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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

 처음에 "일심법(一心法)에 의거하여 두 가지 문(門)이 있다."고 한 것은 '능가경'에서 "적멸(寂滅)이라는 것은 일심이라고 하고, 일심은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대승기신론'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이라고 한 것은 저 '능가경'의 "적멸이라는 것은 일심이라고 한다."고 한 것을 해석한 것이며, 심생멸문(心生滅門)이란 '능가경'의 "일심은 여래장이라고 한다."고 한 것을 해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생성도 소멸도 없으며 본래 적막하고 고요하여 오직 일심뿐인데, 이러한 것을 심진여문이라고 하기 때문에 "적멸이라는 것은 일심이라고 한다."고 한 것이다.

 또 이 일심의 체가 본각(本覺)이지만 무명(無明)에 따라서 움직여 생멸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생멸문에서 여래의 본성이 숨어 있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여래장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는 '능가경'에서 말하기를 "여래장이란 선과 악의 원인으로서 일체의 취생(趣生)을 두루 잘 일으켜 만든다. 비유하자면 마술사가 여러 가지 부류를 변화시켜서 나타내는 것과 같다."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뜻이 생멸문에 있기 때문에 "일심은 여래장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일심의 생멸문을 나타낸 것으로, 아래 글에서 "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멸심이 있으며"라고 하고, 이어 "이 식(識)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각(覺)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니 다만 생멸심만을 취해서 생멸문을 삼는 것이 아니라, 생멸 자체와 생멸상을 통틀어 취하여 모두 생멸문 안에 둔다는 뜻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두 문이 이러한데 어떻게 일심이 되는가? 염정(染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진망(眞妄)의 이문(二門)이 다를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고 하며, 이 둘은 없는 곳이 모든 법 중의 실체이므로 허공과 같지 아니하여서 본성이 스스로 신묘하게 이해하므로 '심(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일이 될 수 있는가? 일도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심(心)이라고 말하는가? 이러한 도리는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은 것이니 무엇이라고 지목할지를 모르겠으나, 억지로 이름 붙여 일심(一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두 문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두문이 각기 총괄하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진여문은 염정의 통상(通相)이며 통상 밖에 별다른 염정이 없기 때문에 염정의 모든 법을 총섭할 수 있음과, 생멸문은 염정을 따로 나타내지만 염정의 법이 모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또한 일체의 모든 법을 총섭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통(通)과 별(別)이 다르기는 하지만 다 같이 부정할 것이 없기 때문에 "두 문이 서로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대승기신론 소,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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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불교, 혜사(惠思)의 '대승지관법문(大乘止觀法門)

 

 정신 집중(止)과 통찰(觀)의 방법

 지(止)란 현상계의 모든 법(法)이 본래부터 그 본성이 유(有)가 아니며, 생멸하지도 않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만법은 허망한 인연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에 유가 아니면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저 법은 현상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이 일심(一心)의 본체만이 분별이 없다. 이렇게 관찰하면 허망한 생각의 흐름을 머추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멈춘다(止)'라고 부른다.

 관(觀)이란 비록 현상계의 법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아 지금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의 본성으로부터 조건적으로 발생하여 마치 환상이나 꿈이 유가 아니면서도 존재하는 것처럼 허망한 현상적 작용이 없을 수 없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본다(觀)'라고 부른다.

 먼저 지와 관의 의지처를 밝혀 보인다는 것은 일심에 의거하여 지관을 수행함을 말한다.

 이 마음(一心)은 곧 그 고유한 본성이 맑고 깨끗한 마음(自性淸淨心)이다. 일심을 가리켜 '진실로 그러함(眞如)'이라고 부르고, 부처의 성품(佛性)이라고도 한다. 또한 법의 몸체(法身)라고도 하며, 여래의 창고(如來藏)라고도 한다. 그리고 법의 영역(法界)이라고도 부르고, 법의 본성(法性)이라고도 부른다.(大46,64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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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반가사유상/어린이문화재청 홈페이지]

 

 요즘 한국불교는 고즈넉한 산사에서 수련을 통해 심신을 치유하고 불교식 생활 등을 실제로 체험 할수 있는 이른바 '템플스테이'를 통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습니다. 한국불교만의 독특한 사상 뿐만 아니라, 음식, 건축양식 등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고 도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도 있어 템플스테이를 체험한 사람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고 합니다. 이렇듯 한국불교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문화산업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전통문화재, 철학, 사상 등이 잘 전승되어 온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이자 대표적인 종교입니다. 이런 한국불교가 가지는 독특한 성격은 어떤 것이 있는지 한국불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불교는 불교의 연기관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발전시킨 특유의 성격을 가진 불교이다.

그런데 과연 인도 불교나 중국 불교와 변별되며 한국인의 특성이 그 속에 녹아들어 있는 한국 불교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근대의 어떤 학자는 "인도와 서역의 불교는 서론적 불교이고, 중국의 불교는 각론적 불교이며, 조선의 불교가 최후의 결론적 불교이다." 라고 하였고, "인도의 원천적 불교, 중국의 분파적 불교에 대하여 한국은 원효, 보조에 의하여 최후의 회통 불교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일반적으로 인도나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 불교의 특성은 일승(一乘)과 일미(一味)의 인식틀로 전개된다는 점, 즉 독창성과 더불어 종합성을 강조하는 측면에 있다고 본다. 이를 '통불교(通佛敎)'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예컨데 다른 나라 불교인들의 인식틀을 보면 자기 종파의 교설에만 충실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불교 사상가들은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어느 종파와 어느 학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어느 종파, 어느 학파에 얽매이지 않았던 근거는 이들의 저술 목록에 잘 나타난다. 이들은 유식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천태가나 선가를 겸업했고, 또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불설에 입각한 융통성 위에서 자신의 학문적 화두를 밀고 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인도나 중국, 일본 사상가들은 자기 종파의 교설에만 충실하고 있다. 그러한 점은 그들의 교상판석의 틀에서 잘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교판으로 알려진 법상종의 3시교판에서는 요의교로서 '해심밀경'을, 천태종의 5시8교에서는 법화 열산시를, 화엄종의 5교 10종판에서는 대승원교로서 법화보다 화엄을 우위에 두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들 모두는 '가장 나중에 오는 장작이 제일 위에 오는' 것 처럼 교판을 통해 자기 종파의 우월성을 표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효는 중국의 교판가들을 향해 "만일 한쪽에만 한결같이 그렇다고 집착하면 두 설을 다 잃을 것이요, 만일 상대를 인정해 주어 자기 설만 고집하지 않으면 두 설을 다 얻을 것이다."라고 갈파한 뒤, 5시 4종으로 판석하려는 견해를 '대롱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격'이라고 비판하고 회통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대해 서양 학자들은 이러한 한국 불교의 특성인 통불교의 '통'이나 회통불교의 '회통'이 "당신들이 즐겨먹는 비빔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불교의 특징은 다양한 개체들이 물리적으로 결합된 비빔밥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삼투된 곰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곰탕은 돼지나 소의 뼈와 살과 양념들이 모여서 무수한 시간 동안 끓는 물속에서 화학적 고투를 거쳐 우러나온 것이다. 이러한 일승과 일미의 인식틀 위에서 정립된 종합성과 독창성이 바로 한국 불교의 특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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