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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통적인 가훈(家訓)은 집안어른이 자녀 또는 후손들에게 주는 가르침, 교훈을 일컫는 것으로써, 대체로 수신제가(修身 齊家), 즉 처세와 때로는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치인(治人)의 도리를 중심으로 생활문화 전반에 걸친 규범과 지침들을 간단명료하게 조목으로 나열,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이 남성 중심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러다 17세기 이후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가훈서들도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여훈(女訓)과 계녀서(戒女書)이다. 이는 보다 구체적인 여성 교육서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당시는 부덕이 높은 여성이 가문 영달의 밑거름이자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여성의 부덕은 그 가문의 명성과 가풍을 전하는 것으로도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우암선생계녀서/ⓒ우리역사넷

 
따라서 가훈서와 여훈서의 목차를 비교해 보면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부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훈서에는 일반가훈과 마찬가지로 가족관계, 교육, 조상 섬기기, 아랫사람 대하기 등 유교가 추구하는 실천윤리가 모두 포함된다. 여기에 더하여 여훈서는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시부모 섬기기와 남편 섬기기가 추가되고, 남성의 사회적 관계를 뒷받침하는 역할이 부여되며, 남녀가 각각 힘써야 할 본업에 대해서도 다르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여훈, 계녀서로는 이황(李滉, 1501~1570)의 <규중요람(閨中要覽)>,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가 왕실의 비빈(妃嬪)을 훈육하기 위해 엮은 <어제내훈(御製內訓>,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계녀서(戒女書)>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저자가 알려진 사대부의 여훈서로 한원진의 <한씨부훈(韓氏婦訓)>, 권구의 <내정편(內政篇)>, 조관빈의 <계자부문(戒子婦文)>, 조준의 <계녀약언(戒女略言)> 등이 있고, 작가 미상의 <규중요람> <규범> <여자계행편> 등이 있다.
 
이러한 사대부가의 여훈서는 대개 '사부모(事父母 부모를 섬기는 도리), 사구고(事舅姑 시부모님을 섬기는 도리), 화형제(和兄弟 형제 사이의 우애를 밝히는 도리), 목친척(睦親戚 친척과 화목하게 지는 도리), 교자녀(敎子女 자녀를 교육하는 도리), 봉제사(奉祭祀 제사를 받드는 도리), 접빈객(接賓客 손님을 접대하는 도리), 어노비(御奴婢 종을 다스리는 도리), 음식의복(飮食衣服 음식과 의복 만드는 도리), 절검(節儉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도리), 근면(勤勉 부지런하게 힘쓰는 도리), 불투기(不妬忌 투기하지 않는 도리), 수신(修身 마음과 몸을 닦아 수양하는 도리), 신언어(愼言語 말을 조심하는 도리)'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목차와 내용은 매우 상세한 것으로, 여성의 삶을 시집살이 중심으로 구조화하고 제가(齊家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는 일) 중심의 기능적 여성상을 강조하는 한편 불투기와 정절을 강조하고 있다.
 

국보 송시열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대표적으로 송시열의 <계녀서>는 출가하는 딸에게 교훈으로 삼게 하기 위해 지어준 글로 한글로 되어 있는데, '부모 지아비 시부모 섬기는 도리, 형제간, 친척 간에 화목하는 도리, 자식 가르치는 도리, 제사 받들고 손님 대접하는 도리, 투기하지 않는 도리, 말을 조심하는 도리, 재물을 절제 있게 쓰는 도리, 일을 부지런히 하는 도리, 병환을 돌보는 도리, 의복과 음식을 만드는 도리, 노비 부리는 도리, 재물을 빌려 주고 되돌려 받는 도리, 팔고 사는 도리' 등  선인들의 선행 등 20여 조목으로 되어 있다. 이들 내용은 조선시대의 사대부가 부녀자들의 행동에 관한 사회적 규범을 보여 주는 것으로 여성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다음으로 우암의 제자이면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으로 저명한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한씨부훈( 韓氏婦訓)-남당선생문집 권26, 잡저>은 1712년(숙종 38)에 부녀자에게 교훈이 될 만한 것을 내용으로 하여 지은 10장 34쪽의 책이다. 이 자료는 한원진이 시집간 누이의 요청에 따라 성현의 말씀 가운데 부인의 행실과 일상적인 가정생활에 절실한 내용을 '부모, 남편 섬기기와 형제자매, 며느리, 첩, 비복 등을 대하는 법도를 비롯하여 집안일 다루기, 접빈과 봉제사 등'의 총 11장으로 구성한 것으로, 주로 <소학(小學)-1187년 완성된 송나라 유징이 지은 수양서>과 <격몽요결(擊蒙要訣)-학자 이이가 1577년 간행한 아동 유학입문서> 에서 발췌하였으며 여훈서에서 다루는 정형화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씨부훈>의 특징은 집안의 성쇠가 부인의 행실에 달려 있고 그것은 교육에 달려 있다고 전제하여 며느리 교육을 항목에 포함시킨 점, 아동 교육의 중요성과 아동 교육의 담당자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의 <가훈(家訓)-근재집(近齋集), 권23~24 잡저>은 부인에게 내린 경계와 질부 박종경(朴宗慶) 처에게 준 8가지 경계로 딸, 측실, 노비 등을 경계한 글이다.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의 < 가훈(家訓)-양유원집(陽園遺集) 권14>도 '내칙(內則)'이라 하여 부모 섬기기, 봉제사, 부부 형제 관계, 아들 가르치기, 종족과 노비 관련 조목, 그리고 복식까지를 다루고 있다. 박필주(朴弼周)의 <계유가중(戒諭家衆)-여호집(黎湖集 1744>은 특별하게 노비들을 대상으로 한 경계로서 상전을 모시는 법, 속이거나 탐하는 마음 없애기, 언행과 음주에 대한 조심 등의 8조목을 수록한 흥미로운 자료이다. 노비 관련 모목이 강조된 가훈으로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가잠(家箴> '사노비(使奴婢), 강덕준(姜德俊, 1607~1668)의 <우곡선생훈자격언(愚谷先生訓子格言)> '어비복(馭婢僕)'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의 <가훈> '계노비문( 戒奴婢文)', 이경근(李擎根, 1824~1889)의 <고암가훈(顧菴家訓)> '사비복(事婢僕)' 등이 있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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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원들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관원으로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사화와 당쟁이 빈번히 일어나면서 이 유배살이가 관리들에게 하나의 필수과정처럼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에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유배를 한두 차례 당하지 않은 관원은 이름이 없거나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정파가 집권하게 되면 반대편의 실각한 정파의 주요 관리들을 제일 먼저 유배형에 처했는데, 실각한 정파가 훗날 다시 집권하면 유배되었던 관리들은 대부분 중앙의 정계로 복귀하였으므로 유배의 성격도 약간 변화하여 조선 후기에는 그것이 일종의 '정치금고'와 동일한 처벌로 간주되곤 하였다. 즉 유배기간에는 중앙의 정계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한국관광공사

일단 유배형이 내려지면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데 드는 일체의 비용을 피유배자가 지불해야 했는데, 심지어는 호송관리의 수고비까지도 부담해야 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모함 등으로 억울하게 유배를 당한 경우라면 그 손해가 엄청났지만 법이 그러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배당한 관리의 신분이나 지위, 인적 관계와 복관 가능성 등에 따라서 떠나는 유배길이나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크게 달랐는데, 고관이나 권신들은 유배길에 거처가는 군현마다 들러 그 지역 수령으로부터 향응을 받거나 유배지의 수령이나 아전들로부터 깍듯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유배간 사람이 본가에 쓴 편지/ⓒ국립전주박물관

유배생활의 실제 모습을 조선 영조 대에 충청남도 직산군수(稷山郡守)를 역임한 전근사(全近思, 1675~1732)의 편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전근사는 1728년 4월에 전라도 운봉현(雲峰縣,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동면·산내면·아영면 일대에 1914년까지 있던 행정구역.)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이유는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무리를 보고도 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낸 대관(臺官, 조선 시대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들은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그를 의금부에 가두고 조사하게 했는데, 직무를 유기환 죄가 드러나자 운봉현에 유배하도록 지시하였다. 유배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같은 도(道)의 수령으로 재임하고 있는 친지에게 다음과 같은 간찰(簡札, 옛 편지들을 이르는 말. 서간(書簡), 서찰(書札)이라고도 부른다.)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체직(관직을 교체하는 것, 보통 면직을 뜻하나 경우에 따라 파직을 뜻하기도 함) 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겪었던 어려운 사정은 잠시 말하지 않더라도, 체직된 후에 양식을 지니고 올 방법이 없어서 맨손으로 내려왔는데, 지금 식량을 주가(主家)에 부탁하기가 구차하고 어려운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 근심스러움을 어찌합니까? 형에게 사람을 보내어 어려움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을까 염려될 뿐만 아니라, 관직에 있으면서 응대하는 어려움을 제가 평소에 잘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 안에 영남 출신 친구로서 수령이 된 사람이 6, 7명에 이르니, 만약 유배지에서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반드시 무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나, 관문(官門)은 사실(私室)과 다르고 어리석은 저의 종놈이 동서도 분간 못하기에 실로 서로 통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관중(管仲, 관포지교의 관중을 빗댓 말)인 저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포숙(관포지교의 포숙을 빗댄 말)인 형뿐이니, 부디 같은 도 출신이 부임한 고을에 편지를 띄워서 특별히 구제해 달라는 뜻으로 간절히 부탁하여 제가 객중에서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가? -중략- 근래에 갖가지 신병이 떠나지를 않아 날마다 신음하는 것이 일인지라, 형편상 혼자 머무르기가 어려워서 아들놈과 비복을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이 때문에 식구가 적지 않으니 더욱 근심스럽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조선시대 관리들은 유배생활 중에도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며 비복(계집종과 사내종)까지 거느리고 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근사는 자신의 신병 때문에 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만, 어찌되었든 유배된 관리들 중에는 가족과 함께 살고 또 비복도 거느리고 산 사람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유배기간에 드는 생활비를 당사자가 마련해야 했지만, 전근사는 경상도 출신의 호남지역 수령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던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정약전의 유배기간을 그린 영화 '자산어보' 스틸 컷/출처 : 네이버영화

한편 같은 유배자라 하더라도 유배기간의 생활과 해배 이후의 행보에는 상당한 개인차가 있었는데, 물론 정치적인 유배의 경우는 유배기간 내내 울분 속에서 보내는 유배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나 정약전처럼 이 기간에 독서와 저술을 하고 또 유배지역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등 유교의 진작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인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복관 후에도 그 지역의 자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리로서 중앙에 진출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은 사후에 그 지역 자제들의 추대로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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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헌에 김치 제조법이 대강이나마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이다. 이규보는 여기서 순무를 여름 석 달 동안에는 장에 절여 먹고, 겨울 석 달 동안은 소금에 절여 먹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채소를 장이나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치를 소금에 절여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김치의 종류와 재료, 제조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요리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이 처음이다.


오이지/© 깊은나무-다음백과


'산가요록'에는 여러 종류의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순무김치[청침채(菁沈菜)], 오이김치[과저(瓜菹)], 가지김치[가자저(茄子菹)], 파김치[생총침채(生蔥沈菜)]는 물론이고 토란김치[우침채(芋沈菜)], 고사리김치[침궐(沈蕨)], 마늘김치[침산(沈蒜)] 등 여러 가지 김치 담그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여름에 속성으로 만들어 먹는 물김치[즙저(汁菹)], 겨울에 무를 이용한 동치미[동침(凍沈)]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15세기의 김치는 지금의 김치와 사뭇 달랐다. 우선 김치의 재료를 살펴보면, 지금은 김치의 가장 일반적인 주재료인 배추가 당시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농서(農書)나 요리서에서 채소 재배법이나 요리법을 소개할 때에도 배추는 오이, 무, 가지, 동아(冬瓜) 등에 비해 아주 소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고문헌에서 배추는 '숑(숭(崧)]', '숑채[숭채(崧菜)]' 또는 '배채[백채(白菜)]'로 기록되었는데, 16세기의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도 '숭저(崧菹)'가 보이고 '산가요록'에도 '배추김치 담그기'라는 뜻의 '침백채(沈白菜)'가 보이지만 단 한 번 등장 할 뿐이다. 이처럼 김치의 주재료로는 배추보다 오이, 가지, 순무, 동아, 파 등의 채소가 널리 쓰였다.


배추의 품종이 꾼준히 개량되어 제대로 결구가 된 품종이 생산되어 김치 재료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쯤으로 짐작된다. 1800년경에 간행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 오늘날의 배추김치와 같은 통배추김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과 추위에 강하면서도 맛과 질감이 좋은 배추가 만들어져 본격적으로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에 우장춘이 개발한 원예 1호, 원예 2호 배추부터였다.


순무/ⓒ위키백과


그리고 무도 지금과 같은 무가 아니라 순무 종류가 더 많이 쓰였다. 지금의 무는 '댓무'라고 하여 나복(蘿葍)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나박김치라는 말은 본래는 무김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댓나무보다는 청(菁)이라고 쓰는 '쉿무', 즉 순무가 더 많이 쓰였고, 기록에도 나복보다는 청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통상 김치라 하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것을 연상하지만, '산가요록'에는 과일도 김치의 주재료가 되고 있다. 즉 수박, 복숭아, 살구 등의 과일이 김채재료로 쓰인 것이다. 사실 과일과 채소는 식물학의 분류방법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즉 과학이 아니라 문화적인 분류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파파야를 익지 않아 파란 상태에서는 채소로 먹고, 노랗게 익으면 과일로 먹는다. 우리도 토마토를 굳이 채소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토마토는 과일일 뿐이다. 서양사람들은 토마토를 스파게티나 햄버거, 샌드위치의 재료로 쓰니까 채소라고 하지만, 우리는 토마토를 과일로 먹지 조리 재료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의 우리 조상들은 수박, 복숭아, 살구를 채소로도 썼던 것이다. 이때의 김치는 반찬으로 과일을 조리하기 위한 것으로도 쓰였지만, 과일을 오래 저장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전기의 김치에 대한 기록에는 젓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젓갈이 김치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전에도 젓갈이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세종 때에 기록에 어린 오이에 곤쟁이젓[자하해(紫蝦醢)]을 넣은 오이김치가 보이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譚)'이라는 책에서도 곤쟁이젓으로 담근 오이김치를 세상에서 '감동(感動)'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다. 흔치는 않지만 김치에 젓갈을 넣은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가요록'에는 곡물을 넣어 발효시킨 김치가 보인다. 여름에 물김치를 담글 때에 날콩이나 기울을 찧어 만든 덩어리를 가루를 내어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특별한 김치 외에는 거의 모든 김치에 고춧가루가 쓰이지만 이때는 양념 중에 고춧가루가 없다. 고추는 17세기에 도임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김치가 18세기에 접어들어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이고 젓갈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19세기에 배추김치가 크게 확산되면서 다른 나라의 김치와 다른 독특한 김치가 만들어졌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함께보기: 초기 김치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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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이혼을 이이(離異)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출처(出妻), 기처(棄妻)라는 말도 쓰였다. 출처는 처를 내쫓는 것이고, 기처는 처를 버린다는 뜻이다. 낱말에도 나타나듯이, 조선시대의 이혼은 부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행위였다. 아내 쪽에서 이혼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처부모를 구타한다든지, 처를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구타하는 경우에 한했다. 그 경우에도 이혼의 제기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 부모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혼, 즉 아내를 내쫓기 위한 명분으로는 유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칠거지악 (七去之惡)이 있었다.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경우는 첫째, 시부모에게 불손하거나 둘째,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셋째, 음행을 저지르거나 넷째, 투기를 부리거나 다섯째, 나쁜 병을 앓거나 여섯째, 말이 많거나 일곱째, 도벽이 있는 경우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삼불거(三不去)라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쫓겨나서 돌아갈 곳이 없거나,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렀거나, 가난하고 미천한 집을 부귀하게 만든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하였다. 하지만 굳이 삼불거를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칠거지악을 이유로 이혼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시부모를 구박하거나 음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심각한 이혼사유가 될 수 있었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사소한 사유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혼이 자유로웠다. 심지어 왕실에서도 그러해서 고려 초에는 문덕왕후(文德王后) 유씨가 과부가 된 상태에서 성종과 혼인하였고, 그려 말에는 순비(順妃) 허씨가 3남 4녀를 낳고 충선왕과 재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절을 장려한 것도 사실이어서, 3품 이상의 처가 수절하는 경우에는 작위를 내려 주는 봉작(封爵)을 하였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러 재가를 점차 규제하기 시작했다. 공양왕 때에 6품 이상의 처는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재가를 금지하고, 위반하면 처벌하고 봉작을 회수하도록 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로는 세 번 시집가는 삼가(三嫁)부터 규제하여 삼가를 실행(失行)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고, 이어서 삼가녀는 행실이 나쁜 여자들의 명부인 자녀안(恣女案)에 기록해 두고 그 자녀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데에 제한을 두었다. 즉 세 번째 결혼 전에 낳은 자식은 관직의 품계에 제한을 두고, 세번째 결혼 후 낳은 자식은 금고(禁錮)에 처하여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령들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삼가녀를 자녀안에 올리고, 그 자손은 사헌부, 사간원 같은 모법이 되어야 하는 맑은 벼슬자리나, 문신과 무신의 인사를 담당하는 중요한 관서인 이조, 병조의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서 성종 때에는 지방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직에 쓰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이러한 조항들은 결혼 자체를 못하게 한 금지조항이 아니라 결혼해서 낳은 자식에게 불이익이 가도록 한 억제조항이었다.




그 후로 1477년(성종 8)에는 두 번 시집가는 재가(再嫁)도 규제대상이 되었다. 재가를 한 경우에는 자손들을 금고에 처하여 문과, 무과, 생원과, 진사과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벼슬길을 막았고, 이는 재혼 전에 낳은 자식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양반가의 자식들은 출세를 하려면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에 어머니의 재혼을 막아야 했다.

이러한 규정이 생겨난 데에는 유고적인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여자가 홀몸이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작지 않은 문제였다. 따라서 의탁할 곳 없는 여인들이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일부 유학자들은 재혼을 아주 곱지 않는 눈으로 보았다. 중국의 정자(程子)는 여자들이 재혼을 하는 것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하는 일이지만,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지극히 큰 일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처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완고한 사고방식은 조선의 법령에도 영향을 미쳤다. 1477년에 성종은 의정부, 육조, 사헌부, 사간원 등의 고위 관원들을 모아 놓고 재가 규제에 대한 의논을 했는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하였지만, 성종은 재가 규제의 편을 들어 결국 재가 규제법이 시행되었다. 몇 해 뒤에 도승지 김승경(金升卿)이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너무 심한 듯하니 규제를 풀자고 건의했으나, 성종은 두 번 시집가도 자신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니, 그래도 재가하고 싶은 여인들은 그러면 그만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이 조항은 '경국대전'에 수록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재가에 대해 일반인들의 견해가 그다지 심하게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서 16세기에 퇴계 이황(李滉)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를 재가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자들의 재혼을 심각한 도덕적 흠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족보에도 재혼한 사실을 밝히고 전남편과 후남편의 이름을 모두 족보에 올렸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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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240호 백자 청화 투각 모란 넝쿨 무늬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보물 240호 '백자 청화 투각 모란 넝쿨 무늬 항아리'는 18세기 조선시대 작품으로 높이 26.4cm 크기의 청화백자이다.

전체적으로 우수한 품질과 유색으로 보아 왕실에서 특별히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왕조 도자기는 보통 단순하고 간결한 것이 주요 특징인 것에 비해 '백자 청화 투각 모란 넝쿨 무늬 항아리'는 복잡한 투조 문양으로 장식한 희귀한 예로 볼 수 있다.

원통형의 내호와 모란꽃을 투각한 장식외호의 이중으로 구성된 것이 특이하다. 어깨 부분에 넝쿨 무늬 대를, 몸체 아래에는 한줄의 양각선과 여의두 무늬를 두르고 그 사이 전면을 모란 무늬로 채웠는데, 담청을 머금은 맑고 깨끗한 백자유약이 얇게 칠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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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70호 '백자 청화 매화 대나무 새 무늬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70호 '백자 청화 매화 대나무 새 무늬 항아리'는 높이 16.5cm, 입지름 6.2cm, 바닥지름 9cm의 크기로 15세기 조선시대 작품이다.

조선시대 관요(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사기 제작을 위한 정부 직영의 가마 또는 사기 제조장)에서는 청화백자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궁중 화원이 담당하였는데, 그 결과 조선 백자는 '백자 청화 매화 대나무 새 무늬 항아리'와 같이 회화적인 성격이 강하면서 화격을 갖춘 매우 걸출한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백자 청화 매화 대나무 새 무늬 항아리'의 매화, 대나무, 새 등은 청화 안료를 사용해 그렸으며(초기 청화백자에서 보이던 중국적인 화려한 문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선의 정취를 자아내는 문양으로 바뀌게 된다), 한국적인 정서가 돋보이는 원숙한 필치가 느껴진다.

문양의 위치에 따라 색의 짙기를 달리해 그림의 입체감과 사실적인 효과를 높인 것 또한 이 백자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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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47호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7호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7호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7호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7호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7호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7호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은 높이 29.7cm의 크기의 15세기 조선시대 초기 제작된 유물로써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인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과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매병이다.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 무늬 매병'은 고려말 상감청자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에 있어 인화(印花)-도장을 찍어 문양을 표현하는. 기법의 비중이 높아지고, 유약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밝은 회청색으로 바뀐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깨쪽에 연꽃잎 문양을 간략하게 표현해 넣었고, 그 바로 아래쪽에는 넝쿨 띠를 상감하여 넣었다.

몸체 전체에 점을 찍어 채우고, 4개의 큰 원안에 파도 무늬 배경을 넣고 물고기를 각 두마리씩 상감하여 넣었다. 또, 큰 원과 원 사이 윗쪽에 학 네마리를 상감하여 표현했으며, 잘록한 허리부분에는 꽃과 풀을 추상적으로 표현해 넣었으며, 그아래에는 연꽃잎 모양의 문양을 상감하여 둘렀다.

유약은 청자유에 가까운 담청색을 띤 분청유를 사용하였는데, 복잡한 문양 구성과 유약은 기형과 더불어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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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관해방총도/국립중앙박물관]


[청구관해방총도/국립중앙박물관]


[청구관해방총도/국립중앙박물관]


[청구관해방총도/국립중앙박물관]


[청구관해방총도/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군사지도인 청구관해방총도(보물 1582호)는 북쪽을 지도의 윗쪽으로 배치하는 현대의 방식과 다르게 한반도를 옆으로 눕혀 그린 것으로 시점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동쪽을 지도의 위쪽에 배치하는 지도도 일부 만들었다.

총구관해방총도의 전체적인 크기는 '동국대전도(東國大全圖)'에 가까운 크기(285cmX86.3cm)로 아주 큰 편에 속하며, 동국대전도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지도의 오른쪽(남쪽)에는 일본의 위치도 간략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지도의 여백에 국경지역과 관련한 중요한 사항들을 붉은 글씨로 나타내고 있다.

산(山)지는 주로 산줄기를 강조하여 이어진 모양으로 표현했고, 백두대간의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또한 압록강, 두만강 이북까지 지도상에 포함하고 있는 것도 동국대전도와 비슷하며, 특히 의주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도로를 표시하였고, 몽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가 그려져 있으며, 울타리의 문이 비교적 자세하게 표현돼 있는데, 이는 국경지역에 대한 군사적 관심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내부 지역에는 군사 기지인 진보(鎭堡)와 성곽들이 잘 그려져 있고, 붉은 선으로 중요 교통망을 표현했으며, 해안에는 방어시설과 관련된 백명을 단위로 하는 군대 편제인 초(哨)와 당(塘)이 각기 표시돼 있다.

당시 중요 통신망이였던 봉수는 횃불모양으로 표시했고, 요충지는 깃발모양으로 표시하는 등 직관적인 표현도 특징이다.

다만, 당시 섬이었던 안면도는 여전히 곶으로 표현하는 등 이전 시기 지도에서 나타나는 불완전한 부분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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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귀여가(男歸女家)란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린 후 대략 일 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처가에 머무르는 혼인방식을 말한다. 이를 서류부가(壻留婦家), 솔서혼속(率壻婚俗)이라고도 하며, 고구려 때 있었다는 서옥제(壻屋制)도 마찬가지로 이에 속한다. 이것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여 자기 집으로 데려와 혼례를 가지는 '주자가례'의 친영(親迎) 방식과 대조되는데, 친영은 신랑이 신부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나아가 맞이하여 옴으로써 음(陰)에 대한 양(陽)의 적극성을 강조한 것이다. 남귀여가 혼속은 부계친족의 자녀들이 각자의 외가에서 성장하는 기회를 줌으로써 부계 중심의 친족 결합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인식되어 조선 명종 때부터 반친영(半親迎)이라는 방식으로 절충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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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도 후기 조선사회로 접어들면서 서당 교육을 평민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서당은 학동들의 신분에 따라 양반 서당과 상놈 서당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향교에서도 동재(東齋)에는 양반 출신 유생만 드나들 수 있었고, 서재(西齋)에는 평민 출신 교생만 드나들 수 있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지긴 했지만 어쨋든 조선 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평민들의 문자 인식률 또한 높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신분에 따른 한계는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서당의 교사인 훈장에 대한 예우가 매우 열악했고, 평민 서당은 공간문제나 평민들의 미약한 재정능력 등으로 인해 사실상 오래도록 존속되기는 힘들었다. 또한 평민 출신이 서당 공부를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과거급제를 통한 높은 벼슬이나 학문에 종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에 공부의 목표가 대부분 실용문 작성 대행, 면장(面長) 정도로 축소되거나 훈장 노릇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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