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오복(五福)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이렇게 다섯가지로 일컬었는데, 그 중 고종명은 일생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덕을 베풀며 살다가 제명대로 일생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종명은 오복중 다른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누구나 고종명을 희망했다.


고종명을 말할 때는 주로 회갑(回甲)과 회혼(回婚) 그리고 회방(回榜)을 주로 거론하는데, 회갑은 태어난 지 만으로 60살이 되는 것을 말하고, 회혼은 혼인을 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하며, 회방은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한다.


평균 수명이 지금과 같지 않은 옛날에는 60세까지 사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회갑을 맞이한 사람은 성대하게 베풀고, 더욱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잔치를 열었다.


회혼은 앞서 말한 것 처럼 결혼을 한지 60년이 되는 것을 말하므로, 회갑보다도 훨씬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15~20세에 결혼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회혼을 맞이하는 나이가 되면 최소 75살~80살이 되어야 회혼이 가능했는데, 부부가 모두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그 확률이 대단히 낮을 수 밖에 없었다.

회혼식은 노부부가 다시 신랑과 신부가 되어 결혼식(회혼례)을 올리는 것으로 아들과 사위가 혼인식을 거행하는 집사와 신랑을 인도하는 기러기 아범이 되고, 달과 며느리가 신부의 수발을 드는 수모가 되었으며, 손자 손녀들이 구경꾼이 되어 큰 잔치를 열었다.


회방 또한 과거에 합격한지 60년을 뜻하는 것으로 회갑, 회혼보다도 훨씬 확률이 낮았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과거에 합격하는 평균 연령이 30세를 넘었다고 하는데, 한 사람의 회방연을 구경하려면, 그 사람의 나이가 보통 90세는 되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인, 장혼(張混 1759~1828)의 문집인 '이이엄집(而已广集)에는 회갑과, 회혼 그리고 회방이 얼마나 맞이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


세상에서 희귀한 일이라고 칭하며 사람들이 경하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생년의 회갑, 등과의 회방, 초례의 회근이 그것이다. 이것은 황왕(皇王)과 제백(帝伯)의 권세로도 취할 수 없고, 진나라나 초나라 도주공(陶朱公)이나 의돈의 부(富)로도 구할 수 없으며, 현인군자의 덕이라도 반드시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장수한 후에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회갑을 맞이하는 것은 열에 대여섯이고, 회방을 맞이하는 것은 백에 서넛이며, 회혼은 천에 한둘이다.


     회갑을 넘기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회갑과 회혼 그리고 회방을 모두 맞이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고종명은 건강하게 적당한 부를 가지고 덕을 베풀면서 평안하게 노후를 맞이하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큰 복록을 누리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사항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고종명은 일생을 살아가는 변하지 않는 목표이자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남귀여가(男歸女家)란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린 후 대략 일 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처가에 머무르는 혼인방식을 말한다. 이를 서류부가(壻留婦家), 솔서혼속(率壻婚俗)이라고도 하며, 고구려 때 있었다는 서옥제(壻屋制)도 마찬가지로 이에 속한다. 이것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여 자기 집으로 데려와 혼례를 가지는 '주자가례'의 친영(親迎) 방식과 대조되는데, 친영은 신랑이 신부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나아가 맞이하여 옴으로써 음(陰)에 대한 양(陽)의 적극성을 강조한 것이다. 남귀여가 혼속은 부계친족의 자녀들이 각자의 외가에서 성장하는 기회를 줌으로써 부계 중심의 친족 결합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인식되어 조선 명종 때부터 반친영(半親迎)이라는 방식으로 절충되기 시작하였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조선시대 민장(民狀)이란 일반 백성이 관청에 올리는 소장(訴狀)을 말하는데, 옛날 당시에는 소지(所志)라고 하였다. 자신이 '뜻한 바'를 관청에 요청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러한 민장은 소송, 청원, 진정 등 관청의 판결과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공권력의 도움을 위한 모든 사건들이 대상이 되므로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는다. 민장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개인이 제출하기도 하였지만, 집단소송의 개념처럼 하나의 집단이 하나의 사건에 대해 제출하기도 하였는데, 관청에서는 제출받은 민장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과 더불어 처리결과를 따로 정리해 모아 두었는데 이것을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이라고 하였다.



[소지(所志)/e뮤지엄(박물관포털)]



민장을 통한 소송은 형사 고발에서 부터 민사소송, 행정적 청원, 행정 소송, 행정 보고 등 매우 다양했으며, 이는 재판 자체가 수령에 대한 일종의 청원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민장 중 가장 많은 내용은 부세문제와 민간의 갈등에 대한 문제인데, 부세 문제는 생활기반인 토지와 관련된 전정, 안정적인 노동력과 관련된 군정, 그리고 19세기 조선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환정(환곡), 그리고 각 지방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부과했던 잡세 등이 주된 것이었다. 즉 조선후기 '삼정문란'과 관련한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민간의 갈등으로는 노비, 토지, 재산 등을 둘러싼 소유권 문제와 산지(山所) 즉, 묘터를 둘러싼 산송, 채무와 관련된 소송, 소작권, 초지, 수리 이용권 등을 둘러싼 문제가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관의 행정적 조치와 그에 따른 불만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민소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상급기관, 나아가 왕에게 까지 호소하기 하였는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되는 경우에는 민란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농민항쟁의 발생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은산별신제 하당굿/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을제는 그 다양한 명칭처럼 행사의 형식이나 내용에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제일(祭日)은 대개 음력으로 10월 초와 정월 초, 그리고 7월 초로 나타나는데, 7월 초에 지내는 제는 여름고사라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과거 역병이나 홍수 피해와 관련하여 장승이나 솟대를 세우기도 한다.


풍년을 기원하거나 마을 수호신의 상징으로 세우는 솟대


경기도의 경우 마을제가 끝나고 굿을 여는 곳이 있는데, 크게 도당굿과 별신굿 또는 고창굿으로 나눌 수 있으며, 둘 다 무당과 같이 온 악사들이 공연을 하여 축제분위기를 만든다. 특히 마을제가 끝나고 굿을 할 때는 술장사를 비롯해 각종 장수들과 구경 온 타동네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고 하니, 마을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축제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을제사는 마을공동체 단위의 의례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지만, 중앙정부가 유교적 지방 통치수단의 하나로 설치하거나 시행한 군현 단위의 사직제, 성황제, 여제, 기우제, 향교석전례 등의 제의는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정치적 혼란기를 통해 쇠퇴의 길을 걷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제도자체가 소멸함에 따라 자연히 중단되게 되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문경 아자개 장터


01

02

03

문경 가은 아자개 장터 

 문경 가은 아자개 장터

문경 가은 아자개 장터



조선시대 향시는 15세기 말부터 삼남지방(충청남북도,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으로는 성종 1년(1470년)의 흉년으로 전라도의 농민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듬해부터 서로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들고 나와 장을 열었는데, 이것을 장문(場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부 인구 밀집 지역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이때까지도 지방은 성읍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하여 살던 때여서 성 외곽에 정기적인 장이 설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 같다. 또 장이 있었다고 해도 5일 간격으로 하루 왕복거리인 30~40리 마다 교통요충지에 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의 현상이다. 즉 임진왜란 전후인 선조 때에 이르러 미약하나마 5일 간격으로 각 지역이 연결되는 시장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장시의 개설은 더욱 진전되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게 되면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이처럼 장시가 활성화되는 주요 원인으로 주거지의 확산과 수공업의 활성화, 대동법 시행, 그리고 이에 다른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시장도 마찬가지지만 18세기 이후 장시가 전국적으로 활성화 됨에 따라 시장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물자가 만나는 곳으로 전국을 거미줄 처럼 연결시키는 연결망 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시장은 경제적 행위를 하는 곳을 넘어 각종 민속놀이는 물론 연회를 하는 장소로도 각광받게 되고 각종 정보도 시장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역할을 하는 이른바 '장터 문화'를 만들어 내게 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조선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도 후기 조선사회로 접어들면서 서당 교육을 평민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서당은 학동들의 신분에 따라 양반 서당과 상놈 서당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향교에서도 동재(東齋)에는 양반 출신 유생만 드나들 수 있었고, 서재(西齋)에는 평민 출신 교생만 드나들 수 있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지긴 했지만 어쨋든 조선 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평민들의 문자 인식률 또한 높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신분에 따른 한계는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서당의 교사인 훈장에 대한 예우가 매우 열악했고, 평민 서당은 공간문제나 평민들의 미약한 재정능력 등으로 인해 사실상 오래도록 존속되기는 힘들었다. 또한 평민 출신이 서당 공부를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과거급제를 통한 높은 벼슬이나 학문에 종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에 공부의 목표가 대부분 실용문 작성 대행, 면장(面長) 정도로 축소되거나 훈장 노릇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많은 사람이 아는 것처럼 경주시 교동(校洞)의 최부자집은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고 10대 진사를 배출한 저명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또한 최부자집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존경받는 집안으로, 가문의 명성과 함께 전해지는 가훈 또한 유명한데, 최부자집의 가훈은 '육훈(六訓)' 이라고 하여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2.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3.과객을 후하게 접대하라.

4.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5.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6.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다음은 육연(자신을 지키는 교훈)


1.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라. 

2. 대인애연(大人靄然) 남에게 온화하게 대해라.

3.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져라. 

4. 유사감연(有事敢然) 일이 있을 때 과감하게 행동하라.

5.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성공) 얻었을 때도 담담하라.

6. 실의태연(失意泰然) 실패했을 때에도 태연히 행동하라.


이와 같이 최부자집 자손들이 지켜야 할 여섯 가지의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 경주 최부자집 고택/네이버 지식백과]


마지막 '경주 최부자'는 최준(1894~1970) 선생으로 독립운동가,기업가,사회운동가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방직후 인재양성을 위한 뜻으로 대부분의 전재산을 대학설립에 기부하였다. 최준 선생은 그러한 공으로 정부는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경주 최부자집의 '육훈'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양반가의 가통을 유지, 존속하기 위해 작성되는 가훈의 목표와 내용, 특징이 아주 선명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각 조목의 의미 해석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가문의 전통 계승과 존속을 위해 정쟁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는 것과 인정, 검약, 후덕, 진휼 등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것 등은 최부자집의 생존방식이자 후손들에 대한 교육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최부자집이 흉년에 땅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하는 것은 가진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고, '육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같은 이 집안의 전통 중에는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것도 있다. 석양 무렵이 되면 물건값이 떨어지기 마련으로 대부분 파장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떨이' 물건을 사지만, 최씨 집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인들은 제일 질이 좋은 물건을 최부잣집에 먼저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이는 최부잣집이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든지, "주변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도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선조가 이 집안의 영광을 만들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자격루,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사람들은 해와 달이 바뀌는 것을 달을 보아 알 수 있었으며, 날짜도 달력의 보급으로 알 웃 있었다. 씨뿌리기, 모내기, 김매기 등의 농사일은 달력에 표시된 양력 절기를 보고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알기 어려웠지만 당시 사람들은 짧은 시간의 흐름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 잠자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시간은 지금과는 달랐다. 낮에는 정시법을 적용하여 2시간 간격으로 시간이 바뀌는 12시진을 사용하여 진시, 사시 등으로 시간을 표시했다. 그러나 밤시간은 부정시법을 적용하여 하늘이 어슴푸레한 박명(薄明)을 뺀 나머지 밤시간을 5등분 하여 5경으로 표현했으므로 5경이 가리키는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네이버


 나라에서는 자격루를 표준시계로 삼아 종을 쳐서 그 시간을 일반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종은 하루에 두 번 울렸다.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가 시작 되는 시간과 성문을 열고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시간 뿐이었다. 정오에는 오고를 쳐서 시간을 알리고, 후에는 오고가 오포, 사이렌으로 대체되었지만 정오의 시보는 서울에 국한되었다.


휴대용 해시계,1849년(현종 15), 가로 11.5㎝, 세로 15.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므로 민간에서는 시간을 재는 데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해시계는 가장 널리 쓰인 시계였지만 양반층만이 주로 사용했으며, 그나마 밤이면 사용할 수 없었고 날이 궂어도 쓸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낮시간을 해의 방위에 따라 대략적으로 판별했다.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보아 시간을 알아냈다. 사람들은 하루 시간의 흐름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도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다. 당시 사회가 짧은 시간의 변동을 측정하는 것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이 산업의 거의 전부였고, 농업은 세밀한 시간의 흐름에 좌우되지 않았다. 또 노동이 강도도 그다지 세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지 않았으며, 지금에 비교하면 매우 느긋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사회발전 속도도 더뎠다. 그러다가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산업화가 진행되고 사람들은 점차 바쁘고 고된 삶에 빠져들게 되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전통적인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10월이 되면 날을 정해 팥시루떡을 쪄서 가주(家主) 주관으로 가을고사를 지냈다. 대청 성주와 안방 제석, 그리고 터주에는 술과 함께 떡을 시루째 갖다 놓고 장독대, 대문간, 헛간, 측간, 외양간, 우물 등에는 떡을 떼어 놓는다. 전 해에 넣었던 터줏가리 안 항아리의 묵은 벼를 햇벼로 갈아 넣는다. 시루떡은 두어 말 정도 해서 동네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다. 단골무당을 불러 고사를 지내는 집도 있다. 산간 지방에서는 마을 전체가 산치성을 지내고 나서 각자 집고사를 지내는 곳이 많았는데 대부분 10월 상달에 고사를 지내지만 정월이나 2월에 지내기도 한다.


삼신바가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동,황헌만/국립민속박물관



 정월 대보름 안으로 단골무당집에 1년 신수점을 보러 가는 집도 있고, 7월칠석 때에 단골집에 가서 가정이 무고하게 해 달라고 비는 집도 있는데, 이를 두고 '마지' 또는 '정성을 드리러 간다'고 한다. 3월에 못자리 고사를 지내는 집은 팥시루떡을 해서 가을고사 때와 마찬가지로 늘 놓는 자리에 제물을 놓고 지낸다.


터주고사,경기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황헌만/국립민속박물관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장지리, 밀양박씨들의 집성촌 주민들은 다락에 '선대신 항아리' 라고 부르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모시는데, 집안 조상을 위하는 것이라고 한다. 안방 안쪽 천장 가까운 벽에는 지석주머니, 삼신주머니를 걸어 놓는다. 지석(또는 제석) 주머니는 집안의 무고(無故)를 위해, 삼신주머니는 자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해 걸어 놓는 것이라고 한다. 제물로는 주로 햅쌀로 찐 시루떡 외에 통북어, 술, 적, 무나물 등을 올린다. 먼저 시루떡을 상 위에 받쳐 놓고, 통북어는 시루떡 오른ㅉ고에 끼워 놓으며, 시루떡 위에는 청수 한 그릇을 부어 올린다. 시루떡 앞에는 돼지고기적이나 쇠고기적을 놓고, 시루떡 옆에는 무나물과 막걹리 한 그릇을 올린다.


동지고사, 충남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국립민속박물관


 뱃고사 또는 배걸이는 강이나 나루와 관련하여 행해지던 강마을의 민속신앙이다. 뱃사공 또는 배를 소유한 집에서는 1년에 두 번, 즉 이른 봄과 10월 상달 고사 때 뱃고사를 지내거나 만신을 불러 뱃굿을 했다. 만신이나 절의 보살을 불러 배에 시루떡, 삼색과일, 술 등을 차려 놓고 징치기, 굿치기를 하는 곳도 있다.

 어부심은 한자로 어보시(魚報施) 또는 어부시(魚鳧施)라고 쓰며, 강에 사는 물고기나 오리(鳧)에게 보시, 즉 베푼다는 뜻이다. 강에서 고기도 잡고 멱을 감는 일도 많았던 시절의 풍속으로, 강 주인인 물짐승들에게 1년 내내 사고 없이 잘 지내게 해 달라고 비는 신앙행위이다.

 경기도 일원의 강마을 주민이면 누구나 정월대보름밤에 어부심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보름 전날 햅쌀로 먼저 공양(供養), 즉 밥을 지어 놓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새벽에 밥을 들고 강가로 나가 제상을 차리고 사해용왕님을 찾으면서 동해 남해 서해 북해 순서로 돌아가며 1배씩 4배 하며 물로 인한 사고가 없도록 기원한 다음 강으로 나가 바가지에 담은 밥을 강물에 푼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충남 부여 백제문화단지 특별 전시관]


충남 공주 부여 무령왕릉 출토, 백제 용봉문 환두대도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