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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기준은 감각이고 정열이다.


우리는 때때로 많은 쾌락들을 지나쳐 버린다. 그리고 잠시 고통을 참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보다 큰 쾌락이 나올 경우, 우리는 많은 고통들이 쾌락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해된 것은 감각이 없고,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을 즐겁게 하는 것은 지속적인 음주나 주연이 아니라, 선택과 거부의 근거들을 조사하는, 그리고 영혼을 괴롭히는 많은 혼란을 야기하는 공허한 의견들을 패퇴시키는 냉철한 관조이다.


모든 쾌락이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모든 쾌락이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든 고통이 나쁘지만 모든 고통이 반드시 회피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전혀 없이 평온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친구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가 친구로 삼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적으로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능력 밖에 일이라면 가능한 한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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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들,

경험해보고 싶은 일들,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을 쭉 적어 보세요.

그리고 그냥 그것들을 꾸준히 하세요.

하나씩 하나씩.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이것 저것 너무 고민하지 말고,

우리, 그렇게 살아요.

[혜민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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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이여, 너는 학대하고 있구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구나. 그러면 너는 자신을 존중할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은 짧고, 네 인생도 거의 끝나간다. 하거늘 너는 아직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들의 영혼에서 행복을 찾는구나.


 자기 영혼의 움직임들을 추적하지 않는 자들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육신의 모든 것은 강이고, 영혼의 모든 것은 꿈이요 연기다. 그리고 삶은 전쟁이자 나그네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철학뿐이다.


 원칙을 고수하며 무엇을 기대하거 피하지 않고 자연에 맞는 현재의 활동과 네 말과 발언에 담긴 영웅적인 진실성에 만족한다면, 너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이웃사람이 말하고 행하고 생각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이 행하는 것이 올바르고 신의 마음에 들도록 마음 쓰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여가를 버는가. 선한 사람이라면 주위의 나쁜 성격들을 둘러볼 것이 아니라, 좌고우면(左顧友眄)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야 한다.


 인간사란 얼마나 덧없고 하찮은 것인지 보라. 어제는 한 방울 진액이었다가 내일은 미라나 재가 된다. 따라서 이 짧은 시간을 자연에 맞게 보내고 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도록 하라. 올리브가 다 익은 뒤 낳아 준 대지를 찬미하고 길러 준 나무에 감사하며 떨어지듯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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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원인이란 따로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우리의 욕심과 그 작용에 달려 있다. 아무리 건장한 체격도 대개는 식사, 보행, 주의력, 독서, 날씨 등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형편에 따라서 날마다 긴장에서 침체로 왔다가 또 침체에서 긴장으로 옮아가는 것이다.[알랭 Al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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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다소 고생이 되더라도 너무 평탄한 길은 걷지 않는 것이 좋다. 왕이라고 해서 만사가 생각대로 되는 것이라면 참 가엾은 존재라고 하겠다. 행복이란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하여 눈뜨게 하는 불안이나 정념, 또한 어느 정도의 고통을 언제나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세계보다 기대와 상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더욱 행복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실제 행복을 손에 넣으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해서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재물에는 두가지가 있다. 주저앉게 하는 재물은 인간을 권태롭게 만든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재물은 다시 계획이나 일을 요구한다.[알랭 Alain]





[쿠쿠정수기, 공기청정 제습기, 비데 렌탈, 쿠쿠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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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위와 행복

 사람이 하는 일이 많으면 도리어 혼란을 초래하고, 공(功)을 서두르면 도리어 파멸에 빠지는 일이 흔한 법이다. 그래서 노자는 오히려 무위(無爲)가 뜻을 크게 이루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무위(無爲)의 술(術)이란 구체적으로는 유약과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고, 무지와 무욕을 궈장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노자는 무위의 상징으로서 물(水)과 어린이 그리고 여성 등 이른바 비공격적인 약자들을 예찬한다. 유가가 말하는 인의예지나 번잡한 법제금령은 말세의 것으로 배척하고, 태고의 소박한 세상을 이상으로 삼는다. 노자 제19장에는 "성스러움을 끊어 버리고 지혜를 내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백 배로 늘어날 것이다. 인을 끊어 버리고 의를 내버리면 백성들은 효도와 자애로움으로 돌아갈 것이다. 기교를 끊어 버리고 이익을 내버리면 도둑들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글로써 표현해도 부족하기 때문에 설명을 덧붙여야만 한다. 본시의 바탕을 드러내고 소박함을 지니며,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망을 적게 가져야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성지(聖智)를 끊고, 인의(仁義)를 버려 교리(巧利)를 낮추는 것에 의해서 민리(民利)도 백 배가 되고, 백성도 효자(孝子)에 복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도적 없는 안녕의 세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요컨대 소박함과 적은 욕심이 사람의 본래 자연의 모습이며, 이것으로 돌아감으로써 사람은 모두 그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가 사상은 인간의 무지와 탐욕을 통찰력 있게 되돌아보며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현실의 역경을 뚫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모색하는 사상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피폐한 정치현실 속에서 도덕규범 체계가 이미 사회적 약자가 되어 버린 자신들에게 압제로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인간 근원에 관한 존재론적인 문제로까지 밀고 들어가 과연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배적 지위를 누릴 만한 자격과 지위가 있는가를 근본적으로 되돌아 본다. 이런 까닭에 노자와 장자의 많은 부분은 인간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그리하여 노장은 인생론에 있어서도 인의예지 등 사회 규범과 질서를 중시하기 보다는 그것이 갖는 기득권적 성격을 비판함으로써 집단이나 권력 중심적 태도를 거부하고 개체 중심적 탈권력적인 태도를 지향한다. 도가 사상이 오늘날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의 관점에 서서 이성과 권력의 해체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계되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사진 노자/네이버지식백과]


 결국 노장 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세간의 이른바 "남부럽지 않은 권세와 부를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세속의 이익을 버리는 데서 생긴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서경'이 제시하는 오복과 육극을 권하거나 피하게 하는 상고시대의 정치철학과 크게 다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더욱이 '노자'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사상이 있다. 제80장은 다음과 같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어야 한다. 유용한 도구들이 수백 종류 있지만 결코 쓰려 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소흘히 생각지 않게 하고 멀리 떠돌지 않게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타고 다닐 필요가 없고, 투구와 갑옷이 있지만 쓸 일이 없으며, 백성들도 문자를 버리고 다시 옛날처럼 새끼줄을 묶어 일을 기록하도록 한다. 그들로 하여금 거친 음식이 달고 거친 옷이 아름다우며 초라한 습속이 즐겁고 사는 집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도록 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보이고 닭이 울고 개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상국가의 모습이다. 혼자됨을 즐기고, 사람과 싸우지 않고, 부작위와 소심, 이런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에 몸을 맡기고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서 유유자적함을 얻는 것이 노자의 삶의 방법이며, 유가의 삶의 방법과 다른 행복관의 발상이다.[행복에 이르는 지혜,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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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3대 선(善)인 건강과 청춘과 자유도 소유하고 있는 동안은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잃은 뒤에야 비로소 느끼게 된다. 이 세 가지도 소극적인 선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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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게 산다' 라는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불행을 줄이고'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뜻을 가질 뿐이라는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생은 향락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헤쳐 나가기 위해 있는 것이다. 라틴어로는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이탈리아어로는 '인생을 적당히 즐겼으면 도망칠 일이다.' 독일어로는 '인간은 세상을 이겨 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또는 '그는 세상을 잘 뚫고 나갈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다. 고통 없는 상태에 권태까지 깃들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된다면 이 세상의 행복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은 모두 망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향락을 사들이려고 해서는 안된다.


■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바라는 사람은 눈뜬 장님이다.


 우리가 꿈꾸는 최상의 행복에 대한 비천하고 터무니없는 소망은 세상의 모든 것을 희생시킨다. 그러나 이런 소망을 버리고 자기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것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멜크와의 왕복 서한집', 행복에 이르는 지혜,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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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공자/네이버 지식백과]

 

공자와 맹자-고대 유가 사상

1)자연과 인간의 선성

 

유가 이전의 상고시대에는 복록수(福祿壽)로 표징되는 행복한 삶과 수덕(修德)으로 표징되는 도덕적 삶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고 명목에서나 실질에서나 그 두 가지 모두가 위정자가 추구해야 할 바의 것이었다. 그러나 도덕과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적 경향이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종국에는 오로지 도덕적 삶에 충실한 삶만이 인간 본연의 자세이자 바람직한 삶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논어'나 '맹자'를 시작으로 하는 유가 계통의 문헌에서 도덕적 삶에 대한 언급은 넘쳐흘러도 행복한 삶에 대한 언급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자 내지 유가 사상이 행복한 삶을 무시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공자는 전쟁과 하극상이 끊이없이 벌어졌던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겪는 삶의 고통과 불행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수없이 목도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원인이 위정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에 있다고 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공자는 그러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했고, 왜 그것이 마땅하고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연의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우주와 사람이 갖는 본연의 모습을 밝혀 그것을 기초로 사람들 특히 위정자들을 교화하고자 힘썼고 그러한 교화에 앞장 설 지식인들을 키우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사진 맹자/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면 이러한 공자의 사상의 근간에 자리 잡은 우주 자연의 본연의 모습은 무엇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표상하는 유가적 전통은 우선 우리를 둘러싼 우주 자연을 평화롭고 생명력이 가득한 유기체로 파악한다. 사실 이것은 유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양 사상의 공통된 전제이다. 그런데 유가 사상에서 좀 독특한 것은 그러한 생명력이야말로 선한 것 중의 선한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데 유가는 우주 자연의 생명력을 어질다거나(仁) 성실하다고(誠) 표현한다. 곧 유가에게 우주 자연은 지극히 선한것, 최고선이다. 유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우주 자연의 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모습을 닮는다. 인간도 우주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속성을 보존하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자연에 깃든 생명력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 된다. 그것이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선하다.

 물론 인간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무릇 우주 자연의 품에서 태어나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마찬가지다.(이 주장에 대해서는 유가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다.) 하지만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는 본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 같은 기적 질료(氣質)가 있고, 그것에 기인하는 욕망과 감정이 있으며, 생각하고 판단하는 의식 주관, 곧 마음이 있다. 모든 존재에 동일한 것은 본질이지 기질이나 마음이 아니다. 인간과 다른 존재의 차이는 실상 이 기질과 마음에서 발생한다. 유가는 인간의 기질과 마음이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느 것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선천적 도덕성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존재, 도덕적 존재가 된다. 곧 인간은 동물과 같이 욕망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기질이 가장 깨끗하기 때문에 동물보다 순화된 욕망 및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동물은 의식 주관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반성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의식 주관이 발달했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반성하여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이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고, 저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의식 주관은 행위를 이런 방향으로도 저런 방향으로도 이끌어 갈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인간의 본질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인간의 본질을 자각하여 그 본질을 반영하는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우주 자연의 도덕성, 생명력을 살려 내는 길이고, 그를 통해서 모든 만물을 길러 내는 천지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천지와 함께 우주를 떠받치는 세 기둥(三才)이 될 수 있으며, 그 생명력이 사회적으로 전파되어 태평한 세상을 만들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영원함과 합치되어 참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행복에 이르는 지혜,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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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장자/네이버지식백과]

 

 제물론(齊物論)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장자는 이 넓은 우주에 비교할 때 인간이란 존재는 소꼬리의 털에 붙은 벌레의 알보다도 미미한 존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우주 자연의 중심도 아니며 인간이나 들풀이나 벌레나 만물은 모두 우주를 구성하는 각기 평등한 일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의 편협한 이익과 생각만을 내세워 자연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제물(齊物) 사상이다. 그리고 인간끼리 전쟁을 벌이는 것 또한 마치 달팽이 뿔 위에 둥지를 틀고 잇는 두 나라의 싸움에 불과한 부질없고도 어처구니 없는 짓일 뿐이다. 실로 우주 자연은 얼마나 광대하고,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살아 가고 있는가.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뽐내면서 그 어리석음에 빠져 남보다 멋있고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칠 때조차 자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그 본래 모습 그대로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 우리가 집착하는 가치 또한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인간 사회에만 통용되는 가치일 뿐 우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일지라도 다가가면 도망치지 않는 새가 없고, 사람이 아무리 더럽다고 기피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좋아하는 짐승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름답고 더러운 것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나 귀하고 천함, 심지어는 살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사람들은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고 논쟁을 즐겨 하지만 그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제3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제3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주관, 곧 나름대로의 입장과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면 모든 가치 체계가 사라진다. 이쪽에서 옳은 것이 저쪽에서는 틀린 것이 될 수 있고, 이쪽에 귀한 것이 저쪽에서는 천한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겉으로만 상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으나 상대주의라는 것도 노자의 사상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말하여 사람들이 선악미추의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미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구분이 없다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인 양 집착하는 것이다. 삶의 불행은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에 사람들이 집착하는 데서 나온다.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욕망에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아야 할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노자가 예시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도덕과 지식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위적 가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무엇이 남는가. 마음속의 자유가 남는다. 집착이란 나의 욕망 체계를 일정한 목표에 얽어매는 일이다. 나의 욕망은 자유롭고자 하지만 어떤 것에 집착함으로써 그것을 얻기 위해 전욕망 체계를 재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욕망도 자유롭게 실현되지 못한다. 노자나 장자는 모두 욕심을 없앨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욕망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틀에 얽매인 욕망 체계를 파괴하라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욕망 체계를 파괴할 때 인간은 상상력이 시키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욕구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욕망을 통해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맛볼 수 있다.[행복에 이르는 지혜,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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