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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금관(金官, 지금의 김해시)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 본래 김해시 호계사에 있었는데, 1873년에 허 왕후릉 곁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전각을 둘러쳐 놓았다.)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의 왕비 허 왕후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년(48년)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陀國, 현재 인도 아요디아 지역에 있었던 나라)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향하려 하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건너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에게 아뢰자, 부왕이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정박했다. 이 배에는 붉은 돛대와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기에 주포(主浦)라 이름했다. 처음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이 처음으로 들어오던 해안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수로왕은 아내를 맞이하여 함께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 당시 해동에는 아직 절을 지어 불법을 받드는 사례가 없었다. 아마도 상교(像敎, 불교의 다른 명칭)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고 이 땅 사람들이 받들지 않았기 때문으로 '가락국본기'에는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년)에 이르러, 그 땅에다 절을 짓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지어(이 일은 아도와 눌지왕 시대에 있었는데, 법흥왕 이전 시대다.) 지금까지 여기서 복을 빌고 남쪽 왜를 진압했다. 이것은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사각형ㅇ데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다. 돌은 약간 붉은 반점 무늬를 띠고 있는데 질이 매우 연하여 이 땅에서 나는 것은 아니다. '신농본초(神農本草, 후한 때 365종의 약이름을 분류하여 지은 책)'에서 닭 벼슬의 피를 떨어뜨려 시험했다는 돌이 바로 이 돌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것은 '가락국본기'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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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댁대왕신종(에밀레종)/ⓒ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제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 재위 742~765)이 천보(天寶, 당나라 대종代宗 이예李豫의 연호로 766년에서 779년까지 사용했다.) 13년 갑오년(754년)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가 열 자 세 치고 두께는 아홉 치며 무게는 49만 7581근이었다. 시주(施主)는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三毛夫人, 경덕대왕의 선비先妃)이며, 공장은 이상택(里上宅) 노복이었다. [당나라] 숙종(肅宗, 재위 756~762) 때 다시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여섯 자 여덟 치였다. 또 다음해인 을미년(755년)에 분황사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동상을 주조했는데, 무게는 30만 6700근이고 공장은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참고: 신라시대 1근의 무게는 성덕대왕신종의 무게인 18.9톤을 통해 신라시대 당시 1근의 무게는 약 250g으로 추정

 

또 경덕왕은 황동 12만 근을 들여 선친 성덕왕을 위해 큰 종 하나를 주조하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재위 765~780) 건운(乾運)이 대력(大歷, 당나라 대종 때의 네 번째 연호로 766~779까지 사용) 경술년(770년) 12월에 유사(有司, 어떤 단체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의 벼슬아치 또는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공장을 모아 종을 완성한 뒤 봉덕사에 모셨다. 이 절은 바로 효성왕(孝成王, 제34대 왕 재위 737~742)이 개원(開元 26년 무인년(738년)에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래서 종의 이름을 '성댁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칭으로 봉덕사종 별칭으로 에밀레종'이라 했다. 성덕대왕은 바로 경덕왕의 아버지 흥광대왕(興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해 시주한 금으로 주조했기 때문에 성덕대왕의 종이라 한 것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郞) 한림랑(翰林郞) 김필해(金弼奚, 김필오金弼奧라고도 한다, 생몰미상)가 왕명을 받들어 종의 이름을 지었는데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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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나무위키

 

옛 책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 이 무왕은 제30대 무왕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이병도 박사는 무녕武寧의 동의이사同義異寫임을 모르고 쓴 것이라 하여 제25대 무녕왕을 말하는 듯하다고 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조에는 이름이 장璋이고 법왕法王의 아들이며 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수도 남쪽 못 가(南池, 부여군 동남리에 있으며 궁남지라고 한다. 여기서 무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 이병도 박사는 "서동은 내가 아는 바로는 무왕의 아명이 아니라 훨씬 이전의 동성왕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서동이 마를 캐어 팔며 살았던 이유를 왕위 계승과 관련된 권력 투쟁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항상 마(薯蕷)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라고 쓴다.)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고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이재선 교수는 이 동요가 서동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백제에 퍼져 있던 구전 설화를 의도적으로 개작하여 경주 지역에 전파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善化公主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선화 공주님은 남몬래 짝지어 두고

薯童房乙 夜矣 卯乙 抱遣 去如

서동(薯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동요는 수도에 가득 퍼져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백관들은 힘껏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게 했다. 공주가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몰랐으나, 우연한 만남을 기뻐하며 그를 믿고 따라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그러고는 함께 백제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며 앞으로 살아갈 계책을 세우자고 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인데, 한평생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 것이 흙덩이처럼 쌓여 있소."

공주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보물을 부모님의 궁궐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았는데, 마치 구릉처럼 쌓였으므로 용화산(龍華山, 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금을 운반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옮겨 줄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의 궁궐에다 금을 날라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하게 여겨 서동을 더욱 존경했고,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 일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도착했는데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가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간곡한 소원입니다."

 

왕이 절을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법상(彌勒法像) 세 개와 회전(回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미륵사 터가 있는데 4미터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유추할 수 있다.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 불교가 미륵신앙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했다.)라고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돕게 했는데,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삼국사>에 "이는 법왕의 아들이다."라고 했는데 이 전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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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천도 과정/ⓒ우리역사넷

 

부여군(扶餘郡)은 전백제의 수도인데, 혹은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성왕(聖王, 백제 제26대  왕, 재위 523~554) 26년 무오년(538년) 봄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그 지명은 소부리인데, 사비란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고 소부리란 부여의 별칭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제4에는 성왕 26년이 아닌 16년으로 되어 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이유는 고구려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비좁은 웅진熊津보다는 넓은 평지에 기틀을 다지려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

 

또 토지측량대장에는 이렇게 말했다.

"소부리군 농부의 주첩(柱貼, 농사 짓는 일꾼의 대장)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여군이라 말하는 것은 아주 옛날의 이름을 회복한 것이며 이는 백제 왕의 성이 부씨(扶氏)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혹은 여주(餘州)라고도 하는데 군의 서쪽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 승려가 대중에게 설법할 때 앉는 대좌를 말한다.)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통화(統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연호로 983년에서 1012년까지 사용했다.) 15년 정유년(997년) 5월 어느 날 여주 공덕대사수장(功德大師繡帳)."

 

또 옛날 하남(河南)에서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지도책 안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으니,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에는 [후한서]의 말을 인용하여 "삼한은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다."라고 했고, [북사北史,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역사서로 위魏나라부터 수나라까지 역사를 기록했다.]에는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고 서남쪽은 큰 바다와 닿아 있으며, 북쪽 끝은 한강(漢江)인데 그 군(郡)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그 밖에 또 오방성(五方城)이 있다."라고 했다.

 

[통전通典]에는 "백제는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가 위치하고 서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해 있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에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으로 그 동북쪽은 신라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越州)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이 있다."라고 했으며, [신당서新唐書]에는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 건너편이고, 북쪽은 고구려다."라고 했다.

 

[삼국사(삼국사기를 말한다.)] '본기本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북부영에서 난리를 피해 달아나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주(州)의 왕에게는 왕자가 없고 단지 세 딸만 있었다. 왕은 주몽이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부여 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沸流)라고 하고 둘째는 온조(溫祚)라고 했다.

 

두 왕자가 후에 태자(太子, 주몽의 아들로 나중에 유리왕이 되었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과 마려(馬黎) 등 10여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따라갔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도착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말했다.

'오직 하남의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그 천연의 요새와 이로운 땅은 또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 지금의 인천 지역)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이며 풍납토성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때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게 되자 위례성으로 돌아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도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 고쳤다. 그 조상의 계보가 고구려와 똑같이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사비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은 인주仁州며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말했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前漢) 홍가 3년 계유년(기원전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기원전 5년)에 한산(漢山, 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도읍을 옮기고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105년이 지나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고 원휘(元徽, 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유욱劉昱의 연호로 473년에서 477년까지 사용했다.) 3년 을묘년(475년)에 이르러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고, 63년이 지나 26대 성왕에 이르러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이 지났으니, 당나라 현경 5년(660년)이었다. 이때는 의자왕이 즉위한 지 20년으로, 신라의 김유신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여 평정시켰다.

 

백제국에는 옛날부터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 200여 성, 76만 호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당나라에서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를 나누어 두고, 그 추장을 도독부 자사(都督府刺史)로 삼았다. 얼마 후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하여 웅(熊), 전(全), 무(武)의 세 개 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했다.

 

또 호암사(虎巖寺)에는 정사암(政事巖, 지금은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이 있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을 선출할 때 뽑힐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적어서 상자에 넣고 바위 위에 둔다. 얼마 후 상자를 가져다 보고는 이름 위에 인(印)이 찍힌 흔적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정사암이라 한 것이다.(이는 귀족 연합적인 삼국 시대의 정치 성격을 나타내는 실례로서 오늘날의 선거 방식과 비슷하여 주목할 만하다.)

 

사비하 가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바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았기 때문에 바위에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남아 있어서 용암(龍巖)이라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浮山) 등 세 개의 산이 있었는데 나라가 흥성하던 시기에는 각기 신인(神人)이 있어 그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서 왕래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비하 절벽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열 명이 앉을 정도로 컸다. 백제 와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하여 예불하려면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며 절을 했는데,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이름을 온돌석(㷝石, 구들돌, 부여에서 보령 쪽으로 가다 보면 큰 다리를 지나 왼쪽에 있다.)이라 했다.

또 사비하 양쪽 절벽이 마치 병풍을 드리운 듯했는데, 백제 왕이 매일 유희하고 잔치를 베풀어 노래와 춤을 추었기 대문에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부른다. 또 시조인 온조는 바로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서 몸집이 크고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이라고도 한다.)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즉시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간혹 지락(至樂, 경초景初의 오기인데, 경초는 위魏나라 명제明帝 조예曺叡의 연호로 237년에서 239년까지 사용했다.) 3년 기미년(239년)에 사비왕이 죽어 고이왕이 즉위했다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읽기: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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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장보고기념관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 재위 839~839, 제38대 원성왕의 손자로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등에 화살을 맞는 꿈을 꾼 후 등에 종기가 나 죽었다고 한다.)은 왕우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사람) 궁파(弓巴, <삼국사기> '열전'에는 '궁복弓福'이라 되어 있다. 장보고張保皐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한다.)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는 원수(신무왕의 아버지 균정과 왕위를 다투었던 희강왕과, 장보고와 신무왕에게 죽임을 당한 민애왕을 말함)가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그를 제거해 주면 왕위를 차지한 후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

궁파는 응낙하고 마음과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켜 수도를 침범해 그 일을 이루었다.

왕이 왕위를 찬탈하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신하들이 옆에서 힘껏 간했다.

"궁파는 비천하니 왕계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왕은 신하들의 말에 따랐다. 이때 궁파는 청해진(淸海鎭,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흥덕왕 때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하던 곳으로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였으며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에 있는데, 이 섬의 남쪽에 방어용 목책이 있었다.)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꾀하고자 했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 생몰미상, 장보고 휘하에서 활약한 무장으로 <속일본기>에는 염장閻丈, 염문閻文으로 기술되어 있다.)이 그 말을 듣고는 왕에게 아뢰었다.

"궁파가 장차 불충을 저지르려 하니 소신이 제거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기꺼이 허락했다.

염장은 왕명을 받고 청해진으로 가서 연락하는 사람을 통해 궁파에게 말했다.

"왕에게 작은 원망이 있어 현명한 공께 몸을 의탁하여 목숨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너희 무리가 왕에게 간하여 내 딸을 왕비로 삼지 못하게 했는데, 어찌하여 나를 만나려 하는가?"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 전했다.

"이는 백관들이 간언하는 것이지, 저는 그 모의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공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청사(廳事)로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왔소?"

염장이 말했다.

"왕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 막하(幕下, 지휘관이나 책임자가 거느리는 사람)에 기대어 해를 모면하고자 합니다."

궁파가 말했다.

"다행한 일이오."

그들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매우 기뻐했다. 그사이 갑자기 염장이 궁파의 장검을 가져다 그를 죽였다. 그러자 휘하의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들을 이끌고 서울(경주)로 돌아와 결과를 보고했다.

"궁파를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염장에 상을 주고 아간(阿干, 신라 17관등 중 제6위인 아찬의 별칭)의 벼슬을 내렸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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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잡간 위홍(魏弘, 제48대 경문왕의 친동생) 등 서너 명의 총애하는 신하가 정권을 쥐고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근심스러워하자 어떤 사람이 다라니(陀羅尼, 범어 dharani의 음역. 석가의 가르침의 정요精要로서, 신비한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의 은어(隱語, 특정한 집단에서 구성원들끼리만 사용하는 은밀한 용어)를 지어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이것을 손에 넣고 말했다.

"왕거인(王居仁)이 아니면 누가 이런 글을 짓겠는가?"

왕거인을 옥에 가두자 왕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그러자 하늘이 곧 그 옥에 벼락을 내려 모면하게 해 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燕丹泣血虹穿日(연단읍혈홍천일)

연단의 피울음은 무지개와 해를 뀌뚫고,

※연단은 전국시대 진시황의 죽이려다 실패하고 죽임을 당한 연나라 태자 단을 말함.

 

鄒衍含悲夏落霜(추연함비하락상)

추연이 머금은 비애는 여름에도 서리를 내렸네

※추연은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연나라 소왕의 스승이 되었지만 혜왕이 즉우하자 참소를 받아 옥에 갇혔는데 한여름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今我失途還似舊(금아실도환사구)

지금 내가 길 잃은 것은 옛 일과 비슷한데,

 

皇天何事不垂祥(황천하사불수상)

아! 황천은 어찌하여 상서로움을 내리지 않나?

 

다라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무망국 찰니나네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詞."

 

풀이하는 자들이 말했다.

"'찰니나제'란 여왕을 말하며, '판니판니소판니'란 두 명의 소판(蘇判, 신라 17관등 중 제3위인 잡찬의 별칭)을 말하는데, 소판이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명의 아간(阿干, 신라 17관등 중 제6위인 아찬의 별칭)을 말한 것이고, '부이'란 부호부인을 말한다."

 

거타지/문화컨텐츠닷컴

 

이때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 나루터와 섬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를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사(弓士)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지금의 백령도, 지방에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도착했을 때,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 열흘 넘게 꼼짝없이 머물렀다. 공이 이를 걱정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못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의 물이 한 길 남짓이나 솟구쳤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말했다.

"활 잘 쏘는 사람을 이곳에 남겨 두면 순풍을 만날 것이다."

공은 꿈에서 깨어나 그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말했다.

"마땅히 나무 조작 쉰 개를 만들어 우리들의 이름을 써서 바다에 던진 후 가라앉은 자의 이름으로 제비를 뽑아야 합니다."

공은 그렇게 했다. 군사 가운데 거타지(居陁知,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용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유사하다.)란 사람의 이름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으므로 그를 남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순풍이 불어 배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거타지는 수심에 잠겨 섬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의 신(神) 약(若)인데 날마다 승려 하나가 해가 뜰 무렵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른다오. 그러면 그는 내 자손의 간장(肝腸)을 모조리 먹어치운다오. 이제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았소. 내일 아침이면 반드시 또 그가 올 테니 그대가 쏘아 주시오."

거타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내 특기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고마워하고는 사라졌다.

거타지가 숨어 엎드려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이 밝아 오자 과연 승려가 나타나 이전처럼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려 했다.

이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즉시 늙은 여우로 변해서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노인이 나와 감사해하며 말했다.

"공의 은혜를 입어 내 목숨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그대의 아내로 주겠소."

거타지가 말했다.

"제게 주신다면 평생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하겠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바뀌게 해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는, 두 용에게 거타지를 데리고 사신의 배를 뒤쫓아가 그배를 호위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가 용 두 마리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 사실을 위에 보고했다.

황제가 말했다.

"신라 사신은 반드시 비범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연회를 열어 신하들의 위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나라로 돌아와서 거타지가 품에서 꽃송이를 꺼내자 꽃이 여인으로 바뀌었으므로 함께 살았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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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처용 문화제 www.cheoyongf.or.kr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재위 875~886)대에는 서울(지금의 경주)에서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담장이 서로 맞닿았는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위치하므로 지금의 울주蔚州다.)로 놀러 갔다 돌아오려 했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 신라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원)이 아뢰었다.

"이는 동해에 있는 용의 변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유사(有司, 어떤 단체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의 벼슬아치 또는 담당관리)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라고 한 것이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둘어와 왕의 정사를 보필했는데, 이름을 처용(處龍)이라 했다. 왕은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아 그의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면서 급간(級干, 신라 십칠 관등 중 가운데 아홉째 등급의 벼슬로 진골과 6두품만 오를 수 있는 관등)이란 직책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밤이 되면 사람으로 변해 그 집에와 몰래 자곤 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났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東京明期月良

동경 밝은 달에

夜入伊遊行如可

밤새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구나.

二 兮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것이지만

二 兮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가.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래 내 것이지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이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끓어앉아 말했다.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범했는데도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됩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치고(이러한 미신은 불교 최전성기인 고려에 와서 궁중 의식으로서 처용무와 처용희로 발전되었다.)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려고 했다.

왕은 돌아오자 곧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 경남 울주군 문수산에 있던 절로 지금은 소실되어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라 했다. 망해사를 또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는데, 이는 처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또 왕이 포석정(鮑石亭, 경주시 배동에 있는 임금의 별궁으로 지금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웠다는 석구만 남아 있다.)으로 행차하니, 남산의 신(神)이 나타나 어전에서 춤을 추었는데(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는 "어디서 왓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 앞에서 가무를 하였는데" 라고 나와 있다.),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그래서 왕이 몸소 춤을 추어 형상을 보였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미

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므로 그 모습을 살펴 왕이 공장(工匠)에게 본떠 새기도록 하여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고 했다고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춤을 추자 이름을 옥도금(玉刀鈐)이라 했고,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어 지백금간(地伯級干)이라 불렀다.

'어법집(語法集)'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고 했다. '도파'란 말은 아마도 지혜(智)로써 나라를 다스리는(理)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아채고 모두(多) 달아나(逃) 도읍(都)이 곧 파괴된다(破)는 뜻이다."

이는 바로 지신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면서 즐거움에만 점점 더 탐닉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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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헌화공원/ⓒ삼척시청 문화관광

 

성덕왕(聖徳王, 신라 33대 왕-재위: 702~737) 대에 순정공(純貞公, 5급 이상의 진골 귀족)이 강릉(江陵, 강원도 명주溟州지역) 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옆에는 바위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는데, 천 길이나 되는 높이에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내게 저 꽃을 꺾어 바치겠소?"

따르던 사람이 말했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

다들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그 꽃을 꺾어 와서 가사(歌詞)도 지어 부인에게 함께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시 이틀째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 바닷가에 닿아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낚아채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다시 한 노인이 말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라고 하니, 바닷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들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이 말을 따르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바다에서 나와 그에게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었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일곱 가지 보물로 꾸민 궁전에 음식들은 맛이 달고 매끄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도 색다른 향기가 스며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 볼 수 없는 향이었다.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 가를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에게 빼앗겼으므로 여러 사람이 해가(海歌, 가락국 수로왕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와 유사함)

그 가사는 이렇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를 약탈해 간 죄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헌)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을 쳐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구지가龜旨歌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놓아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만약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노인이 바친 헌화가(獻花歌)는 이렇다.

 

紫布岩乎邊希(자포암호변희)

자줏빛 바위 가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집음호수무우방교견)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吾肸不喩慚肸伊賜等(오힐불유참힐이사등)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화힐절길가헌호리음여)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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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부산성/문화재청

신라 제32대 효소왕 대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혹은 득곡得谷) 급간이 있었는데, 화랑의 명부에 이름을 놀려놓고 날마다 나오다가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물었다.

"당신의 아들은 지금 어디 있소?"

득오의 어머니가 말했다.

"당전(幢典)인 모량부(牟梁部)의 아간(阿干) 익선(益宣)이 제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경주 서쪽에 있는 해발 729.5m 부산富山 정상부를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계곡을 감싼 포곡식 석산성)의 창고지기(倉直)로 보냈는데, 급히 가느라 낭께 말씀을 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낭이 말했다.

"네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공적인 일로 갔으니 내가 가서 대접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갖고 좌인(左人, 갯지-개질지皆叱知, 신라 때때에 종을 일컫는 말)들을 거느리고 떠나는데, 낭의 무리 137명 역시 의장을 갖추어 따라갔다.

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 위의 득오와 같은 사람이며 득오의 다른 명칭인 득곡得谷의 뜻말의 음차)의 행방을 물어보자 그가 말했다.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으로 득오를 대접했다. 그리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득오와 함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익선이 완강히 반대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경남 밀양의 옛 지명)의 세금 30석을 거두어 성안으로 수송하다가 선비를 귀중히 여기는 낭의 풍모를 아름답게 여기고 융통성 없는 익선을 야비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지(舍知, 신라시대 17관등 중 13위 관등) 진절(珍節)이 기마와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花主, 화랑을 관할하는 관직)가 그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잡함을 씻어 주려 했는데, 익선이 달아나 숨었으므로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이때는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성안에 있는 못 가운데서 익선의 아들을 목욕시키니 그대로 얼어 죽고 말았다.

대왕은 그 말을 듣고는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내쫓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검은색 옷(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면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 한 마을의 사무를 맡아 보던 수장)으로 삼아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했다.

이전에 술종공(述宗公)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9주의 하나)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삼한에 전쟁이 있어 기병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했다. 가다가 죽지령(竹旨嶺)에 도착하니, 한 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그것을 보고 감탄하고 칭찬했다. 거사 역시 공의 위세가 매우 큰 것을 좋게 보고 서로 마음속으로 감동하게 되었다.

술종공이 삭주에 부임하여 다스린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거사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여 매우 놀라고 괴상하게 여겼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사람들이 말했다.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하니, 거사가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은 날이었다. 공이 말했다.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 같소."

다시 군사를 보내 고갯마루 북쪽 봉우리에 거사를 장사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 한 구(軀)를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아내가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자 이름을 죽지(竹旨)라 했다. 그는 장성하여 벼슬길에 올라 김유신 공과 함께 부수(副帥, 주장을 보좌하는 장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문 등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慕竹旨郎歌)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去隱春皆理米,
지나간 봄 그리매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계시지 못해 울면서 시름하는데
,
두덩을 밝히오신 모습이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目煙廻於尸七史伊衣,
눈 돌림 없이 저를
逢烏支惡知乎下是,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에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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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 복원 모형/ⓒ나무위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옆에 있는 탑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렇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 구름이 땅에 드리워진 것을 보고는 구름 속으로 찾아 들어가 보았더니 어떤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갑자기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났다. 그 옆에는 3층으로 된 탑이 있었는데, 위에 솥을 엎어 놓은 듯하여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가서 승려를 찾아보니 다만 거친 풀만 있었다. 그곳을 한 길가량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발이 나왔고, 더 깊이 파자 명(銘)이 나왔다. 그릇 위에 범서(梵書, 인도 문자인 산스크리트 어로 기록된 글)가 있었는데 모시고 있던 신하가 이 글을 알아보고는 불탑이라 했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대답했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 원래는 휴도왕休屠王으로 쓰는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부처다.)이라 합니다."

이로 인하여 성왕은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고, 그 이후에 불법이 처음으로 전래되자 탑과 불도의 인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탑의 높이가 줄어들고 본래의 탑은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 아소카로, 불교를 굳게 믿었으며 불교의 자취를 따라 곳곳에 탑을 세웠다.)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 옛 인도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인간 사회로 볼 수 있다.)에는 곳곳마다 탑을 세웠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또 당나라 용삭(龍朔) 연간에 요동에서 전쟁이 있었다.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가 정벌했던 요동의 옛 땅에 가서 산에 있는 불상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적막하며 행인의 왕래조차 끊어져 있었다. 한 노인에게 묻자 이렇게 말했다.

'이 불상은 선대에 나타났던 것이오.'

그래서 이것을 그려서 서울로 돌아왔다(모두 '대장경'을 함에 넣고 함의 차례를 천자문의 차례로 표시한 약함若函에 기록되어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으며 한나라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했다.

고구려 성왕이 어떤 임금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왕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紹) 2년(기원전 37년)에 제위에 올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년(기원전 19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에는 한나라도 불경을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해외의 변방 신하가 범서(梵書)를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이라고 불렀으니, 서한 시대에도 필시 서역 문자를 아는 사람이 있어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을 하나씩 세우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염부계(閻浮界, 인도를 말한다.) 안의 8만 4000개 탑을 큰 바위 속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지금 곳곳마다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 하나 둘이 아닌데, 아마도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그 감응을 헤아리기 어렵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육왕(育王)의 보탑(寶塔)은 온 속세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혀 이끼가 끼었구나.

그 당시 길 가던 사람들 눈길을 생각해 보면

몇 명이나 신의 무덤을 가리키며 제사 지냈을까?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 요동성의 육왕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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