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미술과 문학분야에서 사실주의(리얼리즘)가 지배적이던 19세기 유럽에서 음악은 낭만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베리스모(verismo)' 오페라의 등장과 함께 사실주의 이념을 받아들인 작품들이 증가하게 된다.

베리스모는 이탈리아어로 '진실'을 뜻하는 '베로(vero)'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낭만주의 오페라나 교향시가 신화나 영웅담과 같은 비현실적인 내용을 소재로 선택한 것과 달리 일상생활의 사건을 통해 인간의 추악함과 잔학성, 연약함 등을 솔직히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17~18세기 오페라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지 않은 것과 달리 사실주의 오페라는 추하거나 천하다는 이유로 예술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던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에 관심을 기울인다.

현실을 미화시키지 않고 냉정하고 차가운 객관적 재현을 통한 삶의 진리와 의미에 도달하려고 노력한 베리스모 오페라는 중간계층이나 노동자 계층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비극적 주제와 비극적인 결말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특징으로 생각되는 가능 고음, 화려한 장식음을 가진 콜로라투라와 벨칸토 창법의 기교적이고 자기과식적인 아리아 대신 역동적이고 긴장감을 유발하는 레치타티보풍의 선율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미화된 가사, 시적인 은유와 상징적, 추상적 표현의 운문가사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구체적인 표현과 산문적인 가사를 즐겨 사용하여 대중들의 공감을 얻어내었다.


[마스카니, 출처: 위키백과 Bushnell, San Francisco]


베리스모 오페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889년 젊은 이탈리아 작곡가를 대상으로 하는 단막극 오페라 공모전에서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3~1945)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 가 우승하면서부터이다.


[마스카니의 대표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출처: 위키백과 미러]


이작품은 시실리 출신 작가 베르가(Giovanni Verga, 1840~1922)의 소설을 오페라로 만든 것으로 1890년 로마에서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새로운 오페라 장르의 효시가 되었다. 그리고 조르다노(Umberto Giordano, 1867~1948), 레온카발로(Ruggiero Leonacavallo, 1858~1919),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 같은 작곡가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다.

특히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Pagliaci)>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불륜, 질투, 집착, 복수와 같은 극의 소재, 음악적 형식 등이 비슷해서 같이 공연되기도 한다.

사실주의 계열의 오페라 중 하나인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의 <카르멘>에서도 주인공인 집시여인 카르멘과 그의 주변인물들인 노동계급(공장직공, 범죄자(밀수꾼), 낙오자(탈영병), 문제아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무절제한 생활방식, 비도덕성, 폭력, 불륜 등은 카르멘뿐 아니라 사실주의 오페라 작품에서 극의 갈등과 전개를 이끌어가는 중심소재로 사용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1822년 "마탄의 사수" 일러스트레이션, 시작 장면의 막스와 킬리안, 위키백과


이탈리아 오페라는 유랑극단을 통해 러시아에까지 전해질 만큼 유럽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독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베네치아에 이어 1673년 교역도시 함부르크(Hamburg)에 오페라 극장이 설립될 만큼 오페라는 독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오페라는 루터교회가 내세운 자국문화, 자국어를 중시하는 사고에 밀려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사회의식을 반영한 창작극(School drama)이 유행하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과 먼 과거를 주로 다루는 오페라는 주목받지 못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슈츠(Heinrich Schutz, 1585~1672)가 1630년 무렵에 <다프네>라는 최초의 독일어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이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이후 고전시기에 모차르트에 의해 오페라는 인기를 끌지만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독일의 정서와 독일 고유의 음악전통보다는 범민족적인 고전의 가치를 표현하는 데 더 주력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독일 오페라는 낭만 초기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가 작곡한 <마탄의 사수(Der Freischutz, 1821)>로 이야기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벨칸토와 아리아 : 나폴리 오페라




이탈리아 남단에 위치한 나폴리는 바로크 중기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특히 A. 스카를라티(Alessandro Scarlatti, 1660~1725) 같은 작곡가가 중심이 된 나폴리 오페라는 오늘날 우리가 오페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서정적인 아리아를 오페라의 주요 요소로 정착시켰다.

특히 이 시기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의 '벨칸토(Bel canto)' 창법이 개발되면서 성악가들은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길게 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안정된 고음처리와 미세하고 가는 트릴, 음계, 아르페지오 등을 무리 없이 연주하는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콜로라투라(coloratura)와 단순하면서 귀에 쏙 들어오는 서정적 선율의 아리아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중심이 된다.

또한 음악에 방해받지 않고 사건의 전개과정이나 상황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말처럼 빠른 '레치타티보'와 노래가사에 많은 내용을 담지는 않지만 음악적인 성격을 극대화하는 '아리아'로 분리되면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는 오페라 안에서 각기 다른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가수가 극중인물의 역할을 잘 소화해내는가보다는 어려운 고음과 다양한 장식음을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 같은 성악기교와 발성에 관심이 쏠리면서 여주인공의 역할은 카스트라토(castrato)라고 부르는 남자 가수들이 맡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카스트라토는 당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오페라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바로크 말기에 실존했던 브로쉬(Carlo Broschi, 1705~1782)라는 카스트라토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파리넬리(Farinelli, 1994>의 첫 장면에서 파리넬리(브로쉬의 무대명)와 트럼펫 주자가 경쟁하는 것처럼 나폴리 오페라에서는 화려한 기교와 풍부한 고음을 연주하는 트럼펫을 중요한 악기로 인식, 극의 흐름과 상관없이 기교를 과시하는 트럼펫 독주부분을 삽입하였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프랑스 오페라

서정적 비극(Tragedie Lyrique): 륄리에 의해 성격이 분명해진 프랑스 고유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분하기 위해 '서정적 비극'이라 불리게 된다.

[관련글:부퐁논쟁]



 오페라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바로크시대 프랑스음악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바로크 초기에는 프랑스 역시 이탈리아 오페라를 그대로 수입하여 공연하였다. 그러나 16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프랑스인들의 정서에 맞지 않다는 비판이 거세진다. 특히 이탈리아어가 프랑스어에 비해 악센트가 강해서 듣기에 거북하다는 점,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단을 초청하는 데 드는 경비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카스트라토에 대한 거부감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후 강력한 왕권을 내세웠던 루이 14세가 등장한 1670년대 프랑스는 정치, 외교에서의 주체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프랑스 고유의 문화와 예술적 가치를 반영하는 프랑스 고유의 오페라 개발에 주력하게 된다. 특히 륄리(Jean Baptiste Lully, 1632~1687)가 왕실음악을 관장하면서 프랑스 오페라는 왕실의 권위를 반영하고 동시에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분되는 프랑스 고유의 특성을 띄면서 발전하게 된다. 소설적인 상상이 가미되었지만 영화 <왕의 춤(Le Roi Danse,2000)>을 보면 예술(춤과 음악)을 통해 왕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한 루이 14세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륄리에 의해 성격이 분명해진 프랑스 고유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분하기 위해 '서정적 비극(Tragedie Lyrique)'이라 불리게 된다. 서정적 비극은 오페라 공연이 시작된기 전에 관현악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서곡(French overture)을 연주하였는데 언제나 느린 부점리듬으로 시작되는 프랑스 서곡은 오페라 공연을 보기 위해 입장하는 루이 14세와 왕족, 귀족들의 느린 행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막으로 이루어진 서정적 비극은 왕에 대한 찬양, 프랑스와 관련된 영웅들의 낭만적이고 신기한 모험을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춤을 아꼈던 루이 14세의 취향을 고려하여 프랑스 오페라는 극의 내용이나 전개와 상관없이 극 중간에 발레를 삽입하였는데 루이 14세와 륄리 사후에도 한동안 발레는 프랑스 오페라의 관습으로 남게 된다. 륄리를 비롯한 많은 왕실작곡가들은 이탈리아어와 달리 비음과 연음이 많은 프랑스어를 정확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레치타티보를 만들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륄리 사후 서정적 비극은 '화성론(Traite de I'harmonie,1722)'의 저자 라모(Jean Philippe Rameau,1683~1764)에 의해 그 전통을 이어가지만,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찬미하는 백과전서학파와 4차례의 논쟁을 치루면서 고전, 낭만시대에 새로운 형태로 변화, 계승, 발전된다.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권도희 김성혜 이지선 유영민]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오페라 개혁

오페라 부파:Opera Buffa:초기 오페라 막간극(intermezzo)에서 독립된 대중적이고 희극적인 오페라, 오페라 세리아와 구분됨.

[부퐁논쟁에 대해서 읽어보기]



 부퐁논쟁으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부파에 푹빠진다.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가 갖는 많은 문제점들을 비판하면서 오페라 작곡가들은 초기 오페라 정신을 회복하고 오페라의 문제점을 개선하자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특히 오페라 탄생의 의의와 목표를 망각한 채, 이야기의 틀이나 구성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극의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아름다운 아리아를 연주하는 나폴리 오페라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문제점을 지적하던 이들 중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인 글룩(Christoph Gluck,1714~1787)은 1767년 자신의 오페라 <알세스테(Alceste)>를 소개하는 글에서 왜 기존 오페라의 문제점들이 개선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관습화된 이탈리아 오페라 전통을 벗어난 '새로운' 오페라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를 '오페라 개혁' 이라고 한다. 오페라 개혁의 주된 내용은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드라마이므로 음악이 드라마를 희생시키면서 자신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음악이 가사의 내용이나 의미전달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후 글룩의 주장 중 일부는 오페라 세리아의 서정성, 부파에 사용되는 짧고 정확한 레치타티보 어법, 프랑스 서곡의 관현악반주, 합창 등의 전통을 흡수한 모차르트의 작품을 통해 범인류적이면서 보편적인 오페라로 계승된다. 고전시대 오페라는 바로크시대 오페라가 특정계층의 인물을 위주로 극이 진행된 것과 달리,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평범한 인물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한다. 그리고 오페라는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아내는 극음악으로서 고전시대에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다.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권도희 김성혜 이지선 유영민]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부퐁논쟁

(Querelle des Bouffons) 1750년대 초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펼쳐진 음악논쟁.

[부퐁논쟁 이후, 오페라 개혁에 대해 읽기]




 바로크시대 오페라는 자국의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민족음악적인 성격을 보였다. 특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교황의 내정간섭을 거부하고 왕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국가를 확립하기 위해, 자신들 고유의 오페라 전통과 어법을 만들고자 많은 공을 들였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라 오페라가 프랑스에 소개된 초기를 제외하고 프랑스에서는 왕실의 비호하에 프랑스식 오페라, 서정적 비극이 유행하였고 이탈리아 오페라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1752년 이탈리아 오페라단이 페르골리시의 <마님이 된 하녀>를 공연한 후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태도가 돌변한다. 백과전서학파로 불리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이탈리아 부파의 '보편적인' 성격의 인물, 서정적이면서 꾸밈이 없는 아리아, '자연스러운' 억양의 레치타티보를 찬양하면서 오페라를 둘러싼 이탈리아와 프랑스 지지자들 사이에 격한 논쟁이 시작된다. '부퐁논쟁'으로 불리는 오페라 전쟁은 이탈리아 부파를 지지하는 백과전서학파와 륄리가 확립한 서정적 비극, 왕실 오페라의 전통을 지지하는 왕당파로 나뉘어져 이후 20년 동안 4차례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다른 말로 '전단' 전쟁이라 불릴 만큼 이탈리아 부파를 지지하는 입장과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두 파는 상대방을 비방하는 문구를 넣은 전단을 뿌려대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애를 썼다.

 부퐁논쟁에서 백과전서학파가 프랑스 오페라를 비난한 배경에는 '자연성'을 추구하는 계몽주의 사고가 깔려있다. 운율과 강세가 분명한 이탈리아어는 태생적으로 음악적인 언어지만 프랑스어는 노래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비록 이탈리아어가 외국어라 뜻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오페라는 무조건 이탈리아어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루소를 비롯한 백과전서학파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이 오페라 전쟁에서는 백과전서학파가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는 한동안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에 푹 빠진다.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권도희 김성혜 이지선 유영민]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