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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원인이란 따로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우리의 욕심과 그 작용에 달려 있다. 아무리 건장한 체격도 대개는 식사, 보행, 주의력, 독서, 날씨 등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형편에 따라서 날마다 긴장에서 침체로 왔다가 또 침체에서 긴장으로 옮아가는 것이다.[알랭 Al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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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다소 고생이 되더라도 너무 평탄한 길은 걷지 않는 것이 좋다. 왕이라고 해서 만사가 생각대로 되는 것이라면 참 가엾은 존재라고 하겠다. 행복이란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하여 눈뜨게 하는 불안이나 정념, 또한 어느 정도의 고통을 언제나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세계보다 기대와 상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더욱 행복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실제 행복을 손에 넣으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해서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재물에는 두가지가 있다. 주저앉게 하는 재물은 인간을 권태롭게 만든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재물은 다시 계획이나 일을 요구한다.[알랭 Alain]





[쿠쿠정수기, 공기청정 제습기, 비데 렌탈, 쿠쿠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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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위와 행복

 사람이 하는 일이 많으면 도리어 혼란을 초래하고, 공(功)을 서두르면 도리어 파멸에 빠지는 일이 흔한 법이다. 그래서 노자는 오히려 무위(無爲)가 뜻을 크게 이루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무위(無爲)의 술(術)이란 구체적으로는 유약과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고, 무지와 무욕을 궈장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노자는 무위의 상징으로서 물(水)과 어린이 그리고 여성 등 이른바 비공격적인 약자들을 예찬한다. 유가가 말하는 인의예지나 번잡한 법제금령은 말세의 것으로 배척하고, 태고의 소박한 세상을 이상으로 삼는다. 노자 제19장에는 "성스러움을 끊어 버리고 지혜를 내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백 배로 늘어날 것이다. 인을 끊어 버리고 의를 내버리면 백성들은 효도와 자애로움으로 돌아갈 것이다. 기교를 끊어 버리고 이익을 내버리면 도둑들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글로써 표현해도 부족하기 때문에 설명을 덧붙여야만 한다. 본시의 바탕을 드러내고 소박함을 지니며,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망을 적게 가져야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성지(聖智)를 끊고, 인의(仁義)를 버려 교리(巧利)를 낮추는 것에 의해서 민리(民利)도 백 배가 되고, 백성도 효자(孝子)에 복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도적 없는 안녕의 세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요컨대 소박함과 적은 욕심이 사람의 본래 자연의 모습이며, 이것으로 돌아감으로써 사람은 모두 그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가 사상은 인간의 무지와 탐욕을 통찰력 있게 되돌아보며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현실의 역경을 뚫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모색하는 사상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피폐한 정치현실 속에서 도덕규범 체계가 이미 사회적 약자가 되어 버린 자신들에게 압제로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인간 근원에 관한 존재론적인 문제로까지 밀고 들어가 과연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배적 지위를 누릴 만한 자격과 지위가 있는가를 근본적으로 되돌아 본다. 이런 까닭에 노자와 장자의 많은 부분은 인간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그리하여 노장은 인생론에 있어서도 인의예지 등 사회 규범과 질서를 중시하기 보다는 그것이 갖는 기득권적 성격을 비판함으로써 집단이나 권력 중심적 태도를 거부하고 개체 중심적 탈권력적인 태도를 지향한다. 도가 사상이 오늘날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의 관점에 서서 이성과 권력의 해체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계되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사진 노자/네이버지식백과]


 결국 노장 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세간의 이른바 "남부럽지 않은 권세와 부를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세속의 이익을 버리는 데서 생긴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서경'이 제시하는 오복과 육극을 권하거나 피하게 하는 상고시대의 정치철학과 크게 다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더욱이 '노자'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사상이 있다. 제80장은 다음과 같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어야 한다. 유용한 도구들이 수백 종류 있지만 결코 쓰려 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소흘히 생각지 않게 하고 멀리 떠돌지 않게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타고 다닐 필요가 없고, 투구와 갑옷이 있지만 쓸 일이 없으며, 백성들도 문자를 버리고 다시 옛날처럼 새끼줄을 묶어 일을 기록하도록 한다. 그들로 하여금 거친 음식이 달고 거친 옷이 아름다우며 초라한 습속이 즐겁고 사는 집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도록 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보이고 닭이 울고 개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상국가의 모습이다. 혼자됨을 즐기고, 사람과 싸우지 않고, 부작위와 소심, 이런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에 몸을 맡기고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서 유유자적함을 얻는 것이 노자의 삶의 방법이며, 유가의 삶의 방법과 다른 행복관의 발상이다.[행복에 이르는 지혜,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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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게 산다' 라는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불행을 줄이고'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뜻을 가질 뿐이라는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생은 향락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헤쳐 나가기 위해 있는 것이다. 라틴어로는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이탈리아어로는 '인생을 적당히 즐겼으면 도망칠 일이다.' 독일어로는 '인간은 세상을 이겨 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또는 '그는 세상을 잘 뚫고 나갈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다. 고통 없는 상태에 권태까지 깃들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된다면 이 세상의 행복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은 모두 망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향락을 사들이려고 해서는 안된다.


■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바라는 사람은 눈뜬 장님이다.


 우리가 꿈꾸는 최상의 행복에 대한 비천하고 터무니없는 소망은 세상의 모든 것을 희생시킨다. 그러나 이런 소망을 버리고 자기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것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멜크와의 왕복 서한집', 행복에 이르는 지혜,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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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장자/네이버지식백과]

 

 제물론(齊物論)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장자는 이 넓은 우주에 비교할 때 인간이란 존재는 소꼬리의 털에 붙은 벌레의 알보다도 미미한 존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우주 자연의 중심도 아니며 인간이나 들풀이나 벌레나 만물은 모두 우주를 구성하는 각기 평등한 일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의 편협한 이익과 생각만을 내세워 자연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제물(齊物) 사상이다. 그리고 인간끼리 전쟁을 벌이는 것 또한 마치 달팽이 뿔 위에 둥지를 틀고 잇는 두 나라의 싸움에 불과한 부질없고도 어처구니 없는 짓일 뿐이다. 실로 우주 자연은 얼마나 광대하고,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살아 가고 있는가.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뽐내면서 그 어리석음에 빠져 남보다 멋있고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칠 때조차 자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그 본래 모습 그대로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 우리가 집착하는 가치 또한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인간 사회에만 통용되는 가치일 뿐 우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일지라도 다가가면 도망치지 않는 새가 없고, 사람이 아무리 더럽다고 기피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좋아하는 짐승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름답고 더러운 것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나 귀하고 천함, 심지어는 살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사람들은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고 논쟁을 즐겨 하지만 그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제3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제3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주관, 곧 나름대로의 입장과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면 모든 가치 체계가 사라진다. 이쪽에서 옳은 것이 저쪽에서는 틀린 것이 될 수 있고, 이쪽에 귀한 것이 저쪽에서는 천한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겉으로만 상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으나 상대주의라는 것도 노자의 사상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말하여 사람들이 선악미추의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미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구분이 없다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인 양 집착하는 것이다. 삶의 불행은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에 사람들이 집착하는 데서 나온다.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욕망에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아야 할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노자가 예시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도덕과 지식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위적 가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무엇이 남는가. 마음속의 자유가 남는다. 집착이란 나의 욕망 체계를 일정한 목표에 얽어매는 일이다. 나의 욕망은 자유롭고자 하지만 어떤 것에 집착함으로써 그것을 얻기 위해 전욕망 체계를 재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욕망도 자유롭게 실현되지 못한다. 노자나 장자는 모두 욕심을 없앨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욕망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틀에 얽매인 욕망 체계를 파괴하라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욕망 체계를 파괴할 때 인간은 상상력이 시키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욕구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욕망을 통해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맛볼 수 있다.[행복에 이르는 지혜,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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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행복한 토끼/온라인 커뮤니티]

 

 플라톤의 행복론은 그리스 고유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으로 온갖 다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몫을 누리면서 다른 것들과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모습이고 사람이 또 본래 살아야 할 모습이며 나라가 추구해야 할 가장 올바른 상태이다. 이러한 모습을 플라톤은 정의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정의롭다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정의롭고 올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은 받으시 행복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그리스 공동체란 발칸반도 곳곳에 산재한 각각의 도시국가들이 제 나름의 특징과 역할을 가지고 다른 이웃 도시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고, 행복한 나라라 함은 한 도시국가에 속하는 여러 다른 계층, 즉 통치자 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들이 서로 상대방의 역할을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핞고, 그들 각자의 본성과 소질에 맞게 자기 역할을 최고의 상태로 수행하면서 서로 조화와 공존을 이루면서 그 나라 전체의 평화와 평온을 이룩하며 사는 것이다.

 요컨데 사람이 사회적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여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하고 자기가 누려야 할 것을 잘 누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것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서로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공존해 가는 것이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인간 각각의 내면의 행복한 상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개인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세 가지 측면, 즉 냉철한 이성의 측면과 자존심과 명예를 중시하는 기개의 측면, 그리고 감각적인 욕심과 충동에 따라 살려는 욕망의 측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플라톤은 이런 세 가지 서로 다른 부분이 인간 영혼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들 가운데 어떤 한 부분이 나머지 부분을 억누르거나 지배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플라톤이 이성주의자라고 해서 개인 내면의 이성이 나머지 기개나 충동을 억눌러서 금욕적으로 사는 것을 플라통이 말하는 행복한 삶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나게 노는 자리에 가면 욕망의 측면이 조화를 이끌어 가면서 잘 놀아야 하고 자존심 내세우거나 용기를 발휘해야 할 곳에서는 기개의 측면이 그렇게 해야 한다. 이처럼 개인적으로행복하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훼손됨이 없이 각각의 부분이 마치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루면서 때로는 빠른곡, 때로는 평정한 곡을 연주하듯 내적인 조화를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제멋대로 본능을 충족시키거나 금욕주의자처럼 일체의 본능을 따르지 않거나 하는 것은 모두 행복한 삶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행복론은 인간의 다층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하고 있는 매우 균형잡힌 행복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 플라톤/네이버 지식백과]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론의 요체는 '수분자족(守分自足) 하며 살아야 한다.' 즉, '분수를 지키고 스스로 넉넉함을 느낀다'라는 동양적인 금언과도 일맥상통한다. 자기 분수와 직분, 자기 할 일을 잘 알고 그것에 충실하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물론 수분자족하며 살자는 말은 자기는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수를 알고 그 정도로나마 만족해야지 하는 패배주의적인 자기 위안 내지 자기 합리화로 들리기도 한다. 하기는 강자나 지배자는 수분자족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말은 강자가 약자를 업신여기면서 하는 말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론, 이른바 수분자족론은 약자에게만 강요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별들이 각각 제자리에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코스모스를 이루듯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에게 요구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통치 계층은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욕망과 흥미를 가지고 있으니 적성과 소질대로 나라를 잘 다스리면 당연히 행복할 것이고, 군인 계층은 소질대로 용기와 명예를 가지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니 통치자의 역할을 넘보거나 생산자의 물건들에 눈을 돌리지 않고 나라를 잘 수호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생산자 계층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신발을 만들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잘하면 당연히 그 때문에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한 사회는 서로의 적성과 소질을 실현해 가면서 서로 의지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적성과 소질은 각각 다른 뿐 어느 것이 보다 좋은 것인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사람 사는 사회를 채우고 귀하고 소중한 가치이고, 각자는 누구의 간섭이나 침해 없이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의 적성에 따른 고유한 역할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 가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기본적으로 행복한 나라, 행복한 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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