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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제2대 남해차차웅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 자충慈充과 동음어이며 '스승'의 옛말 혹은 존장자에 관한 칭호)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일컫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전한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4년)에 즉위하여 21년 동안 다스리고 지황(地皇, 한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 평제平帝를 죽이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다.) 4년 갑신년(24년)에 죽으니, 이 왕이 바로 삼황(三皇, 혁거세왕, 노례왕, 남해왕을 말한다.)의 첫째라고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불렀는데,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어떤 이는 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시대의 명문장가로 '화랑세기'를 지었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다.)이 말했다.

 

"차차웅은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존장인 자를 자충이라 한 것이다."

 

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잇금[齒理](잇자국을 말한다.) 을 말한다. 처음에 남해왕이 승하하자 아들 노례(努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자 탈해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합니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했다. 옛날부터 이렇게 전해 왔다.

 

혹은 왕을 마립간(麻立干, 립立을 수袖로 쓰기도 한다.)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은 이렇게 말했다.

 

"마립이란 궐(橛, 서열을 말한다.)을 말하는 방언이다. 궐표(橛標)는 자리에 따라 두는데, 왕궐(王橛)이 주가 되고 신궐(臣橛)은 아래에 두게 되어 있어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삼국사론三國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거서간과 차차웅이라 부른 임금이 각각 한 명씩 있고, 이사금이라 부른 임금이 열여섯 명이고, 마립간이라 부른 임금이 넷 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을 지으면서 모두 무슨 왕[某王]이라 칭하고 거서간이나 마립간 등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 말이 비루하고 거칠어서 일컬을 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롟하면서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 또한 옳은 일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를 갈문왕(葛文王, 신라 시대 임금의 존족尊族과 임금에 준하는 자에게 주던 칭호다.)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 시대에 낙랑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또 천봉(天鳳) 5년 무인년(18년)에 고구려의 속국 일곱 나라가 투항해 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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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문화컨텐츠닷컴

 

만파식적(萬波息笛)

[삼국사기] '잡지(雜誌)'편에 나오는데, 김부식은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만파식적'을 풀이하면 '거센 물결을 잠재우는 피리'라는 의미다.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 재위 681~692)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성은 김씨며, 개요(開耀, 당나라 고종의 12번째 연호로 681년에서 682년까지 사용했다.) 원년 신사년(681년)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感恩寺,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나 12미터에 달하는 두 탑은 건하다.)를 지었다.

[사중기寺中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완정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 2년(682년)에 완성했다. 금당(金堂) 섬돌(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돌층계) 아래를 파고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었는데, 바로 용이 절 안으로 들어와 서리도록 마련한 것이라 한다. 대개 유조에 따라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大王岩,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바닥가에서 보이는 돌무더기다.)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후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했다.

이듬해 임오년 5월 초하루(어떤 본에는 천수天授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湌, 신라 시대 17관등 중 제4위로 해간海干, 파미간波彌干이라고도 한다.)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일관(日官, 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원) 김춘질(金春質 혹은 春日이라고 했다.)에게 점을 치도록 명령했다.

일관이 왕께 아뢰었다.

"돌아가신 임금(문무대왕文武大王)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며, 또 김유신 공이 33천(天)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킬 보배를 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꼐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신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산의 형세는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혹은 산 역시 대나무처럼 밤자으로 합쳐졌다 떼어졌다 했다고 한다.

사신이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이튿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까지다.)에 대나무가 하나로 합치자, 천지가 진동하고 이레 동안 폭풍우가 치면서 날이 어두워졌다가 그달 16일에야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으로 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용을 영접하여 함께 자리에 앉았다.

왕이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떨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용이 말했다.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친 후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께서는 바닷속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또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한 마음이 되어 값으로는 정할 수 없는 이런 큰 보물을 내려 저에게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옥으로 답례하고는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었다. 17일에 지림사(祗林寺, 기림사라고도 하며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에 있다.)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다.)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말을 달려와 축하하고 천천히 살펴본 다음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물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한 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태자가 아뢰었다.

그래서 왼쪽에서 두 번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못이 되었따. 그래서 용연(龍淵)이라 불렸다.

왕은 궁궐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 때 이르러 천수(天授, 주周나라 측천제則天帝의 연호로 천수라는 연호는 2년밖에 안 썼으므로, 천수 4년은 장수長壽 2년을 말한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로 690년에서 705년까지 재위했다.) 4년 계사년(693년)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이 있었으므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息笛)이라 불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傳記)에 있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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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콘텐츠진흥원 제9회 캐릭터 디자인 공모전 장려상 - 경문왕과 복두장이>

 

경문대왕(景文大王, 신라 제48대 왕, 재위 861~875)의 휘는 응렴(膺廉)이고 열여덟 살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약관의 나이가 되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은 낭(郎)을 불러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고 물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헌안왕 4년 9월에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응렴은 그때 나이 열다섯이었다. 내용은 이와 비슷하다.).

"낭은 화랑이 되어 사방을 유람했는데 무슨 특별한 것이라도 보았는가?"

낭이 아뢰었다.

"신은 아름다운 행실을 가진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게"

낭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데도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유한데도 의복이 검소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 귀한 세력이 있는데도 위세를 펼치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그가 어진 것을 알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짐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그대에게 시집 보내 시중을 들게(원문의 '건즐巾櫛'은 수건과 빗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다른 사람 밑에서 시중을 든다는 의미다.) 하고자 한다."

낭은 자리를 피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후 물러났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말하니 부모가 놀라고 기뻐하며 자제들을 모아 의논했다.

"왕의 맏공주는 외모가 아주 보잘것없지만, 둘째는 매우 아름다우니 그녀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

낭이 무리 중에 우두머리인 범교사(範敎師,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 의하면 헌안왕 4년에 흥륜사의 승려에게 물었다는 말이 있다.)란 자가 이 말을 듣고는 집으로 찾아와 낭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공에게 시집 보낸다는 것이 사실이오?"

낭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럼 둘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겠소?"

낭이 말했다.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동생을 선택하라고 명하셨소."

범교사가 말했다.

"낭이 만약 동생을 선택한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눈 앞에서 죽을 것이오. 하지만 맏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잘 살펴 결정하시오."

얼마 후 왕이 날을 잡고 사람을 보내 낭에게 말했다.

"두 딸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는 오직 공의 뜻에 따르겠다."

심부를 갔던 사람이 돌아와 낭의 뜻을 아뢰었다."

"맏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나자 왕이 병이 위독해져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했다.

"짐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맏딸의 남편인 응렴이 이어받도록 하라."

이튿날 왕이 죽자 낭은 유조를 받들어 즉위했다. 그러자 범교사가 왕에게 와서 아뢰었다.

"제가 아뢴 세 가지 좋은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맏공주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지금 왕위에 오르신 것이 그 한 가지고, 이제 쉽게 아름다운 둘째 공주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두 가지며, 맏공주를 선택했기 때문에 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왕은 그 말을 고맙게 여겨 대덕(大德, 본래 부처를 가리켰으나 덕망이 높은 고승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이란 벼슬을 주고 금 130냥을 내렸다.

왕이 죽으니('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 의하면 즉위 15년 7월 9일이다.) 시호를 경문(景文)이라 했다. 왕의 침전에는 매일 저녁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는데, 대궐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무서워 몰아내려 하니 왕이 말했다.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잠들 수가 없으니 몰아내지 마라."

그래서 매일 잠잘 때면 뱀이 혀를 내밀어 왕의 가슴을 덮었다.

왕은 즉위한 후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자랐다.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직 복두장(幞頭匠, 왕의 모자를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복두장이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道林寺, 옛날 입도림入都林 가에 있었다. 이는 현 경주시 구황동 모전석탑지로 추측) 대숲 가운데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대나무를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왕이 그것을 싫어하여 대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는 산수유를 심었는데 바람이 불면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

화랑 요원랑(邀元郞), 예흔랑(譽昕郎),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 지금의 강원도 통천이다.)을 유람하면서 임금을 위해 나를 다스릴 뜻을 은근히 품었다. 그래서 가사 세 수를 짓고, 다시 사지(舍知, 신라 17관등 중 제13위 관등) 심필(心弼)에게 공책[針卷]을 주고 대구화상(大矩和尙 향가에 뛰어났던 신라의 승려로서 진성왕의 명에 의해 향가집'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다.)에게 보내어 노래 세 수를 짓게 했는데, 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고,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며, 셋째는 문군곡(問群曲)이다.

익덧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아주 기뻐하여 상을 내렸다 하는데 가사는 자세하지 않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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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잡간 위홍(魏弘, 제48대 경문왕의 친동생) 등 서너 명의 총애하는 신하가 정권을 쥐고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근심스러워하자 어떤 사람이 다라니(陀羅尼, 범어 dharani의 음역. 석가의 가르침의 정요精要로서, 신비한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의 은어(隱語, 특정한 집단에서 구성원들끼리만 사용하는 은밀한 용어)를 지어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이것을 손에 넣고 말했다.

"왕거인(王居仁)이 아니면 누가 이런 글을 짓겠는가?"

왕거인을 옥에 가두자 왕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그러자 하늘이 곧 그 옥에 벼락을 내려 모면하게 해 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燕丹泣血虹穿日(연단읍혈홍천일)

연단의 피울음은 무지개와 해를 뀌뚫고,

※연단은 전국시대 진시황의 죽이려다 실패하고 죽임을 당한 연나라 태자 단을 말함.

 

鄒衍含悲夏落霜(추연함비하락상)

추연이 머금은 비애는 여름에도 서리를 내렸네

※추연은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연나라 소왕의 스승이 되었지만 혜왕이 즉우하자 참소를 받아 옥에 갇혔는데 한여름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今我失途還似舊(금아실도환사구)

지금 내가 길 잃은 것은 옛 일과 비슷한데,

 

皇天何事不垂祥(황천하사불수상)

아! 황천은 어찌하여 상서로움을 내리지 않나?

 

다라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무망국 찰니나네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詞."

 

풀이하는 자들이 말했다.

"'찰니나제'란 여왕을 말하며, '판니판니소판니'란 두 명의 소판(蘇判, 신라 17관등 중 제3위인 잡찬의 별칭)을 말하는데, 소판이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명의 아간(阿干, 신라 17관등 중 제6위인 아찬의 별칭)을 말한 것이고, '부이'란 부호부인을 말한다."

 

거타지/문화컨텐츠닷컴

 

이때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 나루터와 섬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를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사(弓士)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지금의 백령도, 지방에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도착했을 때,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 열흘 넘게 꼼짝없이 머물렀다. 공이 이를 걱정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못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의 물이 한 길 남짓이나 솟구쳤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말했다.

"활 잘 쏘는 사람을 이곳에 남겨 두면 순풍을 만날 것이다."

공은 꿈에서 깨어나 그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말했다.

"마땅히 나무 조작 쉰 개를 만들어 우리들의 이름을 써서 바다에 던진 후 가라앉은 자의 이름으로 제비를 뽑아야 합니다."

공은 그렇게 했다. 군사 가운데 거타지(居陁知,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용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유사하다.)란 사람의 이름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으므로 그를 남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순풍이 불어 배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거타지는 수심에 잠겨 섬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의 신(神) 약(若)인데 날마다 승려 하나가 해가 뜰 무렵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른다오. 그러면 그는 내 자손의 간장(肝腸)을 모조리 먹어치운다오. 이제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았소. 내일 아침이면 반드시 또 그가 올 테니 그대가 쏘아 주시오."

거타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내 특기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고마워하고는 사라졌다.

거타지가 숨어 엎드려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이 밝아 오자 과연 승려가 나타나 이전처럼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려 했다.

이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즉시 늙은 여우로 변해서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노인이 나와 감사해하며 말했다.

"공의 은혜를 입어 내 목숨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그대의 아내로 주겠소."

거타지가 말했다.

"제게 주신다면 평생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하겠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바뀌게 해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는, 두 용에게 거타지를 데리고 사신의 배를 뒤쫓아가 그배를 호위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가 용 두 마리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 사실을 위에 보고했다.

황제가 말했다.

"신라 사신은 반드시 비범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연회를 열어 신하들의 위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나라로 돌아와서 거타지가 품에서 꽃송이를 꺼내자 꽃이 여인으로 바뀌었으므로 함께 살았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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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문화컨텐츠닷컴

제27대 덕만(德曼/德萬)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불법의 수입에 남달랐으며 경주 남산 신유림에 능이 있다.)이고, 성은 김씨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貞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 사용했으며 치세로 유명하여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말이 있다) 6년 임진년(632년)에 즉위하여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씨앗 세 되를 보내 왔다(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보여 주는 예다). 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

명을 내려 씨를 뜰에 심도록 했더니 그 꽃이 피었다가 질 때까지 과연 그 말과 다름이 없었다(모란꽃이 향기가 없다는 말은 수사적 비유다).

둘째는, 영묘사(靈妙寺, 선덕여왕 즉위 원년인 632년에 세워진 절로 찰간지주刹竿支柱만 남아 있다.)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개구리들이 모여 사나흘 동안 울어 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예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둘러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 여인의 생식기 모양이라는 뜻으로 경주에서 대구로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건산과 아화 사이에 있다.)을 물어보면 그곳에 틀림없이 적병이 있을 테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말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나서 각기 1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에워싸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亏召)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포위하여 활을 쏘아 죽였다. 백제 후원병이 1200여 명이 왔지만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경주 여근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셋째는, 왕이 병도 없을 때인데 모든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이 되면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불가에서 말하는 욕계육천欲界六天의 둘째 하늘이다.) 가운데 장사 지내라."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었다.

"어디입니까?"

왕이 말했다.

"낭산(狼山, 높이가 몇십 미터에 불과한 나지막한 언덕이다. 사천왕사 터와 가까이 있다.)의 남쪽이다."

과연 그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지금의 경주시 배반동에서 불국사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터만 남아 있다.)를 지었다. 불경에 말했다.

"사천왕천(四天王天, 육계육천의 하나로서, 동방은 지국천持國天, 서방은 광목천廣目天, 남방은 증장천增長天, 북방은 다문천多聞天이라 한다.) 위에 도리천이 있다."

이에 대왕이 신령스럽고 성스러웠음을 알게 되었다.

왕이 살아 있을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가지 일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말했다.

"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는 것을 알았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배필이 없는 나를 놀린 것이다.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인의 음부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이 흰데, 흰색은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이러한 해석은 그 당시 신라에 음양오행설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다라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여왕의 그 성스러운 지혜에 감탄했다.

세 가지 색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인가? 세 여왕은 선덕(善德), 진덕(眞德), 진성(眞聖)이니 당나라 황제의 놀라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세운 것에 관해서는 '양지사전(良志師傳)에 모두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선덕여왕 시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경주시 인왕동에 있으며 반월성에서 바라보인다. 첨성대는 평지에 세워져 있어 실제 관측에는 부적당한 구조물이고 선덕여왕 시절에 천문 관측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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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78호 '호우(壺杅) 글자가 있는 청동그릇'은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인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다.

호우총은 광복 직후 1946년 우리 손으로는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분포하는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중 하나인데, 부장품으로 '호우 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이 출토되어 신라 고분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무덤이 되었다.

이 청동그릇은 주물로 만들어졌는데, 청동그릇 바닥부분에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고 하는 16자와 상부 중앙에 '우물 정(井)'자가 돋을 새김되어 있어, 을모년(415, 장수왕 3년)에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만든 호우로써 광개토대왕을 장사한지 1년 뒤에 이를 기념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청동그릇이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신라 내물왕의 왕자인 복호(卜好) 또는 그와 관련된 인물에 의해 신라로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주인 또한 복호나 그의 후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호우총은 6세기 초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청동그릇은 만들어진지 약 1백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신라의 고분에 부장품으로 넣어진 것이 된다. 따라서, 이 호우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밖에도 경주에서 출토된 고구려에서 제작된 유물로는 금관총의 청동 네귀항아리, 황남대총 북쪽무덤의 금제 귀걸이와 금동신발이 있다.



보물 1878호, 호우(壺杅) 글자가 있는 청동그릇/ⓒ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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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453호 도기 녹유 탁잔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작품으로 고화도 소성의 회백색 바탕흙에 녹유(綠釉)를 입혀 제작하였으며, 잔과 잔받침이 한 벌로 구성되어있는 받침잔(탁잔 托盞)이다.

잔은 반구형태이고 작고 짧은 굽이 달려있으며, 뚜껑에는 작은 보주형 꼭지가 달려있다. 잔받침에도 높이가 짧은 굽이 있고, 잔받침 내면에는 잔을 잔받침에 꽂을 수 있도록 홈을 만들어 장치했다.


높이: 1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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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은 이양선 선생이 기증한 보물 1151호 '청동 옻칠 발걸이'는 말을 탈 때 사용하던 것으로 청동으로 만들었고, 흑칠을 한 것이 특징이다. 전체 모양은 덧버선과 흡사한데, 덮개에는 선을 촘촘하게 배치해 장식했고, 위쪽과 아래쪽에 구름 형태의 문양을 새겼다. 정확한 제작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쇼소잉[일본 나라(奈良)의 도오다이지(東大寺)에 있는 목조 건출물,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발걸이와 비교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14.7cm, 길이 12.1cm의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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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25-4호 칠곡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25-4호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은제도금수형장식구)'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송림사 오층전탑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높이 22.3cm 크기이다.

1959년 송림사 오층전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금빛이 살아있는 화려한 장식구이지만 탑과 관련된 뚜렷한 목적과 용도는 현재까지 알 수 없다.

송림사 오층전탑을 수리하는 과정에 2층 탑신에서 출토된 석함 안쪽 벽에 놓여져 있었으며, 나무줄기와 가지가 대칭적으로 뻗어있고, 긑은 보주형(寶珠形, 둥근 공 모양 구슬) 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약 2배겨여개의 작은 원형 영락을 달아 장식했으며, 밑부분의 밋밋한 부분은 다른 물체에 꽂기 위한 용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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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626호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견된 보물 626호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는 5세기 신라시대 유물로 높이 9.1cm, 입지름 10.4cm, 바닥 6.5cm 크기이다.

전체 형태는 일반적으로 껴묻는 굽다리접시(접시에 높은 굽을 붙인 형태로 고대 식기의 하나)와 모양이 같은데, 굽다리 중간 부분을 돌출시키고 2줄의 돌대를 만들었으며, 끝 부분에 금판을 덧대어 두툼하게 처리하는 등 흙으로 만든 고배와 그 형태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려고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금제 유물은 신라 지배층의 화려한 장례문화를 잘 보여주는 유물로써, 비슷한 시기 고구려나 백제의 장례 부장품과 비교했을 때 발견되는 유물이 무척 화려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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