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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과 세오녀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내용이 없으나 고려초기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에 실려있다.


[사진 삼국유사 권1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한국학중앙연구원]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년 정유년(157년)에 동해 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로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하나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제기를 살펴볼 때, 이때를 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그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알리고 세오녀를 왕께 바쳤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렸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사진 포항 호미곶 연오랑과 세오녀상/국정브리핑]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자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짐의 비(妃)가 짜 놓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오랑이 준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했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은 영일현(迎日懸)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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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

진한(辰韓) 또는 진한(秦韓) 이라고도 한다.



[사진 경주 입실리 출토 세형동검 진한시대의 유물인 세형동검, 동과, 동모. 경주 입실리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고 서로 불러 무리를 이루었는데, 진나라 말과 유사하여 간혹 진한(秦韓)이라 했다고 한다. 열두 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 모두 1만호씩이고 각기 나라라 일컬었다."

 또 최치원은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들이 피신해 온 곳이다. 때문에 탁수(琢 水)의 이름을 취해 살고 있는 읍과 마을을 사탁(沙琢), 점탁(漸)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을 도로 발음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때로 사량(梁)이라 쓰고, 양(梁) 역시 '도'로 읽는다." 

 신라는 전성기에 서울이 17만 8936호였고,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金入宅)-부유하고 윤택한 큰집이 있었다. 그것은 남택, 북택, 오비소택, 본피택, 양택, 지상택, 재매정택,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 한기택, 비혈택, 판적택, 별교택, 아남택, 금양종택, 곡수택, 유야택, 사하택, 사량택, 정상택, 이남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 임상택, 청룡사, 교남택, 항질택, 누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 등이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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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과 백제

남부여라고도 하며 곧 사비성이다.





 신라시조 혁거세가 자리에 오른지 19년 임오년에 변한( 卞韓)사람이 나라를 바쳐 투항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다."

 최치원이 말했다.

 "변한은 백제(百濟)다."

 '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다. 에 의하면, 온조가 일어난 것은 홍가( 鴻嘉)-서한 성제 유경의 연호다. 4년 갑진년(기원전 17년)이었으니, 혁거세나 동명왕의 세대보다 40여년 뒤의 일이 된다.

 '당서'에서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라고 말한 까닭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뿐이다. 간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에서 나와 변한에 나라를 세워 마한 등과 대치한 적이 있었다고 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던 일로, 도읍이 낙랑의 북쪽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이는 구룡산(九龍山) 역시 변나산(卞那山)으로 불렀다는 이유로 함부로 고구려를 변한이라 하는데, 이는 아마도 잘못된 것이다. 마땅히 옛 현인(최치원)의 견해가 옳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백제 전성기에 15만 2300호였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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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가야의 영역/두피디아]


 다섯가야

 '가락기(駕洛記)' 찬(贊)에 보면, 하늘에서 자주색 끈 한 가닥이 내려와 둥근 알 여섯 개를 내렸는데, 다섯 개는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가 이 성에 있게 되었다. 성에 남은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다섯 개는 각기 다섯 가야의 군주가 되었으니, 금관(金官)을 다섯의 숫자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고려의 '사략(史略)'에는 금관까지 숫자에 넣고 창녕(昌寧)을 더 기록했으니 잘못된 것이다.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阿羅伽耶) 라(羅)를 야(耶)로 쓰기도 한다. 지금의 함안이다., 고령가야(古寧伽耶) 지금의 함녕이다., 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이다., 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으로 벽진이라고 한다., 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이다. 다.


[사진 가야금관/두피디아]


 또 고려의 '사략'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년(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첫째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 둘째 고령(古寧) 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일명 기성(岐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상주다., 셋째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인데 아마 고령을 잘못 적은 것 같다. 며,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 앞의 주와 같이 성산은 벽진강라고도 한다. 이다."

[삼국유사,기이제1권/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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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초기 여러나라의 성장과정/두산백과]


 마한(馬韓)

 '삼국지( 三國志) 위지(魏志)' 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국지 위지는 진(晉)나라 역사가 진수(陳壽)가 편찬한 위, 촉, 오 삼국의 정사 '삼국지' 중 위나라 부분으로 '위서(魏書)'가 정확한 말이다. 여기에 마한 50여 국의 이름이 있으며 백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 왕 준(準)은 궁중 사람들과 측근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나라 땅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

 견훤(甄萱)이 태조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습니다.(금마산은 지금의 전북 익산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다.

 (삼국사기 본기에 이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 준(準)을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마한을 합병했음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간혹 금마산을 마한으로 알고 백제라고 하는 것은 잘못되고 황당한 일이다. 고구려 땅에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사이(四夷)는 구이(九夷)와 구한(九韓), 예(穢), 맥(貊)이 있으니,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했다."라고 한 것은 동이족 즉 구이를 말한 것이다.(사이四夷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일컫는다. 직방씨는 주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천하의 지도와 토지에 관한 일을 했다.)

 '삼국사(三國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주(溟州)는 옛날 예국(國)이었는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印章)을 얻어 바쳤다."

 또 이렇게 말했다.(명주는 지금의 강릉이다.)

 "춘주(春州)는 옛날 우수주(牛首州)며 옛날의 맥국인데, 어떤 이는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 한다."(삭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

 '회남자(淮南子)'의 주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이(夷)는 아홉 종류나 있다."

 '논어정의(論語正義)'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구이란 첫째 현도, 둘째 낙랑, 셋째 고려, 넷째, 만식(滿飾), 다섯째 부유(鳧臾), 여섯째 소가(素家), 일곱째 동도(東屠, 여덟째(倭), 아홉째 천비(天鄙)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해동안홍기는 신라의 승려 안홍이 지은 책이다.)

 "구한이란 첫째 일본, 둘째 중화(中華), 셋째 오월(吳越), 넷째 탁라, 다섯째 응유(鷹遊), 여섯째 말갈(靺鞨), 일곱째 단국(丹國), 여덟째 여진(女眞), 아홉째 예맥(貊)이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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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서국 유적지/쿠키뉴스]


 이서국

 노례왕(努禮王) 14년에 이서국(伊西國) 사람이 금성(金城)을 침공해 왔다. 운문사(雲門寺)에 예부터 전해 오는 '제사납전기( 諸 寺納田 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관(貞觀) 6년 임진년(632년)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淸道) 땅이므로 청도군은 옛날의 이서군이다.

 [삼국유사]


 (정관(貞觀):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 사용했다.)


이서국 전설

때는 서기 297년. 신라 유례왕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길목에 있는 이서국을 공격했다. 이서국은 강하게 저항했다. 신라의 공격에 위기감을 느낀 이서국은 방어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금성(지금의 경주)을 공격했다. 이서국의 공격이 워낙 드세 쉽사리 물리칠 수 없었다. 이때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과 함께 이서국을 물리쳤다. 이 군사들을 대나무잎을 귀에 꽂았다고 해 '죽엽군(竹葉軍)'이라 했다. 이서국을 물리친 이후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은 사라졌다. 다만 대나무잎만 신라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었다. 미추왕의 음덕으로 신라가 이서국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금성에서 이서국 군대를 물리친 신라는 이서국을 공격했다. 이서국과 신라는 이서산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절벽 위에 축조된 이서산성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이서산성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유례왕이 이서산성에서 멀지 않은 운문사로 군사를 철수시킨 뒤, 보양 스님께 어떻게 하면 이서산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보양 스님은 "개라는 짐승은 밤에는 잘 지키지만 낮은 지키지 못하고, 앞은 지켜도 뒤는 꺼려 한다. 낮에 북쪽을 공격하라"고 했다. 이서산성이 있는 산의 모습이 달리는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유례왕이 보양 스님의 말대로 했더니 이서산성은 함락됐다. 신라에 패한 이서국의 왕과 왕족들은 이서산성에서 빠져나와 화양읍 동천리 신둔사 뒷산의 봉우리로 숨었다. 왕과 왕족들이 숨었다고 해, 봉우리 이름이 '은왕봉(隱王峰)'이다. 화양읍 서상리에는 '금장들'이라는 들이 있다. 이서국 왕과 왕족들이 이서산성을 나와 피신하면서, 이서국의 수많은 금은보화를 옮기지 못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금장들이라고 한다.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에 나즈막한 산이 하나 있다. 농촌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진입로 한켠에 '이서국 성지'라고 적혀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비석의 옆면에는 '신라 유례왕 7년(서기 297년) 금성을 공략하다가 반격을 받아 폐성 함락으로 멸망하였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곳이 이서국의 왕성(王城)인 백곡토성이 있었던 곳이다. 흙으로 만든 성이기에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백곡토성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비석에 적혀있는 폐성(吠城)이 있다. 주구산성(走拘山城)이라고도 한다. 산성이 있는 산의 모습이 달리는 개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서산성으로 부른다. 이서산성이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면서 이서국은 멸망했다.[출처:쿠키뉴스/기사원문: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3&aid=0000058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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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남북국시대 발해영토/네이버]


 말갈(勿吉)과 발해

 '통전 通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 末靺 鞨인데, 그 추장 조영(대조영을 말함) 때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불렀다.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년712년이다.)에 비로소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고 했다. 개원 開元 7(719년)에 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 高王이라고 했다.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자 명황明皇이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쳐 마침내 해동성국 海東盛國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15부62주가 있었는데, 그후 당나라 천성天 成 초에 거란의 공격을 받아 격파된 뒤로 거란의 통제를 받았다.

 '삼국사'에서 말하기를 '의봉3년 고종 무인년에 고구려 잔당들이 군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했는데, 개원20년경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발해를 토벌했다. 또 성덕왕32년, 현종 갑술년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토벌했다.'라고 했다. 또 신라 '고기古記'에 '고구려의 옛 장수 조영의 성은 대大氏인데,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했다.'라고 했다. 이상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바로 말갈의 다른 종족으로서 다만 갈라지고 합함이 같지 않을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長城)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고 했다.

 [당나라] 가탐賈耽의 '군국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해국의 압록, 남해, 부여, 추성 네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땅인데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지금의 용주)에서 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는 39개의 역驛이 있다."

 또 '삼국사三國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제 말년에 발해, 말갈, 신라가 백제 땅을 나누었다."

 신라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가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어 나라에 폐해가 된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阿 瑟羅州에 이어져 있다고 했다.

 또 '동명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졸본성은 땅이 말갈과 이어져 있다.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125년)에 말갈 군사가 북쪽 국경으로 들어와 대령大 嶺의 목책을 습격하고 이하 泥 河를 건너갔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勿吉로 썻다.

 '지장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읍루와 물길은 모두 숙신이다."

 흑수黑水와 옥저沃沮는 동파東坡의 '지장도'를 깊이 고찰해 보니, 진한의 북쪽에 남북 흑수가 있다.

 살펴보면 동명제는 즉위한지 10년 만에 북옥저를 멸망시켰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 20여 호가 백제에 투항했으며,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으니 또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 흑수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삼국유사]


말갈족은 숙신,읍루라 불리던 종족으로 여진족이라 불렸고, 청나라를 세웠으며 현재 중국에서는 만주족으로 불리는 민족이다. 만주족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와 뿌리가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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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도깨비 문양의 '귀면기와', 치우천왕의 형상을 묘사한 유물이라고 한다.]


치우( 蚩尤) 천왕(天王)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황제헌원(黃帝軒轅,BC 2692~2592년경)은 삼황오제 중 한 사람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자신들의 뿌리와 관련하여 삼황 중에서도 황제헌원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어서 중국 정사의 첫번째 책인 '사기'에서도 첫머리를 황제헌원으로 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그 후의 제옹들도 대부분 그 뿌리를 황제헌원과 연결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황제헌원에 대해 '태백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전(少典)의 다른 지파를 공손(公孫)이라 하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로 유배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나온다.


'황제(黃帝)는 소전(少典)의 자손이고 성은 공손(公孫)이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전은 배달국에서 갈라져나간 사람으로서, 바로 염제신농의 아버지이다. 그러한 소전에서 다시 갈라져나간 후손 중의 한 사람이 공손이며, 그 공손씨의 후손이 바로 황제헌원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황제헌원과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왕 사이에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문에는 황제헌원이 치우를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헌원에 앞서 치우 천왕에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삼성기' 상편의 기록을 보자.

 

 '신시 말기에 치우 천와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다.'

 

 또 '삼성기' 하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몇 대를 지나 자오지(慈烏支) 환웅에 이르렀다. 신과 같이 용맹이 뛰어났으니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다.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 천왕이라 불렀으니, 치우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다.'

 14대 치우천왕은 철을 캐내어 처음으로 갑옷과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었으며, 투구와 갑옷을 처음 본 중국인들은 두려워하며 '머리는 구리로 되었으며 이마는 쇠로 되었다.'하여 여러 문헌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한 무시무시한 괴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쇠를 캐내어 강력한 병장기를 만든 것이 배달국에서 비롯되었음은 쇠 철(鐵)자의 옛글자를 보아도 알 수 있다. '鐵'의 원래 글자는 '금(金)'과 동이족을 일컷는 '이(夷)'자를 합해서 만들 글자로 처음 쇠를 다룬 것이 동이족임을 나태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황이 이러한데도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치우와의 전쟁에서 헌원이 승리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며, 고의적인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의 진원지 격인 '사기'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당시 치우의 군대에게 쫓겨다니던 헌원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리를 이끌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며, 늘 병사로 하여금 병영을 호위하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한 헌원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 다녔으며, 또 언제 추격해 올지 모르는 치우의 군사들 때문에 막사 밖에는 늘 보초를 세워 두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 후로 천왕은 중원대륙에서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질 만큼 사후에가지 그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치우와 헌원의 싸움도 결국 같은 동이족 간의 전쟁이었다.

[이일봉, 실증한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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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

 고기(古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한서에 선제 신작 3년 임술년(기원전 59년) 4월8일에 천제(天帝)가 오룡거를 타고 흘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하며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했다.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고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고 했는데, 해(解)를 씨로 삼았다. 왕은 이후에 상제의 명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부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라 했는데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여기서 오룡거(五龍車)란, 천제가 타는 용 다섯 마리가 모는 수레를 말하며, 5라는 숫자는 고구려에 있던 성의 숫자이다.

 

동부여

 북부여 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 이렇게 말했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터이니, 너는 다른데로 피해 가라.

(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

동해 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 왕도로 삼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했다.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를 지내 대를 잇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큰 연못(백두산 천지)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가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내려주신 아들이로구나!"

 곧 아이를 거두어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라고 했다. 그가 성장하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아 왕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태자 대소에게 와위가 전해졌다. 지황 3년 임오면(22년)-대무신왕5년-에 고구려 왕 무휼이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망했다.(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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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서 아편을 흡입하는 모습]

 

아편전쟁과 서양의 충격, 그리고 동아시아 기존 질서의 붕괴..

 

중국은 오랫동안 세계인들이 선망하는 도자기, 차, 비단 등 고급 상품을 만들며 세계의 은을 빨아들여 풍요를 누렸지만, 1820년대부터 은의 순유출 시기가 시작된다. 중국은 16세기 이래 300년간 대외 무역에서 거대한 은 유입을 계속 유지해 오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은의 역류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유럽은 10퍼센터 대의 고성장을 개시했다. 중국과 유럽의 위치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수 세기 동안 유지해 온 강대국의 지위가 유럽의 보잘것없이 보이는 몇몇 나라들에게 위협당하리라고 생각한 중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편전쟁의 패배가 이런 자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급성장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 영국은 강력한 전투함과 대포를 앞세워 청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 주었다.

아편전쟁의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 동아시아 각국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청을 국가 안보의 울타리로 생각했던 조선도 크게 놀랐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일시적 패배로 받아들이고 아직도 청의 군사력과 국력을 신뢰했다. 반면 청의 패배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도쿠가와 바쿠후였다. 그들은 청의 패배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서양의 확실한 군사력 우위에 의한 것으로 보고, 커다란 위기감에 빠졌다. 아편전쟁 소식은 전 일본을 전율시켰고,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리고 청에 대한 평가도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한편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는 청의 근대화 노력과 양무운동의 발단이 된다. 또한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의 청에대한 재평가는 물론이고, 중국을 중심으로한 세계질서의 종말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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