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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성왕의 무덤이라고 추측되기도 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보물 630호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국립중앙박물관

의희(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 사마덕종司馬德宗의 연호다.) 9년 계축년(413년)에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를 만들었다.(아마도 남평양南平壤인 듯한데, 지금의 양주楊州다.) 왕은 이전 왕의 태자인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음이 못마땅하여 그를 해치려고 고구려 군사를 청해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에게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는 창을 거꾸로 하여 [자기 편인]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은 뒤 떠났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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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 제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의 개국 시조면서 경주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서술했다. 혁거세란 명왕明王, 성왕聖王, 철왕哲王의 뜻이며 존호다.-이병도설)

 

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다음 신화를 서대석 교수는 육촌장 신화라고 이름지었다. 내용은 씨족 집단의 거주 지역과 족장의 이름을 이야기한 것으로서 천신 숭배 집단의 부계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 생활을 하던 사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 여섯 마을 사람들을 조선의 유민으로 보았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며, 촌장은 알평(謁平)이라고 한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峯, 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인데 그 아래에 석탈해왕릉이 보인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설치하고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년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로 읽어야 하며, 간혹 탁涿으로 쓰는데 역시 음은 도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며 아래의 예도 그렇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 구俱를 구仇로 표기하기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에 이산(伊山 혹은 개비산皆比山이라 한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양梁은 탁涿이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혹은 빈지賓之, 빈자貧子, 빙지氷之라고도 한다.)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와서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치원이 옛 집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지금의 금강산-현재의 경주 북쪽에 있는 산-백률사栢栗寺 북쪽산)으로 촌장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라고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활아(活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고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 혹은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여섯 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례왕 9년(132년)에 처음으로 여섯 부의 명칭을 고쳤고, 또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다.)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고본古本에는 건무建武 원년이라고도 하고 또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우물은 이 부족이 농경 생활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은 신라정新羅井이라고 하는데 경주의 탑정동 솔밭에 있따.)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하늘을 나는 천마의 의미가 있으며 하늘의 사자다.)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태양신의 정기를 받아 고귀하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서대석 설) 그 알을 깨뜨려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이 말은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박'은 우리말 '밝光明'에 대한 음차자音借字며, '혁赫'의 훈'밝'에 대한 음차자인 '박'자로 성을 삼은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양주동, 이동환-해설가들에 다르면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선도성모와 같은 존재며, 중국 황실의 공주로서 성도산에 와서 깃들었다는 신모다. -이동환-가 낳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는 말에 어진 사람을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은 것 역시 서술성모가 나타났음을 뜻함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居瑟邯) (또는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 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후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축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맺어드려야 한다."
(이하는 왕비 알영 부인을 맞이하는 이야기인데, 고운기의 고증에 의하면 부인이 태어난 해는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5년 뒤라고 기록하고 있어 여기와는 다르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이도흠에 의하면 '알'은 사물의 핵심이나 근원을 말하며, '씨'의 대칭어로 여성에게만 쓰였다고 한다. 서대석은 알영정을 나정에 대응되는 마을의 중심지로 보았다.-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다. 이러한 닭 토템은 신성 관념의 반영이며 신라 전체의 토템으로 확장된다.) 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이다.)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했다. 여자 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열세 살이 되는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 아이를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 자를 서벌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왕후는 경주의 오릉五陵에 혁거세와 같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한 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五體]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蛇陵 '삼국유사'에 나오는 '뱀'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뱀이야말로 합장을 막고 오릉을 만든 매개자이다.)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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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3대 유리이사금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제2대 남해차차웅,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 '이사금'이라고도 하며 윗사람, 족장,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나중에 임금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노례왕'은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한다.)이 처음에 매부 탈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탈해가 말했다.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치아가 많다고 하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 봅시다."

 

이에 떡을 깨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잇금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즉위했다. 이런 연유로 왕을 잇금이라고 했다. 이질금이란 칭호는 노례왕에서 시작되었다. 유성공(劉聖公,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족형 유현劉玄이다.) 경시(更始) 원년 계미년(23년)에 즉위하여(연표에는 갑신년에 즉위했다고 했다.) 여섯 부의 호를 고쳐 정하고 여섯 성(姓, 이씨李氏, 최씨崔氏, 손씨孫氏, 정씨鄭氏, 배씨裵氏, 설씨薛氏다.)을 하사했다.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는데, 차사(嗟辭, '슬퍼하는 말' 이라는 뜻인데, 가사에 자주 나오는 '아으'와 유사하며 향가의 기원과 관련된다.)와 사뇌격(詞腦格, 향가 중에서 감탄사를 가진 10구체를 말한다.)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쟁기와 보습과 얼음 저장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무(建武) 18년(42년)에는 이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해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함께보기: 제2대 남해왕(차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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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탈'은 '토吐'와 동음이며 '치'는 '이', '니'의 훈차자로서 치질금은 이사금, 이질금과 같은 뜻이다.)은 남해왕 때에(고본古本에 임인년에 왔다고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일연은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술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했다. 가까운 임인년이면 노례왕이 즉위한 뒤일 것이므로 서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앞의 임인년이라면 혁거세의 시대다. 때문에 임인년이라 한 것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맞이하여 그들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는 나는 듯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 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과 하서지촌下西知村이라는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나오며 대왕암에서 3~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포구 가에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있었다.

 

[노파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는 원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일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

 

배를 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길이가 스무 자에 너비가 열세 자나 되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아진의선이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아래 매어 두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해 고했다. 잠시 후에 열어 보니 반듯한 모습의 남자 아이가 있었고, 칠보(七寶, 불가의 일곱 가지 보물로서 금, 은, 유리琉璃, 마노瑪瑙, 호박琥珀, 산호珊瑚, 차거硨磲)와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잘 대접하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 (또는 정명국正明國 사람이라고도 하고 완하국琓夏國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화하국花夏國이라고도 한다. 용성국은 왜倭의 동북쪽 1,000리 지점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고 했는데 일연의 주석처럼 일본과 관련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에 일찍이 스물여덟 용왕이 있는데, 사람의 태(胎)에서 출생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온 백성을 가르치고 성명(性命)을 바르게 닦았습니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간택을 받지 않고 모두 큰 자리(大位, 왕위를 말한다.)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자 아들 구하기를 빌어 7년 만에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군신을 모아 묻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으니 길상(吉祥)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고,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또한 칠보와 노비까지 배에 싣고 띄워 보내면서, '아무 곳이나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라고 축원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아이는 지팡이를 짚고 노비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으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 이레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니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오래도록 살 만했다. 그래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그의 혈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고 박을 허리에 매고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보았다.)의 집이었다. 이에 곧 계책을 써서 몰래 그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 집에 가서 말했다.

 

"여기는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던 집이오."

 

호공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이들의 다툼이 결판이 나지 않아 관청에 고발했다. 관청에서 물었다.

 

"무슨 근거로 너의 집이라고 하느냐?"

 

아이가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가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십시오."

 

탈해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니, 이 사람이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 여기서 '토해'는 '탈해'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白衣]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했다. 그런데 하인이 물을 길어 오면서 도중에 먼저 맛보려 하자 입에 잔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하인이 맹세했다.

 

"이후로는 가깝든 멀든 감히 먼저 물을 맛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입에서 잔이 떨어졌다. 그 뒤로 하인은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에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년(57년) 6월 탈해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옛날 내 집이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라 했다. 어떤 사람은 까치로 인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버리고 성을 석(昔)씨로 했으며(이병도설에 의하면 까치는 길조요 예지豫智의 새이므로 이를 토템으로 삼은 것 같기도 하다.), 상자 속에서 알을 깨고 출생했기 때문에 탈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째인 건초(建初, 후한 장제章帝 유달劉炟의 연호다.) 4년 기모년 79에 죽은 뒤 소천구(疏川丘)에 장사 지냈다. 그 이후에 신(神)이 말했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두개골의 둘레가 세 자 두 치, 몸통뼈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에 치아는 하나로 엉켜 있었으며, 뼈마디는 사슬처럼 이어져 있어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의 골격이었다.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니, 신이 또 말했다.

 

"내 뼈를 동악에 두라.(탈해왕릉은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의 길가에 큰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받들어 모셨다.

이런 말도 있다. [탈해왕이] 죽은 뒤 27대 문무왕 대 조로調露 2년 경신년(680년) 3월 15일 신유일辛酉日 밤, 태종의 꿈에 매우 위엄 있고 사나워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 왕이 그의 말대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사國祀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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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릉/ⓒ한국콘텐츠진흥원

제13대 미추이질금(未鄒尼叱今, 재위 262~284, 혹은 미조未組 또는 미고未古라 한다.-여기서 미조, 미고는 근저根抵, 원본元本이라는 뜻인 '및', '및'의 사음寫音이라는 설이 있다.)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높았고 여전히 성현의 덕이 있어 이해(理解, '삼국사기'에는 점해沾解라고 되어 있다.)로부터 자리를 이어받아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지금 세상에서는 미추왕의 능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며, 후대에 김씨의 여러 왕들이 모두 미추를 시조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오른지 23년 만에 죽었는데, 왕릉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 대에 이서국(伊西國, 지금의 경북 청도 지역에 있던 나라)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우리 [신라]는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막았으나 오랫동안 대항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군대[竹葉軍]가 도우러 와서 우리 군대와 힘을 합쳐 적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적이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선왕이 음덕으로 도와 공을 세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능을 죽현릉(竹現陵, 여기서 '현現'이 '엽葉'과 음이 통하므로 '죽엽릉'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이라 불렀다.

 

그 후 37대 혜공왕(惠恭王) 대인 대력(大曆) 14년 기미년(779년) 4월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무덤 속에서 어떤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는데, 장군과 같은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또 갑옷 차림에 무기를 든 마흔 명가량의 군사가 뒤를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안에서 진동하고 소리내어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어떤 때는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 말은 이런 내용이었다.

 

"신은 평생을 시대의 환란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어 통일을 이룩한 공이 있고, 이제는 혼백이 되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쳐 환란을 구하려는 마음을 잠시도 고쳐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혜공왕 6년)에는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그것은 군주나 신하가 저의 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이제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으려 하니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했다.

"나와 공이 이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예전처럼 힘써 노력해 주시오."

 

[김유신의] 세 차례 부탁에 세 차례 다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회오리 바람은 곧 돌아갔다.

 

혜공왕은 그 말을 듣고는 두려워 즉시 대신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의 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서른 결(結)을 취선사(鷲仙寺, 취선사는 경북 경주에 있던 절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하'에 이 내용이 있다.)에 하사하여 명복을 빌게 했다. 그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에 복을 심기 위해 세운 절이다. 미추왕의 혼이 아니었다면 김유신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이니, 나라를 지키는 마음이 크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미추왕의 혼은 호국령에 속한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기려 삼삼(三山, 신라의 제전 중에서 대사大祀에 속하며 내림奈林, 골화骨化, 혈례穴禮의 세 곳이다.-이동환 설)과 함께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제사 차례를 오릉(五陵, 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제2대 남해차차웅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 보다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함께보기: 이서국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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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제2대 남해차차웅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 자충慈充과 동음어이며 '스승'의 옛말 혹은 존장자에 관한 칭호)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일컫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전한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4년)에 즉위하여 21년 동안 다스리고 지황(地皇, 한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 평제平帝를 죽이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다.) 4년 갑신년(24년)에 죽으니, 이 왕이 바로 삼황(三皇, 혁거세왕, 노례왕, 남해왕을 말한다.)의 첫째라고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불렀는데,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어떤 이는 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시대의 명문장가로 '화랑세기'를 지었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다.)이 말했다.

 

"차차웅은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존장인 자를 자충이라 한 것이다."

 

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잇금[齒理](잇자국을 말한다.) 을 말한다. 처음에 남해왕이 승하하자 아들 노례(努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자 탈해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합니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했다. 옛날부터 이렇게 전해 왔다.

 

혹은 왕을 마립간(麻立干, 립立을 수袖로 쓰기도 한다.)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은 이렇게 말했다.

 

"마립이란 궐(橛, 서열을 말한다.)을 말하는 방언이다. 궐표(橛標)는 자리에 따라 두는데, 왕궐(王橛)이 주가 되고 신궐(臣橛)은 아래에 두게 되어 있어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삼국사론三國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거서간과 차차웅이라 부른 임금이 각각 한 명씩 있고, 이사금이라 부른 임금이 열여섯 명이고, 마립간이라 부른 임금이 넷 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을 지으면서 모두 무슨 왕[某王]이라 칭하고 거서간이나 마립간 등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 말이 비루하고 거칠어서 일컬을 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롟하면서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 또한 옳은 일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를 갈문왕(葛文王, 신라 시대 임금의 존족尊族과 임금에 준하는 자에게 주던 칭호다.)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 시대에 낙랑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또 천봉(天鳳) 5년 무인년(18년)에 고구려의 속국 일곱 나라가 투항해 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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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대왕 괘릉(掛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찬(伊湌, 신라 17관등 중 두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진골만 오를 수 있었다. 이척찬(伊尺飡) 혹은 이간(伊干), 일척간(一尺干), 이찬(夷粲)이라고도 한다.)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었고 원성왕(元聖王)은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중 첫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일명 이벌간(伊罰干),우벌찬(于伐飡),이벌찬(伊伐飡),각간(角干),각찬(角粲),서발한(舒發翰),서불한(舒弗邯)이라 하였다.)으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다. 원성왕은 꿈에 복두(幞頭, 두건의 일종으로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처음 만들었으며, 귀인이 쓰는 모자의 하나로 보면 된다.)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 12현의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꿈에서 깨어나 사람을 시켜 풀이하게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

 

원성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닫고는 나가지도 않았다. 이때 아찬(阿飡, 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직으로 일명 아척간(阿尺干)·아찬(阿粲)이라고도 하였다.) 여삼(餘三 혹은 여산餘山이라고도 한다.)이 와서 뵙기를 청했다. 원성왕은 병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아찬이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했다.

 

아찬이 말했다.

"공께서 꺼리는 일이 무엇입니까?"

원성왕은 꿈을 풀이한 일을 자세히 말했다. 그러자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면서 말했다.

"이는 바로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왕은 주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풀이해 줄 것을 청했따. 아찬이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孫, 원성왕이 내물왕의 12세손이 된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의거)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권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왕이 말했다.

"위로는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아찬이 말했다.

"청컨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지내십시오."

 

왕은 아찬의 말에 따랐다.

얼마 후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삼아 궁궐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시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즉위하자 대신의 무리들이 모두 따라와서 새로 즉위한 임금에게 절을 하고 축하했다. 이 사람이 바로 원성대왕(元聖大王, 재위 785~798)이다. 대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인데, 꿈의 응험이 맞았던 것이다.

 

김주원은 물러나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살았다.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이니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匝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은 참으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의 만파식적을 전해 받아 왕에게 전했다. 왕은 만파식적을 얻었기 때문에 하늘의 은혜를 받아 그 덕이 원대하게 밫났다. 정원(貞元, 당唐나라 덕종德宗 이적李適의 연호로 785~805년까지 사용) 2년 병인년(786년) 10월 11일, 일본의 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記'를 보면, 제55대 문덕왕文德王이 이에 해당되는 듯하다. 그 이외에는 문경이 없는데, 어떤 책에는 왕의 태자라고 하기도 한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했는데,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돌리고 금 50냥과 함께 사신을 보내 그 피리를 청했다. 왕이 사신에게 말했다.

 

"짐은 선대인 진평왕 대에는 있었다고 들었으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듬해 7월7일, 다시 사신을 보내 금 천 냥으로 만파식적을 청하며 말했다.

"과인이 신물(神物)을 보고 난 후 다시 돌려드리겠소."

 

왕은 역시 이전과 같은 대답으로 사양하고, 은 3,000냥을 사신에게 주어 금과 함께 돌려보냈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다음 날 두 여자가 내정(內庭)에 나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바로 동지(東池)와 청지(靑池, 청지는 바로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그 절의 기록에, 우물은 바로 동해의 용이 왕래하면서 설법을 듣는 곳이라 했다. 이 절은 바로 진평왕이 만든 것으로 500성중聖衆, 5층탑, 전민田民을 아울러 바쳤다고 한다.)의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티베트계통의 당항黨項, 탕구트) 사람 두명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이 우물은 지금도 분황사에 남아 있다.)의 용 등 세 용을 저주하여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 속에 담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저희 남편을 비롯하여 나라를 지키는 용을 돌려주게 하십시오."

 

왕은 뒤쫓아 하양관(河陽館, 경상북도 영천 서쪽인 하양에 있어던 관사)에 이르러 직접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의 용 세 마리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느냐?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하겠다."

 

그러자 하서국 사람은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쳤다. 세 곳에 놓아 주자 제각각 한 길씩이나 뛰어오르고 기뻐하며 사라졌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성스럽고 명철함에 감복했다.

 

어느 날 왕은 황룡사(皇龍寺,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 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했는데, 절 이름과 경經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의 승려 지해(智海)를 궁궐로 청하여 50일 동안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했다. 사미(沙彌, 출가하여 정식 승려가 되기 전에 수련 중인 남자 승려) 묘정(妙正)은 항상 금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로 인해 얻은 이름이다.)에서 그릇을 씻었는데, 자라 한 마리가 샘 가운데에서 떴다 잠겼다 했다. 모정은 늘 먹다 남응ㄴ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놀곤 했다. 법연이 끝나 돌아가게 되자 사미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며칠 동안 덕을 베풀어 주었는데 어떻게 갚겠느냐?"

 

며칠 후 자라는 작은 구슬 한를 토해 주었다. 사미는 그 구슬을 허리띠 끝에 매달았다.

 

이후부터 대왕은 사미를 보면 애지중지하여 내전으로 불러들여 항상 곁에 두었다. 이때 한 잡간(匝干, 신라 17관등 중 3위 관등)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역시 사미를 사랑하여 함께 데리고 가기를 청했다. 왕이 허락하여 잡간은 사미와 같이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 역시 사미를 보자 총애하고, 승상과 좌우 신하들이 모두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런데 관상을 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건대, 길상(吉相)이 하나도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존경과 신임을 받으니, 반드시 특별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사미의 허리띠 끝에서 작은 구슬이 나왔다.

황제가 말했다.

 

"짐에게는 여의주 네 개가 있었는데 지난해에 한 개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다."

 

황제가 사미에게 묻자 사미는 그 일을 사실대로 아뢰었다. 황제가 말했다.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사미가 구슬을 얻은 날이 같다."

 

그 구슬을 빼았고 사미를 쫓아냈는데 그 뒤로는 아무도 사미를 사랑하거나 신임하지 않았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숭복사崇福寺다.)에 있는데(그의 능은 물이 차 있어 관을 땅에 묻지 못하고 걸어 놓았다고 하여 괘릉掛陵이라고 부른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또한 왕은 보은사(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조부 훈입(訓入) 잡간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증조부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고조부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삼았는데,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보기: 만파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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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5대 경덕왕릉/ⓒ문화컨텐츠닷컴

[당나라에서] <덕경德經, 도가의 창시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말하며 모두 5,000자로 이루어져 있다.> 등을 보내오자 대왕은 예를 갖추어 받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효성왕 2년'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어 경덕왕 대의 일이 아니라고도 하나, 리상호는 경덕왕 대의 일이 맞다고 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던 해에 오악삼산(五岳三山,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이며, 삼산은 경주 남산, 영천 금강산, 청도 부산이다. 윤영옥 교수는 오악이 통일신라의 상징적 존재이자 전제왕권의 상징이라고 했다.)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 뜰에서 대왕을 모셨다.

3월3일 왕은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올라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길거리에서 대덕(大德, 중에게 부여하는 직위 명칭인데 덕망이나 풍모가 높은 중을 일컫는다.) 한 명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이때 마침 위엄과 풍모가 깨끗한 고승이 배회하며 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와 뵙게 하니 왕이 말했다.

"내가 말한 위엄과 풍모가 있는 승려가 아니다."

그리고 돌려보냈다.

다시 한 승려가 가사를 걸치고 앵통(櫻筒, 중이 물건을 넣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통)을 지고(삼태기를 메고 있었다고 한 곳도 있다.)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그를 보고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통 안을 살펴보니 다구(茶具, 차를 다려 마시기 위한 도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충담(忠談)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매년 중삼일(重三日, 세시풍속에 액을 막는 제의祭儀가 있는 날로 3월3일이다.), 중구일(重九日, 중양일重陽日 이라고도 하며 액을 막는 제의가 있는 날로 9월9일이다.)에 차를 끓여 남산 삼화령(三花嶺, 경주 남산에 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데, 이 위에 연꽃 모양의 불상 대좌가 있다고 한다.)의 미륵세존(彌勒世尊, 뒷 세상에 나타날 부처)께 올리는데, 지금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했다.

"나에게도 차 한 잔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승려는 이에 차를 끓여 바쳤는데, 찻잔 속에서 향내가 풍겼다. 왕이 말했다.

"짐은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 향가를 일컫는 가사의 별칭인데 '기이 제1'에는 사뇌격詞腦格이라고 했다.)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보라."

왕이 말했다.

충담은 곧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 왕의 불교 수행을 돕는 승려)로 봉했으니, 그는 삼가 재배하며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다.

 

君隱父也

군은부야(임금은 아버지요)
臣隱愛賜尸母史也
신은애사시모사야(신하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라)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민언광시한아해고위사시지(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면)
民是愛尸知古如
민시애시지고여(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리라)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굴리질대힐생이지소음물생(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此肹湌惡支治良羅

차힐식악지치량나(이들을 먹여 다스려라)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차지힐사유지어동시거어정위시지(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하면)
國惡支持以支知右如

국악지지이지지고지(이 나라가 보전될 줄 알리라)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후구군여신다지민은여위내시등언(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國惡太平恨音叱如

국악태평한음질여(나라는 태평을 지속하리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김상억 교수는 '찬讚'이 게송류偈頌類의 '찬'이 아니고 한시의 '송찬頌讚' 류와 맥이 같다고 했다. 양주동 박사는 이 작품의 기상천외한 시법에 감탄하면서 문답체의 구조로 보았다.)는 다음과 같다.

 

咽嗚爾處米
열오이처미(열어젖히자)
露曉邪隱月羅理
로효야은월라리(벗어나는 달이)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支下
백운음축간부거은안지하(흰구름 좇아 떠간 언저리)
沙是八陵隱汀理也中
사시팔릉은정리야중(백사장 펼친 물가에)
耆郞矣皃史是史藪邪
기랑의모사시사수야(기파랑 모습이 잠겼어라)
逸烏川理叱磧惡希
일오천리질적악희(일오천 자갈벌에서)
郞也持以支如賜烏隱
랑야지이지여사오은(낭의 지니신)
心未際叱肹逐內良齊
심미제질힐축내량제(마음 좇으려 하네)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아야백사질지차고지호(아! 잣나무 가지 높아)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설시모동내호시화판야(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왕은 옥경(玉莖, 남자의 성기)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는데, 자식이 없어 왕비('왕력'에는 삼모부인三毛夫人으로 되어 있다.)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했다. 후비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각간(角干, 신라 17간등 중 최고 관직) 의충(依忠)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사(表訓大師)를 불러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했으니 원하건대 대사께서 하느님(上帝)에게 청하여 사내아이를 점지하게 해 주시오."

표훈대사가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말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천제께서는 '딸을 구하는 것은 되지만 사내아이는 마땅치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말했다.

"딸을 아들로 바꿔 주시오."

표훈대사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했다.

천제가 말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표훈대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인간 사이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데 지금 대사는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오는 것을 금하노라."

표훈대사가 와서 천제의 말을 전하니 왕이 말했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을 얻어 후사를 삼고 싶소."

달이 차서 왕후가 태자를 낳으니('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7년 7월23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으니,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 신라 제36대 왕, 재위 765~780)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태후가 섭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았고(그는 16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반란이 다섯 번이나 일어났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도 막지 못했으니, 표훈대사의 말이 사실이었다. 태자는 원래 여자였다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돌 때부터 즉위하기까지 항상 부녀자들의 놀이를 일삼고 비단 주머니 차는 것을 좋아하며 도사(道士)들과 희롱했다. 그래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결국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 김양상은 선덕와으이 이름이다. 김경신金敬信의 오기라는 설도 일리가 있다.-이가원 설)에게 시해되었다. 표훈대사 이후로 신라에 성인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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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문화컨텐츠닷컴

 

만파식적(萬波息笛)

[삼국사기] '잡지(雜誌)'편에 나오는데, 김부식은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만파식적'을 풀이하면 '거센 물결을 잠재우는 피리'라는 의미다.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 재위 681~692)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성은 김씨며, 개요(開耀, 당나라 고종의 12번째 연호로 681년에서 682년까지 사용했다.) 원년 신사년(681년)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感恩寺,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나 12미터에 달하는 두 탑은 건하다.)를 지었다.

[사중기寺中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완정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 2년(682년)에 완성했다. 금당(金堂) 섬돌(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돌층계) 아래를 파고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었는데, 바로 용이 절 안으로 들어와 서리도록 마련한 것이라 한다. 대개 유조에 따라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大王岩,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바닥가에서 보이는 돌무더기다.)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후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했다.

이듬해 임오년 5월 초하루(어떤 본에는 천수天授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湌, 신라 시대 17관등 중 제4위로 해간海干, 파미간波彌干이라고도 한다.)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일관(日官, 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원) 김춘질(金春質 혹은 春日이라고 했다.)에게 점을 치도록 명령했다.

일관이 왕께 아뢰었다.

"돌아가신 임금(문무대왕文武大王)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며, 또 김유신 공이 33천(天)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킬 보배를 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꼐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신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산의 형세는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혹은 산 역시 대나무처럼 밤자으로 합쳐졌다 떼어졌다 했다고 한다.

사신이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이튿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까지다.)에 대나무가 하나로 합치자, 천지가 진동하고 이레 동안 폭풍우가 치면서 날이 어두워졌다가 그달 16일에야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으로 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용을 영접하여 함께 자리에 앉았다.

왕이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떨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용이 말했다.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친 후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께서는 바닷속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또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한 마음이 되어 값으로는 정할 수 없는 이런 큰 보물을 내려 저에게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옥으로 답례하고는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었다. 17일에 지림사(祗林寺, 기림사라고도 하며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에 있다.)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다.)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말을 달려와 축하하고 천천히 살펴본 다음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물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한 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태자가 아뢰었다.

그래서 왼쪽에서 두 번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못이 되었따. 그래서 용연(龍淵)이라 불렸다.

왕은 궁궐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 때 이르러 천수(天授, 주周나라 측천제則天帝의 연호로 천수라는 연호는 2년밖에 안 썼으므로, 천수 4년은 장수長壽 2년을 말한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로 690년에서 705년까지 재위했다.) 4년 계사년(693년)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이 있었으므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息笛)이라 불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傳記)에 있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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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콘텐츠진흥원 제9회 캐릭터 디자인 공모전 장려상 - 경문왕과 복두장이>

 

경문대왕(景文大王, 신라 제48대 왕, 재위 861~875)의 휘는 응렴(膺廉)이고 열여덟 살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약관의 나이가 되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은 낭(郎)을 불러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고 물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헌안왕 4년 9월에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응렴은 그때 나이 열다섯이었다. 내용은 이와 비슷하다.).

"낭은 화랑이 되어 사방을 유람했는데 무슨 특별한 것이라도 보았는가?"

낭이 아뢰었다.

"신은 아름다운 행실을 가진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게"

낭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데도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유한데도 의복이 검소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 귀한 세력이 있는데도 위세를 펼치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그가 어진 것을 알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짐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그대에게 시집 보내 시중을 들게(원문의 '건즐巾櫛'은 수건과 빗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다른 사람 밑에서 시중을 든다는 의미다.) 하고자 한다."

낭은 자리를 피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후 물러났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말하니 부모가 놀라고 기뻐하며 자제들을 모아 의논했다.

"왕의 맏공주는 외모가 아주 보잘것없지만, 둘째는 매우 아름다우니 그녀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

낭이 무리 중에 우두머리인 범교사(範敎師,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 의하면 헌안왕 4년에 흥륜사의 승려에게 물었다는 말이 있다.)란 자가 이 말을 듣고는 집으로 찾아와 낭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공에게 시집 보낸다는 것이 사실이오?"

낭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럼 둘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겠소?"

낭이 말했다.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동생을 선택하라고 명하셨소."

범교사가 말했다.

"낭이 만약 동생을 선택한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눈 앞에서 죽을 것이오. 하지만 맏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잘 살펴 결정하시오."

얼마 후 왕이 날을 잡고 사람을 보내 낭에게 말했다.

"두 딸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는 오직 공의 뜻에 따르겠다."

심부를 갔던 사람이 돌아와 낭의 뜻을 아뢰었다."

"맏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나자 왕이 병이 위독해져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했다.

"짐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맏딸의 남편인 응렴이 이어받도록 하라."

이튿날 왕이 죽자 낭은 유조를 받들어 즉위했다. 그러자 범교사가 왕에게 와서 아뢰었다.

"제가 아뢴 세 가지 좋은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맏공주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지금 왕위에 오르신 것이 그 한 가지고, 이제 쉽게 아름다운 둘째 공주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두 가지며, 맏공주를 선택했기 때문에 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왕은 그 말을 고맙게 여겨 대덕(大德, 본래 부처를 가리켰으나 덕망이 높은 고승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이란 벼슬을 주고 금 130냥을 내렸다.

왕이 죽으니('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 의하면 즉위 15년 7월 9일이다.) 시호를 경문(景文)이라 했다. 왕의 침전에는 매일 저녁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는데, 대궐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무서워 몰아내려 하니 왕이 말했다.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잠들 수가 없으니 몰아내지 마라."

그래서 매일 잠잘 때면 뱀이 혀를 내밀어 왕의 가슴을 덮었다.

왕은 즉위한 후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자랐다.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직 복두장(幞頭匠, 왕의 모자를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복두장이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道林寺, 옛날 입도림入都林 가에 있었다. 이는 현 경주시 구황동 모전석탑지로 추측) 대숲 가운데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대나무를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왕이 그것을 싫어하여 대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는 산수유를 심었는데 바람이 불면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

화랑 요원랑(邀元郞), 예흔랑(譽昕郎),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 지금의 강원도 통천이다.)을 유람하면서 임금을 위해 나를 다스릴 뜻을 은근히 품었다. 그래서 가사 세 수를 짓고, 다시 사지(舍知, 신라 17관등 중 제13위 관등) 심필(心弼)에게 공책[針卷]을 주고 대구화상(大矩和尙 향가에 뛰어났던 신라의 승려로서 진성왕의 명에 의해 향가집'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다.)에게 보내어 노래 세 수를 짓게 했는데, 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고,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며, 셋째는 문군곡(問群曲)이다.

익덧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아주 기뻐하여 상을 내렸다 하는데 가사는 자세하지 않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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