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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문화컨텐츠닷컴

제27대 덕만(德曼/德萬)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불법의 수입에 남달랐으며 경주 남산 신유림에 능이 있다.)이고, 성은 김씨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貞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 사용했으며 치세로 유명하여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말이 있다) 6년 임진년(632년)에 즉위하여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씨앗 세 되를 보내 왔다(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보여 주는 예다). 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

명을 내려 씨를 뜰에 심도록 했더니 그 꽃이 피었다가 질 때까지 과연 그 말과 다름이 없었다(모란꽃이 향기가 없다는 말은 수사적 비유다).

둘째는, 영묘사(靈妙寺, 선덕여왕 즉위 원년인 632년에 세워진 절로 찰간지주刹竿支柱만 남아 있다.)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개구리들이 모여 사나흘 동안 울어 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예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둘러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 여인의 생식기 모양이라는 뜻으로 경주에서 대구로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건산과 아화 사이에 있다.)을 물어보면 그곳에 틀림없이 적병이 있을 테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말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나서 각기 1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에워싸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亏召)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포위하여 활을 쏘아 죽였다. 백제 후원병이 1200여 명이 왔지만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경주 여근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셋째는, 왕이 병도 없을 때인데 모든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이 되면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불가에서 말하는 욕계육천欲界六天의 둘째 하늘이다.) 가운데 장사 지내라."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었다.

"어디입니까?"

왕이 말했다.

"낭산(狼山, 높이가 몇십 미터에 불과한 나지막한 언덕이다. 사천왕사 터와 가까이 있다.)의 남쪽이다."

과연 그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지금의 경주시 배반동에서 불국사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터만 남아 있다.)를 지었다. 불경에 말했다.

"사천왕천(四天王天, 육계육천의 하나로서, 동방은 지국천持國天, 서방은 광목천廣目天, 남방은 증장천增長天, 북방은 다문천多聞天이라 한다.) 위에 도리천이 있다."

이에 대왕이 신령스럽고 성스러웠음을 알게 되었다.

왕이 살아 있을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가지 일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말했다.

"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는 것을 알았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배필이 없는 나를 놀린 것이다.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인의 음부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이 흰데, 흰색은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이러한 해석은 그 당시 신라에 음양오행설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다라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여왕의 그 성스러운 지혜에 감탄했다.

세 가지 색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인가? 세 여왕은 선덕(善德), 진덕(眞德), 진성(眞聖)이니 당나라 황제의 놀라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세운 것에 관해서는 '양지사전(良志師傳)에 모두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선덕여왕 시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경주시 인왕동에 있으며 반월성에서 바라보인다. 첨성대는 평지에 세워져 있어 실제 관측에는 부적당한 구조물이고 선덕여왕 시절에 천문 관측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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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6년 네 군의 위치/ⓒ위키백과

'전한서(前漢書)'에서는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년(기원전 82년)에 두 외부(外府)를 두고, 조선의 옛 땅이다."라고 했다. 평나(平那)와 현도군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과 낙랑 등 두 군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설치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조선전(朝鮮傳), 중국 정사인 24사에 기술된 한국 관련 기록'에는 진번, 현도, 임둔, 낙랑 등 네 군인데 지금 여기에는 평나가 있고 진번이 없으니 아마도 한 곳의 명칭이 두 가지인 것 같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두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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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도화녀와 비형랑'/ⓒ한국학중앙연구원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고 성은 김씨다.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태건(太建, 남조南朝 진陳나라 선제宣帝의 연호) 8년 병신년(576년)에 즉위하여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음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을 폐위시켰다.

 

진지왕릉/25대 진지왕과 46대 문성왕이 함께 묻혀있는 무덤/사적 제517호(진지왕릉), 사적 제518호(문성왕릉)/ⓒ경주문화관광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의 민가의 여인이 얼굴이 고와 당시 도화랑(桃花娘)이라 불렸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천자의 위엄이 있다 해도 남편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가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인이 말했다.

"차라리 저자에서 죽어 딴마음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왕은 여인을 희롱하여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는가?"

"됩니다."

그래서 왕은 여인을 놓아 보냈다.

이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고, 2년 뒤에 여인의 남편 역시 죽었다.

열흘 남짓 지난 어느 날 밤에 왕이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여인의 방에 와서 말했다.

"네거 지난번 약속한 바와 같이 이제 네 남편이 죽었으니 되겠는가?"

여인이 좀처럼 승낙하지 않고 부모에게 여쭙자 부모가 말했다.

"임금의 명령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그리고 딸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임금은 이레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 구름이 지붕을 감싸고 방 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레 후 왕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여인이 이로 인해 임신하여 달이 차 곧 해산하려고 하자 천지가 진동했다.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은 아이가 매우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는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다. 열다섯 살이 되자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이 매일 밤마다 먼 곳으로 달아나 놀자 왕이 날랜 병사 쉰명에게 지키게 했다. 그러나 비형은 매일 월성을 넘어 서쪽 황천(荒川, 경성 서쪽, 지금의 경주 남천 하류인데 신원사 터가 보이는 곳이다.) 언덕 위로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날랜 병사들이 숲 속에 숨어서 엿보니, 귀신들이 여러 절의 종소리를 듣고 각기 흩어지면 비형랑 역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군사들이 와서 이런 일을 아뢰니 왕이 비형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는 것이 사실이냐?"

비형랑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경주시 탑정동에 있다.) 북쪽 시내에 다리를 놓아라."

비형은 왕의 명령을 받을어 귀신들에게 돌을 다듬게 하여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그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이 또 물었다.

"귀신들 중에서 인간 세상에 나와 정치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비형이 대답했다.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왕이 말했다.

"데려 오너라."

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나타나자, 왕은 그에게 집사의 벼슬을 내렸다. 길달은 과연 충직하기가 세상에 둘도 없었다.

이때 각각(角干, 신라 관등의 제1위인 이벌찬伊伐飡) 임종(林宗)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은 길달을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길달에게 흥륜사(신라 초기 불교 사찰의 중심으로 진흥왕 5년 544년에 세웠으며 경주시 사정동에 터만 남아 있다.) 남쪽에 누문(樓門)을 짓게 하자, 길달은 매일 밤 그 문 위에 가서 잤다. 때문에 이름을 길달문(吉達門)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둔갑해 도망치자 비형은 귀신을 시켜 붙잡아 죽였다. 그래서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무서워 도망쳤다. 그때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성스러운 임금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세.

날뛰는 온갖 귀신들이여,

이곳에는 함부로 머물지 마라.

 

만간에서는 이 가사를 써 붙여 귀신을 쫓곤 한다.('처용랑과 망해사' 조에도 처용의 얼굴을 붙여 귀신을 쫓았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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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金大城, ?~774)/ⓒ나무위키

모량리(牟梁里, 부운촌浮雲村이라고도 한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城)과 같아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키울 수가 없었으므로 부자인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했는데, 그 집에서 논 몇 이랑을 주어 의식의 밑천을 삼게 했다.

 

이때 덕망 있는 승려[開土] 점개(漸開)가 흥륜사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고자 하여 시주를 받으러 복안의 집에 이르렀는데,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했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했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므로 천신이 항상 ㅗ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안락을 누리고 장사할 것입니다."

대성이 그 말을 듣고는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문밖에 온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전생에 좋은 일을 한 것이 없어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제 또 시주를 하지 못한다면 오는 세상에는 더욱 가난할 것입니다. 우리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세의 응보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했으므로 밭을 점개에게 시주했다.

얼마 후 대성이 죽었다.

그날 밤 나라의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 태어나려고 한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 보니 대성이 과연 죽었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던 날과 같은 날이었다.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왼쪽 주먹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7일 만에 폈는데,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금패를 쥐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다시 대성이라 짓고 그의[예전] 어머니를 맞이하여 집 안에 두고 함께 봉양했다.

대성이 어른이 된 뒤에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묵게 되었다. 대성의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며 말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였느냐? 내가 다시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하며 용서를 비니, 귀신이 말했다.

"나를 위해 절을 지어 줄 수 있겠느냐?"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불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후부터는 사냥을 하지 않고 꿈 속에 나타났던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이 일로 해서 감동하는 바가 있어 자비의 원력(悲願)이 더욱 독실해졌다.

이로 인해서 이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국보 24호인 석굴암. 한편 불국사와 석굴암 두 불사를 한 개인이 일으켰다는 것에 회의를 품는 학자도 있다.)를 세워,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승려에게 각가가 절에 머물도록 부탁했다. 대성은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워 길러 준 부모의 노고에 보답했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도 듣기 어려운 일로 과연 시주를 잘한 징험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주 불국사/ⓒ세계문화유산 불국사

 

석굴암/ⓒ세계문화유산 석굴암

 

대성이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실(龕室, 석굴의 벽 가운데를 깊이 파서 석불을 모셔 두는 곳으로 석굴암 보존불 주위의 십대제자상 위에 열 개의 감실을 팠다.)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개로 쪼개졌다. 그래서 분통해하다가 얼핏 선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감실을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그래서 대성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남쪽 고개로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러므로 그 땅을 향고개[香嶺]라 한다. 불국사의 구름다리[雲梯]와 석탑은 그 나무와 돌에 새긴 노력이 동도(東都)의 여러 사찰 중 어느 것보다 뛰어나다. 옛 향전(鄕傳)에는 위의 내용이 실려 있는데, 절 안의 기록에는 이렇다.

"경덕왕 대에 대상(大相)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년(751년)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대를 거쳐 대력 9년 갑인년(774년)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처음에는 유가종의 고승 항마(降魔)를 청하여 이 절에 살게 했고 이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렇듯 고전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모량 마을에 봄이 지나 세 무의 밭을 시주하니,

향고개에 가을이 되어 만금을 거두었네.

어머니는 한평생에 가난과 부귀를 맛보았고,

재상(김대성)은 한 꿈 속에서 내세와 현세를 오갔네.

 

-삼국유사 권5, 효선(孝善) 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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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通典)'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유민들은 일은여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이들은 영토가 사방 백 리였다."

'후한서(後漢書), 남송의 범엽이 지은 역사책으로 후한 열두 황제의 196년간의 사적을 기록한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 네 군을 두었고 뒤에 두 외부를 두었다. 법령이 점점 번잡해져 이를 일흔여덟 나라로 나누었는데, 각가가 1만 호(戶)였다.

마한은 서쪽에 있었는데 쉰네 개의 작은 읍이 있어 모두 나라라고 불렀고, 진한은 동쪽에 있었는데 열두 개의 작은 읍이 있어 나라라고 불렀다. 또 변한은 남쪽에 있었는데 열두 개의 작은 읍이 있어 각기 나라라고 불렀다."

 

고조선 후 고대 국가들/ⓒ위키백과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일흔두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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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불국사/경주시>


<사진 석굴암/경주시>


먼 옛날 신라시대 신문왕 때입니다.

모량리라는 마을에 대성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 갔지만, 효심도 지극하고 바른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흥륜사의 한 스님이 보시를 받으러 집에 오셨습니다.

보시 할 것이 없던 가난한 대성은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품삯으로 받은 집 근처의 작은 밭이 하나 있어요. 그걸 보시하고 싶습니다."

스님은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며칠 후 대성은 이유 없이 앓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대성이 죽던 날 신라의 재상인 김문량은 아내와 집 앞 마당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불호령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량리에 살았던 김대성이 너의 집에 태어나리라"


김문량은 놀라워하며, 아내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내는 갑자기 입덧을 하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김문량의 집에 태어난 대성은 어느새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청년이 된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사냥을 나간 토함산 기슭에서 곰 한마리를 만났습니다. 자신보다 큰 몸집을 가진 곰을 사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대성은 사냥에 성공합니다.

그는 사냥에 지친 팔다리를 쉴 겸 사냥한 곰을 옆에 두고 그늘에 잠시 누웠습니다.

'큰 곰을 사냥했다고 하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대성은 흐뭇한 마음으로 누워 있다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곰이 피를 흘리며 잡아먹겠다며 무섭게 으르렁 거렸습니다.

대성은 두려움에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곰이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살려 줄 터이니, 나를 위해 절을 하나 지어 줄 수 있겠소?"



대성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대성은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김대성은 이후 곰을 사냥했던 그 장소에 장수사라는 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 일로 깨달음을 얻은 김대성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무언가 나도 보답을 해야 해"




김대성은 현생이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지었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불사(지금의 석굴암)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이 부모님에 대한 효심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김대성의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설화는 실제로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조(大成孝二世父母條)에 전하는 이야기 입니다./출처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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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과 세오녀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내용이 없으나 고려초기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에 실려있다.


[사진 삼국유사 권1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한국학중앙연구원]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년 정유년(157년)에 동해 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로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하나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제기를 살펴볼 때, 이때를 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그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알리고 세오녀를 왕께 바쳤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렸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사진 포항 호미곶 연오랑과 세오녀상/국정브리핑]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자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짐의 비(妃)가 짜 놓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오랑이 준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했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은 영일현(迎日懸)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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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

진한(辰韓) 또는 진한(秦韓) 이라고도 한다.



[사진 경주 입실리 출토 세형동검 진한시대의 유물인 세형동검, 동과, 동모. 경주 입실리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고 서로 불러 무리를 이루었는데, 진나라 말과 유사하여 간혹 진한(秦韓)이라 했다고 한다. 열두 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 모두 1만호씩이고 각기 나라라 일컬었다."

 또 최치원은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들이 피신해 온 곳이다. 때문에 탁수(琢 水)의 이름을 취해 살고 있는 읍과 마을을 사탁(沙琢), 점탁(漸)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을 도로 발음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때로 사량(梁)이라 쓰고, 양(梁) 역시 '도'로 읽는다." 

 신라는 전성기에 서울이 17만 8936호였고,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金入宅)-부유하고 윤택한 큰집이 있었다. 그것은 남택, 북택, 오비소택, 본피택, 양택, 지상택, 재매정택,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 한기택, 비혈택, 판적택, 별교택, 아남택, 금양종택, 곡수택, 유야택, 사하택, 사량택, 정상택, 이남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 임상택, 청룡사, 교남택, 항질택, 누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 등이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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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과 백제

남부여라고도 하며 곧 사비성이다.





 신라시조 혁거세가 자리에 오른지 19년 임오년에 변한( 卞韓)사람이 나라를 바쳐 투항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다."

 최치원이 말했다.

 "변한은 백제(百濟)다."

 '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다. 에 의하면, 온조가 일어난 것은 홍가( 鴻嘉)-서한 성제 유경의 연호다. 4년 갑진년(기원전 17년)이었으니, 혁거세나 동명왕의 세대보다 40여년 뒤의 일이 된다.

 '당서'에서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라고 말한 까닭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뿐이다. 간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에서 나와 변한에 나라를 세워 마한 등과 대치한 적이 있었다고 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던 일로, 도읍이 낙랑의 북쪽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이는 구룡산(九龍山) 역시 변나산(卞那山)으로 불렀다는 이유로 함부로 고구려를 변한이라 하는데, 이는 아마도 잘못된 것이다. 마땅히 옛 현인(최치원)의 견해가 옳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백제 전성기에 15만 2300호였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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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가야의 영역/두피디아]


 다섯가야

 '가락기(駕洛記)' 찬(贊)에 보면, 하늘에서 자주색 끈 한 가닥이 내려와 둥근 알 여섯 개를 내렸는데, 다섯 개는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가 이 성에 있게 되었다. 성에 남은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다섯 개는 각기 다섯 가야의 군주가 되었으니, 금관(金官)을 다섯의 숫자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고려의 '사략(史略)'에는 금관까지 숫자에 넣고 창녕(昌寧)을 더 기록했으니 잘못된 것이다.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阿羅伽耶) 라(羅)를 야(耶)로 쓰기도 한다. 지금의 함안이다., 고령가야(古寧伽耶) 지금의 함녕이다., 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이다., 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으로 벽진이라고 한다., 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이다. 다.


[사진 가야금관/두피디아]


 또 고려의 '사략'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년(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첫째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 둘째 고령(古寧) 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일명 기성(岐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상주다., 셋째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인데 아마 고령을 잘못 적은 것 같다. 며,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 앞의 주와 같이 성산은 벽진강라고도 한다. 이다."

[삼국유사,기이제1권/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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