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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리스토텔레스/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플라톤의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어받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교적 상식에서 출발한다. 그리스 말기의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복잡하고 이론적인 것은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당장 고통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그저 관념적인 이야기를 해 봐야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그의 행복론을 우리의 상식에 맞추어 풀어보기로 하자. 행복감을 언제 느끼는가? 뭔가 목표로 한 일이 잘 성취되었을 때 느낀다. 시험을 잘 보려고 공부를 많이 했는데 생각대로 시험을 잘 보았다면 행복하다. 이와 같이 어떤 행위가 애초 목적한 대로 잘 성취되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모두 무언가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또 다른 어떤 것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것이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것은 바라는 대학에 입학을 하거나 원하는 직업을 잘 얻기 위함이다. 이렇듯 인간의 행위는 수단과 목적의 연쇄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연쇄체계 안에서 잘 이어가는 것, 그것이 잘 이어지면 행복인 것이다. 그런데 그 수단과 목적의 연쇄체계를 계속 올라가다 보면 궁극 목적에 달할 것이고, 그 궁극 목적에 다다르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선이다. 그렇다면 각자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최고선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최고의 행복이다. 이렇게 보면 행복이라는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다. 중간 중간 목표로 한 것을 잘 이루는 것, 활동을 잘해서 잘 이루는 것이 선(agathos)이자 행복이다.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해서 다 선이며 행복인가? 이를테면 도둑질을 계획해서 잘 이루었다면 그 또한 행복인가? 그렇지 않다. 일시적인 행복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다른 한편에서 불안감과 죄책감이 늘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것은 행복의 단계 중 가장 최하급 단계, 즉 이성적 명령이 아닌 동물적 욕망에 기초한 성취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다. 감각적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공격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의 물질적,감정적 가치를 목표로 하는 한, 서로 경쟁을 해야 한다. 감각적 욕망에 매달린다는 것은 남도 나를 향해 그런 욕망을 가지고 맞서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늘 긴장을 해야 하고 그만큼 또 불안하다. 물론 종종 그렇게 싸워서 얻는 즐거움, 쾌감이 있지만 그 사정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쾌감은 언제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시적인 만족감일 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한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을 가르치지만 무한경쟁에서 늘 이기는 사람은 없다. 살아남는 것은 대개 디기업과 재벌들일 뿐 그 안에서 개인의 삶은 끝없이 소모될 뿐이다. 그러나 달리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인의 생활을 검투사와 같은 삶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칼 때문에 죽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칼을 놓을 수도 없는 삶, 실로 불행한 삶이다.

 그러면 지속적인 즐거움, 훼손되지 않는 즐거움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욕망에 눈이 멀어 부도덕적인 일을 감행하면 일시적인 행복은 얻을 수는 있어도 종국에는 고통에 빠지기 때문에 분별 있게 모두에게 선이 되는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공동체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면 그 또한 나의 정점을 보고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서로 좋은 것이다. 이타적인 희생과 봉사만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것을 나누라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그 만큼 다른 사람에게 먼저 베풀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누가 웃는 얼굴에 침을 뱉겠는가? 그렇게 공동체에서 남과 조화를 이루는 일, 그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이루는 것이다. 새치기하지 않고 줄을 잘 서면, 잠깐 다리가 아프지만 결국을 편하고, 자리를 양보하면 몸은 좀 불편하지만 마음이 훨씬 편하다.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그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렇게 당장의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고 이성적 반성을 통해 보다 깊게 생각하고 그 깨달음에 따라 처신하면 즐거움은 더욱 커지고 깊어진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명한 '행복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행복이란 인간이 가지는 여러 기능 가운데서도 이성적 기능,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적 기능을 잘 발휘하고 발달시켜서 얻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요체이다.[행복에 이르는 지혜,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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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늘 일정한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를 알고, 무엇인가를 느끼고, 무엇인가를 의욕하며 산다. 인간은 '상황 내(內) 존재(Being in Situation)'인 것이다. 그러면 상황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알기 쉽게 말해 자연적,사회적,역사적 환경이라고 할 것이다. 지리적 위치, 지형, 기후 등은 자연적 환경이며, 가정, 학교, 지역사회, 회사, 단체, 국가, 국제사회 등은 사회적 환경이다. 그리고 자연, 사회 ,역사 이 세 개의 환경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학문이나 예술도 인간관계 내지 도덕도 종교도 정치도 경제도 모두 문화이고, 이 문화를 전달 확충하고 문화의 주체인 사람 각각의 발달을 도모하는 것 또한 교육이라고 불리는 문화활동이며, 그 문화의 변천 발전의 과정이 역사라 불리는 문화현상이다. 그러므로 '상황 내 존재'인 인간 각자의 행복은 인간과 상황 내지 문화와의 유기적인 긴장관계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개인이 상황으로부터 떨어져 있거나 또 상황이 개인과 떨어져서 우리들 밖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행복을 논할 때는 개인적 측면과 함께 사회적 측면이라고 하는 인간 존재의 이중적인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즉 행복의 내적 조건과 행복의 외적 조건이라는 두 개의 조건을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전자는 개인의 주관적 마음의 문제이며, 후자는 객관적 상황의 문제이다. 그러나 행복론은 비록 이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할지라도, 그 밑바탕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이므로, 종국적으로는 주객 양자의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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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행복한 토끼/온라인 커뮤니티]

 

 플라톤의 행복론은 그리스 고유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으로 온갖 다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몫을 누리면서 다른 것들과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모습이고 사람이 또 본래 살아야 할 모습이며 나라가 추구해야 할 가장 올바른 상태이다. 이러한 모습을 플라톤은 정의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정의롭다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정의롭고 올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은 받으시 행복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그리스 공동체란 발칸반도 곳곳에 산재한 각각의 도시국가들이 제 나름의 특징과 역할을 가지고 다른 이웃 도시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고, 행복한 나라라 함은 한 도시국가에 속하는 여러 다른 계층, 즉 통치자 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들이 서로 상대방의 역할을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핞고, 그들 각자의 본성과 소질에 맞게 자기 역할을 최고의 상태로 수행하면서 서로 조화와 공존을 이루면서 그 나라 전체의 평화와 평온을 이룩하며 사는 것이다.

 요컨데 사람이 사회적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여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하고 자기가 누려야 할 것을 잘 누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것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서로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공존해 가는 것이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인간 각각의 내면의 행복한 상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개인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세 가지 측면, 즉 냉철한 이성의 측면과 자존심과 명예를 중시하는 기개의 측면, 그리고 감각적인 욕심과 충동에 따라 살려는 욕망의 측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플라톤은 이런 세 가지 서로 다른 부분이 인간 영혼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들 가운데 어떤 한 부분이 나머지 부분을 억누르거나 지배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플라톤이 이성주의자라고 해서 개인 내면의 이성이 나머지 기개나 충동을 억눌러서 금욕적으로 사는 것을 플라통이 말하는 행복한 삶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나게 노는 자리에 가면 욕망의 측면이 조화를 이끌어 가면서 잘 놀아야 하고 자존심 내세우거나 용기를 발휘해야 할 곳에서는 기개의 측면이 그렇게 해야 한다. 이처럼 개인적으로행복하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훼손됨이 없이 각각의 부분이 마치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루면서 때로는 빠른곡, 때로는 평정한 곡을 연주하듯 내적인 조화를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제멋대로 본능을 충족시키거나 금욕주의자처럼 일체의 본능을 따르지 않거나 하는 것은 모두 행복한 삶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행복론은 인간의 다층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하고 있는 매우 균형잡힌 행복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 플라톤/네이버 지식백과]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론의 요체는 '수분자족(守分自足) 하며 살아야 한다.' 즉, '분수를 지키고 스스로 넉넉함을 느낀다'라는 동양적인 금언과도 일맥상통한다. 자기 분수와 직분, 자기 할 일을 잘 알고 그것에 충실하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물론 수분자족하며 살자는 말은 자기는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수를 알고 그 정도로나마 만족해야지 하는 패배주의적인 자기 위안 내지 자기 합리화로 들리기도 한다. 하기는 강자나 지배자는 수분자족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말은 강자가 약자를 업신여기면서 하는 말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론, 이른바 수분자족론은 약자에게만 강요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별들이 각각 제자리에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코스모스를 이루듯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에게 요구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통치 계층은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욕망과 흥미를 가지고 있으니 적성과 소질대로 나라를 잘 다스리면 당연히 행복할 것이고, 군인 계층은 소질대로 용기와 명예를 가지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니 통치자의 역할을 넘보거나 생산자의 물건들에 눈을 돌리지 않고 나라를 잘 수호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생산자 계층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신발을 만들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잘하면 당연히 그 때문에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한 사회는 서로의 적성과 소질을 실현해 가면서 서로 의지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적성과 소질은 각각 다른 뿐 어느 것이 보다 좋은 것인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사람 사는 사회를 채우고 귀하고 소중한 가치이고, 각자는 누구의 간섭이나 침해 없이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의 적성에 따른 고유한 역할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 가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기본적으로 행복한 나라, 행복한 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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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올레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중에 인터넷가입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어느 통신사가 좋을까요? 추천부탁드립니다.

 

답변:

인터넷가입을 고려중이라면 으레 이런 질문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올레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등 각각 상품을 놓고 봤을때 정말 어느것이 더 낫다라고 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인터넷속도 등의 인터넷품질은 지역별로 사용환경별로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어떤 통신사의 인터넷상품이 가장 낫다고 말씀드리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죠. 

거기에 인터넷 사용을 하면서 매월 납부하게 되는 월요금도 통신사마다 차이가 나고, 보통 3년약정으로 매월 납부하는 요금이기 때문에 경제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겠죠.

요즘 대세인 LTE와 유선 인터넷을 결합한 올레KT의 ALL-IP올라잇, LG유플러스의 온국민은요yo(한방에yo), SK브로드밴드와 SK텔레콤의 TB끼리온가족할인무료, 한가족결합할인, 온가족프리 등 무선 핸드폰을 어느 통신사의 것을 사용하는지 어떻게 결합상품을 구성할건지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또, 요즘 집집마다 인터넷TV(IPTV)를 많이 사용하는데 통신사마다 채널이나 서비스(해상도등)가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물론, 가입시 지원받을 수 있는 현금사은품이나 상품권 등에서도 차이가 많습니다.

이렇듯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결정 전에 꼭 상담사(브로드몰 고객센터 1544-3502)를 통해 고객님의 사용조건을 이야기 하고, 제대로된 요금설계를 받으셔서

추후 인터넷 등의 결합상품을 사용하면서 후회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첫째 고려사항이라고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broadmall/20709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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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율곡 이이(1536~1584)/네이버 두산백과]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대표적인 주자학자로 강원도 강릉의 외가에서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13세에 초시에 급제하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19세가 되던 해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는가 하면 23세에는 당대의 노사숙유(老士宿儒)로 일컬어지던 이황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는 별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는데 이때의 담압지가 유명한 '천도책'이다.

 이이는 비교적 젊은 시절 중앙의 정치 무대에 나간 이래 20여년 동안 이조좌랑,호조판서,부제학,대제학 등 국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아울러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십만양병론을 주장하면서 각종 화약 무기를 개발하고 전함을 건조하여 왜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유성룡 등의 유학자들로부터 아무 일도 없는데 병력을 양성하는 것은 그자체가 화근이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선견지명을 가진 성은으로 찬양받기도 했다.

 

[사진 초충도/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과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네이버 공부에미친16인의조선선비들]

 

 이이는 49세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성학집요(聖學輯要)'와 '격몽요결(擊夢要訣)'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그 외에도 정치, 경제, 교육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뛰어난 방책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1577년 저술한 '격몽요결'은 초학자들을 위한 성리학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데 충실한 내용과 완성도 높은 체제를 갖추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성현이 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는 입지장(立志章),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혁구습장(革舊習章), 올바른 몸가짐을 강조한 지신장(持身章), 책을 읽4는 방법을 논의한 독서장(讀書章),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논한 사친장(事親章) 등 모두 10장으로 구성 되어 학문의 목적부터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논의하고 있어 조선시대 내내 초학자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이 책의 입지장에서 그는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성인(聖人)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여기에서 그의 학문관이 주자학의 정신을 철저히 이어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이치는 따져 보지 않고 단지 스승의 설이라고 해서 믿고 따르는 독경주의를 비판하고 스스로 의미를 찾는 자주적인 학풍을 주장했다. 그는 이런 학풍에 입각하여 이황에게 다른 사람의 견해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고 아울러 "주자라 할지라도 정말 이(理)와 기가 상대해서 각각 발출한다고 생각했다면 주자 또한 잘못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자주적인 학풍을 중시했다.

 또 그는 벗이었던 성혼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논쟁을 진행했는데 이는 학국철학사상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일어난 사단칠정 논쟁과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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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1.본성이 이치인가 마음이 이치인가

 주자학의 기본명제는 "본성이 곧 이치이다."라는 의미의 '성즉리(性卽理)'이고, 양명학의 기본명제는 "마음이 곧 이치이다."라는 의미의 '심즉리(心卽理)'이다. 주자학에서는 모든 사물이 각각의 이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치가 있고, 개에게는 개의 이치가 있으며, 꽃에는 꽃의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치는 하늘이 정한 것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각각의 사물에 하늘이 정한 이치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모든 이치가 각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가 "만물이 내게 갖추어져 있다."라고 한 말의 연장인 셈이다.

 

[사진 왕수인(왕양명)/네이버 지식백과]

 

 한번은 왕수인이 친구와 함께 유람할 때 한 친구가 절벽에 피어 있는 꽃나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세상에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는데 꽃나무는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 제 스스로 피고 지는 것이니 과연 내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자 왕수인은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는 이 꽃과 그대 마음이 모두 고요할 뿐이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꽃빛깔이 일시에 또렷해졌으니, 곧 이 꽃이 그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였다.

이런 왕수인과 친구가 절벽에 핀 꽃을 보면서 나눈 대화가 양명학의 '심즉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사진 주희/네이버 지식백과]

 

 이런 점에서 본다면 주자학과 양명학 모두 이(理)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유체계는 똑같이 관념론에 속한다. 다만 양자를 구분한다면 주자학은 내 밖의 사물이 객관적으로 있다고 보는 입장이므로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리고, 양명학은 객관적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린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모두 유학이며 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인본주의이다.

인본주의란 세계 만물의 기준을 사람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물에 대한 감각과 인식이 인간 개개인의 판단에 달여 있기 때문에 그 개별 인간 하나하나가 만물을 재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얼핏 보면 유가의 인간중심주의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유학의 또다른 특징은 도덕중심주의이다. '성즉리'와 '심즉리'의 이가 자연법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덕법칙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성즉리'의 성은 도덕성이고, '심즉리'의 심은 도덕심이다.

 주희는 '성즉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보았다. 하지만 예전부터 전해 오는 '대학'에서는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고 보고 정이천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새로 134자를 만들어 넣었다.

 '격물치지'는 '사물에 나아가(格物)' '앎을 완성한다.(致知)'는 뜻이다. 이 말만 보면 앎의 대상이 사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궁극적인 탐구대상은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 속에 들어 있는 이(理)이다. 그렇기 때문에 '격물궁리(格物窮理)'라고도 한다. 주희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만물은 모두 각각의 이를 지니고 있고 사람에게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신령한 앎의 능력이 마음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바탕으로 매일매일 탐구해 가다 보면 마침내 하루아침에 모든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물의 겉과 속, 정교하고 미세한 사물과 거친 사물 할 것 없이 사물의 이치가 다 깨달아질 것이며 내 마음의 온전한 본 모습과 그 마음의 활용이 밝아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주희의 말처럼 온 세상 만물을 다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주희는 독서를 통해 깨닫는 것과 함께 유추법을 제시하였다. 유추법이란 10개 가운데 7~8개를 깨달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얼핏 보면 천하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쉽게 이해 되지 않는다. 이 점은 이렇게 생각해 보자. 개와 고양이와 나무와 돌의 이치는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모습과 역할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개의 이치는 어떤 것일까? 본래 성리학에서는 이치는 변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선(善)이라고 본다. 따라서 개의 이치를 따지는 일은 어떤 개가 가장 좋은(착한) 개인지를 찾는 일과 같다. 가장 좋은 개는 주인 잘 따르고 집 잘 지키는 개일 것이고 주인을 물거나 도둑을 보고 겁을 내는 개는 나쁜 개가 된다. 그리고 이런 평가 원칙은 지금 우리집에서 기르는 개만이 아니라 옆집 개와 뒷집 개,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다른 나라 개들까지도 모두 해당되며, 이미 죽은 개나 앞으로 태어날 개에게도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에서는 이치가 사물 존재보다 앞선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착한) 고양이는 어떤 고양이일까? 쥐 잘 잡고 주인 잘 따르는 고양이가 착한 고양이일 것이며 이 원칙도 이미 죽은 고양이나 앞으로 태어날 고양이에게까지 해당된다.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목재로 쓰기도 좋으면서 예쁜 꽃과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착한) 나무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개와 고양이와 나무의 이치는 다르지만 좋은 나무, 좋은 고양이 좋은 개로 생각을 넓히면 그 이치는 모두 같아진다. 따라서 모든 만물의 이치는 결국 선의 이치라는 점에서 같다는 결론이 나오며 이러한 이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사실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물의 이치를 따지는 것은 사람 중심의 논리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인 유학의 입장에서는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깨달은 궁극의 진리는 그 이치가 내 속에 들어 있는 사람다움의 이치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희는 만물의 이치를 다 합친 것이 태극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격물치지를 통해 궁극에는 태극을 깨닫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젊어서 주자학을 공부했던 왕수인은 주희의 격물치지 이론을 직접 실험해 보았다. 1주일 동안 대나무 앞에 앚아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대나무만 바라보며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대나무대로 나는 나대로 있음을 경험하였다. 왕수인이 깨달은 것은 내 마음이 대나무에게 갈 때 대나무가 비로소 존재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는 타고난 양지를 잘 기르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왕수인의 생각은 생 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여우는 하던 이야기로 되돌아 갔다. "내 생활은 단조로워. 나는 닭을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닭들은 서로 비슷하고, 사람들도 모두 비슷해. 그래서 난 좀 권태로워. 그러나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햇빛을 받은 것처럼 밝아질 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와는 다르게 들릴 너의 발자국 소리를 나는 알게 될 거야. 만일 다른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땅속으로 숨을 거야.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길 봐! 밀밭이 보이니?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나한테 쓸모가 없어. 밀밭을 보아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그래서 슬퍼! 그러나 네 머리카락은 금빛이야. 그래서 네가 날 길들인다면 정말 신날 거야! 밀밭도 금빛이기 때문에 밀은 너를 기억하게 해줄 거야. 그래서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 사랑하게 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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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과 양명학의 의미와 사상사적 영향

 성리학은 중세 시기 동아시아 3국 모두의 보편적 세계관이 되어 700년 이상을 이어 왔고, 양명학 또한 인간 주체와 실천을 강조하면서 근대적 사유의 싹이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은 명대 이후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교조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양명학 또한 인륜이나 사회기강을 거부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사진 태극도설/네이버 지식백과]

 

 주자학은 특히 중세 봉건왕조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사상적 유연성이나 새로운 발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고착화하는 경향을 보였고, 양명학 또한 개인 주체를 강조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래서 명말 청초에 이르면 양명학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학문 경향이 등장한다.

 

[사진 황종희/네이버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사진 고염무/네이버 지식백과]

 

 그러한 경향의 처음을 연 사람은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이다. 황종희는 양명학의 폐단을 비판하고 개인적 도덕 수양의 한계를 넘어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계몽사상가적 정치 이론을 전개하였다. 고염무 또한 경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세론을 찾으려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훈고학과 비슷한 고증학을 새로운 학문 방법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왕부지는 고대부터 내려온 기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상을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은 대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근대로의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서구의 충격과 그에 대한 대응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크게는 봉건제를 유지하면서 성능이 우월한 무기를 중심으로 서구의 우월한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려는 양무파(洋務派)와 이를 넘어서서 정치,경제의 개혁까지를 주장한 변법파(變法派)가 대립하였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모두 근대 이전까지 사회를 이끄는 사상으로 기능하였으며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늘날 다시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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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학과 양명학의 관계

 양명학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양명학이 주자학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계승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주자학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극복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진 주희/네이버 지식백과]

 

 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약간이 차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봉건사회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는 측면을 중시하여 모두를 이학(理學)이라고 부른다.그러나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관학이었던 주자학의 엄숙주의,귄위주의에 반기를 든 것이 양명학으로서 이러한 변화 과정이 이지(理智)에 입각한 규제에서 서정(抒情)에 입각한 자연주의로, 이치가 바깥 사물에 있음을 인정하는 객관에서 내 마음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주관으로, 전통에서 반전통의 자유주의로 나타났다고 보고, 주희의 이학(理學)과 구별하여 심학(心學)이라고 부른다. 또 일부에서는 크게 보면 후자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양명학의 심학 체계 속에 명말 청초에 유행하는 기학(氣學)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는 입장에서 기학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사진 왕양명(왕수인)/네이버 지식백과]

 

 

 또 다른 문제는 고대 유가사상과 주자학,양명학의 연관에 대한 이해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주희가 성선설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유가의 전통을 순자가 아니라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진 것으로 보았지만 오히려 학문 내용을 보면 주지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순자 사상의 영향으로 이해되며, 이와 달리 왕수인의 학문은 맹자의 양지양능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가 전통에 더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그 밖에도 왕수인 사상과 육상산의 사상에 유사성이 많기 때문에 육왕학(陸王學)이라고 표현을 쓰면서도 두 사상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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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들은 철학 사상을 이해할 때 그 사상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의 입장과 일치될수록 깊이 잇는 이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배해 다른 사람들은 그 사상을 배태한 지리적,역사적 배경을 객관적으로 먼저 파악해야 그 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이나 현실과 독립되어 성립하는 사상은 없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가 '안으로 부터의 접근'이라면 뒤의 경우는 '밖으로 부터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는 이 두가지의 어느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진 공자/네이버 지식백과]

 

 예를 들면, 우리는 불교를 이해할 때 근본불교의 교리로서 사성제나 삼법인 등 석가의 사상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불교를 낳은 인도의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가령 인도의 무더운 기후는 인도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들이 명상을 중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고대로부터 사제들을 비롯한 지배층은 시원한 나무 그늘이나 석굴 속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이해하는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와 철학들을 고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사진 석가모니/네이버 지식백과]

 

 따라서 어떤 철학 사상에 접근할 때,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밖에 두고 보라"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안에서만 본다면 우리는 주관적, 관념적으로 흘러서 그 사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또 만일 두 발을 모두 밖에 두고 본다면 우리는 그 사상의 배경만 이해할 뿐 심오한 내용까지는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김교빈 외 13인,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웅진출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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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필적/한국민족문화대백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평생 은거했던 서경덕과는 달리 25세때 부터 적극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1530년 사간으로 재직시에 권신들의 배척을 받아 쫓겨났다가 복귀하는 등 정치적으로 여러 차례의 질곡을 겪었다. 말년에는 권신 윤원형 일파의 미움을 받아 강계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주요 저술을 남겼다.

 서경덕이 기철학을 열었다면 회재 이언적은 이(理)의 철학을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로 대표되는 비주자학적 사유를 극복함으로써 조선 주자학의 이론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당시 손숙돈과 조한보 간에 주자학의 주요 개념인 무극과 태극에 관한 편지글이 오가는 것을 보고 이른바 무극태극 논쟁을 제기하여 두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논쟁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 논쟁을 통해 주자학에 대한 불교적,노장적 이해를 비판했는데, 무극과 태극은 이(理)를 지칭한 것이지 기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동시에 이(理)는 형질이 없지만 결코 무(無)는 아니라고 하여 이(理)를 무(無)로 이해하는 노장적 풍조를 경계하여 철저하게 주자학적 사유에 입각하여 무극과 태극을 설명함으로써 주자학의 순수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학문 방법론에서도 조한보가 태극의 본체를 단번에 깨친다는 논의를 비판하고 거경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적 학문론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그는 이(理)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지만 그 실체가 깃들어 있는 곳을 찾는다면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현실적인 곳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상생활을 떠나서 이(理)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학문 수행 또한 일상생활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 이(理)의 절대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는데, 사람과 사물은 형질이 있지만 이(理)는 형질이 없기 때문에 이(理)는 생사와 시종도 없는 존재라고 하여 이(理)를 무시무종의 궁극적 존재자로 규정하는 등 이(理)의 실재성과 주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주자학을 해석함으로써 훗날 같은 이(理)의 철학자인 이황으로 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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