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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이 1978년에 제작한 원효대사 영정/ⓒ국립현대미술관

 
성사(聖師) 원효(元曉)는 세속의 성이 설씨(薛氏)고,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며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원효의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일대이며, 설총과 일연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지금의 경산시 남산면에는 삼성현(원효, 설총, 일연)을 테마로 하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어있다.) 남쪽 불지촌(佛地村)의 북쪽 밤골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불지촌은 간혹 발지촌(發知村-속어로는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고 한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명의 음운학적인 이유와 설총의 생가가 있었던 유곡동이 바로 이웃마을이라는 것, 그리고 근처 당음동이 원효의 탄생지라는 전설이 남아 있는 것 등을 들어 현재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 부근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분홍, 「원효행장신고-재의수칙의 시론」, ≪논문집≫ 4, 마산대학, 1082, 293쪽))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라는 것을 세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원효와 설총이 살던 마을 유음곡동(지름골) 전경/ⓒ경산인터넷뉴스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원효대사 영정/ⓒ범어사

 
"법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배어 달이 찼는데 마침 이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었다. 급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놓고 그 안에 누워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다. 그 나무의 열매 또한 보통 것과는 달라서 지금까지도 사라율(裟羅栗)이라고 부른다."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전경/ⓒ경산시문화관광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어떤 절의 주지가 종에게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자 종이 적다고 관아에 소송했다. 관리가 괴이하게 여겨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니 한 알이 사발 하나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그래서 밤나무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의 원효대사 기념물/ⓒ경산시문화관광

 
법사가 출가하고서 그 집을 내놓아 초개사(初開寺)라 이름 짓고, 나무 옆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불렀다.
 
범사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는 할아버지의 사적을 좇은 것이다."라고 했으나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경산 초개사 전경(신림사)/ⓒ경산인터넷뉴스

 
이를 살펴보면, 인덕(麟德, 664년~665년까지 사용한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 2년 사이에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했는데, 하주는 바로 지금의 창녕군(昌寧郡)이다. 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속한 현이며,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로 간혹 상주(湘州)라 쓰기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慈仁縣, 757년부터 1895년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으로 현재 경산시의 정중앙에 있는 면이다. 원래 경주부의 속현이었으나 분리되고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전까지 경산, 하양, 자인 중에서 자인군의 중심을 맡은 곳이었으며 2020년 1월 1일 압량면이 압량읍으로 승격되면서 경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면이 되었다.)에 속하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것이다.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의 원효대사 기념물/ⓒ경산시문화관광

 
법사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고 또 다른 이름은 신당(新幢, 여기서 당幢은 세속에서 털毛이라고 한다.) 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똥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는데, 출산을 하게 되자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이때가 진평왕 39년인 대업(大業, 605년~618년까지 사용한 수나라 양제煬帝 양광楊廣의 연호) 13년(617년) 정축년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스승을 좇지 않고 혼자 배웠는데, 그가 사방을 떠돌던 시말(始末)과 성대하게 편 포교의 자취들은 모두 <당전(唐傳)>과 그의 행장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 다 기록하지 않고, 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대사가 어느 날 일찍이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誰許沒柯斧
누가 내게 자루(남성을 상징) 없는 도끼(여성을 상징, 파계승을 암시, 자루 없는 도끼는 과부를 상징)를 주려는가
我斫支天柱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 무열왕이 이 말을 듣고는 말했다.
"이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現경주향교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 궁궐에 딸린 구실아치, 궁궐의 일을 맡아 보던 사람)를 시켜 원효를 불러 오게 했다. 궁리가 왕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보니, 이미 남산을 거쳐 문천교(蚊川橋, 남천을 건너 요석궁으로 가던 다리로 지금도 경주에 그 터가 남아 있다.)를 지나고 있었다.

경주향교/ⓒ경주시문화관광
경주향교/ⓒ경주시문화관광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 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다 가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책에 널리 통달했으니, 신라의 10현(賢) 중 한 사람이다. 방음(方音, 한자의 음이나 훈을 가져와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나 향찰식 언어)으로 중국과 신라의 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 유학에서 중시한 여섯 가지 경전으로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춘추(春秋)를 가리킨다.)과 문학에 토를 달고 풀이했으니, 지금도 신라에서 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고 있다.

설총 영정/ⓒ국립현대미술관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부터 속인의 이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매우 낮은 사람)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瓠)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으므로 그 셩상을 따라 도구(道具)를 만들었다. <화엄경(華嚴經)>의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마음에 거릴낄 것이 없는 사람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 도를 이룬다.-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㝵人一道出生死)" 라는 구절을 따서 무애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원효는 이것을 지니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뽕나무 농사 짓는 늙은이나 옹기장이, 무지몽매한 무리에게도 모두 불타의 이름을 알리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으니, 원효의 교화가 컷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태어나 인연 맺은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의 이름을 초개사라 했으며, 스스로 원효라 부른 것은 아마도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의미다. '원효'라는 이름 역시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은 향언(鄕言, 우리말)으로 '새벽'이라고 했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0 <회향품(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꺾었다. 또 송사 때문에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니 모두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 보살이 수행하는 오십이 계위 중 십 지위의 첫 단계인 환락지歡樂地를 말한다.)라고 했다. 또 바다 용의 권유로 길가에서 조서를 받들고 <삼매경소(三昧經疎)>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 원효의 불교를 뜻하는 것으로,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본각(本覺, 각이 모든 중생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는 뜻)과 시각(視覺, 어떤 계기를 만나 그 본타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경우)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 이 또한 음을 알아 화답하여 부른 것이었다.

국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경주시문화관광

 
그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참 얼굴(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슬픔의 뜻을 표했다. 그때 설총이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채 그대로 있다. 일찍이 원효가 거주하던 혈사(穴寺, 바위 구멍, 석굴, 토굴 등 수행자가 수행하던 곳)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각승초개삼매축 角乘初開三昧軸
 각승으로 처음 삼매축을 열었고
무호종괘만가풍 舞壺終掛萬街風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에 유행했네.
월명요석춘면거 月明瑤石春眠去
달 밝은 요석궁 봄의 꿈은 지나가고
문엄분황고영공 門掩芬皇顧影空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그림자가 공하다.

 
-삼국유사 권 제4, 의해(義解)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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