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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헌화공원/ⓒ삼척시청 문화관광

 

성덕왕(聖徳王, 신라 33대 왕-재위: 702~737) 대에 순정공(純貞公, 5급 이상의 진골 귀족)이 강릉(江陵, 강원도 명주溟州지역) 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옆에는 바위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는데, 천 길이나 되는 높이에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내게 저 꽃을 꺾어 바치겠소?"

따르던 사람이 말했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

다들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그 꽃을 꺾어 와서 가사(歌詞)도 지어 부인에게 함께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시 이틀째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 바닷가에 닿아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낚아채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다시 한 노인이 말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라고 하니, 바닷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들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이 말을 따르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바다에서 나와 그에게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었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일곱 가지 보물로 꾸민 궁전에 음식들은 맛이 달고 매끄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도 색다른 향기가 스며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 볼 수 없는 향이었다.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 가를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에게 빼앗겼으므로 여러 사람이 해가(海歌, 가락국 수로왕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와 유사함)

그 가사는 이렇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를 약탈해 간 죄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헌)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을 쳐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구지가龜旨歌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놓아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만약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노인이 바친 헌화가(獻花歌)는 이렇다.

 

紫布岩乎邊希(자포암호변희)

자줏빛 바위 가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집음호수무우방교견)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吾肸不喩慚肸伊賜等(오힐불유참힐이사등)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화힐절길가헌호리음여)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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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부산성/문화재청

신라 제32대 효소왕 대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혹은 득곡得谷) 급간이 있었는데, 화랑의 명부에 이름을 놀려놓고 날마다 나오다가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물었다.

"당신의 아들은 지금 어디 있소?"

득오의 어머니가 말했다.

"당전(幢典)인 모량부(牟梁部)의 아간(阿干) 익선(益宣)이 제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경주 서쪽에 있는 해발 729.5m 부산富山 정상부를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계곡을 감싼 포곡식 석산성)의 창고지기(倉直)로 보냈는데, 급히 가느라 낭께 말씀을 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낭이 말했다.

"네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공적인 일로 갔으니 내가 가서 대접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갖고 좌인(左人, 갯지-개질지皆叱知, 신라 때때에 종을 일컫는 말)들을 거느리고 떠나는데, 낭의 무리 137명 역시 의장을 갖추어 따라갔다.

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 위의 득오와 같은 사람이며 득오의 다른 명칭인 득곡得谷의 뜻말의 음차)의 행방을 물어보자 그가 말했다.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으로 득오를 대접했다. 그리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득오와 함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익선이 완강히 반대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경남 밀양의 옛 지명)의 세금 30석을 거두어 성안으로 수송하다가 선비를 귀중히 여기는 낭의 풍모를 아름답게 여기고 융통성 없는 익선을 야비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지(舍知, 신라시대 17관등 중 13위 관등) 진절(珍節)이 기마와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花主, 화랑을 관할하는 관직)가 그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잡함을 씻어 주려 했는데, 익선이 달아나 숨었으므로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이때는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성안에 있는 못 가운데서 익선의 아들을 목욕시키니 그대로 얼어 죽고 말았다.

대왕은 그 말을 듣고는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내쫓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검은색 옷(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면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 한 마을의 사무를 맡아 보던 수장)으로 삼아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했다.

이전에 술종공(述宗公)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9주의 하나)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삼한에 전쟁이 있어 기병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했다. 가다가 죽지령(竹旨嶺)에 도착하니, 한 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그것을 보고 감탄하고 칭찬했다. 거사 역시 공의 위세가 매우 큰 것을 좋게 보고 서로 마음속으로 감동하게 되었다.

술종공이 삭주에 부임하여 다스린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거사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여 매우 놀라고 괴상하게 여겼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사람들이 말했다.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하니, 거사가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은 날이었다. 공이 말했다.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 같소."

다시 군사를 보내 고갯마루 북쪽 봉우리에 거사를 장사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 한 구(軀)를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아내가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자 이름을 죽지(竹旨)라 했다. 그는 장성하여 벼슬길에 올라 김유신 공과 함께 부수(副帥, 주장을 보좌하는 장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문 등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慕竹旨郎歌)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去隱春皆理米,
지나간 봄 그리매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계시지 못해 울면서 시름하는데
,
두덩을 밝히오신 모습이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目煙廻於尸七史伊衣,
눈 돌림 없이 저를
逢烏支惡知乎下是,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에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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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 복원 모형/ⓒ나무위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옆에 있는 탑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렇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 구름이 땅에 드리워진 것을 보고는 구름 속으로 찾아 들어가 보았더니 어떤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갑자기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났다. 그 옆에는 3층으로 된 탑이 있었는데, 위에 솥을 엎어 놓은 듯하여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가서 승려를 찾아보니 다만 거친 풀만 있었다. 그곳을 한 길가량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발이 나왔고, 더 깊이 파자 명(銘)이 나왔다. 그릇 위에 범서(梵書, 인도 문자인 산스크리트 어로 기록된 글)가 있었는데 모시고 있던 신하가 이 글을 알아보고는 불탑이라 했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대답했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 원래는 휴도왕休屠王으로 쓰는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부처다.)이라 합니다."

이로 인하여 성왕은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고, 그 이후에 불법이 처음으로 전래되자 탑과 불도의 인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탑의 높이가 줄어들고 본래의 탑은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 아소카로, 불교를 굳게 믿었으며 불교의 자취를 따라 곳곳에 탑을 세웠다.)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 옛 인도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인간 사회로 볼 수 있다.)에는 곳곳마다 탑을 세웠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또 당나라 용삭(龍朔) 연간에 요동에서 전쟁이 있었다.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가 정벌했던 요동의 옛 땅에 가서 산에 있는 불상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적막하며 행인의 왕래조차 끊어져 있었다. 한 노인에게 묻자 이렇게 말했다.

'이 불상은 선대에 나타났던 것이오.'

그래서 이것을 그려서 서울로 돌아왔다(모두 '대장경'을 함에 넣고 함의 차례를 천자문의 차례로 표시한 약함若函에 기록되어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으며 한나라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했다.

고구려 성왕이 어떤 임금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왕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紹) 2년(기원전 37년)에 제위에 올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년(기원전 19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에는 한나라도 불경을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해외의 변방 신하가 범서(梵書)를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이라고 불렀으니, 서한 시대에도 필시 서역 문자를 아는 사람이 있어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을 하나씩 세우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염부계(閻浮界, 인도를 말한다.) 안의 8만 4000개 탑을 큰 바위 속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지금 곳곳마다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 하나 둘이 아닌데, 아마도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그 감응을 헤아리기 어렵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육왕(育王)의 보탑(寶塔)은 온 속세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혀 이끼가 끼었구나.

그 당시 길 가던 사람들 눈길을 생각해 보면

몇 명이나 신의 무덤을 가리키며 제사 지냈을까?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 요동성의 육왕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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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문화컨텐츠닷컴

제27대 덕만(德曼/德萬)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불법의 수입에 남달랐으며 경주 남산 신유림에 능이 있다.)이고, 성은 김씨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貞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 사용했으며 치세로 유명하여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말이 있다) 6년 임진년(632년)에 즉위하여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씨앗 세 되를 보내 왔다(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보여 주는 예다). 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

명을 내려 씨를 뜰에 심도록 했더니 그 꽃이 피었다가 질 때까지 과연 그 말과 다름이 없었다(모란꽃이 향기가 없다는 말은 수사적 비유다).

둘째는, 영묘사(靈妙寺, 선덕여왕 즉위 원년인 632년에 세워진 절로 찰간지주刹竿支柱만 남아 있다.)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개구리들이 모여 사나흘 동안 울어 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예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둘러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 여인의 생식기 모양이라는 뜻으로 경주에서 대구로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건산과 아화 사이에 있다.)을 물어보면 그곳에 틀림없이 적병이 있을 테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말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나서 각기 1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에워싸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亏召)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포위하여 활을 쏘아 죽였다. 백제 후원병이 1200여 명이 왔지만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경주 여근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셋째는, 왕이 병도 없을 때인데 모든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이 되면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불가에서 말하는 욕계육천欲界六天의 둘째 하늘이다.) 가운데 장사 지내라."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었다.

"어디입니까?"

왕이 말했다.

"낭산(狼山, 높이가 몇십 미터에 불과한 나지막한 언덕이다. 사천왕사 터와 가까이 있다.)의 남쪽이다."

과연 그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지금의 경주시 배반동에서 불국사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터만 남아 있다.)를 지었다. 불경에 말했다.

"사천왕천(四天王天, 육계육천의 하나로서, 동방은 지국천持國天, 서방은 광목천廣目天, 남방은 증장천增長天, 북방은 다문천多聞天이라 한다.) 위에 도리천이 있다."

이에 대왕이 신령스럽고 성스러웠음을 알게 되었다.

왕이 살아 있을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가지 일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말했다.

"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는 것을 알았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배필이 없는 나를 놀린 것이다.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인의 음부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이 흰데, 흰색은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이러한 해석은 그 당시 신라에 음양오행설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다라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여왕의 그 성스러운 지혜에 감탄했다.

세 가지 색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인가? 세 여왕은 선덕(善德), 진덕(眞德), 진성(眞聖)이니 당나라 황제의 놀라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세운 것에 관해서는 '양지사전(良志師傳)에 모두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선덕여왕 시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경주시 인왕동에 있으며 반월성에서 바라보인다. 첨성대는 평지에 세워져 있어 실제 관측에는 부적당한 구조물이고 선덕여왕 시절에 천문 관측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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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6년 네 군의 위치/ⓒ위키백과

'전한서(前漢書)'에서는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년(기원전 82년)에 두 외부(外府)를 두고, 조선의 옛 땅이다."라고 했다. 평나(平那)와 현도군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과 낙랑 등 두 군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설치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조선전(朝鮮傳), 중국 정사인 24사에 기술된 한국 관련 기록'에는 진번, 현도, 임둔, 낙랑 등 네 군인데 지금 여기에는 평나가 있고 진번이 없으니 아마도 한 곳의 명칭이 두 가지인 것 같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두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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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도화녀와 비형랑'/ⓒ한국학중앙연구원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고 성은 김씨다.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태건(太建, 남조南朝 진陳나라 선제宣帝의 연호) 8년 병신년(576년)에 즉위하여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음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을 폐위시켰다.

 

진지왕릉/25대 진지왕과 46대 문성왕이 함께 묻혀있는 무덤/사적 제517호(진지왕릉), 사적 제518호(문성왕릉)/ⓒ경주문화관광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의 민가의 여인이 얼굴이 고와 당시 도화랑(桃花娘)이라 불렸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천자의 위엄이 있다 해도 남편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가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인이 말했다.

"차라리 저자에서 죽어 딴마음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왕은 여인을 희롱하여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는가?"

"됩니다."

그래서 왕은 여인을 놓아 보냈다.

이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고, 2년 뒤에 여인의 남편 역시 죽었다.

열흘 남짓 지난 어느 날 밤에 왕이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여인의 방에 와서 말했다.

"네거 지난번 약속한 바와 같이 이제 네 남편이 죽었으니 되겠는가?"

여인이 좀처럼 승낙하지 않고 부모에게 여쭙자 부모가 말했다.

"임금의 명령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그리고 딸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임금은 이레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 구름이 지붕을 감싸고 방 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레 후 왕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여인이 이로 인해 임신하여 달이 차 곧 해산하려고 하자 천지가 진동했다.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은 아이가 매우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는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다. 열다섯 살이 되자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이 매일 밤마다 먼 곳으로 달아나 놀자 왕이 날랜 병사 쉰명에게 지키게 했다. 그러나 비형은 매일 월성을 넘어 서쪽 황천(荒川, 경성 서쪽, 지금의 경주 남천 하류인데 신원사 터가 보이는 곳이다.) 언덕 위로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날랜 병사들이 숲 속에 숨어서 엿보니, 귀신들이 여러 절의 종소리를 듣고 각기 흩어지면 비형랑 역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군사들이 와서 이런 일을 아뢰니 왕이 비형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는 것이 사실이냐?"

비형랑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경주시 탑정동에 있다.) 북쪽 시내에 다리를 놓아라."

비형은 왕의 명령을 받을어 귀신들에게 돌을 다듬게 하여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그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이 또 물었다.

"귀신들 중에서 인간 세상에 나와 정치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비형이 대답했다.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왕이 말했다.

"데려 오너라."

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나타나자, 왕은 그에게 집사의 벼슬을 내렸다. 길달은 과연 충직하기가 세상에 둘도 없었다.

이때 각각(角干, 신라 관등의 제1위인 이벌찬伊伐飡) 임종(林宗)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은 길달을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길달에게 흥륜사(신라 초기 불교 사찰의 중심으로 진흥왕 5년 544년에 세웠으며 경주시 사정동에 터만 남아 있다.) 남쪽에 누문(樓門)을 짓게 하자, 길달은 매일 밤 그 문 위에 가서 잤다. 때문에 이름을 길달문(吉達門)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둔갑해 도망치자 비형은 귀신을 시켜 붙잡아 죽였다. 그래서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무서워 도망쳤다. 그때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성스러운 임금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세.

날뛰는 온갖 귀신들이여,

이곳에는 함부로 머물지 마라.

 

만간에서는 이 가사를 써 붙여 귀신을 쫓곤 한다.('처용랑과 망해사' 조에도 처용의 얼굴을 붙여 귀신을 쫓았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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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金大城, ?~774)/ⓒ나무위키

모량리(牟梁里, 부운촌浮雲村이라고도 한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城)과 같아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키울 수가 없었으므로 부자인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했는데, 그 집에서 논 몇 이랑을 주어 의식의 밑천을 삼게 했다.

 

이때 덕망 있는 승려[開土] 점개(漸開)가 흥륜사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고자 하여 시주를 받으러 복안의 집에 이르렀는데,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했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했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므로 천신이 항상 ㅗ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안락을 누리고 장사할 것입니다."

대성이 그 말을 듣고는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문밖에 온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전생에 좋은 일을 한 것이 없어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제 또 시주를 하지 못한다면 오는 세상에는 더욱 가난할 것입니다. 우리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세의 응보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했으므로 밭을 점개에게 시주했다.

얼마 후 대성이 죽었다.

그날 밤 나라의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 태어나려고 한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 보니 대성이 과연 죽었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던 날과 같은 날이었다.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왼쪽 주먹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7일 만에 폈는데,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금패를 쥐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다시 대성이라 짓고 그의[예전] 어머니를 맞이하여 집 안에 두고 함께 봉양했다.

대성이 어른이 된 뒤에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묵게 되었다. 대성의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며 말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였느냐? 내가 다시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하며 용서를 비니, 귀신이 말했다.

"나를 위해 절을 지어 줄 수 있겠느냐?"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불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후부터는 사냥을 하지 않고 꿈 속에 나타났던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이 일로 해서 감동하는 바가 있어 자비의 원력(悲願)이 더욱 독실해졌다.

이로 인해서 이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국보 24호인 석굴암. 한편 불국사와 석굴암 두 불사를 한 개인이 일으켰다는 것에 회의를 품는 학자도 있다.)를 세워,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승려에게 각가가 절에 머물도록 부탁했다. 대성은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워 길러 준 부모의 노고에 보답했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도 듣기 어려운 일로 과연 시주를 잘한 징험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주 불국사/ⓒ세계문화유산 불국사

 

석굴암/ⓒ세계문화유산 석굴암

 

대성이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실(龕室, 석굴의 벽 가운데를 깊이 파서 석불을 모셔 두는 곳으로 석굴암 보존불 주위의 십대제자상 위에 열 개의 감실을 팠다.)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개로 쪼개졌다. 그래서 분통해하다가 얼핏 선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감실을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그래서 대성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남쪽 고개로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러므로 그 땅을 향고개[香嶺]라 한다. 불국사의 구름다리[雲梯]와 석탑은 그 나무와 돌에 새긴 노력이 동도(東都)의 여러 사찰 중 어느 것보다 뛰어나다. 옛 향전(鄕傳)에는 위의 내용이 실려 있는데, 절 안의 기록에는 이렇다.

"경덕왕 대에 대상(大相)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년(751년)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대를 거쳐 대력 9년 갑인년(774년)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처음에는 유가종의 고승 항마(降魔)를 청하여 이 절에 살게 했고 이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렇듯 고전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모량 마을에 봄이 지나 세 무의 밭을 시주하니,

향고개에 가을이 되어 만금을 거두었네.

어머니는 한평생에 가난과 부귀를 맛보았고,

재상(김대성)은 한 꿈 속에서 내세와 현세를 오갔네.

 

-삼국유사 권5, 효선(孝善) 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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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는데, 응소(應邵, 후한 여남汝南 사람으로 원소袁紹 밑에서 벼슬을 했고 고대의 예의, 풍속, 관직 등에 밝았다.)는 "옛날 조선국" 이라고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 이렇게 말했다.

"평양성은 옛날 한(漢)나라의 낙랑군이다."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와서 투항했고,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정벌하여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또 무휼왕 27년에 광무제(光武帝)가 사신을 보내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예속되었다. 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은 바로 평양성이어야 마땅하다. 어떤 사람들은 낙랑은 중두산(中頭山) 아래 말갈과의 경계고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하는데, 어느 말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낙랑예관‘樂浪禮官」이 새겨진 수막새/ⓒ국립중앙박물관

 

또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이는 아마 옛날 한나라 때의 낙랑군 속현의 땅이었을 것이다."

신라 사람 역시 낙랑이라 불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지금 고려에서도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한다. 또 태조가 김부(金傅,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며 태조는 왕건王建을 말한다.)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라고 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낙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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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通典)'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유민들은 일은여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이들은 영토가 사방 백 리였다."

'후한서(後漢書), 남송의 범엽이 지은 역사책으로 후한 열두 황제의 196년간의 사적을 기록한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 네 군을 두었고 뒤에 두 외부를 두었다. 법령이 점점 번잡해져 이를 일흔여덟 나라로 나누었는데, 각가가 1만 호(戶)였다.

마한은 서쪽에 있었는데 쉰네 개의 작은 읍이 있어 모두 나라라고 불렀고, 진한은 동쪽에 있었는데 열두 개의 작은 읍이 있어 나라라고 불렀다. 또 변한은 남쪽에 있었는데 열두 개의 작은 읍이 있어 각기 나라라고 불렀다."

 

고조선 후 고대 국가들/ⓒ위키백과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일흔두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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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부여는 "은정월(殷正月, 12월), 고구려와 예(濊)는 10월에 각각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온 마을의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며칠 동안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었으며, 마한(馬韓)은 5월 씨뿌리기를 끝냈을 때와 10월 추수가 끝났을 때에 제사를 지내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기를 밤낮을 쉬지 않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고시대부터 노래와 춤을 통해 신에게 감사드리고 풍년을 기원하며 즐거움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에는 신에게 기원하거나 즐거움을 표현하고자 방울 같은 단순한 악기를 흔들며 춤추고 노래했으나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고대 현악기인 '고' 및 완함(阮咸), 비파(琵琶)와 적(笛), 요고(腰鼓), 배소(排簫), 각(角) 등이 등장하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만들어 한민족 특유의 음악을 형성해나갔다.



1. 고구려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는 거문고이다. '삼국사기'에 "진(晉)'에서 7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제2상(第二相) 왕산악(王山岳)이 본래의 모양을 그대로 두고 자못 법제를 개량하여 악기를 만들고, 겸해서 1백 곡을 지어서 연주했다. 그때 현학(玄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지었는데, 후에는 다만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검을 현(玄)', '고 금(琴)'이니 현금은 바로 거문고를 뜻한다. '고'는 현악기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진은 265~419년에 존재했던 중국 왕조이니 거문고 제작연대는 4세기 전후로 볼 수 있다. 음악사학적으로는 고구려에 아무런 현악기가 없는 상태에서 중국 7현금을 보고 갑자기 거문고를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어떤 현악기가 있는 상태에서 7현금의 영향으로 거문고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고 있다.

완함/ⓒ두산백과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거문고 외에 완함, 종적(縱笛), 횡적(橫笛), 요고, 각, 배소 등의 악기가 보인다. 완함은 몸체가 둥글고 목이 긴 현악기인데, 타클라칸 사막 북쪽에 위치한 쿠차에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류트 종류를 바탕으로 재창조한 악기고, 뿔나팔인 각과 대나무관을 옆으로 나란히 묶은 배소는 북방유목민의 고취(鼓吹)에 편성되던 악기이다.

고구려 벽화 오회분제5호묘/ⓒ문화콘텐츠닷컴



요고는 세요고(細腰鼓)를 줄인 말로 '허리가 잘록한 악기', 즉 장구와 같은 것인데, 오른쪽 면은 채로 치고 왼쪽 면은 손으로 두드리는 장구와 달리 양쪽 면을 모두 손으로 친다. 서역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악 3호분의 다리를 X자 모양으로 하고 두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춤추고 있는 무용수는 콧대가 높고 이국적인 복장을 한 것으로 미루어 서역의 무용수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는 거문고 외에 서역에서 들어온 악기들이 다수 있었다.



2. 백제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의 뚜껑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배치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으며, 봉황과 일직선상의 아래인 중앙에 완함이 있고, 왼쪽으로 종적과 배소(排簫), 오른쪽으로 북과 거문고(혹은 가야금 종류)가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백제 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3. 신라
신라의 대표적인 악기는 가야금이다. '삼국사기'에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고 나서 우륵에게 12곡을 짓도록 하였다. 우륵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서 악기를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재위 540~576)에게 의탁하니, 진흥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 충주의 옛 이름)에서 편히 살도록 하고서 곧 주지, 계고, 만덕을 보내서 그 업을 전수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국원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으로 알려져 있는 탄금대가 있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 "변진(弁辰)에 슬(瑟)이 있는데 그 모양은 축(筑)과 비슷하다.:고 하여, 변진지역에 중국의 슬이나 축이 아닌 어떤 현악기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슬은 25현의 현악기이고 축은 대쪽(竹片, 대를 갈라 쪼갠 조각)으로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13현의 현악기이다. 따라서 음악사학적으로는 가실왕이 변진지역에 있었던 기존의 고대 현악기를 개량하여 가야금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보 195호 토우장식 장경호/ⓒ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95호 토우장식 장경호/ⓒ국립중앙박물관


또한 경주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장경호(長頸壺, 4~5세기 경으로 추정)에 표현된 임산부의 현악기 연주모습에서 보듯이 신라에 가야금을 받아들인 6세기 중엽 이전에 '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해왕 17년(212)에 물계자가 나라의 환란에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산속에 들어가 은거하며 탔다는 금(琴)과 자비왕(재위 458~479)때 백결선생이 세모(歲暮)에 방아를 찧을 거리가 없어 슬퍼하는 아내를 위로하고자 방아 찧는 소리를 내며 탔다는 금(琴)은 거문고나 가야금이 아닌 바로 변진지역에 있었던 고대 현악기이다.

신라에는 고대 현악기 '고'와 가야금 이외에 비파와 종적도 있었다. 4~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우에 그 연주모습이 나타나 있다.



4.통일신라시대

삼국이 통일된 뒤에 삼현(三絃,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삼죽(三竹, 대금, 중금, 소금), 박(拍), 대고(大鼓)가 연주되었다.

당과의 활발한 교류로 통일신라에 당악(唐樂)이 들어왔고, 그 영향으로 삼현 삼죽에 반섭조(般涉調), 봉황조(鳳凰調)와 같은 당악의 악조가 쓰이기도 하였다. 당악기로는 725년(성덕왕 24)에 조성된 상원사 범종에 공후, 생, 쟁, 당적, 요고, 당피리, 당비파 등이 보이고, 883년(헌강왕 9)에 건립된 경북 문경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에 생, 당적, 당비파, 동발, 당피리, 박 등이 보인다.

와공후/ⓒ한국학중앙연구원


당악과 구분하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로 향악(鄕樂)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이란 한시에는 서역에서 유래한 춤과 음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당악이 유입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역음악과 춤이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향악으로 불린 것이다. <향악잡영>중 하나인 월전(月顚)은 서역 우전국(지금의 Khotan)에서 전래한 탈춤의 일종이며, 또다른 하나인 속독(束毒)은 서역 소그디아나제국에서 유래한 춤이다.


<월전>

어깨는 올라가고 목은 움츠렸으며 상투는 우뚝 솟았네.

팔 걷어붙인 뭇 선비들 요란하게 잔을 부딪히네.

노랫소리 들리자 한바탕 웃음소리

밤새 휘날린 깃발이 새벽을 재촉하는구나.


<속독>

고수머리와 남빛 얼굴의 낯선 사람들이

데를 지어 뚤에 와서 난새 같이 춤을 추네.

북소리 둥당둥당 바람은 살랑살랑

남북으로 뛰놀면서 끝없이 춤추네.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권도희 김성혜 이지선 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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