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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94호 청자 참외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4호 청자 참외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4호 청자 참외 모양 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4호, '청자 참외 모양 병'은 높이 22.6cm, 입지름 8.4cm, 바닥지름 7.4cm의 크기로 고려청자 절정기인 12세기 전반에 제작된 대표적인 고려청자다.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仁宗/재위 1122~1146)의 무덤인 장릉(長陵)에서 '황통 6년(皇統六年. 1146)의 기록이 있는 인종의 시책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참외 모양을 한 몸통과 치마주름 처럼 주름이 잡힌 굽다리가 달려있고, 입구는 활짝 핀 여덟 개의 꽃잎 모양으로 되어 있다.

목 부분에는 가로로 세 줄이 음각되어 있는 것 외에 다른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양식은 중국 송대 부터 유래하였지만 중국에 비해 훨씬 온화하고 단정한 곡선과 비례를 보이고 있다. 회청색에 옅은 녹색 빛이 도는 반투명의 청자유가 시유되어 고려 비색의 표본을 보이고 있다. 단아한 기형과 고도로 정선된 유약과 태토가 고려청자 최전성기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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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대용 앙부일구(해시계)/국립중앙박물관]


[해대용 앙부일구(해시계)/국립중앙박물관]


[해대용 앙부일구(해시계)/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해시계를 앙부일구(仰釜日晷) 또는 앙부일영(仰釜日影)이라 했는데, 앙부일구에서 일구라는 말은 해시계란 뜻이다. 앙부라고 하는 말은 해로 부터 그림자가 생겨 맺히는 면을(수영면) 뜻하는데, 솥을 받쳐 놓은 것같은 오목한 반구형의 모습에서 비롯된 말이다. 휴대용 앙부일구는 휴대가 가능하도록 작게 만들어낸 해시계로 회백색의 대리석을 깎아 틀을 만들고  수영면에 청동으로 만든 영침(影針)을 꽂았다. 해시계 옆에는 수영면 보다 조금 작게 만든 나침반을 함께 배치해 시간과 함께 방향도 함께 파악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시간과 방향 표시 문자는 각각 모두 음각으로 새겨 칠을 했는데, 측면에 절기와 북극고도가 새겨져 있고, 바닥 면에는 '동치신미맹하하한(同治辛未孟夏下澣)'이라고 하는 연대와 '진산인(晉山人) 강건제(姜健製)라는 낙관 2과가 새겨져 있어 휴대용 앙부일구가 1871년(고종 8년)에 본관이 진주인 강건이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건은 유명한 사대부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증손자로 고종 때인 1899년에서 1900년에 걸쳐 한성판윤을 지냈다. 따라서 강건이 휴대용 앙부일구를 직접 제작했다기 보다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 제작하는 과정에서 앙부일구에 새겨진 문장을 지었거나 제작 책임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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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95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5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5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5호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는 고려청자의 대표적인 명품 가운데 하나로, 높이는 15.3cm의 크기이며, 향이 퍼져나가도록 투각된 칠보무늬 구(球)를 얹은 뚜껑과 국화잎 모양이 장식된 향을 담아 태우는 몸통 부분, 그리고 세마리의 토끼가 각각 등으로 받치고 있는 받침(세발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기 다른 모양을 기능적으로 조화롭게 결합시켜 완성한 조형물로 음각, 양각, 투각, 퇴화, 상감, 첩화 등 다양한 기법이 조화롭게 사용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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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방울 팔주령 윗면/국립중앙박물관]


[청동방울 팔주령 밑면/국립중앙박물관]


[청동방울 팔주령 옆/국립중앙박물관]


청동방울 팔주령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서 출토되었으며, 국보 143-2호이다. 표면이 오목하고 뒷면이 불룩한 팍각형 모양의 청동판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 총 여덟개의 청동구슬이 들어있는 방울이 달려 있는데, 보통 청동방울은 쌍으로 출토가 되는 것으로 보아 두 손으로 들고 방울을 흔들었던 종교적 의식용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유물로 한반도 특유의 청동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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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뚜막/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부뚜막/국립중앙박물관]


부뚜막(쇠화덕)은 고구려 돌방무덤의 하나인 평안북도 운산군 동신면 용호동 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로 1918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조사 당시 돌방무덤의 중앙부분이 무너져 내려앉은 상태였으며, 부뚜막(쇠화덕)은 무덤의 널방(玄室)로 추정되는 곳에서 봉황모양꾸미개와 토기들과 함께 출토된 유물이다.

쇠를 녹여 주조 형식으로 해서 만들어진 부뚜막의 전체적인 형태는 안악3호분의 부엌 그림에서 보이는 부뚜막을 축소해 둔 듯한 형태로 아궁이와 굴뚝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한쪽 옆에 달려 있는 독특한 형태로, 비슷한 형태의 흙으로 만든 아궁이가 퉁거우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고구려 부뚜막(쇠화덕)은 실제로 사용했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사후 세계에서 죽은이가 사용하도록 함께 묻는 일종의 명기(明器)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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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비 은팔찌,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비 은팔찌,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비 은팔찌는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름 8cm의 은으로 만든 팔찌로 국보 160호이다. 팔찌의 둘레에는 머리를 뒷쪽으로 돌리고 발이 3개인 두 마리의 용이 장식되어 있다.

팔찌의 안쪽에 [경자년(庚子年, 520년) 2월에 '다리'라고 하는 장인이 대부인(大夫人, 왕비)을 위해 230주이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更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十世主耳)]고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경자년은 왕비가 죽은 병오년(丙午年, 526년) 보다 6년 전으로, 230주이(二百世主耳)는 무게 단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부인(夫人)이라는 호칭은 왕비나 왕모, 그리고 상류층의 혼인한 여자를 이르는 말로, 무령왕비 은팔찌는 왕비를 위한 것이므로 특별히 대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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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땅 속에 묻혔다가 1993년 능산리절터를 발굴조하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는데, 용이 머리를 들어 입으로 몸체 하부를 물고 있는 형상의 받침과,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산봉우리가 층층이 중첩된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향로의 뚜껑 꼭대기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봉황이 장식되어 있으며, 다섯 방향으로 쌓아올린 봉우리에 식물, 바위 등을 만들어 넣었고, 사이사이에 산길과 시냇물, 폭포 등을 표현했으며, 상상의 동물과 호랑이, 멧돼지, 원숭이, 새 등 현실 속의 짐승들을 인물과 함께 묘사했다.

향로 뚜껑에 표현된 모습은 마치 짐승과 사람들이 신선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윗부분의 다섯 악사는 신선세계에서의 기쁨을 연주하는 듯하고, 그 옆의 5마리 새들은 꼭대기의 봉황을 응시하고 있다.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국립중앙박물관]


봉황은 턱 밑에 구슬을 낀 채 하늘에서 방금 내려와 앉은 듯이 두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으로 서 있다.

몸통은 8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세 겹의 연꽃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꽃잎 위에 신선과 물가의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받침은 하늘을 향해 용트림을 하는 용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고, 다리와 몸통 사이에 구름무늬, 연꽃무늬 등을 넣어 전체가 하나의 원형 받침을 이루도록 하였다.

몸통과 받침은 용이 물고 있는 봉을 몸통에 낸 홈에 끼워 연결시켰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신선들이 산다는 신산을 표현한 박산향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백제적인 요소를 가미하였는데, 불교적 연꽃이 장식되었지만 고대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도가사상이 함께 접목되어 표현된 걸작이다.


높이 61.8cm, 무게 11.85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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