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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풍속도첩-벼타작/국립중앙박물관]



[단원 풍속도첩-벼타작/국립중앙박물관]



[단원 풍속도첩-벼타작/국립중앙박물관]



단원 김홍도의 '단원 풍속도첩-벼타작'은 농부들이 벼를 타작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열심히 벼타작 일을 하는 농민들 한켠에 곰방대를 물고 홀로 한가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양반의 모습을 통해 신분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신분적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한 장면에 그린 그림이지만 그 속에는 심각한 대립관계는 찾아볼 수 없으며, 대립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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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신행길/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신행길/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신행길/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신행길'은 단원 김홍도(1745~1816 이후)의 <단원 풍속도첩> 중 결혼을 위해 신부의 집으로 향하는 신랑 행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굽은 언덕길을 돌아가는 화면 설정을 통해 긴 행렬을 한 화면에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맨 앞에는 청사초롱을 을 든 사내 둘(한 사내는 맨발을 한 것이 특이하다)과 바로 뒤에는 기럭아비가 앞장서 가고 있다.

또, 기럭아비 뒤쪽에 말을 끄는 사내의 모습을 통해 신랑의 집안 어른이 탄 말이 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뒤로는 백마를 탄 신랑의 모습이 보이고, 그림에서 각 인물들의 얼굴 표정이 모두 다른데, 신랑은 과하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하고 있어 이날의 기분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한다.

신랑의 뒤로는 장옷을 입고 말을 타고 따라오는 인물이 보이는데 행색을 통해 매파로 추정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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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328호 기영회도(耆英會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8호 기영회도(耆英會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8호 기영회도(耆英會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8호 기영회도(耆英會圖)/국립중앙박물관]




기영회도(耆英會圖)에서 기영회(耆英會)는 조선시대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70세가 넘은 원로 사대부들의 모임으로 기로연(耆老宴), 기로회(耆老會)라고도 불렀다.

기영회는 고려시대 높은 관료들의 사적모임에서 출발해 점차 정치적 모임으로 발전했으며, 조선 태종 이후 연회적 성격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영회는 예조가 주관했으며 따라서 예조판서가 주관자가 되고 왕의 비서실장격인 승지가 특별히 파견되어 감독했다.

보물 1328호 기영회도는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넓은 대청이 있는 건물 내부에서 행해지는 연회 장면을 생동감있게 잘 표현하고 있다. 전체 그림에서 윗부분에는 제목을 써넣었고, 아랫쪽에는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과 자, 호, 본관, 품계 등의 서열과 시문을 적어 일반적인 계회도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회의 장면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이 목적이었던 만큼 전체적으로 산수 배경은 생략했으며, 건물 내부를 부각되게 배치하여 연회에 참석한 원로사대부들과 주변 인물들의 움직임을 실감나게 담아내고 있다.

본 기영회도에서 참석한 일곱 명의 원로 사대부는 흉배 없는 관복(담홍포)을 입고 호피무늬 방석 위에 앉아 각각 앞에 상을 받아 두고 있으며, 두 명의 원로는 오랜 회포를 풀 듯 서로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잔을 들어 마주하는 장면도 연출되어 있다.

또, 그림 상에 나타나는 촛불을 통해 연회가 열린 시간이 저녁시간인 것도 알 수 있다.

7명의 참석자 명단은 홍섬(1504~1585), 노수신(1515~1590), 정유길(1515~1588), 원혼(1505~1588), 정종영(1513~1589), 박대립(1512~1584), 임열(1510~159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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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풍속도] 행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 행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 행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행상은 27.2cmX23.7cm의 크기로 부부관계로 보이는 두 남녀 상인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낡은 벙거지를 쓰고 지게에 나무통을 지고 있는 남편 상인과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부인이 각자 지게막대와 긴 나무막대를 들고, 움직임이 좋게하기 위해 한복의 바짓가랑이를 감아 매는 행전(行纏)을 하고 있어 다른 먼 곳으로 행상을 떠나기 전 서로 헤어지며 잠깐의 담소를 나누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특이한 것은 부인의 등에 업혀 있는 아기가 저고리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모습이 당시의 이채로운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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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39호, 송시열초상/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39호, 송시열초상/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39호 '송시열초상'은 전체 188cmX79cm(그림 89.7cmX67.6cm)의 크기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선조 40∼숙종 15)을 그린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수작으로 손꼽히는 초상화다.

평상복 차림에 복건을 쓴 이 작품은 주름과 수염에 보이는 섬세한 얼굴 표현을 비롯한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몸 부분의 다소 과장돼 보이는 채구와 윤곽을 그린 견고한 필선, 그리고 음영을 표현하지 않은 직선 위주의 간명한 옷 주름은 조선 중기 학문과 사상을 휘어잡았던 걸출한 정치가의 이미지를 아주 잘 전달하고 있다.

얼굴과 복식에서 음영 처리가 나타나지 않는 점 등은 17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림의 윗부분에는 1778년에 정조가 지은 찬시가 예서로 씌어 있고, 오른쪽에는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글이 해서체로 씌어 있다.

이 작품은 정조의 어제로 미루어 보아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17세기 초상화의 특징이 남아 있어 정조 연간에 원본에 충실하게 옮겨 그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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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88호 심득경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8호 심득경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8호 심득경(沈得經, 1673~1710) 초상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심득경을 애도하여 윤두서(尹斗緖, 1668년∼1715)가 그린 작품이다.

심득경과 윤두서는 절친한 친구이자 친인척관계로 심득경의 어머니가 너무도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딸이며, 윤선도는 윤두서의 증조부가 된다.

이런 심득경이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자 윤두서는 이를 슬퍼하며 생전의 모습을 생각하며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해 석달만에 그림을 완성하는데,

완성된 초상을 심득경의 집에 보내 벽에 걸었더니 마치 죽은 사람이 되살아 온 것 처럼 모두가 놀라서 울었다고 전해진다.

<<남태응의 '청죽화사(聽竹畵史'>>


그만큼 묘사와 표현이 살아 생전의 실물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이다.

심득경 초상은 조선시대 전통적인 초상화 양식을 따랐지만 기존의 초상화와는 달리 필치가 부드럽고 담채가 은은하여 문인화가의 솜씨다운 면모가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에 쓰인 찬문((贊文)에서도 이 초상이 심득경의 실제 모습뿐만 아니라 인품까지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고 감탄하고 있는데,

찬문 중에 심득경의 친구 서예가 이서(李敍 1662~?)가 지은 글을 보면,

'눈이 맑고 귀가 단정하며 입술이 붉고 이빨이 촘촘하다.'

'물에 비친 달은 그의 마음이요, 얼음 같은 옥은 그의 덕이다'

'잘 묻고 힘껏 실천했으며 깨달은 것은 확고했다'

라는 글을 통해 심득경의 실제 모습과 한결같은 그의 품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림 크기 160.3cmX7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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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고유의 화풍을 개척한 인물로 산수와 인물은 물론 짐승과 꽃, 새 등 다양한 소재에 뛰어났다. 특히 남종화풍(南宗畫風)을 바탕으로 조선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았는데, 이는 우리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라고 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정선은 진경산수의 전형을 확립하여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 진경시대는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를 이루어 낸 시기로, 정선이 활동한 영조대는 진경시대 중 최 전성기였다.


이후 정선의 화풍을 따른 화가들을 '정선파'라고 불렀으며, 산수도는 강세황의 평에 의하면 정선의 중년에 그려진 것으로 전통 화풍과 함께 그의 개성적인 필치가 담겨 있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앞쪽에는 시냇물과 바위, 그리고 나무에 둘러싸인 누각이 있고, 뒤로는 장엄하게 솟은 산과 봉우르들이 표현돼 있으며, 멀리 뒤쪽으로 들녘과 나즈막한 산들이 표현돼 있어 실제 거리감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화면 전체를 꽉 채운 그림 구도는 중국 전통 산수화 양식을 따른 것으로, 계절에 따른 경치의 표현은 남종화풍과 조선 중기에 유행한 절파풍(명대 저장 지방 양식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들의 화풍), 그리고 정선 특유의 필치가 혼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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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로 본관은 경주 이며,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이다.

충렬왕 13년에 태어나 공민왕 16년까지 활동한 인물로써, 당시 고려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이며, 고려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올랐다.

   

국보 110호 이제현 초상화는 고려 충선왕(忠宣王, 1275~1325)과 함께 중국을 유람하던 시기 1319년에 충선왕이 진감여(陳鑑如)라고 하는 원나라 화가를 시켜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후 귀국을 하면서 이 그림은 가져오지 못했다가 21년 후에 우연히 그림을 다시 보게 되자 그 감회를 시로 읊었다.



我昔留形影

옛날에 남겨둔 나의 초상은


流靑靑兩鬢春

양쪽 귀밑머리 푸르렀다오.


傳幾歲月

얼마나 많은 세월 흘러갔던가


邂逅尙精神

우연히 또 만나니 정신이 새로워라.


此物非他物

    이 물건 다른 물건 아니라


前身定後身

전신이 곧바로 후신이라네.


兒孫渾不識

아희들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고


相問是何人

이게 누구냐 자꾸 물어보누나.

 


그림에는 이 시와 함께 그림에 대한 원나라 문장가 탕병룡의 찬과 함께 쓰여 있다.


초상은 왼편을 향하고 있는데, 상의 왼쪽에는 주역(周易)과 고대 청동기가 놓여져 있는 칠기로 된 탁자가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분홍빛의 홍조를 띠고 있으며, 별다른 음영의 표현은 없다. 심의는 흰색 옷에 옷깃과 소매 끝 밑단 등의 푸른색의 선으로 둘러져 있으며, 옷의 모양새가 전체적으로 풍성하고 둥글다. 교의는 칠기에 화려하게 조각을 한 후 다시 붉은 색을 칠하여 매우 화려해 보인다.

이제현의 초상화는 비록 원나라 화가가 그린 초상화이지만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중 매우 이른 시기의 초상화라는 의미와 더불어 고려와 원나라의 교류를 통한 문화적 산물로서도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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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 선생의 초상화로 1905년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이 그린 작품이며, 보물 1510호이다.

초상화 우측 상단에 씌어있는 '勉菴崔先生 七十四歲像 毛冠本 면암최선생 칠십사세상 모관본, 乙巳孟春上澣 定山郡守時 蔡石芝圖寫 을사맹춘상한 정산군수시 채석지도사' 라는 기록을 통해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의 74세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상화에서 최익현은 겨울철에 사냥꾼들이 즐겨 사용하는 가죽 감태를 쓰고 심의를 용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얼굴은 갈색선을 수없이 그어 요철과 명암을 표현했으며, 얼굴 표정과 주름은 물론 감태 특유의 털 느낌도 세밀하면서 대담하고 입체감 있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옷 부분은 흰색으로 채색했는데, 옷주름은 선으로 그린 것이 아닌 흰색 채색을 통해 배경색을 그대로 살려 표현한 것이다.


그림 크기

전체 82.2X55.0cm/ 그림 81.5X41.5cm



채용신은 칠곡군순, 정산군수 등을 지내고 종2품관까지 지낸 인물로 조선말기 우국지사나 항일투사의 초상화를 많이 제작했으며, 고종의 어진과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등을 그렸으며,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황장길부인상(黃長吉夫人像) 등의 여인상도 그렸다.

그의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을 사용해 얼굴의 육리문 묘사에 주력하고, 서양의 데생작업과 유사한 많은 필선을 사용해 요철,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한 점 등이 특징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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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개와 강아지/이암/국립중앙박물관]


[어미개와 강아지/이암/국립중앙박물관]




어미개와 강아지 그림(구도狗圖)을 그린 정중 이암(靜仲, 李巖, 1499-?)은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 이구(李璆)의 증손자이며, 왕족으로 두성령(杜城令)에 봉군되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 그림을 잘 그렸으며 뛰어났다고 한다.

인종실록에서 그는 이상좌와 함께 중종의 초상을 그릴 화가로 승정원에 의하여 추천되기도 하였을 정도로 그림 실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동물 그림은 한국적인 정취를 독자적인 화풍을 잘 보여 주는데, 이 그림에서도 어미개와 강아지의 모습을 젖먹이 자식을 품고 있는 따뜻한 분위기로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사실적 표현의 한 예로 어미개와 강아지의 털 색깔이 바뀌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번지게 표현하여 매우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다만, 그림의 주 피사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배경의 나무는 간략하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크기 전체 163.0X55.5cm/그림 73.5X4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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