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러셀은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빅토리아 시대의 냉정하고 엄격한 방식으로 양육받았다고 보면 된다. 조부모의 사랑 없는 양육법은 러셀의 뇌리에 깊은 잔상으로 남았다. 그래서인지 러셀의 삶은 한평생 사랑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셀은 우리 역시 사랑을 찾는 모험을 그치지 말라고 전한다.

 

어떤 욕망은 인생을 계속 들썩들썩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하다.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내가 믿는 사랑이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동경했던 그런 사랑이 아니라, 모험을 불사하면서도 세심함을 갖춘 사랑"이라는 게 러셀의 지론이다.

 

전과 기록에다 두 번의 이혼 경력도 있는 반백의 58세 상류층 사내 러셀. 그는 전통적 기준에 맞는 사랑을 하기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로 도움이 되며 협력하겠다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부러 도망치지 않는 이상 외로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은 동행을 찾아 서로 격려하며 영감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함께 재미를 도모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혹시 사랑에 대한 낭만적 감상에 빠져서 산꼭대기에 홀로 앉아 아쉬움과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이 있는가? 속칭 이런 진상은 러셀이 생각한 귀감이 아니다. 당연히 우리가 본받을 표본도 아니어야 한다. 사랑은 세속적인 것들의 대안이 아니라, 속세의 모든 것이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효과 만점 촉매제다. 러셀의 표현대로 "사랑은 최고의 기쁨을 살찌워주기 때문에 귀히 여긴다". 그리고 "에고(자아)의 견고한 껍질을 부서뜨린다"는 이유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한다.

 

프로이트에게 에고(Ego)는 쾌락을 좇는 이드(Id, 인간의 정신 밑바닥에 있는 원시적, 본능적 요소)의 충동을 점검하고 조절하는 무의식의 일부였다. 러셀은 '행복의 정복'을 출판하기 7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 "에고는 이성과 상식이라 불리는 것을 대변한다. 열정이란 것을 품고 있는 이드와는 대조적이다." 에고는 우리를 문명화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게 순수한 기쁨을 주는 강력한 충동과 욕망을 통제하는 기능도 한다.

 

러셀은 사랑 찾기가 단순히 숭배할 누군가를 찾아내거나 당신에게 뭐든 사줄 사람을 찾거나 당신이 얼마나 멋진지 말해줄 대상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당신이 기쁨과 만족감을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이, 당신 역시 똑같이 기쁨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바로 사랑 찾기다.

 

<사인펠드>(Seinfeld, 미국 NBC에서 1990~98년에 방영한 코믹 시트콤.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가 직접 자신의 삶을 무대로 연기함)의 에피소드 하나를 들어보자. 주인공 제리 사인펠드가 지니 스타인먼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지니가 딱 제리 같은 사람이었던 탓에 둘은 처음 본 순간부터 죽이 잘 맞았다. 지니는 제리와 마찬가지로 시리얼과 슈퍼맨을 좋아한다. 말투도 서로 닮았고 즐겨 하는 농담도 똑같다. 제리는 이런 행운이 있나 싶을 만큼 지니를 만났다는 걸 경이로워했다. 둘은 곧 약혼을 한다. 그리고 다음 에피소드의 초반부에 제리 친구가 제리에게 약혼 이후로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

 

제리: 뭐, 딱히 얘기할 건 없어. [제리가 말하는 사이 플래시백으로 화면 전환] 한 한 달 전이었나? 같이 점심을 먹다가 뜬금없이 우리 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지...

 

제리, 지니: (동시에) 난 네가 싫어!

 

러셀의 말대로 우리는 영원히 지속될 사랑을 찾느라 혼자 너무 골몰하고 집착한다. 우리는 짝을 찾고 있는 것이지, 공통의 경험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확률을 가늠하는 게 아니다. 진기한 일이지만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러셀은 "사랑이 최고의 상태에 오를 때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하마터면 알려지지 않을 뻔한 가치가 이때 나타나는 법"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니 부디 사랑을 찾되, 눈앞의 현실이 아닌 미래의 모험에 대해 생각하라.

 

당신에게 소중한 존재인 누군가를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보라. 침실 안에서든 밖에서든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을 온갖 행동을 하면서 하염없이 행복하지 않았던가? 지금이 바로 그때의 모험심에 다시 불을 붙일 순간이다. 러셀이 한 일을 우리라고 못하겠는가!

(러셀의 행복 철학 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걸 원할 거야, 하고 판단한 뒤 우리 기준에 맞춰 행동한다면 뜻밖의 당황스러운 상황과 맞딱뜨릴 수 있다. 그렇다고 평지풍파를 일으킬 거라는 두려움에 맥없이 휘둘릴 수만은 없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하지만 극한의 공포에 허둥지둥하지 않으면서 침착함을 유지할 방법은 있다.
바로 이성적 사유와 평가야말로 두려움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다.
-배너바 부시(Vannervar Bush)

 

러셀이 지적하듯 언제나 여론은, 누가 봐도 분명 여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보다 폭압적으로 힘을 행사한다. 러셀은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개를 이용해 겁을 주며 해코지하는 상황과 여론의 권련 행사를 비교한다.

 

종종 유명 인사들은 옳고 그름에 대해 자기 확신을 갖기보다는 대중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예측함으로써 자신의 행보를 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공인 입장에서는 자기네가 대중의 압제와 괴롭힘을 당한다고 여길 수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 대중은 기꺼이 폭군처럼 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오해 아닌 오해 때문에 공인들이 피하려고 애쓰는 문제가 종종 야기된다.

 

정치인들은 단순히 여론의 분위기에 맞춰 입맛 따라 변해야 하는 노예가 아니다. 그보다는 기민하게 여론을 감지하도록 조율돼야할 존재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민감해지고자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한 무리다. 직장, 가정 등 우리의 책임을 필요로 하는 그 어떤 조직 내에세도 우리는 대중의 찬성을 바라고 있으므로 정치인들 못지않게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

 

위기 상황에서는 이 두려움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 피터 샌드먼(Peter Sandman)은 권력 당국이 공황 상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정통한 전문가다. 그는 우리가 위기라고 인식하는 상황들이 사실은 반드시 두려워해야 할 건 아니라고 지적한다. "위기 상황이라고 적혀 있는 기나긴 목록을 살펴본 뒤 사람들이 얼마나 동요하는지에 따라 위기 상황의 순서를 매겨보라. 그런 다음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끼치는지를 기준으로 각 위기 상황의 순서를 다시 잡아보라. 그리고 두 순위표의 상관관계를 따져보라. 그러면 0.2라는 눈부신 수치를 얻게 될 것이다." 0.2라는 상관관계를 비전문가가 쓰는 말로 풀자면, 우리는 중대 위기와 사소한 위기를 거의 똑같이 걱정한다는 말이고 우리가 크게 우려하는 위기 상황이라는 게 비교적 대수롭지 않은 경구가 많다는 뜻이다. 우리는 초조함을 느끼는 것을 결정하는 데 실질적 피해보다는 뭔가 다른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우리가 조류독감, 흉기 범죄, 식품 내 수은 함량 같은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동요한다고 해서 이 감정이 실질적 위기를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 직감은 좋은 길잡이가 아니다. 다라서 직감을 중시하는 어떤 실권자나 우두머리들처럼 직감을 좇아가다가는 잘못된 길에 들어서기 십상이다.

 

샌드먼은 '분노'라고 분류되는 감정을 정의하는데, 이는 '위해성'과 그리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한다. 문제는 높은 수준의 격렬한 분노와 낮은 위해성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샌드먼의 말에 다르면, 여론을 향해 과민 반응을 보이는 통치 기관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공식적인 '공포를 위한 공포' 조성은 인류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무리는 툭 하면 대중이 공포에 떨고 있다느니 조만간 공황 상태에 바질 거라느니 멋대로 추정한다... 그들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자기들 손에 꼭 쥐고만 있다. 대중을 안심시키려고 지나치게 애쓰며 대중의 두려움에 경멸을 표한다." 우리가 몽땅 엉덩이에 불이 붙은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상황을 상정하는 '공포를 위한 공포', 다시 말해 도가 지나친 공포는 우리를 절대 안심시키지 못한다. 더군다나 실행활에서 우리의 건강과 안녕에 악영향을 끼치기까지 한다.

샌드먼의 말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되 책임감 있는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대중이 진실을 알지 못하게 꽁꽁 감추려고 할 때보다 오히려 사람들의 두려움 지수나 불행 지수가 더 낮아질 것이다. 우리는 정보 전달을 올바로 한 다음 책임감 있는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우리가 혹시 여론을 잔뜩 성난 개처럼 생각하고 두려워한다면 아예 물어달라고 살살 성을 돋우는 꼴이다.

 

핸드먼은 위기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리더십을 보여준 인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윈스턴 처칠을 꼽는다. 처칠은 당면 문제를 호도하거나 냉혹한 진실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번에 당신이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처칠이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해보자.

(러셀의 행복 철학 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러셀은 이 사회가 우리에게 선사한 독단적인 죄의식에 쓸데없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일, 가령 욕지거리 같은 걸 두고 진 빠지게 걱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다.

 

이따금 한 두 가지 법에 금이 가게 하는 건 죄가 아니다.
아예 산산조각내지 않는 한.
-메이 웨스트(Mae West)

 

러셀은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신의 존재, 또는 신의 부재를 두고 끝없이 고민했다. 그에게는 기독교가 개인의 행복으로 가는 경로가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러셀은 자기 믿음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의식을 숨 막힐 정도로 많이 심어준다. 반면에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식을 전해주는 데는 지나치게 인색하다.

 

러셀의 생각은 이러하다. 우리가 언제 죄를 짓는지 말해주며 죄책감 내지는 후회가 잔뜩 밀려오게 하는 양심이란 것이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고 생각하는 건 비논리적인 사고다. 결국 이 비논리적인 생각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아무 이유 없이 불행의 근원이 되고 만다.

 

간단히 말해 그가 말하는 요지는, 우리가 소위 '양심'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므로 양심이 무엇인지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주재하는 보편적 결정권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러셀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양심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놓은 것은 몇몇 감정의 혼합물이다. 발각될 것 같은 두려움, 또는 무리에서 추방될까봐 갖는 두려움이 여러 감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가령 아무 건설적 이유도 없이 거짓말하거나 물건을 훔치고픈 유혹이 생긴다면 양심이 유용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러셀이 매우 언짢아하는 죄의식은 '눈에 띄는 자기 성찰의 이유'가 없는 곳에 있다.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아는, 그런 막연한 상황 말이다.

 

욕설을 살펴보자. "X새끼"라고 말하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죄책감이 뒤따르지만 별 걱정 없이 누군가에게 "이런 개나리를 봤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자의적이다. 'Wanker'라는 말은 미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으니 거술리지 않지만, 영국에서는 '재수 없는 새끼, 모자란 놈' 같은 뜻으로 쓰이는 공격적인 금기어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우주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 사실은 '벨기에(Belgium)'라고 한다.

 

금기시되는 단어의 수는 나라마다 다르다. 어찌 됐든 우리 대부분은 가끔씩 욕을 할 것이다. 날것대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심리적 유대를 맺기 위해, 신뢰의 신호를 보내고 불안감을 위장하기 위해 우리는 욕을 한다. 그러나 일종의 대가를 치르면서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우리가 끊임없이 되새기는 도덕률을 위반할 때 따라오는 죄책감과 일탈 의식이 바로 그 대가다. "이건 정말 지독하게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러셀의 의견에 어쩌면 동의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불쾌해하고 화를 낸다면 굳이 대놓고 욕을 해야만 할까? 이에 대한 러셀의 처방전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좋아하는 욕을 다 하라. 그리고 욕을 한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대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걱정하라. 예를 들어 아마 큰고모는 당신의 언어 선택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 큰고모가 계시는 동안에 말을 적당히 가려 한다면 사려 깊은 행동이 될 것이다. 그래도 당신의 언어 선태개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말라. 큰고모가 당신보다 더 우위의 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큰고모는 다른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2개 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적응의 기술은 욕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에 있으면서 스페인어로 욕하기, 스페인에 살면서 영어로 욕하기처럼 말이다. 기분이 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욕을 하고 싶다면 자기만의 욕설 용어를 만들어내라. 자기만 그 뜻을 아는 말로 만들면 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우리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각자가 내놓는 모든 의견이 야금야금 갉아 먹히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평론가 데이비드 덴비는 이런 특징을 '스나크(snark)'라고 지칭한다.

 

유머의 정신을 무력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조롱과 비아냥거림이다.
-데이비드 덴비(David Denby)

 

러셀이 들려주는 경쟁과 관련된 이야기. "현대의 삶에서 경쟁이 강조되는 현상은 교양 수준이 전반적으로 퇴화하는 것과 관련돼 있다. 모든 사람들이 보다 풍성한 지적 즐거움을 만끽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러셀은 대화의 기술이 쇠퇴하는 현상을 보고 한탄을 금하지 못했다. 우리가 좋은 문학이나 주변 세상을 더 이상 만끽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도 유감스러워했다. "봄이면 학생들이 나를 데리고 캠퍼스 여기저기 나무들 사이로 산책을 가곤 했다. 곳곳에는 절묘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야생화가 가득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꽃 이름 하나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런 걸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생각하겠지? 돈을 더 벌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러셀이 회상하는 씁쓸한 캠퍼스 단상이다.

 

꽃에 대한 호기심이 부족하다거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다거나 어려운 말들이 가득한 두꺼운 책에 관심이 없다는 건 러셀이 상정하는 문제와 그리 관계가 없다. "문제는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진 인생 철학, 즉 인생은 피 튀기는 경쟁이며 숨찬 경기라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그 경쟁 속에서 존경이란 순전히 승자의 몫이다."

 

[스나크]를 쓴 덴비는 '명예를 손상시키는, 헐뜯는'이라는 뜻의 'snide'와 '논평, 소견'을 뜻하는 'remark'라는 단어를 합성해 'snark'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비방, 헐뜯는 발언'인 스나크를 사용하는 오늘날의 풍조에 비통함을 표한다. 18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이야기꾼들은 필요할 때 튀어나오는 무례함과 풍자에 무조건 반기를 들진 않았다. 덴비 역시 그랬다. 그가 생각하기에 무례함도 자기 자리가 있다. 그가 반대한 대상은 기본적으로 말하는 내용이 전부 허섭스레기 같은 작가와 이야기꾼, 불러거들이다. 덴버가 생각한 훌륭한 풍자란, 더 나은 세상을 함축하는 것이다. 뛰어난 비평은 비평 대상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한다. 비록 가망 없는 시도라 해도 어쨌든 노력은 한다. 하지만 비방은 단순히 파괴하려는 시도만 할 뿐이다.

 

일상적인 비방은 우리 곁에서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낸다. 동료의 성공을 볼 때 우리는 대놓고 불쾌해하기보단 그 성공을 공연히 곁눈질한다. 블로그의 논쟁 글을 보더라도 논쟁 자체가 아니라 개인을 헐뜯는 인신공격성 글이 줄줄이 달린 걸 확인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어떤가. 정작 그들이 자기 할 일을 성심성의껏 들려줘야하는 순간에도 이를 회피할 목적으로 자기들끼리 물어뜯는 설전을 우리에게 들려줄 뿐이다. 우리는 영락없이 비방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덴비가 설명한 비방의 공통 요소는 다음과 같다. 비방하는 주체는 우선 비방의 객체에게 흠집을 내면서 그 대상을 서서히 침몰시키고 싶어 한다. 그래서 결국 다른 대상으로 대체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비방은 진지하고 정당한 비판으로부터 분리된다. 비판이란 건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반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비판이 행해지는 순간 그 내용이 얼마나 가혹하든지간에 잠재적으로는 개입된 모든 이들의 성장을 담보한다. 그런데 비방은 경쟁이 순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경쟁에 임한 상태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게 부정적 책략밖에 없을 때 바로 비방을 사용해 경쟁자를 약화시킨다. 인터넷, 소셜네트워킹, 사무실, 문자 메시지 등은 아마추어 비방꾼들이 활개 칠 장을 잔뜩 넓혀놓았다. 그리고 사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비방에 천부적 재능을 보인다. 부디 기억하라. 우리가 쏟아낸 비방은 비방 그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드러내는 법이다.

 

비방꾼들은 자신감 앞에선 맥을 못 춘다. 당신이 새로운 직장에 가게 됐는데 누군가가 당신더러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다고 비웃으면서 그 직장에 대해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무례하게 떠든다면, 당신이 그 회사를 택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하라. 누군가가 당신의 옷차림과 패션 센스를 놀린다면, 어쩌면 그 사람이 당신의 자신감을 부러워해서 심통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직업으로 삼을 순 없는 노릇.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추슬러 하루하루를 살아나가야 할까?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 덕분에 생활을 꾸려가고, 우리 손으로 나눠주는 것 덕분에 삶을 영위한다.
-윈스턴 처칠(Wiston Churchill)

 

자기 일을 즐기고 살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현실적으로 많은 이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러셀도 잘 안다. 그런데도 러셀은 여전히 행복의 요인이라는 목록에 주저 없이 '일'을 집어넣는다. 그유이가 뭘까?

 

일단 전제를 세우자.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즐기는지에 관한 공신력 있는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데이터 확인차 미국의 경제 조사 기관인 컨퍼런스 보드(The Conference Board)의 조사 내용을 살펴보자. 이 기관은 지난 20년간 직업 만족도를 조사했는데, 마지막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반 이하가 자기 직업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이 결과는 20년 동안 가장 낮은 수치였다.

 

25세 미만에서는 5분의 2 이하가 자기 직업에 만족한다고 했다.

 

일이 말(馬)이라도 된다면 총으로 쏠 수나 있지. 당최 답이 안나오는 문제다.

 

지겨운 일, 재미없는 일이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귀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러셀이 주목하는 부분은, 설령 그런 일이 굉장한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불행의 수준을 낮춰줄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일이라 해도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덜 괴롭다. 많은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 대부분이 그 자체로 재미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조차도 어느 정도는 훌륭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가 아는한 러셀은 닭 도살 작업을 해봤다거나 콜센터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다. 그래도 일단 러셀의 얘기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러셀이 말한 첫 번째 이점은 의무적인 일이라도 우리에게 무언가 할 것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날마다 자유 선택이 주어진다면 의외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미있는 일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쭈뼛거린다. 더 행복해질 것 같지도 않고 대책 없이 더 지루해질 뿐이다.

 

많은 이들에게 직장은 매일 가야 할 곳과 사람들을 만날 공간이라는 의미를 준다. 직장은 일만 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사회생활이 진행되는 곳이다.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구축해야 한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사회가 이미 직장이라는 공간에 구성돼 있다.

 

또한 러셀은 일 덕분에 우리의 휴일이 더욱 달콤하다고 말한다. 물론 일로 인해 휴일이 더욱 짧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러셀은 따분한 일에 관해 보다 현실적인 결론을 내놓는다. 첫째, 일을 하니까 돈이 생긴다. 돈이 곧 행복은 아니라 해도 분명 해로운 건 아니다. 일은 우리의 포부와 소망을 이루는 데 필요한 실질적 조건을 충족시켜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돈을 엄청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고 지루함이 눈에 띄게 줄지도 않지만,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덕분에 평판도 쌓이고 일의 기술도 늘게 된다. 따라서 러셀은 각자 자신의 일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당부한다. 어떤 분야에서건 능력을 인정받으면 행복이 그만큼 가까이 온 것이다.

 

러셀이 보기에 잠정적으로 가장 지루하고 아무 가능성이 없는 일이 있다. "가정에 익숙해진 아내는 임금도 못 받고 자기 계발할 방법도 모색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남편에게도 당연시되는 존재로 살아간다. 집안일로 가치를 인정받기보다는 다른 이유로 가치를 평가받는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지루하게만 보이는 콜센터가 그리 불행한 장소는 아닌 것 같다.

 

어떻게든 한 주 한 주를 흘려보내는 게 직장에서 품은 야망의 최대한도라면 이에 대한 처방은 새 직장을 알아보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이미 몸담고 있는 곳에서 새로운 책임을 모색하는 게 옳다. 고작해야 직장 동료들과 주기적으로 술집을 순례하는 것이라 해도 뭐든 할 만한 게 생기지 않겠는가.

 

(러셀의 행복 철학 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혼자서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게 항상 쉽지만은 않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결핍, 욕망, 편견, 충동과 마주하는 자체가 왠지 거북할 때가 많다. 하지만 러셀은 이렇게 자신과 독대하는 것이 곧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신념을바꾸지 않는다면 당신 인생은 영영 변함없이 이 모양일 것이요.
이거, 좋은 소식이오?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n Somerset Maugham)-

 

행복 성취는 우리 인생 최대의 전투다. 그런데도 우리는 행복을 종종 일, 결혼, 가정, 쇼핑 같은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쯤으로 취급한다. 행복은 엄연히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며 도달해야할 목표이자 본질인데도 말이다.

 

버트런드 러셀 식으로 앎에 다다르는 길을 살펴보자. 만사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치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분해한다. 그런 다음 생각을 정리하고 자기만의 견해로 구축한다. 혹시 '다들 그렇게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경험을 통해 배운다. 그러나 그 경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진득하게 성찰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늘날 우리가 본의 아니게 뭉텅뭉텅 받아들이게 되는 소화 불량의 여러 의견과 정보는 대부분 정치인, 대중 매체, 미래의 선동가들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러셀은 우리에게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듣는 건 좌절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러셀은 가장 기본적인 진리라고 여기는 해답지를 우리에게 흔들어 보인다. 우선 그가 보여준 해답의 첫 줄은, 우리가 삶의 굴곡을 해결하려고 속 편히 신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행복이 이런 식으로 몸집을 불리지는 않을 거라고도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 앞에 지기된 원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만들어진 게 아님을 깨닫게 한다. 동시에 행복이 우리 앞에불쑥 뛰어들기를 기다리는 대신 무언가 조치를 취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점도 잊지 않고 알려준다.

 

러셀은 현재의 상황과 당당히 맞선 자신의 수많은 도전을 책 속에 가득 담아두었다. 그는 우리가 스스로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지금 우리가 일하는 방법, 경쟁에 대처하는 방법, 성(性)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방법이 이 모든 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오류를 수정해보자고 한다. 그런데 러셀이 제시하는 내용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생경해보이는 부분은 바로 우리 스스로 행복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과정이다. 어느새 우리는 쇼핑으로 약으로 술로 행복해지는 데 익숙해졌다. 그 세 가지 모두 효험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등바등 거기에 매달린다.

 

러셀의 권고에 따르려면 일단 두 가지를 인정해보자. 첫째, 돈과 성공은 등식으로 성립되는 관계가 아니다. 이런 말은 가정교사를 곁에 두고서 바깥세상은 책에서나 배웠을 법한 부잣집 도련님이,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 칭송받는 백작한테 쉽게 툭 던질만한 말이다. 하지만 러셀은 이 얘기를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일평생 돈과 성공 사이에 등호를 끼워둔 적도 없다. 그리고 사실 부자도 아니었다. 둘째, 우리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을 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태를 바꿀 책임을 지고 있다. 아무래도 러셀은 모든 해답을 말끔히 찾아내는 데서 기쁨을 느낀 게 아니라 가장 난해하고 곤란한 물음을 던지는 데서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 삶에서 가장 귀중한 표상인 행복을 별다른 노력 않고 냉큼 손에 넣을 수는 없다. 행복을 당장 내게 주시오 하고 정당하게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 러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행복을 얻는 방법이다. 우리가 러셀의 책에서 무엇이든 도움을 얻으려면 일단 우리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차근차근 변화시킬 준비를 해둬야 한다. 자, 이제 러셀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갈 준비가 되었는가?

 

러셀이 가장 좋아한 성경 구절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출애굽기 23장 2절)"에는 그의 다부진 결심이 담겨 있다.  주변 사람이 다들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부화뇌동 좇아가는 경우는 없는가? 이 세상의 큰 물줄기에 덥석 몸을 맡기는 게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는가? 이제 그 물길에서 과감히 빠져나올 때가 되었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음식, 다이어트, 섹스, 도박, 운동, 비디오 게임, 초콜릿, 카페인..., 현대인의 중독 목록을 보노라면 우리가 어떻게 쾌락 탐닉자가 되었는지를 고발하는 기소장 같은 느낌이 든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오늘날의 과잉 탐닉을 설명할 때마다 왜곡된 방식으로 거론되곤 한다. 사실 그는 에피쿠로스라는 이름 하면 언뜻 떠오르는 전형과는 전혀 딴판인 사람이었다. 이 철학자는 와인보다는 물을 선호했고 소박한 음식을 즐겨 먹었으며 오직 행복해지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전념했을 뿐이다. 알고 보면 에피쿠로스가 생각한 행복한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러셀의 생각과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에피쿠로스가 과잉 탐닉 내지는 강박적 소비와 어느 정도 연관돼 있긴 하다. 어쩌면 이런 면은 우리가 흔히 즐거움과 연관시키는 보편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권을 사면서 소소하게 5등 당첨을 꿈꾸진 않는다. 꿈에 그리는 자동차는 매끈한 몸체에 바람처럼 빠르며 굉음을 낼 줄 아는 근사한 물건이다. 꿈같은 휴가는 현실에서 잊고 지내온 온갖 휘황찬란한 사치품으로 가득하다. "꿈꾸던 바를 실제처럼 경험한다는 것"은 에피쿠로스가 쾌락과 연관시켰을 법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구 공동체가 중독에 빠지기 쉽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전엔 어림도 없었지만 지금은 무엇에든 중독될 만큼 수입과 여가 시간 면에서 여유가 있다. 이제 집에서 편히 앉아 도박을 즐길 수 있는 세상이 됐다. 현대의 성(性)문화는 누군가가 푹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길 자극 요소와 표현물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아이들은 강박 충동에 사로잡힐 때까지 마음껏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얻어냈다.

 

복잡하고 심각하며 난해한 충동이란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다. 대신 러셀은 우리더러 모든 충동을 감상적으로 해석하지는 말라고 경고한다. 또 충동 안에서 괜히 무모한 숭고함 따위를 찾으려 들지 말라고 타이른다. "고대인들은 중용을 필수 미덕 중 하나로 여겼다"고 러셀이 짚어준다. 우리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러셀이 보기에 문제의 일면은 "대단히 위압적인 열정이 높이 평가받았다"는 낭만주의적 이상에 있다.

 

어떻게 중용을 찾을 수 있을까? 적당한 게 얼마만큼인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러셀이 제시하는 원칙은 이것이다. 탐닉의 정도가 "건강을 해치지 않아야 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우리가 사는 사회에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러셀은 체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예로 든다. 요즘 우리 중에 체스를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니 러셀이 온라인 카드 게임을 얘기한다고 가정하자. 하루 종일 게임하기만을 고대하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게임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는 사람은 중용의 미덕을 잃은 사람이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꿈을 따르려는 충동, 강박을 뒤쫓고자 안락한 상황을 포기하려는 충동에 관한 물음이다. 러셀은 다시 구별을 지어 답한다. 더 높은 이상이 있는 사람은 이상을 위해 매진하라. 단순히 자극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가 결국 탐닉이다. 등반가도 아닌데 왜 자꾸 더 높은 단계를 찾아 오르려 드는다.

 

탐닉과 과잉 탐닉 사이에 선을 긋기란 쉽지 않다. 탐닉은 단순히 누군가가 열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열정이 평범한 일상생활로는 충족되지 않으나 건강한 에너지 배출구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탐닉하고픈 낭만적 욕구를 따르는 건 전혀 유익하지 않다.

(러셀의 행복철학 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스스로 불행하다 여긴다면 자기 손으로 꾸역 꾸역 불행을 제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행운은 끈기의 다른 이름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

 

인간은 스스로를 모든 사건의 중심에 둔다. 그래서 외부의 사건 역시 자연스레 자신과 연결시킨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는 존재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이 획득한 경험을 개인화하려는 데 능하다. 러셀도 이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대곳적에 프로그램된 것 이상으로 한껏 날아오를 수 있는 능력도 부여받은 존재다. 머리만 좀 쓰면 그 불필요한 연결 고리, 세상만사 모든 것과 내가 연관돼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그 연결 고리에서 호기롭게 벗어날 수 있다.

 

행운이야말로 우리 삶을 구원해줄 요소라고 믿는가? 이 믿음은 그 어떤 잘못된 믿음만큼이나 행복을 와르르 무너뜨릴 ㅜ이력을 품고 있다. 가능성이란 언제나 존재한다. 동전 던지기를 세 번 하고 세 번 다 앞면이 나올 수도 있다. 이걸 보고 누군가가 그 동전을 조정하고 있었다거나 매우 의미심장한 결과라고 의미 부여를 하지는 않는다. 사실 확률적으로 여덟 명 중 한 명은 똑같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다고 해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렇게 되도록 손을 썼다고 보긴 힘들다. 여섯 자리 추첨에서 1, 2, 3, 4, 5, 6이 순서대로 나오는 건 3, 9, 34, 38, 43, 49가 나오는 것과 같은 확률이다. 가능성은 임의적이다.

 

행복에 미치는 운의 영향력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 러셀은 '운이 없는' 실패한 발명가 얘기를 한다. 이 발명가들은 '제조업자들이 너무 자기 방식에 빠져 있어. 혁신적인 사고를 지니고 발명가들을 자유로이 내버려두는 사람들은 없단 말이야'라고 단정한다. 이런 확신은 얼마간 위로는 돼도 마음을 아주 편하게는 하지 않는다.

 

유아용 컵을 발명한 맨디 하버만(Mandy Haberman)은 성공한 발명가다. 하지만 하버만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이 발병가이고 성공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면 당신은 불행하지 않다. 발명을 성공시키는 건 전적으로 자기 능력이므로 발명가로서 열심히 노력해 발명품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돈을 버는 직업으로는 적당치 않다. 특허를 받은 제품 중 단 0.02퍼센트만 시장으로 나간다... 혹시 돈을 벌기를 기대한다면 복권을 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성공을 거두며 살 순 없다.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다. 300명이 입사 지원서를 내면 단 한 명만 일자리를 꿰찬다. 회사 내 상위 10퍼센트 실적을 낸 사람들이 보너스를 받는다면 열에 아홉은 보너스와 상관없는 이들이다.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해도 그 연결 고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견고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원인과 결과의 연결 지점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또는 버트런드 러셀에게도 직접 닿아 있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보다는 통제할 수 있는 사안을 어떻게 감독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발명가로서 행복을 증진시키는 확실한 방법은 더 나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의 책임은 '변명할 여지 없이' 궁긍적으로 나 자신에게 있다.)

 

세상은 나를 위해 준비돼 있는 곳이 아니다. 때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대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음과 같다.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부분을 우리의 역량껏 써먹는 것이다. 그리고 일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는 배짱을 갖추는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일의 성취와 행복을 혼동하지 말라.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이 아무리 중요한 사람이라 해도 시기와 질투를 정복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원대한 야망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소소한 일에 성공을 거두고도 남는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불만족이라는 요소는 야망의 근원이 되어 우리에게 자극을 준다. 자기계발에 관한 수많은 비즈니스 서적들이 주로 다루는 주제가 바로 불만족과 야망이다. '승리를 쟁취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동료들 면상을 짓뭉개는 열 가지 비법'같은 책과 함께 놓인 책이라면 굳이 집어들 이유가 없다. 부자가 되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행복하게 만들어줄 책은 켤코 아니다.

 

러셀은 질투에 관한 내용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기량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 자체로 행복해지진 않는다고 강조한다. 성공만으로는 질투심과 멀어질 수 없다. 세상에는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큼 나보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늘 있기 마련이다. 질투나 부러움이 자신을 추동해 성공을 향해 달음질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면, 막상 승진을 하거나 성공을 거두더라도 질투가 금세 자취를 감추친 않을 것이다.

 

러셀은 이런 예를 든다. 우리는 나폴레옹을 부러워한다.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다는 점에서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실존 인물이 아니었던'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다. 아무래도 너무 과한 상대를 택했던 듯.

 

이같은 불행의 근원은 인간의 타고난 속성 속에 있다. 우리는 스스로 일군 성과를 따로 떼어 가치 있게 볼 줄 모른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끝냈을 때, 힘든 하루 일과를 마쳤을 때, 아침에 눈을 떴는데 토요일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 마음에 벅차오르는 느낌, 그런 감정이 바로 간단명료한 성취감이다. 그 느낌이 한 시간 동안 지속되든, 한 주 내내 가시질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기만의 짜릿한 즐거움일 따름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성취한 다음 '이걸로 충분해', '됐어!' 이런 기분을 잘 느끼지 못한다. 나의 성취감이 남의 실패로 입증되는 게 아니듯, 남이 더 나은 업적을 이뤘다고 내가 달성한 결과물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잘 못한다. 내가 통과한 시험을 옆 사람이 통과하지 못했기 대문에 내가 더 나은 운전자가 되는 건 아니다. 50명의 후보 중 단 한 명만 승진을 하는데 그게 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한순간에 내가 일을 더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고군분투하고, 최고가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의 성과에 자부심을 갖는 건 괜찮다. 그러나 이 과정은 타인의 가치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가치에 부응하는 개인적 탐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여정에서 일단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한 자기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 중에는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제시하는 가치와 기준을 아무 고민 없이 선뜻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우린 지금 돈과 명성을 과대평가하며 성실함, 친절, 신뢰, 이타주의 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남들과 상관없이 스스로 보다 원숙한 열망을 구축한다면 나름의 의미 있는 성공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만 한다면 감히 나폴레옹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우리가 해낼 것이다. 끝없는 부러움의 계단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나폴레옹이 이런 우리를 부러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러셀은 행복보다 더 부러움을 살만한 게 뭐가 있겠느냐고 묻는 중이다.

(레설의 행복철학 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러셀은 불행의 이유로 자극 과다를 상정하는데 그에 따르는 불가피한 결과인 '피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신경과민 피로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불행의 주원인이다.

타인이 바로 지옥이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타인이 지옥이라.. 출퇴근 통근자들에게 와닿는 이야기 아닌가? 러셀은 "오늘날 선진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피로는 신경과민 피로"라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낯선 사람들.. 인간을 골칫거리로 보는 풍조"가 현대인의 피로감을 거든다고 본다. 복잡한 전철을 타고 지하로 이동하기 때문에 "모든 이방인에게 적대적인 분노가 발산"된다고 덧붙인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는 통근자가 아니라고 슬쩍 빠져나갈 수는 없다. 자가용 운전자는 어떤가. 러셀이 글을 ㅆ던 1930년대야 도로에 차가 별로 없었지만 오늘날의 '노상(路上) 분노'는 미국에서 공식적인 정신 질환으로 분류될 정도이다. 정말로 '간헐성 폭발성 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란 질환이 있다.

 

신경과민이거나 간헐적으로 감정이 폭발하는 사람이라면 앞서 말한 질환이 바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스스로 인정한다면 하루 빨리 치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러셀이 책을 쓴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경과민'은 오랫동안 치료 대상이었고 현대에는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보편화되었다. 1930년대에는 스트레스라는 말이 폭풍우 속의 건물이나 너무 많은 책이 꽂힌 책장을 설명하는 데 쓰였다. 이런 뜻으로 쓰였으니 당시에는 그 누구도 '스트레스로 고통방을 일'이 없었다. 당연히 스트레스를 줄인다는 개념도, 처방전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라는 이름이 너무나 보편화된 지금

우리는 이 '스트레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운전 중 폭발하는 분노를 예로 들어보자. 전문가들이 동의한 노상 분노의 주요 원인은 이것이다. 우리는 운전할 때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동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에 대한 터무니없는 기대만 있을 뿐이다. 쓰디쓴 경험보다는 환상에서 비롯된 이상적 운전에 기초한 기대감 말이다. 자기 차의 거침없는 속력을 자랑하며 완벽한 도로, 완벽한 차, 호나벽한 운전자를 기대한다. 거기다 우리는 욕구불만을 속에다 쌓아두기만 할 뿐 툭툭 털어내질 못한다. 조사에 따르면 우리 중 90퍼센트 이상은 자신이 평균 운전자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괜찮은데 주변 상황이 그렇질 않으니 욕구불만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진다.

러셀이 확인시켜줬고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동의한 스트레스 대처법의 필요조건은 바로 차분히 숙고하는 능력이다. 내 차 앞으로 불쑥 끼어든 저 차 운전자는 정말로 앞지르기를 한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천천히 가고 있었던 탓일까? 내가 지금 저 운전자에게 화가 나는 걸까. 아니면 이 도로가 복잡하다는 걸 알면서도 또 늑장을 부린 나 자신에게 화를 내는 걸까? 복잡한 버스에서 사람들이 나를 밀어붙이는 게 너무 짜증나는데 혹시 나 또한 그 사람들을 밀치고 있는 건 아닐까?
차분히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결코 스트레스 정복의 첫걸음조차 델 수가 없다. 약을 복용해 스트레스를 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취하지 않으면, 러셀이 예를 든 복잡한 객차 같은 데 마음이 갇혀 잔뜩 부아가 난 걸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꼴이 된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