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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 도깨비 문양 벽돌)은 충청남도 부여군 외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8종의 백제시대 무늬 벽돌 중 하나로써, 연화대(蓮花臺, 연꽃 모양으로 만든 불상의 자리) 위에 정면으로 서 있는 도깨비 형상이 새겨져 있으며, 약간 연질로 구워진 것이 특징이다. 대각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것 처럼 몸의 크기에 비해 머리 부분이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벌거벗은 상태에서 허리에는 과대(銙帶)가 둘러져 있는데 대금구(帶金句, 띠꾸미개, 금속제 허리띠)와 대선금구(帶先金具, 띠고리의 반대쪽 끝에 달린 장식)가 잘 표현 되어 있다.

크게 부릅뜬 눈과 정면을 향해 포효하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데, 덥수룩한 수염과 양어깨에 휘날리는 갈퀴, 그리고 양손과 발도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문양전의 성격이나 제작기법은 대체로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남조시대의 유물 중 동진(東晉) 영화4년(永和四年, 348)의 명문(銘文)이 있는 중국 난징(南京) 출토 전과 신녕전와창제1호묘(新寧塼瓦廠第一號墓)의 와전(瓦塼)과 매우 깊은 관련을 보여 준다.

 

반대로 일본의 나라(奈良) 난호케사(南法華寺)에 소장되어 있는 벽전(壁塼)과 오카사(岡寺) 출토 봉황문전(白鳳時代, 1변 39㎝, 두께 8.8㎝) 등은 백제 문화와 관련되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 준다.

 

[함께 보기 : 산수귀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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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국립중앙박물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국립중앙박물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국립중앙박물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혼천의(渾天儀)는 전통적으로 가장 중시되어 온 천문의기(天文儀器)의 하나로 일명 혼의(渾儀), 혼의기(渾儀器),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우주론인 혼천설(渾天說, 하늘이 땅을 둘러싸고 있어 마치 새알의 껍질이 노른자위를 싸고 있는 것과 같다고 믿는 우주관)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천체 관측 기구이며 서기전 2세기경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에 예문관제학 정인지, 대제학 정초 등이 왕명을 받아 고전을 조사하여, 중추원사 이천, 호군 장영실 등이 1433년 6월에 최초로 제작한 것으로 나온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나무 혼천의가 원형 고리를 대나무로 제작한 것에 비해 본 혼천의는 원형의 고리를 포함 모두 목제로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십자형 받친대 밑면에 "制氶 辛未 十二月 十一 日" 이라는 묵서(墨書)가 있어 이 묵서를 근거로 본 혼천의가 1871(고종 8)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교육적 효과를 얻기 위해 28수 별자리 배열을 강조하는 등 실제 천체관측을 위해 사용한 혼천의와는 구성이 다르며, 별자리와 방위까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관측보다는 교육을 위한 기자재로 제작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는 구조는 세겹의 동심구면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바깥층에서 중심으로 지평환(地平環), 자오환(子午環), 적도환(赤道環) 등 세 개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평환은 지평에 평행하며 천구를 상하로 나누고, 자오환은 천구자오선과 일치하는 대원(大圓)을 이루고, 천구북극, 천정, 천구남극 등이 이 대원상에 있어 지평환과는 지평에서 직각으로 만난다. 적도환은 천구적도와 일치하는 환으로서 자오선과는 직교하나 지평환과는 엇비슷하게 만난다.

 

이들 세 개의 환이 교착되어 그곳에서의 천구를 알 수 있고, 천구의 상하와 사방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하여 이 환들을 육합의(六合儀)라고 한다. 가운데 층은 황도환(黃道環)과 백도환(白道環)으로 구성되어,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가운데 층을 삼진의(三辰儀)라 하는데 여기서 황도는 태양의 길, 백도는 달의 길을 의미한다.

 

안쪽 층은 적경쌍환(赤經雙環), 극축(極軸), 규관(窺管)으로 구성되며, 망원경과 같이 천체를 관측하는 규관을 통하여서는 동서남북 사방을 볼 수 있으므로 사유의(四遊儀)라 한다. 이들 각 층의 각 환에는 필요한 수의 눈금을 표시하여 정확하게 관측하였다.혼천의는 아침, 저녁 및 밤중의 남중성(南中星), 천체의 적도좌표 · 황도경도 및 지평좌표를 관측하고 일월성신의 운행을 추적하는 데 쓰였다.

 

전체너비 36.5cm X 전체높이 4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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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金製制誥之寶, 금제 제고지보)는 1897년 고종에 의해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만든 국새(國璽) 10과 중 하나로 황제의 명령을 백성에게 알리는 문서나 고급 관원을 임명할 때 사용한 것으로 대한제국기 황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조선왕실의 어보가 거북이 모양의 귀뉴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중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용모양을 한 손잡이인 용뉴와 얕은 받침인 유대, 글자가 쓰인 보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신에 쓰인 글자인 '제고(制誥)'라는 말이 '황제의 명령'을 뜻하는 것으로, 곧 이 국새는 조선왕실이 아닌 황제로 칭한 대한제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국새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제고지보는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지고 6개월 후인 1911년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일본 궁내청으로 들어갔다가 광복 후인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궁내청으로 들어간 국새를 환수해 중앙행정기관이었던 총무처로 인계하였는데, 안타깝게도 6.25전쟁을 거치며 행방이 모연하게 된다. 그러다 다행히도 1954년 경남도청 금고에서 제고지보가 발견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칙명지보', '대원수보'와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크기
가로 11.1cm X 세로 11.1cm
 
[함께 보기 : 국새 칙명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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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가장 시원하게 마시는 방법은?
얼음물?
근데 왜 지금까지 따로 받았지?
같이 나와야 제일 시원한 거 아니야?
세상 처음, 하나의 코크로 얼음과 물을 한 번에
터치 한 번으로 얼음과 물을 동시에
SK매직 원코크 얼음물정수기
이렇게 당연한 걸, 그동안 얼음 정수기는 왜 못했을까?
-CF 中 송혜교 대사-

 

SK매직 원코크 얼음물정수기

 
SK매직은 직수정수기를 최초로 개발한 후 직수정수기가 그랬듯이 무언가 기존의 틀을 깨기 위한 시도들을 많이 하는 듯하다. 알고 보면 단순하지만, 사람들이 불편했던 것,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그런 것들..
직수정수기도 알고 보면 개념은 단순하다. 물론, 순간 온수와 순간 냉수를 만드는 기술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조적으로는 그렇다. 예전의 정수기는 모두 정수한 물을 저장하였다가 필요할 때 내보내는 저수탱크가 있는 탱크형 정수기였다. 그런데, 저수탱크 자체가 내부에 숨겨져 있다 보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생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요즘처럼 스테인리스 재질의 저수탱크가 아닌 물때가 끼기 쉬운 플라스틱 재질인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을 거의 완벽하게 해결해주는 방식으로 저수탱크를 없애고, 필터를 통해 바로 물을 내보내 주는 직수정수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SK매직 원코크 얼음물정수기 설치 모습

위 CF에서 송혜교의 대사처럼 물을 가장 시원하게 마시는 방법은 바로 '얼음물'일 것이다. 그런데 일반 얼음정수기와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코크 하나로 물과 얼음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말 그대로 일반적인 얼음정수기는 아니고, 진짜 얼음물이 나오는 얼음물정수기다. "이렇게 당연한 걸, 그동안 얼음 정수기는 왜 못했을까?"라는 대사처럼 아주 단순한 차이지만 무언가 많이 달라 보인다. 기존에는 얼음물을 마시기 위해 량을 조절해 얼음을 받고, 물을 받는 일을 따로 해야 했지만, 얼음물 정수기는 '얼음물' 버튼이 따로 있어 한 번 터치로 얼음물을 만들어 준다.
또, 코크가 하나인 만큼 기존의 얼음정수기보다 가로 사이즈는 10mm 가량 줄었는데, 얼음 보관량과 제빙량은 더 늘었다.

원코크 얼음물정수기 사이즈 : 가로 245mm X 높이 482mm X 앞뒤 길이(깊이) 515mm

최대 940g의 얼음을 보관할 수 있는 대용량 아이스룸이 들었갔고, 얼음 제빙량은 하루 최대 5,700~6,300g(얼음 약 600알)으로 SK매직의 기존 얼음정수기인 올인원 플러스 얼음정수기(WPU-IAC302) 보다 얼음 보관량은 약 4%, 하루 최대 제빙량은 약 8% 정도 늘어났다. 이 수치는 SK매직에 따르면 1일 약 60잔 이상의 얼음을 받을 수 있는 량이라고 한다.(15˚C 실험환경 조건 당사 TEST 기준/ 얼음 용량 표시 사항은 얼음 탱크 내 만빙센서까지 얼음을 균일하게 채운 당사 테스트 기준으로 실제 얼음 용량은 사용 환경과 탱크 내 얼음이 적재되는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이 정도의 양이면 일반 가정에서는 물론 소규모 사무실에서도 얼음을 부족함 없이 충분히 사용 가능할 듯하다.

SK매직 원코크 얼음물 정수기 1일 얼음 약 60잔 이상

그 밖에도 원코크 얼음물 정수기는 최초 설계에서부터 방문 관리 없이도 사용자 스스로 정수기를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위생과 관련된 기능들이 들어가 있는데, 바로 '스테인리스 직수관'과 '4중 안심케어 기능'이다. 물이 정수기로 유입되어 흘러가 출수되는 곳까지 모든 부분이 일반적인 플라스틱관이 아닌 스테인리스관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별도의 교체를 받지 않아도 물때가 끼일 염려가 적어 보다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으며, 특히 끓인 물에 가까운 약 100도씨의 고온수 기능이 있는 만큼 스테인리스관은 꼭 필요한 장치가 아닌가 싶다. 다음으로 4중 안심케어 기능을 보면 기존의 방문관리를 통해서 케어받을 수 있었던 내부 살균케어를 별도의 방문 관리 없이도 정수기가 스스로 케어할 수 있게 만든 기능들로 아이스룸 케어를 제외하면 기존 '스스로 직수 정수기'와 유사하다.

원코크 얼음물 정수기 스테인리스 직수관

첫 째, 아이스룸을 하루 2번 4시간씩 UV램프로 살균하는 기능이다. 이 기능은 SK매직 얼음정수기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부분으로 별도의 화학적인 약품을 사용하지 않고도 UV 램프를 통해 99% 이상 안전하게 살균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이스룸 UV 살균케어

둘 째,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음료 등이 튀어 가장 오염에 취약한 코크 살균 기능이다. 이 기능도 마찬가지로 SK매직 직수정수기를 비롯해 많은 정수기에 도입된 기능으로 2시간마다 UV 램프를 통해 살균이 이루어 진다.

코크 UV 살균케어

셋 째, 직수관 전해수 살균 기능으로 물이 흐르는 직수관을 전해수(전기 분해 살균 수)를 이용해 5일마다 자동으로 살균 및 클리닝 한다.

직수관 전해수 살균케어

넷 째, 직수정수기도 직수관에는 물이 항상 일부 남아있게 되는데, 당연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선함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2시간마다 직수관에 남아 있는 물을 순환시켜 빼준다.

직수관 자동배수 유로 순환케어

이상으로 원코크 얼음물 정수기에 적용된 주요 특징에 대해 알아봤는데, 마지막으로 꼭 언급해야 하는 부분이 빠져 추가하면 바로 1년에 한 번, 얼음과 관련된 부품들을 무상으로 교체(렌탈 시만 적용)해 준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기존 얼음정수기들도 마찬가지인데, 상품 소개에서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부분이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교체가 이루어지는 부품 종류는 아래 내용과 같다.

1년 1회 얼음 관련 부품 7종 무상 교체

 

아이스룸 4종 부품 무상 교체

토출구 3종 부품 무상 교체

 
 
[내용 및 이미지 출처 : SK매직샵]

SK매직샵™ SK매직공식렌탈샵

직수형 냉온 얼음 올인원 정수기렌탈 비데 공기청정기 제빙기 안마의자 식기세척기 인덕션 음식물처리기 매트리스 삼성가전 렌탈 가격비교 제휴카드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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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국립중앙박물관

 

높이 34.5cm, 입지름 5.8cm, 몸통지름 21.2cm 크기의 보물 제346호 청자 상감 모란무늬 매병(靑磁 象嵌牡丹文 梅甁, 청자 상감 동채 모란문 매병 靑磁 象嵌銅彩牡丹文 梅甁 또는 청자 상감 동채 모란문 매병 靑磁象嵌銅畫牡丹文梅甁 이라고도 한다)은 고려청자에 동화(銅畫, 주성분이 구리인 안료를 사용하여 무늬를 그린 후 구워내면 무늬가 선홍색으로 표현되는 기법) 기법을 이용하여 무늬를 표현하였는데, 몸통에는 모란가지 세 개를 흑백상감으로 묘사한 후 꽃잎에 동화(銅畫) 기법을 이용하여 붉은색을 입혀 화려한 무늬를 나타냈다.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특히 매병을 장식하는데 사용한 경우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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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대용량 얼음정수기 설치 후기

 

사무실 대용량 얼음정수기 설치 후기

★★★★★ 후기 작성자 : 허니/SK매직샵

직원 10명정도인 사무실이고, 여름이라 얼음정수기가 필요하여 선택했어요.

렌탈료도 만족스럽고, 일주일 정도 사용해보니 얼음 용량도 많고, 냉온수 용량도 충분하여 만족하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이나 색상도 고급스럽구요.
싱크대와 약간 떨어져 있지만 설치 기사님이 호스 연결하여 깔끔하게 설치해주셨어요.
사무실에서 사용할 정수기 고민하시는 분들께 추천해요~^^


SK매직 스탠드형 직수 얼음정수기 특장점

 

SK매직 스탠드형 직수 얼음정수기 특장점
SK매직 스탠드형 직수 얼음정수기 특장점

 

특장점 1. 넉넉한 냉수 및 얼음 용량

얼음을 저장하는 아이스룸 용량 3,500g

대용량 설계로 냉수 6.5리터, 온수 3.5리터 출수 가능.
국내 최대 용량 3.5kg 아이스룸 및 직수를 사용한 일일 최대 얼음 제빙량 720개.
(※일반 가정용 및 하프형 얼음정수기는 아이스룸 용량은 보통 750g 안팎)
직수 정수(미온수)는 끊김 없이 지속 출수 가능.


특장점 2. 사용 편리성

높은 출수구 높이, 넓은 물받이 폭, 넓고 다양한 각도에서 출수 가능한 출수 버튼

물병을 올려놓을 수 있는 높은 출수구 높이(26cm), 넓은 물받이 폭(10cm) 및 깊은 물받이, 전 방향 출수 버튼으로 편리하게 이용 가능.
온수 온도 강/약 선택 가능.
냉수 온수 연속취수 가능.

 

특장점 3. 직수와 저수탱크를 동시에 활용한 하이브리드 방식

스테인리스 저수탱크와 직수를 동시에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방식

냉수, 온수 : 저수탱크 방식으로 빠른 취수 가능.
정수(미온수), 얼음 : 직수 방식으로 더 위생적으로 제공.
※ 직수와 저수탱크를 동시에 활용한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직수의 단점인 취수 속도를 높이고, 신선함이 중요한 얼음은 직수를 활용하여 위생성과 장점을 높임.


특장점 4. 사업장 및 다중이용시설에 특화된 위생 기능

UV 안심케어 및 부품 분리형 세척 구조

아이스룸 및 코크 UV 살균 케어.
1년마다 아이스룸 부품 무상교체.
커피나 음료가 튀어 오염되기 쉬운 추출구, 출빙구, 출수 버튼, 물받이를
간편하게 분리해서 세척 가능한 구조.
사용환경에 따라 2개월 또는 4개월 주기로 안심OK 서비스(방문관리) 선택 가능.
 

스탠드형 대용량 얼음정수기 사이즈

스탠드형 대용량 얼음정수기 사이즈

대용량 얼음정수기 사이즈 : 가로 400mm X 높이 1,400mm X 깊이 590mm
 
 
[내용 이미지 출처 : SK매직샵]

[렌탈] 핵심모델 10% 할인 SK매직 스탠드형 직수 얼음정수기 냉온정 WPU-IC110F/국내 최대 얼음 냉수

사무실, 카페, 식당 등에 최적화 설계부터 다른 대용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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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출처(出處), 즉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감에 민감하였는데,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이념일 뿐, 현실적으로는 여러 여건 때문에 실제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무리 물러가려 해도 국왕이 놓아주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조선 숙종 시기 소론의 영수였던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1706년 10월에 영의정에서 물러나려고 여러 차례 상소하였지만 국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최석정이 뜻을 굽히지 않고 무려 16번이나 상소를 올리자 국왕은 할 수 없이 이를 허락해 주었다. 바로 그 다음 날 그는 종친부전부, 삭녕군수, 장령 들을 역임한 나양좌(羅良佐, 1638~1710)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최석정(崔錫鼎, 1646~1715) 초상/ⓒ국립청주박물관

방문을 닫고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세속에 대한 모든 생각이 재같이 식었습니다. 하지만 동인(同人)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열여섯 번이나 사직서를 올렸는데, 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직을 허락받았으니 개인적으로는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최석정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아 조정에 나왔으며,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서를 올려 겨우 면직된 경우도 있었다. 1710년에는 약방도제조로서 임금의 병환을 살피는 데 소흘했다며 삭탈관직(削奪官職,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사판에서 이름을 깎아 버리는 일)과 문외출송(門外黜送, 조선시대 죄인의 관작을 빼앗고 한양 밖으로 추방하던 형벌)까지 당하였다.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도 이와 같이 어려웠지만, 수십 년 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온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더욱이 그 때쯤이면 노령으로 신체가 허약해진데다가 걸핏하면 발병하므로 장기간 여행하는 것이 무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625년 10월에 이전(李㙉, 1558~1648, 조선시대 '월간문집'을 저술한 학자)이 아우 이준(李埈, 1560~1635, 첨지중추부사,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에게 보낸 간찰을 통해 알 수 있다.

듣자니 아우가 낙향할 뜻을 이미 굳혀서 호군(護軍) 봉록(俸祿)도 받지 않을 것이라 하는데, 많은 식구에 어떻게 지내려는가? 무척 걱정이 되네. 학질을 앓고 난 후 원기 회복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추운 날씨에 뱃길 여행은 몸을 더욱 상하게 할 것 같아 우려되니, 부디 이 계획을 그만두길 바라네. 육로를 거쳐 오되, 혼자 오는 것이 간편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꺼번에 가족을 거느리고 귀향하기가 불편하다면, 작은제수씨는 박첨지 집에 의탁한 뒤 나중에 내려오게 해도 무방할 것 같네.

당시 이준의 나이가 66세였으므로 사직하고 낙향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것은 그보다도 훨씬 후였다. 1627년에 정묘호란이 얼아나자 고령임에도 손수 의병을 모집하고, 조도사(調度使, 중앙에서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국가 재정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특별 어사)로 임명되자 군현을 돌아다니며 의곡(義穀, 의병이 납부한 곡식)을 모았다. 70세가 다 되어서도 국왕의 부름을 받고 중앙으로 나아가 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 보니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도 남들처럼 퇴직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고 어린 손자들이 장성하는 것을 바라보려는 꿈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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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원들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관원으로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사화와 당쟁이 빈번히 일어나면서 이 유배살이가 관리들에게 하나의 필수과정처럼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에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유배를 한두 차례 당하지 않은 관원은 이름이 없거나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정파가 집권하게 되면 반대편의 실각한 정파의 주요 관리들을 제일 먼저 유배형에 처했는데, 실각한 정파가 훗날 다시 집권하면 유배되었던 관리들은 대부분 중앙의 정계로 복귀하였으므로 유배의 성격도 약간 변화하여 조선 후기에는 그것이 일종의 '정치금고'와 동일한 처벌로 간주되곤 하였다. 즉 유배기간에는 중앙의 정계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한국관광공사

일단 유배형이 내려지면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데 드는 일체의 비용을 피유배자가 지불해야 했는데, 심지어는 호송관리의 수고비까지도 부담해야 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모함 등으로 억울하게 유배를 당한 경우라면 그 손해가 엄청났지만 법이 그러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배당한 관리의 신분이나 지위, 인적 관계와 복관 가능성 등에 따라서 떠나는 유배길이나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크게 달랐는데, 고관이나 권신들은 유배길에 거처가는 군현마다 들러 그 지역 수령으로부터 향응을 받거나 유배지의 수령이나 아전들로부터 깍듯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유배간 사람이 본가에 쓴 편지/ⓒ국립전주박물관

유배생활의 실제 모습을 조선 영조 대에 충청남도 직산군수(稷山郡守)를 역임한 전근사(全近思, 1675~1732)의 편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전근사는 1728년 4월에 전라도 운봉현(雲峰縣,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동면·산내면·아영면 일대에 1914년까지 있던 행정구역.)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이유는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무리를 보고도 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낸 대관(臺官, 조선 시대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들은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그를 의금부에 가두고 조사하게 했는데, 직무를 유기환 죄가 드러나자 운봉현에 유배하도록 지시하였다. 유배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같은 도(道)의 수령으로 재임하고 있는 친지에게 다음과 같은 간찰(簡札, 옛 편지들을 이르는 말. 서간(書簡), 서찰(書札)이라고도 부른다.)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체직(관직을 교체하는 것, 보통 면직을 뜻하나 경우에 따라 파직을 뜻하기도 함) 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겪었던 어려운 사정은 잠시 말하지 않더라도, 체직된 후에 양식을 지니고 올 방법이 없어서 맨손으로 내려왔는데, 지금 식량을 주가(主家)에 부탁하기가 구차하고 어려운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 근심스러움을 어찌합니까? 형에게 사람을 보내어 어려움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을까 염려될 뿐만 아니라, 관직에 있으면서 응대하는 어려움을 제가 평소에 잘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 안에 영남 출신 친구로서 수령이 된 사람이 6, 7명에 이르니, 만약 유배지에서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반드시 무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나, 관문(官門)은 사실(私室)과 다르고 어리석은 저의 종놈이 동서도 분간 못하기에 실로 서로 통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관중(管仲, 관포지교의 관중을 빗댓 말)인 저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포숙(관포지교의 포숙을 빗댄 말)인 형뿐이니, 부디 같은 도 출신이 부임한 고을에 편지를 띄워서 특별히 구제해 달라는 뜻으로 간절히 부탁하여 제가 객중에서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가? -중략- 근래에 갖가지 신병이 떠나지를 않아 날마다 신음하는 것이 일인지라, 형편상 혼자 머무르기가 어려워서 아들놈과 비복을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이 때문에 식구가 적지 않으니 더욱 근심스럽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조선시대 관리들은 유배생활 중에도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며 비복(계집종과 사내종)까지 거느리고 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근사는 자신의 신병 때문에 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만, 어찌되었든 유배된 관리들 중에는 가족과 함께 살고 또 비복도 거느리고 산 사람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유배기간에 드는 생활비를 당사자가 마련해야 했지만, 전근사는 경상도 출신의 호남지역 수령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던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정약전의 유배기간을 그린 영화 '자산어보' 스틸 컷/출처 : 네이버영화

한편 같은 유배자라 하더라도 유배기간의 생활과 해배 이후의 행보에는 상당한 개인차가 있었는데, 물론 정치적인 유배의 경우는 유배기간 내내 울분 속에서 보내는 유배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나 정약전처럼 이 기간에 독서와 저술을 하고 또 유배지역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등 유교의 진작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인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복관 후에도 그 지역의 자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리로서 중앙에 진출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은 사후에 그 지역 자제들의 추대로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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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00여년 동안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은 겨우 14,000여 명이었다. 따라서 한 해에 겨우 28명 정도만 문과를 통하여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문과에 합격한 후 중앙부서에 대간(臺諫,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을 함께 이르는 말로,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하던 벼슬)과 같은 청요직(淸要職, 청빈함을 요구하는 중요한 관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를 아우르는 관직)이나 승지와 같은 국왕의 시종관으로 근무하게 된다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배출한 가문으로서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봉급은 의외로 적어서 그것만 가지고는 생활하기가 곤란하였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녹봉은 고려시대에 비해 적었는데, 그마저도 갈수록 감소되었다고 한다.

이성원(李性源 1725~1790) 초상-조선후기 홍문관교리, 개성부유수,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관리의 녹봉내력

구분경국대전인조 25년속대전
정1품中米 14石, 糙米 48石, 田米 2石, 黃斗 23石, 小麥 10石, 紬 6匹, 正布 15匹, 楮貨 10張米 14石, 田米 2石, 黃斗 4石米 2石 8斗, 黃豆 2石 5斗
정3품
(당상)
中米 11石, 糙米 32石, 田米 2石, 黃斗 15石, 小麥 7石, 紬 4匹, 正布 13匹, 楮貨 8張米 7石, 田米 2石, 黃斗 2石米 1石 9斗, 黃豆 1石 5斗
정6품中米 5石, 糙米 18石, 田米 2石, 黃斗 9石, 小麥 4石, 紬 1匹, 正布 10匹, 楮貨 4張米 4石, 田米 1石, 黃斗 2石<米 1石 1斗, 黃豆 10斗
종9품糙米 8石, 田米 1石, 黃斗 2石, 小麥 1石, 正布 2匹, 楮貨 1張米 2石, 黃斗 1石米 10斗, 黃豆 5斗

먼저 조선 전기 관리의 녹봉내력을 파악하기 위해 <경국대전>을 살펴보면, 정1품의 관리는 중미(中米 찧거나 쓿어 속겨를 한 차례 벗긴 쌀, 현미보다 더 쓿고 백미보다는 덜 찧은 쌀), 조미(糙未 왕겨만 벗긴 쌀, 현미玄米), 전미(田米 껍질을 벗기지 않을 쌀) 등 쌀 64가마, 콩(黃斗) 23가마, 밀(小麥) 10가마, 명주(紬) 6필, 베(布) 15필, 저화(楮貨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 10장을 받았다. 정3품 당상이나 정6품 관리들은 같은 종류의 물품들을 차등 있게 지급받았다. 그러나 종9품의 경우에는 중미와 명주는 아예 지급받지 못하였으며, 그 밖의 것들도 아주 적은 양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실록 등에 의하면, 흉년이 들거나 외국사신들이 자주 왕래하여 국가의 재정형편이 어렵다는 핑계로 실제로는 위 규정보다 녹봉을 적게 지급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왕조 기본법전/ⓒ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인조 25년(1647)에 지급된 녹봉을 살펴보면, 정1품의 경우 전미를 포함하여 쌀 13가마와 콩 10가마였다. <경국대전>의 규정과 비교하면 녹봉의 종류가 크게 줄어들고 양도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에게 지급되는 녹봉이 이와 같이 적었으니 그 아래의 관원들에게 지급된 것이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더군다나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을 살펴보면 관리들의 녹봉이 더욱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의 경우 겨우 쌀 2가마 8말과 콩 2가마 5말을 지급받았으며, 최하위직인 종9품은 단지 쌀 10말에 콩 5말 밖에 받지 못했다. 이 녹봉으로 고위직은 그럭저럭 살 수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하위직은 분명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데는 관리들의 적은 녹봉이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속대전(續大典, 경국대전 법령 중 시행할 법령만을 추려 편찬한 통일 법전)/ⓒ국립중앙박물관

한양의 물가가 지방보다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앙 관리들은 녹봉만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가계의 수입과 지출상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메워 주는 것이 타인들로부터 수수한 선물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서로의 집을 방문할 때 예의의 표시로 선물을 주었다. 심지어는 편지를 보낼 때에도 선물을 동봉하였다. 특히 요직에 있는 중앙관들은 지방의 수령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이 경우 뇌물과 선물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당시 풍조가 선물을 자유롭게 주고받았기 때문이었는지, 어떤 경우에는 선물을 받고도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청탁하기도 했다. 1644년 정월에 영의정 김류(金瑬, 1571~1648)가 익산군수 조행립(曺行立)에게 보낸 편지에 그러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봄날 그리운 생각에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뜻하지 않게 편지와 아울러 각종의 새해선물도 받았습니다. 더욱 옛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겠으니, 고마움이 갑절이나 됩니다. -중략- 당신 관할 지역에 살고 있는 나주부사를 역임한 김 아무개는 잘 지냅니까? 부디 내가 살아 있다고 전해 주고 또 음식이라도 보내 주어, 이 늙은이 생색이라도 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 속의 별록(別錄)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련된 일인데, 관례를 깨서라도 세밀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김류는 조행립이 새해인사와 아울러 보낸 여러 종류의 선물을 받고서 우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지인인 나주부사 김 아무개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 주고 먹을거리를 보내 생색을 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부탁할 것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한 일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이 사적으로 은밀히 청탁하는 일은 별지(別紙)에 작성하였으며, 이를 읽어 본 후에는 뒷날 말썽이 일어나지 않도록 태우는 것이 관례였다. 김류의 경우에도 별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그런 관례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김류는 영의정에 재임 중이었으니 어느 수령이 청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수령은 비록 지방에 파견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교체되거나 승진하여 중앙의 부서로 돌아갈 관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 간찰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명절이나 절일에 중앙의 고관들에게 선물을 보내어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유지하려 하였다.
 
중앙관들은 박봉으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수입과 지출의 차이를 지방 수령들이나 친지들이 보내 주는 선물로 보충해 간 데 비해 지방관, 그중에서도 특히 수령은 그러한 생활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방 관아에는 수령이 유용할 수 있는 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관리들은 국왕에게 이를 핑계로 수령에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수령은 자신의 소관 업무만 담당했던 경관과는 달리 사법, 군사, 행정의 모든 일을 혼자서 주관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바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모습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쓴 간찰에 잘 나타나 있다.

동추(同推, 관원이  합동으로 죄인을 추문하는 일)하는 걸음이 아니면 창고를 돌며 조적(糶糴 관에서 쌀을 비축하고 배포하는 일)을 나누는 일로, 비록 한가한 고을이라고는 해도 장부 정리도 때에 맞추어야 하고 공문 처리하기에도 겨를이 없다. 여러 고을이 대부분 같아서, 진실로 덜하고 더한 차이가 없다. 붓을 들고 종이를 펴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미처 한 글자도 적기 전에 창 밖에서는 형방이 무릎을 꿇고 '하삷오며(爲白乎旀)'나 '저저자자(這這刺刺)' 등의 소리를 내며 읽고 있고, 개구쟁이 아이가 진한 먹에 붓을 적시고 종이 모서리를 비스듬히 잡고 있으니 나는 먹으로 돼지 모양 비슷하게 수십 개의 서명을 바쁘게 한다. 물러나 생각해 보면 앞서 가슴속에 있던 미처 쓰지 못한 한 편의 좋은 문장은 애석하게도 어느새 만 길 지리산 너머로 달아나 버렸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이 간찰에는 관아에서 관속(官屬)들이 각자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모습과 갑자기 떠오른 좋은 시상(詩想)을 바쁜 업무에 쫓겨 놓쳐 버린 후 안타까워하는 박지원의 모습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박지원은 수령직에 있는 덕분으로 지인인 남공철과 심상규 등에게 백지 한 뭉치씩을 보내 주고, 친척과 친지에게 요전(料錢, 급료)과 제수전(祭需錢, 제사에 필요한 재료를 장만하는데 사용하는 돈) 등을 줄 수 있었으며, 또 수시로 말린 고기와 볶은 고기, 곶감과 고추장 등과 같은 반찬과 먹을거리 등을 집에 보낼 수 있었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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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비데 자가설치 방법/ⓒ코웨이오픈몰

화장실 비데 자가설치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우리집 화장실 구조나 변기가 비데를 설치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었느냐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큰 문제없이 설치가 가능하기도 하지만, 간혹 비데 설치환경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비데를 구입해 설치를 하려다 실패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렇다면 비데를 설치하기 전에 어떤 부분을 먼저 확인해야 할까요?
 

첫 째, 전자식 비데 설치를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합니다. 화장실 변기 근처에 전원 콘센트가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둘 째, 연결 가능한 수전이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이부분은 변기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에는 당연히 수전이 있을 테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네요.
셋째, 화장실 구조상 비데 커버 또는 시트가 세면대나 문 등에 걸리는 경우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넷째, 비데 모양을 확인해야 합니다. 비데 도기 일체형 변기나 콜러형 및 좁은 라운드형 변기는 비데 설치가 어려우므로 비데 모양을 미리 확인해 주세요.

 
위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미리 확인하였다면 일단은 비데 설치가 가능한 환경이므로 안심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럼, 이제 비데 자가 설치 방법에 대해 알아볼 텐데요.
비데를 구입하면 비데 구성품에 자가설치를 위한 가이드를 비롯해, 설치 공구와 자재가 포함되어 있는데, 만약 자가 설치 공구와 자재가 없다면 설치가 어려울 수 있으므로, 비데를 구입하기 전에 자가 설치를 위한 공구와 자재가 구성품에 함께 포함되어 있는지 반드시 확인을 하셔야 무리없이 설치가 가능하므로 꼭 유의해 주세요.
 
 

비데 자가설치 방법

아래 비데 설치 방법은 코웨이 비데(BAS27-D 스스로케어 비데)를 기준으로 하는 설치 방법이므로 비데 브랜드나 모델에 따라 설치 방법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각 공정에 따라 참고용으로 봐 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STEP 1. 구입한 비데 구성품 확인하기

 

기본 구성품 1) 비데 본제, 사용메뉴얼, 자가 설치 가이드, 비데 필터

설치 자재 구성품 2) 설치 자재 : 스페너, 고정 너트, 고정 와셔, 고정나사, 필터 고정 마개, T자 연결관, T자 연결관 패킹, 고정판, 비데 호스, 필터 클립, 십(+)자 드라이버 필요
 
 

STEP 2. 기본 변기 시트 분리하기

※ 변기에 설치되어 있는 기본 시트는 떼어낸 후 버리지 마시고, 추후 필요한 경우를 위해 따로 보관을 해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01. 뒷면 좌우 양쪽 하단에 있는 고정 너트를 시계방향으로 돌려 풀어줍니다.

※ 치마형 변기의 경우 고정 너트가 양쪽 하단이 아닌 변기 위쪽 고정판 나사를 풀어 분리할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02. 변기 시트를 위로 들어 시트 볼트와 함께 분리해 주세요.

 

03. 변기 시트 분리한 다음 남아있는 이물질이나 물때 등을 청소해 주세요.
 

변기 시트 분리가 마무리된 모습
 
 

STEP 3. 원수 차단 및 T자 연결관 연결하기

※ 원수 밸브를 잠그지 않고 작업을 하는 경우는 고압의 물이 뿜어져 나오므로 반드시 원수 밸브를 잠근 후 작업해 주세요.

 

01. 원수 밸브를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잠궈 주세요.
이때, 변기 물내림 버튼을 눌러 물탱크에 물이 차지 않는지 확인해 주세요.
 

02. 스패너를 이용해 원수 호스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 분리해 주세요.
 

03. 원수 밸브 연결 부분에 T자 연결관 패킹을 넣어주세요.
 

04. T자 연결관을 원수 호스와 연결해 주세요.
 

05. 원수 호스와 연결된 T자 연결관(고무 패킹을 넣은 쪽 부분)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원수 밸브에 연결해 주세요.  
 
 

STEP 4. 비데 필터 유로 연결하기

원수부에서 비데로 유입되는 부유물질 및 녹 찌꺼기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필터를 설치하기 위해 T자 연결관과 유로를 연결합니다.
 

01. 필터 뚜껑을 분리해 주세요.
 

02. 필터 고정 마개를 끼워주세요.
 

03. 비데 호스(튜빙선)를 그림과 같이 필터 고정 마개쪽 연결부에 끝까지 밀어 넣어 끼워 주세요.
 

03. 필터와 연결한 비데 호스의 반대편을 T자 연결관에 끝까지 밀어 넣어 끼워 주세요.
 

※ 유로와 연결한 필터는 비데 본체를 완전히 설치 후 비데 본체에 연결합니다.
 
 

STEP 5. 비데 본체 설치하기

비데가 도기 물탱크와 완전히 닿지 않도록 물통과 고정판 사이에 여유 공간을 두고 설치합니다.

 

01. 2개의 홈에 고정 너트를 그림과 같이 삽입해 주세요.
 

02. 물탱크와 가까이 붙지 않도록 고정판 위치를 조절해 주세요.
이때, 고정판 각도가 틀어지면 비데가 바르게 정렬되지 않으므로 유의해 주세요.
 

03. 양쪽 고정 너트 위에 고정 와셔를 연결해 주세요.
 

04. 드라이버를 이용해 양쪽에 고정 나사를 시계 방향으로 돌려 고정판을 단단하게 결합해 주세요. 
 

05. 비데 본체를 고정판에 맞춰 딸깍 소리가 날 때까지 그림처럼 밀어 넣어 고정시켜 주세요.
 

06. 비데를 앞으로 당겨 빠지지 않는지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STEP 6. 필터와 전원 연결하기

비데 연결 부위의 필터 고정 마개에는 누수 방지용 고무링이 2개 있으므로 찢기거나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01. 필터 고정 마개를 그림과 같이 비데 본체 연결부에 밀어 넣어주세요.
 

02. 필터 클립을 필터와 비데 본체 연결부위에 체결해 주세요.
 

03. 비데로 연결된 유로(튜빙호스)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유로와 연결된 방향으로 T자 연결관 밸브를 열어주세요.
 

04. 물이 정상적으로 공급되도록 잠궈 두었던 원수밸브를 반시계 방향으로 열어주세요.
 

05. 마른 손으로 비데 본체의 전원 코드를 화장실 콘센트에 연결해 주세요.
 
 
이상으로 비데 설치가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어떠신가요? 비데 구성품 확인부터 설치까지 총 6단계에 걸쳐 알아봤는데요,
공구와 비데 설치를 위한 필수 자재만 있다면 전문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한 번쯤 직접 설치를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은 아닌데요,
이제 마지막으로 비데 설치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을 해야겠죠?
 

첫 째, 비데와 도기가 똑바로 정렬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둘 째, 비데와 도기의 앞쪽 길이가 딱 맞아 떨어지는지 확인해 주세요.
셋째, 세정을 위한 비데 노즐이 나오는 부분이 도기와 띄워져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넷째, 비데의 앞부분을 잡고 흔들어도 비데가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해 주세요.
다섯째, 원수 밸브 쪽 T자 연결부위와 비데 필터 부위에 누수가 없는지 확인해 주세요.

 
 

비데 자가관리 방법

비데를 직접 설치하였다면, 이제는 비데를 사용하면서 위생을 위해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하게 되는데요, 비데는 특성상 정기적인 청소와 함께 일정 기간 사용 후 교체가 필요한 부품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바로 필터와 노즐팁이 가장 대표적이며, 그 밖에 선택적으로 노즐덕트, 건조덕트 등을 상황에 따라 교체해 주시면 비데를 보다 위생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함께 참고해 주세요.

*비데 필터 : 4개월 마다 교체(교체가 되지 않을 시 물 공급이 막힐 수 있습니다.)
*노즐 팁 : 2개월~4개월 마다 교체(교체가 되지 않을 시 노즐이 막히거나 물줄기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노즐 덕트 및 건조 덕트 : 정기적인 청소 필요, 오염 또는 파손 시 교체

[내용 이미지 출처 : 코웨이오픈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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