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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과 양명학의 의미와 사상사적 영향

 성리학은 중세 시기 동아시아 3국 모두의 보편적 세계관이 되어 700년 이상을 이어 왔고, 양명학 또한 인간 주체와 실천을 강조하면서 근대적 사유의 싹이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은 명대 이후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교조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양명학 또한 인륜이나 사회기강을 거부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사진 태극도설/네이버 지식백과]

 

 주자학은 특히 중세 봉건왕조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사상적 유연성이나 새로운 발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고착화하는 경향을 보였고, 양명학 또한 개인 주체를 강조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래서 명말 청초에 이르면 양명학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학문 경향이 등장한다.

 

[사진 황종희/네이버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사진 고염무/네이버 지식백과]

 

 그러한 경향의 처음을 연 사람은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이다. 황종희는 양명학의 폐단을 비판하고 개인적 도덕 수양의 한계를 넘어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계몽사상가적 정치 이론을 전개하였다. 고염무 또한 경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세론을 찾으려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훈고학과 비슷한 고증학을 새로운 학문 방법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왕부지는 고대부터 내려온 기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상을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은 대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근대로의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서구의 충격과 그에 대한 대응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크게는 봉건제를 유지하면서 성능이 우월한 무기를 중심으로 서구의 우월한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려는 양무파(洋務派)와 이를 넘어서서 정치,경제의 개혁까지를 주장한 변법파(變法派)가 대립하였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모두 근대 이전까지 사회를 이끄는 사상으로 기능하였으며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늘날 다시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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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학과 양명학의 관계

 양명학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양명학이 주자학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계승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주자학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극복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진 주희/네이버 지식백과]

 

 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약간이 차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봉건사회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는 측면을 중시하여 모두를 이학(理學)이라고 부른다.그러나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관학이었던 주자학의 엄숙주의,귄위주의에 반기를 든 것이 양명학으로서 이러한 변화 과정이 이지(理智)에 입각한 규제에서 서정(抒情)에 입각한 자연주의로, 이치가 바깥 사물에 있음을 인정하는 객관에서 내 마음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주관으로, 전통에서 반전통의 자유주의로 나타났다고 보고, 주희의 이학(理學)과 구별하여 심학(心學)이라고 부른다. 또 일부에서는 크게 보면 후자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양명학의 심학 체계 속에 명말 청초에 유행하는 기학(氣學)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는 입장에서 기학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사진 왕양명(왕수인)/네이버 지식백과]

 

 

 또 다른 문제는 고대 유가사상과 주자학,양명학의 연관에 대한 이해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주희가 성선설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유가의 전통을 순자가 아니라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진 것으로 보았지만 오히려 학문 내용을 보면 주지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순자 사상의 영향으로 이해되며, 이와 달리 왕수인의 학문은 맹자의 양지양능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가 전통에 더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그 밖에도 왕수인 사상과 육상산의 사상에 유사성이 많기 때문에 육왕학(陸王學)이라고 표현을 쓰면서도 두 사상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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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필적/한국민족문화대백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평생 은거했던 서경덕과는 달리 25세때 부터 적극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1530년 사간으로 재직시에 권신들의 배척을 받아 쫓겨났다가 복귀하는 등 정치적으로 여러 차례의 질곡을 겪었다. 말년에는 권신 윤원형 일파의 미움을 받아 강계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주요 저술을 남겼다.

 서경덕이 기철학을 열었다면 회재 이언적은 이(理)의 철학을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로 대표되는 비주자학적 사유를 극복함으로써 조선 주자학의 이론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당시 손숙돈과 조한보 간에 주자학의 주요 개념인 무극과 태극에 관한 편지글이 오가는 것을 보고 이른바 무극태극 논쟁을 제기하여 두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논쟁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 논쟁을 통해 주자학에 대한 불교적,노장적 이해를 비판했는데, 무극과 태극은 이(理)를 지칭한 것이지 기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동시에 이(理)는 형질이 없지만 결코 무(無)는 아니라고 하여 이(理)를 무(無)로 이해하는 노장적 풍조를 경계하여 철저하게 주자학적 사유에 입각하여 무극과 태극을 설명함으로써 주자학의 순수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학문 방법론에서도 조한보가 태극의 본체를 단번에 깨친다는 논의를 비판하고 거경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적 학문론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그는 이(理)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지만 그 실체가 깃들어 있는 곳을 찾는다면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현실적인 곳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상생활을 떠나서 이(理)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학문 수행 또한 일상생활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 이(理)의 절대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는데, 사람과 사물은 형질이 있지만 이(理)는 형질이 없기 때문에 이(理)는 생사와 시종도 없는 존재라고 하여 이(理)를 무시무종의 궁극적 존재자로 규정하는 등 이(理)의 실재성과 주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주자학을 해석함으로써 훗날 같은 이(理)의 철학자인 이황으로 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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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네이버/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우리 선비]

 

 위에 있는 푸른 것(하늘)과 아래에 있는 누런 것(땅)은 모두 의식이 없는 사물이다. 그것들은 해와 달과 산과 강과 똑같이 기의 바탕이 이룬 것일 뿐이며, 영묘한 앎이라는 주체적 작용이 전연 없는 것들이다. 성인이 이치를 밝힘에 있어 어찌 그것들을 아비로 섬기고 어미로 섬기라는 이치가 있겠는가? 오직 위대한 상제만이 모양도 바탕도 없으면서 나날이 여기에 임해 있으며, 하늘과 땅을 통어하고 뭇 사물의 할아비이자 뭇 귀신의 우두머리로서 우뚝하고 환하게 저 높이 임해 있다. 이에 성인은 정밀한 마음자세로 상제를 발게 섬겼으니, 이것이 곧 하늘제사(교제郊祭)가 생겨난 유래이다. 이에 온갖 명신들이 상제의 명을 받들어, 어떤 명신들은 해와 달과 별과 별자리와 바람과 구름과 우레와 비를 맡고, 어떤 명신들은 땅과 곡식과 산과 내와 언덕과 큰 언덕과 숲과 연못을 관장한다. 그 맡은 바 일이 위에 있는 명신을 하늘귀신이라 하고, 그 맡은 일이 아래에 있는 명신을 땅귀신이라고 부른다.

[정약용, '춘추고징(春秋考徵)','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3책]

 

[사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오학론/정약용이 당대의 주요 학문 경향인 성리학,훈고학,문장학,과거학,술수학의 다섯을 들어 그 폐단을 비판한 논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 춘추고징(春秋考徵)/정약용이 '춘추'에 대하여 고징한 저서. 1936년 김성진이 편집하여 간행되었다. 4권. 규장각도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성(性)을 제대로 알아서 밝힌 것은 오로지 맹자 한 분인가 한다. 하늘이 내려준 성은 선(善)과 의(義)를 좋아함으로써 영명이 스스로를 살찌우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기질의 성이 고기를 좋아함으로써 몸이 스스로를 살찌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좋아하는 것을 성으로 규정할 때에만 이 뜻은 제대로 밝혀진다.(중략) 하늘이 주신 이 성은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한다. 한 가지 일에 마주칠 적마다 그 선함과 악함이 바로 앞에 놓여 있으니, 이 성이 향하고자 하는 쪽을 한결같이 따른다면 아무런 잘못이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다.(중략) 만일 이 성이 없다면 아무리 지혜롭기가 신명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평생토록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선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정약용, '염씨고문소증백일초(閻氏古文疏證百一抄)','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3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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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초정(楚亭) 박제가/네이버]

 

 북경의 유리창 좌우 십여 리 및 용봉사 시장 등에 언뜻 보아도 찬란하게 번쩍거리며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 이것은 모두 옛 제기와 옥, 서화 등 기묘한 것들이다.(중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유한 것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을 살리는 데는 도움이 안된다. 모두 불태워 버린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한다. 그 말이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저 푸른 산, 흰 구름은 모두 먹고 입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한다.(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문이 과거 시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안목이 국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불경을 적은 종이를 더럽다 하고 밤색 화로를 더럽다 하여, 점점 문명하고 단아한 세계와 스스로 인연을 끊는다. 꽃에서 사는 벌레는 날개와 수염에서 향기가 나지만, 더라운 곳에서 사는 것은 꿈틀거리고 숨쉬는 모양이 아주 추하다. 만물이 실로 이러하니 사람 또한 당연히 그러하다. 봄볕 같고 비단 같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먼지 구덩이 더러운 곳에 빠져 있던 사람과는 반드시 다른 데가 있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염과 날개가 향기를 지니지 못할가 두렵다.

[박제가, '고동서화(古董書畵)', "북학의(北學議)"]

 

[사진 박제가 북학의(北學議)/네이버/한국의고전을 읽는다]

 

 신은 농사를 관장하는 관리입니다.(중략) 다만 고을 백성이 편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겁게 여기며, 개천과 봇도랑을 법에 맞게 하고, 집 주위를 가지런하게 정리하며, 모습과 언사가 조촐하고 미더우며, 그릇과 의복이 견고하고 갖추어져 있으며, 수목이 번성하고 모든 가축이 잘 자라며, 남자와 여자가 게으르지 않아 각자 일거리가 있으며, 장인(匠人) 장사꾼이 모여들고 도둑들이 물러가며, 다리와 주막과 뒷간도 수리하지 않은 것이 없고, 낚시와 사냥하는 데에 배도 있고 수레도 있으며, 아이들은 역질을 앓지 않고 늙은이는 노래하고 글을 읊조리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것은 모두 근본을 두텁게 하고 농사에 힘쓴 후의 효과로서, 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된 뒤의 일이오니, 중화(中和)와 위육(位育)도 대개 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박제가, '응지진북학의소(應旨進北學議疏)',"북학의(北學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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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네이버/연암집,박지원의 시문을 모은 문집으로 총17권6책으로 구성(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옛것을 본떠 글을 짓는 것은 사물을 거울에 비추는 것과 같으니, 형체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가? 좌우가 서로 반대이니, 어찌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중략) 그러니 끝내 비슷해질 수 없는 것이다. 대체 어찌해서 비슷해지기를 구하는가? 비슷함은 참이 아니다. 천하에 이른바 '서로 같다'는 것은 반드시 '꼭 닮았다'라고 해야 하며, '분별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 또한 '참에 가깝다'라고 해야 한다. 참을 말하고 닮음을 말할 때는 가짜와 다름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박지원,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연암집(燕巖集)"]

 

 본 것이 적은 사람은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생각한다. 만물은 스스로 괴이할 것이 없는데 내가 공연히 걱정을 하고,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함해 댄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덧없이 검은 깃털이 갑자기 흰빛으로 물들고 다시 녹색으로 반짝이며, 햇빛이 비치자 자주색으로 변했다가 눈이 부시면서 비취색으로 바뀐다. 그러니 내가 푸른 까마귀라 해도 무방하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본래 정해진 색이 없는데 우리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심지어는 눈으로 보지도 않고 먼저 마음에 정해 버린다. 아! 까마귀를 검은색에 가두어 버리는 것도 그렇더라도, 까마귀를 가지고 천하의 모든 색을 가두어 버리는구나! 까마귀는 과연 검은색이로되, 이른바 푸르고 붉음이 색 가운데의 빛임을 누가 다시 알겠는가!

[박지원, '능양시집서(菱洋詩集書)', "연암집(燕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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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가득한 별들은 나름대로 세계 아닌 것이 없다. 별의 세계에서 보면 땅의 세계 또한 별이다. 무량한 세계가 우주에 흩어져 있으니, 오직 이 땅의 세계만이 교묘히 그 정중앙에 처할 이치는 없다. 이렇게 보자면 세계 아닌 것이 없고 돌지 않는 것이 없다. 뭇 세계에서 보는 것도 땅에서 보는 것과 같으니, 각자가 스스로를 중앙이라 하고 각 별들을 뭇 세계라 한다. 해와 달과 오행성이 땅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는데, 땅에서 관측하기에는 실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땅을 칠정(七政) 중앙이라고 하면 가하지만, 뭇 별들의 정중앙이라 하면 우물 속에 앉아 있는 자의 소견이다.(중략)

 

[사진 담헌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하늘이 낳고 땅이 길러 낸 것 중에 무릇 혈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똑같이 사람이다. 무리 중에 뛰어난 사람이 한 지역을 다스리니, 모두 똑같이 군왕이다. 문을 두터이 하고 해자를 깊이 파서 영역을 지키니, 모두 똑같이 나라이다. 장보(章甫, 은나라에서 쓰던 갓)와 위모(委貌,주나라에서 쓰던 갓), 문신(紊身)과 조제(雕題,이마에 문양을 새겨 넣던 야만 풍속)가 모두 똑같이 습속이다. 하늘에서 보면 어찌 내외의 구분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각기 자신의 부모를 모시고, 각기 자신의 군왕을 받들며, 각기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각기 자신의 습속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은 중화와 오랑캐가 한가지이다. 대저 천지가 변하여 사람과 만물이 번성하고, 사람과 만물이 번성하여 상대와 내가 드러났으며, 상대와 내가 드러나 안과 밖의 구분이 생겼다.(중략)

 

[사진 의산문답/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다. 왕실이 나날이 낮아지고 제후가 쇠약해졌으며, 오나라, 초나라가 중국을 침략하고 도둑과 반적이 끊이지 않았다.

'춘추(春秋)'는 주나라 책이니, 안팎의 구분이 엄한 것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공자가 바다를 건너 변방에 가 살았다면 중화로 오랑캐를 변화시키고 주나라 밖에서 주나라의 도를 일으켰을 것이니, 마땅히 안팎의 구분과 높이고 내치는 뜻을 갖춘 주나라 밖의 '춘추'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성인인 까닭이다.[홍대용,'의산문답(醫山問答)','담헌서(湛軒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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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조국사 지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지눌의 진심(眞心) 사상 '보저전서(普照全書)

 

 번뇌와 깨달음의 동일한 근본

 지금 말하는 바는 오로지 드러난 형상(相)은 이에 매여있는 일심의 망념(妄念)이 지어낸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곧 삼계(三界)와 생사라는 병의 근본이다. 만약 우리가 무명(無明)은 생겨남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과거의 업(業)은 다 없어지고 새로운 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곧 병을 끊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한 생각의 마음이 병의 근본이며 또한 동시의 도(道)의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실제(實)에 집착하면 그르치게 되고, 공(空)임을 깨달으면 잘못이 없게 된다. 따라서 깨달음은 한마음의 한순간에 있으며, 거기에는 앞뒤가 없다. 이러하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깊이 헤아려서 분명하게 결정을 내리면 이치에 도달함이 매우 가깝게 되기 때문에 비록 말세의 중생일지라도 그 마음이 넓고 큰 자는 역시 마음을 비워 스스로 비추어볼 수 있고, 한 생각의 연기가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아직 깨달음을 확인할 수는 없을지라도 도에 들어가는 기본이다.(152쪽)

 

 올바른 수행방법

 질문: 중생의 업과(業果)인 종자(種子)와 그 종자의 현행(現行)이 여러 겁 동안 훈습해 온 것이 마치 아교풀이나 옻칠과도 같이 단단히 덮여 있는데, 어떻게 단지 일심을 깨달은 것만으로 금방 그것을 끊어 버리고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대답: 만약 그대가 마음(心)과 대상 존재(境)가 실재한다고 집착하고 주관 존재(人)와 객관 존재(法)가 공(空)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오랜 겁 동안 수행하더라도 결국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무아(無我)를 금방 이해하고 사물의 무실체성을 깊이 통찰할 수 있다면 주관과 객관이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니, 확증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센 바람이 날리는 먼지처럼, 급류에 떠내려가는 가벼운 배처럼 쉽게 금방 성취할 수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대들이 일심을 믿지 않고 스스로 어려움과 장애를 만드는 점이다.

 또 "어째서 번뇌를 끊을 필요가 없는가?"라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만약 살생이나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거짓말이 다 일심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처하는 곳마다 문득 고요하게 될 것이니, 다시 끊어야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심을 이해하기만 하면 온갖 존재는 저절로 환영처럼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이미 형태가 없으니, 법이 어찌 형상을 갖겠는가? 종밀의 '법집별행록'에 설명된 단혹(斷惑)의 뜻에 따르면, 본성(性)과 형상(相)이 함께 비추인다. 이것이 '끊음이 없는 끊음'이다. 끊어도 끊음이 없는 것이 진정한 끊음이다.(152~153쪽)

 

 진심(眞心)과 체용의 불이(不二)

 진심(眞心)의 묘한 본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고, 편안하고 고요하며, 참되고 일정하다. 이 참된 본체 위에 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그 묘함을 얻는 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사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음은 온갖 경계를 따라 구르니, 구르는 곳마다 진실로 신비롭다. 흐름을 따르면서 그 본성을 알아차리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

 그러므로 움직이고 걸을 때나, 밥을 먹고 옷을 입을 때나,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놀릴 때나, 왼쪽을 돌아보다가 오른쪽을 엿볼 때나, 그 어느 때나 다 진심의 묘한 작용의 나타남이다. 범부들은 미혹되고 혼동되어서,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는다고 생각만 하고, 밥을 먹을 때는 단지 밥을 먹는다는 생각만 하여, 무슨 일을 할 때나 항상 단지 드라난 모습만을 따라 전전한다. 그러므로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속에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어도 알지 못한다. 만약 그 본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작용하는 중에 있어서 결코 어둡거나 잊어버리지 않는다. [진심직설(眞心直說],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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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거듭된 사화로 세력이 세력이 많이 꺾인 사림파는 지방에 은거하면서 서원과 향약 등의 향촌 활동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주자학의 근본 문제를 깊이 연구하는 등 수준 높은 학문 활동을 통해 한층 더 심화된 학문적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시대 주자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부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시작을 장식한 인물이 바로 화담 서경덕이라고 할 수 있다.

 서경덕은 송도에서 태어나 58세로 자신의 서재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동안 출사하지 않고 화담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화담선생으로 불렀다. 그는 18세 때 '대학'을 읽다가 사물을 궁구하는 격물(格物)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때부터 벽에 사물의 이름을 붙여 놓고 궁리를 시작하는 등 격물을 중시하는 학풍을 수립했다.

 '격물(格物)'은 사물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물과 직접 접촉하는 실천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정신적 긴장을 요구하는 '거경(居敬)'과 함께 주자학의 근본적 학문 방법 중의 하나로 서경덕은 이 같은 방법론을 통해 종달새가 날아다니는 현상부터 온천과 바람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 대한 독창적이고 합리적인 해설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온천을 설명하면서 음에 속하는 물은 성질이 차가울 수밖에 없는데 온천이 뜨거운 까닭을 두고 "구체적인 사물의 특징은 음양이기의 배합에 따라 결정되며 음기인 물을 땅 속에서 있는 양기가 건드려서 온천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또 부채를 흔들면 바람이 발생하는 현상을 두고 "부채가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천지 사이에 가득한 기를 부채가 움직이게 한 것일 뿐"이라고 해설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주자학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기(氣)를 가지고 만물을 설명하는 입장을 지켰는데 '태허설', '귀신사생론', '원리기', '이기설' 등의 저술에는 기철학과 관련된 그의 주요 주장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기를 자기 원인에 의해서 존재하면서 자기 운동의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근원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기일원론적 세계관을 수립했다. 그가 기를 주자학의 또 다른 중요한 범주인 이(理)보다 앞서는 존재로 설정하고 이(理)를 부속물 정도로 서술하면서 기의 영원성을 주장한 것은 주자보다 장재와 소옹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사색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직접 탐구하는 격물을 학문 방법으로 중시한 것은 상대적으로 독서와 거경을 더 중시했던 주자학의 일반적인 경향과 구별되는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를 근원적 실재로 규정한 것은 관념이자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理)를 앞세웠던 대부분의 학자들에 비해 훨씬 덜 사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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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암 조광조/위키백과]

 

 조광조는 후세의 사림파 유학자들로부터 계파를 초월하여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잇는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당시의 군주였던 중종에게 중용되어 중앙정계로 진출하자 "내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내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든다."는 구호를 내걸고 유교의 정치, 곧 지치(至治)를 당시 조선 사회에 실제로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개혁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그는 사림파 자체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사림파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고 있었던 향촌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주자가 정리한 향약을 보급해, 향촌 사회를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기틀을 수립하였다.

 아울러 주자학적 이념에 충실한 인재들을 선발했으며, 사림파의 정치적 기반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일종의 추천제인 현량과를 설치하여 향촌에서 성장한 신진 학자들을 대거 발탁하는 등 다방면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광조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관학파 유학자들의 비리를 공격하고 그들의 부당한 포상을 삭제하는 한편, 국가기관이지만 도교적 풍습에 근거하던 소격서를 혁파하는 등의 공격적 개혁을 진행시켰다.

 조광조의 이 같은 개혁은 정치적으로는 훈구파 세력의 과도한 국가권력 독점을 방지하려고 한 것이었으며, 학술적으로는 주자학 이념에 입각하여 관학파 유학자들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함으로써 주자학 이념에 입각하여 관학파 유학자들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함으로써 주자학 이념에 걸맞은 사회를 조선에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기존 훈구파 세력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기묘사화라는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조씨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조작하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파 유학자들이 희생당하면서 사림파는 다시 시련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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