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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음부터 읽어봄직..믿음직 바람직 놀람직.."

이광고 다들 알고계시죠? ㅎㅎ

바로 SK매직의 브랜드 CF 광고입니다.


SK매직 런칭 CF 영상/SK매직샵


이 광고 후 최근까지 SK매직의 렌탈 성장세가 굉장히 가파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이유를 보면, 2015년 국내최초 직수형 정수기 출시로 국내 정수기 시장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며, 최근에는 국내최초 스테인리스 직수관을 탑재한 직수 정수기를 비롯해 식기세척기, 공기청정기, 비데, 전기레인지 등 보다 고급화되고 차별화된 제품들이 렌탈 소비자에게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SK매직 올인원 직수 정수기 기능 영상/SK매직샵


그런데, 렌탈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강조되는 부분이 바로 관리에 대한 부분이 아닐 수 없죠?

그 이유는 다름아닌 렌탈이 가진 최대 장점이 바로 정기적인 제품 방문 관리를 받아보는 것이므로 당연히 강조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즉,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일반 구매 상품이 아닌 렌탈로 출시가 되면 관리 서비스에 대한 퀄리티가 반드시 따라줘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렌탈 제품으로서는 자연스레 외면받을 수 밖에 없는데요,


렌탈=관리


SK매직 안심OK 서비스 B.I/SK매직샵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SK매직의 경우 회사의 성장과 더불어 렌탈 관리 서비스를 대폭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브랜드 파워 1위, 소비자 웰빙지수 1위, 소비자의 선택 2년 연속 수상 등 실제 고객만족도도 제품의 퀄리티와 맞물려 급격히 향상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데, SK매직의 렌탈 관리 서비스는 일반적인 명칭과는 조금 다르게 불리고 있습니다.

바로, 안심OK 서비스라고 하는데요,


SK매직 안심OK 서비스 B.I/SK매직샵


안심OK란,

SK매직 렌탈 서비스로 불렸던

서비스 명칭을 대체하는 새로운 브랜드로

고객에게 안심을 제공하기 위한

SK매직의 진정 어린 따스한 마음을

손글씨와 하트 모양으로 표현한 서비스 브랜드.

또한 SK를 대표하는 빨간 색상과

OK! 표현을 사용해

높은 서비스 수준과 책임감을 강조.


SK매직 안심OK 서비스 특장점

1. 생산부터 설치, 사후관리까지

2. 전국적인 설치, 서비스 인프라

3. 전문 MC의 꼼꼼한 정기방문 케어

4. SK매직 특별 5+ 케어 서비스

(직수관 교체, 체계적 필터 관리

조리수 밸므 무상 설치, 방문 살균케어,

물튀김 없는 위생적 구조)


[SK매직 안심OK 서비스 자세히 보기]



SK매직 식기세척기 CF 영상/SK매직샵


이처럼 SK매직의 렌탈 관리 서비스 '안심OK 서비스'는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식기세척기, 전기레인지 등

대표적인 주방, 건강 가전 제품을

제조-설치-관리까지

한번에 one-stop으로 가능한 서비스의 제공은 물론,

모두 직영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어

무상설치와 지정일 설치, 기존제품 무상수거와

정기적인 사후 관리 서비스까지 해주기 때문에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렌탈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차원높은 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용출처: SK매직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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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연령층은 7~8세 이상의 유소년부터 중장년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어린 학동들이었다. 이들은 연령상 한창 놀이를 즐길 나이이므로 학습보다는 놀이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은 인류학자인 윤학준(尹學準)의 어린 시절 추억담인데, 그는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를 훈장으로 모시고 가숙(家熟)에서 '천자문'을 배웠다고 한다.


대관령서당 선생님과 학생들 기념 촬영(1959)/ⓒ국가기록원


저녁 무렵 아이들은 옆집 마당에서 '진 뺏기 놀이'에 열중해서 함성을 지르며 놀고 있는데, 그 고함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면서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마음은 콩밭에 가 있어서 글이 머리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벼락은 떨어졌고, 회초리가 날아오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이런 어린 학동들의 관심을 공부로 유인하기 위해 흥미를 유발하는 여러가지 놀이가 동원되었다. 그중 하나가 '글자 찾기 놀이'인데, 이것은 '천자문' 등을 통해 이제 막 글자를 익혀가는 어린 학생들의 놀이 중 하나였다.


두 사람 이상 복수의 개구쟁이가 책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과(戈)나 식(式) 따위의 (삐침이 비슷한) 글자를 누가 먼저 가장 많이 찾아내는가 하는 놀이이다. 순간적인 승부이기 때문에 자못 시끄럽다. 이 '삐침' 찾기 놀이에 싫증이 나면 이번에는 같은 글자가 나란히 있는 것을 찾는 놀이를 한다. 이 놀이의 경우에는 모양은 비슷하나 다른 글자, 가령 강(岡)자와 망(罔)자가 나란히 있는 것을 짚었을 때는 페널티가 붙는다.


삐침이나 한자의 부수가 같은 글자 찾기와 유사하나 뜻이 다른 글자 찾기는 놀이를 통해서 글자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이는 앞으로 사서삼경과 같은 경전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미처 익히지 못한 글자를 자전(字典)이나 옥편(玉篇)에서 찾아야 할 때 매우 손쉽게 찾기 위한 학습방법 중의 하나였다.


학습과 관련된 본격적인 놀이로는 '초(初) 중(中) 종(終) 놀이'가 있었다. 학동 서넛이 짝이 되어 한 학동이 옛사람의 시구(詩句) 한 구절을 소리 높여 읊으면 다른 학동이 이에 호응하여 대구(對句)를 찾아내는 것으로, 시 창작에 도움이 되는 놀이였다. 또 '화승작(火繩作)'이나 '각촉부시(刻燭賦詩)'와 같은 놀이도 있었다. 이것은 시간을 정해 놓고 글짓기를 겨루는 것으로, 짧은 시간 내에 글을 얼마나 짜임새 있게 잘 짓느냐를 경쟁하는 놀이였다.


학동들의 야외 수업/ⓒ대구광역시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공부하는 데 필요한 정신 집중 강화와 체력 보강을 위한 놀이도 있었다. 정신집중 강화를 위한 것으로는 '투호(投壺)'가 있었다. 서당의 마당에 항아리를 놓고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10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항아리 속에 던져 많이 넣은 편이 이기는 것인데, 항아리에 화살을 집어넣으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원래 이 투호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향사례(鄕射禮)와 더불어 유생들이 예법을 익히고 시행하는 의식이었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투호를 향사례와 함께 흥학(興學)의 일환으로 보고 수령들에게 이를 실시하도록 권장하였다.


체력을 보강하는 놀이로는 줄넘기와 '태격'이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은 새끼줄로 줄넘기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자신을 찾아와 글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에게 먼저 줄넘기를 3천 번 하도록 한 후에 글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또 일개 가문에서 전해 오는 일이기는 하지만, 전라도 김제의 어느 가문에서는 태극을 음차한 '태격'이라는 무예를 익혀 몸을 단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놀이는 아니지만 이황(李滉, 1501~1570)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나오는 도인법(導人法)은 공부하면서 생긴 심신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서당에서 널리 행해졌다.


서당의 행사로 개접례(開接禮)와 파접례(罷接禮)가 있다. 개접례와 파접례는 일종의 개강식과 종강식인데, 주로 규모가 큰 서당에서 실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접은 대략 3월에서 5월 사이에 했고, 파접은 7월 이후 날씨가 쌀쌀해지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모든 서당이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농촌의 경우에는 일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농번기에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서당에 다니며 공부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서당의 행사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책거리였다. 책씻이(冊施時) 또는 세책례(洗冊禮)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학동들이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스승에게 감사의 표시로 떡을 해서 올리는 간단한 잔치였다. 책 한 권을 다 읽은 학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학동들도 이 날은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덩달아서 좋아했다. 다음은 어린 시절 안동에서 서당을 다닌 윤학준의 추억담이다.


나에게 도 하나의 즐거움은 가끔씩 들어오는 '책거리 떡'이다. '책거리 떡'이란 '학생'이 책을 한 권 데면 감사의 뜻으로 스승에게 가져오는 떡이다.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인데, 떡이 마치 귀(耳) 모양 같아서 '귀떡'이라고도 한다. 크기도 귀만한고 속은 비어 있으며 겉에는 노란 콩고물을 입힌다. 속이 비어 있는 것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소견이 넓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도량이 있고 틀이 큰 사람이 되라는 소망이 것들어 있다.


책거리는 때가 되면 의례적으로 행하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학부모들이 학동들의 학업 성취 정돌을 확인하고 격려하며 훈장의 노고에 감사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때 먹는 떡 하나에도 이와 같이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책거리로 송편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송편과 같이 속이 지식으로 꽉 찬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서당행사 중의 하나로 봄에 등산을 하거나 여름에 천렵(川獵)을 하기도 하였다. 정기적으로 실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봄이 되면 훈장과 학동들이 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고 높은 곳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영조 대에 경상도 고성현(固城縣)에서 훈장 노릇을 하던 구상덕(仇尙德, 1706~1761)은 봄이 되면 학동들과 산에 올랐는데,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여름에는 시원한 강이나 계곡으로 물놀이를 나가 더위에 지친 신심을 회복하고 공부를 향한 의욕을 재충전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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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은 조선시대에 성행한 초급 교육기관 중의 하나였다. 서당의 기원을 무엇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으로까지 소급하는 학설도 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인들은 책을 좋아하여 -중략- 저잣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당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문무교육을 겸비한 사설 교육기관이기에 이를 서당의 기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서긍(徐兢,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에서 고려로 파견돼 왔던 사절의 한 사람)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 두서너 채가 마주 보고 있는데, 백성의 자제들이 이곳에 모여 스승에게서 경서를 배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의 경당과 고려의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모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서당/ⓒ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서당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16세기로,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동에 거주하던 김진(金璡, 1510~1560)은 1525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임하현(臨河縣)으로 이거한 후 부암(傅巖) 근처에 서당을 설립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

부암의 곁에 서당 한 채를 짓고 자제와 고을의 어린이를 불러 모아 학령(學令, 학교에서 학생들의 활동과 수업내용, 처벌 규정을 정한 학칙)을 세우고 수업과정을 엄히 하였다. 가르치는 데 열성적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고 수십 년 하였더니 학도(學徒)의 기상이 크게 일어났고 경전을 외우는 소리가 온 마을에 가득하였다.

"


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초기의 서당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김진은 먼저 집 근처에 서당을 세우고 자기 가=문의 자제와 마을의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가 과거 응시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한 것은 유학의 가르침, 즉 '수신제가 (修身齊家)'를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르치는 일에 더욱 열성적이었고 교육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년 동안 했더니 마침내 학도의 기상이 크게 진작되고 마을에 경전 읽는 소리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16세기 서당의 모습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양란을 겪고 난 후 정부는 재정적인 이유를 들어 관학(官學)인 향교에 교관(敎官)을 파견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서원의 활동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서당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이러한 사정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고을에는 비록 향교와 서원이 있지만 한갓 문구(文具)로만 설립되어 있을 뿐 교육방도가 크게 무너지고 시설은 형편없이 낡아 유학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공부하고자 하는 선비들은 서당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향촌의 사족들은 서당 설립에 열성적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사족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향촌사족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곳에서는 수령이 직접 주도하여 서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7세기에는 향촌 사족과 수령이 적극적으로 도와 서당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조속한 시일 내에 회복하려 하였다.


18세기가 되면 서당은 또 한 차례 변모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8세기에 들어와 향촌 곳곳에 동성(同姓)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 성씨가 특정한 마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서당의 설립도 자연히 문중(門中) 또는 마을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문중과 마을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서당계(書堂契)나 학계(學契)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계(契)를 통해 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고리대로 놓아 이자를 불리든지 혹은 학전(學田)을 구입하여 거기에서 얻어지는 소출로 서당의 학채와 운영비를 조달했다. 이와 같이 18세기에는 문중 또는 마을 중심의 서당이 크게 성행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서당을 통한 교육의 수요가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중인과 평민, 천민층에까지 확대되었다. 평민과 천민들까지도 문자를 터득하여 자신의 의사와 소망을 글로 표현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등장한 것이 '지식을 팔아 먹고사는' 새로운 계층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몰락한 양반이거나 신흥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평민 또는 천민 출신의 유랑지식인이었는데, 이들이 설립한 서당이 바로 '훈장 자영 서당'이었다. 훈장의 지적 수준이나 성향이 다양했기 때문에 이들이 설립한 서당의 교육수준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서당이 번성하여 한 마을에만 서너 개나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학동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서당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무튼 19세기에는 서당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훈장 자영 서당'이 새롭게 등장하여 중인이나 평민, 천민까지도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함께보기: 조선 말기(후기) 서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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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상인과 소비자, 그 둘을 연결하는 중개인, 그리고 물건을 운반하는 마행상이나 선상(船商)으로 구성되고 운영된다. 상인은 앉아서 파는 좌고(坐賈)와 돌아다니며 파는 행상(行商)으로 나뉜다. 좌고는 좌상(坐商)이라고도 하며, 좌고와 행상을 합하여 상고(商賈)라고 한다. 객주(客主,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거간하며, 여러 가지 부수 기능을 담당한 중간상인), 거간(居間, 타인간의 상행위의 중개 및 토지와 가옥의 매매·임차·전당의 중개를 직업으로 삼는 중간상인), 공인(貢人, 조선 후기 중앙 각 궁(宮)·관부(官府)에 필요한 물자의 조달을 맡았던 어용적 공납청부업자) 등은 중개상인들이다.


[김홍도 <장터길> 보물 527호]


선상은 조선 초기에는 주로 서강, 마포, 용산 등의 한강변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이나 성안에 사는 부재지주인 사대부들의 소작료를 운반해 왔다. 또 이들이 생산지의 포구주인이나 행상 또는 직접 생산자로부터 산 물화를 싣고 경강에 도착하면 경강주인이나 중도아(中都兒, 조선 후기 상품 유통체계 내에서 생산지와 소매상인 간의 연결고리를 담당한 중간 도매업자들을 일컫는 표현)가 이를 시전에 넘겼다.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 행상/국립중앙박물관]


우리 역사에서 행상들이 언제 자체 조직과 운영체제를 갖추게 되었는지는 문헌적 근거가 없어 알 수 없다.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용어는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합친 말인데, 이것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조선 말기인 19세기 후반경이다.


부상(負商)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관련지어 볼 때 장시 유통망이 전국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에 조직화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유품으로만 보면 1845년 이후 군현의 수령이 상고(商賈)에게 발급한 공원차정첩(公員差定帖)과 1851년에 작성된 '예산임방입의절목(禮山任房立義節目)'이나 원홍주육군상무사(元洪州六郡商務社)의 '청금록(靑衿錄)' 등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7세기 중엽 이후 지방의 장시가 활성화되고 대동법의 시행으로 물자의 유통이 전국적인 망을 갖추게 되면서 장시는 자연히 수세(收稅)의 표적이 되었다. 장시 운영에 관한 권한은 지방관이 가지고 있었는데, 지방관은 그 권한으로 어려운 재정사정을 타개하고 모자라는 공공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장세(場稅) 징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수세패/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중엽이 되면 비교적 규모가 큰 장시를 둔 군현에서는 장세 징수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을 일종의 관행처럼 받아들였다. 대개 처음에는 진휼을 위한 비용 마련에서 징수를 시작하였지만, 그 액수가 커지면서 지방재정의 한 축을 이루게 된 것이다. 19세기 초가 되면 전국적인 장시망(場市網)이 형성된데다가 거래물량도 많아지면서 장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관리가 요구되는 시점에 도달한다. 송상(松商)이나 경상(京商), 즉 개성이나 한양의 거상들이 전국적인 상단(商團)을 조직하여 운영한 것도 이때쯤으로 여겨진다. 19세기 중반에 들어 행상들에 대한 국가적 관리가 요구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중에서도 현실적으로도 가장 필요했던 것이 장세 징수였는데, 징수의 대상인 이들의 일부를 중간관리자로 조직하는 등의 방식으로 장세의 효율적인 징수를 꽤했던 것이다.


상인조직으로는 보부상조직말고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첫째, 서울 육주비전(六注比廛, 육의전)과 같은 시전(市廛)이나 개성, 평양, 수원 등에서 시전을 운영한 상인들의 조직

둘째, 객주와 여각

셋째, 대동법 실시 이후 관수품 조달을 담당하였던 공인(貢人) 조직


거래 물량이 많을 경우 시장에서 처음 만난 판매자나 구매자 모두 당사자들끼리 바로 거래하는 것은 매우 불안하다. 객주는 위탁판매를 맡아 쌍방 간에 이러한 불확실성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객주는 위탁판매를 맡아 쌍방 간에 이러한 불확실성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객주와 고객 사이에 신용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객주는 각처에서 모여드는 상인들을 위해 이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거나 물건을 보관하는 일, 물품 매매를 성립시키는 일 등을 업으로 하는 상인다. 창고 보관과 물품 운송취급은 위탁판매에 부수되는 이들의 업무이다.

거간은 매매자 쌍방 간에 개입하여 매매를 성사시키고 수수료를 받는 자를 말한다. 장주릅, 우다위 등으로 부리기도 한다. 집을 거래하는 거간은 특히 가쾌(家儈)라고 한다. 거간은 객주에 딸려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두 유형이 있는데, 전자를 내거간(內居間)이라 하고 후자를 외거간(外居間)이라고 한다. 전문적인 미곡거간을 감고(監考)라고 하며, 보통 시장에서는 '되쟁이' 또는 '마쟁이'로 불린다. 일반농민이 직접 쌀가게에 와서 소매하는 경우에 이를 중개하는 자를 특히 승간군(升看軍)이라고 한다. 환전거간은 금전의 대부와 차용에 관여하는 거간이고, 당화거간은 화물에 관여하는 거간이다. 육주비전 전포 앞에서 지나가는 손님을 끌어 물건을 사게 하는 '여리꾼(列立軍)'도 거간의 일종이다. 거간이 받는 수수료를 구전(口錢)이라고 하는데, 대개 곡물 한 섬에 대해 2~4전(錢), 기타 잡물에 대해서는 매매가격의 1%를 받는다. 그러나 객주의 수수료는 거래내용에 따라 다양하다. 매매물건의 수량을 기준으로 받는 구전을 물구문(物口文)이라 하고, 가격을 기준으로 받는 구전을 전구문(錢口文)이라고 한다. 위탁 판매한 물건을 맡을 때는 [임치표(任置票), 임치장(任置狀)]를 주었다.


[개성부기/국립중앙박물관]


시장에서 통용되던 거래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어음, 환간(換簡), 임치장(任置狀), 선지증(船之證, 출차표(出次票), 고본(股本), 세가문권(貰家文券), 장기(掌記), 수표(手票), 삭채표(朔債票), 명문(明文), 보음지(保音紙), 전안(廛案) 등 거래문서의 일종인 거래장부도 다음과 같이 여러 종류가 있다.

일기장(日記帳), 각방세책(各房稅冊), 물품 거래장(物品去來帳), 위탁물 처리장(委託物處理帳), 어험 수지장(魚驗收支帳), 회계책(會計冊), 손익 계산장(損益計算帳), 분개장(分介帳) 등 분개장에는 원장(元帳), 외상장책(外上長冊), 타급장책(他給長冊), 결산장(決算帳) 등이 포함된다, 사개부기(四介簿記) 또는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이라고 하는 개성상인들이 개발한 복식부기도 이러한 문서의 일종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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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에서는 도시적 여건을 갖춘 읍성이 많지 않은데다가 농촌을 배후지로 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양자 간에는 경제적인 의존관계가 높았기 때문에 분산된 구매력을 모아 장을 상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간혹 교통이 발달한 행정 중심지의 경우는 수요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장날 간격을 5일보다 더 줄여 2~3일 간격으로 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나 나주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전주는 서울, 평양, 개성 등과 함께 상설점포라고 할 수 있는 시전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용하는 전주읍장은 상설화되어 있지 않아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등 사대문의 입구에서 번갈아 장이 열렸는데, 2일에는 남문 밖, 4일에는 북문 밖, 7일에는 서문 밖, 9일에는 동문 밖에 장이 섰다. 그 중에서도 2일과 7일에 열리는 장은 큰 장으로, 4일과 9일에 열리는 장은 작은 장으로 각각 부렸다. 나중의 읍내장도 2일, 4일, 7일, 9일 등 열흘에 네 번 열려 다른 곳에 비하면 배나 자주 열렸다.


[함께보기: 오일장의 역사]


전라도 부안은 규모가 큰 군은 아니지만 해안을 끼고 있어 생산물이 풍부한데다가 교통의 요충지여서 이곳 역시 읍내장을 둘로 나누었다. 장날을 보면, 읍내상장(邑內上場)은 2 · 7일에, 읍내하장(邑內下場)은 4 · 9일에 열리므로 결국 열흘에 네 번 여는 셈이다.

오일장은 정기시장인데, 구체적으로는 한 달을 30일로 잡아 여섯 번, 열흘을 단위로 하면 두 번 여는 장이다. 장날은 주변 장을 고려하여 상인들이 순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매달 1일, 6일, 11일, 16일, 21일, 26일 등 6일을 여는 장이 주변에 있으면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 등 5일 간격으로 장을 열게 되며, 여기에 들른 상인은 다음 날은 매달 3일과 8일이 들어가는 날에 여는 장으로 이동한다.


정기시장과 그 주기는 세 가지 원리에 의해 형성된다. 중국대륙의 장시체계를 연구한 스키너(G. W. Skinner)는 전통 농민사회의 시장이 정기성(定期性)을 띠는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첫째는 공급자, 즉 생산자나 상인의 입장으로, 이들이 하나의 시장에만 의존하기에는 이익이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면 공급자는 서로 다른 개시일을 이용하여 판로를 여러 개의 시장에 의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정기시는 대량생산자나 순회상인이 아닌 소규모 생산자로서의 농민에게도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키우는 몇 마리의 닭이 낳은 달걀은 매일같이 시장에 나가 팔 만큼의 수량이 되지 못한다. 농민의 생산규모는 이와 같이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시장 하나에만 의존하더라도 충분하며, 그 대신 하나의 시장에서 많은 고객을 대할 수 있어 좋은 것이다.


둘째는 소비자의 입장으로, 시장의 정기성은 여행거리를 줄이는 방법이 된다. 농민들의 전통적인 소비규범은 검약을 강조하며, 또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시장에 매일 나갈 필요가 없다. 하나의 시장권 내에 있는 가구의 수가 증가하여 상인의 입장에서는 장을 매일 열어 상설화하기에 충분한 수준까지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농민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소비형태가 여전히 이전과 같아 5일 간격의 장에 어떠한 불편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러한 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교통 · 운송수단으로, 정기시장은 그것이 발달하지 않은 지역에서 그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통 · 운송수단이 아무리 발달해 있어도 농촌의 인구는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거리 이동에 많은 비용이 든다. 그러므로 교통비와 시간을 아끼려는 농민들과 단순한 생계수단으로 장사를 계속하는 영세상인이 존속하는 한 농촌의 정기시장은 계속 그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수원의 우시장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곳이다. 장날이면 각지에서 소장수와 농민들이 몰려들어 언제나 성시를 이루었다. 수원의 우시장은 일반장과 함께 서는데, 성내(城內) 시장은 10일 간격인 9일, 19일, 29일에, 성외(城外) 시장도 역시 10일 간격인 4일, 14일, 24일에 열어 합치면 5일장을 여는 셈이 된다.


[도리도표/ⓒ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을 기점으로 주요 대로상의 거점과 거리를 표로 그린 첩으로,

상인이나 여행객이 지참했던 19세기 유물이다.


[도리도표/ⓒ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순조 연간에 제작된 8도전도의 도리도표첩. 채색목판본


위와 같이 상거래가 활발한 지역에서 정기시장의 개시일이 늘어나는 현상은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상설화되지 않고 분설(分設)되어 간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요자인 농민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며, 상인의 입장에서도 시장이 포섭할 수 있는 지역적인 범위를 넓히고 거래를 통해 발생하는 이익을 골고루 나눌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6대로(大路), 또는 이후의 10대 간선도로 중에 서울에서 호서와 호남으로 향하는 도로는 수원을 거쳐 간다. 서울에서 서남쪽으로 나 있는 6대로의 하나인 제5대로 제주로는 1770년에 나온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 의하면 한성에서 출발하여 동작진을 건너 과천에 이르고, 사근천을 건너 수원에 도착하면 그 다음은 진위-소사점-아주교-성환역-직산-천안-차령-공주-니성-여산-삼례역-태인-정읍-장성-영암-해남-제주에까지 이른다. 이책은 화성건설 이전에 나왔기 때문에 여기서 수원은 화성 축조 이전의 구읍(舊邑)을 가리키는 것이다. 구 읍치 남쪽 아래의 황구지천을 건너면 독산성이 있기 때문에 황구지천을 건너기 위해 설치한 다리가 세람교이다.


장길은 두 장시를 지름길로 연결한다. 경기지역 장시의 연결은 서울을 구심점으로 방사선을 이루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웃하는 장의 개시일이 지방의 장들과는 달리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수원장 역시 정조의 화성 축조 이전에는 이웃 장들과 마찬가지로 서울로 모이는 선사으이 한 장에 불과하였으므로 포섭범위는 비교적 넓었지만 주변 장들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화성 축조 이전의 옛 수원장 자리는 구 읍치에 있어 현 위치보다 남쪽 아래로 위도상 남양장과 나란히 하고 있어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었고, 따라서 서울을 향해 올라가는 물자들이 남양장과 수원장을 모두 거칠 수 없었다.

화성 축성 이전에 서울을 떠나는 주요 시발점은 양재역(良才驛)이었으며, 광주에 이르러 용인과 수원 방면으로 길이 나뉘었는데, 그 분기점이 낙생역(樂生驛)이다. 광주를 거쳐 경상도 동래로 향하는 역로는 조선 말엽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 즉 용인 구흥(駒興)과 김령(金嶺)을 경유하여 죽산과 음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수원을 경유하는 역로는 양재역에서 시작하여 용인을 거쳐 삼남으로 향하는 대로(大路) 도중에 낙생역이나 구흥역에서 분기(分岐)하는 간로(間路)였다.

본래 옛 수원과 남양의 치소(治所)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남양은 서해로 돌출한 반도이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수원으로도 갈 수는 있지만 서울이 목적지인 경우는 옛 수원장을 경유해야 할 이유가 없다. 유통체계로 볼 때 화성 축조 이전까지 세람교는 육로로 올라온 남쪽의 물산들이 수원구읍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에 해당한다. 세람교를 건넌 물자들은 동북쪽으로 과천을 통과하여 올라간 것이 아니라, 서북쪽으로 현 화성시 봉담면 동화리에 있던 동화역을 지나 매송면 어천리를 거쳐 노량진을 향해 올라갔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역을 수원의 읍치로 천장(遷葬)함과 동시에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원행로(園幸路)를 새로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호서와 호남으로 가는 대로와 신작로가 생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화성을 통과한 역로는 팔달문을 나와 수원천을 따라 남진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수원은 광주(廣州)와 더불어 삼남으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부각되었다.

화성 건설로 수원 인근의 장시체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후기 수원을 중심으로 하는 장시는 북쪽으로 서울 방면, 동쪽으로 용인 방면, 남서쪽으로 남양 방면, 그리고 남쪽으로 평택 방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장시들은 모두 삼남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구조에서 서울방면 외에 나머지 세 방면은 화성 건설 이후에 변화를 겪는데, 그것은 수원장과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구 읍치를 화성으로 이읍(移邑)한 데 따른 결과이다.


송파는 한강, 동빙고, 용산, 마포 등과 더불어 한강의 오강(五江)이라고 하였다. 송파를 거점으로 한강을 오르내리는 수운(水運)은 강원도까지 닿았고, 마행상(馬行商)들은 이곳을 기점으로 전국을 돌았다. 장날이면 이러한 마행상인들과 뱃사람들이 들끓어 270여 호의 객줏집이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송파장은 원래 오일장이므로 본장날은 하루지만, 그 전날과 다음 날 물선을 실어 오고 내가는 화물과 상인들로 붐볐으므로 거의 상설화하다시피 한 것이다. 서울로 공급되는 경기도 남동부의 쌀 · 숯 · 담배 · 소 · 채소 · 곡식 등이 모두 송파나루를 건넜다.


1900년을 전후로 경인선 및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는 등 운손수단의 발달과 교통로의 변화로 송파장의 경기는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서울 장안 곳곳에 상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분산되어 갔다. 또 상권이 약화되자 행상인들은 직접 물건을 들고 경성시내를 돌아다녀 송파장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결국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진이 물에 잠기는 사건이 일어나자 솦아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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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헤어져야 되는 것을 아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세요?

우리의 감정은 머리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숙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그만 헤어져라 해도

내 안의 감정이 정리되는 속도는 훨씬 천천히 진행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상대방으로부터 결정타를 맞는 일이 생깁니다.

그 사람이 말로, 행동으로 나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순간,

내 가슴속 그와의 불빛이 정리되어 소멸됨이 보입니다.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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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에서 필수적인 것이 공동회연(共同會宴)으로, 대표적인 것은 '호미모듬', ;호미씻이' '풋굿'이다. 김매기를 마친 뒤 공동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먹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 가지 연희를 곁들여 뛰고 놀면서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결속을 재확인하는 의례이자 행사였다. 호미는 가장 기본적이고 다용도로 활용된 농구였다. 두레가 노동조직이었기 때문에 호미를 상징적 행사에 동원한 것이었다.


호미모듬은 두레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두레꾼들이 농청에 모여 역원을 선출하고 공동의 조직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작업을 준비하는 날로, 저마다 자기의 호미를 한 개씩 농청에 모아 거두는 의식이다. 이 호미는 대개 첫 두레일까지 걸어 두는 것이 관례였고, 그 시기는 대개 2월 하리아드랫날(2월 초하루), 혹은 2월의 머슴날이었다.


호미씻이는 세조연(洗鋤宴), 세조회(洗鋤會)라고도 하고, 호미걸이라고도 한다. 호미씻이는 두레 최고의 축제로서, 세벌매기가 끝나 재배기의 농사가 실제적으로 마무리되는 7월 15일을 전후하여 날을 잡아 잔치를 벌이던 행사이다. 농민들의 일년 영농주기를 보면, 크게 농번기와 농한기가 교차하면서 그 중간중간에 준농한기가 끼여 있다. 호미씻이는 여름철의 최대 농작업이던 논매기뿐만 아니라 밭매기를 마치는 시점에 형성되는 준농한기에 하루를 잡아서 온 동민이 모여 놀던 농경세시였다.


[연산백중놀이/ⓒ한국민속대백과사전]



호미씻이는 농민들이 중노동의 중압감을 씻어 내고 전반부의 재배기에서 후반부의 수확기로 이행하는 과정에 설정된 시간적 통과의례였다. 동시에 호미씻이는 매년 결성되던 두레와 같은 공동협업노동조직이 제 기능을 다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그런 노동조직을 해체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호남지역은 호미씻이라고 하는데, 이는 농사가 끝나 호미를 씻는다는 의미이며, 경기지역에서는 호미걸이라고 하는데, 두레기의 버릿줄에 호미를 걸어 두기 때문이다.


호미씻이는 지역별로 그 명칭이 매우 다양한데, 풋구(혹은 풋꾸, 풋굿)와 초연(草宴), 두레 먹기, 장원례, 머슴잔치 등으로도 불렸다. 풋구, 곧 초연(草宴)은 들판의 잡초(풀:草)를 제거한 다음에 하는 굿(잔치:宴)이라는 뜻으로, '풋구 먹는다' '풋구먹이 한다' '초연 먹는다'라고 하며, 주로 영남지방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호미씻이를 '두레 먹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호남과 충남, 경남 남부에서 주로 쓰인다.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두레 먹기라 하는데, 이는 두레꾼의 공동작업인 제초작업이 끝난 후에 모여서 놀고 먹는다는 의미이며, 간혹 '두레잔치'라고도 했다. 그리고 두레 먹기를 할 때, 두레꾼 가운데서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뽑아 소에 태워 주인집에 가서 후하게 대접받고 즐겁게 논다고 하여 장원례(壯元禮)라고도 하였다. 또 머슴들이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이므로 이 행사를 머슴잔치, 머슴생일 또는 머슴날이라고도 했다.


모이는 장소는 강변이나 개울가의 그늘, 또는 마을 주변의 그늘진 곳이었다. 호미씻이를 하러 나갈 때는 집집마다 성의껏 음식과 술을 준비해 갔다. 대체로 부잣집에서 더 풍성하게 마련하는 것이 관례였다. 참여한 사람들은 온종일 먹고 마시며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놀았느넫, 머슴들은 주인집에서 만들어 준 음식과 술을 가지고 나가서 은근히 과시하면서 흥겹게 놀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집마다 마련해 준 음식물을 늘어놓고 머슴들 스스로 품평회를 하기도 했다. 주인집에서 많은 음식을 제공받은 머슴은 주인한테 그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제공된 음식물로 주인의 인심이 얼마나 후한지도 헤아려졌다. 그런가 하면 농사가 잘된 집의 머슴을 뽑아 시상하기도 하고, 삿갓을 씌워 소등에 태워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곳도 있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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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의 공동노동 내용과 방식

두레가 맡아서 하는 공동노동은 모내기, 물 대기, 김매기, 벼 베기, 타작 등 논농사의 전 과정이다. 특히 일시적으로 많은 품이 요구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반드시 두레가 동원되어야 했다.


[함께 보기: 전통 공동노동조직, 두레의 발생과 명칭]



[사진 모내기 두레/한국학중앙연구원]


김매기는 농사일 중 가장 힘든 것이어서 공동으로, 그리고 풍물로 흥을 돋우며 일을 하였다. 김매기는 모내기가 끝나고 15일이 지나 모와 함께 잡초가 자라는 오뉴월의 더위와 겹쳐서 시작되는데, 음력 5~6월(양력 6~7월)에 이루어진다.

김매기는 논바닥에 물기가 있어 흙이 마르기 전에 빨리 해야 하므로 두레 공동작업이 필요하며, 김을 매는 간격은 초벌 도는 애벌매기를 한 후 10일 뒤에 두벌매기, 다시 보름 후에 세벌매기(만두레라고도 함)를 한다.

두레작업(두레공사)은 엄격한 규율 아래 진행되었다. 현지 조사된 두레작업의 한 예시를 간략하게 묘사하여 두레 일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두레꾼들은 두레작업을 하는 날 아침 동이 틀 무렵부터 마을 동각이나 모정 혹은 도가집 앞마당에 모였다. 모이는 신호로 종고를 울리거나 징을 쳤다. 어떤 두레는 아예 늦게 모일 것을 염려하여 공동취침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두레꾼들이 다 모이면 두레기를 앞세우고 풍물(길 군악)을 치면서 일터로 나간다. 농기와 영기를 세우고 상쇠가 앞장서 위세를 보이면서 행군하면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줄지어 따라가기도 했고, 일단 일터에 도착하면 두레기를 넓은 곳에 세우고 간단한 풍물 고사를 지냈다.

풍물꾼들이 먼저 논으로 들어간다. 김매는 순서와 요령을 잘 알고 있는 영좌나 좌상의 지시에 따라 일꾼들은 논으로 들어가 앞잽이와 뒷잽이가 원을 지어 돌아가면서 김을 맨다. 이 과정에서 경험이 많은 좌상이나 공원의 지시가 매우 중요하며, 풍장에 따라 고된 노동을 흥겹게 진행한다. 이 같은 일과 놀이의 순환이 바로 두레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삼복더위에 뙤약볕 아래서 김매기를 하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앞잽이 선소리꾼과 논북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래서 중간중간에 논두렁에서 한바탕 놀아야만 그 고통을 덜 수 있었다. 이러한 일과 놀이의 순환은 내용적으로 보면 노동의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미중의 지혜로운 선택이었던 것이다.

작업시간은 좌상이 정하는데, 시계가 없을 때는 구멍 뚫린 초롱에 물을 채워 그것이 다 없어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일하는 중간에 두렁 넘기라 하여 옆 논으로 연이어 이동하기도 하고, 몬들이라 하여 원을 모아 마지막 쌈을 싸게 되는데, 이것이 두레작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레의 공동식사 관행은 또 다른 문화적 특징이었다. 두레의 공동식사는 새참과 식사로 구분되는데, 새참은 술이 주종이었고, 비록 빈약한 차림이었으나 일꾼들 모두가 바가지에 들밥을 먹으면서 공동체로서의 동질감과 친밀감을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레 일이 끝나면 두레꾼들은 풍장을 치면서 마을로 돌아온다. 일꾼들은 도랑에서 몸을 씻은 뒤 도가집[도가(都家), 농사(農舍), 농청(農廳)]에 준비한 술을 마시고 즐기면서 하루 일을 마친다. 일종의 뒤풀이 형태로 놀이판이 벌어지고, 여기에 술과 음식, 다양한 여흥이 어우러지면 한판 굿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두레작업에서 과부, 노인, 환자가 있는 집안이나 어린아이만이 있는 집의 농사를 두레가 거들어 주는데, 이처럼 마을 전체적인 노역에 인력을 제공함으로써 공동체적 삶의 유지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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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대에 매립된 빌트인 가스레인지를 사용하다가 보면 직전까지 멀쩡하게 작동하던 것이 갑자기 불이 켜지지 않거나, 점화 후에 불이 자동으로 꺼지는 문제가 발생하는 등 예기치 않는 고장으로 애를 먹을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 수리를 요청하기 전 아래 동영상을 참고해 먼저 자가 점검을 해보세요~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결 방법도 있어요.


※단, 가스레인지는 안전과 직결된다는 것! 간단한 자가 진단 후에도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거나 가스가 샌다던가 하는 문제가 예상되면 지체말고 반드시 전문 기술자의 도움을 요청하세요!



빌트인 가스레인지 고장 시 자가 점검 방법

자주묻는 질문&답변 영상 순서


1. 점화 플러그를 돌렸을 때

"따다닥" 불꽃 튀는 소리가 나지 않고, 점화가 안될 때


2. 가스레인지 불이 자동으로 꺼질 때


3. 슈퍼레인지 점화 방법


4. 불꽃이 평소보다 작거나 점화가 안될 때


5. 가스레인지 관리를 위한 상판 청소 방법


6. 가스레인지 관리를 위한 소모품 버너캡, 버너헤드 청소 방법





[내용출처: SK매직샵 다이렉트 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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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알수록

모른다고 여기고,

모르면 모를수록

안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 가장 큰 장애는

모르는데 아는 체하는 것입니다.

모른다 이야기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배우면 되는데

안느 체하니까 계속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연극해야 합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솔직해지면 바로 얻을 수 있습니다.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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