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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부여는 "은정월(殷正月, 12월), 고구려와 예(濊)는 10월에 각각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온 마을의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며칠 동안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었으며, 마한(馬韓)은 5월 씨뿌리기를 끝냈을 때와 10월 추수가 끝났을 때에 제사를 지내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기를 밤낮을 쉬지 않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고시대부터 노래와 춤을 통해 신에게 감사드리고 풍년을 기원하며 즐거움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에는 신에게 기원하거나 즐거움을 표현하고자 방울 같은 단순한 악기를 흔들며 춤추고 노래했으나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고대 현악기인 '고' 및 완함(阮咸), 비파(琵琶)와 적(笛), 요고(腰鼓), 배소(排簫), 각(角) 등이 등장하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만들어 한민족 특유의 음악을 형성해나갔다.



1. 고구려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는 거문고이다. '삼국사기'에 "진(晉)'에서 7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제2상(第二相) 왕산악(王山岳)이 본래의 모양을 그대로 두고 자못 법제를 개량하여 악기를 만들고, 겸해서 1백 곡을 지어서 연주했다. 그때 현학(玄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지었는데, 후에는 다만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검을 현(玄)', '고 금(琴)'이니 현금은 바로 거문고를 뜻한다. '고'는 현악기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진은 265~419년에 존재했던 중국 왕조이니 거문고 제작연대는 4세기 전후로 볼 수 있다. 음악사학적으로는 고구려에 아무런 현악기가 없는 상태에서 중국 7현금을 보고 갑자기 거문고를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어떤 현악기가 있는 상태에서 7현금의 영향으로 거문고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고 있다.

완함/ⓒ두산백과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거문고 외에 완함, 종적(縱笛), 횡적(橫笛), 요고, 각, 배소 등의 악기가 보인다. 완함은 몸체가 둥글고 목이 긴 현악기인데, 타클라칸 사막 북쪽에 위치한 쿠차에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류트 종류를 바탕으로 재창조한 악기고, 뿔나팔인 각과 대나무관을 옆으로 나란히 묶은 배소는 북방유목민의 고취(鼓吹)에 편성되던 악기이다.

고구려 벽화 오회분제5호묘/ⓒ문화콘텐츠닷컴



요고는 세요고(細腰鼓)를 줄인 말로 '허리가 잘록한 악기', 즉 장구와 같은 것인데, 오른쪽 면은 채로 치고 왼쪽 면은 손으로 두드리는 장구와 달리 양쪽 면을 모두 손으로 친다. 서역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악 3호분의 다리를 X자 모양으로 하고 두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춤추고 있는 무용수는 콧대가 높고 이국적인 복장을 한 것으로 미루어 서역의 무용수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는 거문고 외에 서역에서 들어온 악기들이 다수 있었다.



2. 백제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의 뚜껑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배치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으며, 봉황과 일직선상의 아래인 중앙에 완함이 있고, 왼쪽으로 종적과 배소(排簫), 오른쪽으로 북과 거문고(혹은 가야금 종류)가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백제 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3. 신라
신라의 대표적인 악기는 가야금이다. '삼국사기'에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고 나서 우륵에게 12곡을 짓도록 하였다. 우륵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서 악기를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재위 540~576)에게 의탁하니, 진흥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 충주의 옛 이름)에서 편히 살도록 하고서 곧 주지, 계고, 만덕을 보내서 그 업을 전수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국원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으로 알려져 있는 탄금대가 있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 "변진(弁辰)에 슬(瑟)이 있는데 그 모양은 축(筑)과 비슷하다.:고 하여, 변진지역에 중국의 슬이나 축이 아닌 어떤 현악기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슬은 25현의 현악기이고 축은 대쪽(竹片, 대를 갈라 쪼갠 조각)으로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13현의 현악기이다. 따라서 음악사학적으로는 가실왕이 변진지역에 있었던 기존의 고대 현악기를 개량하여 가야금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보 195호 토우장식 장경호/ⓒ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95호 토우장식 장경호/ⓒ국립중앙박물관


또한 경주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장경호(長頸壺, 4~5세기 경으로 추정)에 표현된 임산부의 현악기 연주모습에서 보듯이 신라에 가야금을 받아들인 6세기 중엽 이전에 '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해왕 17년(212)에 물계자가 나라의 환란에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산속에 들어가 은거하며 탔다는 금(琴)과 자비왕(재위 458~479)때 백결선생이 세모(歲暮)에 방아를 찧을 거리가 없어 슬퍼하는 아내를 위로하고자 방아 찧는 소리를 내며 탔다는 금(琴)은 거문고나 가야금이 아닌 바로 변진지역에 있었던 고대 현악기이다.

신라에는 고대 현악기 '고'와 가야금 이외에 비파와 종적도 있었다. 4~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우에 그 연주모습이 나타나 있다.



4.통일신라시대

삼국이 통일된 뒤에 삼현(三絃,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삼죽(三竹, 대금, 중금, 소금), 박(拍), 대고(大鼓)가 연주되었다.

당과의 활발한 교류로 통일신라에 당악(唐樂)이 들어왔고, 그 영향으로 삼현 삼죽에 반섭조(般涉調), 봉황조(鳳凰調)와 같은 당악의 악조가 쓰이기도 하였다. 당악기로는 725년(성덕왕 24)에 조성된 상원사 범종에 공후, 생, 쟁, 당적, 요고, 당피리, 당비파 등이 보이고, 883년(헌강왕 9)에 건립된 경북 문경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에 생, 당적, 당비파, 동발, 당피리, 박 등이 보인다.

와공후/ⓒ한국학중앙연구원


당악과 구분하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로 향악(鄕樂)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이란 한시에는 서역에서 유래한 춤과 음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당악이 유입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역음악과 춤이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향악으로 불린 것이다. <향악잡영>중 하나인 월전(月顚)은 서역 우전국(지금의 Khotan)에서 전래한 탈춤의 일종이며, 또다른 하나인 속독(束毒)은 서역 소그디아나제국에서 유래한 춤이다.


<월전>

어깨는 올라가고 목은 움츠렸으며 상투는 우뚝 솟았네.

팔 걷어붙인 뭇 선비들 요란하게 잔을 부딪히네.

노랫소리 들리자 한바탕 웃음소리

밤새 휘날린 깃발이 새벽을 재촉하는구나.


<속독>

고수머리와 남빛 얼굴의 낯선 사람들이

데를 지어 뚤에 와서 난새 같이 춤을 추네.

북소리 둥당둥당 바람은 살랑살랑

남북으로 뛰놀면서 끝없이 춤추네.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권도희 김성혜 이지선 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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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과 세오녀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내용이 없으나 고려초기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에 실려있다.


[사진 삼국유사 권1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한국학중앙연구원]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년 정유년(157년)에 동해 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로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하나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제기를 살펴볼 때, 이때를 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그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알리고 세오녀를 왕께 바쳤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렸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사진 포항 호미곶 연오랑과 세오녀상/국정브리핑]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자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짐의 비(妃)가 짜 놓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오랑이 준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했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은 영일현(迎日懸)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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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가야의 영역/두피디아]


 다섯가야

 '가락기(駕洛記)' 찬(贊)에 보면, 하늘에서 자주색 끈 한 가닥이 내려와 둥근 알 여섯 개를 내렸는데, 다섯 개는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가 이 성에 있게 되었다. 성에 남은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다섯 개는 각기 다섯 가야의 군주가 되었으니, 금관(金官)을 다섯의 숫자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고려의 '사략(史略)'에는 금관까지 숫자에 넣고 창녕(昌寧)을 더 기록했으니 잘못된 것이다.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阿羅伽耶) 라(羅)를 야(耶)로 쓰기도 한다. 지금의 함안이다., 고령가야(古寧伽耶) 지금의 함녕이다., 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이다., 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으로 벽진이라고 한다., 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이다. 다.


[사진 가야금관/두피디아]


 또 고려의 '사략'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년(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첫째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 둘째 고령(古寧) 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일명 기성(岐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상주다., 셋째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인데 아마 고령을 잘못 적은 것 같다. 며,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 앞의 주와 같이 성산은 벽진강라고도 한다. 이다."

[삼국유사,기이제1권/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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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서국 유적지/쿠키뉴스]


 이서국

 노례왕(努禮王) 14년에 이서국(伊西國) 사람이 금성(金城)을 침공해 왔다. 운문사(雲門寺)에 예부터 전해 오는 '제사납전기( 諸 寺納田 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관(貞觀) 6년 임진년(632년)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淸道) 땅이므로 청도군은 옛날의 이서군이다.

 [삼국유사]


 (정관(貞觀):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 사용했다.)


이서국 전설

때는 서기 297년. 신라 유례왕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길목에 있는 이서국을 공격했다. 이서국은 강하게 저항했다. 신라의 공격에 위기감을 느낀 이서국은 방어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금성(지금의 경주)을 공격했다. 이서국의 공격이 워낙 드세 쉽사리 물리칠 수 없었다. 이때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과 함께 이서국을 물리쳤다. 이 군사들을 대나무잎을 귀에 꽂았다고 해 '죽엽군(竹葉軍)'이라 했다. 이서국을 물리친 이후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은 사라졌다. 다만 대나무잎만 신라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었다. 미추왕의 음덕으로 신라가 이서국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금성에서 이서국 군대를 물리친 신라는 이서국을 공격했다. 이서국과 신라는 이서산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절벽 위에 축조된 이서산성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이서산성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유례왕이 이서산성에서 멀지 않은 운문사로 군사를 철수시킨 뒤, 보양 스님께 어떻게 하면 이서산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보양 스님은 "개라는 짐승은 밤에는 잘 지키지만 낮은 지키지 못하고, 앞은 지켜도 뒤는 꺼려 한다. 낮에 북쪽을 공격하라"고 했다. 이서산성이 있는 산의 모습이 달리는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유례왕이 보양 스님의 말대로 했더니 이서산성은 함락됐다. 신라에 패한 이서국의 왕과 왕족들은 이서산성에서 빠져나와 화양읍 동천리 신둔사 뒷산의 봉우리로 숨었다. 왕과 왕족들이 숨었다고 해, 봉우리 이름이 '은왕봉(隱王峰)'이다. 화양읍 서상리에는 '금장들'이라는 들이 있다. 이서국 왕과 왕족들이 이서산성을 나와 피신하면서, 이서국의 수많은 금은보화를 옮기지 못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금장들이라고 한다.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에 나즈막한 산이 하나 있다. 농촌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진입로 한켠에 '이서국 성지'라고 적혀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비석의 옆면에는 '신라 유례왕 7년(서기 297년) 금성을 공략하다가 반격을 받아 폐성 함락으로 멸망하였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곳이 이서국의 왕성(王城)인 백곡토성이 있었던 곳이다. 흙으로 만든 성이기에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백곡토성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비석에 적혀있는 폐성(吠城)이 있다. 주구산성(走拘山城)이라고도 한다. 산성이 있는 산의 모습이 달리는 개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서산성으로 부른다. 이서산성이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면서 이서국은 멸망했다.[출처:쿠키뉴스/기사원문: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3&aid=0000058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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