자/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6호, 청자 거북이 모양 주자/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6호, 청자 거북이 모양 주자/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6호, 청자 거북이 모양 주자/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6호 청자 거북이 모양 주자는 함경남도 개성에서 출토된 청자 상형 주자로, 연꽃 받침 위에 앉아 있는 거북이 모양으로 제작되었다. 

몸통은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얼굴과 목의 형상은 용의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고려시대 돌로 만든 비석의 귀부(龜趺)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수염, 갈기, 이빨, 비늘, 이마의 뿔 등이 정교하게 표현돼 있으며 눈에는 철사 안료를 써서 검은 점을 찍은 것 또한 특징이다.

거북 등 껍질 육각형 무늬 안에는 왕(王)자를 문양처럼 새겨 넣었는데, 이는 이 주자를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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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61호 청자 어룡 모양 주전자/국립중앙박물관]

 

[국보 61호 청자 어룡 모양 주전자/국립중앙박물관]

 

[국보 61호 청자 어룡 모양 주전자/국립중앙박물관]

 

 

국보 61호인 청자 어룡 모양 주전자는 상상 속의 동물인 어룡(漁龍)-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하고 몸통은 물고기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물을 힘껏 박차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인물이나 동식물의 형상을 본따 만든 전형적인 '상형청자'이다.

상형청자는 모본이 되는 형상의 대표적인 특징을 골라 묘사했으로 어떤 경우에는 모본의 느낌보다 더 강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다.

 

높이 24.3cm 바닥지름 1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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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60호 청자 사자 장식 뚜껑 향로(청자사자개향로)/국립중앙박물관]


[국보 60호 청자 사자 장식 뚜껑 향로(청자사자개향로)/국립중앙박물관]


[국보 60호 청자 사자 장식 뚜껑 향로(청자사자개향로)/국립중앙박물관]



고려청자로 국보 60호인 청자 사자 장식 뚜껑 향로는 화로에서 피운 향이 뚜껑에 나있는 구멍으로 들어가 사자의 입으로 나오도 식으로 제작되었다. 뚜껑에 장식되어 잇는 사자가 가운데 아닌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사자를 조각한 후 뚜껑에 붙이면서 옆으로 미끄러져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이며, 향로 형태는 뚜껑의 경우 윗면에 한 단을 더 만들어 그 위에 사자를 올렸고, 단이 형성된 가장자리에는 여의두문을, 측면에는 초화문을 음각으로 새겼고, 규서을 받쳐 구웠다. 화로의 몸체 여백에는 넓게 퍼진 구름문을 가득채워 음각했다. 뒷다리를 구부려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과 크고 동그랗게 뜬 눈에 철화 안료로 표현한 눈동자, 낮게 숙이고 있는 귀, 등에 올려붙인 꼬리 등은 매우 친근감 있는 사자의 형태로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청자 사자 장식 뚜껑 향로와 같은 상형 청자는 고려청자의 최정성기였던 12세기에 제작된 특색을 보이는데, 고려청자 특유의 아름다운 비색과 세련된 조형으로 당시 고려 공예의 높은 기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높이 21.2cm 입지름 11.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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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94호 청자 참외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4호 청자 참외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4호 청자 참외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4호, '청자 참외 모양 병'은 높이 22.6cm, 입지름 8.4cm, 바닥지름 7.4cm의 크기로 고려청자 절정기인 12세기 전반에 제작된 대표적인 고려청자다.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仁宗/재위 1122~1146)의 무덤인 장릉(長陵)에서 '황통 6년(皇統六年. 1146)의 기록이 있는 인종의 시책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참외 모양을 한 몸통과 치마주름 처럼 주름이 잡힌 굽다리가 달려있고, 입구는 활짝 핀 여덟 개의 꽃잎 모양으로 되어 있다.

목 부분에는 가로로 세 줄이 음각되어 있는 것 외에 다른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양식은 중국 송대 부터 유래하였지만 중국에 비해 훨씬 온화하고 단정한 곡선과 비례를 보이고 있다. 회청색에 옅은 녹색 빛이 도는 반투명의 청자유가 시유되어 고려 비색의 표본을 보이고 있다. 단아한 기형과 고도로 정선된 유약과 태토가 고려청자 최전성기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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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대용 앙부일구(해시계)/국립중앙박물관]


[해대용 앙부일구(해시계)/국립중앙박물관]


[해대용 앙부일구(해시계)/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해시계를 앙부일구(仰釜日晷) 또는 앙부일영(仰釜日影)이라 했는데, 앙부일구에서 일구라는 말은 해시계란 뜻이다. 앙부라고 하는 말은 해로 부터 그림자가 생겨 맺히는 면을(수영면) 뜻하는데, 솥을 받쳐 놓은 것같은 오목한 반구형의 모습에서 비롯된 말이다. 휴대용 앙부일구는 휴대가 가능하도록 작게 만들어낸 해시계로 회백색의 대리석을 깎아 틀을 만들고  수영면에 청동으로 만든 영침(影針)을 꽂았다. 해시계 옆에는 수영면 보다 조금 작게 만든 나침반을 함께 배치해 시간과 함께 방향도 함께 파악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시간과 방향 표시 문자는 각각 모두 음각으로 새겨 칠을 했는데, 측면에 절기와 북극고도가 새겨져 있고, 바닥 면에는 '동치신미맹하하한(同治辛未孟夏下澣)'이라고 하는 연대와 '진산인(晉山人) 강건제(姜健製)라는 낙관 2과가 새겨져 있어 휴대용 앙부일구가 1871년(고종 8년)에 본관이 진주인 강건이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건은 유명한 사대부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증손자로 고종 때인 1899년에서 1900년에 걸쳐 한성판윤을 지냈다. 따라서 강건이 휴대용 앙부일구를 직접 제작했다기 보다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 제작하는 과정에서 앙부일구에 새겨진 문장을 지었거나 제작 책임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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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95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5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5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5호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는 고려청자의 대표적인 명품 가운데 하나로, 높이는 15.3cm의 크기이며, 향이 퍼져나가도록 투각된 칠보무늬 구(球)를 얹은 뚜껑과 국화잎 모양이 장식된 향을 담아 태우는 몸통 부분, 그리고 세마리의 토끼가 각각 등으로 받치고 있는 받침(세발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기 다른 모양을 기능적으로 조화롭게 결합시켜 완성한 조형물로 음각, 양각, 투각, 퇴화, 상감, 첩화 등 다양한 기법이 조화롭게 사용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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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방울 팔주령 윗면/국립중앙박물관]


[청동방울 팔주령 밑면/국립중앙박물관]


[청동방울 팔주령 옆/국립중앙박물관]


청동방울 팔주령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서 출토되었으며, 국보 143-2호이다. 표면이 오목하고 뒷면이 불룩한 팍각형 모양의 청동판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 총 여덟개의 청동구슬이 들어있는 방울이 달려 있는데, 보통 청동방울은 쌍으로 출토가 되는 것으로 보아 두 손으로 들고 방울을 흔들었던 종교적 의식용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유물로 한반도 특유의 청동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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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뚜막/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부뚜막/국립중앙박물관]


부뚜막(쇠화덕)은 고구려 돌방무덤의 하나인 평안북도 운산군 동신면 용호동 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로 1918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조사 당시 돌방무덤의 중앙부분이 무너져 내려앉은 상태였으며, 부뚜막(쇠화덕)은 무덤의 널방(玄室)로 추정되는 곳에서 봉황모양꾸미개와 토기들과 함께 출토된 유물이다.

쇠를 녹여 주조 형식으로 해서 만들어진 부뚜막의 전체적인 형태는 안악3호분의 부엌 그림에서 보이는 부뚜막을 축소해 둔 듯한 형태로 아궁이와 굴뚝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한쪽 옆에 달려 있는 독특한 형태로, 비슷한 형태의 흙으로 만든 아궁이가 퉁거우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고구려 부뚜막(쇠화덕)은 실제로 사용했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사후 세계에서 죽은이가 사용하도록 함께 묻는 일종의 명기(明器)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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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땅 속에 묻혔다가 1993년 능산리절터를 발굴조하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는데, 용이 머리를 들어 입으로 몸체 하부를 물고 있는 형상의 받침과,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산봉우리가 층층이 중첩된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향로의 뚜껑 꼭대기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봉황이 장식되어 있으며, 다섯 방향으로 쌓아올린 봉우리에 식물, 바위 등을 만들어 넣었고, 사이사이에 산길과 시냇물, 폭포 등을 표현했으며, 상상의 동물과 호랑이, 멧돼지, 원숭이, 새 등 현실 속의 짐승들을 인물과 함께 묘사했다.

향로 뚜껑에 표현된 모습은 마치 짐승과 사람들이 신선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윗부분의 다섯 악사는 신선세계에서의 기쁨을 연주하는 듯하고, 그 옆의 5마리 새들은 꼭대기의 봉황을 응시하고 있다.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봉황은 턱 밑에 구슬을 낀 채 하늘에서 방금 내려와 앉은 듯이 두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으로 서 있다.

몸통은 8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세 겹의 연꽃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꽃잎 위에 신선과 물가의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받침은 하늘을 향해 용트림을 하는 용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고, 다리와 몸통 사이에 구름무늬, 연꽃무늬 등을 넣어 전체가 하나의 원형 받침을 이루도록 하였다.

몸통과 받침은 용이 물고 있는 봉을 몸통에 낸 홈에 끼워 연결시켰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신선들이 산다는 신산을 표현한 박산향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백제적인 요소를 가미하였는데, 불교적 연꽃이 장식되었지만 고대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도가사상이 함께 접목되어 표현된 걸작이다.


높이 61.8cm, 무게 11.85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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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부전대동계문서/한국민속대백과사전]


고려 말 조선 초의 향도는 조선시대 촌락공동체 조직의 원형적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래 불교조직이었던 향도는 고려 말기에 이르러 순수 불사(佛事)를 벗어난 무속적이거나 회음, 상장부조 같은 공동체적 생활의례에 간여하면서 기층민들의 생활공동체 조직으로 정착되어 갔다. 이들은 조선 후기의 촌계, 대동계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촌락공동체 조직은 시기별로 변모와 변천을 거듭하였다. 예를 들면 성리학적 지배질서가 확립되면서 실시된 향약이나, 사족들의 동계, 동약 조직의 보급으로 기층민 조직이었던 촌락조직은 축소되고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임ㅁ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난후 복구와 자구책으로 상하합계(上下合契)의 동계가 나타났으며, 또 사족의 동계조직이 와해되거나 사족 간의 상호부조 역할로 한정되자,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촌락민들이 주도하는 대동계(大同契)가 운영되었다.


대동은 '크게 하나 됨'이라는 뜻으로, 평등으로 모든 사람이 일치하고 화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대동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지가 '대동계'인 것이다. 대동계와 촌계는 거의 모든 마을에 있었던 아주 보편적인 마을공동체 조직으로, 마을의 대동계(촌계)는 마을제를 주관하고, 제언, 도로, 교량, 우물의 수리, 마을 공동재산의 마련과 운영, 환과고독의 보호, 진휼과 혼상의 상부상조를 담당하였으며 또한 자치, 자율의 불문율로 마을사람을 규제하고 결속하기도 하였다.


대동회의는 마을사람 전체의 회의로, 대개 마을제(동제)를 지낸 이후 음복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대동계의 대동회의는 민주적 의사 결정을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상부상조의 측면에서 의례적이고 균분적인 사족 결사조직들의 부조와는 다른 모습의 결정들이 보인다. 이 대동계는 기본적으로 마을사람들로 구성되며, 임원은 동족마을인 경우는 문장(門長)이나 촌장으로 불리는 고령자, 유식자가 상징적인 원로가 되고, 실질적인 일은 유사와 공원들이 나누어 맡는다.


대동계가 담당한 공사(公事)에서 큰 특징은 공생과 평등의 원칙이 최우선이라는 점이다. 마을 구성원은 경제적 능력과 신분, 기타 공지되는 능력에 따라 동등한 책임과 권한을 가지면서 참여하고, 권익을 분배받는다. 즉 환과고독과 같이 생활이 어려운 이웃이나, 급작스러운 피해를 입은 사람의 경우는 구휼은 물론 부담을 경감하거나 제외하는 전통이 있었다. 또 대동계의 공동체 규약은 불문율이었지만, 그 어떤 법보다도 강했고, 민주적이었으며, 실용적이었다. 이처럼 대동계는 민주적 참여, 평등과 공생, 자치와 자율의 논리 속에서 확대된 마을사람들의 생활원리이자 촌락공동체의 전통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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