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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88호 '강민첨 초상'은 경상우병사 이연필(李延弼, 생년미상~1803)이 진주에 있던 원본을 1788년 화원 박춘빈에게 옮겨 그리게 하여 강원도 회양 관아로 보낸 것이다.

이 그림이 그려져 전달된 곳인 당시 회양 관아는 강민첨의 후손인 강세황이 회양부사로 부임한 아들 강인과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이 초상화의 모사에 강세황이 관여해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상의 주인공인 강민첨(姜民瞻, 963(광종 14)∼1021(현종 12))은 고려시대 전기 문신이자 장군이며, 진주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시조로 강세황(姜世晃, 1713(숙종 39)∼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이자 평론가)의 17대조이다.


[강세황 초상 보기]


강민첨은 1016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 고려시대 내의성(內議省)의 종4품 관직)이 되었고,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대장군으로 평장사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홍화진에서 적을 대파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은열(殷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공신각에 초상이 걸렸다고 전한다.

이 초상에서 강민첨은 머리에 관모인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쓰고, 중국 송(宋)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고려시대 관복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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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13~14세기) 유물로 높이 15.5cm 크기의 보살좌상이다.

보살좌상의 전체적인 형태를 보면 매우 화려하게 표현돼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화려한 보살상은 고려 후기 원나에서 전해진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밀교적 성격의 동시대 불상 양식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삼면두식(三面頭飾, 삼면보관 三面寶冠이라고도 하며, 정면과 좌우측면에 꽃무늬 등의 장식을 붙인 것으로, 보살상 특유의 두부 장식의 한 형식)을 쓰고 있으며, 관의 가운데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변화되어 나타난다는 의미의 화불(化佛)이 표현돼 있다. 빗어 묶은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 온화한 미소를 띠는 얼굴표정은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주며, 화반형의 큰 귀고리를 하고 있다. 상의는 입지 않은채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두르고 있는데, 큰 구슬로 장식된 길다란 목걸이가 상반신을 가리며, 허리에 두른 띠를 지나 세 겹의 홑잎 연꽃이 장식된 대좌까지 늘어져있다.


보물 18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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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78호 '호우(壺杅) 글자가 있는 청동그릇'은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인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다.

호우총은 광복 직후 1946년 우리 손으로는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분포하는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중 하나인데, 부장품으로 '호우 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이 출토되어 신라 고분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무덤이 되었다.

이 청동그릇은 주물로 만들어졌는데, 청동그릇 바닥부분에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고 하는 16자와 상부 중앙에 '우물 정(井)'자가 돋을 새김되어 있어, 을모년(415, 장수왕 3년)에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만든 호우로써 광개토대왕을 장사한지 1년 뒤에 이를 기념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청동그릇이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신라 내물왕의 왕자인 복호(卜好) 또는 그와 관련된 인물에 의해 신라로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주인 또한 복호나 그의 후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호우총은 6세기 초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청동그릇은 만들어진지 약 1백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신라의 고분에 부장품으로 넣어진 것이 된다. 따라서, 이 호우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밖에도 경주에서 출토된 고구려에서 제작된 유물로는 금관총의 청동 네귀항아리, 황남대총 북쪽무덤의 금제 귀걸이와 금동신발이 있다.



보물 1878호, 호우(壺杅) 글자가 있는 청동그릇/ⓒ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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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685-1호 '추사 김정희가 쓴 묵소거사 자찬'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정중하게 정성을 담아 쓴 듯한 글씨로 글씨형이 세장(細長, 가늘고 길다)하며, 날카롭고 변화가 큰 필획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묵소거사(默笑居士)'는 추사 김정희의 친한 친구였던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의 호로 이 글은 '묵소거사'라는 호를 지은 뜻을 담고 있는데, 작품을 감싼 장황 주변에 찍힌 엽전 모양의 둥근 인장들 또한 김유근의 것으로 친구인 김유근과 이 글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 내용을 보면,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시중(時中)에 가깝고, 웃어야할 때 웃는다면 중용(中庸)에 가깝겠지.

옳고 그름을 판단 할 때나, 세상에서 벼슬하거나 또는 은거를 결심할 시기가 찾아 올 때는 그 그동은 천리(天理)를 위반하지 않고,

그 고요함은 인정(人情)을 거스리지 않으리.

침묵할 때 침묵을 지키고, 웃을 때 웃는다는 의미는 대단하도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의 뜻을 알릴 수 있으니, 침묵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중용의 도를 터득하여 나의 감정을 발할 수 있으니, 웃는다 한들 무슨 걱정이 되랴.

힘쓸지어다.

나 자신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화는 면할 수 있음을 알겠다.

묵소거사가 스스로 찬(讚)하노라."구절로 돼 있다.


보물 1685-1호 '추사 김정희가 쓴 묵소거사 자찬'/ⓒ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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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은 경북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에서 출토된 높이 44.4cm, 머리띠 지름 19cm의 신라시대 유물로 금관의 내관으로 추정되는 금제관모와 새날개 모양의 금관식과함께 한 벌로 이루어져 있다.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식)]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금제관모)]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문화재청


금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바깥에 쓰는 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관테 위에 세 개의 나뭇가지모양 장식과 두 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을 붙여 세웠는데, 관테의 상하 가장자리에는 송곳같은 도구로 찍은 두 줄의 줄무늬와 한 줄의 물결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가운데는 한 줄의 둥근 볼록 장식이 되어 있다. 또한 관 전체에는 곱은옥과 달개를 달아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나뭇가지모양 장식의 줄기는 럽고 크지만 곁가지는 작은 형태로, 천마총 출토 금관보다 오래된 방식으로 추정된다. 테두리의 앞면 좌우측에는 두 줄의 긴 드리개를 달았는데, 드리개는 가운데가 비어있는 금구슬 열개를 쇠사슬 형태로 연결하여 끝에는 금모곱은옥을 달아 장식했다.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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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식)'은 경북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에서 출토된 높이 40.8cm 크기의 신라시대 유물이다.

전체 형태는 새가 큰 날개 짓을 하는 모습으로 관모에 끼워 사용하는 금제 관식이다. 맞새김(투조 방식) 기법의 당초 줄기 무늬가 장식된 금판 3장을 접합하여 만들었으며, 안쪽과 바깥쪽에 둥근 달개가 여러개 달려 있다. 가운데 장식의 윗부분에는 당초줄기처럼 간략화된 용무늬를 맞새김(투조 방식) 기법으로 표현하였는데 좌우가 비대칭이다.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금관식)/ⓒ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신라시대 관꾸미개는 새의 날개 모양이 주를 이루지만 나비처럼 생긴 것도 있으며, 새 날개 모양은 옆으로 날개를 활짝 펼친 형태가 오래된 것이며, 차츰 새 날개 모양의 끝이 안으로 오므라들어 위로 솟구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국보 87호 금관총 금제 관식은 비교적 새로운 형식의 관꾸미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금제 관식은 신라 왕실과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이며, 신라의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수장의 무덤에서도 출토되는데 출토될 당시 무덤의 주인공이 직접 착용한 상태에서 발굴되는 금관과 달리 부장품궤에서 껴묻거리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 특징이 있다.

[국보 87호 금관총 금제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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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자리짜기'는 자리를 짜고 있는 아버지와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뒤로 막대기로 힘있게 짚어가며 긁을 읽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 부모는 뒤에서 힘차게 글을 읽는 아들이 자랑스럽고 대견해 힘든 노동도 힘든줄 모르고 집중하고 있다.

쉼없이 힘든 노동을 해야하는 빡빡한 현실 속에서도 다시 힘을 내게 하는 서민가정의 유일한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림이다.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자리짜기/ⓒ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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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28호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은 8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높이 37cm 크기이다.

약사불은 보통 한쪽 손에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약사불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여러방향에 머무르는 부처를 표현한 사방불에서 동방에 머무르는 부처로 표현된다.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는 약사불은 갖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음식과 옷을 제공하는 등 여러 고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현실세계와 가장 가까운 부처라고 할 수 있다. 부처가 되기 전 보살이었을 때는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것을 포함한 12가지 큰 소원을 지녔고, 부처가 되고 난 후에는 동방에 위치한 유리광세계를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보물 328호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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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234-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불입상'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출토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높이 17.4cm 크기이다.

대좌와 함께 주조한 금동불에 얇게 투각한 당초무늬 그리고 불꽃무늬의 거신광배(擧身光背, 불상의 윤곽에 따라 광배를 표현한 것, 전신광배라고도 한다.)를 결합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광배까지 한 묶음으로 온전하게 전하는 통일신라 말의 불상은 흔치 않은데, 출토지가 후백제 영역이었던 익산 왕궁리인 점에서 제작시기를 비롯한 발원자의 문제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는 불상이다.

전체 형태를 보면 육계(肉髻, 부처의 머리 위에 볼록 올라온 머리 모양, 원래는 인도의 성인(聖人)들이 긴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었던 형태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혜를 상징한다.)가 아주 크고 얼굴이 둥굴넙적한 형태이며, 이목구비가 분명하면서 귀기 길어 어깨 부분까지 내려와 있는 형태에 콧수염이 새겨져 있는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둥굴넙적한 얼굴은 토착화되어 표현되었으며, 신체의 비례는 상체가 지나치게 짧고 하체가 길게 표현되어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한 장의 대의를 통견식으로 입었고 옷주름의 형식은 Y자형을 따랐다. 심단형식의 대좌 또한 연꽃의 입체감은 없고 선각으로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뒷면의 주조 구멍은 머리에는 없지만 몸 전면에서 다리까지 큼직하게 뚫려있는데, 내부의 주물이 매우 거칠다. 목 아래에는 광배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도록 촉이 달려 있다.

국보 123-4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불입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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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27호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 觀音菩薩 立像)'은 7세기 삼국시대 것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양동 산 108에서 출토되었다.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을 통해 7세기 전반 우리나라에 관음 신앙이 존재했음을 증거하는 중요한 자료로써의 가치가 큰 유물이다.

불교에서 관음 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삶의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모든 고통에서 구제하고 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믿는다.

이 상의 전체적인 형태에서 보살이 쓰고 있는 관 중앙에 화불(化佛)이 있고, 정병(淨甁, 자비를 상징하는 상징적인 공양구)을 들고 있는데,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상으로 여긴다.

국보 127호 금동관음보살입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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