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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진덕여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은 즉위하자 직접 태평가(太平歌, 진덕여왕이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은 사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5 '진덕왕 조'에 실려 있는데, 당나라 고종은 이것을 읽고 법민을 대부경大府卿으로 임명해 돌려보냈다고 한다.)를 짓고 비단 무늬를 짜서 사신('삼국사기'에는 진덕왕 4년에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사신으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을 시켜 당나라에 바치게 했다.

어떤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요청하자, 당 태종이 가상히 여겨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현경(顯慶,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로 656년에서 661년까지 사용했다.)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제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은 태종 시대가 아니라 바로 고종(高宗) 시대다. 소정방이 온 것이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에 무늬를 짠 것이 군사를 청할 때가 아님은 확실하므로 진덕여왕 때가 맞다. 아마도 김흠순(金欽純)의 석방을 요청할 때였을 것이다.

당나라 황제는 이 점을 가상하게 여겨 진덕여왕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권5) 치당태평송/ⓒ한국학중앙연구원

 

위대한 당나라가 큰 왕업을 여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획 창성하여라.
전쟁이 그치니 위엄이 정해지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임금을 잇는다.
하늘을 통솔하닌 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빛을 머금는다.
깊은 인(仁)은 해와 달을 짝할 만하고
운수가 요순 시대와 같다.
펄럭이는 깃발은 어찌 그토록 빛나며
울리는 북소리는 어찌 그리도 장엄한가.
나라 밖의 오랑캐로 명을 거스른 자는
칼날에 엎어져 죽임을 당하리라.
순수한 풍속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 고루어리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
사계절은 옥촉(玉燭, 사계절의 기후가 조화를 이룬 것이니 태평한 시대를 말한다.)처럼 화합하고
일월과 오행(七曜, 하늘에 보이는 별 중 육안으로 관찰되고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별을 오행과 대응시킨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과 태양 달을 합친 7개의 천체를 말하며 칠요성이라고도 한다.)은 만방을 순행한다.
산의 신령은 보필할 재보(宰輔, '시경詩經-대아大雅' 숭고崧高의 '유악강신維嶽降神:큰 산의 산신령이 내려와  생보급신生甫及申:보씨와 신씨를 낳으셨도다'를 인용한 것으로 보후甫候와 신백申伯 두 사람으로 국가의 동량 즉, 기둥과 들보가 되는 신하를 가리킨다.)를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진실된 사람을 임명하였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이룬 한결같은 덕이
우리 당나라 황실을 비추리라.

 
진덕왕 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어 남산 우지암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그때 몸집이 큰 호랑이가 그 자리로 달려들자 공들이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며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던져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아 상석에 앉았지만, 공들은 모두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

 

진덕여왕 때 일화/출처 : https://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6/2009052601483_6.html


신라에는 신령스러운 땅이 네 군데 있었다. 큰일을 의논할 때마다 대신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 의논했고, 그렇게 하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졌다.
신령스러운 땅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진덕왕 대에 처음으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조례(正旦禮,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진덕왕 즉위 5년의 일이다.)를 행했고, 처음으로 시랑(侍郞)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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