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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326호 '사여래도(四如來圖)'는 각기 다른 부처의 모습 즉, 아미타불, 약사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의 설법회를 하나의 화면에 표현한 가로 74cm, 세로 90cm 크기의 불화이다.

이 불화는 1562년(명종 17) 그려졌으며, 중종(中宗, 1488~1544)의 다섯 번째 아들인 덕양군(德陽君, 1524~1581)의 장남 풍산군 이종린(豊山君 李宗麟, 1538~1611)이 1560년에 세상을 떠난 외조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권찬(權纘)을 비롯한 가족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발원해 조성되었다. 왕실 종친에 의해 발원된 조선 중기 대표적 불화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보물 1326호 사여래도(四如來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6호 사여래도(四如來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6호 사여래도(四如來圖)/ⓒ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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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은 당대 최고의 궁중 예술가들이 최고의 재료를 이용해 그림과 글로 궁중행사를 기록한 것으로 조선 후기 문화의 품격을 잘 알려주는 작품이다.

기사(耆社)란 원래 70세 이상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중신을 우대하기 위해 만든 모임으로,

이 첩은 1719년(숙종 45) 4월 17일과 18일에 있었던 중신들의 경로잔치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것으로 1720년에 완성되었다.

이유(李濡)·김창집(金昌集)·김우황(金宇杭)·황흠(黃欽)·최규서(崔奎瑞)·강현·홍만조(洪萬朝)·이선부(李善溥)·정호(鄭澔)·신임(申醐)·임방(任埅) 등 11명이 참석대상자였으며, 왕이 친히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첩은 모두 12부를 만들었는데, 1부는 기사의 관청에서 보관하고 11부는 참석한 중신 11명이 각 1부씩 나눠가졌다고 한다.

계첩의 그림은 김진여(金振汝)·장태흥(張泰興)·박동보·장득만(張得萬)·허숙(許俶) 등 인물과 초상에 능한 5명의 화원이 담당했으며, 숙종이 내린 글, 서문과 발문,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 참석 중신들의 초상과 직접 쓴 축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929호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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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은 소당 이재관(小塘 李在寬, 1783-1838,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로 본관은 용인, 자는 원강, 호는 소당, 벼슬은 감목관을 지냈다. 전통적인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남종화의 세계를 이룩한 화가이다.)의 작품으로 초상화의 상단에 "若山眞影 小塘寫(약산의 진영 소당이 그림)"이라 쓰여 있어 초상화의 주인공이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였던 약산 강이오(若山 姜彛五, 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임을 알 수 있다. 강이오는 정조 시대 예단(藝壇, 예술계) 총수 격이었던 강세황(姜世晃)의 손자로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문인화가로서는 널리 이름을 알렸다. 당시 예술작품에 대한 감식안이 높았던 추사 김정희나 신위(申緯, 조선 후기의 문신·화가·서예가)의 글 속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강이오의 초상화는 섬세한 필력을 바탕으로 강이오의 차분한 인상이 특징적으로 잘 묘사되었고, 능숙하고 빠른 속도로 그려낸 의습선(옷의 주름 등을 표현하는 필선)은 이재관의 개성적인 필법인 날카로운 각선들로 표현되었다. 초상화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이재관과 강이오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김정희가 초상화를 평한 글과 '노염제(老髥題)'라는 서명이 있으며 '염(髥)', '추사(秋史)'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통해 이재관이 강이오의 초상화를 그린 까닭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그 까닭은 아마도 그들이 1833년 창경궁영건공사와 1838년 태조 어진 모사 작업에 참여한 인연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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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96호 '윤급 초상'은 가로 113.3cm 세로 151.5cm 크기의 윤급(尹汲, 1697(숙종 23)∼1770(영조 46). 조선 후기의 문신)의 관복전신좌상이다.

사모(紗帽,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를 쓰고 서대(犀帶, 조선 시대 일품의 벼슬아치가 허리에 두르던 띠로 조복, 제복, 상복에 둘렀으며 무소의 뿔로 장식하였다.)를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를 부착한 현녹색 단령(團領, 조선 말기까지 모든 관원이 평소 집무복으로 착용한 상복)을 입고 있으며, 표피를 덮은 의자에 앉아 화문석(花紋席, 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이 깔린 족좌대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은데, 이러한 양식은 18세기 초 이후에 보이는 양식이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왼쪽 귀가 보이도록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향하게 표현한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적 특색인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 형식으로, 쌍학문의 흉배는 구름을 수놓은 것 같이 표현하고자 구름의 윤곽선을 곡선이 아닌 짧은 단선을 세로로 그어 표현하였다.

그림에서 배 부분을 가장 어둡게 처리하여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느낌을 살렸으며, 의자와 족좌대의 나뭇결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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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70cm 크기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과 함께 감산사 절터에서 수습되었으며,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 연대와 제작 동기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719년 김지성(金志誠, 652~?, 통일신라의 문신. 67세에 집사부 시랑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뒤 감산사를 창건하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미륵보살의 유가론을 연구하였으며, 노장사상에도 심취하였다고 한다.)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감산사를 지었으며, 미륵보살과 아미타여래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미륵보살입상의 신체와 광배는 하나의 돌로 제작하였으며, 별도로 제작한 대좌와 결합시킨 형태로 만들었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보관의 중앙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변화되어 나타난다는 의미의 화불(化佛)이 있다.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올라 있고 눈과 입에 미소가 어려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 불상의 목 부분에 표현되는 세 개의 주름으로 번뇌도(煩惱道), 업도(業道), 고도(苦道)를 의미함)가 뚜렷하며, 목걸이, 팔찌, 영락 장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법의가 얇아 신체의 풍만하고 유려한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표현이 사실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을 한 통일신라 8세기 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함께보기: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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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은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75cm 크기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제작 연대가 확실한 유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연대에 있어 기준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 나발(螺髮, 불상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의 머리카락. 나계(螺髻)라고도 함)이 있고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오른 혹과 같은 것. 불정(佛頂)·무견정상(無見頂相)·정계라고도 함)가 크고 편평하다. 다소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미간백호상(白毫,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이라고도 함) 구멍이 있다. 법의(法衣, 세 가지 법의인 삼의(三衣), 곧 가사(袈裟)를 일컬음. 승복(僧服)•승의(僧衣)•법복(法服)이라고도 함)가 얇게 표현되어 있어 전체적인 몸의 곡선이 잘 드러나는 형태이다. 마치 물결치듯 U자 모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두 다리까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광배는 거신광, 두광, 신광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은 8세기 신라 불상의 정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1915년 경주 감산사터에서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옮긴 것이다. 광배와 대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으며, 광배에는 719년 김지성(金志誠, 652~?, 통일신라의 문신. 67세에 집사부 시랑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뒤 감산사를 창건하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미륵보살의 유가론을 연구하였으며, 노장사상에도 심취하였다고 한다.)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감산사를 지었으며, 미륵보살과 아미타여래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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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손에 보주를 들고 바위 모양의 대좌에 앉아있는 형태의 지장보살상으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지장보살상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불상의 제작연대도 나타나 있는데, 대좌 뒷면에 음각된 8행 49자의 글귀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데, 음각 글귀 가운데 '정덕 10년 을해 3월일(正德十年乙亥三月日)'이라는 내용으로 제작 연대가 1515년임을 알 수 있다.

불상 전체를 금으로 얇게 입혀 제작했지만 일부에서 붉은 칠이 남아 있으며, 상체에 비해 결가부좌한 다리가 빈약하게 표현되어 비례상 다소 불안정한 느낌이 들게 한다.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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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白磁 靑畫 瀟湘八景文 八角 硯滴, 19세기 조선후기, 높이 12.6cm)'은 회화적인 기량이 돋보이는 초대형 팔각 연적(硯滴, 먹을 갈 때 벼루에 따를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연적의 윗면에는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용의 모습을 음각과 양각기법을 활용해 매우 생동감있게 표현하였으며, 옆면에는 '소상팔경(瀟湘八景)'의 아름다운 전경 무늬가 표현돼 있다. 또한 팔각 면 중 물이 나오는 출수구가 있는 정면에는 당나라 시인 가도(賈道, 777~841)의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의 구절 일부를 인용한 "동정추월(洞庭秋月)"이라는 소상팔경도의 제목과 "송하문동자 장한강동거(松下問童子 張翰江東去)"가 들어가 있다. 소상팔경(瀟湘八景) 무늬란 중국 후난성(湖南省), 퉁팅호(洞庭湖) 남쪽에 위치한 샤오수이(瀟水)강과 샹장(湘江)강 주변의 여덟 가지 절경을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 후기에 청화백자의 무늬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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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44호 '경주 월지 금동초심지가위(慶州 月池 金銅燭鋏)'는 경주의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되었다. 금동초심지가위는 보통의 가위와는 다르게 초심지를 자르는 특수한 형태의 심지 가위인데, 전면에 새겨진 섬세한 어자문을 통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에 제작된 왕실 공예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본 정창원(쇼소잉, 正倉院: 일본 나라[奈良]의 도오다이지[東大寺]에 있는 목조건축물) 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가위의 생산지를 밝혀준 유물로 8세기 신라와 일본의 교류와 관련한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통일 신라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는 공예품이다.

동판재를 단조한 성형기법을 비롯해 주 문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바탕을 어자문(魚子紋, 도자기의 겉에 씌우는 잿물의 잘고 고운 금)기법을 쓴 장식기법과 금동제에 군청색 안료를 도포함으로써 황금색과 청색의 조화를 보여주는 화려한 금공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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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상층 기단 면석에 글자 크기 4cm의 탑 이름이 해서체(楷書體, 자형이 가장 똑바른 한자 서체의 한 가지)로 새겨져 있는데,끝에 태평 11년(太平十一年)의 연호 및 연대가 나타나 있다. 여기서 태평은 중국 요(遼)나라의 연호로, 1031년(고려 현종 22)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탑의 내부에서 '太平十一年歲次辛未正月四日高麗國尙州界知京山府事任若木郡內巽方在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태평11년세차신미정월4일고려국상주계지경산부사임약목군내손방재정도사5층석탑조성형지기)'라 쓰여진 백지묵서(白紙墨書)의 형지기와 아울러 녹유사리병(綠釉舍利甁)·동합(銅盒)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 '조성형지기(造成形止記)'에 따르면 당시 승려 지한의 주도 아래 이 지역 향리와 백성들이 국가의 평안, 전쟁의 종식, 풍년을 발원하며 세운 탑이라고 한다.

글 문투에는 이두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탑 자체에 관해서는 물론이지만 이두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이 올라간 형태인데, 현재 5층 지붕돌은 없어졌고, 상륜부(相輪, 불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의 장식 받침인 노반(露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의 한 부분)은 남아있다.

1층 기단에는 코끼리 눈을 본 떠 만든 무늬가 새겨져 있고, 2층 기단부터 탑신까지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에는 문짝과 자물쇠 모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깨끗하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지붕돌은 4단 받침대 추녀 밑으로 낙수홈(물을 아래로 내려보내기 위한 홈)이 있다.

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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