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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원들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관원으로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사화와 당쟁이 빈번히 일어나면서 이 유배살이가 관리들에게 하나의 필수과정처럼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에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유배를 한두 차례 당하지 않은 관원은 이름이 없거나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정파가 집권하게 되면 반대편의 실각한 정파의 주요 관리들을 제일 먼저 유배형에 처했는데, 실각한 정파가 훗날 다시 집권하면 유배되었던 관리들은 대부분 중앙의 정계로 복귀하였으므로 유배의 성격도 약간 변화하여 조선 후기에는 그것이 일종의 '정치금고'와 동일한 처벌로 간주되곤 하였다. 즉 유배기간에는 중앙의 정계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한국관광공사

일단 유배형이 내려지면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데 드는 일체의 비용을 피유배자가 지불해야 했는데, 심지어는 호송관리의 수고비까지도 부담해야 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모함 등으로 억울하게 유배를 당한 경우라면 그 손해가 엄청났지만 법이 그러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배당한 관리의 신분이나 지위, 인적 관계와 복관 가능성 등에 따라서 떠나는 유배길이나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크게 달랐는데, 고관이나 권신들은 유배길에 거처가는 군현마다 들러 그 지역 수령으로부터 향응을 받거나 유배지의 수령이나 아전들로부터 깍듯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유배간 사람이 본가에 쓴 편지/ⓒ국립전주박물관

유배생활의 실제 모습을 조선 영조 대에 충청남도 직산군수(稷山郡守)를 역임한 전근사(全近思, 1675~1732)의 편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전근사는 1728년 4월에 전라도 운봉현(雲峰縣,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동면·산내면·아영면 일대에 1914년까지 있던 행정구역.)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이유는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무리를 보고도 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낸 대관(臺官, 조선 시대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들은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그를 의금부에 가두고 조사하게 했는데, 직무를 유기환 죄가 드러나자 운봉현에 유배하도록 지시하였다. 유배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같은 도(道)의 수령으로 재임하고 있는 친지에게 다음과 같은 간찰(簡札, 옛 편지들을 이르는 말. 서간(書簡), 서찰(書札)이라고도 부른다.)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체직(관직을 교체하는 것, 보통 면직을 뜻하나 경우에 따라 파직을 뜻하기도 함) 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겪었던 어려운 사정은 잠시 말하지 않더라도, 체직된 후에 양식을 지니고 올 방법이 없어서 맨손으로 내려왔는데, 지금 식량을 주가(主家)에 부탁하기가 구차하고 어려운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 근심스러움을 어찌합니까? 형에게 사람을 보내어 어려움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을까 염려될 뿐만 아니라, 관직에 있으면서 응대하는 어려움을 제가 평소에 잘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 안에 영남 출신 친구로서 수령이 된 사람이 6, 7명에 이르니, 만약 유배지에서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반드시 무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나, 관문(官門)은 사실(私室)과 다르고 어리석은 저의 종놈이 동서도 분간 못하기에 실로 서로 통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관중(管仲, 관포지교의 관중을 빗댓 말)인 저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포숙(관포지교의 포숙을 빗댄 말)인 형뿐이니, 부디 같은 도 출신이 부임한 고을에 편지를 띄워서 특별히 구제해 달라는 뜻으로 간절히 부탁하여 제가 객중에서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가? -중략- 근래에 갖가지 신병이 떠나지를 않아 날마다 신음하는 것이 일인지라, 형편상 혼자 머무르기가 어려워서 아들놈과 비복을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이 때문에 식구가 적지 않으니 더욱 근심스럽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조선시대 관리들은 유배생활 중에도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며 비복(계집종과 사내종)까지 거느리고 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근사는 자신의 신병 때문에 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만, 어찌되었든 유배된 관리들 중에는 가족과 함께 살고 또 비복도 거느리고 산 사람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유배기간에 드는 생활비를 당사자가 마련해야 했지만, 전근사는 경상도 출신의 호남지역 수령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던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정약전의 유배기간을 그린 영화 '자산어보' 스틸 컷/출처 : 네이버영화

한편 같은 유배자라 하더라도 유배기간의 생활과 해배 이후의 행보에는 상당한 개인차가 있었는데, 물론 정치적인 유배의 경우는 유배기간 내내 울분 속에서 보내는 유배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나 정약전처럼 이 기간에 독서와 저술을 하고 또 유배지역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등 유교의 진작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인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복관 후에도 그 지역의 자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리로서 중앙에 진출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은 사후에 그 지역 자제들의 추대로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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