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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은 경북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에서 출토된 높이 44.4cm, 머리띠 지름 19cm의 신라시대 유물로 금관의 내관으로 추정되는 금제관모와 새날개 모양의 금관식과함께 한 벌로 이루어져 있다.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식)]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금제관모)]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문화재청


금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바깥에 쓰는 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관테 위에 세 개의 나뭇가지모양 장식과 두 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을 붙여 세웠는데, 관테의 상하 가장자리에는 송곳같은 도구로 찍은 두 줄의 줄무늬와 한 줄의 물결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가운데는 한 줄의 둥근 볼록 장식이 되어 있다. 또한 관 전체에는 곱은옥과 달개를 달아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나뭇가지모양 장식의 줄기는 럽고 크지만 곁가지는 작은 형태로, 천마총 출토 금관보다 오래된 방식으로 추정된다. 테두리의 앞면 좌우측에는 두 줄의 긴 드리개를 달았는데, 드리개는 가운데가 비어있는 금구슬 열개를 쇠사슬 형태로 연결하여 끝에는 금모곱은옥을 달아 장식했다.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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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식)'은 경북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에서 출토된 높이 40.8cm 크기의 신라시대 유물이다.

전체 형태는 새가 큰 날개 짓을 하는 모습으로 관모에 끼워 사용하는 금제 관식이다. 맞새김(투조 방식) 기법의 당초 줄기 무늬가 장식된 금판 3장을 접합하여 만들었으며, 안쪽과 바깥쪽에 둥근 달개가 여러개 달려 있다. 가운데 장식의 윗부분에는 당초줄기처럼 간략화된 용무늬를 맞새김(투조 방식) 기법으로 표현하였는데 좌우가 비대칭이다.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식)/ⓒ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신라시대 관꾸미개는 새의 날개 모양이 주를 이루지만 나비처럼 생긴 것도 있으며, 새 날개 모양은 옆으로 날개를 활짝 펼친 형태가 오래된 것이며, 차츰 새 날개 모양의 끝이 안으로 오므라들어 위로 솟구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국보 87호 금관총 금제 관식은 비교적 새로운 형식의 관꾸미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금제 관식은 신라 왕실과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이며, 신라의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수장의 무덤에서도 출토되는데 출토될 당시 무덤의 주인공이 직접 착용한 상태에서 발굴되는 금관과 달리 부장품궤에서 껴묻거리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 특징이 있다.

[국보 87호 금관총 금제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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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자리짜기'는 자리를 짜고 있는 아버지와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뒤로 막대기로 힘있게 짚어가며 긁을 읽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 부모는 뒤에서 힘차게 글을 읽는 아들이 자랑스럽고 대견해 힘든 노동도 힘든줄 모르고 집중하고 있다.

쉼없이 힘든 노동을 해야하는 빡빡한 현실 속에서도 다시 힘을 내게 하는 서민가정의 유일한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림이다.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자리짜기/ⓒ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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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姜世晃)은 1713(숙종 39)~1791(정조 15)년의 인물로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이자 평론가이다. 본관은 진주(晋州) 로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으며, 64세에 기로과에, 66세에는 문신 정시에 수석합격하였다. 관직으로는 영릉 참봉, 사포 별제, 병조 참의, 한성부 판윤 등을 두루 거쳤다.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는데,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의 발전, 풍속화, 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보물 590-2호 강세황 초상/ⓒ한국학중앙연구원


보물 590-2호 강세황 초상은 강세황의 기로신(耆老臣, 조선시대 나이가 많고 품계가 높은 문신을 예우하여 부른 명칭) 임명을 기념하여 화원 이명기가 그린 71세 때의 초상으로 깊게 패인 주름과 흰 수염, 굳은 정신이 드러나는 눈동자 표현 등 인물의 세사한 사실적 표현을 통해 내면을 전달하는 전신(傳神)의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화원 이명기는 서울 회현동의 강세황의 집에서 열흘 만에 강세황의 초상 세 점과 맏아들 강인의 초상을 완성하였으며 공임으로 열 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초상을 두고 강세황의 셋째아들인 강관(姜寬)은 "정신과 마음을 흡사하게 그려내어 털끝만큼의 유감도 없다."고 하였다. 또한 초상의 제작과정도 강관이 기록한 '계추기사(癸秋記事)'에 잘 남아있다.

화원 이명기는 본관은 개성, 호는 화산관(華山館)으로 당시 서양화의 음영법을 응용한 사질적이이면서도 기품 있는 초상화로 이름이 높았다.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했고 찰방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1971년 정조어진을 그릴 때 주관화사로 활약하였고, 1796년에는 단원 김홍도와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 조신 후기 문신 서직수 초상화, 보물 제1487호)을 그리기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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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아니면 친구들이 많이들 하니까

피라미처럼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고 하지 말아요.



내 주관을 세우고

스스로 독창적인 트렌드세터가 되세요.

기존의 패러다임을 당신이 뒤집으세요.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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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당신이 지친 모습을 보여줄 때,

내가 부족하나마 위로의 말을 전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생각지도 못한 행복을 가져다줘요.


당신을 더 깉은 곳에서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왠지 들어서 말이에요.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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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춤추는 아이(무동)'은 가로 26.8cm, 세로 22.7cm 크기의 그림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연주모습과 얼굴의 표정, 춤추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 등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아이의 모습 또한 마치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진다.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춤추는 아이(무동)/ⓒ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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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세요?

그 이유가 주변 사람들에게

내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닌가요?


나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나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관념으로 꽉 차 있지는 않은가요?

그렇다면, 어찌 외롭지 않겠어요.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보세요.

우리, 그렇게 서로 다르지 않아요.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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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주막'은 크기 가로 28cm, 세로 23.9cm 크기로 간이주막에서 행인들이 식사를 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국자로 막걸리를 떠내는 주모의 모습과 부뚜막 위의 밥 쌓아놓은 양푼과 술사발들, 한쪽에 자리잡고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행인의 모습과 음식을 다 먹고 값을 치르려는 듯 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행인의 모습에서 당시 주막의 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행인의 상차림에서는 동양화에서 나타나는 역원근법이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주막/ⓒ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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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승려가 된 이유는,

이렇게 한 생을

끝없이 분투만 하다 죽음을 맞이하기 싫어서였습니다.

무조건 성공만을 위해서 끝없이 경쟁만 하다가

나중에 죽음을 맞게 되면

얼마나 허탈할까 하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공의 잣대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칠 나의 모습을 염려하면서

그들의 기준점과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헐떡거리며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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