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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등등 주로 관리가 필요한 제품을 기준으로 렌탈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매달 사용료를 내고 써야하는 만큼 렌탈 비용에 대해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겠죠?

 

렌탈 제품의 경우는 매 달 각 브랜드 별로 할인 프로모션이 변경 되는 추세이고, 새 제품을 빌려서 이용하는 렌탈의 특성상 렌탈 기간이 최소 3년(36개월) 이상인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시점에 렌탈을 진행하느냐에 따라 크건 적건 결과적으로 자신이 총 지불하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증가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는데요, 사실 매 달 바뀌는 프로모션은 인위적으로 확인하거나 딱 맞춰 렌탈을 진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일이 챙겨 할인을 적용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렌탈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큰 부분은 그 금액에서도 가장 큰, 바로 제휴카드 할인을 이용하는 것인데요, 카드사 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최저 1만원~최대2만5천원까지 렌탈 기간 동안 매달 할인이 적용되기 때문에 제휴카드 할인만 잘 챙겨도 꽤 큰 금액을 줄일 수 있답니다.

 

오늘은 타사에 비해 렌탈 요금이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정수기나 비데 공깅청정기 이외에 뷰티, 식물재배기, 매트리스 같은 건강과 관련된 제품들 위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교원웰스 렌탈 제휴 카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표를 참고해 주세요~!

 

※ 제휴카드 청구할인 받는 방법 순서 예.

1) 월 렌탈료 30,000원 정수기 렌탈
2) 카드사로부터 제휴카드 발급
3) 발급받은 제휴카드로 렌탈 고객센터에 자동이체 등록(필수)
4) 월 카드 사용실적을 채우면제휴카드 결제 최대 20,00원 청구 할인 적용
5)실제로 빠져나가는 월 렌탈료 10,000원

 

 

교원웰스 렌탈 제휴카드 및 프로모션

 

1. 웰스 KB국민카드

웰스 KB국민카드

  

※카드 사용실적에 실제로 적용 및 제외 대상에 대한 기준 등은 카드 발급 전 카드사를 통해 꼭! 확인하세요.

 

전월 실적 월 할인 한도
30만원 이상 월 11,000원 할인
70만원 이상 월 15,000원 할인
100만원 이상 월 20,000원 할인

 

렌탈, 멤버십 요금 승인 건이 여러 건인 경우 합산하여 전월 실적에 따른 월 할인한도 내에서 할인

 

연회비

K-World(JCB) : 12,000원/국내외겸용(Master) : 12,000원

 

신청방법

국민카드 온라인신청 또는 간편신청 1670-8440을 통해 카드 발급 후 웰스 고객센터로 자동이체 신청

 

 

2. LOCA X 웰스 롯데카드

LOCA X 웰스 롯데카드

  

※카드 사용실적에 실제로 적용 및 제외 대상에 대한 기준 등은 카드 발급 전 카드사를 통해 꼭! 확인하세요.

 

전월 실적 월 할인 한도
30만원 이상 월 10,000원 할인
70만원 이상 월 15,000원 할인
150만원 이상 월 25,000원 할인

 

LOCA X 웰스를 최초 발급한 고객의 경우 카드발급일로부터 다음 달 말일까지 이용실적에 관계없이 10,000원 할인한도가 제공됩니다.

카드발급일 ~ 다음 달 말일 기간에도 지난달(1일~말일) LOCA X 웰스 이용실적이 70만원 이상 또는 150만원 이상일 경우, 해당 이용실적에 따라 할인한도가 제공됩니다.

LOCA X 웰스로 제휴사 렌탈료 자동납부 연결 시에만 결제일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렌탈료 자동납부 승인 건이 여러 건인 경우 월 할인한도 내에서 할인됩니다.

렌탈료가 렌탈료 할인 금액보다 적을 경우 렌탈료 만큼만 할인이 됩니다.

 

연회비

Master : 20,000원/Amex : 20,000원/국내전용 : 20,000원

 

신청방법

롯데카드를 통해 카드 발급 후 웰스 고객센터로 자동이체 신청

 

 

3. 웰스 하나카드

웰스 하나카드

  

※카드 사용실적에 실제로 적용 및 제외 대상에 대한 기준 등은 카드 발급 전 카드사를 통해 꼭! 확인하세요.

 

전월 실적 월 할인 한도
30만원 이상 월 13,000원 할인

 

렌탈료가 월 2회 이상 청구될 경우 월 최대 13,000원까지만 청구 할인

 

연회비

One Way(JCB) : 12,000원/국내외겸용(Master) : 12,000원

 

신청방법

하나카드 전용콜(1800-2491)을 통해 카드 발급 후 웰스 고객센터로 자동이체 신청

 

 

4. 웰스 삼성카드

웰스 삼성카드

  

※카드 사용실적에 실제로 적용 및 제외 대상에 대한 기준 등은 카드 발급 전 카드사를 통해 꼭! 확인하세요.

 

① 웰스 렌탈료 자동납부 시 전월 이용금액에 따라 7,000원~13,000원 결제일할인

전월 실적 월 할인 한도
30만원 이상 월 7,000원 할인
70만원 이상 월 10,000원 할인
120만원 이상 월 13,000원 할인

 

* 통합 월 1회 제공

* 발급월 +1개월까지는 전월 이용금액 30만원 미만 시에도 30만원 이상 실적구간 혜택 제공

* 웰스 월 렌탈료 할인은 매월 3일에 적용, 회원님의 결제일에 청구금액에서 할인 적용 예) 월렌탈료 9,000원, 할인금액이 13,000원일 경우, 13,000원 모두 결제대금에서 차감

 

② 생활요금 자동납부 10,000원 이상 결제건별 1,000원 할인 아파트관리비, 통신, 4대사회보험

*통합 월 3회 제공 (월 최대 3천원)

*발급월+1개월까지는 전월 이용금액 30만원 미만 시에도 제공

*통신은 SKT,SK브로드밴드, KT, LG U+ 이동통신/인터넷/유선전화요금

 

연회비

해외겸용(VISA) : 15,000원/국내전용 : 15,000원

 

신청방법

삼성카드를 통해 카드 발급 후 웰스 고객센터로 자동이체 신청

 

 

웰스 제휴카드는 위와 같이 현재 총 4종(국민, 롯데, 하나, 삼성)으로 사용이 가능하답니다.

제휴카드 할인을 받기 위해서는 각 카드사에서 제휴카드를 발급 받으시고, 실물 카드를 수령하신 후에는

반드시 웰스 고객센터를 통해 렌탈료 결제 방법을 해당 제휴카드로 변경/등록 하신 후에 사용하셔야만

정상적인 렌탈료 청구할인 혜택을 받아보실 수 있다는 것! 꼭 기억하세요~!

 

[출처 : 교원웰스렌탈몰]

 

자연을담은웰스 교원웰스렌탈몰

직수형 정수기,얼음정수기,비데,공기청정기,연수기,전기렌지,커피머신,식물재배기,매트리스 렌탈

kywel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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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18세기 작품-Johann Gottlieb Becker(1720-1782) 위키미디어)

 

칸트는 그의 저서인 <판단력 비판>에서 미에 관한 판단, 즉 취미 판단은 대상의 객관적 성질에 관한 논리적인 개념적 인식 판단이 아니라 미감적인(ästhetisch) 판단, 즉 주관의 쾌, 불쾌의 감정과 관련된 판단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이 같은 주관의 만족감과 결부된 판단에는 감각적인 쾌적함에 관한 판단과 선(goodness-칸트에 의하면 선에는 어떤 것을 위해 유용하다는 의미에서 선한 것과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이 있다.)에 관한 판단, 그리고 취미 판단이 있다. 그런데 앞의 두 판단에서의 만족감은 관심(interest)과 결부되어 있는 반면에, 취미 판단에서의 만족감은 무관심적인 즐거움이다. 그래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취미란, 어떤 대상 또는 어떤 표상방식을 일체의 관심을 떠나서 만족 또는 불만족에 의해 판정하는 능력이다.

 

한편 감각적인 쾌적함에 관한 판단과 취미 판단은 둘 다 대상에 대한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주관적 판단이지만, 선에 관한 판단과 관련된 만족감은 목적 개념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그리고 감각적인 쾌적함에 관한 판단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지만, 미란, 일체의 관심을 떠난 만족의 대상이므로 취미 판단은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성에 대한 요구를 수반할 수 있다. 이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미란, 개념을 떠나서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칸트가 미적 판단의 '독자성'과 '보편성'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즉 미에 관한 취미 판단은 대상에 대한 개념적 판단이 아닌 주관적 판단이라는 점에서 감각적인 쾌적함에 관한 판단과 공통적이고, 선에 관한 판단과는 차별적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관심과 결부된 것인가의 여부를 따지자면, 선에 관한 판단과 감각적 쾌적함에 관한 판단은 관심과 결부되어 있는 데 반해 미에 관한 판단은  무관심적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무관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미에 관한 판단은 개념적 판단이 아닌 주관적 판단이면서도 감각적인 쾌적함에 관한 판단과는 달리 보편성을 요구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칸트 미학이 합리론과 취미론의 난점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지만, 아직 취미론과의 차별성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므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도록 하자.

 

취미론에서는 취미를 인간의 내적 감관으로 규정했는데, 이때의 감관이란 미에 관한 판정이 즉각적이며 직관적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이에 비해 칸트는 '쾌의 감정이 대상의 판정에 선행하는가, 아니면 대상의 판정이 쾌감에 선행하는가'라는 문제를 해명하면서, 감각적인 쾌적함에 관한 판단에서는 쾌의 감정이 선행하는 데 반해 미에 관한 판단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미에 관한 판단에서는 대상의 판정을 위해 우리의 선천적인 인식능력으로서의 구상력과 오성이 함께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는 취미론과 차별적이면서 또한 합리론적인 전통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왜나하면 칸트가 말하는 선천적인 인식능력은 합리론의 입장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으로서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미에 관한 판단이 이루어질 때 선천적인 인식 능력으로서 구상력과 오성이 함께 작동하지만, 그렇다고 개념적인 판단은 아니므로 구상력이 오성의 개념에 종속됨이 없이 '구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에 관한 판단에서는 인간의 선천적인 인식 능력들이 작동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그 인식능력들은 보편적인 것이라고 상정함으로써 칸트 미학은 미적 판단 기준의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점이 취미론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한편, 취미 판단의 대상인 미에 관해 칸트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미는, 합목적성이 목적의 표상을 떠나서 어떤 대상에 지각되는 한에 있어서의 그 대상의 합목적성의 형식이다.

 

칸트가 미를 왜 이렇게 규정하였는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칸트는 미를 어떤 대상의 합목적성이라는 측면과 연관시킨다. 취미 판단은 감각적인 쾌적함에 관한 판단과는 달리 대상의 판정을 위해 선천적인 인식 능력들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주관적 만족감과 관련된 판단들 중 선에 관한 판단에 더 가깝다. 그런데 선에 관한 판단은 일정한 목적의 개념에 관한 개념적 판단이면서도 그 대상이 그러한 목적에 부합됨으로써 갖게 되는 주관적 즐거움과 결부된 판단이기도 하다. 즉 선에 관한 판단에 있어서 그 대상은 어떤 일정한 목적의 개념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객관적 합목적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유용성일 경우 외적인 객관적 합목적성이고, 대상의 완전성일 경우 내적인 객관적 합목적성이다.

반면, 미에 관한 판단은 개념적 판단이 아니기 때문에 그 대상은 객관적인 합목적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합목적성, 즉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그 규정 근거로 갖는다.

 

이처럼 미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좀 더 광범위한 철학적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언급해야 할 점은 칸트가 취미 판단을 논할 때 그 일차적 대상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이라는 사실이다. 즉 자연의 어떤 대상이 누군가의 목적에 따라 지어진 것처럼 합목적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칸트 철학의 전체 체계에 의하면 그 목적은 결코 인간의 '순수 이성'에 의해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사상가들은 미를 형이상학적 배경에서 비롯된 완전성의 개념으로 규정한 데 반해, 칸트는 그것을 목적 없는 합목적성, 즉 형식적인 합목적성이라고만 규정했다. 여기서 우리는 '목적 없는' 이라는 구절을, 우리의 인식적 주관이 결코 그 목적을 개념적으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칸트의 미학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미적 판단이 그 일차적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의 미에 대한 규정이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에도 똑같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보완적인 개념, 즉 '천재'라는 개념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이 인간에 의한 예술의 산물로서 주어진다면, 그 대상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목적, 즉 예술가의 목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판단되려면, 그 대상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을 그 규정근거로서 지녀야 한다. 따라서 예술가의 목적은 우리가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조건을 위해서 칸트가 제시한 개념이 '천재'이다.

 

천재는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으로서, 그 규칙이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대상을 산출해 내는 독창성이 천재의 본질적 속성이다. 다시 말해,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만들어 낸 규칙이 독창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그 규칙을 개념적으로 정식화할 수 없어야만 그 대상에 관한 판단은 칸트가 규정한 미적 판단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해서 종합적으로 완성된 근대 미학의 성과 혹은 의미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언급할 수 있다. 근대 미학에 의해 제시된 '무관심적 쾌'의 개념은 결국 미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인식이나 도덕 혹은 현실적 유용성 등으로부터 독립된 '자기 충족적(self sufiicient)' 영역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예술의 가치는 인식이나 도덕의 잣대로 혹은 현실적 유용성이라는 기준으로 잴 수 없는 고유한 가치, 즉 '미'라는 가치를 지닌다는 관점을 근대 미학은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형식적 혹은 주관적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술 작품에는 자기 완결적 체계라는 의미가, 또 '천재'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술가에게는 일상적인 사고나 요구에 구애됨이 없이 활동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창조자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이로써 하나의 독립된 사회적 제도로서의 파인 아트 체계에 대해서, 그러한 체계의 독자성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근대 미학의 성과 혹은 의미이다.

 

[문화 비평과 미학-최연희·정준영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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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이 1978년에 제작한 원효대사 영정/ⓒ국립현대미술관

 
성사(聖師) 원효(元曉)는 세속의 성이 설씨(薛氏)고,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며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원효의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일대이며, 설총과 일연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지금의 경산시 남산면에는 삼성현(원효, 설총, 일연)을 테마로 하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어있다.) 남쪽 불지촌(佛地村)의 북쪽 밤골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불지촌은 간혹 발지촌(發知村-속어로는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고 한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명의 음운학적인 이유와 설총의 생가가 있었던 유곡동이 바로 이웃마을이라는 것, 그리고 근처 당음동이 원효의 탄생지라는 전설이 남아 있는 것 등을 들어 현재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 부근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분홍, 「원효행장신고-재의수칙의 시론」, ≪논문집≫ 4, 마산대학, 1082, 293쪽))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라는 것을 세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원효와 설총이 살던 마을 유음곡동(지름골) 전경/ⓒ경산인터넷뉴스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원효대사 영정/ⓒ범어사

 
"법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배어 달이 찼는데 마침 이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었다. 급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놓고 그 안에 누워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다. 그 나무의 열매 또한 보통 것과는 달라서 지금까지도 사라율(裟羅栗)이라고 부른다."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전경/ⓒ경산시문화관광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어떤 절의 주지가 종에게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자 종이 적다고 관아에 소송했다. 관리가 괴이하게 여겨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니 한 알이 사발 하나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그래서 밤나무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의 원효대사 기념물/ⓒ경산시문화관광

 
법사가 출가하고서 그 집을 내놓아 초개사(初開寺)라 이름 짓고, 나무 옆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불렀다.
 
범사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는 할아버지의 사적을 좇은 것이다."라고 했으나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경산 초개사 전경(신림사)/ⓒ경산인터넷뉴스

 
이를 살펴보면, 인덕(麟德, 664년~665년까지 사용한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 2년 사이에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했는데, 하주는 바로 지금의 창녕군(昌寧郡)이다. 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속한 현이며,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로 간혹 상주(湘州)라 쓰기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慈仁縣, 757년부터 1895년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으로 현재 경산시의 정중앙에 있는 면이다. 원래 경주부의 속현이었으나 분리되고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전까지 경산, 하양, 자인 중에서 자인군의 중심을 맡은 곳이었으며 2020년 1월 1일 압량면이 압량읍으로 승격되면서 경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면이 되었다.)에 속하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것이다.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의 원효대사 기념물/ⓒ경산시문화관광

 
법사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고 또 다른 이름은 신당(新幢, 여기서 당幢은 세속에서 털毛이라고 한다.) 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똥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는데, 출산을 하게 되자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이때가 진평왕 39년인 대업(大業, 605년~618년까지 사용한 수나라 양제煬帝 양광楊廣의 연호) 13년(617년) 정축년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스승을 좇지 않고 혼자 배웠는데, 그가 사방을 떠돌던 시말(始末)과 성대하게 편 포교의 자취들은 모두 <당전(唐傳)>과 그의 행장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 다 기록하지 않고, 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대사가 어느 날 일찍이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誰許沒柯斧
누가 내게 자루(남성을 상징) 없는 도끼(여성을 상징, 파계승을 암시, 자루 없는 도끼는 과부를 상징)를 주려는가
我斫支天柱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 무열왕이 이 말을 듣고는 말했다.
"이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現경주향교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 궁궐에 딸린 구실아치, 궁궐의 일을 맡아 보던 사람)를 시켜 원효를 불러 오게 했다. 궁리가 왕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보니, 이미 남산을 거쳐 문천교(蚊川橋, 남천을 건너 요석궁으로 가던 다리로 지금도 경주에 그 터가 남아 있다.)를 지나고 있었다.

경주향교/ⓒ경주시문화관광
경주향교/ⓒ경주시문화관광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 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다 가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책에 널리 통달했으니, 신라의 10현(賢) 중 한 사람이다. 방음(方音, 한자의 음이나 훈을 가져와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나 향찰식 언어)으로 중국과 신라의 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 유학에서 중시한 여섯 가지 경전으로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춘추(春秋)를 가리킨다.)과 문학에 토를 달고 풀이했으니, 지금도 신라에서 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고 있다.

설총 영정/ⓒ국립현대미술관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부터 속인의 이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매우 낮은 사람)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瓠)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으므로 그 셩상을 따라 도구(道具)를 만들었다. <화엄경(華嚴經)>의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마음에 거릴낄 것이 없는 사람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 도를 이룬다.-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㝵人一道出生死)" 라는 구절을 따서 무애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원효는 이것을 지니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뽕나무 농사 짓는 늙은이나 옹기장이, 무지몽매한 무리에게도 모두 불타의 이름을 알리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으니, 원효의 교화가 컷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태어나 인연 맺은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의 이름을 초개사라 했으며, 스스로 원효라 부른 것은 아마도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의미다. '원효'라는 이름 역시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은 향언(鄕言, 우리말)으로 '새벽'이라고 했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0 <회향품(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꺾었다. 또 송사 때문에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니 모두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 보살이 수행하는 오십이 계위 중 십 지위의 첫 단계인 환락지歡樂地를 말한다.)라고 했다. 또 바다 용의 권유로 길가에서 조서를 받들고 <삼매경소(三昧經疎)>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 원효의 불교를 뜻하는 것으로,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본각(本覺, 각이 모든 중생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는 뜻)과 시각(視覺, 어떤 계기를 만나 그 본타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경우)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 이 또한 음을 알아 화답하여 부른 것이었다.

국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경주시문화관광

 
그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참 얼굴(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슬픔의 뜻을 표했다. 그때 설총이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채 그대로 있다. 일찍이 원효가 거주하던 혈사(穴寺, 바위 구멍, 석굴, 토굴 등 수행자가 수행하던 곳)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각승초개삼매축 角乘初開三昧軸
 각승으로 처음 삼매축을 열었고
무호종괘만가풍 舞壺終掛萬街風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에 유행했네.
월명요석춘면거 月明瑤石春眠去
달 밝은 요석궁 봄의 꿈은 지나가고
문엄분황고영공 門掩芬皇顧影空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그림자가 공하다.

 
-삼국유사 권 제4, 의해(義解)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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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 대성동 고분군/ⓒ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추친단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추친단

 
한국고대사 연구자인 김태식 교수에 의하면 '가락국기' 조는 원래 고려 문종(文宗) 후반의 문인이 편찬한 것을 일연이 줄여 쓴 것이라고 한다. 이 조는 수로왕 신화를 시작으로 400년 정도 지속된 가야에 관한 내용으로 단편적인 <삼국사기> 기록에 비해 상세하게 밝혀 나가고 있어 가야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가락'은 가야(伽耶), 가야(加耶), 가라(加羅)라고도 하며, 북방의 부여(扶餘)계 언어에 속한다.

 
문종조(文宗朝, 고려 제11대 왕) 대강(大康, 요나라 도종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가 1075년~1084년까지 사용한 연호)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였던 문인이 지었는데, 여기에 그 개략적인 것을 싣는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이 땅에 아직 나라의 칭호가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 추장들이 백성을 아울러 다스렸으니, 모두 100호(戶는 하나의 고을과 비슷한 규모이며, 마을이나 씨족 집단을 뜻한다.)에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이 저마다 산과 들에 모여 살았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42년) 3월 계욕일(禊浴日, 재앙을 물리치고 몸을 강물에 씻어 깨끗이 하는날로, 몸을 깨끗하게 하여 액땜을 하고 다같이 모여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는 날을 뜻한다. 대부분 3월 상사일上巳日 즉, 음력 3월 3일에 하며, 이 시기는 파종기로 풍요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등의 큰 행사가 있었다.)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봉(龜旨峯, 지금의 경남 김해시에 있으며, 구지봉의 봉우리 모양이 넓은 원형으로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과 같다고 한다. 구지봉 꼭대기에는 돌 무더기가 거북 모양의 돌울 떠받치고 있는 고인돌이 있고, 근처에 1976년 세운 여섯 개의 알과 아홉 마리의 돌거북으로 구성된 천강육란석조상天降六卵石造像이 있다.)에서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래서 무리 이삼백 명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의 소리 같았지만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구간들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다시 대답했다.
"구지봉입니다."
 

구지봉 전경/ⓒ김해시청
구지봉/ⓒ김해시청

 
또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온 것이다. 너희들이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내면서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밀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구하구하龜何龜何 수기현아首其現也 약불현야若不現也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라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기뻐 춤추게 되리라"
 
구간들은 그 말대로 하면서 모두 기쁘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 하늘을 우러러보니 자줏빛 새끼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살펴보니 붉은색 보자기로 싼 금합(金合, 수확한 곡식을 다음 수확기까지 보관하는 상자)이 있었다. 그것을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허리를 굽혀 백 번 절하고, 얼마 후 다시 금합을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와 탑 위에 두고 제각기 흩어졌다.
 
12일(협진浹辰을 풀이한 말로 협浹은 일주一周 즉, 한바퀴 도는 것을 뜻하고, 진辰은 12간지를 뜻한다.)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열어 보니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빼어났다. 그들을 평상에 앉혀 절하며 축하하고 지극히 공경했다. 그들은 나날이 자라서 열흘 남짓 되자 키가 아홉 자나 되어 은(殷)나라의 탕왕(湯王) 같았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의 고조(高祖)와 같았고, 눈썹의 여덟 색채가 요(堯) 임금과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이 순(舜) 임금과 같았다(태평성대라고 일컫는 요순시대의 임금들로, 요 임금은 유가가 꿈꾸었던 이상적 군주이며, 순 임금은 요 임금과 더불어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린 명군으로 불린다).
 
그달 보름에 즉위했는데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부르니, 바로 여섯 가야 중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호암미술관의 가야 금관(좌), 오구라 컬렉션의 가야 금관(우)/ⓒ국립중앙박물관
고령 지산동 30호 출토 가야 금동관(좌), 성주 가암동 출토 가야 금동관(우)/ⓒ국립중앙박물관
고령 지산동 32호 가야 금동관/ⓒ국립중앙박물관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그는 임시로 궁궐을 짓게 하고 들어가 다스렸는데, 질박하고 검소하여 지붕의 이엉(짚이나 풀잎 새 등을 엮어 만든 초가 지붕의 재료)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석 자를 넘지 않았다.
 
즉위 2년 계묘년(43년) 봄 정월에 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
 
이에 임시로 지은 궁궐 남쪽 신답평(新畓坪, 이곳은 한전閑田 즉, 묵은 밭이었는데 새로 경작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답畓이란 글자는 속자俗字다.)에 행차하여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다가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곳은 마치 여뀌잎처럼 좁지만, 빼어나게 아름다워 열여섯 나한(羅漢,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소승 불교에서 교법을 수행하는 성문聲聞(출가 수행자) 사위四位(수행자의 수행의 단계) 중 덕행이 높았던 성자聖者를 뜻한다.)이 머물 만한다. 더군다나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일곱 성(七聖, '성'이란 올바른 지혜로 진리를 비추어 본 사람으로, '칠성'이란 수신행隨信行, 신해信解, 견지見至, 신증身證, 혜해탈慧解脫, 구해탈俱解脫을 말한다. 한편 고운기교수는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란 구절의 3과 7을 연계시켜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칠일의 숫자와 관련되어 있일 것이라고 보았다.)이 머물 만하여, 정말로 알맞은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참으로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1500보(약 1.8km) 둘레의 외성(外城)과 궁궐, 전당(殿當)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 창고, 곡식 창고 지을 곳을 두루 정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국내의 장정과 공장(工匠)을 두루 불러모아 그달 20일(즉위 2년 봄 정월)에 튼튼한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3월10일에 역사(役事)를 마쳤다. 궁궐과 옥사(屋舍)는 농한기를 기다려 그해 10월 안에 짓기 시작하여 갑진년(44년) 2월에 이르러 완성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궐로 옮겨 가서 모든 정치의 큰 기틀을 살피고 여러 가지 일을 신속히 처리했다.
 

김해 가야테마파크에 복원된 가야왕궁 태극전/ⓒ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홍보서비스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니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했다. 탈해는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는데, 키가 석 자고 머리 둘레가 한 자나 되었다. 탈해는 기뻐하며 궁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위를 빼앗으려고 왔소."
 
수로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왕위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명했으니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 너에게 왕위를 넘겨 줄 수 없고, 또 감히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했다.
"그대는 나와 술법을 겨룰 수가 있겠소?"
 
수로왕이 말했다.
"좋다."
 
그래서 잠깐 사이에 탈해가 매로 변하자 왕은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왕은 새매로 변했는데, 그사이에 아주 짧은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탈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왕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서대석 교수는 수로왕과 탈해의 이야기를 해상을 통해 가락국을 침략한 집단과 수로왕 집단이 전쟁을 한 일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경남 김해시에 조성된 '가야의 거리'의 가야 군사들/ⓒ한국관광공사

 
탈해가 이에 항복하여 말했다.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서 제가 매가 되자 독수리가 되었고, 참새가 되자 새매가 돠었는데도 죽임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인께서 저의 죽음을 원치 않는 인(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왕과 왕위를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탈해는 곧 절을 하고 나갔다. 그러고는 서울 변두리의 나루터로 가서 중국 배가 오가는 물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탈해가 머물면서 모반을 꾸밀까 걱정하여 급히 수군 500척을 내어 추격했으나, 탈해가 계림 땅 경계로 도망쳐 들어갔으므로 수군이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이일에 관한 기록은 신라의 기록과 많이 차이가 있다.
 

가야의 영역[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대가야-고령, 비화가야-창녕/6가야 중 하나로 경북 성주에 있었다고 알려진 '성산가야'는 실제성에 논란이 있다.]/ⓒ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추친단

 
건무 24년 무신년(48년) 7월27일에 구간들이 조회(朝會) 때 왕께 아뢰었다.
"대왕께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도 좋은 짝을 얻지 못했으니, 신들의 딸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처자를 뽑아 궁궐로 들여 배필로 삼으십시오."
 
왕이 말했다.
"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왕후를 맞는 것 역시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마라."
 
그리고 유천간에게 가벼운 배와 날랜 말을 주어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명하고, 또 신귀간에게는 승점(乘岾,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며, 승점은 연하輦下-즉, 도읍에 속한 곳-의 나라다.)으로 가도록 명했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횃불을 들자 배는 재빨리 육지 쪽으로 달려왔다. 신귀간 등이 이를 보고는 대궐로 달려들어와 아뢰었다. 수로왕은 이 말을 듣고서 기뻐했다. 얼마 후 구간들을 보낸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좋은 계수나무로 만든 아름다운 노를 저으며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 안으로 모셔오게 했다.
 

1800년대 말 제작된 웅천현(現 경남 창원시 진해구) 지도(고지도)에 나오는 '만산도'/ⓒ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배에서 내린 왕후가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평소에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아뢰니, 왕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여겨 유사(有司,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를 데리고 행차했다. 그리고 대궐 아래 서남쪽 60보쯤 되는 곳의 산언저리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이에 왕후가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 입구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때 모시던 잉신(媵臣, 왕비를 따라온 신하들)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었으며, 노비까지 합치면 모두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수놓은 비단(금수錦繡)과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능라綾羅), 의상(衣裳), 필로 된 비단(필단疋緞), 금은, 구슬과 옥, 아름다운 옥(경구瓊玖), 장신구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드라마 김수로에서 김수로왕과 허왕후/ⓒMBC드라마

 
왕후가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자 왕이 나가 맞이하여 장막 궁전으로 함께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계단 아래서 왕을 뵙고 즉시 물러갔다. 임금은 유사에게 잉신 부부를 데려오도록 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노비들은 각기 한 방에 대여섯 명씩 들게 하라."
 
그리고 좋은 음료와 향이 좋은 술을 주고 무늬 있는 자리에서 재웠다. 또 의복과 보화를 주었고 많은 수의 군사에게 지키게 했다.
그래서 왕과 왕후가 함께 침전에 들게 되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陁國, 중인도中印度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해석해 왔으나 중국이나 태국이라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아요디아 [Ayodhya] 인도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주(州)에 있는 도시라는 설도 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그곳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 풍속이 아름다우며 백여 곳의 사찰에 3,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許氏)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금년 5월에 부왕과 왕후가 저를 보고 말하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똑같이 꿈속에서 상제(上帝)를 보았다. 상제께서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왕이 되게 한 신성한 사람으로,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짝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가락국으로 보내 수로왕의 짝이 되게 하라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난 후에도 상제의 말이 귀에 남아 있으니 너는 여기서 빨리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향해 가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신선이 먹는 대추(증조蒸棗, 찐대추-신선이 먹는 대추)를 구하고, 하늘로 가서 선계(仙界)의 복숭아(반도蟠桃, 신성한 복숭아)를 좇으며 반듯한 이마(진수螓首-아름다운 용모)를 갖추어 이제야 감히 임금의 얼굴(용안龍顔)을 뵙게 된 것입니다."
 

드라마 김수로에서 김수로왕과 허왕후/ⓒMBC드라마

 
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왕비를 맞이하자는 신하들의 간청을 구태여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당신이 몸소 내게 오셨으니, 못난 나에게는 다행이오."
 
드디어 혼인을 하고 이틀 밤을 지낸 뒤 또 하루 낮을 지냈다. 그러고는 마침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기 양식으로 쌀 열 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수로왕비릉(허왕후릉) 옆에 있는 파사석탑. 허왕후(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고 한다/ⓒ국립중앙박물관


 
8월1일에 왕은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부부도 모두 수레를 나란히 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외국의 갖가지 진기한 물건을 모두 싣고 천천히 돌아오니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게 하고, 잉신 부부와 노비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살게 했으며, 나머지 따라온 자들은 20여 칸의 빈관(賓館) 한 채에 사람 수를 정하여 나누어 살게 하고 일용품을 넉넉히 주었다. 또한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내고(內庫, 왕궁에 직속된 왕실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 또는 재정을 담당하던 관청)에 저장하여 왕후가 사철 쓰도록 했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영전/ⓒ전통문화포털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들은 모두 여러 벼슬아치의 우두머리인데, 그 지위와 이름이 모두 소인이나 농부의 호칭이지 결코 고관 직위의 호칭이라고는 할 수 없소. 혹시라도 나라 밖 사람들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마침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고치고,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으로 고쳤으며,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이란 명칭은 윗글자는 고치지 않고 아랫글자만 고쳐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했다. 또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쳤으며, 신귀(神鬼)는 음을 고치지 않고 훈만 고쳐 신귀(臣貴)로 했다. 계림의 직의(職儀)를 취해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周)의 제도와 한(漢)의 제도를 나누어 정했으니, 이는 옛것을 고쳐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해상왕국 가야 ❘ 특별전 《바다를 건넌 가야인》 전시 영상 中/ⓒ국립김해박물관

 
이에 수로왕은 국가를 다스리는 집을 정돈하여, 백성들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사는 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비유할 수 있었다. 그 공(功)은 도산씨(塗山氏)가 하(夏)나라를 보필하고(도산씨의 딸로 하나라 우 임금에게 시집가 도왔다. 도산은 우 임금이 제후들과 맹세한 땅이다.), 요임금의 딸들(당원唐媛, 요임금의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으로 순임금에게 시집 가 교씨의 시조가 되었다.)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해에 곰 얻는 꿈을 꾸어 징조가 있더니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년(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175세였다.
 

김해 수로왕비릉(허왕후릉)/ⓒ김해시청

 
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왕후가 가락국에 처음 와서 닿은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했으며, 붉은 깃발이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왕비를 따라온 잉신이던 천부경(泉府卿) 신보와 종정감(宗正監) 조광 등은 가락국에 도착한 지 30년 만에 각자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2년 뒤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밖의 하인들은 온 지 칠팔 년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오직 고국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지닌 채 고향을 향하고 죽으니, 살던 빈관이 텅 비어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매일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슬픔에 젖곤 하다가 24년이 지난 헌제(獻帝) 건안(建安, 중국 후한 헌제의 세 번째 연호) 4년 기묘년(199년) 3월 23일에 죽었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비통해했는데,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욱 심했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는 한 발(약 1.8미터)이고 둘레는 300보(약 360미터)로 하여 장사를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대를 이은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 구형(仇衡)까지 이 묘에 배향하고, 매년 맹춘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정결한 제사를 지냈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김해시청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김해시청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문무왕文武王) 용삭(龍朔, 661년에서 663년까지 사용한 당나라 고종의 연호) 원년 신유년(661년) 3월 어느날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왕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 삼국사기에는 노종奴宗으로 삼국유사에는 세종世宗으로 나오며, 이는 동일한 사람인 노종을 훈차訓借에 의해 세종으로 기록되었다고 본다.)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 졸지공卒支公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솔우공이 아닌 졸지공卒支公으로 보기도 한다.) 아들 잡간 서운(庶云)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원군은 나에게 바로 15대 시조다. 그 나라는 이미 망했으나 장례를 지내는 묘는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해라."
 

문무왕 영정/ⓒ전통문화포털

 


이에 사자를 옛터로 보내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을 공양 밑천으로 삼아 왕위전(王位田)이라 불렀으며 본토에 귀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인 급간 갱세(賡世)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제전(祭田)을 관리하며 해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과 밥, 다과 등 여러 가지 음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삿날도 거등왕이 정한 연중 다섯 날을 그대로 지켜 정성 어린 제사가 지금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년)에 편방(便房, 임시로 제사를 지내는 장소)을 설치한 후부터 구형왕 말까지 330년 동안에 종묘의 제사는 항상 변함이 없었는데,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용삭 원년 신유년(661년)까지의 60년(실제로는 구형왕 항복부터 문무왕 즉위년까지는 120년 차이가 있다.) 사이에는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간혹 거르기도 했다.

아! 아름답구나, 문무왕(文武王)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냈으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도다.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행하게 했으니.

경남 김해시 안동에 있는 초선대(招仙臺). 가락국의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七点山)의 선인(仙人)을 초대하여 거문고와 바둑으로 서로 즐겼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한국학중앙연구원


 
신라 말년에 잡간 충지(忠至)란 사람이 있었는데, 금관성(金官城)을 공격하여 빼앗아 성주장군(城主將軍, 신라 말에 지방 호족들이 그 지방을 점령하고 일컫던 칭호)이 되었다. 또 아간 영규(英規)라는 사람이 장군의 위엄을 빌려 종묘의 제사를 빼앗고 함부로 제사를 지냈다. 그가 단오날을 맞아 제사를 지내는데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 없이 무너져 깔려 죽고 말았다.
 
이에 성주장군이 혼잣말을 했다.
"다행히 전세의 인연으로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그러니 마땅히 내가 영정(影幀)을 그리고 향과 등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겠다."
 
그리고 석 자 크기의 교견(鮫絹, 남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비단)에 진영(眞影, 초상화)을 그려 벽에 모셔 두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경건하게 받들었다. 이렇게 한 지 사흘도 채 못 되어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바닥에 거의 한 말이나 흥건히 괴었다. 이에 장군은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받들어 사당으로 가서 불태운 다음 즉시 수로왕의 직계 자손 규림(圭林)을 불러 말했다.
"어제 불상사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나는가? 이는 정녕 내가 영정을 그려서 공양하는 것이 공손치 못하여 사당의 위령(威靈, 위엄이 있는 신령)이 진노한 것이다. 영규가 이미 죽었고 나도 매우 두려워 영정을 불태웠으니, 반드시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 자손이니 옛날 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겠다."
 
이리하여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는데 여든여덟 살이 되어 죽은 뒤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사당을 배알하는 단오일 제사에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미친 증세로 인해 사당에 와 간원이 차려 놓은 제수를 치우고 자기의 제수를 차려 제사 지냈다. 준필은 술잔을 세 번 올리는 일(삼헌三獻)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서 죽고 말았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이 말했다.
"분수 넘게 지내는 제사는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낳는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여규가 있었고 후에는 준필이 있었으니, 이들 부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또 사당 가운데 금옥이 많으니 도적들이 언젠가 와서 훔쳐가려 했다. 도적들이 사당에 처음 왔을 때,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는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 사면으로 비오듯 홀을 쏘아 도적 칠팔 명을 맞히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 도적들이 다시 왔을 때는 길이가 30여 자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팔구 명을 물어 죽였다. 이때 겨우 죽음을 면한 도적들은 모두 엎어지고 흩어졌다. 때문에 능원(陵園)의 안팎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지켜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야 철갑주/ⓒ국립중앙박물관

 
건안 4년 기묘년(199년)에 처음으로 이 사당을 세운 이후로 지금 임금이 즉위한 31년 대강(大康) 2년 병진년(1076년)까지 모두 878년이 되었으나, 쌓아 올린 깨끗한 흙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배열해 놓은 여러 옥조각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면 당나라 사람 신체부(辛替否)가 "예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으며, 허물어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오직 이 가락국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신체부의 말이 영험이 있는 것이지만, 수로왕의 사당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신체부의 말이 다 믿을 만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또 수로왕을 사모하여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29일이 되면 향토의 백성과 관리와 병사들이 승점(乘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은 동서쪽으로 바라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누어 망산도로부터 용맹한 말을 타고 육지로 다투어 달리고, 뱃머리를 둥실 띄워 서로 물에서 밀며 북쪽의 고포(古浦)를 향해 내달린다. 이는 대개 옛날 유천간, 신귀간 등이 허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급히 임금께 알렸던 유적이다.
 

가야 유물인 국보275호 기마인물형 뿔잔/ⓒ국립중앙박물관


가락국이 멸망한 후 대대로 이곳에 대한 칭호가 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661년~663년까지 사용한 당唐 고종의 연호) 원년 신사년(681년)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부르고 태수를 두었다. 그 후 259년이 지나 우리 태조가 통합한 후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설치하여 48년을 지냈다. 다음에는 임해군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여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27년을 지냈고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64년을 지냈다.
 
순화(淳化, 북송 태종의 연호며 고려 성종 2년이다.) 2년(991년)에 김해부의 양전사(量田史, 토지조사를 감독하고 통제하는 일을 하는 관리)인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이 조사하여 보고했다.
"수로왕릉에 딸려 있는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옛 제도 대로 15결로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 부역을 맡은 장정)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담당한 관서에게 그 장계를 전하니 조정에서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알을 내려 변해 성스러운 임금이 된 후, 수명이 길어 158세에 이르렀으니, 저 삼황(三皇) 이후 비견될 만한 사람이 없다. 죽은 후 선대로부터 능묘에 딸려 있던 전답을 지금 줄여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가 또 아뢰니,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겨 절반은 능묘에 두어 옮기지 않고 절반은 향리의 역정에게 주도록 했다. 절사(節使)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이에 반은 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에서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도록 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양전사는 매우 피곤했다. 어느날 저녁 꿈 속에서 갑자기 칠팔 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했다.
"네거 큰 죄를 지었으므로 베어 죽이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깨어났는데 이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쳤는데, 병이 조금도 낫지 않아 관문을 지나다가 죽었다. 그때문에 양전사는 양전도장(量田都帳)에 도장을 찍지 못했다.
 
이후에 봉사(奉使)하는 사람이 와서 그 전답을 조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일 뿐이고, 3결 87부 1속이 부족했다(결부제結負制라는 제도로 신라 이후부터 조선까지 활용한 토지파악 제도이며, 수확량을 기초로 토지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곡식 다발을 손으로 움켜쥔 1주먹(악握) 만큼 세(稅)로 낼 수 있는 토지를 1파(把)라고 하고, 10파를 1속(束)으로, 10속을 1부(負) 혹은 복(卜)으로, 100부를 1결(結)로 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로챈 것을 추적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서에 보고하고 왕명으로 다시 넉넉히 지급했으니 고금에 탄실할 일이다.
 
시조 수로왕(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부지런하게 다스리고 정성스럽게 도를 숭상했는데, 시조의 어머니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가(元嘉) 29년 임진년(452년)에 원군과 왕후가 합혼하던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 했으며, 사신을 보내 그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측량하여 삼보(三寶, 불자가 귀의해야 한다는 불보, 법보, 승보의 3가지를 가리키는 불교의 교리로서, 석가모니 자신이 불보이고,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이 법보이며, 부처의 제자로서의 비구, 비구니의 출가 교단이 승보이다.)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했다.
 

장유사/ⓒ김해시청

 
이 절이 생긴 지 500년이 지나자 장유사(長遊寺, 경상남도 김해시 불모산佛母山에 있는 삼국시대 승려 장유가 창건한 사찰)를 지었는데, 이 절에 바친 전시(田柴)가 모두 300결이었다. 그러자 장유사의 삼강(三剛, 절의 재정과 운영의 실무를 담당하는 세 가지 직책)은 왕후사가 장유사 시지(柴地)의 동남쪽 지경(일정한 테두리 안의 땅) 안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없애 전장(田莊)으로 만들고, 추수한 것을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세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를 아래에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렇다.
 

태초가 열리니 해와 달이 비로소 밝았고,
인륜은 비록 있었으나 임금의 자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방의 나라들은 서울을 나누었다.
신라가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은 뒤에 세워졌다.
세상을 다스릴 사람이 없으니 누가 백성을 돌보랴.
드디어 상제께서 저 창생을 돌보아 주셨다.
이에 부명(符命, 하늘이 제왕이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을 주어 특별히 정령을 보냈다.
산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아득한 듯하고 바깥도 컴컴했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것 같은데, 들으니 소리가 났다.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이레가 지난 후에야 한때 고요해졌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에서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내려오며 자색 끈 하나를 드리웠다.
다른 지방 낯선 땅에 집들은 잇달아 있었다.
구경꾼이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이 우글거렸다.
다섯 분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다.
같은 시각 같은 모습은 형제 같았다.
참으로 하늘이 덕인(德人)을 내어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천하가 맑아지려 했다.
화려한 제도는 옛 제도를 모방하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평했다.
온갖 정사에 힘쓰니 모든 정치가 시행되고, 기울지도 치우치치도 않으니 오직 정일(精一, 정세하고 한결같다.)했다.
길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농부는 밭갈이를 서로 양보했다.
사방에 사건이 없어 베개를 편히 받치고, 만백성이 태평을 맞이했다.
갑자기 햇볕에 드러나 풀잎 위의 이슬처럼 문득 대춘(大椿, 수명이 긴 참죽나무를 말하며, 오래사는 것을 뜻한다.)을 보전하지 못했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가 통곡했다.
금 같은 그 자취 빛나고 옥 같은 소리를 울렸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제사는 향기롭기만 했다.
세월은 비록 흘러갔으나 규범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다. 건안 4년 기묘년(199년) 3월13일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가평(嘉平, 중국 위魏나라 왕 조방曺芳의 연호로 249년~254년까지 사용했다.) 5년 계유년(253년) 9월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렇게 말했다.
"성은 김씨(金氏)라고 하니, 아마도 가야국의 세조가 금빛 알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으로 성을 삼았을 뿐이다."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가평 5년 계유년(253년)에 즉위해 39년을 다스리고 영평(永平) 원년 신해년(291년) 1월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로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평 원년에 즉위하여 56년을 다스리고, 영화(永和) 2년 병오년(346년) 7월8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간 아궁(阿躬)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다. 영화 2년에 즉위하여 62년을 다스리고, 의희(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 사마덕종司馬德宗의 연호로 419년~420년까지 사용했다.) 3년 정미년(407년) 4월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의 딸인 정신(貞信)이며,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407년)에 즉위하여 용녀(傭女)와 결혼한 후 외척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여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계림이 꾀를 써서 가락국을 정벌하고자 했다. 가락국의 신하 박원도(朴元道)가 좌지왕에게 간했다.
"이런 일은 유초(遺草)를 깎고 깎아도 또한 털이 나는 법이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인들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복사(卜士)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에 '소인을 없애면 군자인 벗이 와서 도울 것이다.'라고 했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펴보십시오."
왕이 "옳다."라고 사례하고는 용녀를 내쳐 하산도(荷山島)로 귀양 보내고 정치를 고쳐 오랫동안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15년 동안 다스리고 영초(永初, 송宋나라 무제武帝 유유劉裕의 연호로 420년~422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유년(421년) 5월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초 2년에 즉위하여 31년 동안 다스리고 원가(元嘉, 송宋나라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연호로 424년~453년까지 사용했다.) 28년 신묘년(451년) 2월3일에 죽었다. 왕비는 각간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에 즉위했으며 이듬해 세조와 허황옥(許黃玉) 황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처음 세조와 왕후가 결혼하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전답 10결을 내어 보탰다. 42년 동안 다스리고 영명(永明,남조 제齊나라 무제武帝 소색蕭賾의 연호로 483년~493년까지 사용했다.) 10년 임신년(492년) 10월4일에 죽었다. 왕비는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 10년에 즉위하여 30년을 다스리고 정광(正光,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 원후元詡의 연호로 520년~525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축년 (521년) 4월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의 딸 숙(淑)이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김씨다. 정광 2년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렸다. 보정(保定, 북조北朝 북주北周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의 연호로 561년~565년까지 사용했다.) 2년 임오년(562년)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자 왕이 직접 군졸을 거느리고 싸웠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항하여 사울 수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신라에 들어가 항복했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각(世宗角干)이고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이며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말했다.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양梁나라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연호로 529년~534년까지 사용했다.) 4년 임자년 (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과 구형왕비(신라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와 증조모)/ⓒ전통문화포털

 

경남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이라고 전하는 '산청 전 가야 구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 임자년에 땅을 신라에 바치고 항복했다고 했다. 그러기에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 임인년(42년)에서 구형왕 말 임자년(532년)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땅을 바친 것이 위(魏)나라 보정(保定) 2년 임오년 (562년)이 되므로 30년이 더 있게 되니 모두 520년이 되는데, 지금 두 가지 설을 다 기록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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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복원도/ⓒ경주문화관광

 

경주 황룡사지/ⓒ경주문화관광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년(636년)에 자장법사가 서쪽(당나라)으로 유학을 갔는데, 바로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감화되어 불법을 전수받았다.

자장법사/ⓒ경주시

 
문수보살은 자장법사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 왕은 천축 찰리종(刹利種, 고대 인도에서 네 계급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크샤트리아를 말한다)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 불교 이치를 깨달은 이에게 주는 본인의 미래에 관한 기록)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 황하 문명을 중심으로 하고 동서남북 사방의 변방을 하급의 문화로 폄하하는 데서 나온 관념으로 산동성 제나라도 동이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공공(共工, 중국 요순 시대에 흉포하기로 이름난 종족으로 중국 강회江淮 지방에 살았다)의 종족과는 다르다.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 사교(邪敎, 건전하지 못하고 그릇된 종교)를 믿어 때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법문(法文, 불경의 글)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승려들이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모든 백성이 평화롭다."
말을 마치자 문수보살은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법사는 이것이 보살의 변화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그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둑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나타나 물었다.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보리(提, 보디bodhi의 음역으로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불타 정각正覺의 지혜, 즉 불타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그에게 절하고서 다시 물었다.
"너희 나라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는 말갈과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왜와 이어져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가며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입이 잦으니, 이것이 백성의 고통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거라."
 
자장법사가 물었다.
"고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해야 이롭겠습니까?"
 
신령한 사람이 말했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 불교 또는 불법을 보호하거나 옹호하는 용)은 바로 내 큰아들인데, 범왕(梵王, 범천왕梵天王의 준말로 인도 바라문교婆羅門敎-힌두교의 기본 배경이 되며 불교에도 영향을 미친 인도의 원시종교-의 최고 신이다)의 명령을 받고 가서 절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九韓)가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 호국 사상에서 생겨난 팔관회는 우리나라의 고유 민속과 불교가 접목된 것으로 윤등을 설치하고 향등을 달아 밤새도록 광명과 향기가 가득하도록 연화대를 설치해 가무를 즐기는 축제로 신라시대에 시작되어 고려 시대에 가장 많이 개최되었던 불교 의례다)를 열고 죄인을 풀어 주면 밖의 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 서울 남쪽 언덕에 정사를 하나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어 주면 나 역시 덕을 갚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신령한 사람은 자장법사에게 옥()을 바치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사중기寺中記>에는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의 처소에 탑을 세워야 할 이유를 들었다고 했다.
 
정관 17년 계모년(643년)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내려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와 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권했다.

선덕여왕과 신하들/ⓒ경주시(천년 왕국의 부활 中)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자 신하들이 말했다.
"백제에 부탁해 공장(工匠, 장인 중에서 국가의 직역 체제 아래에 편재된 장인층의 장인)을 데려와야 가능합니다."
선덕왕은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공장을 청하게 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재목과 돌을 다듬고, 이간(伊干, 신라 17관등의 제2등으로 잡찬의 위이다)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라고 하며,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다)이 수하 공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처음 이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는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꿈꾸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심이 되어 손을 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사방으 컴캄해지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공장은 뉘우치고 탑을 완성했다.

황룡사 9층목탑/ⓒ경주시(천년 왕국의 부활 中)

 
<찰주기刹柱記>에 이렇게 말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근자, 그 이하는 183자다(약 66미터 정도 되며, 21미터의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의 세 배다)."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백 개를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戒壇, 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으로 대승 계단과 소승 계단으로 나뉜다) 및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셔, 못에 있는 용의 청원을 들어주었다.-대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이며 역시 자장법사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이후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 고구려 왕이 장차 신라를 정벌하고자 계책을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가?"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구려 왕은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나라에 구정(九鼎, 중국 하나라 우임금 때 전국의 쇠를 모아 만든 아홉 주州를 상징하는 솥)이 있어서 초()나라 사람들이 감히 북쪽(주나라)을 엿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귀신이 받치는 힘으로 수도 장안을 누르니,
휘황찬란한 금벽색이 기왓장을 움직이네.
올라가 굽어 보니 어찌 구한(九韓)만 복종하랴.
천하가 특히 태평함을 비로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 명현(名賢) 안흥(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 제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략했다. 대궐 남쪽 황룔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 나라의 침략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왜(倭, 일본), 2층은 중화(中華,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로 추정), 3층은 오월(吳越,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로 추정), 4층은 탁라(托羅, 탐라국), 5층은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여진족), 9층은 예맥(穢貊, 고구려로 추정)을 억누른다."

황룡사역사박물관 전시모형

 
또 <국사>와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계유년(553년)에 절을 세운 뒤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년(645년)에 탑을 처음 세웠다. 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7년 성력(聖曆,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 원년 무술련(698년) 6월에 벼락을 맞았다.-<사중고기>에 성덕왕(聖德王) 때라고 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제33대 성덕왕 경신년(720년)에 다시 지었고, 제48대 경문왕(景文王) 무자년(868년)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같은 시대에 세 번째로 다시 지었다. 고려 광종(光宗) 즉위 5년 계축년(953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顯宗) 13년 신유년에 네 번째로 다시 지었다. 또 정종(靖宗) 2년 을해년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아 문종(文宗) 갑진년(1064년)에 다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헌종(獻宗) 말년 을해년(1095년)에 여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고종 16년 무술년(1238년) 겨울에 몽골이 침입하여 탑과 절, 장륙존상과 전각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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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1907년 광화문 앞 풍경(국립민속박물관)
1907년 창덕궁 존덕정에서 영친왕과 일행(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황제를 모시고 조선 서북순행 길에 올랐을 때 찍은 사진(국립고궁박물관)
1909년 순종 서북순행 사진(국립고궁박물관)
1909년 순종 서북순행 사진(국립고궁박물관)
1909년 순종 서북순행 사진(국립고궁박물관)
1909년 순종 서북순행 사진(국립고궁박물관)
1909년 순종 서북순행 사진(국립고궁박물관)
1913~1915년쯤 찍은 것으로 추정. 왼쪽부터 의친왕 이강, 순종, 덕혜옹주, 영친왕 이은, 고종, 순종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씨,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대한제국 황실은 경술국치 뒤 일본으로부터 이왕가로 책봉받아 식민지 기간 동안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서울역사박물관)
1918년 영친왕의 조선 방문 당시 황실 가족과 총독부 관료들이 연회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영친왕, 고종, 순종(서울신문 DB)

 

고종(왼쪽)과 영친왕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함께 찍은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의 어머니, 고종황제의 후궁 순헌황귀비(국립고궁박물관)
덕혜옹주의 어머니, 고종의 후궁 귀인양씨(국립고궁박물관)
고종황제(국립고궁박물관)

 

고종황제 어진(국립고궁박물관)
고종황제와 신하들(시사오늘)
1918년 군복차림의 영친왕(광복회미서북부지회)
남여를타고 석조전으로 향하는 고종황제(광복회미서북부지회)
대한문 앞에 모인사람들(서울대박물관)
대한제국 황실 양악대(장애인뉴스)
덕수궁 석조전 중앙홀에서 기념 촬영하는 영친왕(앞줄왼쪽에서네번째)(문화재청)
영친왕이 기념 촬영을 했던 덕수궁 석조전 중앙홀이 복원된 모습(문화재청)
덕혜옹주(국립고궁박물관)
덕혜옹주(뉴시스)

 

덕혜옹주와 의친왕(경북신문)
도자기에 휘호하는 영친왕(광복회미서북부지회)
사진기로 창경원 하마를 촬영하는 영친왕(광복회미서북부지회)
상중의 이건(뉴시스)
순종황제어차와 순종효황후어차. 순종황제와 순종효황후(국립고궁박물관)
순종황제어차(국립고궁박물관)
순종황제어차(국립고궁박물관)
순종황제어차(국립고궁박물관)
순종황제 장례식(광복회미서북부지회)
순종황제 장례식(광복회미서북부지회)
순종황제 장례식(광복회미서북부지회)
순종황제 장례식(광복회미서북부지회)

 

영친왕과 사무관 고희경(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비와 아들 이구(국립중앙박물관)
영친왕의 아들 이구와 일행(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의 아들 이구와 줄리아 리(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의 아들 이구와 줄리아리(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국립고궁박물관)
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고 있는 사무관(광복회미서북부지회)
운현궁 양관(뉴시스)
의친왕(고종의 다섯 째 아들)의 자손들(서울시)
의친왕의 둘 째 딸 이해원 옹주 결혼식 때 모습(대한제국황족회)
의친왕의 차남 흥영군 이우(국립고궁박물관)
의친왕 이강(세종대왕신문)
의친왕 이강(국립고궁박물관)
의친왕 이강의 장남 이건(국립고궁박물관)
의친왕 이강의 장남 이건(국립고궁박물관)
의친왕 이강의 장남 이건과 일본인 부인(국립고궁박물관)
의친왕 이강의 장남 이건과 일본인 부인(국립고궁박물관)
이구와 줄리아 리 일행(국립고궁박물관)
이승만 대통령이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광복회미서북부지회)
흥영군 이우왕자와 박찬주 공비
일본 오사카에서 육군 사단장으로 복무하던 시절의 영친왕과 오른쪽으로 아들 이구와 영친왕비(국립고궁박물관)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제주일보)
좌측부터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년), 순종(純宗, 1874~1926년),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년), 영친왕(英親王 李垠, 1897~1970년), 고종(高宗, 1852~1919년),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1966년), 의친왕 비 덕인당 김씨(德仁堂 金氏, 1880~1964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李鍵, 1909~1990년)(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상궁들과 기모노 복장의 일본 여인(광복회미서북부지회)
창덕궁 인정전 앞 순종과 관료들(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인정전 앞 순종과 관료들(국립고궁박물관)
홍릉 입구의 홍살문. 홍릉에 배치된 3조의 홍살문 중 하나로 현재 전하지 않는 문이다(광복회미서북부지회)
훈련원에 마련된 고종황제 장례식장(서울대박물관)
훈련 중인 대한제국 군대(매일신문)
흥선대원군 노년 모습(국립현대미술관)
흥영군 이우 왕자와 박찬주 공비 그리고 두아들(국립고궁박물관)
황실가족(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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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통령, 제3대 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에 쏠린 민의(1952년)/ⓒ문화체육관광부
후보자의 대형 초상화를 든 거리유세(1952년)/ⓒ문화체육관광부
함태영 부통령 제3대 민의원 총선거 투표(1954년)/ⓒ문화체육관광부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한 후보자의 선거사무소 전경(1954년)/ⓒ문화체육관광부
당시 주요 홍보수단이었던 지프로 제3대 민의원 선거를 홍보 중인 지프(1954년)/ⓒ문화체육관광부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선거 홍보물/ⓒ문화체육관광부
정·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장면 후보의 선거 홍보물(1956년)/ⓒ문화체육관광부
이승만·이기붕 후보 유세차량(1956년)/ⓒ문화체육관광부
벽에 나붙은 각종 홍보물(1956년)/ⓒ문화체육관광부
5·15 정·부통령 선거를 알리는 후보자 벽보를 붙이고 있는 장면(1956년)/ⓒ문화체육관광부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1956년)/ⓒ문화체육관광부

 

정·부통령선거 개표(1956년)/ⓒ문화체육관광부
정ㆍ부통령 선거 개표 속보판(1956년)/ⓒ문화체육관광부
민의원 제4대 국회 정·부의장 선거 개표 상황(1958년)/ⓒ문화체육관광부
개봉되는 제4대 정부통령 선거 투표함(1960년)/ⓒ문화체육관광부
1960년 제 4대 대통령 선거,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투표하는 장면(1960년)/ⓒ문화체육관광부
게시판을 통해 실황중계 중인 민의원 선거 개표 결과(1960년)/ⓒ문화체육관광부
베트남파견 비둘기부대 경비중대 대통령 선거 투표(1967년)/ⓒ문화체육관광부
윤보선 대통령 후보와 공덕귀 여사 내외 5ㆍ3 대통령 선거 투표(1967년)/ⓒ문화체육관광부
박정희 대통령 후보와 육영수 여사 내외 5ㆍ3 대통령 선거 투표(1967년)/ⓒ문화체육관광부
박정희 대통령 제7대 대통령선거 청주 유세(1971년)/ⓒ문화체육관광부
박정희 대통령 제7대 대통령선거 서울 유세(1971년 장충동)/ⓒ문화체육관광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대통령 선거(1972년)/ⓒ문화체육관광부
정주영 회장 제12대 대통령 선거 투표(1981년)/ⓒ문화체육관광부
정주영 회장 제12대 대통령 선거 투표(1981년)/ⓒ문화체육관광부
정주영 회장 제12대 대통령 선거 투표(1981년)/ⓒ문화체육관광부
남덕우 국무총리 제11대 국회의원선거 개표 상황실 방문(1981년)/ⓒ문화체육관광부
남덕우 국무총리 제11대 국회의원선거 개표 상황실 방문(1981년)/ⓒ문화체육관광부
남덕우 국무총리 제11대 국회의원선거 개표 상황실 방문(1981년)/ⓒ문화체육관광부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유세(1987년)/ⓒ문화체육관광부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유세(1987년)/ⓒ문화체육관광부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유세(1987년)/ⓒ문화체육관광부
노태우 대통령 13대 대통령 선거유세 장면 사진(1989년)/ⓒ문화체육관광부
노태우 대통령 13대 대통령 선거유세 장면 사진(1989년)/ⓒ문화체육관광부
노태우 대통령 13대 대통령 선거유세 장면 사진(1989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재자 투표, 해군 장병 함상투표(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재자 투표, 해군 장병 함상투표(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재자 투표, 해군 장병 함상투표(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선거 유세(1992년 김영삼)/ⓒ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선거 유세(1992년 김영삼)/ⓒ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선거 유세(1992년 김영삼)/ⓒ문화체육관광부
서울 효자동의 정부합동 공명선거관리 상황실(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의 선거 벽보(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제14대 대통령선거 개표상황(1992년)/ⓒ문화체육관광부
조순 서울시 시장 후보, 서울 시민들(1995년)/ⓒ문화체육관광부
제15대 국회의원선거 합동 연설회(1996년)/ⓒ문화체육관광부
제15대 대통령선거 스케치(1997년)/ⓒ문화체육관광부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제15대 대통령선거 거리 연설회(1997년)/ⓒ문화체육관광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벽보(2000년)/ⓒ문화체육관광부
제16대 대통령 선거 유세(이회창, 노무현)(2002년)/ⓒ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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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상차림/ⓒ한국강사신문

 
 
가례는 가가례(家家禮)라는 말처럼 각 집안마다 그 형식이나 내용이 조금씩 다른데, 그중에서도 특히 제례(祭禮), 즉 조상제사가 그러하다. 즉, 조상 제사는 마치 시험의 정답과 같이 고정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만 유사할뿐 집집마다 그 형식이나 내용이 세부적으로 각기 다 다르다.
제사의 종류를 보면 그 시기에 따라 시제(時祭), 삭망차례(朔望茶禮), 속절차례(俗節茶禮), 천신차례(薦新茶禮), 이제(禰祭), 기제(忌祭)가 있다.
 
 

조상제사의 종류

 

시제(時祭)

시제는 시향(時享)이라고도 하며, 본래 사계절 철마다 4대 이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뜻하는 말인데,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기제범위를 벗어난 5대조 이상의 직계조상 묘소에서 지내는 세일제(歲一祭, 일 년에 한 번 음력 10월 묘소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뜻)를 뜻하게 되었다.
 

차례(茶禮)

차례는 차사(茶祀)라고도 하며, 원래는 음력으로 다달이 초하루, 보름, 생신에 간단히 낮에 지내는 제사이나 이것도 설,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 명절에 지내는 속절제나 천신제의 제사방식이 되었다.
 

이제(禰祭)

고비(考妣), 즉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제사인 이제는 음력 9월 중에 날을 택하여 지낸다고 하였으나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기제(忌祭)

기제는 고조(高祖) 이하의 조상을 대상으로 돌아가신 날 새벽에 지내는 제사이다.
 
 
상중(喪中)에 지내는 제사로는 우제(虞祭), 소상(小祥), 대상(大祥), 담제(禫祭)가 있다. 담제는 초상(初喪)으로부터 27개월 만에, 즉 만 2년 후에 대상(大祥)을 치른 그 다음다음 달 하순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낸다.
 
또, 제사는 모시는 장소에 따라 사당에서 지내는 사당제(祠堂祭) 또는 묘제(廟祭)와 산소에서 지내는 묘제(墓祭)가 있다. 사당제로는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례와 혼례 등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 사당에 고하는 고유제(告由祭) 또는 고사례(告事禮)가 있다. 신주를 옮길 때도 제사를 지낸다. 신주가 사당을 나갈 때는 이안제(移安祭), 돌아오면 환안제(還安祭)를 한다.
묘에서는 집안에서 지내는 것처럼 상석에 제사음식을 갖추고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간단히 주과포(酒果脯, 술 과일 포)만 놓고 절만 두 번 올리는 식으로 지내기도 한다.
 
 

제사상 차리는 방법

 
제수(祭需)를 제사상에 진설(陳設)하는 방법은 지역, 당색, 집안에 따라 각기 다르다. 신위를 기준으로 1렬은 국, 2열은 적과 전, 3렬은 탕, 4열은 포와 나물, 5열은 과일 및 과자류 순으로 놓은다. 참사자(參祀者), 즉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할 때는 맨 앞줄이 과일을 놓는 줄이다. 과일을 놓는 순서는 대략 세 가지, 즉 조율이시(棗栗梨柹), 조율시이(棗栗枾梨), 홍동백서(紅東白西)의 기준으로 대추, 밤, 감, 배 등과 생과를 놓는데, 앞의 둘은 참사자 기준으로 왼쪽부터 진행하여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반면 홍동백서의 기주에서는 오른쪽부터 조(棗), 시(枾), 조과(造果), 이(梨), 율(栗)의 순서로 왼쪽으로 나간다. 둘째 줄에는 포와 해를 진설하는데, 좌포우해(左脯右醢)로 놓는다. 이때 영남지방의 남인(南人)집안처럼 좌우의 기준을 참사자가 아니라 신위(神位)로 삼는 경우는 좌해우포(左醢右脯)가 된다. 또 적줄과 탕줄도 집안이나 당색에 따라 달라 소론집안에서는 내탕외적(內湯外炙), 즉 2열에 탕을 놓는다.
 

제사상차림/ⓒ서울시설공단

 
 
신위는 사당이나 벽감(壁龕)에 신주를 모시고 있는 경우에는 신주로, 그렇지 않을 때는 지방(紙榜)을 써서 모신다.
 

지방 쓰는 법/ⓒ매일경제

 
 

제사 지내는 방법

 
다음은 대강의 기제절차이다.
세세한 방식은 앞서 언급한 대로 집안마다 조금씩 다르다.
 
1. 제사는 영신(迎神)에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대문을 열어 놓는다. 제상의 뒤쪽을 북쪽으로 삼아 병풍을 치고 제수(祭需)를 진설한다. 지방을 써 붙이거나 사당에서 신주를 모시고 오는 출주(出主)의식을 행한다.
 
2. 강신(降神)은 조상의 혼(魂)과 백(魄)을 부르는 의식이다. 하늘의 혼을 부르기 위해 제주(祭主)가 신위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향로에 분향(焚香)을 하고 지하의 백을 부르기 위해 모사(茅沙)그릇에 술을 조금씩 세 번 붓는 뇌주(酹酒)를 한다.
 
3. 참신(參神)은 조상의 신위에 인사하는 절차로, 모든 참사자가 일제히 두 번 절한다. 신주인 경우에는 참신을 먼저 하고, 지방인 경우에는 강신을 먼저 한다. 미리 제찬을 진설하지 않고, 참신 다음에는 진찬(進饌)이라 하여 제찬을 올린다.
 
4. 초헌(初獻)은 제주가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독축(讀祝)은 초헌이 끝나고 참사자가 모두 꿇어앉은 상태에서 축관이 제주 왼쪽에 앉아서 축문을 읽는 절차이다. 아헌(亞獻)은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으로, 원래는 주부가 올린다. 종헌(終獻)은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잔을 채우지 않고 7부쯤 부어서 올린다.
 
5. 유식은(侑食)은 조상신에게 식사를 권유하는 절차이다. 잔에 술을 가득 따르는 첨잔(添盞) 혹은 첨작(添酌)을 한 후 숟가락을 밥그릇 한가운데의 오목한 부분이 동쪽을 향하게 꽂고 젓가락을 바르게 놓는다. 합문(闔門, 방문을 닫고 방 밖으로 나가서 밖에서 3~4분 기다리거나, 제상 앞에 모두 엎드려 일정 시간 기다린다)과 계문(啓門, 닫았던 방문을 다시 여는 것, 엎드려 기다린 경우 다시 일어선다) 후 진다(進茶), 즉 차를 올리는데, 숭늉을 쓴다(이때, 국그릇을 비우고 그 그릇 그대로 물을 받아 원래 국이 있던 자리에 두고 밥그릇에 꽂았던 숟가락을 이용해 밥을 조금씩 세번 떠서 물그릇에 옮기는 것으로 숭늉을 대신하기도 한다).
 
6. 사신(辭神)은 신을 보내는 절차로, 참사자 전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일제히 두 번 절한다. 신주를 모신 경우에는 사당으로 가서 납주(納主)하고, 지방을 쓴 경우에는 분축(焚祝) 때 함께 태운다. 음식을 치우고 제상을 정리하는 일을 철(徹)이라고 한다.
기제 때는 제사에 쓴 음식을 여러 친지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준(餕) 절차는 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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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냉장고나 세탁기 건조기 같은 가전들 모두 색상을 특화시킨 제품들이 많이 팔리고 있죠?
그러고 보니 하얀색 냉장고나 세탁기를 본 지가 꽤 오래된 것 같기도 하네요ㅎㅎ

 
이제는 정수기도 그 길을 따라가는 것 같아요.
정수기의 경우는 지금도 주로 하얀색이 많기는 하지만
코웨이 아이콘 정수기 색상이 알록달록 변하더니 드디어 과감하게 색을 입히고 색상 변경까지 가능한 디자인의 정수기가 출시되었네요.
바로 현대렌탈케어 큐밍 브랜드에서 출시한 '딜라이트 정수기'인데요,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색상을 조합하는 가전의 트렌드처럼 하나의 정수기 색상을 요리조리 조합하면 12가지 색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독특한 정수기에요.
 

12가지 색상 조합??

 
12가지 색상 조합 방법은 기본 바탕이 되는 일명 정수기 헤드 색상이라고 하는 색상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고, 몸통이 되는 부분 즉, 바디 색상 4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서 서로 조합하는 방식인데요,
이렇게 하면 서로 다른 색상의 정수기가 12종이 나오게 되죠.
색상 조합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답니다.
 
 

12가지 컬러 조합 방법

 
1. 헤드 색상을 선택하세요!
3가지 색상 버터 옐로우 / 세이지 그린 / 프로스트 그레이 中 택1
헤드 색상이란 정수기 상단에 메뉴판을 이루는 색상을 말합니다.
 
2. 바디 패널 색상을 선택하면 끝!
4가지 색상 버터 옐로우 / 세이지 그린 / 프로스트 그레이 / 미드나잇 블루
바디 패널 색상은 정수기 몸통을 이루는 부분의 색상으로
 
이렇게 색상을 조합하면 독특한 나만의 정수기 디자인이 만들어진답니다!
 

헤드 칼라 세이지 그린 + 바디 칼라 4종 적용

 

헤드 칼라 프로스트 그레이 + 바디 칼라 4종 적용

 

헤드 칼라 버터 옐로우 + 바디 칼라 4종 적용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떤가요?
물론 디자인의 특성상 취향에 따로 호불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최근까지 출시되었던 정수기들에 비해 독특해서 눈에 확~! 띄었답니다.^^

 
바디 패널의 경우 사용하면서 바꾸는 것도 가능한데, 당연히 유상으로 구입이 되겠죠?
이벤트 내용에서 3종을 무상으로 주는 혜택가가 15만원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 바디를 한 번 바꾸는데 5만원 정도가 소요되지 않을까 추측되는 부분이에요.
※이 부분은 아래 기타 특장점에도 나오지만 렌탈로 이용하는 경우 2년에 1회 무상 교체가 이루어 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현재 출시기념 행사로 바디 패널 3종을 무상으로 준다고 하니 필요하신 분들은 함께 참고해 보셔요~!
 
행사기간
24.3.18~24.3.23

 
그런데 아직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이벤트 기간이 너무 짧다는 느낌..!

 
아무튼 마지막으로 정수기라는 카테고리에서는 디자인 못지않게
특히 중요한 정수 기능과 위생과 관련된 기능들 그리고 사이즈에 대해서는 아래 내용을 참고해 보셔요~!

 

필터 시스템

 
1단계
01. 프리카본(물 맛 향상)
02. pH 유지, 미네랄 용출
 
2단계
01. 복합 나노 트랩 필터(부유물 및 녹찌꺼기 제거)
02. 양전하막(노로바이러스 및 세균 제거)
03. 포스트카본(미세입자와 악취제거)
04. 실리카볼(물 맛 향상 및 미네랄 공급)
 
 

관리방법 선택

4개월 방문 관리/셀프관리 선택
※셀프관리 선택 시, 4개월마다 셀프키트 택배 배송 및 12개월마다 케어매니저 방문 점검
 
 

기타 특장점

2년 주기 바디 색상 무료 교체 서비스 제공
 

출수구 파우셋 모듈 전면 교체, 파우셋 UV 살균
24시간마다 유로 자동 클린
 

4단계 온수 조절
45℃/75℃/85 ℃ /100 ℃ 초고온수
 

모든 기능 음성 안내 기능
3단계 음량 크기 조절 및 무음모드 가능
 
 

딜라이트 정수기 SPEC

 
모델명 : HQPS11C/20E/G0E/Y0E
종류 : 나노필터 직수형 정수기 냉온정수형
제품크기 : 150X379X394mm
제품중량 : 약 8.0kg
유효정수량 : 1,500L
온수온도 : 45도씨/75도씨/85도씨/100도씨
정량추출 : 800mL/120mL/230mL/550mL/1L/연속출수(2L)
에너지소비효율등급 : 1등급
 
 
 
[내용 출처 : 현대렌탈케어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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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진덕여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은 즉위하자 직접 태평가(太平歌, 진덕여왕이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은 사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5 '진덕왕 조'에 실려 있는데, 당나라 고종은 이것을 읽고 법민을 대부경大府卿으로 임명해 돌려보냈다고 한다.)를 짓고 비단 무늬를 짜서 사신('삼국사기'에는 진덕왕 4년에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사신으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을 시켜 당나라에 바치게 했다.

어떤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요청하자, 당 태종이 가상히 여겨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현경(顯慶,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로 656년에서 661년까지 사용했다.)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제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은 태종 시대가 아니라 바로 고종(高宗) 시대다. 소정방이 온 것이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에 무늬를 짠 것이 군사를 청할 때가 아님은 확실하므로 진덕여왕 때가 맞다. 아마도 김흠순(金欽純)의 석방을 요청할 때였을 것이다.

당나라 황제는 이 점을 가상하게 여겨 진덕여왕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권5) 치당태평송/ⓒ한국학중앙연구원

 

위대한 당나라가 큰 왕업을 여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획 창성하여라.
전쟁이 그치니 위엄이 정해지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임금을 잇는다.
하늘을 통솔하닌 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빛을 머금는다.
깊은 인(仁)은 해와 달을 짝할 만하고
운수가 요순 시대와 같다.
펄럭이는 깃발은 어찌 그토록 빛나며
울리는 북소리는 어찌 그리도 장엄한가.
나라 밖의 오랑캐로 명을 거스른 자는
칼날에 엎어져 죽임을 당하리라.
순수한 풍속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 고루어리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
사계절은 옥촉(玉燭, 사계절의 기후가 조화를 이룬 것이니 태평한 시대를 말한다.)처럼 화합하고
일월과 오행(七曜, 하늘에 보이는 별 중 육안으로 관찰되고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별을 오행과 대응시킨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과 태양 달을 합친 7개의 천체를 말하며 칠요성이라고도 한다.)은 만방을 순행한다.
산의 신령은 보필할 재보(宰輔, '시경詩經-대아大雅' 숭고崧高의 '유악강신維嶽降神:큰 산의 산신령이 내려와  생보급신生甫及申:보씨와 신씨를 낳으셨도다'를 인용한 것으로 보후甫候와 신백申伯 두 사람으로 국가의 동량 즉, 기둥과 들보가 되는 신하를 가리킨다.)를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진실된 사람을 임명하였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이룬 한결같은 덕이
우리 당나라 황실을 비추리라.

 
진덕왕 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어 남산 우지암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그때 몸집이 큰 호랑이가 그 자리로 달려들자 공들이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며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던져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아 상석에 앉았지만, 공들은 모두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

 

진덕여왕 때 일화/출처 : https://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6/2009052601483_6.html


신라에는 신령스러운 땅이 네 군데 있었다. 큰일을 의논할 때마다 대신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 의논했고, 그렇게 하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졌다.
신령스러운 땅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진덕왕 대에 처음으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조례(正旦禮,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진덕왕 즉위 5년의 일이다.)를 행했고, 처음으로 시랑(侍郞)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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