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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옥


 전통적으로 집의 크기는 칸(間)을 단위로 재었다. 기록으로만 남겨진 집의 크기가 종종 혼동이 되는 것은, 칸이 때로는 건물이 들어선 땅 전체의 넓이, 즉 대지 규모를 말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대지에 들어선 건물의 규모, 즉 건평을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건평의 규모에 사용되는 칸이란 본래 네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네모꼴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면적은 일정하지 않았는데, 공간을 이루는 부재의 길이에 따라 길이가 달라서, 한 변의 길이가 작게는 6척부터 크게는 10척까지 들쭉날쭉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변의 길이가 7.8척 정도를 이루는 공간을 의미했다. 여기서 쓰는 척은 영조척(營造尺)으로서, 한 자의 길이는 시기에 따라 달랐으나 조선 후기에는 대략 31cm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한옥


 신라시대에도 그러했지만 조선시대에도 신분에 다라, 또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 정해진 규모 이상의 집을 짓지 못하게 규제했다. 예컨대 세종 때에는 대군은 60칸,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일반서인은 10칸을 넘지 못하게 규제를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데, 민간에 또도는 말로는 양반집은 최대 99칸까지 지을 수 있다고 하여 구례 운조류(雲鳥樓)가 99칸 규모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렇지만 양반가 99칸은 뚜렷한 근거 없이 떠도는 말이었으며, 실제로 100칸이 넘는 집들도 있었다. 연산군 때 성희안의 집이 40칸 규제를 넘었고, 대군, 공주도 60칸을 넘을 수 없었다지만 인조 때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이 170칸이었고, 숙종 때 왕자 연령군(延齡君)의 혼례를 앞두고 신혼집을 미리 지어 마련했는데, 집터 2,260칸, 기와집 177칸이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부자양반의 집을 살펴보면, 주인남자가 기거하는 사랑채와 주인여자가 기거하는 안채가 따로 있고, 종과 하인이 사는 행랑채가 따로 있었다. 여기에 곡식을 보관해 두는 곳간, 농기구나 허드레 살림살이를 보관해 두는 헛간, 마소를 키우는 마구간, 외양간 등이 덧붙여졌다.


조선시대 초가집


 하지만 일반백성들의 집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흔히 아주 소박한 집을 '초가삼간'이라고 하는데, 초가삼간이란 두 칸짜리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구조이거나, 한 칸짜리 방 둘에 부엌 하나가 딸리 구조를 말한다. 때로는 여기에 마루 한 칸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그것이 대개 일반평민들의 살림집이었다.

 조건이 아주 나쁜 집으로는 토막집, 움집이라 부르는 집이 있었다. 최근의 발굴결과를 보면,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져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움집이 조선시대에도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집들은 땅을 약간 파고 바닥을 다진 뒤, 그 위에 거적자리 같은 것을 깔아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막고 나무, 솔가지, 집 따위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이다. 최소한의 살림도구로 살아가는 극빈층은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이런 집에서 살고 있었으며, 이런 움막집은 일제 강점기의 사진에도 보인다. 18세기에 정조가 수원에 갔을 때 그곳 집들을 묘사하면서 달팽이 껍데기 같기도 하고 게딱지 같기도 하다고 하였는데, 그런 집들이 바로 이러한 움집이었을 것이다.

움집 형태/출처: (주)천재교육


 그런데 집의 전체적인 규모는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방 하나하나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대개 방은 한 칸 또는 두 칸 규모였다. 한 칸짜리 방은 대략 사방 2미터 남짓의 방이므로 사람이 누우면 누운 방향으로는 남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 물론 높은 지위와 경제력을 갖춘 계층의 집은 일반서민의 집 방보다는 방 한 칸의 넓이가 더 넓었다. 그러나 두 칸짜리 방이라 해도 현대식 주거와 비교하면 방의 넓이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중세 서양의 가옥은 서민가옥도 이렇게 작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방은 대개 거주공간이 방 하나로 이루어져 모든 가족이 하나의 방 안에 살았고, 그 공간이 개방된 상태로 부엌, 거실, 침실의 구분 없이 쓰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가옥은 서민가옥도 부엌과 방이 벽체로 나뉘어 별도의 공간을 구성했으며, 때로는 침실이 아닌 거실로 마루가 별도로 설비되어 있어서 한 채의 집은 여러 공간으로 구획되어 방 하나하나의 규모가 작았던 것이다. 방의 규모가 이렇게 작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난방 때문이었다. 서양에서는 화로, 벽난로를 두어 방 안에서 불을 때어 복사열이나 공기의 대류에 의해 방안을 따뜻하게 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거실 한가운데를 부분적으로 파서 그곳에 화로 역할을 하는 이로리를 두어 난방을 하고 물을 끓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방 밖의 부엌에서 불을 때어 방의 구들을 뜨겁게 해 간접적으로 방 안을 따뜻하게 했다.


 온돌은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고 적은 연료로 오랫동안 방을 따뜻하게 하는 데는 세계 어떤 문명권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효과적인 낭방법이었다. 예컨대 일본의 다다미방과 비교하더라도 한옥의 온돌은 월등히 우수한 난방방법이었다. 그러나 온돌에도 약점은 있었는데, 따뜻한 방바닥에는 벼록과 같은 벌레가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바닥이 아닌 실내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웃풍이란 온돌방식의 난방이 안고 있는 약점이었다. 한옥에서 창문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고, 방문도 허리를 구부리고 드나들 정도로 작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바닥만이 아니라 방 안 전체를 따뜻하게 하려면 방의 면적을 작게 하고 지붕의 높이도 낮추어야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집의 방 크기가 작게 된 원인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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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사람의 오복(五福)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이렇게 다섯가지로 일컬었는데, 그 중 고종명은 일생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덕을 베풀며 살다가 제명대로 일생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종명은 오복중 다른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누구나 고종명을 희망했다.


고종명을 말할 때는 주로 회갑(回甲)과 회혼(回婚) 그리고 회방(回榜)을 주로 거론하는데, 회갑은 태어난 지 만으로 60살이 되는 것을 말하고, 회혼은 혼인을 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하며, 회방은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한다.


평균 수명이 지금과 같지 않은 옛날에는 60세까지 사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회갑을 맞이한 사람은 성대하게 베풀고, 더욱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잔치를 열었다.


회혼은 앞서 말한 것 처럼 결혼을 한지 60년이 되는 것을 말하므로, 회갑보다도 훨씬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15~20세에 결혼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회혼을 맞이하는 나이가 되면 최소 75살~80살이 되어야 회혼이 가능했는데, 부부가 모두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그 확률이 대단히 낮을 수 밖에 없었다.

회혼식은 노부부가 다시 신랑과 신부가 되어 결혼식(회혼례)을 올리는 것으로 아들과 사위가 혼인식을 거행하는 집사와 신랑을 인도하는 기러기 아범이 되고, 달과 며느리가 신부의 수발을 드는 수모가 되었으며, 손자 손녀들이 구경꾼이 되어 큰 잔치를 열었다.


회방 또한 과거에 합격한지 60년을 뜻하는 것으로 회갑, 회혼보다도 훨씬 확률이 낮았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과거에 합격하는 평균 연령이 30세를 넘었다고 하는데, 한 사람의 회방연을 구경하려면, 그 사람의 나이가 보통 90세는 되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인, 장혼(張混 1759~1828)의 문집인 '이이엄집(而已广集)에는 회갑과, 회혼 그리고 회방이 얼마나 맞이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


세상에서 희귀한 일이라고 칭하며 사람들이 경하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생년의 회갑, 등과의 회방, 초례의 회근이 그것이다. 이것은 황왕(皇王)과 제백(帝伯)의 권세로도 취할 수 없고, 진나라나 초나라 도주공(陶朱公)이나 의돈의 부(富)로도 구할 수 없으며, 현인군자의 덕이라도 반드시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장수한 후에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회갑을 맞이하는 것은 열에 대여섯이고, 회방을 맞이하는 것은 백에 서넛이며, 회혼은 천에 한둘이다.


     회갑을 넘기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회갑과 회혼 그리고 회방을 모두 맞이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고종명은 건강하게 적당한 부를 가지고 덕을 베풀면서 평안하게 노후를 맞이하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큰 복록을 누리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사항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고종명은 일생을 살아가는 변하지 않는 목표이자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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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사람들은 해와 달이 바뀌는 것을 달을 보아 알 수 있었으며, 날짜도 달력의 보급으로 알 웃 있었다. 씨뿌리기, 모내기, 김매기 등의 농사일은 달력에 표시된 양력 절기를 보고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알기 어려웠지만 당시 사람들은 짧은 시간의 흐름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 잠자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시간은 지금과는 달랐다. 낮에는 정시법을 적용하여 2시간 간격으로 시간이 바뀌는 12시진을 사용하여 진시, 사시 등으로 시간을 표시했다. 그러나 밤시간은 부정시법을 적용하여 하늘이 어슴푸레한 박명(薄明)을 뺀 나머지 밤시간을 5등분 하여 5경으로 표현했으므로 5경이 가리키는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네이버


 나라에서는 자격루를 표준시계로 삼아 종을 쳐서 그 시간을 일반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종은 하루에 두 번 울렸다.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가 시작 되는 시간과 성문을 열고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시간 뿐이었다. 정오에는 오고를 쳐서 시간을 알리고, 후에는 오고가 오포, 사이렌으로 대체되었지만 정오의 시보는 서울에 국한되었다.


휴대용 해시계,1849년(현종 15), 가로 11.5㎝, 세로 15.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므로 민간에서는 시간을 재는 데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해시계는 가장 널리 쓰인 시계였지만 양반층만이 주로 사용했으며, 그나마 밤이면 사용할 수 없었고 날이 궂어도 쓸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낮시간을 해의 방위에 따라 대략적으로 판별했다.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보아 시간을 알아냈다. 사람들은 하루 시간의 흐름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도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다. 당시 사회가 짧은 시간의 변동을 측정하는 것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이 산업의 거의 전부였고, 농업은 세밀한 시간의 흐름에 좌우되지 않았다. 또 노동이 강도도 그다지 세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지 않았으며, 지금에 비교하면 매우 느긋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사회발전 속도도 더뎠다. 그러다가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산업화가 진행되고 사람들은 점차 바쁘고 고된 삶에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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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인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10월이 되면 날을 정해 팥시루떡을 쪄서 가주(家主) 주관으로 가을고사를 지냈다. 대청 성주와 안방 제석, 그리고 터주에는 술과 함께 떡을 시루째 갖다 놓고 장독대, 대문간, 헛간, 측간, 외양간, 우물 등에는 떡을 떼어 놓는다. 전 해에 넣었던 터줏가리 안 항아리의 묵은 벼를 햇벼로 갈아 넣는다. 시루떡은 두어 말 정도 해서 동네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다. 단골무당을 불러 고사를 지내는 집도 있다. 산간 지방에서는 마을 전체가 산치성을 지내고 나서 각자 집고사를 지내는 곳이 많았는데 대부분 10월 상달에 고사를 지내지만 정월이나 2월에 지내기도 한다.


삼신바가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동,황헌만/국립민속박물관



 정월 대보름 안으로 단골무당집에 1년 신수점을 보러 가는 집도 있고, 7월칠석 때에 단골집에 가서 가정이 무고하게 해 달라고 비는 집도 있는데, 이를 두고 '마지' 또는 '정성을 드리러 간다'고 한다. 3월에 못자리 고사를 지내는 집은 팥시루떡을 해서 가을고사 때와 마찬가지로 늘 놓는 자리에 제물을 놓고 지낸다.


터주고사,경기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황헌만/국립민속박물관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장지리, 밀양박씨들의 집성촌 주민들은 다락에 '선대신 항아리' 라고 부르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모시는데, 집안 조상을 위하는 것이라고 한다. 안방 안쪽 천장 가까운 벽에는 지석주머니, 삼신주머니를 걸어 놓는다. 지석(또는 제석) 주머니는 집안의 무고(無故)를 위해, 삼신주머니는 자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해 걸어 놓는 것이라고 한다. 제물로는 주로 햅쌀로 찐 시루떡 외에 통북어, 술, 적, 무나물 등을 올린다. 먼저 시루떡을 상 위에 받쳐 놓고, 통북어는 시루떡 오른ㅉ고에 끼워 놓으며, 시루떡 위에는 청수 한 그릇을 부어 올린다. 시루떡 앞에는 돼지고기적이나 쇠고기적을 놓고, 시루떡 옆에는 무나물과 막걹리 한 그릇을 올린다.


동지고사, 충남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국립민속박물관


 뱃고사 또는 배걸이는 강이나 나루와 관련하여 행해지던 강마을의 민속신앙이다. 뱃사공 또는 배를 소유한 집에서는 1년에 두 번, 즉 이른 봄과 10월 상달 고사 때 뱃고사를 지내거나 만신을 불러 뱃굿을 했다. 만신이나 절의 보살을 불러 배에 시루떡, 삼색과일, 술 등을 차려 놓고 징치기, 굿치기를 하는 곳도 있다.

 어부심은 한자로 어보시(魚報施) 또는 어부시(魚鳧施)라고 쓰며, 강에 사는 물고기나 오리(鳧)에게 보시, 즉 베푼다는 뜻이다. 강에서 고기도 잡고 멱을 감는 일도 많았던 시절의 풍속으로, 강 주인인 물짐승들에게 1년 내내 사고 없이 잘 지내게 해 달라고 비는 신앙행위이다.

 경기도 일원의 강마을 주민이면 누구나 정월대보름밤에 어부심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보름 전날 햅쌀로 먼저 공양(供養), 즉 밥을 지어 놓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새벽에 밥을 들고 강가로 나가 제상을 차리고 사해용왕님을 찾으면서 동해 남해 서해 북해 순서로 돌아가며 1배씩 4배 하며 물로 인한 사고가 없도록 기원한 다음 강으로 나가 바가지에 담은 밥을 강물에 푼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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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의 역사





조선시대 향시(鄕市)는 15세기 말부터 삼남지방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 기록상으로는 성종 1년(1470년)의 흉년으로 전라도의 농민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듬해부터 서로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들고 나와 장을 열었는데, 이것을 장문(場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까지도 지방은 성읍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하여 살던 때여서 성 외곽에 정기적인 장이 설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 같다. 또 장이 있었다고 해도 5일 간격으로 1일 행정(行程), 즉 하루 왕복거리인 30~40리마다 교통요충지에 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의 현상이다. 즉 임진왜란 전후인 선조 때에 이르러 미약하나마 5일 간격으로 각 지역이 연결되는 시장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장시의 개설은 더욱 진전되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게 되면 국토 전역으로 확대된다. 이것은 그동안의 주거기 확산과 수공업의 활성화, 대동법 시행, 그리고 이에 따른 상품화페경제의 발달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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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통 시장의 분류(종류)와 의미






[김홍도 <장터길> 보물 527호]


 조선시대에는 시장보다는 장시(場市) 또는 장(場)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장시에는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붙는 수식어가 다르다. 우선 장이 언제 열리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 매일 열리는 상설시장을 시(市)라고 하고, 점포를 시전(市廛)이라고 하였다. 시민(市民)은 시전을 운영하는 상인을 말한다. 매일 열리지 않고 주기를 정해 열리는 정기시장은 장(場)이라고 하여 그 주기에 따라 오일장, 10일장 등으로 불렀다. 일정한 주기가 없이 배가 도착할 때라든지 별신제가 열릴 때, 또는 허가된 장소가 아니거나 장을 처음 개설할 때 벌이는 장은 난장(亂場)이라고 하였다.


 장이 서는 위치를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중앙시장과 지역시장이 있고, 경시(京市), 향시(鄕市), 성읍시(城邑市), 가로시(街路市) 등이 있었다. 경시에는 정부로 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시전과 그렇지 않은 난전(亂廛),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잠시 열리는 조석시(朝夕市)가 있었다. 조석시에서는 도시나 성읍의 주민들이 필요한 신선한 생선이나 채소 또는 땔감 등을 거래하였다. 무역이 이루어지는 지역에는 개시(開市) 또는 후시(後市) 등이 있었다.


 거래물종에 따라 시장을 분류하면 일반시장과 특수시장, 농산물시장과 수산물시장으로 구분되고, 거래단계별로 보면 산지시장, 중앙도매시장, 도매시장, 소매시장 등으로, 제조과정을 기준으로 보면 원료시장과 제품시장으로 나뉘는데, 이는 대개가 산업화 이후에 진행된 현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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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창(詩調唱)


[사진 전통 장구/네이버지식백과]


 시조창은 영조(재위1724~1776) 무렵부터 노래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처음에는 평시조 형식만 있었는데, 초장을 높은 소리로 질러대는 지름시조, 장형시조를 촘촘히 얹어 부르는 사설시조, 가볍게 흥청거리는 창법으로 부르는 엇시조 등의 변주곡이 생겨났다.

 시조창은 3장 형식의 일정한 선율에 여러 시조를 얹어서 부르는 것이다. 가곡이 관현반주를 수반하는 것과는 달리 장구 하나만으로 반주를 한다. 가곡은 고도로 세련되어 음악적으로 많은 훈련이 필요하여 주로 전문가에 의해 불리지만, 시조창은 간단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메트로놈은 40부터 시작되는데, 시조의 1박은 메트로놈 40보다 더 느리고, 선율도 극히 단순하다. 그렇다면 시조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바람이 머리 위 소나무 숲으로 '쏴~악' 하고 스쳐 몰아오다가, 바람이 지나 멀어지면서 소나무 잎이 흔들리며 내는 여운의 소리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듯, 시조의 아름다움은 선율이나 리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음이 흘러가면서 수묵화의 농담(濃淡)처럼 또는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잎처럼 만들어지는 소리의 역동성에 있다.

 엄밀히 말하면 서양음악에 익숙한 귀로 들었을 때 시조가 느리게 느껴지는 것이지 우리 전통음악에 익숙한 귀로 들으면 알맞은 속도이다. 서양인은 맥박을 기준으로 템포를 정하고 우리는 호흡을 기준으로 템포를 정했다. 보통 맥박은 1분간에 70회를 뛰고, 맥박이 6회 뛸 동안 호흡은 1회 한다. 서양은 맥박 1회를 1박으로 잡았고, 우리는 1/2 호흡, 즉 맥박 3회를 1박으로 잡았으므로, 속도감이 서로 다른 것 뿐이다.


<평시조>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草廬) 한 칸 지어 내니

반 칸은 청품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지름시조>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사설지름시조>

물 넘는 강상(江上)에 올라 나무도 꺾어 다리도 높고 돌도 발로 툭 차 데굴데굴 궁굴려 수렁도 뫼고

만첩청산 내리고 내리는 물결을 위여다가 어르렁 콸콸 더지 둥덩실 님 찾아 간다.

우리도 사랑 실은 배 타고 더지 둥덩실.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김성혜 이지선 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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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먹는 일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먹을 것을 유달리 중시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뿐 아니라 대표적인 예로 진달래꽃을 참꽃, 철쭉꽃을 개꽃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철쭉꽃이 진달래꽃보다 아름다워도 먹지 못하는 철쭉꽃은 '개꽃',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은 '참꽃'이라고 불렀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가와 없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루의 시각을 밥 먹을 때로 구분했는데, 그래서 저녁밥을 먹는다고 하지 않고 통상 '저녁'을 먹는다고 말한다. 또 인사말로 '밥 먹었느냐'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예전에 너무 가난하고 굶주리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인사말이 생겼다고 오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어에서 '굿 모닝', '굿 이브닝'이라는 말을 우리는 "아침밥 먹었습니까?", "저녁밥 먹었습니까?"로 인사했던 것이다. 시간을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밥 먹는 때로 생각했던 관습이 매우 오래 된 것이라는 것은 '끼'라는 말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끼'와 '때'는 본래 같은 말이었다. 16세기 중종 때 편찬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時'를 'ㅂㅅ기니 시'라 풀이했다. 요즘도 노인들은 '세 끼 밥'이라 하지 않고 '세 때 밥'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원으로 살펴보더라도 '끼'는 '때'와 함께 하나의 낱말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다. 또 우리는 뭐든지 먹는다고 표현했다.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의 말들이 먹는다는 말 한마디로 표현된다. 영어에서는 물이나 술을 마시는 것을 'drink' 담배 피우는 것을 'smoke'로 표현하지만 우리말에서는 모두 먹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마음도 먹고, 욕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귀도 먹고, 겁도 먹고, 잊어먹고, 떼어먹고 등의 표현이 보여 주듯 우리의 오래된 언어생활에도 먹는 것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우리는 예전부터 다른 민족에 비해 많이 먹었다. 성인 남자는 한 끼에 420cc의 곡물을 먹었는데, 이는 지금의 식사량에 비하면 3배에 이르는 것으로,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에 비해서도 꽤 많은 양을 먹었다. 끼니는 예전에는 '조석(朝夕)끼니'라는 말 처럼 한 두 끼를 먹었으며, 해가 긴 여름철이나 힘든 일을 할 때에는 간단한 점심(點心)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기도 했다. 예전에는 어린이도 180cc를 먹어 지금의 어른 보다도 더 많이 먹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먹었을까? 그 원인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난해서 그랬다는 지적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전에 너무나 어렵게 살아서 먹을 것이 생기면 정신없이 허겁지겁 많이 먹는 습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전의 가난이나 기근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이전에는 중국, 일본, 서양 어디나 흉년, 기근이 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심지어는 영아 살해 등의 풍습이 횡행했다. 우리민족이 많이 먹었다는 것은 늘 많이 먹었다는 것이지 어쩌다가 한 번 먹을 것이 생겼을 때 닥치는 대로 많이 먹었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하면 늘 많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었다. 조선시대에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출, 공출 등으로 쌀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남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쌀의 완만한 증산, 보리의 급격한 증산이 식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쌀은 칼로리가 높고, 고른 영양소를 갖추고 있는 우수한 식품이다. 또, 벼는 파종량에 비해 수확량이 많고, 벼농사는 토지 이용도가 높아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훌륭한 곡식이었다.

 가장 중요한 부식인 김치는 무, 오이, 가지 등으로 만들었는데, 18세기부터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여 지금처럼 빨간 김치가 생겨났으며, 19세기에는 배추가 주재료로 부상했다.

 식사도구로는 밥상과 수저를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작은 소반을 써서 식사를 했고 성인은 각자 따로 상을 받아 먹었다. 집 구조가 조리를 하는 부엌과 밥을 먹는 방으로 분리되어 있고, 부엌에서 방에 이르는 동선이 복잡하여 소반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중국이나 일본이 13, 14세기부터는 젓가락만으로 밥을 먹었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써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상차림에는 항상 국이 있었는데, 그 국이 건더기가 많고 뜨거웠기 때문에 숟가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생활문화/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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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훈은 무엇이고, 왜 만드는 것일까?

 가훈(家訓)이란 집안어른이 자녀 또는 후손들에게 주는 가르침, 교훈을 일컫는다. 가훈은 집안을 어떻게 경영해야 다음 세대에서도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정체였고, '가정교육의 텍스트'였다. 전통사회에서 가정은 사회생활의 기본으로, 가훈을 통한 가정교육을 가문 전통의 유지, 존속, 명예를 담보할 중요한 구실을 삼았다. 가훈은 대체로 수신제가(修身 齊家), 즉 처세와 때로는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치인(治人)의 도리를 중심으로 생활문화 전반에 걸친 규범과 지침들을 간단명료하게 조목으로 나열, 정리한 것이 일반적이다.

 가훈서는 각 집안의 환경과 배경, 사회적 지위와 고유한 경험의 토대 위에서 실제적인 삶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 작성형태 등에서도 차이가 나게 마련이며, 특히 가훈을 편찬한 인물의 평생 경험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가훈이 없는 집안이 거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었고, 이름있는 가문들은 가문의 전통으로 선조의 유훈(遺訓)과 가훈을 특화, 전승하였다. 예컨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김유신(金 庾信) 집안의 '충효', 최영(崔瑩) 집안의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신의,지조,청백,성실,우애', 김굉필(金宏弼)의 '인륜(人倫)', 이언적(李彦迪)의 '근검과 절약', 이이(李珥)'의 '화목과 우애' 등은 오랫동안 그들 집안의 생활신조이다.

 이렇게 가훈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구전으로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 많고, 오늘날의 가훈처럼 간단한 명구로 작성된 것도 있다.

 

[사진 풍천노씨가학십도-도식으로된 풍천노씨의 가훈/네이버]


 가훈의 종류와 형태

 가훈은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예를 들어 가정의 규범이라는 의미로 정훈(庭 訓), 가범( 家範), 가규(家規), 가헌(家憲), 가의(家儀), 가학(家學), 가법(家法)이라고도 불리며, 자손에게 내리는 교훈, 계시라는 뜻에서 유훈(遺訓), 유서(遺書), 유명(遺命), 가계(家戒), 유계(戒), 훈자(訓子), 계자서(書) 등으로 불린다.

 대상은 아들, 딸, 손자 등으로 구체적인 대상을 명시한 경우도 있고, 대상을 명시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역시 가훈이라면 협의의 대상범위는 자녀와 친족(당내지친)이었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모든 후손이 규범으로 삼는 교육서로 활용되기도 한다.

 가훈서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은 서간(書簡), 문답(問答), 유훈(遺訓) 등의 형식이며, 17세기 이후가 되면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체계를 갖추어 편찬된 가훈들이 나타난다. 서간은 부모가 생전에 자손들에게 준 일상생활의 가르침이나 언행에 대한 훈계를 사후에 기록하여 가훈서로 삼은 경우이다. 문답은 각 가정에서 학문, 독서의 중요성, 독서방법, 인물관 등에 대한 문답을 엮어 가훈으로 전해 준 경우이고, 유훈은 성현의 격언을 기초로 유언, 유서로 남긴 것이 가훈이 된 경우이다.

 잡저(저술)로 편찬된 것으로는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경우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역시 가장 일반적이다. 현재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가훈은 70여 종이 넘지만, 이 중 필사본은 10여 종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저자의 문집이나 족보 등에 수록된 것들이다. 이와 달리 별도의 저술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된 '분봉가훈(盆峯訓)'(연안이씨, 1706), '수졸재가훈(守拙齋訓)'(진주강씨, 1789), '우곡선생훈자격언(愚谷先生子格訓)'(진주강씨, 1724), '풍천노씨가학십도(豊川盧氏 學十圖)'(1847) 등도 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훈자첩(訓子帖), 제영( 題 詠), 도상(圖像) 등으로 남겨진 경우도 있다.

 이런 가훈의 내용은 개인적 덕목인 수신에서부터 가정생활인 제가, 그리고 사회생활인 처세, 거향, 관리 생활 전반에 두루 미치고 있다. 조선시대 가훈서의 내용을 보면 5~6개조에서 30여 개 조목에 이르는 다양함을 보여 주는데, 이들 내용을 요소별로 분석한 연구(정무곤, 조선시대 가훈서의 교육학적 해석, 2006)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15개조 내외가 가장 많고, 공통적으로 포함된 조목을 보면 '봉선, 제사, 목친, 독서, 의복, 언행, 우애, 부부, 교자, 어목, 치산, 농상, 거향, 접인, 교우, 거관' 등으로, 크게 보아 몸가짐(修身), 집안일( 齊家), 바깥( 處世)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한다.

 수신의 항목으로는 성의, 정심, 독서, 언행 등의 항목에 집중되어 있으며, 다음 집안일(齊家)에 관련한 조목으로는 부모 섬기기와 조상제사를 비롯하여 효우, 노비 다스리기, 가정경제 운용의 항목이 주류를 이룬다. 다음으로는 사회활동(處世)과 관련한 항목인데, 종족 간의 돈목을 시작으로 거향, 접인, 교유, 거관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출처:전통사회와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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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영천,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

 

 우리는 지금 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식생활, 주거생활, 의복, 음악, 미술, 영화, 스포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문화의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특정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접목해 새로운 콘텐츠로 각광받기 시작하였고, 문화상품, 더 나아가 문화산업으로 까지 거론되며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까지 하다. 특히 그동안에는 박물관에나 전시가 되고, 보전에 골머리를 앓아 왔던 전통문화가 IT기술과 융합되면서 새로운 문화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랜 역사와 소중한 문화자원을 지닌 우리나라는 그만큼 양질의 문화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진 셈이다.

 

[역대흥행1위에 오른 애미메이션 '겨울왕국' 포스터]

 

 21세기는 기존의 군사나 경제보다 문화전쟁이 더 심화되면서 디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1편이 1년 동안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가 낸 이익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여들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문화전쟁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단순히 개발과 발전의 논리에 맞물려 전통문화와 문화재를 홀대하고, 전통의 정신이나 사상, 철학 등을 열등시 하고 등한시 해온 결과 우리의 많은 소중한 문화와 유산들이 사라져 왔고, 또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최근에 이런 문화산업이 각광받으면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재조명되고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그 동안 소흘하고 등한시 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어린이문화재청]

 

 이는 분명히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뿌리인 정신문화, 이를테면 우리만의 독특한 철학은 아직도 구시대의 산물로 여기지며 홀대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문화의 뿌리는 그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라도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를 진지하게 한번 더 되돌아 보고, 변화된 우리의 삶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데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말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세지를 주고 있다.

 아래는 문화와 철학에 대해 핵심적인 내용이라 소개하고자 한다.

 

 문화와 철학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문화를 넓은 범주에서 보면 종교,철학,예술,법률,풍속 같은 모든 사회현상을 포괄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정신생활 영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문화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화를 3개의 층차로 구분한 중국학자 방박의 견해에 따르면 뿌리가 되는 가장 깊은 부분에는 종교와 철학, 윤리 등이 놓여 있고, 둥치나 줄기에 해당하는 중간 부분에는 문학, 예술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잎과 열매에 해당하는 겉으로 나타나느 부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문화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민족의 문화는 그 민족의 철학에 담긴 인간관, 사회관, 자연관, 세계관, 예술관 등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문화가 중심이 되는 시대를 살면서도 오히려 그 뿌리인 철학을 가장 소흘히 대하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김교빈,이현구 '동양철학에세이', 동녘,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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