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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진흥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제24대 진흥왕은 즉위할 당시 열다섯 살('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일곱 살로 되어 있다.)이었기 때문에 태후가 섭정을 했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이며, 법흥왕의 아우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다. 임종 무렵 머리칼을 깎고 법복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승성(承聖(남조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의 연호다.) 3년(554년) 9월, 백제의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공해 와서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필을 빼았아 갔다.

국보 3호 북한산 신리 즌흥왕 순수비/ⓒ국립중앙박물관

이보다 앞서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모의 했다. 이때 진흥왕이 말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알렸더니, 고구려는 그 말에 감격하여 신라와 화친을 맺었다. 이 대문에 백제는 신라를 원망하여 침략해온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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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 재위 500~514)의 성은 김씨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도는 지도로(智度路)며, 시호는 지증(智證)이라 했다. 이때부터 시호가 쓰이기 시작했고, 또 우리말에서 왕을 마립간(麻立干, '마립'은 두頭, 상上, 종宗의 의미고 '간'은 대大, 장長의 뜻이니, '정상'을 뜻하는 존호로 왕에게 쓰였으며, '마라한', '마루한'으로 발음했다고 한다.-양주동, 이동환 설)이라고 부른 것도 이 왕 때부터다.

 

왕은 영원(永元, 남조 제나라 동혼후東昏侯 소보권蕭寶券의 연호다.) 2년 경진년(500년)에 즉위했다.(혹은 신사년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3년이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여서 좋은 짝을 찾기가 어려웠으므로 사신을 삼도(三道)로 보내 구했다. 사신이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개 두 마리가 북만큼 커다란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다투어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묻자 한 소녀가 이렇게 말했다.

 

"모량부 상공(相公)의 딸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다 숲 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상공 딸의 키가 일곱 자 다섯 치나 되었다. 이런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왕이 수레를 보내 그녀를 궁궐로 맞아들여 황후로 봉하니(박씨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신하들이 모두 축하했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다.) 동해 속으로 바람을 타고 이틀 정도 가면 우릉도(于陵島, 지금의 우릉도羽陵島-지금의 경북 울릉군 울릉도다.)가 있는데, 둘레가 2만 6730보(步)였다. 섬의 오랑캐들이 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게 굴면서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伊湌, 신라 벼슬 이름으로 17관등에서 제1관등이다.) 박이종(朴伊宗,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이사부異斯夫라고 되어 잇으며 김씨라고 했다.)에게 명하여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박이종은 나무로 만든 사자를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신라장군 '이사부' 표준영정/삼척시청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겠다."

 

우릉도의 오랑캐는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려 주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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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유적 효충사(朴堤上遺跡 孝忠祠) 박제상 영정/ⓒ양산시립박물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는 박제상(朴堤上)으로 되어 있어 박제상으로 교쳐야 한다. '제상'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했다.

 

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왕위에 오른지 36년 경인년(39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말했다.

 

"저희 임금은 대왕의 신성하심을 듣고 신 등에게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께 아뢰도록 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왕자 한 명을 보내 저희 임금께 성심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왕이 셋째 아들 미해(美海, 미토희未吐喜-라고도 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미사흔未斯欣으로 되어 있다. 미사흔과 박제상 이야기는 <일본서기> 권7에도 전한다.)를 왜국(신라에게 위협을 주었던 왜국의 성립은 대체로 4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왜국은 신라 왕을 눈물 흘리게 만들 만큼 강한 힘이 있었다.)에 보냈다. 이때 미해의 나이는 열 살로 말과 행동이 아직 반듯하게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내신 박사람(朴娑覽)을 부사(副使)로 삼아 딸려 보냈다. 그런데 왜왕이 30년 동안 그를 붙잡아 두고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訥祗王)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기미년(419년)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사신을 보내 말했다.

 

"저희 임금께서는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 <삼국하기> '신라본기'에는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가 지혜가 빼어나고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특별히 소신을 보내 간청하도록 했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러워하면서 서로 화친을 맺어 왕래하기로 했다. 그래서 동생 보해에게 고구려로 가도록 명령하고 내신 김무알(金武謁)을 보좌로 삼아 보냈다. 그런데 장수왕 역시 그를 억류하고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10년 을축년(425년)에 이르러 왕은 여러 신하들과 나라 안의 호걸들을 불러모아 직접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고 다양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자 왕이 눈물을 떨구면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과거 선친께서는 백성들의 일이라면 성심을 다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왜국으로 보냈다가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또 짐이 보위에 오른 이래 이웃 나라의 군사가 대단히 강성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고구려만이 화친을 맺자는 말을 하였으므로 짐이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루려에 보냈다. 그런데 고구려 역시 그를 붙잡아 두고는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짐이 비록 부귀한 위치에 있지만 일찍이 하루 한 순간이라도 아우들을 잊거나 생각하고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만약 두 아우를 만나 보고 함께 선왕의 묘를 뵙게 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겠는데, 누가 이 계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때 모든 관료들이 다 함께 아뢰었다.

 

"이 일은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 태수 박제상(朴堤上)이라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제상을 불러 물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어려운가 쉬운가를 따져 보고 나서 행동하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죽을지 살지를 따져 보고 나서 움직이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명을 받들어 가겠습니다."

 

왕은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그와 잔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손을 잡고는 헤어졌다.

 

제상은 왕 앞에서 명을 받들고 곧장 북해(北海)의 길을 달려 변복을 하고 고구려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 함께 탈출할 날짜를 의논하여 우선 5월 15일로 정하고, 고성(高城) 수구(水口)로 돌아와 묵으면서 기다렸다. 보해는 기일이 다가오자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조회하지 않다가 밤중에 도망쳐서 고성 바닷가까지 이르렀다. 고구려 왕이 이을 알고는 수십 명을 보내 뒤쫓아 고성에 이르러 따라잡게 되었다. 그러나 보해가 고구려에 머무는 동안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활을 쏘았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을 면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왕은 보해를 만나 보자 미해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며 눈물을 머금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마치 몸 하나에 팔뚝이 하나뿐이고 얼굴 하나에 눈이 하나뿐인 것 같소.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소?"

 

이때 제상이 이 말을 듣고는 두 번 절한 후 하직하고 말에 올랐다.

 

그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길을 떠나 곧바로 율포(栗浦) 바닷가에 도착했다.

 

제상의 아내가 이 일을 듣고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가 간곡하게 불렀으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떠났다. 그러고는 왜국에 도착해서 거짓으로 말했다.

 

"계림의 왕이 무고한 내 아버지와 형을 죽였기 때문에 이곳까지 도망쳐 왔습니다."

 

왜왕은 그를 믿고서 집을 주고 편안히 살게 해 주었다.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바닷가에 나가 노닐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았다. 잡은 것을 항상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이 매우 기뻐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 안개가 짙게 끼자 제상이 말했다.

 

"도망가실 만합니다."

 

미해가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갑시다."

 

제상이 말했다.

 

"만약 신까지 달아난다면 아마도 왜인들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받을 것입니다. 신이 남아서 추격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말했다.

 

"지금 그대는 나에게 아버지나 형과 같은 존재인데, 어찌 그대를 버려 두고 혼자 돌아갈 수 있겠소?"

 

제상이 말했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만 있다면 만족할 따름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술을 가져다 미해에게 바쳤다. 이때 계림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에 있었으므로 그를 딸려 보냈다.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 있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주변 사람들이 들어와 보려고 했으나 제상이 밖으로 나와서 저지하며 말했다.

 

"어제 말을 달려 사냥을 하느라 병이 깊어 아직 일어나지 않았소."

 

그러나 날이 저물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다시 묻자 대답했다.

 

"미해는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주변 사람들이 급히 왜 왕에게 알렸다. 왜왕은 기병을 시켜 뒤쫓게 했으나 따라잡지 못했으므로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너희 나라 왕자를 돌려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했다.

 

"나는 계림의 신하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한 것뿐인데 어찌 감히 당신에게 말하겠는가?"

왜왕이 노하여 말했다.

 

"이제 너는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니, 오형(五形, 중국 고대 다섯 가지 형벌로서 대체로 먹물로 얼굴에 글씨를 새기고[墨], 코를 베고[劓], 발뒤꿈치를 베고[刖], 성기를 절단하고[宮], 목을 베는[斬] 것을 말한다.)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신하라고 말하면 후한 녹을 주겠다."

 

제상이 대답했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 왕에게 볼기를 맞는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하여 제상의 발바닥 살갗을 도려 낸 후 갈대를 베어다 놓고 구 위를 걷게 했다.(오늘날 갈대에 있는 핏자국을 세속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제상이 대답했다.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뜨거운 철판 위에 세우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역시 제상이 대답했다.

 

"계림의 신하다."

 

그러자 왜왕은 제상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는 목도(木島) 가운데서 불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오자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에 알리게 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백관들에게 굴헐역(屈歇驛)에서 맞도록 명하고, 자신은 친동생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서 맞았다. 그리고 대궐로 들어와서 잔치를 베풀고 나라 안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제상의 아내는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하고 딸을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옛날 한(漢)나라의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에 있을 때 초(楚)나라 군사의 포로가 되었다.  항우(項羽)가 주가에게 '네가 내 신하가 되면 만록후(萬祿侯)로 봉하겠다.'라고 했으나, 주가는 욕을 하며 굽히지 않다가 초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제상의 충렬(忠烈)이 주가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처음에 제상이 떠나갈 때, 소식을 들은 부인이 뒤쫓았으나 만나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의 모래밭에 드러누워 오래도록 울부짖었는데, 이 때문에 그 모래밭을 장사(長沙)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 했다. 오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경주시 외동읍과 울주군 두동면 경계에 있으며 해발 754미터다. 그 아래에 박제상 사당이 있다. 아직도 이곳 주민들은 치술령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다 삶을 마쳤다. 그 뒤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으며, 지금도 사당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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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성왕의 무덤이라고 추측되기도 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보물 630호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국립중앙박물관

의희(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 사마덕종司馬德宗의 연호다.) 9년 계축년(413년)에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를 만들었다.(아마도 남평양南平壤인 듯한데, 지금의 양주楊州다.) 왕은 이전 왕의 태자인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음이 못마땅하여 그를 해치려고 고구려 군사를 청해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에게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는 창을 거꾸로 하여 [자기 편인]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은 뒤 떠났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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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 제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의 개국 시조면서 경주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서술했다. 혁거세란 명왕明王, 성왕聖王, 철왕哲王의 뜻이며 존호다.-이병도설)

 

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다음 신화를 서대석 교수는 육촌장 신화라고 이름지었다. 내용은 씨족 집단의 거주 지역과 족장의 이름을 이야기한 것으로서 천신 숭배 집단의 부계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 생활을 하던 사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 여섯 마을 사람들을 조선의 유민으로 보았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며, 촌장은 알평(謁平)이라고 한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峯, 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인데 그 아래에 석탈해왕릉이 보인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설치하고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년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로 읽어야 하며, 간혹 탁涿으로 쓰는데 역시 음은 도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며 아래의 예도 그렇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 구俱를 구仇로 표기하기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에 이산(伊山 혹은 개비산皆比山이라 한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양梁은 탁涿이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혹은 빈지賓之, 빈자貧子, 빙지氷之라고도 한다.)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와서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치원이 옛 집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지금의 금강산-현재의 경주 북쪽에 있는 산-백률사栢栗寺 북쪽산)으로 촌장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라고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활아(活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고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 혹은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여섯 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례왕 9년(132년)에 처음으로 여섯 부의 명칭을 고쳤고, 또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다.)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고본古本에는 건무建武 원년이라고도 하고 또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우물은 이 부족이 농경 생활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은 신라정新羅井이라고 하는데 경주의 탑정동 솔밭에 있따.)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하늘을 나는 천마의 의미가 있으며 하늘의 사자다.)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태양신의 정기를 받아 고귀하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서대석 설) 그 알을 깨뜨려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이 말은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박'은 우리말 '밝光明'에 대한 음차자音借字며, '혁赫'의 훈'밝'에 대한 음차자인 '박'자로 성을 삼은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양주동, 이동환-해설가들에 다르면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선도성모와 같은 존재며, 중국 황실의 공주로서 성도산에 와서 깃들었다는 신모다. -이동환-가 낳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는 말에 어진 사람을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은 것 역시 서술성모가 나타났음을 뜻함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居瑟邯) (또는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 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후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축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맺어드려야 한다."
(이하는 왕비 알영 부인을 맞이하는 이야기인데, 고운기의 고증에 의하면 부인이 태어난 해는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5년 뒤라고 기록하고 있어 여기와는 다르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이도흠에 의하면 '알'은 사물의 핵심이나 근원을 말하며, '씨'의 대칭어로 여성에게만 쓰였다고 한다. 서대석은 알영정을 나정에 대응되는 마을의 중심지로 보았다.-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다. 이러한 닭 토템은 신성 관념의 반영이며 신라 전체의 토템으로 확장된다.) 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이다.)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했다. 여자 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열세 살이 되는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 아이를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 자를 서벌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왕후는 경주의 오릉五陵에 혁거세와 같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한 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五體]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蛇陵 '삼국유사'에 나오는 '뱀'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뱀이야말로 합장을 막고 오릉을 만든 매개자이다.)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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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3대 유리이사금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제2대 남해차차웅,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 '이사금'이라고도 하며 윗사람, 족장,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나중에 임금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노례왕'은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한다.)이 처음에 매부 탈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탈해가 말했다.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치아가 많다고 하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 봅시다."

 

이에 떡을 깨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잇금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즉위했다. 이런 연유로 왕을 잇금이라고 했다. 이질금이란 칭호는 노례왕에서 시작되었다. 유성공(劉聖公,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족형 유현劉玄이다.) 경시(更始) 원년 계미년(23년)에 즉위하여(연표에는 갑신년에 즉위했다고 했다.) 여섯 부의 호를 고쳐 정하고 여섯 성(姓, 이씨李氏, 최씨崔氏, 손씨孫氏, 정씨鄭氏, 배씨裵氏, 설씨薛氏다.)을 하사했다.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는데, 차사(嗟辭, '슬퍼하는 말' 이라는 뜻인데, 가사에 자주 나오는 '아으'와 유사하며 향가의 기원과 관련된다.)와 사뇌격(詞腦格, 향가 중에서 감탄사를 가진 10구체를 말한다.)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쟁기와 보습과 얼음 저장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무(建武) 18년(42년)에는 이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해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함께보기: 제2대 남해왕(차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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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탈'은 '토吐'와 동음이며 '치'는 '이', '니'의 훈차자로서 치질금은 이사금, 이질금과 같은 뜻이다.)은 남해왕 때에(고본古本에 임인년에 왔다고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일연은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술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했다. 가까운 임인년이면 노례왕이 즉위한 뒤일 것이므로 서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앞의 임인년이라면 혁거세의 시대다. 때문에 임인년이라 한 것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맞이하여 그들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는 나는 듯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 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과 하서지촌下西知村이라는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나오며 대왕암에서 3~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포구 가에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있었다.

 

[노파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는 원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일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

 

배를 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길이가 스무 자에 너비가 열세 자나 되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아진의선이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아래 매어 두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해 고했다. 잠시 후에 열어 보니 반듯한 모습의 남자 아이가 있었고, 칠보(七寶, 불가의 일곱 가지 보물로서 금, 은, 유리琉璃, 마노瑪瑙, 호박琥珀, 산호珊瑚, 차거硨磲)와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잘 대접하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 (또는 정명국正明國 사람이라고도 하고 완하국琓夏國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화하국花夏國이라고도 한다. 용성국은 왜倭의 동북쪽 1,000리 지점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고 했는데 일연의 주석처럼 일본과 관련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에 일찍이 스물여덟 용왕이 있는데, 사람의 태(胎)에서 출생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온 백성을 가르치고 성명(性命)을 바르게 닦았습니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간택을 받지 않고 모두 큰 자리(大位, 왕위를 말한다.)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자 아들 구하기를 빌어 7년 만에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군신을 모아 묻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으니 길상(吉祥)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고,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또한 칠보와 노비까지 배에 싣고 띄워 보내면서, '아무 곳이나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라고 축원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아이는 지팡이를 짚고 노비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으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 이레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니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오래도록 살 만했다. 그래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그의 혈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고 박을 허리에 매고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보았다.)의 집이었다. 이에 곧 계책을 써서 몰래 그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 집에 가서 말했다.

 

"여기는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던 집이오."

 

호공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이들의 다툼이 결판이 나지 않아 관청에 고발했다. 관청에서 물었다.

 

"무슨 근거로 너의 집이라고 하느냐?"

 

아이가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가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십시오."

 

탈해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니, 이 사람이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 여기서 '토해'는 '탈해'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白衣]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했다. 그런데 하인이 물을 길어 오면서 도중에 먼저 맛보려 하자 입에 잔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하인이 맹세했다.

 

"이후로는 가깝든 멀든 감히 먼저 물을 맛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입에서 잔이 떨어졌다. 그 뒤로 하인은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에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년(57년) 6월 탈해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옛날 내 집이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라 했다. 어떤 사람은 까치로 인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버리고 성을 석(昔)씨로 했으며(이병도설에 의하면 까치는 길조요 예지豫智의 새이므로 이를 토템으로 삼은 것 같기도 하다.), 상자 속에서 알을 깨고 출생했기 때문에 탈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째인 건초(建初, 후한 장제章帝 유달劉炟의 연호다.) 4년 기모년 79에 죽은 뒤 소천구(疏川丘)에 장사 지냈다. 그 이후에 신(神)이 말했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두개골의 둘레가 세 자 두 치, 몸통뼈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에 치아는 하나로 엉켜 있었으며, 뼈마디는 사슬처럼 이어져 있어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의 골격이었다.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니, 신이 또 말했다.

 

"내 뼈를 동악에 두라.(탈해왕릉은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의 길가에 큰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받들어 모셨다.

이런 말도 있다. [탈해왕이] 죽은 뒤 27대 문무왕 대 조로調露 2년 경신년(680년) 3월 15일 신유일辛酉日 밤, 태종의 꿈에 매우 위엄 있고 사나워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 왕이 그의 말대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사國祀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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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릉/ⓒ한국콘텐츠진흥원

제13대 미추이질금(未鄒尼叱今, 재위 262~284, 혹은 미조未組 또는 미고未古라 한다.-여기서 미조, 미고는 근저根抵, 원본元本이라는 뜻인 '및', '및'의 사음寫音이라는 설이 있다.)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높았고 여전히 성현의 덕이 있어 이해(理解, '삼국사기'에는 점해沾解라고 되어 있다.)로부터 자리를 이어받아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지금 세상에서는 미추왕의 능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며, 후대에 김씨의 여러 왕들이 모두 미추를 시조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오른지 23년 만에 죽었는데, 왕릉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 대에 이서국(伊西國, 지금의 경북 청도 지역에 있던 나라)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우리 [신라]는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막았으나 오랫동안 대항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군대[竹葉軍]가 도우러 와서 우리 군대와 힘을 합쳐 적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적이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선왕이 음덕으로 도와 공을 세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능을 죽현릉(竹現陵, 여기서 '현現'이 '엽葉'과 음이 통하므로 '죽엽릉'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이라 불렀다.

 

그 후 37대 혜공왕(惠恭王) 대인 대력(大曆) 14년 기미년(779년) 4월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무덤 속에서 어떤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는데, 장군과 같은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또 갑옷 차림에 무기를 든 마흔 명가량의 군사가 뒤를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안에서 진동하고 소리내어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어떤 때는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 말은 이런 내용이었다.

 

"신은 평생을 시대의 환란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어 통일을 이룩한 공이 있고, 이제는 혼백이 되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쳐 환란을 구하려는 마음을 잠시도 고쳐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혜공왕 6년)에는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그것은 군주나 신하가 저의 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이제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으려 하니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했다.

"나와 공이 이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예전처럼 힘써 노력해 주시오."

 

[김유신의] 세 차례 부탁에 세 차례 다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회오리 바람은 곧 돌아갔다.

 

혜공왕은 그 말을 듣고는 두려워 즉시 대신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의 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서른 결(結)을 취선사(鷲仙寺, 취선사는 경북 경주에 있던 절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하'에 이 내용이 있다.)에 하사하여 명복을 빌게 했다. 그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에 복을 심기 위해 세운 절이다. 미추왕의 혼이 아니었다면 김유신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이니, 나라를 지키는 마음이 크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미추왕의 혼은 호국령에 속한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기려 삼삼(三山, 신라의 제전 중에서 대사大祀에 속하며 내림奈林, 골화骨化, 혈례穴禮의 세 곳이다.-이동환 설)과 함께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제사 차례를 오릉(五陵, 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제2대 남해차차웅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 보다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함께보기: 이서국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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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제2대 남해차차웅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 자충慈充과 동음어이며 '스승'의 옛말 혹은 존장자에 관한 칭호)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일컫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전한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4년)에 즉위하여 21년 동안 다스리고 지황(地皇, 한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 평제平帝를 죽이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다.) 4년 갑신년(24년)에 죽으니, 이 왕이 바로 삼황(三皇, 혁거세왕, 노례왕, 남해왕을 말한다.)의 첫째라고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불렀는데,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어떤 이는 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시대의 명문장가로 '화랑세기'를 지었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다.)이 말했다.

 

"차차웅은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존장인 자를 자충이라 한 것이다."

 

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잇금[齒理](잇자국을 말한다.) 을 말한다. 처음에 남해왕이 승하하자 아들 노례(努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자 탈해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합니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했다. 옛날부터 이렇게 전해 왔다.

 

혹은 왕을 마립간(麻立干, 립立을 수袖로 쓰기도 한다.)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은 이렇게 말했다.

 

"마립이란 궐(橛, 서열을 말한다.)을 말하는 방언이다. 궐표(橛標)는 자리에 따라 두는데, 왕궐(王橛)이 주가 되고 신궐(臣橛)은 아래에 두게 되어 있어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삼국사론三國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거서간과 차차웅이라 부른 임금이 각각 한 명씩 있고, 이사금이라 부른 임금이 열여섯 명이고, 마립간이라 부른 임금이 넷 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을 지으면서 모두 무슨 왕[某王]이라 칭하고 거서간이나 마립간 등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 말이 비루하고 거칠어서 일컬을 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롟하면서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 또한 옳은 일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를 갈문왕(葛文王, 신라 시대 임금의 존족尊族과 임금에 준하는 자에게 주던 칭호다.)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 시대에 낙랑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또 천봉(天鳳) 5년 무인년(18년)에 고구려의 속국 일곱 나라가 투항해 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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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대왕 괘릉(掛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찬(伊湌, 신라 17관등 중 두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진골만 오를 수 있었다. 이척찬(伊尺飡) 혹은 이간(伊干), 일척간(一尺干), 이찬(夷粲)이라고도 한다.)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었고 원성왕(元聖王)은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중 첫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일명 이벌간(伊罰干),우벌찬(于伐飡),이벌찬(伊伐飡),각간(角干),각찬(角粲),서발한(舒發翰),서불한(舒弗邯)이라 하였다.)으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다. 원성왕은 꿈에 복두(幞頭, 두건의 일종으로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처음 만들었으며, 귀인이 쓰는 모자의 하나로 보면 된다.)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 12현의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꿈에서 깨어나 사람을 시켜 풀이하게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

 

원성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닫고는 나가지도 않았다. 이때 아찬(阿飡, 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직으로 일명 아척간(阿尺干)·아찬(阿粲)이라고도 하였다.) 여삼(餘三 혹은 여산餘山이라고도 한다.)이 와서 뵙기를 청했다. 원성왕은 병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아찬이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했다.

 

아찬이 말했다.

"공께서 꺼리는 일이 무엇입니까?"

원성왕은 꿈을 풀이한 일을 자세히 말했다. 그러자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면서 말했다.

"이는 바로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왕은 주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풀이해 줄 것을 청했따. 아찬이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孫, 원성왕이 내물왕의 12세손이 된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의거)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권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왕이 말했다.

"위로는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아찬이 말했다.

"청컨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지내십시오."

 

왕은 아찬의 말에 따랐다.

얼마 후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삼아 궁궐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시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즉위하자 대신의 무리들이 모두 따라와서 새로 즉위한 임금에게 절을 하고 축하했다. 이 사람이 바로 원성대왕(元聖大王, 재위 785~798)이다. 대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인데, 꿈의 응험이 맞았던 것이다.

 

김주원은 물러나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살았다.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이니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匝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은 참으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의 만파식적을 전해 받아 왕에게 전했다. 왕은 만파식적을 얻었기 때문에 하늘의 은혜를 받아 그 덕이 원대하게 밫났다. 정원(貞元, 당唐나라 덕종德宗 이적李適의 연호로 785~805년까지 사용) 2년 병인년(786년) 10월 11일, 일본의 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記'를 보면, 제55대 문덕왕文德王이 이에 해당되는 듯하다. 그 이외에는 문경이 없는데, 어떤 책에는 왕의 태자라고 하기도 한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했는데,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돌리고 금 50냥과 함께 사신을 보내 그 피리를 청했다. 왕이 사신에게 말했다.

 

"짐은 선대인 진평왕 대에는 있었다고 들었으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듬해 7월7일, 다시 사신을 보내 금 천 냥으로 만파식적을 청하며 말했다.

"과인이 신물(神物)을 보고 난 후 다시 돌려드리겠소."

 

왕은 역시 이전과 같은 대답으로 사양하고, 은 3,000냥을 사신에게 주어 금과 함께 돌려보냈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다음 날 두 여자가 내정(內庭)에 나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바로 동지(東池)와 청지(靑池, 청지는 바로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그 절의 기록에, 우물은 바로 동해의 용이 왕래하면서 설법을 듣는 곳이라 했다. 이 절은 바로 진평왕이 만든 것으로 500성중聖衆, 5층탑, 전민田民을 아울러 바쳤다고 한다.)의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티베트계통의 당항黨項, 탕구트) 사람 두명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이 우물은 지금도 분황사에 남아 있다.)의 용 등 세 용을 저주하여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 속에 담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저희 남편을 비롯하여 나라를 지키는 용을 돌려주게 하십시오."

 

왕은 뒤쫓아 하양관(河陽館, 경상북도 영천 서쪽인 하양에 있어던 관사)에 이르러 직접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의 용 세 마리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느냐?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하겠다."

 

그러자 하서국 사람은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쳤다. 세 곳에 놓아 주자 제각각 한 길씩이나 뛰어오르고 기뻐하며 사라졌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성스럽고 명철함에 감복했다.

 

어느 날 왕은 황룡사(皇龍寺,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 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했는데, 절 이름과 경經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의 승려 지해(智海)를 궁궐로 청하여 50일 동안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했다. 사미(沙彌, 출가하여 정식 승려가 되기 전에 수련 중인 남자 승려) 묘정(妙正)은 항상 금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로 인해 얻은 이름이다.)에서 그릇을 씻었는데, 자라 한 마리가 샘 가운데에서 떴다 잠겼다 했다. 모정은 늘 먹다 남응ㄴ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놀곤 했다. 법연이 끝나 돌아가게 되자 사미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며칠 동안 덕을 베풀어 주었는데 어떻게 갚겠느냐?"

 

며칠 후 자라는 작은 구슬 한를 토해 주었다. 사미는 그 구슬을 허리띠 끝에 매달았다.

 

이후부터 대왕은 사미를 보면 애지중지하여 내전으로 불러들여 항상 곁에 두었다. 이때 한 잡간(匝干, 신라 17관등 중 3위 관등)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역시 사미를 사랑하여 함께 데리고 가기를 청했다. 왕이 허락하여 잡간은 사미와 같이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 역시 사미를 보자 총애하고, 승상과 좌우 신하들이 모두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런데 관상을 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건대, 길상(吉相)이 하나도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존경과 신임을 받으니, 반드시 특별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사미의 허리띠 끝에서 작은 구슬이 나왔다.

황제가 말했다.

 

"짐에게는 여의주 네 개가 있었는데 지난해에 한 개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다."

 

황제가 사미에게 묻자 사미는 그 일을 사실대로 아뢰었다. 황제가 말했다.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사미가 구슬을 얻은 날이 같다."

 

그 구슬을 빼았고 사미를 쫓아냈는데 그 뒤로는 아무도 사미를 사랑하거나 신임하지 않았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숭복사崇福寺다.)에 있는데(그의 능은 물이 차 있어 관을 땅에 묻지 못하고 걸어 놓았다고 하여 괘릉掛陵이라고 부른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또한 왕은 보은사(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조부 훈입(訓入) 잡간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증조부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고조부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삼았는데,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보기: 만파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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