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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5대 경덕왕릉/ⓒ문화컨텐츠닷컴

[당나라에서] <덕경德經, 도가의 창시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말하며 모두 5,000자로 이루어져 있다.> 등을 보내오자 대왕은 예를 갖추어 받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효성왕 2년'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어 경덕왕 대의 일이 아니라고도 하나, 리상호는 경덕왕 대의 일이 맞다고 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던 해에 오악삼산(五岳三山,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이며, 삼산은 경주 남산, 영천 금강산, 청도 부산이다. 윤영옥 교수는 오악이 통일신라의 상징적 존재이자 전제왕권의 상징이라고 했다.)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 뜰에서 대왕을 모셨다.

3월3일 왕은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올라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길거리에서 대덕(大德, 중에게 부여하는 직위 명칭인데 덕망이나 풍모가 높은 중을 일컫는다.) 한 명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이때 마침 위엄과 풍모가 깨끗한 고승이 배회하며 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와 뵙게 하니 왕이 말했다.

"내가 말한 위엄과 풍모가 있는 승려가 아니다."

그리고 돌려보냈다.

다시 한 승려가 가사를 걸치고 앵통(櫻筒, 중이 물건을 넣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통)을 지고(삼태기를 메고 있었다고 한 곳도 있다.)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그를 보고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통 안을 살펴보니 다구(茶具, 차를 다려 마시기 위한 도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충담(忠談)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매년 중삼일(重三日, 세시풍속에 액을 막는 제의祭儀가 있는 날로 3월3일이다.), 중구일(重九日, 중양일重陽日 이라고도 하며 액을 막는 제의가 있는 날로 9월9일이다.)에 차를 끓여 남산 삼화령(三花嶺, 경주 남산에 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데, 이 위에 연꽃 모양의 불상 대좌가 있다고 한다.)의 미륵세존(彌勒世尊, 뒷 세상에 나타날 부처)께 올리는데, 지금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했다.

"나에게도 차 한 잔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승려는 이에 차를 끓여 바쳤는데, 찻잔 속에서 향내가 풍겼다. 왕이 말했다.

"짐은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 향가를 일컫는 가사의 별칭인데 '기이 제1'에는 사뇌격詞腦格이라고 했다.)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보라."

왕이 말했다.

충담은 곧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 왕의 불교 수행을 돕는 승려)로 봉했으니, 그는 삼가 재배하며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다.

 

君隱父也

군은부야(임금은 아버지요)
臣隱愛賜尸母史也
신은애사시모사야(신하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라)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민언광시한아해고위사시지(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면)
民是愛尸知古如
민시애시지고여(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리라)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굴리질대힐생이지소음물생(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此肹湌惡支治良羅

차힐식악지치량나(이들을 먹여 다스려라)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차지힐사유지어동시거어정위시지(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하면)
國惡支持以支知右如

국악지지이지지고지(이 나라가 보전될 줄 알리라)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후구군여신다지민은여위내시등언(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國惡太平恨音叱如

국악태평한음질여(나라는 태평을 지속하리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김상억 교수는 '찬讚'이 게송류偈頌類의 '찬'이 아니고 한시의 '송찬頌讚' 류와 맥이 같다고 했다. 양주동 박사는 이 작품의 기상천외한 시법에 감탄하면서 문답체의 구조로 보았다.)는 다음과 같다.

 

咽嗚爾處米
열오이처미(열어젖히자)
露曉邪隱月羅理
로효야은월라리(벗어나는 달이)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支下
백운음축간부거은안지하(흰구름 좇아 떠간 언저리)
沙是八陵隱汀理也中
사시팔릉은정리야중(백사장 펼친 물가에)
耆郞矣皃史是史藪邪
기랑의모사시사수야(기파랑 모습이 잠겼어라)
逸烏川理叱磧惡希
일오천리질적악희(일오천 자갈벌에서)
郞也持以支如賜烏隱
랑야지이지여사오은(낭의 지니신)
心未際叱肹逐內良齊
심미제질힐축내량제(마음 좇으려 하네)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아야백사질지차고지호(아! 잣나무 가지 높아)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설시모동내호시화판야(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왕은 옥경(玉莖, 남자의 성기)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는데, 자식이 없어 왕비('왕력'에는 삼모부인三毛夫人으로 되어 있다.)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했다. 후비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각간(角干, 신라 17간등 중 최고 관직) 의충(依忠)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사(表訓大師)를 불러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했으니 원하건대 대사께서 하느님(上帝)에게 청하여 사내아이를 점지하게 해 주시오."

표훈대사가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말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천제께서는 '딸을 구하는 것은 되지만 사내아이는 마땅치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말했다.

"딸을 아들로 바꿔 주시오."

표훈대사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했다.

천제가 말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표훈대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인간 사이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데 지금 대사는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오는 것을 금하노라."

표훈대사가 와서 천제의 말을 전하니 왕이 말했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을 얻어 후사를 삼고 싶소."

달이 차서 왕후가 태자를 낳으니('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7년 7월23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으니,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 신라 제36대 왕, 재위 765~780)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태후가 섭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았고(그는 16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반란이 다섯 번이나 일어났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도 막지 못했으니, 표훈대사의 말이 사실이었다. 태자는 원래 여자였다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돌 때부터 즉위하기까지 항상 부녀자들의 놀이를 일삼고 비단 주머니 차는 것을 좋아하며 도사(道士)들과 희롱했다. 그래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결국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 김양상은 선덕와으이 이름이다. 김경신金敬信의 오기라는 설도 일리가 있다.-이가원 설)에게 시해되었다. 표훈대사 이후로 신라에 성인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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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문화컨텐츠닷컴

 

만파식적(萬波息笛)

[삼국사기] '잡지(雜誌)'편에 나오는데, 김부식은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만파식적'을 풀이하면 '거센 물결을 잠재우는 피리'라는 의미다.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 재위 681~692)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성은 김씨며, 개요(開耀, 당나라 고종의 12번째 연호로 681년에서 682년까지 사용했다.) 원년 신사년(681년)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感恩寺,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나 12미터에 달하는 두 탑은 건하다.)를 지었다.

[사중기寺中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완정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 2년(682년)에 완성했다. 금당(金堂) 섬돌(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돌층계) 아래를 파고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었는데, 바로 용이 절 안으로 들어와 서리도록 마련한 것이라 한다. 대개 유조에 따라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大王岩,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바닥가에서 보이는 돌무더기다.)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후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했다.

이듬해 임오년 5월 초하루(어떤 본에는 천수天授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湌, 신라 시대 17관등 중 제4위로 해간海干, 파미간波彌干이라고도 한다.)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일관(日官, 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원) 김춘질(金春質 혹은 春日이라고 했다.)에게 점을 치도록 명령했다.

일관이 왕께 아뢰었다.

"돌아가신 임금(문무대왕文武大王)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며, 또 김유신 공이 33천(天)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킬 보배를 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꼐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신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산의 형세는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혹은 산 역시 대나무처럼 밤자으로 합쳐졌다 떼어졌다 했다고 한다.

사신이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이튿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까지다.)에 대나무가 하나로 합치자, 천지가 진동하고 이레 동안 폭풍우가 치면서 날이 어두워졌다가 그달 16일에야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으로 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용을 영접하여 함께 자리에 앉았다.

왕이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떨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용이 말했다.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친 후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께서는 바닷속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또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한 마음이 되어 값으로는 정할 수 없는 이런 큰 보물을 내려 저에게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옥으로 답례하고는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었다. 17일에 지림사(祗林寺, 기림사라고도 하며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에 있다.)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다.)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말을 달려와 축하하고 천천히 살펴본 다음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물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한 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태자가 아뢰었다.

그래서 왼쪽에서 두 번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못이 되었따. 그래서 용연(龍淵)이라 불렸다.

왕은 궁궐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 때 이르러 천수(天授, 주周나라 측천제則天帝의 연호로 천수라는 연호는 2년밖에 안 썼으므로, 천수 4년은 장수長壽 2년을 말한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로 690년에서 705년까지 재위했다.) 4년 계사년(693년)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이 있었으므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息笛)이라 불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傳記)에 있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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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콘텐츠진흥원 제9회 캐릭터 디자인 공모전 장려상 - 경문왕과 복두장이>

 

경문대왕(景文大王, 신라 제48대 왕, 재위 861~875)의 휘는 응렴(膺廉)이고 열여덟 살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약관의 나이가 되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은 낭(郎)을 불러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고 물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헌안왕 4년 9월에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응렴은 그때 나이 열다섯이었다. 내용은 이와 비슷하다.).

"낭은 화랑이 되어 사방을 유람했는데 무슨 특별한 것이라도 보았는가?"

낭이 아뢰었다.

"신은 아름다운 행실을 가진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게"

낭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데도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유한데도 의복이 검소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 귀한 세력이 있는데도 위세를 펼치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그가 어진 것을 알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짐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그대에게 시집 보내 시중을 들게(원문의 '건즐巾櫛'은 수건과 빗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다른 사람 밑에서 시중을 든다는 의미다.) 하고자 한다."

낭은 자리를 피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후 물러났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말하니 부모가 놀라고 기뻐하며 자제들을 모아 의논했다.

"왕의 맏공주는 외모가 아주 보잘것없지만, 둘째는 매우 아름다우니 그녀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

낭이 무리 중에 우두머리인 범교사(範敎師,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 의하면 헌안왕 4년에 흥륜사의 승려에게 물었다는 말이 있다.)란 자가 이 말을 듣고는 집으로 찾아와 낭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공에게 시집 보낸다는 것이 사실이오?"

낭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럼 둘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겠소?"

낭이 말했다.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동생을 선택하라고 명하셨소."

범교사가 말했다.

"낭이 만약 동생을 선택한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눈 앞에서 죽을 것이오. 하지만 맏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잘 살펴 결정하시오."

얼마 후 왕이 날을 잡고 사람을 보내 낭에게 말했다.

"두 딸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는 오직 공의 뜻에 따르겠다."

심부를 갔던 사람이 돌아와 낭의 뜻을 아뢰었다."

"맏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나자 왕이 병이 위독해져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했다.

"짐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맏딸의 남편인 응렴이 이어받도록 하라."

이튿날 왕이 죽자 낭은 유조를 받들어 즉위했다. 그러자 범교사가 왕에게 와서 아뢰었다.

"제가 아뢴 세 가지 좋은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맏공주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지금 왕위에 오르신 것이 그 한 가지고, 이제 쉽게 아름다운 둘째 공주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두 가지며, 맏공주를 선택했기 때문에 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왕은 그 말을 고맙게 여겨 대덕(大德, 본래 부처를 가리켰으나 덕망이 높은 고승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이란 벼슬을 주고 금 130냥을 내렸다.

왕이 죽으니('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 의하면 즉위 15년 7월 9일이다.) 시호를 경문(景文)이라 했다. 왕의 침전에는 매일 저녁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는데, 대궐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무서워 몰아내려 하니 왕이 말했다.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잠들 수가 없으니 몰아내지 마라."

그래서 매일 잠잘 때면 뱀이 혀를 내밀어 왕의 가슴을 덮었다.

왕은 즉위한 후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자랐다.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직 복두장(幞頭匠, 왕의 모자를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복두장이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道林寺, 옛날 입도림入都林 가에 있었다. 이는 현 경주시 구황동 모전석탑지로 추측) 대숲 가운데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대나무를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왕이 그것을 싫어하여 대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는 산수유를 심었는데 바람이 불면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

화랑 요원랑(邀元郞), 예흔랑(譽昕郎),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 지금의 강원도 통천이다.)을 유람하면서 임금을 위해 나를 다스릴 뜻을 은근히 품었다. 그래서 가사 세 수를 짓고, 다시 사지(舍知, 신라 17관등 중 제13위 관등) 심필(心弼)에게 공책[針卷]을 주고 대구화상(大矩和尙 향가에 뛰어났던 신라의 승려로서 진성왕의 명에 의해 향가집'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다.)에게 보내어 노래 세 수를 짓게 했는데, 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고,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며, 셋째는 문군곡(問群曲)이다.

익덧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아주 기뻐하여 상을 내렸다 하는데 가사는 자세하지 않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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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금관(金官, 지금의 김해시)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 본래 김해시 호계사에 있었는데, 1873년에 허 왕후릉 곁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전각을 둘러쳐 놓았다.)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의 왕비 허 왕후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년(48년)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陀國, 현재 인도 아요디아 지역에 있었던 나라)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향하려 하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건너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에게 아뢰자, 부왕이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정박했다. 이 배에는 붉은 돛대와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기에 주포(主浦)라 이름했다. 처음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이 처음으로 들어오던 해안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수로왕은 아내를 맞이하여 함께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 당시 해동에는 아직 절을 지어 불법을 받드는 사례가 없었다. 아마도 상교(像敎, 불교의 다른 명칭)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고 이 땅 사람들이 받들지 않았기 때문으로 '가락국본기'에는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년)에 이르러, 그 땅에다 절을 짓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지어(이 일은 아도와 눌지왕 시대에 있었는데, 법흥왕 이전 시대다.) 지금까지 여기서 복을 빌고 남쪽 왜를 진압했다. 이것은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사각형ㅇ데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다. 돌은 약간 붉은 반점 무늬를 띠고 있는데 질이 매우 연하여 이 땅에서 나는 것은 아니다. '신농본초(神農本草, 후한 때 365종의 약이름을 분류하여 지은 책)'에서 닭 벼슬의 피를 떨어뜨려 시험했다는 돌이 바로 이 돌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것은 '가락국본기'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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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댁대왕신종(에밀레종)/ⓒ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제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 재위 742~765)이 천보(天寶, 당나라 대종代宗 이예李豫의 연호로 766년에서 779년까지 사용했다.) 13년 갑오년(754년)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가 열 자 세 치고 두께는 아홉 치며 무게는 49만 7581근이었다. 시주(施主)는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三毛夫人, 경덕대왕의 선비先妃)이며, 공장은 이상택(里上宅) 노복이었다. [당나라] 숙종(肅宗, 재위 756~762) 때 다시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여섯 자 여덟 치였다. 또 다음해인 을미년(755년)에 분황사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동상을 주조했는데, 무게는 30만 6700근이고 공장은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참고: 신라시대 1근의 무게는 성덕대왕신종의 무게인 18.9톤을 통해 신라시대 당시 1근의 무게는 약 250g으로 추정

 

또 경덕왕은 황동 12만 근을 들여 선친 성덕왕을 위해 큰 종 하나를 주조하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재위 765~780) 건운(乾運)이 대력(大歷, 당나라 대종 때의 네 번째 연호로 766~779까지 사용) 경술년(770년) 12월에 유사(有司, 어떤 단체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의 벼슬아치 또는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공장을 모아 종을 완성한 뒤 봉덕사에 모셨다. 이 절은 바로 효성왕(孝成王, 제34대 왕 재위 737~742)이 개원(開元 26년 무인년(738년)에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래서 종의 이름을 '성댁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칭으로 봉덕사종 별칭으로 에밀레종'이라 했다. 성덕대왕은 바로 경덕왕의 아버지 흥광대왕(興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해 시주한 금으로 주조했기 때문에 성덕대왕의 종이라 한 것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郞) 한림랑(翰林郞) 김필해(金弼奚, 김필오金弼奧라고도 한다, 생몰미상)가 왕명을 받들어 종의 이름을 지었는데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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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나무위키

 

옛 책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 이 무왕은 제30대 무왕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이병도 박사는 무녕武寧의 동의이사同義異寫임을 모르고 쓴 것이라 하여 제25대 무녕왕을 말하는 듯하다고 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조에는 이름이 장璋이고 법왕法王의 아들이며 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수도 남쪽 못 가(南池, 부여군 동남리에 있으며 궁남지라고 한다. 여기서 무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 이병도 박사는 "서동은 내가 아는 바로는 무왕의 아명이 아니라 훨씬 이전의 동성왕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서동이 마를 캐어 팔며 살았던 이유를 왕위 계승과 관련된 권력 투쟁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항상 마(薯蕷)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라고 쓴다.)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고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이재선 교수는 이 동요가 서동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백제에 퍼져 있던 구전 설화를 의도적으로 개작하여 경주 지역에 전파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善化公主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선화 공주님은 남몬래 짝지어 두고

薯童房乙 夜矣 卯乙 抱遣 去如

서동(薯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동요는 수도에 가득 퍼져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백관들은 힘껏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게 했다. 공주가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몰랐으나, 우연한 만남을 기뻐하며 그를 믿고 따라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그러고는 함께 백제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며 앞으로 살아갈 계책을 세우자고 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인데, 한평생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 것이 흙덩이처럼 쌓여 있소."

공주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보물을 부모님의 궁궐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았는데, 마치 구릉처럼 쌓였으므로 용화산(龍華山, 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금을 운반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옮겨 줄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의 궁궐에다 금을 날라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하게 여겨 서동을 더욱 존경했고,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 일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도착했는데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가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간곡한 소원입니다."

 

왕이 절을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법상(彌勒法像) 세 개와 회전(回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미륵사 터가 있는데 4미터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유추할 수 있다.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 불교가 미륵신앙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했다.)라고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돕게 했는데,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삼국사>에 "이는 법왕의 아들이다."라고 했는데 이 전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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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천도 과정/ⓒ우리역사넷

 

부여군(扶餘郡)은 전백제의 수도인데, 혹은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성왕(聖王, 백제 제26대  왕, 재위 523~554) 26년 무오년(538년) 봄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그 지명은 소부리인데, 사비란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고 소부리란 부여의 별칭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제4에는 성왕 26년이 아닌 16년으로 되어 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이유는 고구려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비좁은 웅진熊津보다는 넓은 평지에 기틀을 다지려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

 

또 토지측량대장에는 이렇게 말했다.

"소부리군 농부의 주첩(柱貼, 농사 짓는 일꾼의 대장)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여군이라 말하는 것은 아주 옛날의 이름을 회복한 것이며 이는 백제 왕의 성이 부씨(扶氏)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혹은 여주(餘州)라고도 하는데 군의 서쪽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 승려가 대중에게 설법할 때 앉는 대좌를 말한다.)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통화(統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연호로 983년에서 1012년까지 사용했다.) 15년 정유년(997년) 5월 어느 날 여주 공덕대사수장(功德大師繡帳)."

 

또 옛날 하남(河南)에서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지도책 안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으니,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에는 [후한서]의 말을 인용하여 "삼한은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다."라고 했고, [북사北史,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역사서로 위魏나라부터 수나라까지 역사를 기록했다.]에는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고 서남쪽은 큰 바다와 닿아 있으며, 북쪽 끝은 한강(漢江)인데 그 군(郡)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그 밖에 또 오방성(五方城)이 있다."라고 했다.

 

[통전通典]에는 "백제는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가 위치하고 서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해 있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에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으로 그 동북쪽은 신라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越州)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이 있다."라고 했으며, [신당서新唐書]에는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 건너편이고, 북쪽은 고구려다."라고 했다.

 

[삼국사(삼국사기를 말한다.)] '본기本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북부영에서 난리를 피해 달아나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주(州)의 왕에게는 왕자가 없고 단지 세 딸만 있었다. 왕은 주몽이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부여 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沸流)라고 하고 둘째는 온조(溫祚)라고 했다.

 

두 왕자가 후에 태자(太子, 주몽의 아들로 나중에 유리왕이 되었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과 마려(馬黎) 등 10여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따라갔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도착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말했다.

'오직 하남의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그 천연의 요새와 이로운 땅은 또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 지금의 인천 지역)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이며 풍납토성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때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게 되자 위례성으로 돌아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도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 고쳤다. 그 조상의 계보가 고구려와 똑같이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사비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은 인주仁州며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말했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前漢) 홍가 3년 계유년(기원전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기원전 5년)에 한산(漢山, 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도읍을 옮기고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105년이 지나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고 원휘(元徽, 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유욱劉昱의 연호로 473년에서 477년까지 사용했다.) 3년 을묘년(475년)에 이르러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고, 63년이 지나 26대 성왕에 이르러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이 지났으니, 당나라 현경 5년(660년)이었다. 이때는 의자왕이 즉위한 지 20년으로, 신라의 김유신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여 평정시켰다.

 

백제국에는 옛날부터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 200여 성, 76만 호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당나라에서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를 나누어 두고, 그 추장을 도독부 자사(都督府刺史)로 삼았다. 얼마 후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하여 웅(熊), 전(全), 무(武)의 세 개 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했다.

 

또 호암사(虎巖寺)에는 정사암(政事巖, 지금은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이 있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을 선출할 때 뽑힐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적어서 상자에 넣고 바위 위에 둔다. 얼마 후 상자를 가져다 보고는 이름 위에 인(印)이 찍힌 흔적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정사암이라 한 것이다.(이는 귀족 연합적인 삼국 시대의 정치 성격을 나타내는 실례로서 오늘날의 선거 방식과 비슷하여 주목할 만하다.)

 

사비하 가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바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았기 때문에 바위에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남아 있어서 용암(龍巖)이라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浮山) 등 세 개의 산이 있었는데 나라가 흥성하던 시기에는 각기 신인(神人)이 있어 그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서 왕래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비하 절벽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열 명이 앉을 정도로 컸다. 백제 와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하여 예불하려면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며 절을 했는데,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이름을 온돌석(㷝石, 구들돌, 부여에서 보령 쪽으로 가다 보면 큰 다리를 지나 왼쪽에 있다.)이라 했다.

또 사비하 양쪽 절벽이 마치 병풍을 드리운 듯했는데, 백제 왕이 매일 유희하고 잔치를 베풀어 노래와 춤을 추었기 대문에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부른다. 또 시조인 온조는 바로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서 몸집이 크고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이라고도 한다.)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즉시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간혹 지락(至樂, 경초景初의 오기인데, 경초는 위魏나라 명제明帝 조예曺叡의 연호로 237년에서 239년까지 사용했다.) 3년 기미년(239년)에 사비왕이 죽어 고이왕이 즉위했다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읽기: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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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장보고기념관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 재위 839~839, 제38대 원성왕의 손자로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등에 화살을 맞는 꿈을 꾼 후 등에 종기가 나 죽었다고 한다.)은 왕우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사람) 궁파(弓巴, <삼국사기> '열전'에는 '궁복弓福'이라 되어 있다. 장보고張保皐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한다.)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는 원수(신무왕의 아버지 균정과 왕위를 다투었던 희강왕과, 장보고와 신무왕에게 죽임을 당한 민애왕을 말함)가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그를 제거해 주면 왕위를 차지한 후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

궁파는 응낙하고 마음과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켜 수도를 침범해 그 일을 이루었다.

왕이 왕위를 찬탈하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신하들이 옆에서 힘껏 간했다.

"궁파는 비천하니 왕계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왕은 신하들의 말에 따랐다. 이때 궁파는 청해진(淸海鎭,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흥덕왕 때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하던 곳으로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였으며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에 있는데, 이 섬의 남쪽에 방어용 목책이 있었다.)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꾀하고자 했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 생몰미상, 장보고 휘하에서 활약한 무장으로 <속일본기>에는 염장閻丈, 염문閻文으로 기술되어 있다.)이 그 말을 듣고는 왕에게 아뢰었다.

"궁파가 장차 불충을 저지르려 하니 소신이 제거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기꺼이 허락했다.

염장은 왕명을 받고 청해진으로 가서 연락하는 사람을 통해 궁파에게 말했다.

"왕에게 작은 원망이 있어 현명한 공께 몸을 의탁하여 목숨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너희 무리가 왕에게 간하여 내 딸을 왕비로 삼지 못하게 했는데, 어찌하여 나를 만나려 하는가?"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 전했다.

"이는 백관들이 간언하는 것이지, 저는 그 모의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공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청사(廳事)로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왔소?"

염장이 말했다.

"왕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 막하(幕下, 지휘관이나 책임자가 거느리는 사람)에 기대어 해를 모면하고자 합니다."

궁파가 말했다.

"다행한 일이오."

그들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매우 기뻐했다. 그사이 갑자기 염장이 궁파의 장검을 가져다 그를 죽였다. 그러자 휘하의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들을 이끌고 서울(경주)로 돌아와 결과를 보고했다.

"궁파를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염장에 상을 주고 아간(阿干, 신라 17관등 중 제6위인 아찬의 별칭)의 벼슬을 내렸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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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잡간 위홍(魏弘, 제48대 경문왕의 친동생) 등 서너 명의 총애하는 신하가 정권을 쥐고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근심스러워하자 어떤 사람이 다라니(陀羅尼, 범어 dharani의 음역. 석가의 가르침의 정요精要로서, 신비한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의 은어(隱語, 특정한 집단에서 구성원들끼리만 사용하는 은밀한 용어)를 지어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이것을 손에 넣고 말했다.

"왕거인(王居仁)이 아니면 누가 이런 글을 짓겠는가?"

왕거인을 옥에 가두자 왕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그러자 하늘이 곧 그 옥에 벼락을 내려 모면하게 해 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燕丹泣血虹穿日(연단읍혈홍천일)

연단의 피울음은 무지개와 해를 뀌뚫고,

※연단은 전국시대 진시황의 죽이려다 실패하고 죽임을 당한 연나라 태자 단을 말함.

 

鄒衍含悲夏落霜(추연함비하락상)

추연이 머금은 비애는 여름에도 서리를 내렸네

※추연은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연나라 소왕의 스승이 되었지만 혜왕이 즉우하자 참소를 받아 옥에 갇혔는데 한여름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今我失途還似舊(금아실도환사구)

지금 내가 길 잃은 것은 옛 일과 비슷한데,

 

皇天何事不垂祥(황천하사불수상)

아! 황천은 어찌하여 상서로움을 내리지 않나?

 

다라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무망국 찰니나네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詞."

 

풀이하는 자들이 말했다.

"'찰니나제'란 여왕을 말하며, '판니판니소판니'란 두 명의 소판(蘇判, 신라 17관등 중 제3위인 잡찬의 별칭)을 말하는데, 소판이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명의 아간(阿干, 신라 17관등 중 제6위인 아찬의 별칭)을 말한 것이고, '부이'란 부호부인을 말한다."

 

거타지/문화컨텐츠닷컴

 

이때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 나루터와 섬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를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사(弓士)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지금의 백령도, 지방에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도착했을 때,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 열흘 넘게 꼼짝없이 머물렀다. 공이 이를 걱정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못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의 물이 한 길 남짓이나 솟구쳤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말했다.

"활 잘 쏘는 사람을 이곳에 남겨 두면 순풍을 만날 것이다."

공은 꿈에서 깨어나 그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말했다.

"마땅히 나무 조작 쉰 개를 만들어 우리들의 이름을 써서 바다에 던진 후 가라앉은 자의 이름으로 제비를 뽑아야 합니다."

공은 그렇게 했다. 군사 가운데 거타지(居陁知,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용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유사하다.)란 사람의 이름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으므로 그를 남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순풍이 불어 배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거타지는 수심에 잠겨 섬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의 신(神) 약(若)인데 날마다 승려 하나가 해가 뜰 무렵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른다오. 그러면 그는 내 자손의 간장(肝腸)을 모조리 먹어치운다오. 이제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았소. 내일 아침이면 반드시 또 그가 올 테니 그대가 쏘아 주시오."

거타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내 특기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고마워하고는 사라졌다.

거타지가 숨어 엎드려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이 밝아 오자 과연 승려가 나타나 이전처럼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려 했다.

이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즉시 늙은 여우로 변해서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노인이 나와 감사해하며 말했다.

"공의 은혜를 입어 내 목숨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그대의 아내로 주겠소."

거타지가 말했다.

"제게 주신다면 평생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하겠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바뀌게 해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는, 두 용에게 거타지를 데리고 사신의 배를 뒤쫓아가 그배를 호위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가 용 두 마리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 사실을 위에 보고했다.

황제가 말했다.

"신라 사신은 반드시 비범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연회를 열어 신하들의 위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나라로 돌아와서 거타지가 품에서 꽃송이를 꺼내자 꽃이 여인으로 바뀌었으므로 함께 살았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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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처용 문화제 www.cheoyongf.or.kr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재위 875~886)대에는 서울(지금의 경주)에서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담장이 서로 맞닿았는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위치하므로 지금의 울주蔚州다.)로 놀러 갔다 돌아오려 했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 신라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원)이 아뢰었다.

"이는 동해에 있는 용의 변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유사(有司, 어떤 단체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의 벼슬아치 또는 담당관리)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라고 한 것이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둘어와 왕의 정사를 보필했는데, 이름을 처용(處龍)이라 했다. 왕은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아 그의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면서 급간(級干, 신라 십칠 관등 중 가운데 아홉째 등급의 벼슬로 진골과 6두품만 오를 수 있는 관등)이란 직책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밤이 되면 사람으로 변해 그 집에와 몰래 자곤 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났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東京明期月良

동경 밝은 달에

夜入伊遊行如可

밤새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구나.

二 兮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것이지만

二 兮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가.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래 내 것이지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이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끓어앉아 말했다.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범했는데도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됩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치고(이러한 미신은 불교 최전성기인 고려에 와서 궁중 의식으로서 처용무와 처용희로 발전되었다.)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려고 했다.

왕은 돌아오자 곧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 경남 울주군 문수산에 있던 절로 지금은 소실되어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라 했다. 망해사를 또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는데, 이는 처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또 왕이 포석정(鮑石亭, 경주시 배동에 있는 임금의 별궁으로 지금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웠다는 석구만 남아 있다.)으로 행차하니, 남산의 신(神)이 나타나 어전에서 춤을 추었는데(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는 "어디서 왓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 앞에서 가무를 하였는데" 라고 나와 있다.),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그래서 왕이 몸소 춤을 추어 형상을 보였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미

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므로 그 모습을 살펴 왕이 공장(工匠)에게 본떠 새기도록 하여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고 했다고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춤을 추자 이름을 옥도금(玉刀鈐)이라 했고,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어 지백금간(地伯級干)이라 불렀다.

'어법집(語法集)'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고 했다. '도파'란 말은 아마도 지혜(智)로써 나라를 다스리는(理)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아채고 모두(多) 달아나(逃) 도읍(都)이 곧 파괴된다(破)는 뜻이다."

이는 바로 지신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면서 즐거움에만 점점 더 탐닉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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