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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에는 각종 양념이 들어간다. 고추, 파, 마늘, 새앙, 부추 등 경우에 다라 여러 가지가 조합되어 참가되는데, 이런 양념들은 우리에게 철분, 비타민, 칼슘을 제공한다. 특히 마늘은 쌀밥을 먹을 때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B1의 흡수를 도와 각기병을 막아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양념들이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파슬리, 로즈마리, 육두구, 정향 등의 향신료(香辛料)는 음식의 맛과 향을 돋우기 위해 넣는 첨가물로서, 전세계 여러 민족은 모두 자신들이 즐기는 향신료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에 썼던 향신료로는 마늘, 새앙, 겨자, 천초 등이 있었다. '산가요록(山家要錄,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요리서)'에는 이 밖에도 정가, 노야기, 분디나무 잎 등 다양한 향신료가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정작 가장 중요한 고추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추는 본래 감자, 옥수수처럼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건너온 식품이다. 다라서 신대륙이 발견되고 그곳의 물산이 아이사에 전해지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나라에서 고추가 전해지기 전까지 고춧가루의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 천초(川椒)가루이다. 천초는 그냥 초(椒)라고도 하며, 촉초(蜀椒)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산쇼(山椒)라고 부른다. 천초는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아직도 추어탕에 양념으로 쓰이고 있는데, 추어탕에 매운맛을 내는 짙은 갈색 가루가 바로 천초가루이다.


천초 껍질/ⓒ위키백과


천초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 자생하는 초피나무 열매 껍질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서 양념으로 쓰며, 쌉싸래하고 매운맛이 나는 향신료이다. 허균(許筠)이 지은 음식에 관한 책 '도문대작(屠門大嚼)(1611)에 '초시(椒豉)'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7세기에 천초로 고추장과 비슷한 형태의 장을 담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요록(要錄)'(1680년경)이라는 요리책에도 오이김치를 담글 때에 겨잣가루와 함께 천초가루를 양념으로 쓰고 있다.


초피나무/ⓒ위키백과


그러다가 고려 중기에 우리나라에 후추가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서역에서 온 물건에 호(胡)자를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서역에서 온 복숭아처럼 생긴 과일을 호두(胡桃)라고 했듯이 서역에서 온 초(椒)라는 뜻에서 호초(胡椒)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후추가 되었다.


후추열매/ⓒ학국학중앙연구원


후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입맛을 돋우는 최고의 향신료로 각광받았다. 유럽의 경우 오래 묵은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 주는 중요한 향신료로서, 멀리 인도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값이 상당히 비싸서 알갱이 수를 세어 팔 정도였다.


후추는 우리나라에는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처음 보이며, 신안 앞바다 해저에서 발견된 원나라 무역선의 물품 가운데에서도 발견된 일이 있다. 후추는 열대지방의 식물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므로 값이 상당히 비쌌다. 그래서 왕의 하사품으로 등장했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일본 사신이 잔칫상에 후추알을 뿌리자 조선의 악공(樂工)과 기녀들이 비싼 후추알을 줍느라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던 일을 소개하고 있다.


유구국(琉球國: 현 오키나와)에서 수입해 오는 후추 값이 너무 비싸고 또 구하기도 어려워서 조선시대 15세기에는 국내에서 재배하려는 노력도 해 보았으나 우리나라 풍토에 맞지 않아 실패했다. 결국 너무 비싸서 음식의 양념으로 쓰기에는 적절치 않아 약재로 많이 쓰였다. 때로는 더운 여름날 후추알을 갈아 물에 타서 마시며 갈증을 가라앉히기도 했으니, 쌉싸래한 맛이 지금의 탄산음료를 마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발발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해졌다. 고추라는 이름은 고초(苦椒)ㅇ에서 온 것으로, '매워서 열이 나는 초'라는 뜻이다. 고추는 일본에서 온 매운 식품이라는 뜻에서 왜겨자(倭芥子)라고 했고, 때로는 서양 오랑캐 남만(南蠻)에서 들여온 초라고 해서 남만초(南蠻椒), 번초(蕃椒)라고도 했으며, 매운 가지라는 뜻의 날가(辣茄)라고도 불렀는데, 실제로 고추는 멕시코 원산의 가짓과 식물이다.


고추는 아마도 1600년을 전후하여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추에 관한 기록은 1614년경에 편찬된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일종의 백과사전)에 처음 보인다. 그 측에 기록되기로는, 주막집에서 소주 안주로 고추를 놓았는데, 고추가 하도 매워서 그것을 먹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이야기로 생각되지만, 새로운 식품 고추가 주었던 강렬한 인상이 그렇게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추를 안주로 먹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당시 기록에도 고춧가루에 관한 내용은 없으므로, 그때의 고추는 말려서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어 양념으로 쓴 것이 아니라 통째로 그대로 식품으로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1670년경에 쓴 '음식디미방'에서도 마늘김치에 고춧가루를 양념으로 쓰지 않고 천초가루를 양념으로 쓰고 있다.


고추가 가루 상태로 양념으로 쓰인 것은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처음 보이며, 이때에는 고춧가루뿐만이 아니라 고춧가루로 고추장을 담가 먹는 만초장(蠻椒醬)도 등장한다. 이때부터 우리의 식생활은 엄청난 변화를 겼었다. 서양에서는 근대에 접어들어 일어난 식생활의 혁명으로 18세기의 감자, 포크, 개인접시를 들고 있지만, 우리나라 식생활의 혁명은 고춧가루의 사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추도 김치처럼 우리 식품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1980년대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 모든 음식이 빨간 것이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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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와 소금 또는 향신료만으로 만든 김치는 단백질의 부족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예전 김치에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한 다양한 김치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치에 육류를 넣은 것이다. 17세기 안동장씨의 '음식디미방'(1670년경)에는 생치김치, 생치지, 생치짠지라는 이름으로 오이김치에 ㅁ라리지 않은 꿩고기, 즉 생치(生雉)를 넣어 만드는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또 18세기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는 어육(魚肉)김치가 소개되어 있고, 19세기 빙허각(憑虛閣)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에도 어육김치와 전복김치가 등장한다. 어육김치는 대구, 북어, 민어, 조기 등의 대가리와 껍질을 모아 두었다가 김장 때에 김치에 넣는 것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말린 새우살과 같은 어패류도 김치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오이에 꿩고기를 넣어 담그는 꿩김치(생치김치)/ⓒ농촌진흥청


그런데 가장 널리 쓰인 단백질을 섭취하는 방법은 젓갈이다. 그래서 '규합총서'에서는 김치 담그는 법에 곤쟁이젓뿐 아니라 조기젓, 준치젓, 밴댕이젓, 굴젓 등 여러 가지 젓갈이 소개되어 있다. 많지는 않지만 김치에 새우젓을 쓰는 사례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19세기에 접어들어 어패류나 고기를 넣어 단백질을 공급하고 맛을 돋우는 고급 김치가 등장했고, 이때부터 젓갈이 김치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생선은 제철에 한꺼번에 많이 잡은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장하고 조리하여 먹었다. 크기가 커서 볼품이 있는 것은 식해(食醢)를 만들어 먹었다. 생선을 소금에 절이고 좁쌀 따위의 곡물을 첨가하여 발효시켜 먹는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등 여러 가지 식해가 동해안 지방에서 특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리고 크기가 작아 식해를 만들기 적합하지 않은 새우, 멸치 등은 젓갈을 담가 먹었다. 물론 조기젓, 밴댕이젓, 굴젓 등 크기와 관계없이 삭혀서 만든 젓갈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들은 액젓을 만들어 먹었다.


젓갈과 액젓은 김치에 첨가되어 김치의 맛을 좋게 하였다. 어패류를 소금에 절여 오래 묵혀 발효시키면 단백질이 차츰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고유의 맛과 향기를 낸다. 2,3개월 숙성시키면 생선뼈가 물러지고 분해되어 흡수하기 쉬운 상태의 젓갈로 변하여 특유의 맛과 향기를 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젓갈은 질 좋은 단백질과 칼슘, 지방질의 공급원이 되었다.


젓갈 가운데 새우젓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조기는 2,3개월 숙성시키면 조기젓이 되고, 1년 이상 숙성시키면 조기젓국이 된다. 한반도 남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멸치도 멸치젓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예전 문헌에 멸치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이지 않으므로 조선시대에는 김치의 젓갈로 많이 쓰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젓갈이 본격적으로 김치에 사용된 것은 고춧가루와 함께 18세기부터인 듯하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젓갈은 이미 15세기에 김치에 쓰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례가 많이 보이지 않아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고춧가루가 사용되면서 고춧가루가 젓갈의 산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자 적극적으로 김치 조리에 이용된 듯하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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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헌에 김치 제조법이 대강이나마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이다. 이규보는 여기서 순무를 여름 석 달 동안에는 장에 절여 먹고, 겨울 석 달 동안은 소금에 절여 먹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채소를 장이나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치를 소금에 절여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김치의 종류와 재료, 제조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요리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이 처음이다.


오이지/© 깊은나무-다음백과


'산가요록'에는 여러 종류의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순무김치[청침채(菁沈菜)], 오이김치[과저(瓜菹)], 가지김치[가자저(茄子菹)], 파김치[생총침채(生蔥沈菜)]는 물론이고 토란김치[우침채(芋沈菜)], 고사리김치[침궐(沈蕨)], 마늘김치[침산(沈蒜)] 등 여러 가지 김치 담그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여름에 속성으로 만들어 먹는 물김치[즙저(汁菹)], 겨울에 무를 이용한 동치미[동침(凍沈)]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15세기의 김치는 지금의 김치와 사뭇 달랐다. 우선 김치의 재료를 살펴보면, 지금은 김치의 가장 일반적인 주재료인 배추가 당시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농서(農書)나 요리서에서 채소 재배법이나 요리법을 소개할 때에도 배추는 오이, 무, 가지, 동아(冬瓜) 등에 비해 아주 소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고문헌에서 배추는 '숑(숭(崧)]', '숑채[숭채(崧菜)]' 또는 '배채[백채(白菜)]'로 기록되었는데, 16세기의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도 '숭저(崧菹)'가 보이고 '산가요록'에도 '배추김치 담그기'라는 뜻의 '침백채(沈白菜)'가 보이지만 단 한 번 등장 할 뿐이다. 이처럼 김치의 주재료로는 배추보다 오이, 가지, 순무, 동아, 파 등의 채소가 널리 쓰였다.


배추의 품종이 꾼준히 개량되어 제대로 결구가 된 품종이 생산되어 김치 재료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쯤으로 짐작된다. 1800년경에 간행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 오늘날의 배추김치와 같은 통배추김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과 추위에 강하면서도 맛과 질감이 좋은 배추가 만들어져 본격적으로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에 우장춘이 개발한 원예 1호, 원예 2호 배추부터였다.


순무/ⓒ위키백과


그리고 무도 지금과 같은 무가 아니라 순무 종류가 더 많이 쓰였다. 지금의 무는 '댓무'라고 하여 나복(蘿葍)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나박김치라는 말은 본래는 무김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댓나무보다는 청(菁)이라고 쓰는 '쉿무', 즉 순무가 더 많이 쓰였고, 기록에도 나복보다는 청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통상 김치라 하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것을 연상하지만, '산가요록'에는 과일도 김치의 주재료가 되고 있다. 즉 수박, 복숭아, 살구 등의 과일이 김채재료로 쓰인 것이다. 사실 과일과 채소는 식물학의 분류방법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즉 과학이 아니라 문화적인 분류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파파야를 익지 않아 파란 상태에서는 채소로 먹고, 노랗게 익으면 과일로 먹는다. 우리도 토마토를 굳이 채소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토마토는 과일일 뿐이다. 서양사람들은 토마토를 스파게티나 햄버거, 샌드위치의 재료로 쓰니까 채소라고 하지만, 우리는 토마토를 과일로 먹지 조리 재료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의 우리 조상들은 수박, 복숭아, 살구를 채소로도 썼던 것이다. 이때의 김치는 반찬으로 과일을 조리하기 위한 것으로도 쓰였지만, 과일을 오래 저장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전기의 김치에 대한 기록에는 젓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젓갈이 김치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전에도 젓갈이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세종 때에 기록에 어린 오이에 곤쟁이젓[자하해(紫蝦醢)]을 넣은 오이김치가 보이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譚)'이라는 책에서도 곤쟁이젓으로 담근 오이김치를 세상에서 '감동(感動)'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다. 흔치는 않지만 김치에 젓갈을 넣은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가요록'에는 곡물을 넣어 발효시킨 김치가 보인다. 여름에 물김치를 담글 때에 날콩이나 기울을 찧어 만든 덩어리를 가루를 내어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특별한 김치 외에는 거의 모든 김치에 고춧가루가 쓰이지만 이때는 양념 중에 고춧가루가 없다. 고추는 17세기에 도임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김치가 18세기에 접어들어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이고 젓갈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19세기에 배추김치가 크게 확산되면서 다른 나라의 김치와 다른 독특한 김치가 만들어졌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함께보기: 초기 김치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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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는 김치말고 '지'라는 말도 있다. 오이지, 짠지, 섞박지, 장아찌, 젓국지, 게국지 등의 여러 가지 김치 이름에 '지'가 붙고, 지금은 일본에서 유래된 다쿠앙도 단무지라고 부른다. '지'는 뒤에 붙기만 하는 말이 아니라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그대로 김치라는 뜻으로 쓰인다.

'지'는 '디히'에서 온 말로, 15세기 문헌에서 '겨울김치'를 '겨디히'라고 불렀다. 그 디히가 지히, 지이를 거쳐 지로 바뀐 것이다. 장아찌라는 말도 장에 절인 김치라는 뜻의 '쟝앳디히'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보다는 김치라는 말이 훨씬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김치'라는 말은 '담근 채소'라는 뜻의 한자어 '沈菜'에서 유래되었고, 김장도 '침장(沈藏)'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한자어 '沈菜'를 우리말로 어떻게 표기했는가 하는 것을 추적해 보면 김치의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의 '沈菜'를 조상들이 어떻게 읽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침채의 한글 표기를 최초로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1527년에 편찬된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인데, 이 책에서 '저(菹)'를 '딤채 조'로 해석했다.


딤채(팀채) > 짐채(침채) > 김채(짐치) > 김치


그런데 1700년을 전후해서 '디'가 '지'로, '티'가 '치'로 바뀌는 구개음화가 진행되어 '딤채'는 '짐채'로 변했다.

그런데 '딤채'가 사용되던 시기에도 '沈菜'를 '팀채'로 읽은 사례가 적잖이 보인다. '훈몽자회'보다 약 50년 뒤에 간행된 '내훈(內訓)'이 그렇다. 물론 '팀채'도 1700년을 전후해서 구개음화의 진행으로 '침채'로 바뀌었다.

결국 '沈菜'는 초기에 '딤채' 또는 '팀채'로 불렸고, 18세기쯤에는 구개음화 현상으로 인해 '짐채' 또는 '침채'로 불렸다.

'딤채'와 '팀채'가 공존했던 16세기에 '沈'자의 공식적인 음은 '팀'이었다. 그런데 왜 일부 책에서 '딤채'라고 했을까? '딤채, 짐채'로 부른 '훈몽자회' '신증유합(新增類合)' '구황촬요벽온방(救荒撮要壁瘟方)' '두창경험방언해(痘瘡經驗方諺解' 등의 책은 어린이 또는 초보 학습자를 위해 간행한 책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반서민들이 쉽게 보게 하기 위해 한글로 언해한 책들이다. 반면에 '팀채, 침채'로 부른 '내훈' '소학(小學)' '왜어유해(倭語類解)' '한청문감(漢淸文鑑)' 등의 책은 양반들의 수신서(修身書)이자 유교경전이며, 외국어 학습자들을 위한 전문서적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치를 '딤채'라 불렀는데 양반 식자들이 김치는 '沈菜'라는 한자말에서 온 것이니까 '팀채'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팀채'라는 말은 책에만 있던 말이지 일반인들이 일생생활에서 실제로 썼던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짜장면'이라고 하는데 방송에서만 유독 '짜장면'이 중국어 '자쟝미엔(炸醬麵)'에서 유래된 것이니까 '자장면'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출처: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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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발효음식, 김치! 우리나라 식탁이라면 빠질 수 없는 김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어디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역사속 김치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김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다. 삼국지 위서 30권에 동이전(東夷傳) 중 고구려 편에 나타나는데-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은 비록 중국측의 기록이지만 고대사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우리민족의 고대사를 연구할 때 귀중한 사료 중 하나로써 동이(東夷) 즉,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왜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내용을 보면 "고구려인은 술 빚기,장 담그기, 젓갈 등의 발효음식을 매우 잘한다" 고 기록돼 있다. 이는 이미 이 시기에 저장발효식품이 보편화 되고 생활화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언제부터 김치를 만들어 먹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김치를 주로 '저(菹)'로 표기했으며 그밖에도 여러가지 한자어가 사용되었다. 침채(沈菜), 염채(鹽菜), 함채(鹹菜), 엄채(醃菜), 저채( 菹菜), 침저(沈菹), 침지(沈漬) 등이 그것이다.

 김치를 뜻하는 낱말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10세기 고려시대이다. 즉 983년(성종 2년)에 환구(圜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 차려 놓는 음식 가운데 미나리김치[근저(芹菹)], 죽순김치[순저(筍菹)], 순무김치[청저(菁菹)], 부추김치[구저(韭菹)] 등이 보이는데, 이것들이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으로 분명히 보이는 김치이다.

 하지만 10세기에 처음으로 김치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10세기 전에, 오래전부터 김치를 만들어 먹었는데 지금까지 남은 기록에 그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김치를 '저(菹)'로 기록하여, 오이를 깎아 절여서 만든 '저(菹)'가 '시경'에  처음으로 보인다. 그때의 저는 공자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먹었다는 것으로 보아 오이를 시큼하게 절인 것으로서, 아마도 지금의 오이피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8세기의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의 문서에 제조방법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된 '츠케(漬)'가 등장한다. 그것은 김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김치를 '츠케모노(漬物)'라고 부른다.

 중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김치가 있었고, 6세기에 편찬된 '제민요술( 濟民要述)'이라는 책에 김치 제조법이 소개되어 있으며, 일본에도 8세기에 김치가 있었으므로, 중국과 일본의 문화적 가교 역할을 했던 한반도에도 일본에 김치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김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정창원 문서에 수수보리지(須須保理漬)라는 순무김치 만드는 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수수보리는 일본에 누룩으로 술 만드는 법을 알려 준 백제사람 이름이므로 그 순무김치도 백제에서 제조법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치가 수천 년 전부터 중국에 있었고 8세기 일본의 기록에 김치가 등장하므로 우리나라에도 김치가 그 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김치는 꼭 다른 나라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도 있다.

 김치의 종류가 수백 가지가 넘는다는 말도 있듯이, 어떤 채소든 절여서 먹을 수만 있다면 김치가 될 수 있다. 음식물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에 생선은 바닷가에서나 구할 수 있고, 고기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먹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은 곡식과 채소였다. 그런데 김치의 재료는 꼭 밭에서 나는 채소뿐이 아니었다. 고려 말의 시에도 여뀌풀에 마름을 넣어 소금에 절였다는 말이 있듯이 야생초도 절여 먹으면 김치가 된다.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 진휼식품으로 나누어 주었던 것이 쌀, 콩, 장, 미역국이었는데, 장을 나누어준 것은 야생초를 그냥 먹으면 탈이 나기 때문에 장으로 조리를 해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결국 김치는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음식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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