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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행복 철학, 두 마음

러셀은 어떤 일을 계속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의식을 여러 가지 문제 해결에 착수하게 만든다. 그는 이 멀티태스킹이 우리한테도 가능한 얘기라고 말한다.

 

예술은 의식과 무의식의 긴밀합 결합이다. -장 콕토(Jean Cocteau)

 

어느날 아침 눈을 떴는데 몇 주 동안 갈피도 못 잡고 있던 문제의 답이 번뜩 떠오른 적 있는가? 지난달 그 문제 때문에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고민하던 때를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 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을까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러셀은 이 문제 해결 과정이 전혀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일종의 문제 해결 기계처럼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풀지 못한 문제를 부여안고 걱정 끝에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또다시 불행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난다. 이는 마치 괴로운 습관과 같다. 골치 아픈 문제는 여전히 고집스레 해답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다시금 괴롭고 언짢은 마음으로 잠이 든다. 단순히 문제 해결에 실패하는 것뿐 아니라 너무 기진맥진해서 해결할 힘조차 소진돼버리고 만다. 심지어 낮 동안 다른 문제들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결국에는 문제 자체를 그냥 내버려두지도 못하면서 어떤 통찰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이도저도 아닌 일종의 평형 상태에 도달한다. 다소 몽롱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한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회의 준비를 하고 작년에 했던 일과 대동소이한 일을 하면서 평정심을 찾으려고 한다.

 

이상의 내용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러셀은 전혀 달랐다. 복잡한 문제 해결에 관한 한 러셀은 수학의 달인이었고 윤리학의 도사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단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가장 최대치의 집중도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생각에 임한다고 한다. 그런 다음 자기 무의식에게 명령하기를 "수면 아래에서 작업을 진행하라"고 한 뒤 몇 달 동안은 그 문제에 대해 또다시 생각하지 않는다. 나중에 그가 자기 머릿속 서류 정리함에서 그 문제를 자아내면, 이미 무의식이 그 서류를 꺼내 말끔히 해결한 다음 다시 서류함에 정리해서 넣어놓은 걸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리는 단지 러셀처럼 우리 생각이나 마음을 개념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러셀의 방법을 찬찬히 살펴보라. 실제로 이 과정이 적용되는 예는 상당히 많다. 가령 6개월 전에 작성했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꺼내서 다시 봤더니 구조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면 당신은 이미 의식적 사고 없이 문제 해결 과정을 진행시킨 것이다.

 

러셀의 방식을 적용하려면 다음 요소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1. 계획 수립 : 혹시 몇 주 동안 자신의 결정을 소금에 절이듯 시간 속에 놔둘 생각이라면 전 과정을 일찍 시작해야 한다.

2. 강도 : 러셀은 문제를 마음대로 갖고 놀라는 말을 했던 게 아니다. 초기 처리 과정을 시행하는 데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강도 높게 쓰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문제가 뭔지 취합해서 정리해두고 해야 할 일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 정도는 처음부터 필요하다는 뜻이다.

3. 훈련 : 계속 방해를 받는다면 무의식은 제 할 일을 해내지 못한다. 자신감을 가지고 무제를 그냥 내버려두라.

4. 현실성 : 우린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우리의 무의식 처리 장치가 우리 자신보다 더 나을 리는 없다. 무의식 장치는 그저 훼방받지 않고 정신 산만해지지 않는 상태의 우리 자신일 뿐이다. 말도 못하게 어려운 문제는 전문가에게 일임하고 싶겠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는 미지수다.

 

그래도 시도해보자. 분명 효과가 있다. 혹시 실패할 경우 도움을 청하거나 다시 본인 능력들을 불러 모을 회의를 소집하면 된다.

 

리포트를 쓰거나 학술적 연구를 진행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작성해야 할 때, 일단 일에 착수하기 전에 몇 주 동안 대략적 밑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들이라. 전체적인 그림을 쭉 훑어보거나 다른 이들에게 조언을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개선이 필요한 데가 어딘지 확인하라. 그리고 최소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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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행복은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그네들의 행복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게 있다.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오한 행복을 누리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바라건대, 나 동물들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네.
그 얼마나 느긋하고 자족하는 모습들인지.
-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러셀은 월트 휘트먼의 시로 책의 서두를 연다. 휘트먼이 왜 동물을 좋아하는지에 관한 이 시는 한편으로 러셀의 마음을 대변한 것임에 틀림없다. "동물은 자신의 상황을 걱정하거나 한탄하는 법이 없다. 어둠 속에 잠 못 이루며 자신의 죄 때문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근본적으로 이 시의 내용은 러셀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일종의 행동 방침이다.

 

물론 동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나는 애완용 거북이를 한 마리 키우고 있는데, 내 생각에 이 녀석은 나랑 같이 텔레비전으로 럭비 경기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어쩌다 보니 나는 그렇게 믿게 됐지만 아내는 거북이의 취향 같은 걸로 왈가왈부하거나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아니다.

 

휘트먼이 언급하는 동물들을 보라. 그네들의 초연한 모습은 실로 우리에게 큰 자극이자 가르침이 된다. 우리는 문제 해결에 골머리를 썩으며 평생을 징징댈 필요가 없다. 많이 배웠거나 문제 해결 의지가 있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돼지는 자기 배설물 위에 누워 뒹굴다가 어느새 소시지가 되고 만다. 자기 분뇨 위에 뒹구는 것도, 소시지가 되는 것도 우리가 돼지더러 축하할 일이라고 얘기할 만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마치 돼지처럼 자기 배설물 위를 뒹굴면서도 개의치 않고 자족하는 존재라면, 어느 누구를 해코지하지도 말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다가 순리대로 도살장에서 죽임을 당해 장렬히 소시지가 되고 말라. 도살장에서 죽든, 럭셔리 호텔에서 스트립 걸 다섯 명을 옆에 끼고 코카인을 들이마시다 죽든 어쨌든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이것이야말로 러셀의 관점에서는 총명하게 행복해지는 데 완벽히 다가서는 게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앞으로 10분 동안 잔뜩 심각하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 중인가? 세상만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사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인생의 핵심은 무엇인가? 자, 조심스레 단언컨대 10분이 다 지나도록 당신은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더 행복해지지도, 더 만족스러움을 느끼지도 못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아, 배고프다, 저녁으로 뭘 먹을까? 오늘은 왠지 인도 음식이 날 부르는군. 짐한테 문자나 보내봐야겠다. 짐이 별일 없으면 만나야겠지. 부다페스트로 여행 갔던 얘기도 듣고 싶군.' 이 생각 덕분에 결과적으로 친구와 우정이 쌓이고 기분 좋은 식사를 하고 중부 유럽에 대한 얘기도 듣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식의 즐거움은 겉치레로 보이거나 깊이가 부족한 게 아니냐고?

 

이런 질문에 러셀이 둘려주는 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세계에서 느끼는 즐거움,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역량껏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행복의 근원이 된다.

 

쾌락주의는 지나친 방종이나 탐닉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 주변의 세계에서 기쁨을 취하는 것이다. 방금 유럽 여행을 하고 돌아온 친구가 있는가? 오랫동안 못 본 친구가 있는가? 지금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만나라.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 책의 다음 장은 묵묵히 기다려줄 테니까.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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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게 하나도 없는 책, 지루한 책, 재미없는 책... 모두에게 이런 책이ㅣ 한 권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 책들을 통해 얻는 교훈 하나. 스스로를 표현하는 재주는 말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다.

 

더운 사람이 추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알렉산드로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이제 우리는 바이런식 불행에 대한 광범위한 탐색 말미에 다다랐다. 아떤 면에서 보면 불행하다는 게 심오하거나 고상하다고 여기는 것, 행복한 사람들은 단순하다고 보는 견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감정은 위대한 사상가들을 위한 몫이라고 여기는 것 등은 모두 어리석은 생각이다. 러셀은 이런 생각들이 우리 스스로 내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리고 모든 게 더 좋아질 수 있는 외부 세계의 증거를 외면하고 새롭거나 뜻밖의 사건이 좋은 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근거를 무시하는 것도 우라의 어리석음을 키운다고 말한다.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해보는 게 집에 가만히 앉아서 답도 없는 문제를 붙들고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러셀의 시대엔 인터넷도 블로그도 없었지만 그는 분명 인기 작가였다. 그가 내놓은 결과물이 입증하듯 러셀은 소재가 고갈되거나 글길이 막히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글은 경험 덕분에 세상에 굴러 나왔다. 예컨대 러셀은 사람들이 당신 의견을 인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다. 그는 이미 예전에 자기 의견을 표명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투옥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글을 쓰고는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러셀은 이런 조언을 한다. "뭘 써보겠다고 애쓰지 말라. 차라리 쓰지 않으려고 애써보라. 세상 속으로 나가라. 해적이 되든 보르네오 섬의 왕이 되든 러시아 노동자가 되든 하라."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뭔가 쓸 거리가 생길 것이라고 러셀은 충고한다.

 

지난 80년 동안 우린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건 아닐까? 그 당시에도 러셀이 제안한 경험 가운데 훌륭한 문학으로 탄생된 건 세 번째 제안 하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불굴의 의지로 조사해서 나온 결과물 <수용소 군도>가 그것이다. 중요한 건 세상을 삐ㄸ가하게 보며 비난하기 이전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라는 러셀의 조언이다. 그냥 자기 머릿속에 담긴 내용을 무턱대고 쓰진 말라.

 

블로그 세계에서 확연히 눈에 띄는 부분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알고 싶다는 욕구를 뒤로 제치고 혼자 치고 나가는 경우다.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뭐, 아무거나 끼적거리는 거야 그저 소일하는 방법으로는 괜찮다. 하지만 러셀이 지적하듯 직접 경험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못한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바라만 보면서 자기 내부에 내내 갇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함정에 빠뜨리고 올가미로 옥죄고 있는 꼴이다.

 

러셀은 작가 지망생이 해적(물론 권고 사항은 아니다)이나 보르네오 섬의 왕(국경 재편성이라는 문제 때문에 만만찮은 일이긴 하지만)이 된다면 "자신의 글쓰기가 스스로에게 하찮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작가 지망생은 뭔가 다른 할 일을 찾을 가능성도 있다. 글쓰기 말고 다른 데서 재능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현대이ㅡ 예를 들어 러셀의 말을 다시 곱씹어보자. 러셀이 살던 시데에는 누군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장 정치판에 뛰어들어야겠다고 말한다면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졸업 후 바로 정치에 입문하는 전문적인 정치 계층이 있다. 국회의원들이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할까? 물온 이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제기되지만 찬성하는 쪽에서 노놓는 논점 또한 확실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할 때 경험은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며 우리를 보다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자선 단체에 돈을 보낼 게 아니라 시간을 투자해서 직접 자선 활동에 동참해 보라. 봉사활동은 기부금만큼이나 가치 있으며 다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귀중한 무엇인가를 돌려준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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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 우리는 질투와 선망이라는 정치학을 발동시키길 좋아한다. 힘든 일이 생기면 당연히 약이 오르고 화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을 두고 타인을 비난한다고 해서 행복감이 더 커지지는 않는다.

 

평균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건
평균을 깎아먹는 짓이다.

-윌리엄 M 와이넌스(William M. Winans)

 

최근 영구에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부활하는 조짐이 보인다. 주된 표적은 이민자들이다. 질투에 푹 절어 있는 데다 자기들 눈에 부정하다고 보이는 것을 바로잡아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괜히 이민자들을 걸고넘어지는 이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러셀의 말대로 우리 모두는 "숲에서 길을 잃었다". 그 숲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한편으로 보면 불평등이 질투를 양산하는 게 맞다. 러셀은 만약 불평등이 실재한다면 질투를 사라지게 하는 게 가능하거나 올바른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불평등 상황이 눈에 띄는 순간 그 불공평함을 없애는 것 외에는 질투를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 얘기는 질투를 사라지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면 정의가 실현될 거라는 환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말하자면 이 환상은 고작해야 "최악의 가능성에서 나올 만한" 어쭙잖은 정의다.

 

불행한 사람들이 보다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게 만들기보다는, 운이 좋은 사람들이 덜 즐거워지게 만드는 데 집중하는 그 어떤 정의 체계도 결코 옳지 않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어떠한가. 자동차 보험에 들지 않는 방법으로 돈을 절약하는 사람들은 경찰들이 웬만해선 자기를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단순히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다. 혹시나 그들이 내 차 후미를 들이받아 박살내기 전에 어떻게든 그 무책임한 사람들의 기쁨을 조금씩 줄이는 게 적절한 대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행복을 보호하기 위해 남의 행복을 깎아내리는 건 불행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방편으로서 사용 가치가 있는 일반 원칙이다. 말하자면 낮은 수준의 대응책이다. 일단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 있는 것만큼 흡족한 일은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뤄내는 성취는 보통 우수리를 잘라버리는 현상을 낳는다. 질투심에 눈먼 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평범의 범주로 끌어들인다. 0과 1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1로 올라가기보다는 뒤에 붙은 숫자가 무엇이든 불문하고 모두 0으로 끌어내려지는 셈이다.

 

톰 피터스(Tom Peters)와 로버트 워터맨(Robert H. Wateman)이 쓴 '초우량 기업의 조건(In Search of Excellence)은 거의 30년간 경영서적계의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초판 발행 후 4년간 약 300만 부가 팔린 책이다. 피터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초우량이라는 수식어를 제대로 구체화시킨 43개의 기업을 조사해 그 발전의 근간을 책으로 정리했다. 다른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아 따라 할 수 있도록 초우량 기업의 조건을 포착해보자는 게 피터스의 의도였다.

 

하지만 그의 동기 부여가 썩 훌륭했던 건 아니다. 출판 20주년 기념식에서 피터스는 이런 말을 남긴다. "나의 계획은 바로 이거였다. 내가 진정, 매우 깊이, 극심하게 열 받았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피터스는 다른 경영 전문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와 전직 미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s) 때문에 짜증이 났던 것이다. 드러커는 사회 구조에 너무 지나치게 호의를 보였고 맥나마라는 회계 원칙을 전쟁 관리에 도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둘이 만들어낸 체계는 당시의 표준적 관례로 자리 잡아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던 터라 피터스 입장에서는 영 마뜩찮을 뿐이었다.

 

그래서 피터스는 드러커와 맥나마라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사를 쓴느 대신 책을 출판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상황이 더 좋은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을 써서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을 분발케 하는 쪽을 택했다. 애초의 동기가 칭찬받을 만하진 않지만 결국 똑똑한 선택을 한 셈이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잡담과 쑥덕공론은 누가 뭘 아주 잘했느니, 그 정도면 당연히 상을 받을 만했느니 하는 훈훈한 칭찬이나 덕담과는 거리가 멀다. 나보다 일을 덜 한다느니, 얄밉게 더 많이 챙겨 간다느니 하는 얘기가 주를 이룰 것이다. 그런 뒷공론에 괜한 마음고생하지 말고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들고 직접 상사를 찾아가라. 그리고 온 사방에 독기를 퍼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연습을 해보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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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상아탑에 바쳤던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우리한테 들려줄 굉장한 조언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가 내민 건 임시변통의 응급조치나 죽효약이 아니었다. 성질 급한 우리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다소 특별한 처방이었다.

 

매사에 가능한 한 단순하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은 수준에서 적당히.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러셀은 철학이 엘리트들의 훈련법이라고 믿었다. 자기 입장에서 보면 철학은 대체로 엘리트한테나 해당 사항이 있는 분야였다. 더 너른 세계를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용적 목적으로 활용해서 어떤 결과를 얻겠다는 건 도통 러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비친 1920~3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에만 온통 관심을 쏟았고, 당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생각하는 바가 곧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모습은 현대의 우리 모습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중이 사상가들의 견해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이 러셀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러셀은 신문 칼럼을 시작으로 교육, 종교, 결혼 등에 관한 책을 거침없이 써낼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즈음에는 그간 러셀의 손과 머리에서 나온 글줄기가 엄청난 방류량을 보여줄 정도였다.

 

러셀의 활발한 저작 활동을 두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이해시킨다는 명분하에 '지나치게 단순화'한 글을 남발한 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러셀의 글쓰기 작업은 곧 대중화 작업이었다. 지나친 단순화와 대중화 사이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러셀은 자기 인식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이 책에서는 그 어떤 심오한 철학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넌지시 건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과감히 바라건대, 행복의 부재로 고통받는 뭇사람들이 자기 상황을 진단하고 탈출 경로를 찾아냈으면 한다."

 

러셀은 자신의 논리를 쓸모없는 간략 정보로 압축하지 않는다. 그의 책은 우리가 대가를 치르고 손에 쥐는 그런 종류의 행복을 전해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의 우울함을 거둬가지도 않는다. 하루에 다섯 번 웃는 방법이라든가 재미있게 사는 열 가지 기술을 전해주는 것도 아니며 아주 확실한 삶의 안전장치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오늘날의 축구 감독과 CEO들은 직업적 측면에서 자기만의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도 '인생철학'이랍시고 '절대 사과하지 않기' 같은 신조를 품고 사는 꼴통들이 있다. 이런건 철학이라기보다 역겨움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러셀은 대중을 상대하면서 함부로 성공을 약속하는 덫에 빠지지 않는다. 어려운 개념에 쉬운 꼬리표를 붙이지 않고 쉬운 결과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행복을 얻는 게 쉬운 일이라는 확신을 주지도 않는다. 러셀의 책은 패배할 공산이 클 수밖에 없는 험한 인생 전투를 상정하면서 이를 이겨내자는 의지를 공고히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낼 행복의 '정복'을 약속한다. 러셀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고되고 힘든 전투이자 가장 혼란스러운 문제, 다시 말해 행복을 위한 고군분투를 마냥 단순화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러셀을 통해 보장받는 것은 훨씬 풍요로운 미래다. 그가 제시한 미래는 '명료한 사고'와 '결론에 도달하기'라는 방법을 통해 가능하다. 논리의 가치, 사고를 통제하는 치료적 가치, 쉬운 해결법을 거부하는 자세가 바로 러셀의 방식이다.

 

오늘날의 행복은 산업과 같다. 말하자면 러셀은 우리 인생에서 행복 산업의 잠재력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잡지 기사들이 우리를 괴롭혀가며 읊어대는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메시지를 전해준다.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내용으로 우리 눈과 귀를 사로잡던 텔레비전 프로그램과도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적어도 러셀은 우리를 어른으로 대우해주면서 우리 스스로도 자신을 어른 취급해야 한다는 걸 일깨워준다.

 

당신은 자기계발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집어 드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년 동안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 책, 잡지, 인터넷, CD 등을 바로보던 시각을 달리해보라. 그리고 그 수많은 자료들이 영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온다면 과감히 던져버리라. 최소한 책장에 빈 공간을 확보하는 소득은 얻을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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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아이를 낳아야 할까? 당신이 포기한 인생을 자녀가 대신 완성시켜줄 거라는 기대를 하는가? 러셀은 이런 나태한 기대를 하는 사람들을 향해 따끔한 주의를 준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갖는 비결:
상황이 이렇게 저렇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잘 돌아가리라 기대하지 않기.

-신디 추팩(Cindy Chupack)

 

러셀이 본 부모와 자녀의 관계. "열에 아홉은 양쪽 모두 서로가 불행의 원인. 백에 아흔아홉은 최소한 한쪽에게 불행의 씨앗." 풍자 언론 '어니언(The Onion)' 신문은 2007년 보도에서 미국의 부모 95퍼센트가 자녀를 학대한다는 가상의 결과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저녁 식사 전에 과자 못 먹게 하기'처럼 정도가 덜한 위반부터 '원하는 걸 절대 못 갖게 하기', '장기간 무시하기' 같은 보다 지독한 위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대가 유형별로 기록돼 있다."

 

호르몬 넘치는 아이들의 감정을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애초에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조절할 수 있다. 러셀은 현대 어머니들의 딜레마가 1930년대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분석 내용을 제시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삶이 좋지만 정말로 아이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요즘 추세는 '몽땅 한꺼번에'가 가능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실제 현실 상황을 반영하기보다는 언론에 기세 좋게 등장하는 슈퍼맘이 보통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구조로 흘러간다.

 

여기서 러셀은 일하는 미혼 여성을 언급한다. 이 여성들은 자기만의 수입이 있고 사회적 지위도 갖추었으며 안락한 생활을 하고 흥미로운 자극을 얻을 기회도 많았다고 한다. 엄마가 된다는 건 아마도 이상의 여러 가지 중 적어도 몇 개는 사라진다는 뜻이다.

 

"엄마가 된 여성은 집에 묶여 있다. 자신의 재능과 기술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수백 수천 가지 사소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를 받는다... 자신의 모든 매력과 7할 이상의 지성을 단기간에 잃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낮 동안의 골칫거리와 자신의 수고에 대해 말하는 여성은 성가신 사람이지만, 그조차도 말하지 못하는 여성은 정신이 딴 데 팔린 사람이다."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려줘 유감이긴 하다. 장담컨대 꼭 이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러셀은 부모와 자식 간의 특별한 유대를 저버리라는 말을 했던 게 아니다. 하지만 단지 사회가 옳은 일이라고 정한 기준 때문에 자녀를 위해 자기 인생 전부를 희생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말라고 전한다.

 

이 말이 너무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건 러셀이 의도한 게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유대가 서로를 만족시키는 요인이자 행복의 훌륭한 원천이라는 것이 곧 러셀의 논리이다. "심리적으로 볼 때 '부모됨'은 인생이 제공해야 하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지속적인 행복을 선사할 수 있다." 러셀은 부모와 자식 간에 정서적 연대가 없이는 이런 행복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덧붙인다.

 

러셀은 아이를 가지라고 권한다. "상황 때문에 이 행복을 멀리하고 있는 경우, 절실한 내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채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개인의 성취를 희생하면서 자기 삶을 자녀에게 헌신하는 풍조는 지지하지 않는다. 아이가 없을 때 본인이 행복하다면 그게 옳은 삶이다.

 

부모로서 시간을 보낼 때 장을 보러 간다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을 처리하는 데만 정신이 팔리기 쉽다. 그러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쪼개보라. 그러면 자신의 존재를 새삼 돌이켜볼 수 있고 진정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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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괴로운가? 혹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우유부단함이라는 증상이 나타난 건 아닌지 돌아볼 때다.

 

설령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 뒤에는 평온함이 따른다.
-리타 메이 브라운(Rita Mae Brown)

 

"보다 나은 인생철학과 정신 수양으로 걱정이라는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러셀이 전한 이 말에 우리 모두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낙제생 같은 기분이 든다.

 

러셀은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 훈련을 한 사람이다. 평화주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던 사람, 심심풀이로 철학책을 쓴 사람, 1 더하기 1은 2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노놓은 총 400페이지의 철학적 성과물이 단 두 줄짜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때문에 뭉개진 사람이 바로 그다.

 

낙담과 좌절이 그의 친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보통 사람이라면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을 것 같지만 러셀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부딪힌 매 상황은 노력해서 돌파해볼 가치가 있는 도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러셀의 해결책은 다소 귀찮ㄴ고 짜증나는 구석이 있다. 대단히 효과적이면서도 우리로선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건 그런 고민에 어떤 목적이 있을 때뿐이다. 러셀은 이렇게 설명하면서 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평범한 나날의 일상적인 문제들을 차단한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러셀의 말은, 심각한 중병인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병에 대한 걱정을 아예 차단한다는 뜻이 아니다. 새벽 두 시에 찾아온 통증에 초조해하며 걱정만 할 게 아니라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가야겠다는 고민을 하는 게 더 낫다고 부르짖는 중이다.

 

문제가 생기면 가능한 한 모든 정볼을 수집해 잘 분석해본 다음 결정을 내리고, "새로운 사실이 대두되지 않는 한 결정을 번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단계는 생각 그만하기다. "우유부단함만큼 고단하고 소모적인 건 없다. 망설임처럼 무익한 건 없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고 자기가 내린 결정을 믿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라. 러셀은 걱정 금물과 자기애 기술을 무대 공포 치유에 사용했다. "내가 연설을 잘하든 못하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느끼도록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우주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제 할 일을 할 테니까."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러셀이니까 그렇게 말하기 쉽겠지.' 그래도 일단은 러셀이 스스로에게 처방한 나름의 특효약을 살펴보자. 러셀은 다음의 속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1. 겸손. 당신은 온 세상이 주목할 만큼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내일 당장 거리에서 마구 날뛰며 내키는 대로 감정을 터뜨린다고 해도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당신 모습을 찍어 제보하지 않는한, 지역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리기 힘들다. 그러니 온 세상이 자기에게 집중할 거라는 부담에서 벗어나라.

 

2. 확신. 다신이 내린 결정은 옆 사람의 말에 혹해서 나온 일시적 결과물이 아니다. 자기 확신을 가지라.

 

3. 성실. 어떤 일을 하기로 정했으면 착실히 하라. 설령 성실함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라 해도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러셀이 그런 사람이었다.

 

4. 통찰력. 당신이 수집한 정보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감정에 충실한 결정을 뒷받침해주는 그저 그런 잡동사니가 아니다. 종종 루리는 어떤 것이 진실이라는 걸 알지만 대면하기 껄끄럽다는 이유로 그 진실을 슬쩍 무시해버리곤 한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꺼이 재고해보는 의지와 열린 마음이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결정에 만족한다는 걸 확인하는 방법일 뿐이지 자신이 옳다는 걸 확인하는 방법은 아님을 명심하라.

 

영국의 전직 수상 존 메어저(John Major)의 습관 한 가지. 그는 결정을 내릴 사안이 생기면 종이 한 장을 세로로 반을 접어 한쪽에는 찬성, 다른 쪽에는 반대에 관한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우리 마음속에서 찬반이 다투는 문제가 있다면 이 방법을 사용해보라. 꽤 유용한 방식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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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우리가 느끼는 불행의 대부분이 경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도 주지 못하는 하찮은 결과물에 목숨을 걸면 우리 삶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혹시 이런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면 정말 유감이다.

 

결혼과 일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조언을 구하는 남자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글로리아 스테이넘(Gloria Steinem)

 

러셀은 사무실 업무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나 사용할 법한 언어를 써서 사무직 근로자들의 고충을 표현한다. "본질적으로 하찮은 일에 품위를 부여하기."

 

러셀은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1930년대의 평범한 사쿠직 직원들의 단상을 제시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1930년대 직장인들은 휴일에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를 챙겨 갈 필요는 없었다. 러셀은 출세를 위한 사다리가 있다는 생각, 이 사다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반기를 든다. 그 사다리는 주변 사람보다 더 성공하겠다는 눈물겨운 발버둥질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러셀의 눈에 비친 직장인들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서둘러 출근하고 밤늦게 귀가해 "만찬을 위해 옷을 차려입을 시간에 딱 맞춰"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생활을 즐기는 척 한다. 1930년대의 모습이다.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외로워지고" 아내나 자녀들이 뭘 하는지 도통 모른다. 휴일이 되어도 일 생각만 하고 있다.

 

왠지 익숙한 얘기 같지 않은가? 만찬을 위해 옷을 차려입는 부분만 배고 나머지 모두 현대인에게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우리는 일과 생활의 균형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일과 생활을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그럴듯한 장치를 파는 회사도 종종 등장한다. 그건 어디까지 그 회사의 주장이다. 이 기계들은 휴일을 맞아 해변을 찾은 당신에게 사장의 이메일을 고이 전해줘 당신의 휴식을 망치도록 고안된 것들이다.

 

공중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 받는 소리를 듣는 일이 자주 있진 않지만 어쩌다 경험하게 되면 상당히 당혹스러운 상황이긴 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이 쫓아다니는 경우다.

 

업무를 가속화하기 위해 소프트웨어를 설치한다는 말은 어떤가? 그건 당신이 일을 더 빨리 마친다는 뜻이 아니다. 애석하지만 더 많은 업무를 맡게 된다는 뜻이다.

 

일과 생활의 진짜 균형은 우리 머릿속에서 비롯된다. 휴대전화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끄고 마음까지 끌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충분히 행복을 담보한다.

 

우리가 감수하고 희생해야 할 건 무엇일까? 행복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 눈에는 돈과 지위를 희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사업가의 종교와 영예는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다짐과 요구다. 그래서 그는 기쁘게 고통을 감수한다." 돈은 어느 정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보다 폭 넓은 차원이 아니라 돈과 권력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겨다줄 뿐이다.

 

우리는 사업가, 고도성장, 모험가, 억만장자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조사에 다르면 예상과 달리 수많은 군소 기업체들이 기업 성장을 그다지 원치 않는다고 한다. 소규모 회사의 사업가들은 자녀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저 조금 더 안정된 생활 속에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할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들의 바람을 창피하게 여기는가?

 

주변의 전원을 끄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신경을 끈 것이다. 일도 안 하고 일에 대한 얘기도 안 하고 일 걱정도 안 하는 시간을 가질 거라고 자기 자신과 가족들에게 약속하라. 전화기도 끄고 컴퓨터도 끄라. 당신뿐만 아니라 기계들도 한 번씩은 전원을 끈 상태가 필요하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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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우리는 자기 한계 내에서 하루하루 일하고 놀고 살아간다. 스스로를 한계 밖으로 밀어붙이는 건 더럭 겁이 나기도 하고 사실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행복의 가능성을 손수 밀어내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열망은 곧 우리의 가능성이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일하는 데 기쁨이 있는가? 우리는 '기쁨을 통한 힘'(KdF, Kraft durch Freude. 나치 독일에서 조직된 대규모 국가 관리 레저 기관. 노동자들의 여가 시간 및 활동 조직을 목적으로 함)이 나치에게 도용당했던 세상에 산다. 비슷한 고무책은 러시아, 중국, 동유럽의 공산주의 세대에게 매우 고된 일을 위임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러셀은 열심히 일한 뒤 얻는 기쁨, 즉 노동의 즐거움이 가혹한 폭군보다는 기업가들의 몫이었던 시대에 살았다. 그래서 일이나 노동에 대한 러셀의 시각은 현대인보다 더 긍정적이다.

 

러셀은 러시아의 젊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설명하는 글을 쓰기까지 했다. "서구권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 지성들은 자신의 대단한 능력에 걸맞은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불행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젊은 지성들은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러시아에서 가장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잠재력에 도달할 기회를 제공하고 우리 자신도 기회가 올 때마다 잠재력에 도전함으로써 우리의 행복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행복 총합을 증가시키자는 게 러셀이 말하는 핵심이다. 자기 능력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내던 한 명의 러셀 덕분에 우리는 기쁨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도, 중국,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죽어가거나 평생 글 읽는 법도 못 배운 채 살아가는 수천 명의 잠재적 러셀들이 있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뼈아픈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완벽한 치료책은 없지만 병을 진단하고 교정하는 힘은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서구의 젊은 남녀들 사이에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냉소주의는 안락함과 무력감의 합작품이다." 러셀의 말에 강한 반론이 제기된다 해도 어쨌든 이 말은 여전히 주효하다. 무력감은 성가신 게 없고 만사가 귀찮다는 뜻이고, 안락함은 염려하는 것도 신경 쓰는 것도 없다는 뜻이다.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 1999년부터 중국의 학생 수가 매년 30퍼센트씩 늘어나고 있다. 최근 6년 사이 대학 졸업생 수는 네 배가 되었다. 2010년에는 중국의 공학 및 이학 박사가 수적으로 미국을 앞질렀다. 이 이공계 박사들은 국가의 환경을 바꾸고 회사와 도시를 설립하고 있다. 러셀은 개인의 추진력에서 비롯되는 쉼 없는 노력과 변화를 만드는 능력이 결합돼 행복을 일궈낸다고 생각한다. "노력과 능력을 갖춘 그 사람은 냉소주의자가 아니라 개혁가가 된다."

 

서구인들은 자신의 잠재력이 어느 순간 극적으로 깨달아지기를 기대한다. 그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게다가 시험을 망친다고 부정을 저지르거나 결과를 위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자기 능력으로부터 총총히 멀어지고 있는 격이다. 우리 문화는 이런 서글픈 상황을 눈감아주는 데 전문가가 돼버렸다. 그리 낙심할 이유가 뭐냐며 우리 눈앞에 슬며시 텔레비전을 설치해뒀고 쇼핑, 정크푸드, 야동을 손에 꼭 쥐어주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냉소주의와 손쉬운 삶을 뿌리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우리 인생 전체에서 보다 큰 행복을 품는 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기 능력 이하의 성과를 내는 안일함에서 한 걸음씩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눈을 감아보라.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아래쪽으로 향하는 한쪽 길이 있다. 그 길 끝에 있는 당신은 지겨워 죽겠는데다 건강까지 해치는 일을 10년 동안 매일 반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위쪽으로 향하는 또 다른 길에는 여러 기회를 포착한다면 10년 내에 이룰 수 있는 당신 모습이 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과감하게 두 번째 길을 향해 첫발을 내딛어보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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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이 사회가 우리에게 선사한 독단적인 죄의식에 쓸데없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일, 가령 욕지거리 같은 걸 두고 진 빠지게 걱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다.

 

이따금 한 두 가지 법에 금이 가게 하는 건 죄가 아니다.
아예 산산조각내지 않는 한.
-메이 웨스트(Mae West)

 

러셀은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신의 존재, 또는 신의 부재를 두고 끝없이 고민했다. 그에게는 기독교가 개인의 행복으로 가는 경로가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러셀은 자기 믿음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의식을 숨 막힐 정도로 많이 심어준다. 반면에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식을 전해주는 데는 지나치게 인색하다.

 

러셀의 생각은 이러하다. 우리가 언제 죄를 짓는지 말해주며 죄책감 내지는 후회가 잔뜩 밀려오게 하는 양심이란 것이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고 생각하는 건 비논리적인 사고다. 결국 이 비논리적인 생각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아무 이유 없이 불행의 근원이 되고 만다.

 

간단히 말해 그가 말하는 요지는, 우리가 소위 '양심'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므로 양심이 무엇인지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주재하는 보편적 결정권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러셀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양심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놓은 것은 몇몇 감정의 혼합물이다. 발각될 것 같은 두려움, 또는 무리에서 추방될까봐 갖는 두려움이 여러 감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가령 아무 건설적 이유도 없이 거짓말하거나 물건을 훔치고픈 유혹이 생긴다면 양심이 유용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러셀이 매우 언짢아하는 죄의식은 '눈에 띄는 자기 성찰의 이유'가 없는 곳에 있다.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아는, 그런 막연한 상황 말이다.

 

욕설을 살펴보자. "X새끼"라고 말하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죄책감이 뒤따르지만 별 걱정 없이 누군가에게 "이런 개나리를 봤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자의적이다. 'Wanker'라는 말은 미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으니 거술리지 않지만, 영국에서는 '재수 없는 새끼, 모자란 놈' 같은 뜻으로 쓰이는 공격적인 금기어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우주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 사실은 '벨기에(Belgium)'라고 한다.

 

금기시되는 단어의 수는 나라마다 다르다. 어찌 됐든 우리 대부분은 가끔씩 욕을 할 것이다. 날것대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심리적 유대를 맺기 위해, 신뢰의 신호를 보내고 불안감을 위장하기 위해 우리는 욕을 한다. 그러나 일종의 대가를 치르면서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우리가 끊임없이 되새기는 도덕률을 위반할 때 따라오는 죄책감과 일탈 의식이 바로 그 대가다. "이건 정말 지독하게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러셀의 의견에 어쩌면 동의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불쾌해하고 화를 낸다면 굳이 대놓고 욕을 해야만 할까? 이에 대한 러셀의 처방전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좋아하는 욕을 다 하라. 그리고 욕을 한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대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걱정하라. 예를 들어 아마 큰고모는 당신의 언어 선택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 큰고모가 계시는 동안에 말을 적당히 가려 한다면 사려 깊은 행동이 될 것이다. 그래도 당신의 언어 선태개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말라. 큰고모가 당신보다 더 우위의 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큰고모는 다른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2개 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적응의 기술은 욕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에 있으면서 스페인어로 욕하기, 스페인에 살면서 영어로 욕하기처럼 말이다. 기분이 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욕을 하고 싶다면 자기만의 욕설 용어를 만들어내라. 자기만 그 뜻을 아는 말로 만들면 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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